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천 따라 세검정 그리고 백사실 계곡 나들이
작성자 최병규
세검정~백사실(백석동천) 이야기
오늘 여러분과 함께 세검정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까지 이야기를 나눌 전통문화지도사 ○○○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처럼 전통문화지도사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전통문화지도사 ○급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진행할 나들이 지역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계시는 이곳이 바로 세검정 정자입니다.
세검정을 시작으로 신영정에서 동네 관광문화 명소 안내지도를 보며 홍제천 주변의 이야기와 일붕선교종 一鵬禪敎宗 입구에 불암佛巖과 현통사 그리고 백사실 별서別墅터와 월암과 백석동천 암각 글씨와 부침바위 터를 보면서 오늘의 일정을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홍제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 홍제천의 발원지 이야기
지금 세검정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는 홍제천(弘濟川)으로 불리는데 상류천은 세검천이라고도 불립니다.
북한산국립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문수봉과 보현봉, 형제봉 그리고 구준봉에서 발원하고 백악산과 인왕산을 분수령으로 안산과 백련산 그리고 궁산과 성산의 지류가 합쳐져 불광천을 만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홍제천(弘濟川)은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 그리고 마포구에 걸쳐서 약 19km를 흐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인왕산과 안산 사이 무악재(사현沙峴) 아래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이나 관리가 쉬어가던 홍제원(弘濟院)이 자리하고 있어서 홍제라는 이름이 붙어 홍제동이 되고 또한 홍제천이라는 이름이 불리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홍제원 주변으로 모래가 많이 쌓여 사현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려 때 사현사라는 사찰이 자리하기도 했습니다.
모래가 많이 쌓여 물이 모래 밑으로 흘렀다고 해서 모래내 또는 사천(沙川)으로도 불리는데 아직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남가좌동에 모래내 전철역과 모래내 전통시장이 남아 있어서 사천의 지명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언제 홍제천을 걷다가 출출하실 때 모래내 시장에서 먹거리를 즐기셔도 좋을 것입니다.
홍제천에는 모래내시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왕시장과 포방터 시장이 여러분들의 입맛을 즐겁게 해줄 곳이 여러 군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홍제천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홍제천 주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환향년과 호로자식이라는 욕을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이는 바로 병자호란 이후에 생겨난 우리들의 뼈아픈 역사의 그늘과 1968년1월21일에 남파 공작원이었던 김신조 일행들의 1·21 사태 당시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 청와대 인근에 있는 창의문 일대에서 총격전이 일어난 사건 역시 홍제천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멀리 가지 않고 홍제라는 유래가 생기게 된 홍제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백사실 계곡까지 나들이를 시작하겠습니다.
■ 홍제천 주변 이야기
홍제동(弘濟洞) 유래 이야기입니다.
홍제동은 조선시대 때 중국사신과 조선의 조천사와 연행사가 드나드는 중요한 육로로 조선시대 제1로서의 지역으로 중국사신 및 여행객들이 머물렀던 홍제원과 인왕산, 안산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이 형성되어 장안의 경승지로 불리었던 곳으로 경치가 수려했던 곳에 “홍제원”(홍제동 131번지 일대)이라는 현재의 국립여관의 역할을 하던 곳이 있어서 붙은 지명입니다.
● 홍제원
홍제동의 유래가 되었던 홍제원은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손들에게는 마지막 휴식처로 숭례문이나 돈의문을 나서 천연정을 지나 무악재를 넘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 바로 홍제원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한양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간선도로가 9개가 있는데 그 중에 제1로가 숭례문과 돈의문으로부터 무악재를 넘어 평안도 의주까지 총 1,086리에 이르는 중요했던 도로입니다.
이 도로는 연행로(燕行路) 또는 사행로(使行路)라고도 불리었는데, 중국의 사신이나 우리나라 사신의 통행로로 이용되었던 길입니다. 이 길목에서 무악재를 넘기 전이나 넘어간 길손들은 무악재 아래 홍제원에서 옷매무새를 고친 다던가 송별회를 하는 잠시 휴식을 취하던 지금으로 보면 국립여관의 역할을 하던 곳이 바로 동서남북 네 곳의 원 중에 한곳이 바로 홍제원입니다.
네 곳의 원은 동쪽에 전관원, 남쪽에 이태원, 북쪽에 보제원, 서쪽에 홍제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홍제원의 위치는 지하철3호선 홍제역 북동쪽 출입구 부근(홍제동 138번지)에 홍제원(弘濟院)이 있었습니다.
홍제원은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이용하였으므로 다른 원보다 규모가 컸으며, 누각이 있고 중국사신이 묵는 공관(公館)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홍제원 건물은 청일전쟁(1894) 때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일본이 이겨 그 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홍제원은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 일행이 환송 나온 사람들과 작별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는데, 홍제원 주변에는 술을 파는 색주가와 길손에게 떡을 파는 떡집이 많이 있었고, 떡 중에도 인절미가 특히 유명하여 ‘홍제원 인절미’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합니다.
홍제동 일대는 여러 지명으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 절골
절골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홍제4동 인왕아파트 주변일대를 말하는데, 이곳에 청련사, 환희사라는 절이 있어 불여진 이름입니다.
▶ 우물골
우물골은 인왕산 아래 현대그린아파트 입구에 우물이 있어 그 일대를 우물골이라 불렀으며
▶ 외상골
외상골은 지금의 문화촌 동성교회 주변을 말하는데 외진 곳에 있다하여 불리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불당골 (탑골)
불당골 탑골이라 부리었던 이곳은 인왕시장과 인왕초등학교 사이에 고려 때 만들어진 사현사라는 절이 있어서 불당골이라 하였으며, 또한 탑이 있어서 탑골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사현사5층탑으로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가시면 만날 수 있습니다.
▶ 거능골
거능골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곳은 홍제1동사무소와 고은초등학교에 시영 화장터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무덤이 많아 불리어진 고은산 아래 동네이름으로 추정됩니다.
▶ 무신골
무신골은 무당들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홍제2동 한양아파트 아래 축복교회 자리에「할미당」이란 무당들이 굿하던 장소가 있었는데, 장안의 큰 무당들이 자리 세를 내고 굿도 하고 죽은 영혼을 달래주기도 한 곳입니다. 특히 조선말 명성황후가 아이를 못 낳아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활을 쏘았다던 장소로 유명했던 이곳 아래쪽의 마을이름입니다. 지금은 굿을 하던 집들은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길만이 서강맨션 옆으로 나있습니다.
● 홍제동에 화장터가 있었습니다
도로명 주소인 모래내길에는 홍제1동 주민센터와 고은초등학교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서울시 시립장재장(市立葬齋場)이 있었습니다.
시립장재장은 1929년 6월 북아현동과 신당동에 있던 화장장이 주택가에 둘러싸이게 됨으로써 이곳으로 이전하였는데, 도시계획으로 1970년대 초에 경기도 고양군 벽제리로 이전하게 됩니다. 또한 고은초등학교에서 북동쪽으로 50m 지점에는 죽은 사람의 유골을 안치하였던 납골당(納骨堂)이 있었는데, 1960년대만 해도 이곳에 비석들이 즐비하여 산들이 온통 비석으로 덥혔다고 합니다. 1970년에 벽제로 옮기기 전 까지 1932년에 일본인의 의해 경성부림으로 17개의 화구 설비를 갖춘 채 설립된 화장터는 하루에 화구 1개당 세 사람의 화장을 할 수 있어 1일 평균 50명을 화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35년 동안 홍제동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한 사망자들은 63만여 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화장을 거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방정환, 이중섭 등 여기서 화장을 했지만 방정환선생은 5년이나 안치되어 있다가 망우리로 이전되었고, 이중섭의 유골은 반은 일본으로 반은 망우리로 옮겨졌습니다.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애국지사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별세하자 만해 한용운선생은 자진하여 유해를 인수해서 심우장의 자기 방에다 모셔다 놓고 오일장을 지낸 일화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 동기는 홍제동 화장터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관계로 미아리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조그마한 화장터에서 장례를 치르게 합니다. 그리고 만해도 사후에 미아리에서 화장되어 망우리공원으로 가게 됩니다.
● 사현사
사현사라는 고려 때 세워진 사찰이 있었는데 현재 인왕시장과 인왕초등하교 사이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찰에는 5층 석탑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유진상가
현재 홍제견인차량보관소 구간부터 유진상가를 거쳐 홍제교까지 구간 500여 미터 구간이 복개되어 있으며, 1970년대에 유진상가를 세우면서 함께 복개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70년에 지어진 유진상가(홍은동 48-84)는 1, 2층에는 상가가 자리 잡고 3~5층에는 주거시설로 만들어진 주상복합건물로 서울에서 세 번째로 1968년에 낙원상가, 1967년에 세운상가 그리고 유진상가 만들어 졌습니다. 유진상가는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주상복합건물로, 1층에는 100여개의 상점이 들어서 한 때 서북권의 대표 상권을 형성했으며 특히 아파트가 귀했던 시절 이곳은 군장성, 외교관, 연예인이 모여 사는 서울의 대표적 부촌이기도 했습니다.
상가와 맨션이 합쳐진 이 건물은 김신조 사건으로 전쟁을 대비해 구조를 설계하였고, 탱크가 옥상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지어졌다고 하는데 지금도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유진상가는 다른 용도로 군사적 방어기능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동 전체를 초대형 낙석 구실을 하도록 설계했는데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70년대 구호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준전시 체제의 상징물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데 내부순환도로를 만들면서 상가3~5층 일부를 뜯어내었답니다. 유진상가에서 녹번과 불광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바로 산골고개입니다.
● 산골고개
산골고개 즉 녹번현(綠礬峴)은 추모현(追慕峴) 북쪽에 있는데 석벽에서 자연동(自然銅)이 나는데, 뼈 부러진 이들이 캐다가 약으로 사용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고개는 조선시대 중국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사람이 지키면 1만명이 열지 못할 곳이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이 고개의 석벽에서 자연동이 산출된다. 이것을 채굴하는 사람들이 쇠정으로 석벽을 파헤치면 돌 사이에 은싸라기 같은 것이 나오는데 파란 빛의 광채가 난다. 뼈 부러진 사람이 먹으면 신기하게 효험을 본다. 미음과 함께 그 부스러기를 날로 먹는데, 먹을 때 꼭 낫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면 효험을 본다고 한다.’
산골은 뼈에 금이 간 상처에 접골제로서, 또 보혈강장제로서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일대에는 산골을 캐어다 약용으로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조선 건국 초 서울지역에 도성을 쌓을 때 노역에 동원된 인부들이 돌을 나르다 허리를 다치거나 뼈를 다치면 “산골고개에 가서 산골을 먹고 오라.”고 하였다 할 정도로 유명하였답니다. 조선시대에 산골고개에서 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홍제천을 건너야 했는데, 사람들 사이에는 이 개천에서 몸을 씻고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고 도성에 들어가면 횡재를 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왔는데 서석게다리라 부른답니다. 유진상가 사거리에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표석만 이 남아 이곳에 다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서석게 다리는 석교로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으면서 석교를 걷어 갔다고 합니다.
● 서석게다리
산골고개로 가다가 떡전거리(인절미), 설렁탕집이 성행하였다. 석교는 경복궁을 재건할 때 재료로 쓰여짐.
■ 인조반정
1623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모여 있던 군사 수백이 홍제천 계곡을 따라 창의문을 부수고 능양군(인조)이 광해군을 왕에서 몰아낸 이른바 ‘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당시 광해군은 가까스로 궁을 빠져 나갔지만 며칠 뒤 결국 반정의 군사들에게 잡혀 폐위되고 맙니다..
1623년 3월 13일 새벽 창덕궁을 점령한 인조반정 세력들 중 이귀 김류 등 중심인물들이 세검정에 모여 도원결의 하듯이 피 묻은 칼을 세검정 아래로 흐르는 홍제천 계곡물에 씻고 칼집에 다시 넣으면서 태평성대를 꿈꾸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검정’ 이름 또한 칼을 씻었다는 데서 유래 된 설이지요.
하지만 인조반정의 중심세력들이 세검정에서 피 묻은 칼을 씻으며 꿈꾸었던 태평성대의 시절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치욕의 역사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인조반정 4년 뒤인 1627년 후금(청나라)이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이른바 정묘호란입니다.. 이어 9년 뒤인 1636년에 1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합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나 40여 일만에 청에 항복하게 됩니다. 청나라는 조선 땅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대신 몇 가지 조건을 내걸고 이른바 ‘조공’을 바치라 하는데 조공에는 공녀를 바치는 조항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공’정책의 하나로 조선 여인 수만 명을 청나라 심양으로 끌고 갔는데 이 당시 끌려간 조선 여인들은 건너갔던 홍제천을 다시 만나게 되는 아픔의 역사를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 있게 만든 곳입니다..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 여인들이 하나 둘씩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조를 잃어버렸을 것이라는 짐작 하나만으로 이혼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심판을 받고 마을과 고향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고 심지어는 자살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 사회적인 문제가 대두되어 골치 꺼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바로 환향년과 호로자식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 된 것입니다.
▶ 환향녀(還鄕女) ‘고향으로 되돌아온 여자’
환향녀(還鄕女) : 홍제천은 우리 여성 선조들의 애환이 드러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묘호란이후 1636년에 병자호란(인조)후 삼전도에서 굴복한 인조는 청나라에 수만 명의 포로를 보내게 됩니다. 그중에 공녀로 양반 상놈할 거 없이 아낙네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세월이 지나 청나라에 잡혀갔던 여자들이 돌아오게 되었으나 어디에서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인 그녀들은 오히려 '환향녀'(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고 정절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해서 조선사회에서 냉대와 손가락질을 받았고 이것은 곧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나라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는 명을 내려 구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홍제천에서 목욕을 하게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홍제천 주변에 모여 살던 여인들이 큰 은혜를 입었다하여 홍은동(弘恩洞弘)이란 이름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런 홍제천의 슬픈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우리나라의 대표문인이면서 대표적인 친일파의 한 사람인 이광수는 홍제천의 역사를 들먹이면서 친일파에 대한 것도 일일이 가리지 말고 용서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을 하였는데 자기 합리화요 비겁한 자기도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반성을 한 최남선과 비교되곤 합니다.
▶ 호로자식
환향녀의 자식을 호로(胡虜)자식이라 하는데 환향녀들이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로(胡虜) 즉 오랑케의 자식이라 하여 사회에서 냉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심한 욕으로 표현하는데 쓰였다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제한다는 홍제
홍제천의 ‘홍제(弘濟)’란 의미는 글자 그대로 널리 구제한다는 의미인데 고려시대에는 ‘홍제(洪큰물홍 濟건널제)’로 쓰다가 조선 세종 이후부터 홍제(弘넓을홍濟빈곤에서 어려움을 구제하다 는 뜻의 제)와 혼용되었으며, 조선 후기 이후로는 주로 홍제(弘濟 널리 구제하다)가 사용되었답니다. 홍제동에서 세검정으로 올라오다보면 문화촌이 나옵니다.
● 문화촌
문화촌은 1950년대 말에 홍제동 279번지 일대 홍제천가의 자갈밭을 정리하여 바둑판처럼 정리한 골목과 반듯한 집터를 만들어서 담장을 사이에 두고 두 집씩 나란히 붙여서 지은 맞배지붕 형식의 단층 양옥을 30여 채 지어서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을 살게 해주면서 생긴 이름입니다.이때 입주하여 살았던 문화예술인으로 시인 김관식, 시인 김상억, 시인 박화목, 아동문학가 석용원, 화가 성기대 씨 등이 있습니다.
문화촌의 위치는 지금 서울여자간호대학이 있는 부근으로 정확히는 간호대학 정문에서 바라보이는 길 건너편으로 보면 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자유당 말기 정치깡패 임화수가 문화예술인을 키운답시고 한국예술인협회를 만들었는데, 이승만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고 원로배우 김희갑씨를 구타하여 갈비대가 나가는 사고를 일으키고서 미안함을 감추기 위해서 이 마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답니다. 다음으로 문화촌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요즘 뜨고 있는 백종원의 골목시장으로 잘 알려진 홍은동 포방터 시장이 나옵니다.
● 홍은동(弘恩洞)
홍은동이란 이름은 1950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예전의 경기도 은평면 홍제외리 지역이라는 데서 홍제외리의 "홍"자와 은평면의 "은"자를 따써 붙여진 이름입니다.
홍제천 변의 弘恩(홍은)동은 여자들이 왕의 많은 성은을 입었다는 데서 홍은동이란 말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 포방골
홍은2동의 포방터 시장이 있는 곳으로 예전에 포를 쏘는 연습장이 있었던 마을이란 뜻으로 그 일대를 포방골이라 하며 지금도 불리어 졌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인조 재위 기간에 오군영이 오위로 개편되면서 다섯 군영이 되자 '오영문'이라고도 불렀는데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을 이르는데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도성을 직접 방어하는 중앙 군영으로 총융청, 수어청은 서울의 외곽을 방어를 담당했는데 그때 포방터에서 포 연습을 하던 곳에 정식 훈련장이 생기면서 그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포방시장에서 홍지문으로 오르다 보면 욎쪽에 마애보살 좌상을 볼 수 있습니다.
▶ 수마당골
홍은동 보도각백불 아래쪽의 마을을 말하며, 홍수가 나면 넘치는 물에 의하여 마을이 온통 휩싸였기 때문에 불리워진 이름
▶ 호박골
홍은2동 산1번지 지역에 1950년이후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호박을 심어 팔게 되었다 하여 부르던 이름
▶ 치마바위골
홍은동 현대아파트가 위치해 있는 인근에 돌로 이루어진 산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마치 치마폭 같다 하여 치마바위라 불리어졌으며, 그 주변동네를 치마바위 골이라 부르기도 함
● 홍은동 보도각 마애보살 좌상(弘恩洞普渡閣磨崖菩薩坐像)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7호
홍제천을 오르다보면 홍은동 옥천암 경내의 거대한 암석에 새겨진 높이 5m의 마애불로 ‘백불(白佛)’또는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고 불리는 암각 불상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사면을 모두 개방한 각(閣)을 세워 보존하고 있는데 흰색 의 호분(胡粉)이 전체적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기 때문에 백불(白佛) 또는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고도 부릅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상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용재총화),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 민씨가 고종의 천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하얗게 칠을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마애불상은 근래에 세워진 정면1칸, 측면 2칸의 보도각이란 전각 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고종 5년(1868)에 명성황후가 정관법사에게 명하여 홍제동 해수관음 곁에 관음전을 지었고"
1927년에 이성우스님이 칠성각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6칸과 요사3칸을 고쳐지었다. 1942년 주지 동봉스님이 관음전을 수리하고 보타전을 다시 세우고 1987년에 삼성각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수덕전을 하나로 통폐합하여 중창되었다고 한다.
1973년에는 '보도각 백불'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마애존상은 온화하면서 근엄한 얼굴, 팔이나 손이 우아하면서도 중후한 형태미를 뽐내고 있는데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전반기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머리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어깨를 따라 팔꿈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비교적 둥근 얼굴은 눈이 가늘고 입이 작게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옷은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옷주름은 선이 깊지는 않지만 신체 전반에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아미타불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마애불로서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보인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 말사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이 있습니다.
다음은 탕춘대성 이야기를 해보려합니다.
● 홍지문과 탕춘대성
탕춘대성은 숙종대 만들어진 방어용의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산성으로 축성되게 됩니다.탕춘대성에서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습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 문으로 그 역할을 하였으나 1921년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오다가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홍지문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쓰게 됩니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는데 석축 윗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입니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을 합니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한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며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그 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 배치하였다.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서울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상명대를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한옥 한 채가 양옥 건물에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집이 바로 춘원 이광수가 살았던 집입니다.
● 이광수집터
이광수(李光洙, 1892~1950.10.25 , 춘원 春園 평북 정주 생.)
염초소 터에서 70여m 올라가면 한옥 한 채가 있는데 이는 춘원 이광수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입니다. 그러나 당시 집은 남아 있지 않고 우물과 향나무, 감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의 집은 1970년 경 새로 지은 집입니다. 이광수는 1917년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장편 소설인 ‘무정’을 쓴 현대문학의 개척자입니다. 또한 독립운동도 하였으나 1939년에는 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면서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하게 되어 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기도 하였습니다. 6.25 전쟁 때 납북되어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하였습니다.
1972년에 현재의 집 주인이 춘원의 집을 사서 이층 양옥으로 개조하려 했는데, 춘원의 자취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지인 조병화, 박종화, 김광섭 등의 일부 문인들이 춘원의 자취를 남기길 위해 김재철씨를 설득했고, 그 부탁이 받아들여져 춘원헌 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품으로 '재생'(1924), '마의태자(麻衣太子 1926), 단종애사 (1929), 흙(1932-1933), 이순신(1931), 유정(有情 1933), 사랑(1938)>그 밖의 작품에 '윤광호(尹光浩)' 등의 단편과 '이차돈(異次頓)의 사(死)' . '사랑' . '원효대사' 등 장편,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시편들이 있다.
1937년 흥사단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 되었는데, 1938년 3월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후 12월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창씨개명까지 하게 됩니다.
이광수집 아래 로터리 부근에는 일본 수비대가 거처하던 왜관터와 화약을 제조하던 염초소 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도로 건너 창의문 쪽으로 우측에 보면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옥 건물이 있는데 소전 손재형 선생께서 소유하고 있었던 곳인데 바로 석파정의 별채를 옮겨다 놓아서 석파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대문 위를 보면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 왜관 터(倭館 址, 상명대앞 삼거리)
대한제국 말 일본 수비대가 거처한데서 유래된 이름.
(같은 시기 군대해산 등으로 인하여 의병활동이 활발한 이 지역 인근 북한산성에도 헌병대 분소를 설치한 바 있다)
● 염초소 터(焰硝所 址, 홍지동 36,37번지) 상명대 올라가는 입구
조선시대 염초(焰硝), 즉 화약을 제조하던 곳.
군사시설 지역이었던 이곳에 군영과 군문에 무기와 함께 화약을 자체 조달하는 화약제조소.
팔선생이라는 중국집이 있는데 바로 그 뒤가 염초소가 있었던 곳입니다.
● 손재형(1903~1981) 석파랑
소전(素筌·素田) 손재형 선생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서예라는 단어를 최초로 만드신 분입니다. 이전에는 서도 혹은 서법이라고 불리었습니다.처음에는 행서와 해서를 쓰다가, 이후에 예서와 전서를 쓰면서 독창적인 문체를 만들어내게됩니다.
한글서체인'소전체'라고 하는 문체는 현재까지도 서예인들 사이에서 호평과 비판이 오가고 있습니다만 좋아하는 사람은 추사 이후로 한국 최고의 서예가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안종원과 김돈희에게 배웠으며 서화골동의 감식안도 뛰어나 기교적인 개성이 드러나는 문인화도 그리게 됩니다.
1946년 진도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재단이사장과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8년 자유당에 입당하여 제4대 민의원에 당선, 1965년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등을 지냅니다.
금석문으로 한글예서체의 〈이충무공동상명〉과 육체의 〈사육신묘비문〉·〈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문〉 등이 있는데,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청와대에서 사사를 하였고 많은 서예가들 8~9할이 그의 제자들이라고도 합니다.
석파랑은 서예가 손재형 선생이 석파정의 사랑채를 옮겨와 만든 그의 집이다.
서예가인 손재형이 1963년 짓기 시작하여 1969년에 완공한 집이다. 전국에서 헐리는 한옥에서 기와, 재목 등 필요한 재료를 사모아 만들었다. 이 곳 돌담은 덕수궁 돌담이 헐릴 때 가져와서 쌓은 것이며, 운현궁, 선희궁, 칠궁 재료도 섞여 있다. 위쪽에 흥선대원군 별장 석파정의 사랑채가 있다.
손재형은 일본으로 유출된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한국으로 가져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말년에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별장 아래에 있는 손재형이 살던 건물들은 현재 전통음식점 '석파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손재형 선생은 정치에 투신해 재산을 탕진하자 고리대금업자에게 세한도를 담보로 맡겼는데 돈 갚을 길이 없자 세한도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개성 출신의 갑부 손세기가 사들이고 현재는 그의 아들인 손창근이 소유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했다. 단 소유권은 손창근이 가지고 있음
세검정으로 오다보면 도로 건너편 벼랑에 사찰이 있는데 바로 소림사라 합니다. 태조가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 소림사(小林寺, 홍지동 80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인 소림사는 1396년(조선 태조 5) 혜철(慧哲)선사가 태조의 명을 받아 창건하였습니다. 본래 자연굴에 법당을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중국 하남성 숭산에 있는 소림사의 이름을 따서 소림굴(少林窟)이라 했으며,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이 굴에서 수도한 바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1817년(순조 17) 절 이름을 소림사로 바꾸었습니다.
■ 세검정•탕춘대•신영동•평창동•현통사 이야기
이제 본격적으로 세검정과 탕춘대 그리고 현통사, 백사실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 세검정(洗劍亭, 신영동 168-6 번지)
세검정은 『궁궐지』에 의하면 “계해년의 반정 때 창의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세검정이라 이름 하였다.(癸亥反正時 由彰義門入 故名洗劍亭)”고 하는데 이는 성공한 반정이라서 이후에 이곳에서 칼을 씻었던 자리라고 하여 세검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아닌가 봅니다. 이는 씻을 세와 칼 검자를 쓰다 보니 만들어진 이야기라 볼 수 있습니다. 또 한설은 조선 영조 때 서울을 방비하고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기 위하여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총융청 군사들의 연회장소로 지은 정자라고도 하는 설입니다.
김상채(金尙彩)의 《창암집(蒼巖集)》에는 육각정자로서 1747년(영조 23)에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영조 24년(1748) 겸재 정선은 73세 때 ‘세검정도’를 그리게 됩니다. 이 그림은 세검정이 준공된 다음 영조에게 보이기 위해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조선 후기 때의 세검정은 선비들에게 사랑 받던 유희의 장소로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시절이 흘러 일제 강점기 때인 1941년 인근에 있었던 종이공장인 조지서에서 불이나 세검정이 소실되게 됩니다. 이후 1977년에 와서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복원을 하게 됩니다. 지금의 모습이 바로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의 의해 복원된 것이라 하는데, 지금의 정자는 복원 당시 겸재의 그림을 많이 참고했다고는 하지만 그림 속 정자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주춧돌은 사각기둥이 아니라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드는 사다리꼴입니다. 그리고 너무 짧고 체감이 급격해 그 위에 얹힌 정자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춧돌이 짧다보니 그림 속 누각형 정자는 간 곳 없고 그저 작고 평범한 집 하나가 암반 위에 올라앉은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또 겸재의 그림에는 정자 뒤 북쪽으로 ‘ㄷ’ 자 형태의 담장이 있고, 정자로 들어오는 일각문과 정자 아래로 내려가는 쪽문이 있고, 지붕 위에는 절병통이 있었지만 지금의 정자는 보이질 않습니다. 문화재를 복원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왈가왈부할 소지를 남기고 있어 또한 문화재 기술력을 의심 받는 일이 생깁니다.
숙종 때, 즉 서기 1675년에서 1720년 사이에 탕춘대성, 즉 서성을 쌓고 평창(平倉) 등 시설을 그 부근에 두었으며 영조 때, 즉 1725년에서 1776년 사이에는 군문의 하나로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 등 5영의 군무를 절제하는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설치하고 종래 북한산성의 업무를 관장하던 경리청도 합하여 실질적인 국방업무의 요지가 됩니다.
이에 따라 탕춘대의 지명도 연융대(練戎臺)로 고쳐졌으며 왕도 때때로 거둥하여 장병들의 무예를 손수 시험하기도 하였으며, 또 여기에 총융청의 청사를 신영하였던 관계로 신영동의 동명이 여기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세검정 일대에는 군사시설이 들어서고 정부 고관들의 출입이 잦게 되자, 연융대 앞 시냇물이 흐르는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세검정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세검정 정자 앞에는 차일암(遮日巖)이라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성종 때의 문신이며 많은 기록을 남긴 용재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이 일대의 경치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 밖에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藏義寺)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시냇물이 삼각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 골짜기 안에는 여재단(礪祭壇)이 있고 그 남쪽에는 무이정상(武夷精舍)의 옛터가 있다.
길 앞에는 돌을 수십 길이나 쌓아올린 수각(水閣)이 있고 또 절 앞 수십 보 앞에는 차일암이 있는데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시내를 베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 바위 아래에는 장막을 칠 만한 우묵한 곳이 있는데 바위는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으며 흐르는 물소리는 맑은 하늘 아래 천둥, 번개가 치는 듯 귀가 따갑다. 물이 맑고 돌이 희어서 선경이 완연하다.‘
● 탕춘대(蕩春臺, 신영동 136-9번지)
탕춘대는 연산군 12(1506)년 경 장의사와 조지서 부근에 세운 누대의 이름입니다..
연산군은 집권 후기에 호화 꽃놀이 연회장으로 수많은 궁녀 미인(흥청)들을 대동하고 꽃피던 봄날에 술과 여자 풍악소리로 사치와 향락을 즐기던 곳으로 이곳에다 정자를 짓게 됩니다.
‘연산군이 장의문 밖 조지서 터에 이궁을 지으려다가 먼저 탕춘대를 봉우리 위에 세웠다. 또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횡각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긴 회랑을 연하여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여러 신하들에게 과하고자 하여 놀고 구경하기를 명하였다. 『연산군일기』 12(1506)년 1월 27일’
연산군은 이 부근에 이궁을 짓기 위해 조지서를 홍제원 근처로 이전합니다.
‘전교하기를, “조지서를 홍제원 위로 옮겨 짓고, 곁에 가까운 인가를 모두 철거하며, 장의사에 사는 중도 내치고, 동리 어귀를 한계 하여 목책(목책)을 설치하라.『연산군일기』 10(1504)년 7월14일’
탕춘대를 짓고 얼마가지 않아 인조반정이 일어나 폐위되고 맙니다.
영조 30년(1754) “탕춘대”란 이름이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다고 판단하여 “연융대(鍊戎臺)”로 고쳤습니다. 탕자는 방탕할(쓸어질) ‘蕩’자에 봄 ‘春’자이고, 연융은 단련할 ‘練’ 자에 병장기 ‘戎’자입니다.
탕춘대 표석 위에 보면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저 비석의 문구는 ‘송공수천자선문불망비(宋公壽天慈善文不忘碑)’라고 쓰여 있는데, 송수천 씨의 선행을 잊지 말자는 내용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송수천이란 분이 운영난에 처한 창의학교에 거금의 사재를 기부한 것에 대한 감사로 1922년에 세웠습니다. 원래 현 위치에서 가까운 세검정우체국 부근에 있었던 것을 도로공사를 하면서 이전한 것입니다.
● 조지서(造紙署, 신영동 199번지 일대)
조선시대에 궁중과 관청,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각종 종이를 만드는 관청이자 공장으로 태종 15(1415)년 조지소(造紙所)라는 명칭으로 세검정초등학교 남쪽 세검정길 일대의 세검정 일부와 가로변에 설치하였는데, 세조 12(1466)년에 조지서로 개칭되었다가 고종 19(1882)년에 폐쇄합니다.
▷ 태종이 조지서를 둔 동기는 태종 10(1410)년 지폐인 저화(楮貨,고려 말기·조선 전기에,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돈)를 통용하게 하고, 또한 관청에서 사용할 종이가 필요하였는데, 이 때 각 도에서 만들어 상납한 종이의 규격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실록 편찬할 때 참고한 사초나 실록의 초고 들을 물에 씻는 세초(洗草)를 하여 먹물을 지운 종이를 조지서로 보내 다시 종이로 재생
● 수각(水閣)
연산군이 사천계곡(沙川溪谷) 물을 이용하여 지은 정자.
● 석경루(石瓊樓, 신영동 149번지)
현재 불암 바위 남쪽으로 빌라들이 있는 곳으로 연산군이 사천계곡(沙川溪谷) 수각과 함께 지은 누각.
● 연융대(鍊戎臺)
영조30(1754)년 “탕춘대”란 이름이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다고 판단하여 “연융대(鍊戎臺)”로 고쳤다.
● 총융청(摠戎廳, 신영동 45번지)
영조 23(1747)년 5월 6일에는 총융청(摠戎廳·경기지역을 관할한 군영)을 탕춘대로 옮기고 경리청 대신 북한산성까지 수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신영동(新營洞)은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이 현재의 세검정초등학교로 이전되자 총융청을 ‘신영, 즉 새로 생긴 군영’으로 부르면서 생겨남
▶ 5위(지역방어 체제)→5영(수도권 방어 체계)으로 군대 개편
훈련도감 임진왜란 이후 군사훈련을 통한 정병양성
어영천 이괄의 난 화포훈련과 국왕호위
총융청 정묘호란 직전 수도 한성의 주위, 경기도내 5개 병영의 방어. 관리
수어청 정묘호란 후 남한산성 방비 전담
금위영 숙종8년(1682년) 국왕호위와 수도방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삼군문을 이뤄 수도 자체 방위 역할.
● 장의사 (莊義寺신영동 현 세검초등학교)
삼국통일 직전 신라 무열왕 6년(659)에 황산벌싸움에서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한산주에 창건한 사찰. 지금은 초등학교에 당간주 만 남아 있는데 보물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왕실에서 왕실의 명복을 비는 각종 제를 지냈으며, 진관사와 함께 세종~문종 때는 집현전 학사들이, 성종 때에는 홍문관 관원들이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 장의사당간지주(莊義寺址幢竿支柱, 보물 제235호, 신영동 현 세검초등학교)
사찰에서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지주라 한다. 절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어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찰 앞에 설치했던 조형물로서 장의사당간지주는 초기 당간지주의 형식을 나타낸다.
● 평창(平倉)
비상시를 대비하여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 선혜청 창고(宣惠廳 倉庫)
비상시를 대비하여 대동미(大同米)·대동포(大同布)·대동전(大同錢)의 수납을 관장하던 선혜청의 창고를 설치하였다.
● 북단(北壇)
북교(北郊)에 있는 단(壇), 북단(北壇)이라 하고 여단(癘壇)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한성부에서 홍역, 마마, 호열자, 장질부사 등 유행병을 예방하기 위해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자식없는 자)에게 거행하는 제사.
정종 2(1400)년 전국 각 고을의 치소마다 반드시 한 곳씩 설치하였고, 봄, 가을, 겨울에 하루씩 지냈다.
● 일봉선원(서경보) 재단법인 대한불교 일붕선교종(財)大韓佛敎 一鵬禪敎宗
서울시 종로구 세검정로 6길 76-9번지(신영동 일붕선원)(총무원)
(재)대한불교 일붕선교종은 석가모니불을 교조로,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하고 있다.
지금의 종단은 1988년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1914-1996)스님을 개조로 하여 서울 신영동 일붕선원 대법당에서 창종되었다.
일봉선교종에 가기전 입구에 불암(佛巖)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습니다. 이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일붕 서경보 스님이 세운 것입니다. 내용은 마을을 영원히 잘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 巨巖鎭靈地(거암진영지) 큰 바위가 신령스러운 땅을 메워
不動萬年春(부동만년춘) 만 년 동안 움직이지 않는구나.
願此天真佛(원차천진불) 하늘이 내린 진불에 기원 하노니
千世護鄕門(천세호향문) 영원토록 마을을 지켜주소서
세월이 흐르면 이 바위도 문화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일붕 스님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학장과 일붕선교종의 종정을 지냈는데 126개의 박사학위, 1,042권의 저서, 757개의 통일 기원비 건립, 50여만 점의 선필(禪筆), 최대 석굴법당 건립 등 5개 분야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하였답니다.
일붕 스님은 1932년 제주도에서 출가하였고, 1950년대까지는 교학과 교율에 열중하시다가 1960년대부터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5년에는 한국 최초로 해외포교사가 되어 활발한 포교사업에 나섰으며, 1992년6월에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정회원 16개국 대표가 참가한 세계법왕청 총회에서 초대 법왕으로 추대되었다.
1991년에는 재단법인 등록을 필하고 종단을 통합하였다.
1,2대 법인이사장에는 일붕(서경보)스님이 취임하였고, 초대 총무원장 정각 스님이래 2011년 2월 현재 제8대 법인 이사장은 경원(鏡圓)스님이며 종정은 제5세 석진 지공대종사, 총무원장은 9대 경원(鏡圓)스님이다.
학승이자 교육자였던 스님은 1969년 미국 템플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데 이어 철학 종교학 법학 언어학 인류학 종교학등 26개분야 1백26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합니다. 1953년부터 해인대 원광대 동아대 동국대등 국내외 25개 대학에서 불교및 철학을 강의하고 2백여개 대학 초청세미나를 갖은바 있으며 불교사상 교양전집 1천42권의 저서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신영동 149번지인 이 근처에 연산군이 지은 석경루(石瓊樓)란 누각이 있었습니다.
현통사로 올라가겠습니다.
● 현통사
일붕선교종 소속 사찰입니다. 일봉스님이 잠시 머물렀던 고이기도 합니다.
현통사는 고려시대부터 현재 자리를 지켜왔는데, 조선시대까지 ‘장의사’라 불렸다고 합니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사찰이 소실되고 1958년 이름을 보문사로 변경했다가 1967년 재건 작업이 시작돼 1971년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이후 1987년 사찰 명을 ‘현통사’로 변경합니다. 현통사의 역사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현통사 입구 문은 일주문인데 사천왕문을 겸하고 있습니다.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데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사천왕은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불법 수호와 사부대중의 보호하는 신으로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합니다.
일주문 양쪽에 대련으로 써 있는 글은
入此門來莫存知解(입차문래막존지해)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아는 체하지 말라.
無解空器大道成滿(무해공기대도성만) 아는 것이 없는 빈 그릇이 큰 도를 이루리라.
아는 체 하지 말고 그릇을 비운다. 좋은 글입니다.
왼쪽에 일붕 애국시(一鵬愛國詩)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白石淸流洞(백석청류동) 백석의 맑은 물이 계곡에 흐르고
看花聽鳥聲(간화청조성) 꽃을 바라보니 새 소리도 들리네.
一鹏禪日月(일붕선일월) 일붕은 일월처럼 참선을 하며
愛國萬尊淸(애국만존청) 진실로 영원히 나라를 사랑하리라.
현통사 사찰이 좁아 나가서 일명 동령폭포라고 하는 건너편에서 현통사를 보며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현통사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나서 이야기 진행
현통사를 보면서 대웅보전이 보입니다. 대웅은 큰 영웅이란 뜻으로 석가모니의 별칭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사찰에 가면 대웅전과 대웅보전이 있는데 두 곳은 모시는 협시불이 다릅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 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에 아미타부처님과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십니다. 그것이 대웅전과 대웅보전의 차이인데 기본이 그렇다는 것이고 사찰마다 다른 곳도 있습니다.
대웅보전 왼편 뒤쪽으로 독성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에만 있는 고유의 신앙 대상입니다. 독성(獨聖)은 나반존자(那畔尊者)의 다른 이름으로 ‘홀로 깨친 이’라는 뜻입니다. 홀로 독 자, 성인 성 자지요.
왼쪽으로 산신각이 있고,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성각이 있는데 모두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인데 임진왜란 이후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우리의 토속신앙과 결합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어떤 절에서는 삼성각이라 하여 독성, 산신, 칠성을 한 곳에 모시기도 합니다.
여기서 칠성각의 현판을 한 번 잘 보세요. 좀 특이한 점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바로 성자가 별 성 자인데 좀 특이 하지요?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별 성(星)자의 고자(古字)입니다. 즉 날 일이 세 개인 맑을 정 밑에 날생(曐)을 한 것이죠. 그런데 같은 자로는 흰 백자 세 개(皨)와 밭 전자 세 개(㽮)를 쓴 것도 같은 별 성 자입니다.
그 다음 제월당(霽月堂)을 보시면 비 갠 뒤에 달을 보는 집이란 뜻인데, 이 현판도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죠. 제월당이라 이름 붙인 내력은 바로 현통사 앞의 봉우리가 월암(月巖)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있다가 백사실 별서 터에서 월암 각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달월 자가 옆으로 누워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선 달의 모습이 항상 같지 않음을 오묘한 불법에 비유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또 월암은 매월 초승달이 뜨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워 있는 달 월자는 초승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월당 안에서는 비스듬히 누워야 달이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썼다고 하는데 운치와 풍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비갠 뒤 제월당 앞 월암에 달이 뜨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름답지 않을 까 상상을 한번 해 보시지요.
제월당 옆에 범종각이 있습니다. 현통사는 범종과 목어, 운판이 함께 보관되어 있는데 어떤 절은 범종만 있거나 사물전이라 하여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함께 있기도 합니다. 범종은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기 위하여 치는 것이고, 법고는 축생, 목어는 수생, 운판은 날짐승을 위하여 치는 것입니다.
현통사 중수비가 있는데 내용 중에 연대가 틀린 게 있습니다. 비문 중에 순조 17년(1877)이라 되어 있는데 순조 17년은 1817년입니다. 60년이 더해진 것이죠. 순조 1년은 1801년입니다.
(1800년은 즉위한 해로 원년이라 부름)
이동하겠습니다.
여기서부터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백사실 계곡이 시작됩니다. 백사실 계곡은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하고 백악산 아래 자리하고 있는 계곡으로 도롱룡, 북방산개구리, 무당개구리, 버들치, 가재 등 1급수에만 사는 다양한 생물체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대표적 자연생태 명소로 2009년 생태 경관보전 지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백사실 계곡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있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어서 지금 우리에게 힐링의 장소를 제공하고 있답니다.
● 백사실 계곡 백석동천 이야기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명승지36호
이 곳에 오니 어떻습니까. 공기가 확연히 다르지요. 이곳이 바로 부암동 백석동천(付岩洞白石洞天) 일대 백사실 별서가 있던 곳입니다. 2008년 01월 08일 명승 제 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백석동천의 지정 면적은 15,400여 평 됩니다.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사면의 백사실 계곡에 위치한 조선 시대 별서가 있던 곳
이다. 지금은 보시다시피 터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1800년대 도성 가까이에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별서정원의 유구와 바위에 암각된 각자, 월암과 백석동천 경역 내의 지형과 산림이 잘 보존되어 있는 명승지입니다. 2005년에 사적 제46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에 명승36호로 재분류되었습니다.
이곳 백사실 별서 터는 계류 근처에 육각정자의 주초석과 연못이 있고, 연못 위로 약 4m 정도의 높은 대지에 건물지가 있었습니다. 건물지에는 사랑채와 정자의 기초·담장·석축 일부만 남아 있고 건물지 위쪽 바위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 등이 각자된 바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별서정원의 대부분은 산수가 수려한 경승지에 위치하며 세상으로부터의 은둔과 은일을 위해 마을과는 일정한 격리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도시화가 많이 이루어진 서울에 위치하고 있는 별서임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춘 격조 높은 전통 별서 정원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평가입니다.
백석동천은 백사실 원림 유적을 포함한 계곡 일대의 지역은 청운동의 도화동천, 가회동의 청린동천, 인왕산 자락의 청계동천, 성북동의 쌍류동천 등이 서울의 도시화로 도화동천, 청린동천, 청계동천 등은 옛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쌍류동천은 성락원이 보존되면서 경내에 해당하는 동천 지역이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이곳 백석동천은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 후면에 있기 때문에 각종 규제를 받아 오히려 자연 상태로 경역이 유지되었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건물터와 연못 유구가 위치한 동천의 중심에서 보면 사방이 계곡과 자연만 조망되어 서울에 있는 동천 중에서는 그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 별서는 남북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측에 둥근 연못이 있고 연못의 남단에는 지금은 사라진 육각형 정자의 주초석만 남아 있습니다. 연못의 북쪽에는 주변보다 3.7m 정도 높게 단을 조성하여 이 위에 건물을 지어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한옥으로, 특히 사랑채에서 연못이 바로 아래로 보이도록 조망위치를 고려해 건축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석동천 내에는 동천을 상징하는 글자가 바위에 각자되어 있는데 조금 있다가 만나게 될 커다란 바위의 수직면에 ‘백석동천’이라고 암각이 나타납니다. 백석이라는 명칭은 흰 바위라는 뜻으로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과 관련이 있다는 설과 북악(백악)의 후면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백악에서 취한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정원 유구의 맞은편 서쪽 산마루 근처 바위를 보시면 월암(月巖)이라는 각자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월암의 위치는 건물터에서 정 서쪽으로 매월 초승달이 뜨는 방향으로 ‘월출어서(月出於西)’라 하여 달이 서쪽에서 떠오르는데 사랑채에서 월암 방향으로 떠오르는 초승달을 감상하는 것은 매우 멋진 풍광이었을 것입니다.
추정되는 백사실 별서의 주인
백사골 별서의 주인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전해 내려오는 소문대로
첫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둘째로는 백사 윤훤(尹暄, 1573~1627) 윤두수(尹斗壽, 1533∼1601) 넷째 아들
셋째로는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
넷째로는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 1720~1783)와 교유했던 제4의 인물 허필
다섯째는 추사 김정희
여섯째는 애서 홍우길
백사실 별서를 소유했던 인물들은 첫째 허필, 둘째 김정희, 셋째 홍우길,
별서는 허필에게 김정희가 매입했다고 하며 이후 김정희에게 애사 홍우길이 매입했다고 한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의 ‘참봉집’에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동천과 모정인 간정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이 있었으며 허씨의 모정(茅亭)에는 간정료(看鼎寮)라는 편액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간정료(솥을 보는 집이란 뜻으로 차를 끓이는 다조를 말한다.)
春臺水石自年年 춘대의 물과 바위는 스스로 해마다 있었지만
始見溪山有別天 이제 비로소 산 계곡에 별유천지가 있는 것을 보았네
探到東源高瀑處 물어물어 동쪽 근원 높은 폭포 흐르는 곳에 이르니
山丹花發許亭前 허씨의 정자 앞에는 산단화가 만발하였네
허씨는 허필로 강세황과 친분이 있었던 지두화에 능했던 인물인 허필은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시·서·화에 전념하여 삼절(三絶)로 불렸는데 강세황 등 당시 시서화에 능했던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애사 홍우길 출생 1809년(순조 9)~1890년(고종 27)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정언·지평·사간을 거쳐 1856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이조참의·예방승지를 거쳐 1859년 경상도관찰사, 1860년 이조참판, 공조·이조·예조·형조의 판서, 한성부판윤, 대호군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림을 잘 그렸다.
월암 이광려가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월암이라는 각자를 새겼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사랑채 뒤 공터가 안채였는데 현대에 와서 동네 주민들이 배드민턴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평탄작업을 하는 바람에 주춧돌마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랑채 처럼 주춧돌이 남아 있었더라면 건물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둥근 시멘트로 되어 있는 곳은 우물입니다. 그리고 적색 벽돌의 구조물은 쓰레기를 소각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소각장으로 보입니다.
이곳 사각형의 구조물이 있는데 용도는 작은 연못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래로 연못이 있고 건너편에 육각정의 정자 주춧돌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있었는데 언제 없어졌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곳을 상상해 보십시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 사람이라 생각하고 심호흡을 마면서 상상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오솔길로 올라 능금마을로 가 보겠습니다.
● 능금마을
계곡물에 손이라도 잠시 담가보시지요. 이곳이 바로 능금마을 입구입니다. 능금마을은 조선중기부터 1970년대까지 능금과 자두를 재배했다는 일명 능금마을입니다.
이곳은 인조반정 후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개경에 있는 능금나무를 나눠줘 재배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리고 능금을 궁궐에 진상품으로 바쳤다고 하며 1970년만 해도 자하문 밖에는 능금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70년대 이후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는 사라지게 되어 지금은 능금을 재배하지 않고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능금마을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서울에 이런 아늑하고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도심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힐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석동천 암각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 백석동천白石洞天
이곳이 바로 백악산 아래 흰돌마을 즉 산과 내로 둘러싸인,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좋은 곳
하늘에 이어져 신선이 사는 세계라는 곳을 표시한 곳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홍제천인 세검정과 백사실 계곡을 걸으면서 느낀 점들은 각자 새기시고 사계절 어느 때라도 오시면 그날의 정취에 흠뻑 젖을 거라 봅니다.
오늘 이야기 중에 월암이나 백석동천 각자 좌에 누가 새겼다는 이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측만 할 뿐입니다. 그 당시에 각자를 새길 때 누가 새겼다는 이름이 남아 있으면 역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터인데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세검정 및 백석동천을 현장학습 시간을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려가면서 부침바위 터를 확인하면 일정을 마치게 됩니다.
함께 내려가면서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 터로 가기 전에 부침바위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 부침바위 터 (小林寺, 부암동 141-1번지) 부암동
고려시대 몽골(원나라)의 침입을 받았을 때 고려 장정들이 몽골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혼례를 치른 다음날에 남편이 끌려간 여인이 있었습니다. 신랑과 생이별한 이 여인은 매일 소복을 하고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이 바위에 와서 빌었고 어느 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이 몽골에 수소문하여 그녀의 남편을 찾아오게 하여 결국 부부가 상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부부가 함께 이 바위를 찾아 여인이 했던 방식으로 돌을 부치자 이별했을 때에는 떨어지던 돌이 상봉한 뒤에는 붙어 있게 되고 그로부터 옥동자를 원하는 여인이나 자식을 찾으려는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소원을 빌면서 돌을 붙여 소원을 빌던 곳이다 하여 부암동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함께 나눈 ○○○입니다. 고맙습니다.
■ 주변 동네 유래
● 구기동(舊其洞) 평창동(平倉洞) 신영동(新營洞) 홍지동(弘智洞)
구기동은 구텃굴 이라하던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인데 무엇에 대한 옛터인지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고려 때 관아(官衙)가 있던 자리인가 생각 된다 동네 이름으로 나온 것은 갑오개혁 때 북서(北署) 상평방(常平坊)의 구기동이 있었다,
가는굴은 세곡동이라 하며 가늘고 길게 들어간 골짝기에 마을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매박골은 구기동을 이룬 자연촌락 중 비교적 큰 마을인데 매바위가 있으므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응암(應岩)이라고도 한다, 먹정굴은 구기동에서 불광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구기터널이 뚫린 근방인데 산성(山城)이 암문(暗門)이 있고 검은 바위가 있어서 박쥐가 많으므로 먹정굴이라 하였다, 문수동은 문수사(文殊寺)가 있었으므로 문수동 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숙종41년에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을 때 좌의정 이 명(李 命)이 탕춘대성은 넓어서 수비하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문수동의 어귀를 막는 것이 성(城)을 쌓기도 편리하고 지키기도 용이하다고 주장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탕춘대성을 중심으로 성(城)을 쌓았다,
● 평창동(平倉洞)
평창동은 평창동 156 번지 일대의 선혜청(宣蕙廳)(대동미와 포전을 관리)과 평창동 330번지 일대의 총융청(摠戎廳), 경리청(經理廳)을 대신하여 북한산성을 구관(句管)한 관청)의 평창(平倉)이라는 두 개의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동법(大同法)에 따라 대동미(大同米)와 포전(布錢)이 출납을 맡았던 관청의 창고 중 대동미를 보관하던 곳을 평창이라 하였다, 평창동의 지형은 북한산줄기가 뻗어 내린 관계로 평지 보다는 계곡과 산이 많다, 평창동의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고종 때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평창동이 한성부 상평방(常平坊)내의 선혜청계에 속하였다.
평창동에는 율목동(栗木洞), 신창(新倉), 월계동(月溪洞) 평창굴 장안의 토착 마을이 있다, 율곡동은 밤나무가 많이 심어져있어 밤의 수확이 많은 동이므로 밤나무골이라 했던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월계동은 월계정(月桂亭)이 있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이 붙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월계수로 만든 정자가 있기 때문에 월계동(月桂洞)이라 하던 것이 月溪洞으로 바뀌었다, 186 - 187 번지 일대는 장안이라 하여 평창동 중에서도 가장 큰 토착부락이었다, 도읍(都邑)을 가리키는 말을 장안이라 한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이 일대는 한 때 유원지로서 서울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던 곳이다,
● 신영동(新營洞)
신영동은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조선시대 다섯 군영(軍營)중 하나를 삼청동(三淸洞)에서 신영동 219-4번지 세검정 초등학교 일대로 이전하여 새로 지은 군영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종4년에 편찬된 육전조례에서 사평방에 처음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 상평방내 경리청에 속한 동명에서 신영동이 기록되었다, 상평방 경리청계, 무계동, 부암동, 백석동, 홍지문내동 삼지동, 구기동, 음암동, 왕정평, 신영동, 남문동, 이라고 적혀있다, 신영동의 명칭이 붙여진 유래를 궁궐지(宮闕志)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찾아보면 조선시대 5군영중의 하나인 총융청으로 영조 때 북한산성 수비를 담당 시키고 그 청사를 창의문 밖으로 이전 시켰다고 하였다, 따라서 총융청이 새로 영조(營造)되었다 해서 신영동이라고 호칭된 것이다, 원래 총융청은 인조2년(1624)에 사직동 북쪽에 설치되었으나 헌종10년에 삼청동으로 청사를 이전 시켰다가 영조 때에 신영동으로 다시 이전한 것이다,
또한 탕춘대가 있던 부근의 시냇물이 감돌아가는 신영동 137, 139, 141~144번지 일대에는 승목소라는 부락이 있었고 장의사(藏義寺) 계곡은 봄철의 꽃 여름철의 과일 가을철의 단풍이 어우러진 이곳은 세검정 일대의 수석과 함께 경관을 이루었으므로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줄지어 찾았던 곳이고 1970년 초 까지 각급학교 소풍지(消風地)로서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 홍지동(弘智洞)
홍지동은 탕춘대성(蕩春臺城)의 남쪽관문인 홍지문(弘智門)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제정된 동명에 의하면 상평성외(常平城外) 경리청계(經理廳契) 안에 홍지문내동 삼지동(三芝洞) 남문동으로 되었다,
동명이 유래된 홍지문 중심으로 일찍부터 발달하여 왔는데 홍지문 안쪽과 가까운 곳에 형성된 마을을 홍지내동 혹은 줄여서 내동 안골이라 하였는데 홍지문 90~97번지와 103~104번지 일대가 해당된다, 삼지동(三池洞)을 혹은 삼지동(三芝洞)이라고 하는데 홍지문 서북쪽으로 67~70, 76~80번지 일대로서 비교적 높은 지대인데 소림사(少林寺)라는 절이 있고 절 앞에는 연못이 세 개가 있었으므로 삼지동(三池洞)이라 불렀다, 연못가에 돌 거북이 있었는데 경복궁 중건시 캐내어 석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탕충대성은 전체길이가 약 4km로 북한산 비봉에서부터 시작 하여 사천(沙川)의 홍지문에 이르는데 성문(城門)은 홍지문 하나뿐이나 동북쪽으로 사천을 가로 질러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으므로 탕춘대성 전체로 볼 때에 남 쪽문에 해당되는 홍지문을 남문이라 불렀고 부근 홍지동 36번지 일대를 남문동이라 하였다,
● 부암동(付岩洞)
부암동은 세금정쪽에 길가에 높이 2m 부암동 134번지에 부침바위(부암(付岩)가 있었는데 자기 나이대로 문질러서 돌을 붙이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傳說)이 있는 바위로서 동명의 유래가 된 것이다, 부암동, 무계동(武溪洞) 백석동(白石洞), 부암동, 삼계동(三溪洞)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한산과 인왕산 자락에 위치하므로 바위 계곡등과 관련된 지형이다, 무계동은 자하문 밖(자하문은 개성의 자하골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쪽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로 수석이 맑고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백석동은 부암동 115및 115~1번지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백석실(白石室)이라고도 하는데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삼계동은 무계동 아래 부암동 318번지 일대를 말하며 석파정의 암벽에 삼계동이라는 3글자가 새겨져있다,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있는 계곡처럼 생겼다 해서 무계동이 되었는데 안평대군이 쓴 무계동의 각자(刻字)가 남아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이곳에서 산정(山亭)을 세워 무계정사(武械精舍)라 이름을 붙이고 글을 읊고 활을 쏘는 등 심신을 단련 하였다 무계정사를 짓기 전에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고도 불렀는데 여름철에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고 기린교(麒麟橋)라는 다리도 있었다,
※ 석파정은 세검정 근처(近處) 부암동(삼계동)에 석파정(石坡亭)(석파는 대원군의 호)이 유명하다 이 정자(亭子)는 한말 고종의 부친인 흥성대원군이 철종(哲宗)때 권신(權臣)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인 삼계동정자가 있는 것을 김홍근으로부터 빼앗은 것으로 하루 밤 고종을 이곳에서 머물게 하는 계책을 새워 마침내 대원군 소유로 했고 석파정으로 고쳐 불렸으며 그 후 세습되어 이희, 이준, 이우의, 별장으로 사용되다 6, 25동란 후 천주교 주관의 콜롬비아 고아원에서 사용했었으나 지금은 개인 소유이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