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아세요? 우려 먹기 좋은 건
우엉차가 아니라...
내 글..
이 글은 정면이 X 백현이 스핀오프입니다.
맞아요
"백현이 후회물"
럽어겐 들어주시면 되겠습니다 :)
우리는 스물 하나에 만나, 9년을 연애했다. 혼담이 오가는 서른이 되었고, 친구들은 하나둘 씩 짝을 찾아 떠났다. 김정면하면 변백현. 변백현하면 김정면. 그 수식어가 이제는 닳고 닳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 되었다. 9년이라는 시간동안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데뷔할 때 그랬고, 내가 마음이 식었을 때도 그랬고.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다. 지금은 없으면 허전해서 같이 있는 걸까. 우리의 사랑의 크기는 얼마나 작아졌을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곤 한다.
“백현아.”
“.....”
“변백현.”
“.....”
오늘도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게임에 열을 내고 있다. 헤드셋을 벗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지 모니터에만 집중할 뿐이다. 우리 집은 거의 그의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물건으로 하나둘 채워나가기 시작하다보니, 누가 누구의 물건인지 구별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그게 9년이라는 시간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가 먹은 떡볶이 일회용기를 치우라고 그를 불렀다. 아빠 다리를 하고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아 씨..’, ‘아...’ 탄식을 내뱉으며 게임을 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변백현.”
“아, 잠만.”
응! 왜? 하던 것이 무엇이든 바로 대답하던 그는, 짜증 섞인 말투로 내게 말했다.
촬영을 마치고 피곤한 건 나였다. 오자마자 보이는 건 더러운 집 꼴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둔 윗옷에 샤워를 했는지 던져 놓은 수건들, 과자 부스러기, 빈 페트병,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짜증이 솟구쳤다.
“야.”
“아, 왜.”
“치우라고.”
“좀 있다가 치울게.”
핸드백을 툭 하고 던졌다. 모니터만 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왜?”
들어오자마자 왜 짜증을 내냐는 식으로 바라보는 저 태도.
“치우라고.”
“치운다고.”
“지금 치우라고.”
“잠시...”
“치우라고, 좀!”
“하 씨.”
결국 변백현의 캐릭터가 죽었고, 나를 올려다보는 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제가 어질러 둔 것들을 치웠다. 그도, 나도 서로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에 앉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로 봐서는 설거지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제대를 한지도 벌써 2개월. 별다른 일정이 없어서 변백현의 일상은 매번 똑같았다. 챙겨 먹으라고 밥까지 해놓고 가도 매번 배달음식. 그리고 새벽촬영이 끝나고 올 때까지 게임. 얼마나 오랫동안 했으면 컴퓨터에서 위이이잉- 하는 열이 돌아가는 소리가 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녁은.”
화장을 지우고 있는 나에게 딱딱하게 질문을 한다.
“생각 없어.”
내 대답에 알겠다는 듯 방문을 닫았다. 닫힌 방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곤 길게 한숨을 쉬며 화장솜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니, 말끔해진 거실에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는 변백현이 눈에 띄었다.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화장실로 가 대충 씻었다. 우리에게 오가는 말은 딱히 없었다.
“언제 잘 건데.”
“먼저 자.”
뚝뚝, 머리에서 흐르는 물기의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그와 나 사이는 고요했다.
“백현아.”
“응.”
“오자마자 짜증낸 거 미안해.”
“아니야. 내가 잘못했지, 뭐.”
뜨겁게 달아오르던 우리의 20대 초반, 그리고 점점 식어갔지만 여전히 뜨거웠던 20대 중반, 그리고 완전히 미지근한 온도에 도착해버린 지금.
“먼저 잘게.”
“응. 피곤할 텐데, 잘 자.”
헤어지는 방법을 몰라 헤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
헤어지고 나서의 내가 상상이 되질 않아 헤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연애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내 나이를 샌다면, 그와 인생의 반을 함께하고 있었다. 무서운 게, 두려운 게 컸다. 이제부터 내 인생에 변백현이 사라진다면. 그 가정을 부정하고 싶었으니까.
어두운 방안에 변백현이 사놓은 무드등의 빛만 나를 비추었다. 한 없이 좁아보였던 침대가 이젠 내게 넓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이 누워 있는 침대보다 혼자 누운 침대가 당연해졌다. 연애를 하면 할수록 상대방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하는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하는 걸까. 거실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다보니, 슬퍼졌다. 빛과 반대로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힘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정면아, 자?”
거실의 빛이 좀 환해지고,
“내가 미안해.”
“......”
“울지마.”
그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요즘 너도 나한테 짜증내고, 나도 너한테 짜증내서 그냥 많이 부딪쳤잖아. 내가 더 노력할게. 나 한 번 봐줄 수 있어?”
“.....”
“널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은 똑같은데, 우리는 왜 이렇게 엇나가려고 하는 걸까..”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그가 선물해 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연애 초기와 완전히 달라진 그에게, 연애 초기 때의 그를 원하고 있었을까. 내가 혼자 울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 오지 않은 게 원망된 걸까.
내 사랑의 크기는 10에서 30으로, 30에서 60으로, 60에서 120으로 배수로 커지는데 왜 그는 1000에서 900으로, 900에서 700으로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걸까.
“..백현아.”
“..응.”
“변하지만 말아줘.”
어떤 이유든 간에, 네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돼. 내 말에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인다.
“얼른 자.”
노력도 필요 없었다. 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연애는 10년차로 접어들며,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끝이 무엇이든.
/
→ 정면아. 나 오늘 찬열이랑 세훈이랑 술 마셔서 못 들어갈 것 같아. 찬열이 집에서 자고 갈게.
우리 사이에 이제는 일방적인 통보는 익숙한 일이었다.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폰을 뒤집었다. 한숨을 푹 내쉬니 상대 배우가 땅 꺼지겠네, 하는 농담을 해보였다.
“선배.”
“응, 왜?”
“선배도 6년 연애하고 결혼하셨잖아요.”
“그렇지. 왜?”
“결혼해야겠다는 계기가 있었어요?”
묻고도 뭔가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사랑하니까 하지.”
답이 뻔히 정해져있는 거였는데.
그 말에 머리가 울렸다. 그리고는 지끈지끈 아파왔다. 선배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사랑하니까. 네가 아니면 안 되니까.
“근데 정면아. 나도 그랬어.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게 맞을까? 이 사람의 익숙함 때문에 결혼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확신이 생기는 건 딱 결정적인 순간이더라고.”
“어떤... 순간이요?”
“내 인생에서 이 사람을 삭제해도 후회하지 않을까.”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가정.
“삭제해도 상관없으면 결혼까진 아닌 거고, 삭제하면 평생을 후회한다면 그건 자기의 인연인 거지.”
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서로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건 아닐까. 9년이라는 세월의 정 때문에, 그리고 당연하게 결혼할 거라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정말 나를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변백현과 결혼하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그 순간은 이제 없는 것 같다. 서로의 감정에 대해 무뎌져 갔고, 아무리 반짝이는 반지라도 세월이 지나면 닳기 마련이었다.
백현아.
저녁에 잠시 집에 올 수 있어?
→ 왜?
할 이야기가 있어서
→ 중요한 이야기야? 세훈이 휴가 때문에 곤란할 것 같은데.
→ 내일 얘기하면 안 돼?
아냐. 그래. 내일 이야기하자.
오늘의 말을 내일로 미룬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 알겠어. 내일 봐.
응
아 맞다. 나도 저녁에 경수 만나. 잠시 보기로 했어
→ 알겠어
알겠어. 그 말이 콕콕 찔렀다. 왜? 라는 말도 이제는 없는 거구나. 그와의 대화창을 한동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민석이 경수의 연락을 받고 다급하게 나왔다. 축 늘어져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자는 정면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준면이 형은?”
“걔 지금 해외라서 연락 안 될 거야.”
“나는 지금 바로 지방 내려가야 되거든? 백현이도 전화 안 받아서 일단 형한테 전화했어.”
민석이 곤란하다는 듯 경수와 정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 일단 부탁해... 진짜 미안.”
“정면이 집 비밀번호 알아?”
“......”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정면과 백현, 그리고 준면 뿐이었다. 하지만 준면과 백현은 전화가 몇 시간 전부터 불통이었으니.
“형 진짜 미안해. 내가.”
“아냐. 일단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넌 촬영하러 얼른 가.”
경수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며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수가 오기 전부터 이미 잔뜩 취해 있었던 정면이 계속 울기만 했다. 그 하소연을 들어주다, 새벽에 촬영이 있는 경수는 정면을 혼자 보낼 수가 없었기에 민석에게 도움을 청했고,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달려와 주었다.
경수가 가고 난 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퉁퉁 부어있는 정면을 바라보는 민석이었다.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에 살며시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변백현..”
나지막하게 부르는 그의 이름이었다.
민석은 한숨을 쉬며 일단 침착하게 다시 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예 꺼져버린 휴대폰이었고, 답답한 마음에 문자를 남겼다.
[백현아. 지금 정면이가 경수랑 술 마시다가 경수 촬영가고 내가 데리고 있어. 준면이도 연락이 안 돼서 일단 우리 집에 데려갈게. 이 연락 받으면 바로 연락해줘.]
정면아, 가자. 힘없이 축 처진 정면을 부축하는 민석이었다.
“..오빠.”
살며시 눈을 뜬 정면이 민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민석은 좀 정신이 들어? 질문을 했고, 고개를 내저으며 힘겹게 눈을 깜빡이는 정면이었다. 대학생 때 이후로 이렇게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마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혼자서 다섯 병을 마시고는 어지러운 듯 민석의 부축에 인상을 썼다.
“백현이랑 준면이 둘 다 연락이 안 돼서 내가 왔어.”
“....네..”
“혹시 집 비밀번호 얘기해줄 수 있어? 데려다 줄게.”
눈이 풀려 민석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정면이었고, 민석은 일단 차에 태우기 위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고 민석에게 의지해서 주차장까지 왔고, 뒷좌석에 태운 뒤 민석이 차 문을 닫았다. 운전석에 탄 그가 한 번 더 물었다. 정면아, 집 비밀번호 기억나? 비.밀.번.호. 또박또박 한 글자씩 이야기하니,
“010506....”
010506? 재차 확인하는 민석이었고, 정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도중에도 준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새벽 세 시라 그런가. 한숨을 쉬며 신호를 기다리던 민석이, 문득 세훈이 백현을 만난다는 것을 흘려 들은 것 같아 곧장 세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뭐야?
“너 지금 백현이랑 있어?”
- 어? 어.
“변백현 지금 뭐하는데?”
- 게임. 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변백현 휴대폰 확인 안 해?”
- 몰라. 지금 계속 게임 중이라서. 바꿔줄까?
“어.”
경수가 11시부터 3시까지 계속해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고 했다. 준면이야 해외에 있으니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자기 여자친구가 집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고 몇 시간 째 휴대폰을 보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 어, 형 왜?
“너 휴대폰 어딨냐?”
- 나 술집에 두고 왔는데, 아 찾으러 가는 걸 깜빡하고 계속 게임 중이었다. 왜?
“정면이 집 비밀번호 010506 맞아?”
- 그걸 왜 물어 보는데.
“정면이 데려다 주게.”
- 형이 왜 데려다주는데.
나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본인의 연애가 아니었으니 그냥 넘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너무 뻔뻔해보였다.
“경수랑 술 마시다가 정면이가 너무 취해서 내가 데리러 왔어. 준면이도 해외에 있고, 너도 경수 연락 안 받아서.”
- 아. 그래?
“비밀번호 아무튼 맞는 거지?”
- 어 맞아. 지금 어딘데?
“이제 거의 다 와 가.”
아. 그럼 형, 정면이 좀 잘 부탁해.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백현의 음성에 민석은 표정이 굳었다. 왜 취할 때까지 마셨는지, 다른 남자가 그 집에 들어간다는데도 너무 태연한 태도.
“백현아”
- 어.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정면이 많이 울었어. 네가 와 봐야 될 것 같아.”
마지막 기회.
- 알겠어. 게임 끝나고 찬열이집 말고 정면이집으로 바로 갈게.
술이 조금 깨서 통화를 듣고 있었던 정면은 백현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알겠다.”
민석의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통화는 종료되었다. 한숨을 쉬던 그가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있는 정면을 향해 바라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아냈다.
“혼...자 들어갈게요... 죄송해요.”
깜짝 놀란 그가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면아!”
차 문을 열고 나와 뛰어가다, 결국 중심을 잃고 넘어져버린 정면이었다. 민석이 그녀에게로 황급히 달려갔고, 까진 무릎에 피가 뚝뚝 흘렀다. 발개진 손바닥을 감추었다.
“..백현이가.... 변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그래서... 그래서, 제가 내일....”
“...정면아.”
“변하지말라고 했던 거 취소하고... 노력해달라고 하려 했어요... 근, 근데... 안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끝난 것 같거든요..”
사랑이 변할 때,
“...아니야, 정면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거.”
이 관계는 끝이 난다.
/
“...깼네.”
몇 시인지도 모를 해가 이제 뜨기 시작한 시각. 잠을 설쳤다. 30분이라도 잤을까. 누군가의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백현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일어나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언제 왔어?”
“방금.”
한 여섯시 반쯤 됐으려나.
“백현,”
“정면아.”
먼저 이야기해. 그의 음성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싫어. 먼저 이야기해.”
네 입에서는 안 나올 말이었으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으니까.
“정면아.”
“....응.”
“정말 고마웠어.”
그래서 너한테 먼저 이야기하라고 한 건데.
“내가.. 9년 동안 준 거에 비해 받은 것도 많았고, 너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 쉽지 않아. 그런데도... 자꾸 삼키지 않고 싶어서 이야기해.”
“......”
“널 만나서 웃는 시간이 훨씬 많았고, 널 만나서 내가 너무 행복한 사람임을 깨달았어.”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뭐라고 이야기해야 될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권태기라고 생각했는데,”
“.....”
“그냥... 예전과 같지 않은 내가 보이더라...”
변백현은 이미 마음 정리를 한 것 같아서.
“노력한다는 것도 거짓말일 것 같아서 못하겠어.”
“......”
“미안해. 정말로.”
멍청하게 그 말만 듣고 있었다.
“넌 아무 잘못도 없어... 내가 변해서 내가 나빠서 그런 거니까...”
“......”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9년간 사랑했던 사람이 내게 이별을 고하고 있다. 난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 그리는 미래 말고는 내 미래는 없었는데.
“평생 벌 받을게..”
“......”
“...정면아.”
내 손을 잡는다.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동시에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이젠 더 이상 빛나지 않는 반지를 빼냈다.
“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그에게 반지를 던지듯 건넸다.
“정면아...”
“내 이름 부르지마.”
“.....”
“제발 그냥 가.”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사랑 앞에 자존심을 내세우는 사람은 진짜 이해되지 않았는데,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난 전혀 다른 생각으로 그에게 해줄 말이 있었다는 것도, 이별은 내 손이 아니라면 끝나지 않는 거라는 것도, 그냥 모든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정말 미안해...”
“제발! 그냥 가!!!!”
그렇게 잔인할 거였으면 그냥 미안하다는 소리도 집어 치우고 가!
눈물이 눈가에 떨어질 것처럼 고여있었다. 변백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
“......”
정적이 찾아왔다.
무슨 심보인지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몇 분을, 몇 십분을. 결국 내가 버티지 못하고 그를 밀쳐내고 신발도 신지 않고 눈물을 닦아 내며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나를 따라오는 듯 그가 정면아! 그렇게 크게 외쳤다.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무작정 아무거나 눌러 내렸다. 지하 2층 이었고, 한숨을 쉬며 쭈그려 앉아 눈물을 참다 결국 터졌다.
“정면아.”
왜 네가 아닐까.
“......”
그 마음뿐이었다.
내가 걱정됐는지 계속 지하주차장에 있었던 김민석이 나를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비상계단 문이 열리며 변백현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내 신발이었다.
“...김정면.”
내가 어떻게 널 내 인생에서 삭제할 수 있을까.
“......”
그런데도,
“...갈게.”
내게 신발을 놓아주고 뒤도는 그의 뒷모습에,
“....가지마. 변백현. 너 진짜 나랑 끝 아니잖아.”
애써 너의 앞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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