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말씀 나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아트 뮤지엄(Art Museum)에 가면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이 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은 좀 독특합니다.
어떤 것은 어린애가 장난한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성의 없이 낙서한 듯한 작품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피카소의 작품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쌉니다.
1943년 어느 날 길을 가던 피카소가 버려진 자전거를 발견하고 그 자전거에서안장과 핸들을 떼어내어 안장에다 핸들을 붙여 만든 작품‘황소머리’라는 작품은 런던 경매 시장에서 약 300억 원에 팔렸습니다.
그 누군가 버린 쓰레기가 피카소의 손에 닿자 보물로 변했습니다.
쓰레기와 같은 가치를 가졌지만 피카소의 손길에 닿아 돈으로 환산 할 수도 없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 작품이 되었듯이 누구의 손이 닿느냐에 따라 물건의가치가 달라집니다.
심지어는 작품이 아니고 어떤 사람의 소유였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사례도 있습니다.
오래 전 러시아에서 다 망가진 탁자와 펜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쓰레기통에서 주워 놓았다가 창고 세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물 탁자와 만년필이 무려 1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 탁자와 펜이 러시아 최고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쓸 때 사용한 탁자와 펜이란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인생 또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들이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그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귀한 가치를 회복하며 또 인지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 사람이 장가를 들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두의 축복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애굽 왕의 정치적인 속내에 희생양이 된 민족, 박해 받던 히브리인이었던 부모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격변의 시기로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의 사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전을 보장하던 서부 셈족인 힉소스 왕조가 정권을 잃고 애굽의 토착왕조인18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학자들과 성서 고고학자들은 노예로 애굽에 팔려왔던 요셉이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요셉과 같은 서부셈족인 힉소스 족이 애굽을 통치했을 무렵이거나 힉소스 통치 이전의 애굽의 중 왕국 시절에나 가능한 이야기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힉소스 왕조 시대 이전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증거 본문으로 창세기41:14에 요셉을 감옥에서 불러낼 때 수염을 깎고 바로 앞에 나아갔다는 부분을 언급합니다. 셈족은 수염을 깎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힉소스 왕조라고보기 보다는 다른 문화를 가진 애굽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특히 창46장에 애굽 사람들이 목축을 가증하게 여긴다는 부분을 볼 때, 유목민족이었던 셈족이 목축을 가증하게 여겼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므로 힉소스 왕조 이전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요셉은 애굽의 중 왕조 시대에 총리가 되어서 중 왕조 시대와힉소스 왕조를 지내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총리로서 지위와 명예를누릴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를 고려하면 파격적인 대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으로 인해 조성된 이스라엘의 안전은 100여년 정도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호적이었던 힉소스 왕조가 애굽을 점령할 때 전차와 기마병에 의해 기동전을 벌여서 점령했으며 이러한 절술에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애굽의 토착 왕조들은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애굽의 토착왕조들은 힉소스 왕조가 100여년을 지내고 있는 기간 중에 힘을 길러서 결국은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었습니다. 애굽에 토착 왕조가 그 정권을 잡음으로 인해 힉소스 왕조의 도움과 보호를받아서 번영을 누렸던 이스라엘에게 불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애굽 토착왕조의 백성들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더 많음으로 인해, 새로운 왕조는 그들과 적대적이었던힉소스 왕조와 우호적인 이스라엘을 위협요인으로 손꼽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출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력으로 인해 왕조를 빼앗겼던 뼈아픈 기억을 가진 애굽의 토착 왕조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노동력과 유사시 군사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특단의 조치를 감행합니다.
아이를 낳아서 딸이면 살려두고 아들이면 나일 강에 던져 넣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미래에 대한 살생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살생 명령은 자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화시키려는 속셈이 깔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애굽의 정책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힘 있는 영웅이 아니라 십브아와 부아라는 이름을 가진 힘없고 사회적 지위도 낮은 산파였습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아와 부아라는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십브아와 부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의 항명을 알게 된 바로는 그녀들을 불러 책임 추궁을 합니다.
여차하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녀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셔서 애굽의 바로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이와 같이 책임을 면할 수 있는 변론함으로서 그녀들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자신의 계획을 성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바로는 군사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바로의 조치는 당시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겨우 세운 신왕조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으며, 그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조치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고핫 자손 아므람은 그 아내 요게벳을 통해서 아들을낳았던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살생 명령으로 인해서 갓 태어난 모세를 지켜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쉽게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를 낳은 후에 어떻게든 아이를 숨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랄수록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석 달이라는 시간동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 모세를 바라보던 요게벳은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여 아주 작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애굽의 갈대는 파피루스라 부르는데 우리 나라 갈대처럼 작은 것이 아니라소형 배를 건조하여 지금의 쾌속선으로 활용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요게벳은 이 파피루스로 만든 갈대 상자에 아이를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두었습니다.그리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이 아이의 안전을 염려하여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나일 강으로 목욕하기 위해 내려 왔다가 갈대 사이에 있던 갈대 상자를 발견하였습니다.
공주는 시녀들에게 갈대상자를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시녀들이 가져온 갈대상자를 열어보니 참으로 예쁘고 귀여운 남자 아이가 누워 있었습니다.
공주는 그 아이를 보고 한 눈에 히브리인의 아이 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럼에도 공주는 그 아이를 볼 때 불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미리암이 순발력을 발휘하여 바로의 공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공주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공주가 미리암의 말을 듣고 흔쾌히 허락하여 줍니다. 애굽의 공주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유모로 고용하면서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말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을 보면, 아이의 유모를 고용하고 삯을 주는 고용 계약서와 같은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애굽에서는 여자라 할지라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 요게벳이 모세를 부르는 이름이 있었겠지만 법적인 권리를 가진 바로의공주가 지어준 모세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애굽인들에게 나일 강은 수많은 애굽 신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사테트는 나일강의 범람의 여신으로 애굽의 남부지역에서 전쟁과 사냥, 그리고 다신의 여신으로 숭배 받았습니다.
또한 개구리 모습을 하고 있는 ‘해케트’도 생명과 다산의 여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사테트와 해케트는 나일강을 상징하며 다신과 창조의 신으로 숭배하였던 애굽 남부의 수호신인 크놈신의 두 배우자로 생각되었습니다.
아스완의 크놈 신전과 엘레판틴 섬에 있는 사테트 신전에서 나일강과 관련된우상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산의 여신으로 숭배받는 우상의 근거지인 나일 강에 목욕을 하러 나온 바로의 공주는 단순한 목욕이 아니라 어떠한 의식 차원에서 나일강에나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궁중 안에서도 충분히 목욕을 할 수 있었으며 세계 실내 목욕 문화의 발상지가 애굽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일강변에 만들어진 애굽의 대중목욕탕은 종교의식을 앞둔 애굽인에게 목욕은 의무적인 절차였습니다.
따라서 바로의 공주가 나일강으로 나와서 모세를 발견하고 히브리인들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건져 자신의 아들로 삼은 것은 이러한 나일 강과 연관되어있는 우상숭배에 영향을 받았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애굽에서는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필수요소로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의 책(사자의 서)이라는이집트 문서에 의하면, 모든 죽은 자들은 오시리스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곳에서양심을 상징하는 죽은 이의 심장 무게를 저울에 다는데, 깃털보다 심장이 무거운 사람은 죄가 많은 것으로 판단되어 아뮤트에게 심장을 먹히게되지만,착한 사람은 오시리스의 왕국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오시리스에 관한 신화에서 강조하는 선한 일 때문에 바로의 공주가 히브리인 아이를 입양하는데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을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정서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모세가 태어나서 그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공로가 클까요?
아이러니하게 모세의 생명을 구원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여인들입니다.
조금 앞의 구절에 보면, 히브리 산파 십브아와 부아, 그리고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의 활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바로의 공주와 그 시녀들도 모두 힘없는 여인들이지만 강한 힘을 가진 바로의 명령에 대항하여 한 생명을살려 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히 벌어진 일이겠습니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여하심이 아니었으면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닙니다.
여러분!
모세가 생명을 건진 비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그 아들의 목숨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렸을 때, 실로 신묘막측(神妙莫測)한 방법으로 관여하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요게벳이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모세를 지키려 했다면 결국은 군사들에게 발각되어서 그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요게벳에게 지혜를 주시고, 애굽의 우상숭배의 문화까지도 이용하심으로 바로의 공주에게 모세를 물에서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바로의 공주에게 월급을 받아가면서 공식적으로 드러내놓고 모세를 히브리인의 아들로 그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당당하게키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생명을 해하려는 바로의 공주가 오히려 모세의 생명을 보호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라!’는것입니다.
무엇을 맡겨드려야 할까요?
우리는 살다가 직면하는 크고 굵직굵직한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소소한 문제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돈 문제, 자녀의 교육 문제, 부부간의 갈등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등의내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일들 중에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먼저 이성과 감성의 판단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관여하실 수 있는 틈이전혀 없습니다.
어쩌다가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온 문제들은, 내 힘에 부치는 크고 굵직한 문제들도 어느 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힘으로 하다가, 안되면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가고, 그래도 안 되면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하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여전히 내가 주인 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맡겨드린다는 것은 나의 소유권, 나의 통치권이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실제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내 자신이 예수님의 종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술로는 예수님을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맡겨드리는 것은 내가 생각할 때 불가능한 것들이나 이루어지려면 아주 먼 미래의 것들을 주로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내 문제의 해결사나 도깨비 방망이로 이용하려는 심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나의 주인이시자 구원자이시라면 내 자신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 또한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것은 내 마음대로 하고, 어떤 것은 주님께 드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100% 주님 손에 드려야 합니다.
제가 한 7-8년 전에 트럼펫을 처음 구입했습니다.
트럼펫 동호회에도 가입하여 열심히 트럼펫을 불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연주하는 분들의 소리는 너무나 경쾌한데, 제가 내는 소리는 영 듣기 거북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가지고 있는 트럼펫과 제가 가지고 있는 트럼펫의 메이커가 달라서 악기가 문제인가... 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동호회 총무님이 제 트럼펫이 엔틱하니 예쁘다고 한번 불어보아도 되겠냐고 물어보십니다.
흔쾌히 허락하면서 뭐 좋지도 않는 트럼펫인데... 하면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제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음악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충격이었죠. 트럼펫이 문제가 아니라 연주자가 문제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준 사건입니다.
그 총무님이 제 트럼펫의 음색이 너무나 좋다고 이런 트럼펫은 시향 같은 곳에서 클래식 음악을 할 때 사용해도 손색이 없이 어울릴 것 같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그렇게 좋은 트럼펫을 저는 고물취급을 했으니 얼마나 우둔합니까?
초보자의 손에 들린 악기가 그 역량을 다 발휘하기 못하였지만, 고수의 손에들릴 때 본래의 음색을 되찾을 수 있었듯이 우리의 삶도 연약하고 힘없는 우리 스스로가 운행할 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주님 손에 맡겨드릴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 하나님의형상을 닮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손에서는 실패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는 사명을 주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처럼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손수 손으로 빚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그 어떤 피조물보다 더 많은 정성과 애정을 들여 하나님이 형상을 담은 귀한 작품으로 빚으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생령을 불어넣어서 하나님과 동역하는 아주 특별하고 귀한 관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창조의 본래 목적에 맞는 우리의 본래 가치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인간들의 소유가 본래 누구였습니까?
내 자신이었습니까?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이셨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드린다는 것은 원래 내 소유인데 하나님께 드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던 나를 본래의 자리에 다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본래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가는 것이 주님의 소유권이내 삶에서 회복되는 것이며 진정한 회개입니다.
오늘 물에서 건진 자 또는 물에서 얻은 자 라는 뜻을 가진 ‘모세’라는 인물을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확인하였습니다.
온전한 회개를 통해 우리의 소유주를 찾아가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정체성을 되찾는 첫 걸음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공동체적인 마인드들이 사라지고 오직 나만 남아서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가는 시대에 우리의 참 주인이시며 창조자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매인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 찬양]
주님 내 길을 잘 아시고(F)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F), 생명 주께 있네(G) 주님 한 분 만으로(G)
주님 손에 맡겨드리리(F),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F)
[결단의 찬양]
요게벳의 노래(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