<1> 식민지에서 해방으로 다시 전쟁으로
◇힘없는 민족의 갈대 운명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없었던 한민족은 식민지의 2등 족속으로서 쌀을 바치라면 쌀을 바쳤고 쇠를 바치라면 쇠를 바쳤고 사람을 바치라면 사람을 바쳤다. 노래를 부르라면 일본 천황에게 목숨을 바치러 가는 조선의 아들을 위해서 장행가(壯行歌)를 불렀고, 시를 지으라면 일본 군대에게 몸을 바치러 가는 조선의 딸을 위해서 위안부(慰安賦)를 지었다.
고작 식민지 20년 만에 독립운동은 마음속 울화통 전선에서 이뤄지는 일이었지, 더 이상 청산리나 봉오동, 압록강이나 두만강에서 벌어지는 실제 무장투쟁이 아니었다. 만주의 100만 관동군과 조선의 5만 일본 군대에 맞서 싸울 군대는 식민지 30년 만에 근근이 양성한 광복군 5천이었다.
그나마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프랑스 조계(租界)마저, 상해임시정부의 방패막이였던 프랑스 조계마저 일본이 접수한 후에는(1937) 천막 수준을 겨우 면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장개석의 힘과 동정에 절대적으로 의지했고 수만 리 중국의 오지로 쫓겨 다니는 신세라, 바위에 부딪치는 계란의 역할도 못했다.
일제 말에 이르면, 조선이나 만주에서 일본의 헌병 1명, 경찰 1명 죽이는 것도 청사에 길이 빛날 일이었다. 독립운동, 그것은 이불 킥에 지나지 않았다.
한민족은 그토록 나약했다. 일본의 230만(중국에만 120만) 중무장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강대국의 은총이 아니고는 한민족의 운명은 어둠의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언감생심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해방 후에도 무궁화 강산은 강대국의 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을 홀로 물리친 미국과,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Little Boy)가 터지고야 부랴부랴 참전해 어부지리를 취한 소련의 입김이 절대적이었고, 나중에는 일본군이 쫓겨난 중원에서 통일의 꽃사슴을 잡은 중공의 손이 한반도를 향해 미소 양국에 못지않은 유형무형의 북서풍을 일으켰다.
샘 아저씨(Uncle Sam)는 압도적인 힘을 가졌지만 한반도에 대한 무관심과 턱없는 정보 부족 탓으로, 19세기 이래 150여 년간 오매불망 동아시아에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려던 시베리아 곰과, 영원한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왕 서방에게 번번이 의표가 찔렸다.
다행히 미국은 실수를 금방 알아차리고 이내 실수를 만회했다. 미국의 실수 만회와 ‘잘 살아 보세’ 한국의 용수철 도약으로 휴전선 이남은 지상낙원(파라다이스 코리아)이 되었지만, 중소(中蘇)의 공산 제국주의와 ‘반동분자 때려잡자, 대를 이어 때려잡자, 3대를 이어 때려잡자’ 북한의 자유낙하(free fall)로 휴전선 이북은 생지옥(헬 조선)이 되었다.
◇스스로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황소 한국
경제는 한국이 대(對)중국과 대(對)홍콩 합해서 연간 약 800억 달러(*)의 흑자를 보고, 군사는 국군이 미군과 연합하여 중국의 해방군과 북한의 인민군과 러시아의 극동군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스스로의 성취에 자긍심이 없고 미국의 안보 울타리에 감사할 줄 모른다. 기아와 공포의 생지옥 북한, 공산당과 공안(경찰)의 나라 중국,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 Oligarch 권력형 독과점 재벌)와 비밀경찰의 나라 러시아에 스스로 코뚜레를 꿰고 리모컨 고삐를 넘겨주려고 안달이다.
(*각각 수출 1421억 달러, 수입 979억 달러, 2017년 기준; 수출 328억 달러, 수입 16억 달러, 2016년 기준)
[중국 통일 후 모택동이 한반도와 인도지나에 선물한 독배] 1945년 10월 1일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뚱)은 100년의 굴욕 끝에 중원의 사슴을 사로잡은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강청(江青 장칭)과 8억 인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하게 블루스를 춘 게 아니라, 자금성 황금 보좌에 앉아 천자국(天子國)의 ‘에헴’ 짓이었다.
한반도와 인도지나반도에 전쟁을 부추긴 것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주변 국가를 분열시키고 약화시켜 중국의 아시아 패권(覇權)을 유지하는 중화주의(China First) 정책을 펼친 것이다. 그게 바로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서남공정(西南工程)이었다. 그것은 아직도 미완으로서 계속 추구되고 있다.
북한에는 5만 정병(精兵)을 보냈다. 사심 없이 중국 통일을 도운 5만 배달민족에게 수고했다고 무언의 약속대로 약소하나마 간도를 뚝 떼어 준 게 아니었다. 장차 적화통일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라며 소련군과 미군이 모두 철수한 한반도에서 일시에 힘의 균형을 무너뜨려,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의 군침이 절로 입안에 가득 고이게 만든 것이다. 아마 김일성은 자면서도 침을 질질 흘렸을 것이다, 통일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황홀한 꿈을 꾸면서!
이어 공산당 시황제는 베트남에는 1884년 청불전쟁에서 프랑스에 패배한 굴욕도 씻을 겸 고작 소총부대 2개인가 4개인가 대대밖에 없던 때에 6개 사단을 중무장시킬 무기와, 기관단총과 대포 포함한 현대식 무기와 그들을 훈련시킬 군사고문단을 보낸 것이다.
그렇게 월맹이 4년간 불철주야 준비해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디엔비엔푸(奠邊府 전변부) 전투(1954)였다. 베트남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 결정적인 중공의 지원이 없었으면 그까짓 소총부대 2개 내지 4개 대대가 설령 10년 후 10개, 20개 대대로 늘었다 해도 턱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땅굴 파는 것도 6ㆍ25의 후반기에 진지전에서 인민 해방군이 터득한 것을 로열티 한 푼 안 받고, 월맹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준 것이다.
베트남이 미국을 물리쳐?
중공과 소련의 무기와 군수품이 없었으면, 100년이 지나도 불가능할 일이었다.
뭐,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을 물리쳐?
미국의 노골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베트남전에 소련과 중공이 군인은 안 보내고 무기와 물자를 보냈듯이, 이번에는 미국이 바로 그런 작전을 역이용하여 시베리아 곰 사냥에, 소련 붕괴 작전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결과가 소련의 해체였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영웅 레이건이 말귀 좀 알아듣는 고르바초프에게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고르바초프가 군비경쟁의 허망함을 깨닫고, 핵 단추에 납땜질하고, ‘레이건 형님, 감사하오!’ 하면서 조용히 항복하고,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glasnost 개방)하고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perestroika 개혁)하는 길로 나아감에, 마침내 소련이 항복하고 15개 나라로 갈라졌더라, 이건 중2까지 가르치고 중3만 되면 그렇게 신화를 역사로 가르치면 안 된다.
그런데 아직도 역사 아닌 그 따위 숱한 신화들을 한국인들은 좌우를 떠나 여태껏 5천만이 확고부동한 진실로, 만고의 진리로 믿고 있으니, 대체 언제쯤이면 이 나라 지식인들은 ‘소설’ 삼국지 수준의 역사 공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II부/ 오늘은 6.25전쟁 68주년이다. 6.25전쟁에서는 남북한 군보다 미국과 중공과 소련이 거의 전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그 중에서도 모택동의 역할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그것은 지금의 북핵 정국에서 시진핑의 중국이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6.25전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당사자였던 중국측이 작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6.25전쟁을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The 자유일보는 그런 측면에서 중국측 자료를 통해
△김일성이 서울에서 3일간 머뭇거린 이유 △김일성이 모택동의 인천항과 군산항 요새화 제안을 거부한 이유 △스탈린이 휴전을 계속 미룬 이유 △미국이 당시 스탈린 점령지 만주를 모택동에게 선물한 이유 등 6.25전쟁 4대 의혹을 전격 연재공개한다. 모택동(毛澤東) 중공 주석(主席)과 주덕(朱德)중공군총사령이 한국전에 참전할 중국인민지원군 검열(사열)을 하고 있다. 【전격공개】 중국 자료를 통해 본 ‘6·25전쟁 4대 의혹’ <2> 중국의 남침 인정
평론가 최성재
2010년 6ㆍ25사변 60주년을 맞이하여 중국은 처음으로 남침을 인정했다.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국제선구보도((國際先驅導報)와 인민일보의 해외판 환구시보(環球時報 Global Times)에 실렸다.
이 중 국제선구보도 기사는 중국 국내에 소개되자 곧바로 중국의 모든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다행히 BBC 중문판에서 인용 보도한 것은 BBC 소관이라 그런지 지워지지 않았다.
국제선구도보에는 평론 몇 편을 소개한 다음, 마지막에 6ㆍ25대사기(大事記, 약사略史)를 실었는데, 그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49년 소련과 미국의 점령군이 차례로 철수했다. 한반도 북부는 당시 13만 5천 명의 훈련된 군대가 있었는데 무장이 잘 갖춰졌지만, 한반도 남부는 9만 8천 명의 (오합지졸) 군경 집단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바로 그 날 한국의 부대 가운데 절반이 주말 휴가를 떠난 사이, 북한군이 조직적으로 기습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한국의 수도 한성(漢城, 서울)을 점령했다. (번역: 최성재 以下同)
(1949年苏联和美国占领军先后撤走。朝鲜半岛北部此时拥有一支13万5千人的训练有素,军备充足的部队;半岛南部只有一支9万8千人的军警队伍。
1950年6月25日正当南部的韩国一半的部队周末休假,北部的朝鲜军队实施了有组织的突袭行动 1950年6月28日朝鲜军队攻占韩国首都汉城(今首尔)。)
환구시보(2010-06-18)에는 냉전 전문가 심지화(沈志華) 중국 화동(華東)사범대 교수와 나눈 대담 기사를 통해 슬그머니 남침을 인정했다. 중국어와 영어 둘 다 실렸는데, 영어는 요약문이다. 중문에는 환구시보의 기자가 심지화를 소개하면서 제 입으로 남침을 인정했지만, 영문에는 그 부분은 쏙 빼고 심지화의 개인 견해라는 조건을 달고서 ‘김일성이 남침했다’고 실었다.
중어 원문에는 앞에 몇 번 김일성이 남침했다는 말이 나오지만, 그렇게 단정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심지화는 처음부터 중국어 교과서와는 달리 남침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 도발의 책임자보다는 오히려 남침의 동기가 이제는 학술적 논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련의 부동항 욕심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을 거론했다.
编者按: ... 冷战结束后,随着苏联档案材料的解密,已可以确定当年是北朝鲜首先进攻南朝鲜。(편집자 주: ... 냉전이 끝난 후, 소련의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그해에 북한이 한국을 침략한 것이 확실히 밝혀졌다.)
중문: 朝鲜战争在1950年6月25日爆发了。(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했다.)
영문: Kim launched the war on June 25, 1950.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을 감행했다.)
◇6ㆍ25 비사
위에 언급한 중국의 두 신문에 바탕을 두고 한국과 미국 자료와 소련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몇 가지 6ㆍ25 비사를 재구성해 보겠다. 한민족의 의지와 관계없이 막후에서 한민족의 운명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여러 번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이런 상황은 중국의 경제력이 러시아에 이어 일본도 능가하면서 오늘날 한반도를 중심으로 재현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은 어느 모로 보나 세계 10대 강국으로 발돋움했지만 스스로의 힘을 모르는 황소처럼 아직도 자신을 고작 세계 100위 정도의 약소국으로 인식하고 대한민국을 욕하고 저주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힘을 한데 모으지 못하고 미래의 운명을 다시 강대국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미소 철수 직후 3개 정예 사단을 북한에 몰래 보낸 모택동
6ㆍ25사변 후반에는 이승만의 빼어난 외교력이 빛을 발했고, 사변 초기에는 앞서 기술한 대로 모택동이 1949년에서 1950년 초에 보내 준 중공군 소속이었던 조선군 3개 사단(제5, 6, 7사단)과 소련의 무기 덕분에 김일성이 반짝 기고만장했던 적이 있지만, 미국과 중공과 소련이 거의 전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그중에서 모택동의 역할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중국이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한 후 조선족으로 구성된 정병(精兵) 3개 사단을 6ㆍ25 전에 보낸 사실이다. 이것을 국제선구보도에 실린 평론 가운데 하나에서 밝혔다. 필자는 미국에 거주하는 하청련(河淸漣)이다. 그는 이 글에서 김일성의 남침도 단정적으로 인정했다.
김일성의 거듭된 요구에 따라, 중국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임표 소속 부대에서 중국 국적의 조선족 3개 정예 사단이 1949년과 1950년초에 조선에 들어가 조선 인민군에 편입되어 김일성에게 제공되었다. 이것은 김일성이 한국을 침략하는 주력부대가 되었다. 소련과 중국의 지지를 받아,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계획적으로 준비를 갖추어 남한을 침략하는 전쟁을 도발했다. 북소리 한 번 울리고, 김일성은 3일 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공략하여 세계를 경악시켰다.
(在金日成的再三要求下,中国人民解放军四野林彪所部中国籍朝鲜族的三个精锐师在1949和1950年初调入朝鲜,编入朝鲜人民军,供金日成调遣,成为金日成进攻韩国的主力部队。 有了苏中支持,金日成在1950年6月25日,有计划有准备地发动了入侵南韩的战争,一鼓作气在三天之内攻下韩国首都汉城,世界为之震惊。)
다른 졸고에서도 누차 밝혔지만, 6ㆍ25 전에 모택동이 3개 사단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은 감히 남침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인천상륙작전 후 모택동이 100만 대군을 보낸 것 이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
중국은 지금도 압록강과 두만강 바로 위에 최소 30만 대군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사실상 북한에 인민해방군을 주둔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은 태평양 건너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리적으로 항상 불리할 수밖에 없다. 형식상 중공군이 북한에 주둔하지 않는 것으로 북한과 쪽쪽 입을 맞추어, 중국이 북한과 한통속이 되어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것은 멀쩡한 사람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려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친북좌파가 그에 장단을 맞추는 것은 을사오적보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매국적 행위다.
【전격공개】 중국 자료를 통해 본 ‘6·25전쟁 4대 의혹’ III
『‘서울 3일 지체’는 소련 군사고문이 없어서』 1954년 10월 1일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는 김일성과 모택동 ◇ 모택동, 6.25전 한국 항구 철옹성화 제안했으나 김일성이 거부 모택동은 전쟁을 아는 자로서 전쟁을 모르는 김일성에게 남침 전에 또 한 번 엄청난 제의를 건넸다. 한국과 미국으로선 천행으로(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김일성이 이를 거부했다. 심지화의 대담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택동은 일찍이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중국이 한반도의 연해지구와 주요 항구를 방어하는 걸 도울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처음에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중국의 제의를 접수하지 않았다. 후에 전황이 악화되자 김일성은 중국의 원조를 희망했지만, 스탈린의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는 감히 중국에게 직접 군사 파병을 요구하지 못했다.
(毛泽东曾经向斯大林和金日成表示,中国可以帮助防守朝鲜半岛沿海地区和重要港口。但是起初,金日成认为美国不会干涉,因此没有接受中国的提议。随着战况的恶化,金日成希望得到中国的帮助,但是没有斯大林的同意,他不敢要求中国出兵。)
아찔한 순간이었다. 소규모 전투 외에는 실전 경험이 없던 김일성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기보다 중국의 입김이 커지는 것만 걱정했던 것 같다. 이것이 한미 양국에게는 천행 또 천행이었다. 해군은 별것 없었지만, 중국은 능히 한국의 주요 항구와 해안 지역을 철옹성으로 만들 힘이 있었다. 김일성이 굴러 온 복을 차 버림으로써 인류 역사상 길이 빛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은 어리석은 김일성 덕분에 덩케르크(Dunkerque)의 악몽을 피하고 한반도판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했던 것이다. 후에(1950-07-02) 주은래도 주중 소련대사 로시친(Roshchin)에게 해안 봉쇄를 다시 제안했지만, 이번에는 스탈린이 우물쭈물했던 것 같다. 중국의 영향력을 염려하던 김일성은 백전노장 팽덕회가 중공군을 몰고 오면서부터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사실상 소대장급으로 격하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하고 소련의 환심을 사기 위한 거리행진
◇ ‘서울 3일’은 소련군 작전 담당 고문이 없어서 탈북 시인 장진성이 6ㆍ25 수수께끼의 단초를 하나 제공했다. 인민군이 서울 점령 후 사흘간 머문 이유에 대해 김일성이 내뱉었다는 말을 소개한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극비로 이조실록을 본뜬 ‘김조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많은 1차 사료(史料)를 접한 모양이다.
“소련 놈들이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것이 김일성의 말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심지화가 보다 신빙성 있는 말을 전한다.
사실상 작전계획은 전부 소련의 참모가 세웠다. 북한의 인민군은 크든 작든 작전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병사가 절대 38선을 넘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혹시 체포되어 우리가 참전했다는 증거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38선을 넘은 후에는 소련 군사고문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계속 남진하던 북한 군대는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事实上,作战计划全部是由苏联参谋制定的,因为朝鲜人民军并没有多少作战经验。斯大林坚决不允许苏联士兵越过38线或是直接参加战争,因为“我们不想留下证据被人家指控我们参与了这件事”。而越过38线后,由于缺乏苏联顾问的指导,继续南进的朝鲜军队完全处于混乱之中。)
애초에 스탈린은 서울 점령까지만 작전을 세워 주었던 모양이다. 작전을 세울 소련 참모가 38선을 넘지 않았고 그 후의 작전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성은 넘치는 기쁨 속에서 술에 취한 듯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다. 무기는 이미 스탈린이 원래 북한군만이 아니라 조선족 3개 사단까지 한국 지형에 맞는 무기로 중무장시켜 두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무기를 안 주어 진격할 수 없었다는 김일성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자존심 문제로 김일성은 작전계획에 대한 무능을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이를 에둘러 소련의 무기 지원 부족으로 돌렸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넓은 의미에서 김일성의 서울 점령 후 소련의 지원이 부족했던 것은 틀림없었던 모양이다.
심지화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여 심지어 미군이 1950년 10월 8일 연해주의 소련 공군 기지 7개를 아작 낸 것에 대해서도 찍 소리 않았다고 한다. 미국은 그렇게 손쉽게 제공권을 장악했다.
스탈린의 흑해별장 스탈린과 주은래의 흑해 비밀회담...
"북한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인천 상륙 작전 후에도 아슬아슬한 장면이 벌어졌다. 결정적으로 이때도 모택동이 다시 한 번 한민족의 운명을 망쳤다. 인천 등 한국의 항구를 요새화하라고 권유하던 주은래는 맥아더가 바다에서 육지로 걸어 나오자 즉각 모스크바로 날아간다. 스탈린은 흑해의 다차(별장)에 있었다.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흑해회담이 열리는 순간이다.
1950년 10월 11일, 주은래 등은 모스크바를 거쳐 코카사스의 흑해 해변에 위치한 스탈린의 별장에 날아가서 그날 오후에 소련 국가 원수와 회담을 거행했다. 주은래는 중공중앙정치국 회의 내용을 소개하고 북한의 전황과 북한에 대한 원조 문제를 토론했다. 중국이 출병하는 문제는 실제로 아주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소련이 무기와 장비 및 공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지적했다.
“중국이 필요로 하는 비행기와 탱크와 대포 등 군사장비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도 있소. 그러나 소련의 공군은 준비가 미흡하오. 2개월 내지 1개월 반 안에는 출동할 수 없소.”
거듭 토론한 후에 쌍방은 합의를 보았다. 두 대국이 모두 준비가 미흡하여 북한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김일성에게 조속히 안전하게 후퇴할 것을 알려 주자고. 스탈린은 최후 결정은 모택동이 내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만약 북한이 미군과 한국군에게 점령되면, 그것은 중국 책임이라고 윽박질렀다.
영문판을 보면 김일성에게 중소가 지원하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핑계를 대기로 합의를 봤다는 말도 나온다(영문 번역 생략).
(10月11日,周恩来等人经莫斯科飞抵高加索黑海边斯大林的休养地,并于当天下午与苏联领导人举行了会谈。周恩来介绍了中共中央政治局会议讨论朝鲜局势和出兵援朝问题的情况,说明中国出兵将面临巨大的实际困难,强调需要苏联提供武器装备和空军支援。斯大林指出:可以完全满足中国所需要的飞机、坦克、大炮等军事装备,但是,苏联空军尚未准备好,须在两个月或两个半月内才能出动。反复讨论以后,双方认为,既然大家都未做好准备,只好放弃朝鲜,及早通知金日成安排撤退。斯大林要求毛泽东作出最后的决定,这样如果北朝鲜最终被美军和南方占领,责任就是中国的。)
(After extended discussions, both sides agreed that since both could only be ready after six months when North Korea would have been occupied by South Korea and the US, they had to give up the country and inform Kim to arrange a retreat as soon as possible.)
마지막에 모택동이 단독으로 흑해회담을 거부하고 1950년 10월 15일 북한으로 중공군을 보내기로 최종결정한다. 스탈린의 노회한 외교와 모택동의 아시아 패권에 대한 야망이 잘 드러난다. 맥아더와는 다른 스타일의 유연한 리지웨이 장군
인천상륙 작전 직후 남북 총선을 제의한 스탈린
그 이전 10월 4일에 스탈린은 UN을 통해 미군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북한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게 하고, 아울러 국제연합위원회가 북한으로 들어가 총선을 실시하는 것을 주재할 수 있게 하겠다는 제의도 했다.
(10月4日,联合国秘书处的一位苏联工作人员邀请挪威驻联合国代表共进午餐,希望他作为中间人向美国政府传话:如果麦克阿瑟同意在三八线止步,苏联将劝说北朝鲜人放下武器,并允许联合国委员会进入北朝鲜主持大选。)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모택동도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경고했지만, 미국은 이것도 무시했다. 인천상륙작전이 너무 빛났기 때문에 UN군에 의한 남북통일은 1950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달성할 수 있다고 오판했던 것이다.
맥아더처럼 모택동도 처음의 성공에 도취되어 후에 영국이 중심이 되어 발의한 1ㆍ4후퇴 상황에서 휴전선을 긋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서울이 적에게 넘어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모택동으로서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조만간에 얼마든지 적화통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장점은 유연한 민주적인 정책결정이다. 실수를 빨리 깨닫고 실수를 만회하는 의사소통이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더 이상 신으로 여기지 않고 쫓아낸 다음, 단호하고 영리한 리지웨이를 보내 중공군에게 본때를 보여 주었다.
스탈린은 1949년 개발한 핵무기를 믿었다. 그것만 있으면 미군은 만주로 진격할 리 없고 그것만 있으면 통일 중국과 세계최강 미국이 이전투구로 국력이 쇠잔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전략적 차원에서 소련이 가장 원한 것은 한반도의 부동항(不凍港)이었다. 미국의 원폭투하 후 전광석화처럼 170만 극동군으로 얼이 빠져 다리와 눈이 함께 풀린 80만 관동군을 무장해제 시켰지만, 소련이 얻은 것은 러일전쟁으로 일본에게 빼앗긴 여순과 대련 두 항구 및 만주의 중장(中長)철도 그리고 외몽골뿐이었다.
1945년 장개석과 맺은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른 것이었다. 여순과 대련은 30년간 조차하는 조건이었지만, 1949년 중공에 의해 중원이 통일되면서 그것은 두 공산국끼리 심각한 주권 문제로 대두되었다. 때마침 국제 압력이 가해졌다. 영국과 인도 등이 중공을 합법적 정부로 승인하려고 하고 미국도 우호적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신3국 간섭이었다. 결국 스탈린은 외몽골 외에는 중국에 모두 돌려주기로 했다.
대신 스탈린은 이미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내세워 동구와 몽골처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든 북한을 이용하여 절대 손해 볼 리 없는 게임 곧 6ㆍ25 불바다를 주도면밀하게 연출하여 김일성이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처럼 날뛰게 만든다.
미국이 38선을 제의하자 동해 쪽으로 그 선을 연장하여 일본의 북해도까지 소련의 지배하에 두자고 제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적이 있었던 스탈린은 완벽한 준비를 갖춘 다음 지정학적으로 절대 유리한 점을 이용하여 소련군을 먼저 철수시키고 미국이 아무 준비 없이 덜컥 미군을 철수하게 만든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북한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과 소련은 철군해도 사실상 북한에 군대를 주둔한 것과 마찬가지인 점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 이승만, 토지개혁으로 민심을 얻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철권통치로 북한에는 우익이 처음부터 씨가 말랐지만, 트루먼과 이승만의 봄바람 통치로 한국에는 좌익이 서울과 대구와 여수, 태백산맥과 지리산과 한라산만이 아니라 군대에까지 들끓었던 것도 김일성이 적화통일에 대한 야심을 부채질했다.
이승만은 폭동과 반란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군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토지개혁으로 민심을 얻었다.
소련과 중공과 북한, 동구, 후일의 공산베트남은 국가 노예제 형태의 토지개혁으로 민심을 완전히 잃고 노동자와 농민을 길게는 70년 짧게는 10년 기아에 허덕이게 만들었지만, 한국의 선무당들은 지금도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허구적 논리(*)에 입각하여 이를 정반대로 알고 신파조로 선전하고 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니라 ‘유혈강탈 앵벌이분배’였다.)
막상 김일성이 남침하자 공산 봉기는 전혀 없었다. 도리어 한국의 청년들은 우리 토지와 우리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맨주먹으로 악랄한 공산군과 싸웠다. 후일 월남과는 판이한 양상이었다. 그러나 6ㆍ25 당시 10대 의혹에서 드러나듯 공산당을 색출한 숙군(肅軍) 운동도 군부에 뿌리박은 남로당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다.
전쟁광이 만면에 천사의 미소를 띠고 서명하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전쟁이라면 말만 들어도 부들부들 떠는 배부른 바보들을 안심시킨 후, 그들의 정신무장을 완벽하게 해제시킨 후, 전쟁의지를 깡그리 꺾은 후, 소풍 가듯 유유히 필승의 전쟁으로 가기 위한 안전판이다.
1953년 7월 27일, 트루먼과 모택동은 스탈린이 죽긴 죽었으되(1953-03-05) 지옥에도 아직 못 들고 구천을 헤매고 있을 때, 총과 대포를 잠시 내려놓자고 합의했다. 38선 양쪽에서 일진일퇴하며 2년 이상 미군과 중공군이 피 말리는 진지전(陣地戰)을 벌이고 있던 때, 스탈린은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이전투구를 부채질할[加油] 뿐 도무지 휴전에 합의해 주지 않았지만, 육신을 떠난 상태에서는 제 한 영혼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라 한반도 따위에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던 것이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과 김정은은 판문점에서 65년 만에 이산가족 상봉하듯 만나서 얼싸안고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우리끼리 절대 싸우지 말자며 종전선언에 일필휘지 가서명했다.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2018년 6월 12일, 트럼프와 김정은은 싱가포르에서 각기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조건으로 종전선언에 가서명하고 평화협정을 맺을 수도 있다고 폭탄 선언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선언을 재차 확인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북한은 공포와 폭력, 거짓과 착취로 유지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생지옥이다. 딱 한 명 외에는 누구든 언제 어디서나 파리를 잡듯 불개미를 짓밟듯 인간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폭압적 체제, 원천징수 세금이 90~100%인 살인적 착취체제이다. 뭐, 체제 보장?
김일성과 김정일과 김정은의 사진에 먼지 한 올 발견되었다고 한 가족이 몰살될 수 있는 생지옥이다. 한국의 지인과 휴대폰으로 통화 한 번 했다고, 세계의 감성에 전율의 파도를 일으키는 K-팝 한 곡 듣거나 흥얼거렸다고, 핵을 개발했다고는 하지만 상당한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이란에서도 시청률 80%를 자랑하는 한류 드라마를 한 편 봤다고, 거액의 뇌물을 안 고이면(바치면), 강제수용소에 전 가족을 몰아넣고 뼈가 가루가 되도록 강제 노동시키다가 픽 죽으면 툭 묻어 버리는 체제, 거짓과 폭력의 ‘헬조선’이다. 뭐, 체제 보장?
한 달 봉급이라야 고위직이라도 시중환율로 미화 1달러도 안 되지만, 달러가 한 푼이라도 들어오면 39호실에서 관리하며 그것을 한 인간신의 사치품에 쓰거나 언제 숙청될지 모르지만 고분고분한 자들에게 잠시 맡기고, 나머지는 몽땅 군사력 증강에 집중투자하는 1년 365일 비상계엄 전시체제다. 뭐, 체제 보장?
그것은 오로지 적화통일하기 위해서, 또한 공포와 폭력으로 2300만 중 그 누구도 쿠데타는커녕 시위도 못하게 군대와 비밀경찰을 강화시키는 데 사용한다. 한국이 주든 미국이 주든 일본이 주든 UN이 주든, 그것은 바로 빼돌려 최우선적으로 군대를 유지하거나 강화시키는 데 사용하는 상시(常時) 병영체제다. 장마당도 여차하면 박살내는 조폭체제다. 뭐, 체제보장?
북한의 약속은 모조리 깨기 위해서만 맺는 약속, 멍청한 상대에게 또는 제5열에게 선심 쓰는 척하는 거짓 약속이다. 믿는 자에겐 환멸과 파멸과 후회가 있을 뿐이다.
학문은 의문에서 비롯되고 자유민주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의심할 수 없는 정치체제는 자유민주가 아니다. 지도자를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체제, 그게 바로 자유민주에서 자유를 뺀 민주주의, 인민민주, 공산독재다. 법이 돼지의 진주 목걸이로 희화되는 정치체제다.
한국은 민주완장들이 득세하면서 괴이한 일들이 일상사가 되고 있다. 2300만 노예의 유일무이한 주인 김정은도 절대 의심해서는 안 되고, 386운동권으로 둘러싸인 문재인도 절대 의심해서는 안 된다. 김정은을 항상 의심했던 박근혜는 1분 1초도 남김없이 의심의 대상이었지만, 촛불의 몽롱한 감성에 호소하여 의심의 안개와 먹구름에 휩싸인 희대의 마녀로 만들 수 있었지만, 김정은과 문재인의 파안대소와 어깨동무, 덕담과 약속에 대해서는 절대 의심해서는 안 된다. 김정은과 문재인을 의심하면 사방에서 즉각 수구꼴통 돌팔매가 날아온다. 일방적인 군축과 군사훈련 중지, 방어선 후퇴에 대해서는 오로지 남북평화와 민족화해를 위한 구국의 결단으로 무조건 믿어야 한다. 청사에 길이 빛날 결단으로 철석같이 믿어야 한다.
자유민주에서 의심이 신뢰로 바뀌는 데는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투박한 행동과 가시적인 물증이 필수 요소이다. 아무리 말이 곱고 아름답고 화려하더라도 행동과 일치하지 않으면, 국민의 복리와 국가의 안보에 기여하지 못하면, 평화롭게 붓두껍으로 그 입을 봉해야 한다. 떠돌이 약장수로 입에 풀칠이나 하도록 권력의 자리에서 조용히 끌어내려야 한다. 단, 정치 보복은 금지!
싱가포르에서 김정은은 거미줄을 쳤고 트럼프는 덫을 놓았다. 11월 중간선거가 끝나면, 트럼프는 그새 자기들도 모르게 한 편이 되어 버린 민주당과 좌파언론과 함께 본격적인 검증에 들어갈 것이다. 김정은의 거미줄에는 미제국주의자는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기레기’든 한 명도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곤충 잡는 데나 유용할 뿐이니까.
오로지 의심할 줄 모르는 한국인만 스스로 ‘얼음’이 될 것이다. 그때 김정은은 드르륵 갈길 것이다. 판문점에서 문재인은 거미줄을 쳤고 김정은은 덫을 놓았던 것이다. (2018.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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