香餌之下必有死魚 물고기는 향기로운 미끼에 낚여서 죽는다.
石西手稿
石西手稿
京行路中與蒼史兪益卿共賦 乙酉正月
서울 가는 길에 유익경과 함께 시를 짓다. -을유년 정월
碧雲海國已春聲 生世隨緣又此行 群蟄寸驚消雪色 新苗欲坼(탁)記花名 一宵聯枕留光岳 千里揮鞭上洛城 報道南湖消息好 棹(도)歌初發水盈盈 自光山發行
하늘은 푸른 구름으로 뒤덮이고 나라는 이미 봄의 소리로 가득하다. 이 세상에 나서 바람이 일면 물결이 일렁이듯 마음 가는 대로 이 길을 간다. 겨울잠에 빠져 있는 무리들 놀라서 깨고 눈빛은 녹아 사라진다. 새싹은 금방이라도 돋아날 낌새고 그 꽃 이름을 더듬어 기억해 낸다. 하룻밤 꼬박 光岳에 누어 머물고, 이른 아침 채찍을 휘두르며 천리나 되는 서울 길을 오른다. 고향에 소식을 전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으련만, 뱃노래 소리는 비로소 들리고 강물은 철철 넘쳐흐른다. -光山을 출발하며
山家寥寂有雞聲 千里䡖(輕)裝信馬行 春雁來時多客夢 午煙凝處問村名 老僧杖錫歸雲堅 上舍詩篇動海城 暖律方生雪初盡 野塘水色碧盈盈 蒼史
쓸쓸하고 한적한 산 속 人家에 닭울음소리 들린다. 가는 천리길 홀가분한 행장이라 조랑말 힘들지 않다. 객지에서 봄날 꿈에 자주 기러기 날아온다. 저녁 무렵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의 이름을 묻는다. 노승은 지팡이를 짚으며 구름 낀 고개 마루를 넘어 돌아오는구나. 거처에 올라 풍경을 바라보니 시편들이 광대한 성채처럼 떠오른다. 마음속 온화한 시편이 사방에 흩어진 殘雪을 녹이는구나. 들판의 연못 물색은 검푸르고 가득 차 넘친다. -창사
客路逢新占物華 綠堤十里柳行斜 石棹千年通地脈 金城數疊護人家 每夜同看湖上月 一春先到洛陽花 行人止宿元無定 何處靑烟帶晩霞 潭州店午發窆
여행길에 묏자리를 새로 잡는 풍경을 마주쳤다. 풀들이 자란 긴 언덕 위로는 버드나무가 비스듬히 늘어서 있다. 床石은 천년 동안 지맥과 통하고, 쇠로 만든 견고한 성은 오래도록 人家를 지킨다. 매일 밤 함께 호수 위에 비치는 달을 바라본다. 봄이면 낙양의 꽃이 가장 먼저 핀다. 먼길을 가는 사람 잠시 머물러 쉴 곳을 찾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 검푸른 연기가 저녁놀과 어우러진다. -담주의 한 주막을 오후에 떠나다.
離思遙落望京華 潭府孤城夕日斜 新柳東西呼酒客 疎林上下讀書家 片帆夜渡滄江月 匹馬春期紫閣花 山畔村容堪供函 兩三茅屋帶晴霞 蒼史
이별을 슬퍼하는 생각으로 서울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희망이 사라져 아득하고, 외딴 성의 깊은 연못 속으로 석양은 지네. 새잎이 푸른 버드나무는 여기저기로 주객을 부르고, 숲 속에는 책을 읽는 사람들뿐이네. 밤중에 돛을 기울여 바람을 받으며 푸른 강물을 건너는데, 강물에 달빛이 비치네. 봄날 한 필의 말로 떠나는 길, 隱者의 처소에 꽃이 피었네. 산 마을 논두렁은 느긋하고 즐거이 술잔을 건넨다. 이엉을 얹은 두서너 채의 지붕들 뒤로 맑은 하늘에 저녁놀이 붉다. 蒼史
叢篁老柳一庭方 小小池臺小小堂 古驛逢人多面熟 新年爲客計程長 戱劇歌聲聞小鼓 令嚴詩罰怕深觴 野靜方能安歇泊 浮生一日異閉忙 淳化方築夜宿
집 뜰 맞은편에 빽빽한 대나무와 오래된 버드나무 하나. 작은 연못과 작은 집, 그 오래된 驛站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 낯익은 이가 많다. 새해 나그네의 계획된 여정이 멀기만 하다. 어디선가 작은북을 치며 웃고 떠들썩하게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하고 깊은 술잔. 들판은 적막하고 처소는 심신을 편안히 하여 쉬어 머물만 하다. 아! 덧없는 인생, 낯선 곳에서의 하루는 저물고 아득하기만 하다.
一宵投宿碧山方 依樹傍岩築小堂 水闊晴潭魚子出 雪消春畝麥芽長 遠客携詩花載𨋀 村婆傳酒尾爲觴 又待淸晨催秣馬 歸裝何處不奔忙 蒼史
하룻밤을 여관에서 묵고 푸른 산을 향한다.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바위 곁에 작은 집을 짓는다. 물길은 확 트이고 화창하게 갠 날, 물 속의 어린 물고기들은 나와 헤엄친다. 구름은 흩어져 보이지 않고, 봄날 밭이랑 보리 싹은 크게 웃자랐다. 먼 길 떠나온 나그네 시를 읊으며 가늘 길마다 꽃이 활짝 피었다. 시골 노인네가 건네주는 술은 대나무 밑동으로 술잔을 삼는다. 또한 맑은 첫새벽 녘을 기다려 재촉해 말 여물을 먹이고, 떠날 차비를 하는데 어느 곳인들 바쁘지 않겠는가.
珌馬凌晨去若飛 淳州山色正依微 池邊畵閣凝香出 柳外仙槳錦纜歸 千里行裝携墨卷 十年事業傀塵衣 江南野老知春及 畚鍤村村帶晩暉 曉發過淳化邑
한 필의 말로 새벽 일찍 나서는 길이 나는 듯 하다. 淳州의 산 빛깔이 참으로 어렴풋하고, 화사하게 채색한 연못가 누각을 향긋한 향기가 감싸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버드나무를 벗어나 신선 지팡이 같은 상앗대와 비단 닻줄의 배를 타고 되돌아간다. 천리 행장으로는 묵과 서책을 챙겼을 뿐이다. 십 년 동안 해 온 일은 크기만 하고 나들이옷은 속세의 떼로 더렵혀졌다. 강남의 노인은 봄이 이미 이르렀음을 아는지, 마을마다 삼태기와 삽이 저녁 햇빛을 두르고 있다.
畵閣翼然勢若飛 軟風吹霧滴霏微 計路休言千里遠 望鄕共伴早春歸 茅店馬嘶殘月曉 峽天雪透白綿衣 穿林過壑登蘆嶺 喔喔村鷄已午暉 蒼史
화사하게 색을 입힌 누각의 자태는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비상하는 듯 하고, 솔솔바람이 안개를 흩뿌려 이슬비라도 내리는 듯 방울져 맺힌다. 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말하기를 천리는 멀고도 멀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벗과 함께 가는 길, 벌써 봄은 왔다. 주막 말이 울고 있는 새벽 하늘에 달이 떴다. 산꼭대기 눈은 밝아서 흰 무명옷 속까지 비친다. 거친 숲을 뚫고 험한 골짜기를 지나서 蘆嶺을 오른다. 닭들이 소리 높여 우는 마을은 이미 대낮처럼 밝다.
逶迤峽路太間關 萬朶仙雲手可攀 地似羊膓多白石 侍從馬首惜靑山 漁人泛泛春江濶 樵叟丁丁夕照還 九折靑泥君莫歎 艱危閱盡始安閒 午飯蘆嶺向葛覃
구불구불 비탈진 산 속의 길은 매우 험하여 걷기가 힘들다. 온갖 초목의 가지와 휘몰아치는 구름을 붙잡고 오른다. 길은 양 창자처럼 꼬불꼬불하고 수많은 하얀 돌이 박혔다. 靑山을 향해 머리를 치켜든 侍從馬가 애처롭다. 어부는 강물을 漂流하며 아득히 멀어지고, 저녁 무렵 나무꾼의 나무 찍는 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려 퍼진다. 땅이 하도 구불구불하고 질퍽하여 그대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어렵고 위험한 길에 대한 준비를 애초에 다했다면 편안하고 여유 있지 않았을까.
三宿行裝已禪宵 曉風吹秧拂飄飄 千岩雲水支離盡 大府完山咫尺遙 過路穿如巴錦峽 新詩題似漢仙橋 主人勸我三盃又 酒力春寒恐易消 曉發鍮店向完山
삼일 동안 머물고 길 떠날 채비를 마치니 이미 고요한 밤이다. 동틀 무렵 스치는 바람에 어린 모가 산들산들 나부낀다. 깊은 산 속의 구름과 물줄기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 흔적 없이 사라진다. 큰 고을 완산까지 조금은 멀기만 하다. 산길 헤치고 가는 길, 巴지방의 골짜기처럼 아름답다. 새로운 詩題가 떠오르니 漢의 仙橋와 같다. 놋그릇 가게 주인이 술을 권하여 또 석 잔을 마신다. 술기운에 봄날 추위도 놀라서 쉬 사라진다.
各都二月動春和 淡靄輕風微雨過 煙野蒼茫天外盡 酒樓次茅柳邊多 古碑有字賢僕跡 忮閣流丹逝者波 客子斜陽歸路達 望京臺上意如何 蒼史
각 고을마다 2월 봄날 움직임이 화창하다. 엷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봄비는 보슬보슬 내린다. 들판에 피어오르는 연기는 넓고 먼 아득한 하늘 밖까지 닿을 듯 싶다. 술집 근처에는 띠가 자라고 버드나무가 주변에 많다. 옛 비석에 賢僕이라는 글자의 자취가 남아 있다. 나라를 거역한 죄로 붉은 피로서 휩쓸러 간 죽은 자의 험난했던 삶. 아! 나그네는 해가 저무는 길을 따라서 정처 없이 되돌아가는구나. 望京臺에 올라 품었던 뜻은 어찌하였을까.
驛樓達子出山門 流水中分共一源 雨歇支離湖上路 煙消的歷柳邊村 海天雲拕鴻過影 野渡泥瀜馬踏痕 報道壺山春色好 燖魚忮倒兩三樽 早飯參禮驛達嚴叔輔發向礪山
역참 누각에서 지리에 밝은 사람에게 물어 산 어귀를 빠져 나와 마을로 들어섰다. 흐르는 물은 반으로 갈라도 모두 근원지는 같다. 비는 그치고 물길이 갈가리 갈라져 호수 위로 길이 났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지어 또렷하게 보이는 버드나무 주변 마을은 마냥 한가롭다. 푸르른 바다 하늘에 끌어다 놓은 구름은 기러기가 지나가는 형상이다. 말이 밟고 지나치는 물길이 넓고 질퍽한 들판은 자국이 남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이 壺山의 봄 색깔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불에 굽는 고기를 뒤집어 뜯고, 둘이서 술 세 통을 흥건하게 비웠다. -삼례역에 도착해 아침을 일찍 먹고 嚴叔輔가 여산을 향해 출발하다.
忽忽行裝又出門 門前流水不知源 春山盡是詩中物 野草還生燒後痕 古驛無人曹識面 一鞭如夢宿來村 歸家釀得看花酒 欯滿莊周五石樽 蒼史
갑작스레 행장을 갖추고 또다시 문을 나선다. 저기 문 앞으로 흐르는 물의 근원지는 어디쯤인지 알 길이 없구나. 봄의 생기는 온 산에 가득하고 만물은 이 글 속에서 요동친다. 저 들판의 온갖 초목은 환생하여 곧 불살라진 후 흔적만이 남는다. 옛 역에는 인적이 뜸하고, 마을은 한번 다녀가 본 적이 있다. 말등에 채찍을 휘두르며 꿈길을 가듯 마을을 찾아 들어가 잠 속으로 빠져든다. 집으로 돌아가면 花酒라도 빚어 놓았다가 손님에게 대접하고 싶구나. 莊周의 다섯 개의 돌 술통이 가득 하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
皇華亭過卽湖西 兩界人煙限一溪 白馬鳴聲滄海去 酉龍飛舞碧山樓 和風穩養花胎軟 宿雨初醒柳眼迷 詩上稿椎猶未定 行行不記路高低 午飯皇華亭向恩津
황화정을 지나치면 곧장 湖西지방이다. 양쪽 지방을 가로지르는 실개천 따라 인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흰말의 울음소리는 넓고 커다란 바다 멀리 울려 퍼진다. 날이 저물어 푸른 산마루 위로 용이 날며 춤을 춘다.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와 잘 자란 꽃봉오리가 보들보들하다. 어제 밤부터 내리던 비가 아직까지 깊은 잠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버드나무를 깨운다. 詩想이 떠오르도록 무지 노력하지만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해도 높낮이 운율이 쓰여지지 않는다. -오후에 皇華亭에서 점심을 먹고 恩津을 향하다.
南濟橋頭一笑西 東風獵獵柳搖溪 千林雨過如蘇病 百鳥春生自定棲 白馬江聲緣野轉 酉龍山色出雲迷 逢人試問投休處 一抹炊煙老屋低 蒼史
南濟橋 부근을 지나치다 서쪽 하늘을 쳐다보며 한바탕 웃는다. 동풍이 실개천 주변 버드나무를 뒤흔들고 지나친다. 울창한 숲에 봄비가 내리니 마음의 병이 다 낫는 듯 후련하다. 봄에는 수많은 새들이 태어나 스스로 둥지를 찾아 들어간다. 白馬江 물 흐르는 소리는 강줄기 따라 저 들판으로 울려 퍼진다. 酉龍山의 푸르스름은 더해 가고, 산등성이 걸쳐 있는 구름은 야단스럽다. 길에서 마주친 이에게 별 뜻 없이 쉬어 갈 만한 곳을 물어 그곳을 바라보니, 어느 노인네 집의 지붕에 밥짓는 연기가 낮게 깔려 머물러 있다.
迢迢迢客店暮煙生 疲脚纔投病忮晴 南國江山如過夢 西湖風物各稱情 春來萬樹恩波浹 夜點新茶活火明 預料淸晨催馬發 扁舟直渡大江橫 夜宿恩津
날이 저물며 아득히 먼 客店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여장을 풀어 피로한 다리의 통증을 떨쳐 버리니 마음이 한결 개운하다. 南國의 江山이 꿈인 냥 지나쳐 간다. 西湖의 風物은 제각기 마음에 맞다. 봄의 생기를 머금은 나무들은 발랄하고, 출렁거리는 강물은 유난히 활기차다. 한밤중 새 찻잎을 볶는 불꽃이 활활 타올라 밝다. 미리 짐작컨대 맑은 첫새벽에 일어나 재촉해서 말을 출발시켜야, 작은 배라도 타고 큰 강물을 가로질러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中和初吉養花天 行度靑山綠水邊 千劫猶存觀燭佛 十年回想宿風煙 豪歌痛飮尼城酒 忮意催登錦浦船 艶子靑春詩步健 長楸走馬看鞭先 早發向擎天店
세상 가득 꽃들이 피어나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의 봄날. 가는 곳마다 산과 강물은 푸르다. 永劫의 세월, 깊은 사색으로 주위를 살피며, 어렴풋이 타는 촛불처럼 지나간다. 십 년을 回想하니 저 멀리 보이는 흐릿한 기운처럼 머물러 있는 듯 하다. 이 밤 한바탕 실컷 노래를 부르며 尼城酒를 흠뻑 마신다. 뜻을 굳게 먹고 금포선에 오른다. 이 아름다운 푸른 봄날 시를 읊으며 걷는 걸음걸이가 힘차다. 커다란 가래나무 사이로 채찍을 휘두르고, 바삐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앞질러 간다.
困睡纔醒出午天 長程去去正無邊 四脚翩翩當走馬 一身瀁瀁似乘船 峽路春寒猶有雪 柳條雨歇半和煙 此行堪供湖山畵 君馬我車爭後先 蒼史
오후에 겨우 피곤한 잠에서 깨어나 나왔다. 멀고 먼 여정 가도 가도 정히 끝닿는 곳은 없다. 이놈의 말은 네 발이 훨훨 나듯 잘도 달리는구나. 이 몸은 끝없이 넓은 강물에 승선하듯, 험준한 골짜기를 오르니 봄의 한기가 여전하여 눈이 채 녹지 않았다. 비가 멎은 뒤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 가득 한창이다. 지금 가는 길은 호수와 산을 화폭에 담기에 그만이다. 그대의 말과 나의 수레가 뒤서거니 앞서거니 다투듯 달린다.
二月湖天遠客遊 棹歌蕩瀁木蘭舟 山迎水送淸無賴 酒到詩成判不愁 幾處雲屛攀翠壁 四回粉堞擁丹樓 曲江花柳來時約 誰復題名最上頭 午發向錦江
2월 호숫가 하늘 아래 먼길 떠나온 객이 거닐고 있다. 어디선가 넘쳐흐르는 강물 따라 노 젓는 어부의 흥얼거리는 노랫가락 소리. 山水를 맞고 떠나 보냄을 업으로 삼아 邪念과 눈앞의 이익을 좇지 않는다. 이내 술이 도착하고 시를 지으니 아무런 걱정거리 없구나. 저 곳의 구름은 병풍처럼 드리워진 비취색 암벽을 타고 피어올라, 네 차례 석회를 바른 성가퀴 주위를 돌아 붉은 망루를 끌어안는다. 굽이굽이 강물 따라 꽃과 버들이 약속된 시간을 어김없이 피어난다. 누가 거듭 정상의 암벽에 자기 이름을 새겨 놓았는가.
錦江江上白雲遊 立馬汀洲喚小舟 雨歇明沙和雲色 氷瀜群鷺送寒愁 漁 人收釣歸煙浦 逆旅尋春上酒樓 渺渺鄕山何處是 夕陽前路更回頭 蒼史
금강 상류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간다. 강가 모래톱에 말을 세워 두고 작은 나룻배를 부른다. 비가 멎은 뒤 펼쳐진 모래는 더욱 곱고 맑으며 구름 색은 온화하다. 얼음이 녹으며 추위에 대한 근심을 떨쳐 버린 백로 떼들이 날아든다. 어부는 낚싯대를 걷어 들이고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강가 마을로 돌아간다. 客舍에 여장을 풀고 좋은 술집에서 오는 봄을 생각한다. 고향의 산천은 아득하고 멀어 여기서 어디쯤인가. 동구밖에 석양이 지니 다시 머리를 돌린다.
詩入名區未易詩 旅燈剔盡夜遲遲 良辰初記生花日 客地相逢舊雨知 夢與閒鴗隣水國 身同疲馬息鞭枝 白頭猶有淸狂習 又向江壚一中之 野宿錦江逢全州吳榮燮朴龍萬申泰翊諸益
시인이 이름난 고장에 발을 들여놓으니 시 쓰기가 쉽지 않구나. 객사의 등잔 심지를 돋우어 환하게 밝히니 밤이 더디게 깊어 간다. 봄날 처음으로 꽃이 피어난 날짜를 기록한다. 객지에서 오랜 벗을 만나니, 꿈에 이웃 용궁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쇠새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이 몸처럼 말도 지쳐 있어서 쉬게 하고 채찍은 버팀목에 놓는다. 野人은 청아한 멋을 알고 상식에서 벗어난 언행을 일삼는 사람이라, 모두 강변 주막을 향해 한 마음이 된다.
欲寫離懷每有詩 客囱夜色故遲遲 驛路一旬多遠夢 江樓此日有新知 店女挑燈誇酒債 野翁折柳補籬枝 漁人不似行人苦 一葉扁舟任取之 蒼史
이별의 회한을 없애려 하지만 늘 詩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객사의 天窓으로 흐르는 밤의 경치가 참으로 더디다. 역참까지 열흘 걸려 가야 할 길은 너무나 멀어 흐릿한데, 이날 이곳에 강나루가 있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주막 아낙네는 등불을 돋워 주위를 밝히는데 술값으로 진 빚은 지나치다. 시골 늙은이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울타리를 고친다. 어부와 길을 걷는 사람의 고통은 서로 다른 것일까. 하나의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간다.
一山行盡一山高 匹馬淩晨氣正豪 水暖游魚皆得計 春生鳥語不知勞 行吟最喜逢佳節 痛飮那能用小槽 蒼史
(尾聯未就余笑曰君亦貌不足耶蒼史笑曰東坡云但掛酒壺那計盞偶題詩句不須編何必編尾聯耶)
어느 산이든 정상에 올라 봐야 그 산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벽에 한 필의 말을 몰아 달려가니, 그 기상 참으로 호탕하다. 강물은 맑고 따사로워 물 속에서 유유히 헤어쳐 다니는 물고기 모두 헤아릴 수 있다. 봄에 만물은 소생하고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지칠 줄 모른다. 길을 거닐며 시를 읊으다 보면 아름다운 구절에 이르러 가장 희열을 느낀다. 술을 흠뻑 취하도록 마시고, 어찌 작은 술통이 쓸모 있겠는가.
(마지막 연을 짓지 못하자 내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역시 사물의 형상화하는 능력이 부족하네 그려.” 이에 창사 웃으며 말하기를 “소동파가 이르기를, 단지 벽에 술병이 걸려 있거늘, 어찌 잔을 셈할 것인가. 마음으로 가늠할 수밖에. 때때로 시의 제목에 따른 詩句를 전부 기록할 필요는 없다. 그러하니 어찌 마지막 연을 반드시 기록하여야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浮生到處是蘧廬 峽路盤回萬木踈 故國天寒歸雪鴈 新年春暖上氷魚 來頭風物皆稱意 過境雪山似步虛 回首南關消息杳 家中欲寄一封書 午過車嶺
떠도는 인생 가닿는 곳은 저기 초라한 주막이로구나. 수많은 나무가 우거진 좁은 길을 돌아 나오니 이제야 눈앞이 확 트였다. 저 기러기들은 눈 내리고 추운 머나먼 고국으로 돌아간다. 새해 봄날이 따뜻해지니 어름 속에 갇혀있던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뛰어오른다. 지금부터 보게 될 모든 풍경은 이내 마음 너무나 흡족할 것이다. 흰눈이 쌓여있는 차령고개에 올라서니 허공을 걷는 듯 하다. 머리를 돌려서 관문을 바라보니 어느덧 식구들 소식이 묘연하다. 이번 참에 집으로 편지 한 장 써서 보내야겠다.
剪剪東風拂面新 天公作意惱行人 且將酒力堪當卯 莫花心巧妬春列 嶂紛飛如鳥翼黝 雲重疊似魚鱗令 朝直向驩山驛高 擧長鞭一問津 曉發天安新店逢長城金容中同鑣
세찬 동풍이 새로 난 풀잎을 잘라버리듯 스쳐간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의도가 너무나 궁금해 행인을 고뇌케 한다. 이렇게 술을 마시고도 장차 이른 새벽에 깨어날 여력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막상 미인의 질투심이 매섭다더니만 봄바람이 이리 매울 줄이야. 저 높고 가파른 산에 어지럽게 날리는 낙엽은 새의 날갯짓과 같고, 첩첩히 쌓여있는 저 먹구름은 물고기 비늘과 같다. 아침이 밝아오니 곧장 환산역으로 향한다. 채찍을 높이 쳐들고 조랑말을 재촉하면서 나루터로 가는 길을 묻는다.
香帘十隊覘晴新 驛路輕行不動塵 遠客吟鞭初歇雨 靑娥酌酒更邀人 當風紙葉回如環 向日銅盂簇似鱗 怊悵取思仍不見 依依門柳記前春 朝飯成歡驛訪宋左溟不遇
하늘이 흐렸다가 비로소 맑으니 향기가 감도는 열 개의 주막 깃발이 보인다. 나루터에 이르러 먼지마저 일지 않는 역으로 가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비로소 비도 그치고 하였으니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이라도 구슬려서 시라도 한 수 지어볼까. 다시금 저 사람을 불러다가 함께 어여쁜 아해가 따라주는 술이라도 마셔야겠네. 곧 바람이 불어와 종이와 낙엽이 원을 그리며 날아다닌다. 전날 마셨던 동으로 만든 사발과 조릿대는 물고기 비늘과 비슷하였다. 거듭 식구들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너무나 슬프구나. 봄이 오기 전에 헤어지기 서운한 이 마음을 대문 안 뜰에 자란 버드나무에라도 기록해둬야겠구나.
立馬橋頭百感新 平沙回憶舊風塵 天晴野曠消兵氣 水盡山回問酒人 村老耕田磨折戟 將軍奏凱卸金鱗 古碑鴻慶難尋字 啼鳥年年野草春 過素沙
다리 근처에 이르러 말을 세워두고 둘러보니 온갖 감정이 새록새록 하다. 저 모래펄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거 세상에서 겪었던 온갖 것들이 떠오른다. 하늘은 푸르고 저 들판은 광활한데 전쟁의 기운은 사라질는지. 온 힘을 다해 강물을 건너고 산을 돌아서 주막집을 물었다. 시골 노인네가 삼지창을 갈고 꺾어서 밭을 갈고 있었고, 장수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황금 물고기가 붙은 갑옷을 풀어놓았다. 옛 비석에서는 크고 경사스러운 글귀를 찾아보기가 힘들구나. 새들은 우지지고 해마다 봄이 오면 들에는 풀이 자라네.
古杏千年三兩叢 春來披拂蒲庭風 山非生客牙簪碧 泉亦名流玉圍紅 覓句忘形塵世外 呼樽立馬夕陽中 隋州米價多於玉 市語紛紛隔水東 午飯漆院夕抵鰲山
양쪽에 총 세 그루씩 있는 저 오래된 은행나무는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봄이 오면 초가집 정원에 초목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린다. 산에서 초면이 아닌 사람을 마주쳤는데 그 사람의 우아한 비녀가 푸르다. 우물은 또한 그 흐름이 푸른 옥빛이고 불그스름한 주변은 너무나 아름답다. 좋은 시구를 찾아 궁리를 해봐도 속세 바깥세상의 형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저녁놀이 질 무렵 말을 세워놓고 술 단지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수주의 쌀을 옥보다 비싸게 파다는 저자거리의 말은 시끄럽기만 하고 강물은 동쪽으로 멀어져간다.
馬首群山接起居 梧川物色夢中如 村煙未散亂喧早 沙水初晴馬踏虛 雲擁高牙杉似函 風搖細髮柳新梳 分明記得曾行虛 花笛三聲意氣餘 自葛川向梧川 往在甲戍陪先君榮掃淸安其後壬午余亦榮行路於此
첩첩산중 이어진 곳으로 말머리를 돌려서 가는 도중에 일어섰다. 梧川의 풍경이 꿈속을 걷는 듯 하다. 이른 아침부터 마을에서 연기는 피어오르고 시끌벅적하다. 비로소 하늘이 개이고 물기가 바짝 말라있는 모래를 말이 밟고 지나니 깊이 파인다. 고상하고 우아한 삼나무를 구름이 감싸고 있는데 술잔과 비슷하다. 바람이 가는 버드나무를 흔드는데 머리를 빗으로 빗듯 가지런하다. 일찍 가서 거처를 잡아놓고 분명히 기록해야겠다. 꽃피리를 세 번이나 불면서 의기양양 걸어가는데 마음조차 넉넉하다.
-갈천에서 오천으로 향하다.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선군의 묘소에 가서 기분 좋게 깨끗이 청소를 하고 오후에 나도 역시 왔던 길로 당당히 걸어갔다.
携飛江鳥定新居 泛披中流雪色如 二月風多毛髮冷 千年樹老腹心虛 水舵鏡面靑羅帶 山揷雪鬟碧玉流 直向壚頭三酌快 狂歌擊釗我思餘 夕到松坡 時淸兵與倭洋人來留者多
푸른 하늘을 나는 저 새는 강가에 새 둥지를 틀었네. 강물을 헤치며 흘러가는 저 물거품은 눈처럼 하얗다. 이월에 부는 세찬 바람 머리카락마저 휘날려 쌀쌀하다. 천년을 살아온 저 나무는 늙어서 속이 텅 비었다. 키를 휘저으며 건너는데 수면에 비친 강물이 비단 띠처럼 푸르다. 눈이 싸여 있는 저 산색은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하다. 곧장 주막으로 향해서 향로 옆에서 기분 좋게 술 석 잔을 마셨다. 어디서 쇳조각을 두들기며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정신은 혼미해지고 의식은 여운이 남는다.
-저녁 때 송파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병사들과 일본인 서양인이 와서 머물고 있었다.
漢陽襟帶壯王居 千古金湯畵莫如 三角峯光晴扱地 五江水勢碧涵虛 簪纓館閣催花漏 歌舞池臺低月柳 憶昨彤庭宣內醞 此生白髮感恩餘 朝渡松坡津向京城
한양은 왕이 거주하는 궁궐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요충지다. 오랜 전부터 철옹성(金城湯池 방비가 매우 튼튼한 성)으로 그려지기 충분했다. 삼각산 봉우리에 맑게 갠 하늘에 빛이 땅 위에까지 이른다. 한강 다섯 나루터를 잇는 그 푸른 물의 기세가 하늘까지 적신다. 벼슬아치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 핀 꽃망울이 터뜨리기를 재촉한다. 가무를 즐기던 정자 밑 연못에 달과 버드나무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니, 지난날에 궁궐 내에 술을 빚어 베풀던 게 생각난다. 이내 인생은 머리가 허연 노인네가 되었으니 감사하는 마음만 남아있을 뿐이다.
齋洞詩會與諸賢共賦
呼燈展𨋀夜相携 酒後衣冠坐不齊 南國天寒驚鴈度 上林春早賦鶯啼 暮年爲客當花社 新月隨人到玉溪 已料名園高此會 扁舟昨渡漢江西
수레바퀴 굴대에 서로 전등을 길게 매달게 놓고, 술기운이 달아오른 뒤라서 앉은 자리의 의관이 가지런하지 못하다. 남국의 추운 날씨에 놀란 기러기가 지나간다. 이른 봄날 숲속 상공에는 꾀꼬리가 우지진다. 이 늙은 나그네를 위해서 곧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새로운 달이 오면 사람들과 함께 푸른 개울을 건너간다. 이미 이름 있는 동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벌써 어제 배 한 척이 한강 서쪽으로 건너갔다.
附諸賢賦詩
記否前秋夜夜携 項斯聞是大名齊 何嫌狹世醒還醉 無奈浮生笑又啼 兼旬病起春生樹 千里人來月印溪 紫陌槐黃知不達 昇仙橋上馬東西 玄居 趙漢尙 聖仲 主事 齋洞
기억하는가, 지난해 가을 밤마다 잡아끌었던 것을. 항사가 대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깨었다 취했다를 반복하며 세상이 비좁다 불평하는가. 떠도는 인생, 울다 웃다 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병석에서 일어나고 나무에 봄기운이 돋아나려면 열흘 이상이 걸릴 것 같고, 천 리에서 사람이 오니 밝은 달이 시냇물이 잠겼네. 도성의 저잣거리가 언제 노랗게 물이 들지는 아직 알지 못하고, 말을 타고 선교를 지나 동서로 달리네.
故人邀我短筇携 邂逅相逢萬事齊 經臘寒梅餘影在 三春歸鴈數聲啼 空庭月入渾無地 幽磵氷消半漲溪 縱得諸君今夜會 那堪他日各東西 觀軒 金弘植 土毅 壯洞
옛 벗이 짧은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나는 맞이하네.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서로 만나니 만사가 잘 풀릴 듯하네. 섣달이 지나니 겨울에 핀 매화는 그림자만 남고, 봄의 석 달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러기들 울음소리가 하염없이 들린다. 텅 빈 정원에 달이 지니 발 디딜 땅이 없고, 깊은 골짜기 얼음이 녹아 계곡물이 넘치네. 오늘 밤 그대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다른 날은 각자 동서로 흩어져 있어야 하니 어찌 견디어야 하는가.
翠雲亭下客相携 烟樹微茫自不齊 故友緣多明月在 空山夜冷杜鵑啼 谷風熙皥春生樹 氷雪消瀜水漲溪 還謝諸君佳句得 愧吾詩道漢陽西 愛靜 兪鎭哲 土明 齋洞
취운정 아래에 객들이 다 함께 모였는데, 안개가 끼어 나무가 어슴푸레하니 서로 어긋나 보인다. 옛 벗들이 많이 모인 것은 밝은 달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산에는 쌀쌀한 이 밤에 두견새 울음소리만 들리네. 계곡에서 부는 사람이 포근하여 나무마다 봄기운이 새록새록, 얼음과 눈이 녹아 불어난 물로 냇물이 철철 넘치네. 감사하게도 여러분한테서 아름다운 글귀를 들으니, 지금까지 써온 나의 詩가 너무나 부끄러워 한양 서쪽으로 떠나리라.
翩翩筇屐日相携 遠峀迷茫碧不齊 多情新月隨吾在 何事寒雞催曉啼 江南家遠書千里 港北氷瀜水一溪 多謝紫峰峰上友 殷勤來訪翠雲西 蒼史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신고 훨훨 날아 날마다 만난다.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는 아득하여 푸른 산이 제각각이다. 초승달은 다정하게 내 뒤를 따르네. 아직 추운데 어찌하여 닭은 새벽 울음을 재촉하는가. 강 남쪽에 있는 집에서 천 리나 떨어진 먼 곳까지 편지를 보냈구나. 항구 북쪽에서 얼음이 둥둥 떠내려와 한 개울을 이루네. 자줏빛 봉우리마다 벗이 있는 걸 깊이 감사드리며, 은근히 궁 서쪽에 있는 취운정을 찾네.
客路東風滿袖携 眉晴喜見碧山齊 夜寒星穗蒼龍掛 酒盡梅梢翠羽啼 千里初逢春入社 一生難別月當溪 如今誰會都門恨 駟馬高車在漢西 竹潭 嚴淑輔 堤川
나그네가 길 위에서 동풍을 옷소매에 가득 담고 가네. 노인이 두 눈을 맑게 하고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니 푸른 산이 참으로 아름답다. 추운 밤 등불 같은 별들이 푸른 용을 한 마리 걸어놓은 것만 같다. 술은 이미 떨어지고, 매화 가지 끝에 앉은 물총새 날갯짓 소리만 들리네. 아주 먼 데서 처음 만나 올봄에 다시 만났는데, 평생을 살아도 헤어짐이란 실개천에 뜬 달만큼이나 어려우니, 오늘은 누가 도성 문 앞에 모여 헤어짐을 한탄하려나. 덮개가 달린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가 벌써 한양 서쪽에서 기다리고 있네.
蒼史曉夢觀軒金士毅以五色箋畵蘭贈之云余戱賦
창사가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觀軒 김사의가 오색 쪽지와 그림 난을 보냈다기에 재미 삼아 내가 시를 짓다.
前宵投我畵蘭枝 幅幅金箋各樣奇 也識故人花社契 心香先許夢中知
지난밤에 나한테 그림과 난초 한 뿌리를 보내줬네. 한 폭 한 폭이 금을 입힌 쪽지고 모양이 서로 달라 기묘하기가 이를 데 없네. 옛사람도 화사계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데, 마음이 향기롭다는 걸 꿈속에서 미리 알고 허락한 모양이다.
齋洞諸益共賦
재동에서 여러 친구가 함께 짓다
樓頭春雨似絲長 爲是花心摠向陽 客子一生游酒國 京華從古擅詩鄕 神淸凡案留仙籍 試罷衣衫債墨光 最賀文昌新進士 靑年來得白蓮香 蒼史今番登新榜進士
누각 머리맡에 봄비가 긴 실처럼 주룩주룩 내린다. 아름다운 꽃의 마음은 모두 따사로운 햇볕을 향하듯, 나그네의 삶이란 술 마시고 황홀경에 빠져 노니는 것이다. 예로부터 번화한 도성에서 제멋대로 시향이라고 하는데, 정신을 맑게 하고 책상 옆에 머물러야 선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시험을 끝내고 옷을 입으니 먹에서 빛이 난다. 새로 장원급제한 진사에게 최고의 축하는 문운을 번성시키라는 말이다. 젊은 소년이 따서 가져온 하얀 연꽃이 향기롭다. 창사가 이번에 새로 진사에 올랐다.
碧煙凝處柳絲長 遊孔東風住洛陽 滿庭卉木經新雨 邀友杯樽似故鄕 爲客初過寒食節 題詩不負好風光 且喜今年春事早 歸家剩得百花香 蒼史
푸른 안개가 머무르는 곳에 버드나무가 실처럼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공자가 이리저리 떠돌다 봄바람이 불자 낙양에 가서 살았다. 풀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에 이른 봄비가 지나가네. 벗을 만나 술 단지 끼고 술잔을 주고받으니 고향에 온 것만 같다. 나그네가 되어 한식날을 보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시 제목은 풍광을 좋아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올해 봄 농사가 빨라 기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온갖 꽃향기를 남겨 가져가리라.
支離爲客雨聲長 寒食今年在洛陽 千里有緣詩酒友 一生不負水雲鄕 逸醉豪吟富此日 早花晩柳幾多光 偏憐魁榜紅蓮客 能使詩名滿耳香 湖山 李世夏 堤川
나그네가 되어 우렁찬 빗소리를 들으니 지리멸렬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올해 한식날에는 낙양에 있네. 시가 인연이 되어 천 리나 떨어진 곳에서 벗들과 술을 마시고 있지만, 평생 수운향을 잊은 적이 없네. 오늘은 흠뻑 취해 부귀영화를 호탕하게 읊으리라. 햇볕이 따사로우니 꽃이 일찍 피고 버드나무는 뒤늦게 싹을 틔울 기미를 보인다. 장원급제하여 붉은 연꽃무늬 옷 입은 객들이 무척 어여쁘다. 시로 이름을 떨치고 귀에 향기가 가득 찼으면 좋겠다.
蕭蕭匹馬倦嘶長 半朔驅馳抵漢陽 洛社此遾佳節會 錦江何處故人鄕 檻花着雨孕紅意 御柳迎風舒翠光 便把新箋噓玉蕤 羡君詩語滿堂香 月溪 李錫昇 浩汝 北靑
몹시도 지친 한 필의 말의 울음소리가 멀리도 들린다. 말을 타고 보름 동안 달려 한양에 이르렀다. 낙사회 모임에 참석하려고 이 먼 곳까지 오고 보니 가히 멋진 연회다. 고인의 고향은 금강 어디쯤 있는가. 난간에 핀 꽃 비에 젖으니 붉은 정취를 잉태하네. 궁궐 안 버드나무는 부는 바람에 펄럭이고 물총새는 빛이 나네. 새 쪽지를 편히 붙잡고 옥유향을 부니, 그대들 시어가 향기롭게 방안 가득 퍼지네.
客愁偏向雨聲長 底事經旬在洛陽 半世邀遊花月榭 一生淸夢水雲鄕 芳蘭含露方抽氣 御柳迎風已弄光 多謝紅綾恩賜日 詩名滿載曲江香 竹溪 嚴淑輔 堤川
쓸쓸한 나그네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네. 무슨 일로 낙양에 열흘 넘게 있는가. 반평생 달빛 비치는 누각을 찾아 꽃놀이를 즐겼지만, 평생 꿈에 그리던 물이 흐르고 구름이 떠다니는 고향을 잊은 적 없네. 이슬을 머금은 난초의 향이 사방에 퍼져 나가네. 궁정에 핀 버드나무는 바람이 부니 이내 햇빛을 희롱하며 노네. 감사하게도 임금께서 내려주시어 오늘 하루 홍릉의를 입어보네. 시로 이름을 떨치어 굽어 흐르는 강에 가득 실어 떠나보낼 만큼 좋은 소리를 듣고 싶네.
送李湖山歸堤川
松湖風定浪紋新 白鳥分飛去去津 萍逢海內爲兄弟 花發山中送故人 那期千里投書近 只信三時八夢頻 見說城東楊柳錄 未堪持贈一枝春
소나무가 자라는 호수에 바람이 잦아드니 물결이 새롭네. 백조가 사방으로 흩어져 나루터를 지나 훨훨 날아가네. 부평초처럼 떠돌다 육지에서 만나면 모두가 형제 아닌가. 산에 꽃이 피니 옛 벗을 떠나보내네. 천 리에서 글을 써서 보내면 어제쯤에나 닿으려나. 세 시간 동안 꿈을 여덟 번이나 꾸었다면 믿을 것인가. 도성 동쪽에 자라는 버드나무가 유난히 푸르다는 말을 들었는데, 봄이건만 그대에게 가지 하나 주지 못하고 떠나보내네.
斜陽回首別懷新 遠樹迷茫何處津 二年南國曾爲客 千里東湖又送人 細柳風情煙際擷 早花消息雨聲頻 鄕社親朋如有問 靑袍司馬洛城春 蒼史
해가 하늘을 돌아 비스듬히 머리에 비칠 때 헤어지려니 마음이 새롭네. 멀리 떨어진 나무는 아득하고, 나루터는 얼마나 가야 나오려나. 이 년 전 이미 나그네가 되어 남국을 떠돈 그대를, 천 리나 떨어진 동호에서 또다시 떠나보내네. 가느다란 버드나무에 안개가 피어 물들이니 풍치가 정겹네. 꽃이 일찍 피었음을 알리려는지 빗소리가 잦네. 친한 벗과 고향에서 만나 물으니, 낙성에 봄이 오면 푸른 도포를 입은 사마가 오리라 하네.
三月十九日 崇禎皇帝諱辰也 上率東宮辛景武臺行望拜禮就位四拜百官齊拜 是日儒生參班狎近因設忠良科 余以疎逖雙覩褥儀口占一絶
삼 월 십구 일은 숭정황제의 제삿날이다. 왕세자와 함께 어렵게 경무대에 가서 서쪽을 향해 절하고, 제자리로 가서 사배하자, 백관들이 일제히 절을 했다. 이날 유생들이 제향에 참석하여 버릇없이 가까이 다가와 붙는 바람에 충량과 과거를 보게 되었다. 나는 멀리서 두 눈으로 잔치를 보고 있다가 즉석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皇壇報亨永圖功 萬古○常此海東 展拜褥儀今刱睹 璇題輝暎大明紅 御題大明紅 銘
황보단은 만사형통하고 후세에 영원히 남을 공로다. 오랜 세월 동안 항상 이곳 해동을 도와주었지 않은가. 엎드려 절하고 잔치를 베푸는 걸 오늘 처음으로 본다. 임금께서 제목을 내려주셨으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대명홍이다.
是日景武臺引新榜進士 親受謝恩余口占一絶
이날 경무대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자 명단이 붙었다. 친히 임금이 주신 은혜를 받으니, 나는 즉석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五百蓮花荷聖功 彤庭羅列各西東 諸君何以昇平答 箇箇葵忱向日紅
오백 개의 연꽃을 건 모습을 보니 성스러운 공적이다. 궁궐 뜰에 각자 서에서 동으로 줄지어 서니, 그대들은 태평성대를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해바라기의 마음은 하나같이 붉은 해를 향하네.
念一日早發京城 途中口占疊紅字
이른 아침에 경성을 출발하면서 생각하기를, 가는 길에 紅자로 거듭 끝맺는 시를 즉석에서 짓기로 하다.
蒼史將榮覲于長興府衙與其仲氏注書 號杞軒 同行路
창사가 장원급제하여 아버지를 뵈러 장흥도호부 관아에 그의 둘째 형 주서注書(호가 杞軒이다)와 간다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由龍仁榮掃于石峴兪侍郞墓洪承㫖淳學亦從行
용인에 있는 석현 유시랑의 묘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기에 승지 홍순학도 따라갔다.
書中費了十年功 匹馬蕭蕭出洛東 頭白無由塵刹報 回瞻雙闕五雲紅
십 년이라는 세월을 공들여 글 쓰는 데 허비하고, 말 한 마리 타고 쓸쓸히 낙양 동쪽으로 떠나네.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이 드넓은 세상에(塵塵刹土 개개의 작은 티끌 하나하나에도 저마다 국토가 있다는 뜻) 보답할 길이 없구나. 돌아보니 대궐을 덮은 여러 빛깔의 구름이 참 붉다.
晴日棹歌晩奏功 西流漢水發源東 一年春信閒商畧 纔見開紅已落紅 渡西氷津
맑게 갠 날 뱃사공 노랫소리는 만년의 누리는 즐거움이네.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의 발원지는 동쪽이겠지. 대충 헤아려 보면 일 년 중 봄소식이 가장 조용하다. 붉은 꽃이 피는 걸 잠깐 보여주고 그새 붉은 꽃이 떨어지네.
裁來松柏蔭前功 一片佳城石峴東 也識公家餘慶蔚 賢仍次第桂蓮紅 宿兪侍郎即墓閣
잘 다듬은 송백이 우거진 건 앞사람의 공로다. 석현의 한 개의 무덤이 동쪽에 있네. 경주와 울산에 귀족이 많다는 건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어진 후손이 차제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네.
衝泥馬足易虧功 宿霧濃烟漲野東 山半酒家無處覓 雨中零落杏花紅 驩山雨中
말 다리에 진흙이 튀어 묻으니 공들인 보람이 사라지네. 동쪽 들판은 묻은 안개와 짙은 연기로 자욱하네. 산을 반이나 올라와도 술집은 보이지 않네. 비가 보슬보슬 내리니 살구꽃 더욱 붉네.
前宵一雨認農功 布穀聲聲在樹東 春暮德平山下路 木綿播種野裙紅 德平途中
전날 밤 한차례 쏟아진 비는 농사꾼이 일할 때가 되었다는 걸 알려주네. 동쪽에 있는 나무에서 뻐꾸기 울음소리 들리네. 덕평 산 아랫길로 봄이 저물어가네. 목면 씨앗 뿌리는 들판은 붉은 치마뿐이네.
雙笛臨風各效功 新恩云是向河東 店女多情要一唱 小槽新壓滴珠紅 路逢河東李進士新榜也 夕陽江路短笛可聽余戱贈一絶
두 개의 피리가 바람이 부니 각각 힘을 내는구나. 이번에 새로 진사시에 합격한 분이 하동으로 향하네. 주점 여인이 다정히 다정히 요구하니 한 곡조를 부르네. 작은 술통을 다시금 쥐어짜자 방울져 떨어지는 것이 붉은 구슬 같네. 가는 길에 이번에 새로 진사시에 합격한 하동 이 진사를 만나다. 저물 무렵 강둑에서 피리 소리가 들리는데 가히 들을 만하여 내가 기쁘게 절구 한 수를 지어서 주다.
占晴鳩鷰報春功 數点人烟隔水東 掩暎誰家楊柳岸 門前斜出小桃紅 過弓院
비둘기로 비가 그칠지를 점치고, 제비는 봄이 왔음을 알리네. 동쪽을 보니 안개와 강물 사이로 사람이 점점이 보이네. 버드나무 언덕에 감춰진 저 집은 누구 집인가. 문 앞에 비스듬히 모습을 드러낸 복숭아꽃이 붉다.
江天如畵潑雲微 蓐食行人及早暉 短笛三聲移彩舫 紅桃數点落荊扉 沙晴白鳥雙雙去 路遠靑驄緩緩歸 客裏光陰春已暮 更將綠膩較紅稀 朝渡錦江
강 위로 보이는 하늘에 흩뿌려놓은 것 같은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서둘러 밥을 먹고 아침 일찍 떠나니 빛이 난다. 피리 소리를 세 번 울리니 배가 자리를 옮긴다. 가시나무로 만든 싸리문 주변에 붉은 복숭아꽃 몇 개가 떨어져 있네. 비가 갠 모래 위로 하얀 새가 쌍을 이뤄 날아가네. 먼 길을 떠나는 청총마는 느릿느릿 돌아가네. 객지에서 세월을 보내니 봄이 이미 저물어버렸네. 푸른 잎사귀는 다시금 반질반질 윤이 나는데, 붉은 꽃은 져버리네.
藍袍尤喜早成功 去路如天錦水東 故渡仙舟爲客待 官僮齎簡印文紅 蒼史外舅洪用觀時宰永同使官隷候於江頭數日云
빨리 뜻을 이뤄 감포 옷을 입었다면 더욱 기뻤을 것이다. 가야 할 길은 하늘만큼 멀고 금강의 물은 동쪽으로 흐르네. 자고로 놀잇배가 강을 건너는 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함이네. 관의 아이가 가져온 편지에 찍힌 글자가 붉네. 창사 장인 홍용관이 영동 현감으로 있을 때 관에서 사람을 보내 나루터 근처를 수일 동안 살피고 돌아갔다.
如花市女懶針功 點檢行人倚戶東 風彩如今誰第一 京華進士少年紅 擎天道中
꽃처럼 아름다운 저잣거리 여인네도 게으르면 일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네. 동쪽 창문에 기어 길 가는 사람을 낱낱이 살피네. 풍채가 가장 좋은 사람은 누구인가. 서울에서 진사에 합격한 소년의 얼굴이 가장 붉네.
乍寒酒力易爲功 斗北佳人坐玉東 臨別殷勤更洗酌 羞將髮白傍顔紅 艾峴道中
날씨가 갑자기 추워질 경우 술의 힘을 빌리면 일을 이루기가 쉽네. 두북의 가인이 옥동에 앉아 있네. 막상 헤어지려니 은근하여 다시 술을 따르네. 백발의 진사 얼굴이 붉으니 부끄럽네.
豊沛名都萬世功 騈闐車馬響東東 笙歌數闋風流客 猶似長安馬踏紅 到全州府
왕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이곳 도성은 만세의 공덕이다. 수레와 말소리가 시끌벅적 동동동 들리네. 생황의 곡조 몇 수를 듣고 나니 풍류객들로 넘쳐나네. 붉은 것이 장안의 마답비연을 보는 듯하다.
草晴柳暖是天功 隱暎村家隔岸東 蕩漾輕舟人滿載 披香亭畔夕陽紅 過詩山披香亭
초초히 날이 개자 버드나무가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의 조화네. 시골 초가와 산기슭 사이 동쪽에 무언가 은은히 비치네. 크게 흔들리는 작은 배에 사람이 가득 실려있네. 피향정 너머로 보이는 석양이 붉네.
縷金毬玉尙奇功 異域名香渡海東 多事南州年老客 擔簦千里買花紅 先之崔老有花癖自京買花負來
금 알갱이와 둥근 옥으로 꾸미는 것은 남다른 뛰어난 공이다. 다른 나라에서 이름난 향이 바다 동쪽으로 건너오네. 나이 많은 나그네가 할 일이 많은 남쪽 고을로 향하네. 우산을 메고 천 리에서 사 온 꽃이 붉네. 먼저 간 최 노인한테 꽃을 좋아하는 병이 있어, 서울에서 꽃을 사 짊어지고 왔다.
金鈴無奈護花功 一片西飛一片東 支離千里江南路 白首詩人最惜紅 過鰲山是日餞春也 途中口占三絶
금 방울도 없이 꽃의 공을 어떻게 지키려 하는가. 한 조각은 서쪽으로 날고 한 조각은 동쪽으로 나네. 서로 뿔뿔이 흩어져 천 리나 떨어진 남쪽 강 길로 날아오네. 머리가 허연 시인이 가장 아끼는 건 붉은 꽃이라네. 이날 오산을 지나는데 봄 잔치를 벌어졌다. 도중에 즉석에서 절구 삼 구를 지었다.
麥穗新芒占歲功 居然春色水流東 解釋靑皇無限恨 另將花事入詩紅
보리 이삭을 줍고 씨를 뿌리고 길흉을 점치는 것은 해마다 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봄빛의 물이 남몰래 슬며시 동쪽으로 흐르고, 봄이 찾아오니 끝없는 근심이 스르르 풀리네. 자기 할 일 마치고 헤어져 시 속으로 들어가니 꽃이 더욱 붉네.
循環節物各成功 項刻韶華斗柄東 想得春風渠亦客 佳人何事泣花紅
계절마다 반복해서 각자 목적한 바를 이루네. 봄날의 화창한 경치를 마음에 새기고 하늘을 보니 북두칠성 자루가 동쪽을 향해 있네. 봄바람이 도랑에 부니 나그네 또한 감상에 젖네. 아름다운 사람은 무슨 일로 붉은 꽃을 보고 우는가.
肩輿無力馬無功 一路之西更出東 百丈雲梯雙脚健 高花拚折倚天紅 過蘆嶺
가마꾼이 힘을 못 쓰면 말의 공이 없어지네. 서쪽 한길로 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빠져나가네. 두 다리에 걸쳐져 있는 밧줄도 엮은 긴 사다리가 튼튼하네. 높은 곳에 피어 바람에 날리고 꺾이어도 하늘을 의지하며 사는 꽃이 붉네.
江郊播穀驗田功 樵叟蕘兒陟彼東 漁人背負苽皮艇 去向晴湖剌鯉紅 向羅州北倉
강 주변에 나가 곡식을 뿌리고 밭을 가는 것도 공이다. 노인은 땔나무 하러 가고 아이는 꼴을 베러 동쪽 높은 산을 오르네. 고기 잡는 사람은 등에 줄풀을 지고 거룻배에 오르네. 맑게 갠 호수를 지나자 붉은 잉어가 물 위로 펄쩍 뛰어오르네.
叅天西岳拄神功 初看在西更看東 也識吾家山色裏 薔薇花發兩三紅 途中望瑞石山
하늘 높이 치솟아 받들고 선 서석산은 신의 공덕이다. 처음에는 서쪽에 있다가 다시 보니 동쪽에 있네. 다들 알지 않는가, 내 집이 산 빛깔 속에 있다는 것을. 활짝 핀 장미꽃 두세 개가 붉네.
穿峽支離酒有功 靑帘斜出柳橋東 杜宇不知春事去 啼花猶作滿山紅 長興楡峙途中
지리멸렬되어 산골짜기를 뚫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술의 공력이네. 버드나무가 자라는 다리 옆으로 주막집 깃발이 비스듬히 서 있네. 소쩍새는 봄날이 가는 걸 알지 못하네. 산을 온통 뒤덮은 진달래꽃이 붉네.
四月四日東閣壽辰也 設聞喜宴于平近堂疊紅字六節以賀
사 월 사 일 동각이 세워진 날이다. 문희연(과거에 급제한 집에서 여는 잔치)을 베푼다기에 평근당으로 가서 축하의 의미로 절구 여섯 수를 지었다.
億佛山靑萬歲功 黝雲散盡汭江東 杏院橋頭花十里 笙弦淸裂舞裙紅 府倅率官屬待于杏院橋頭人馬騈闐繮屬十里
억불산의 푸르름은 만세의 공이네. 검푸른 구름 흩어져 모두 예양강 동쪽으로 흘러가네. 행원교 머리맡에 핀 꽃은 십 리나 되네. 생황 현 긋는 소리 맑고 무희들 치마 붉네. 장흥부사가 하인을 이끌고 행원교 다리 머리맡에 고삐를 붙잡고 시끌벅적하니 줄 선 사람과 말이 십 리나 되었다.
光山歌妓效新功 唱到襄陽漢水東 梅閣弧辰稱慶席 仙郞兼得來蓮紅 光山妓香心桂蟾錦香綵瓊明玉皆來佐歡
새로 공을 세워 광산에서 노래 잘하는 기생을 보내주었다. 노랫소리가 강원도 양양에서 한강 동쪽으로 흐르는 듯하네. 매화가 피는 날 동각이 생일을 맞으니 이를 일컬어 경사스러운 잔치라고 하네. 선랑이 거듭 얻어오는 연꽃이 붉네. 광산에서 기생 향심이와 계섬 금향 채경 명옥이 모두 와서 도우니 기뻤다.
호신(弧辰)은 남자의 생일을 가리킨다. 옛 풍습에 아들이 태어나면 세상에 큰 뜻을 펴도록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봉초(蓬草)로 화살을 만들어 천지 사방에 쏘았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禮記 內則》
鈴索無聲鼓奏功 鄕中章甫坐西東 花前賀酒多多語 一是蓮紅一桂紅 邀一鄕多士盃盤狼藉
방울이 비어 소리가 안 나니 장구를 연주하는 것도 일이네. 향중의 유생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앉았네. 꽃을 앞에 두고 축하를 하니 마실 술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네. 모두가 붉은 연꽃과 붉은 계수나무뿐이네. 고을의 많은 선비를 맞이하다 보니 술잔과 접시가 사방에 널려 있다.
伶才侲唱各輸功 綠樹繁陰畫閣東 士女如雲觀感席 官廚散出錦糕紅 觀者如堵出五石餠散給
악사 재인 광대 가인 모두의 공이네. 단청을 입힌 동쪽 누각에 나무가 무성하여 녹음이 짙네. 구경하는 자리에 선비와 아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네. 관청 부엌에서 쏟아져 나오는 비단과 떡이 붉다. 구경꾼이 여기저기서 몰려들자 다섯 가지 석이떡을 흩어져 나눠줬다.
堆前簿牒且休功 鎭日歡娛碧館東 捐俸百金分賜日 六房官屬醉花紅 以百金賜官屬而飾喜
높이 싸여 있는 관아의 장부와 문서 또한 훌륭한 공덕이네. 평소 기쁘고 즐거워 사람들 웃음이 넘치는 푸른 관아가 동쪽에 있네. 녹봉에서 떼어낸 많은 돈을 하루 동안 쓰라고 쪼개서 나눠주네. 육방의 하인들이 취해 얼굴이 꽃처럼 붉네. 잔치에 쓰라고 관 하인들에게 많은 돈을 주었다.
長州太守定治功 淸白家聲振海東 囹圄中人相感泣 良辰同樂酒痕紅 又以酒餠夙賜獄中人醉飽終日
장흥 태수가 바로잡은 공이다. 청백리 가문의 소리가 해동까지 떨치었네. 감옥 안에 든 사람도 서로 감복해 눈물을 흘리네. 좋은 날 다 함께 즐기니 술 자국이 붉네. 또한 술과 떡을 옥중에 있는 사람에게도 나눠줘 종일 취하고 배불리 먹었다.
奉呈杞南 兪鼎煥
鑪金百鍊是良珍 傾盡相逢意愈新 壯歲皆稱湖海士 淸秋同作漢陽賓 文章富艶貧非病 心氣和平老更春 假得餘年眞積力 書中黙契古之人 杞南言曩時所讀皆表襮欠體認上工夫 從今若假數年卒以讀書庚有心得之妙
화로에 쇠를 녹이고 거듭 단련해야 좋은 보물이 나오네. 서로 만나 터놓고 이야기해야 뜻이 더욱 새로워지네. 한창때는 모두 호수와 바다 같은 사람이라 칭했네. 맑게 갠 가을날 한양에서 손님으로 만나 함께 시를 지었네. 글월이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가난하나 병이 아니네. 늙어서 다시 봄을 맞이하려면 심기가 화평해야 하네. 가령 얻으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하네. 옛사람이 이르길 책 속에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한다 하네.
기남이 요전 날 말하길 책을 읽으면 몸이 허약하다는 게 겉으로 드러나는데, 이를 인정하고 학업에 매진해야 한다. 만약에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수년간 책을 읽으면 마음으로 터득한 묘리가 있으리라.
冠山衙與小痴老人酬唱
소치 노인과 함께 관산(장흥) 관아에서 시를 주고받다.
畵閣東頭客夜深 松筠相守歲寒心 自從小別仙橋後 一叚詩緣又訂令
단청 곱게 칠한 누각에 올라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밤이 깊어 쓸쓸하기만 하다. 세찬 눈보라 속에서도 소나무와 대나무는 서로 도와 푸르름을 잃지 않듯이. 우리도 그 뜻을 본받아 선교에서 각자 헤어진 후에 한 단씩 시를 엮어 다음에 고치기로 했다.
衙齋別榻坐深深 忽然先生愜我心 舊境依依堪設夢 詩緣詎意到如令 小痴
각자 방에 들어와 평상에 앉으니 마음이 훈훈하기만 하구나. 거기서 갑자기 장 선생을 만나니 기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늙은이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하고 서운해하던 차에 이제야 꿈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시에 깃든 감정은 그 뜻이 변하지 않아야 시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曾年供奉脩門深 展轉擎紈愡畵心 髮白江湖千里外 祗應魂夢惱如令 石西
왕년에 노인께서 도성에 들어가 나랏일에 힘쓰셨는데, 방바닥에 드러누워 흰 비단을 높이 쳐들고 있어 본들 그림의 이미지가 떠오르던가요. 천 리 밖 강호에 묻혀 머리가 하얗도록 살지라도, 다만 꿈속에서도 고뇌해야만 그림의 경지에 이를 수 있지요.
可但曾年托契深 詩成珠玉倍傾心 莫將時事開談籔 請看浮雲變古令 小痴
왕년에 내가 굳게 약속하기를 시를 지어서 크게 성공하리라 마음먹었건만 이야기하자면 세상일이라는 것이 조리값만도 못하더이다. 청컨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시오. 저 흘러가는 구름처럼 옛것은 변하게 마련이외다.
屋裡群山碧似藍 書香墨色在樽南 八耋人間三絶老 從來蘭馥異於凡 石西
방 안에 들어가 바라보니, 주위를 둘러싼 푸르른 산이 온통 쪽빛이고, 방 한구석에 술 단지를 두고 늘 책을 읽고 먹으로 그림을 그리니, 여덟 명의 노인네 중 시와 서와 화 세 가지 모두 가장 뛰어난 노인이네. 지금껏 봐온 바와 같이 난향이 어찌 평범한 꽃향기와 같을 수 있겠는가.
書畫元來貴出藍 不離硏北與香南 請君且把玉燈看 一朶蓮花妙不凡 小痴
글씨와 그림은 본래 스승보다 더 뛰어난 제자가 나오기가 참으로 어렵다. 서로 나누어 벼루는 북쪽에 향기는 남쪽으로 흐르도록 할 수 없는 법. 그대 옥등을 높이 쳐들고 잠깐 저기를 보시오. 하나의 대롱에 절묘하게 핀 연꽃이 무척 아름답지 않소.
心香淸似玉煙藍 一在梅西一竹南 俗眼渾忘詩格在 祗將鴉墨判仙凡 石西
마음의 향기가 맑으니 옥빛 안개만큼이나 푸르다. 서쪽에는 한그루 매화가 있고 남쪽에는 한그루 대나무가 있다. 보통 사람 눈에는 흐릿하여 시의 격식이 보이지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갈까마귀 색과 먹물 색이 다르듯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汭江一帶也拕藍 佛嶽崚嶒竦處南 何事淹遲鳥次縣 觀梅東閣色殊凡 小痴
한 개의 띠처럼 휘감아 도는 강물의 모습이 쪽물을 풀어놓은 것만 같다. 남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우뚝 솟아 첩첩이 쌓여있다. 어찌하다 보니 오랫동안 조차현(장흥 관산)에 오지 못하였는데, 관매도에서 봤을 때보다 이곳 동각에 직접 와서 보니 주변 풍광이 색깔부터가 다르다.
官齋淨寂似迦藍 畵意詩心共硯南 可但痴翁修鍊妙 烟霞風骨己超凡 石西
마을이 맑고 고요한 것이 절간과 같다. 화의와 시심을 함께 공부하였건만 소치 노인께서만 힘써 배우고 익히어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안개 속에 비친 노인의 풍채는 이미 범속을 초월하였다.
次小痴自輓用疊字格
다음은 소치 노인이 첩자격식에 맞춰 스스로 만사를 지음.
造物無爲似有爲 得休休處便休宜 雲來雲去元无定 花謝花開自不知 達觀莊翁遊曠漠 多心佛祖說慈悲 生平緣業惟難忘 愛畵愛書兼愛詩
만물의 조화는 유위하는 것 같으나 무위하고 쉴 곳을 얻거든 그대로 편히 쉬시게. 구름이 오고 가는 것은 원래 정해진 것이 없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지 않는가. 달관한 장자 노인은 아득히 넓은 들판을 노닐고 걱정 많은 부처 자비를 설법하려 다니듯 평생을 인연이고 업이다 생각하고 살아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네. 그리하여 그림을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고 더불어 시를 사랑하였노라.
和小痴述懷 丙戌 三月
소치 노인의 술회에 화답하다 1886년 3월
梅花看到逼詩神 底事痴翁說若辛 歲月多心欺墨客 湖山達觀屬閒人 林容澹薄晴如雨 竹氣剛堅老更春 瑞石前遊何足感 浮生統計摠塵塵
시신詩神이 가까이 다가와 매화를 보니, 소치 노인께서 무슨 이유로 어렵게 말씀하시네. 세월이 갈수록 걱정은 많아지고 묵객들은 나를 속이려고만 하오. 호수와 산속에 들어가 달관하여 살아도 일 없는 사람은 끊이지 않소. 비 온 뒤 맑게 개면 숲이 더욱 깨끗해 보이고, 늙은 대나무가 다시 봄을 맞으면 기운이 더욱 굳세어지지 않습니까. 서석을 등지고 노니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떠도는 인생, 모든 걸 모아봐야 먼지뿐이지 않습니까.
魚字十二疊奉贐小痴老人
소치 노인이 魚자 십이첩수를 지어서 전별하다
浮休世事夢緣虛 回憶當年禁直廬 竹石命題坡老帖 君恩何似賜金魚
정처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그해 궁에서 숙직하던 곳을 떠올리니 대나무와 돌을 주제로 지은 동파 노인의 시첩이 생각난다. 황금 물고기를 준들 어찌 임금의 은혜만 하겠는가.
憲宗朝以白衣入侍上出 東坡書帖命畫帖木竹石 소치 노인은 헌종 임금 때 백의입시로 입궐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고 소동파의 서첩을 목죽석이라는 제목으로 화첩을 만든 적 있다
浮休世事夢緣虛 歸臥雲林結小廬 流落江湖千里外 誰知白髮泣前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운림에 지은 작은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누우니 강호에서 천 리나 떨어진 타지에서 살다 백발이 되어 예전에 잡아놓은 물고기를 보고 눈물지는 심정 누가 알까.
憲廟昇遐後絶意世事 歸隱雲林洞 헌종 임금이 세상을 뜨자 소치 노인은 세상일과는 의절하고 운림동으로 돌아와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
浮休世事夢緣虛 笠屐新圖掛草廬 靑眼嵩陽人去後 堪憐身世侶鰕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동파립극도를 새로 그려 초가집에 걸어놓고 보니 따뜻한 눈을 가진 숭양거사가 떠나고 난 후 새우와 벗하는 내 신세를 감내하려니 너무나 애석하기만 하다.
小痴作東坡笠屐圖 翁覃溪畫題云 嵩陽靑眼人何在 소치 노인이 동파립극도를 그렸다. 옹담계(覃溪 옹방강의 호)가 말하는 그림의 주제는 嵩陽居士今何在 靑眼看人萬里情이다. 숭양거사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니 사람의 정이 만 리까지 흐르네.
浮休世事夢緣虛 好會仙橋處士廬 小別龍山三十載 江湖蹤迹兩忘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선교동에 사는 처사의 초가에서 즐겨 모이다가 용산동에서 잠시 헤어진 게 벌써 삼십 년이다 보니 강호에 발자취만 남기고 아울러 고기 잡는 생각마저 잃었다.
浮休世事夢緣虛 悵望雲山海上廬 一本芭蕉爲我贈 中間消息隔雙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초가에 우두커니 서서 구름에 덮인 산과 바다를 시름없이 바라보니 나를 위로해주는 건 오직 파초 한 줄기뿐, 소식이 간간이 들릴 법도 한데 편지조차 뜸하구나.
浮休世事夢緣虛 雪月冠山梅發廬 銀燭官樓相和席 歸心何若憶鱸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눈이 내리는 달밤에 관산을 찾았더니 초가집에 매화가 피었다. 관가의 누각에 은촛대를 켜놓고 서로 어울려 앉아 즐기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마음먹으니 뜬금없이 농어 생각만 난다.
浮休世事夢緣虛 靑暮光山客到廬 白氎楑杉經過路 鹿車兒挽勝魚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늦은 봄날 광산에 사는 반가운 손님이 초가집에 오셨다. 하얀 무명옷을 입고 삼나무를 헤아리며 길을 걷는데, 아이가 끄는 사슴 수레에 물고기가 넘쳐난다.
浮休世事夢緣虛 門柳依然舊雨廬 八十痴翁何健壯 也應調息擧春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초가집 문 앞 버드나무는 예전과 다름이 없고 이 소치 노인은 팔십이 다 되었건만 또 얼마나 건장한가. 춘어가 보이거든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가 번쩍 들어올려야 한다.
浮休世事夢緣虛 畫意經營閉竹廬 也有官廚牛酒供 何曾長鋏歎無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그림의 뜻을 헤아리고자 갔건만 대나무 집은 굳게 닫혀 있네. 소고기와 술을 주는 관청이 어디에 있던가. 어찌하여 일찍이 긴 칼을 집어 들고 반찬에 물고기가 없다 탄식하는가.
浮休世事夢緣虛 縑帛朝朝走一廬 從此海陽紙價貴 家家屛幛(障)掃花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비단장수가 아침마다 한 초가로 달려가기 바빴다. 이제는 해양(광주)의 종잇값이 비싸고 귀해져 집집마다 화어도가 그려진 병풍을 없애버리는구나.
浮休世事夢緣虛 梅下池臺竹下廬 可但先生工畫帖 詩中自有墨池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매화나무 밑에 연못이 있고 대나무 밑에 초가집이 있다. 다만 선생의 화첩이 가장 교묘해 시 속에 벼루와 연못과 물고기가 있다.
浮休世事夢緣虛 蕉葉山人掩獘廬 悵然臨別無由贈 齎送花箋十二魚
정처 없이 떠돌다 쉬어 가는 세상사 꿈같은 인연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산에 사는 사람이 파초 잎을 따다가 쓰러져가는 초가를 덮는다. 그대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헤어지려니 서운하고 섭섭하다. 죽을 때 가져가고 싶은 것은 작은 편지지와 열두 마리 물고기뿐이네.
次魯岡柳君湜回甲韻
一日筠史鄭君來叩話間道 今年正月吉日魯岡柳斯文懸弧甲也 君湜作詩記 其事 余曰 余與君湜同庚而後幾個月 古所謂雌甲者非耶 雪江亭即魯岡子 靑氈舊物 湖山之勝甲於吾鄕 春和景明富 與兩三隣回棹小舟尙羊於九回溪 恐未晩也
하루는 균사 정군이 와 작은 길에서 붙잡고 말하길 “금년 정월 길일이 노강 류사문의 회갑일입니다.” 했다. 군식이 그 일을 시로 지어 기록했다. 내가 말하길 “나 또한 군식과 동갑인데 몇 개울 늦습니다. 예로부터 소위 자갑이라 하지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설강정은 노강의 아들에게로 대대로 내려온 오래된 물건이었다. 봄날이 화창하고 산수가 맑고 풍부해, 호수와 산의 경치가 내 고향에서는 으뜸이었다. 두세 명의 이웃과 함께 뱃머리를 돌리니, 작은 배가 아홉 굽이 시냇물에서 서성거려 늦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花甲先天屬後天 吾君生日即今年 迎新栢葉浮盃底 飾喜瓊華溢案前 歲月飛光憐百感 湖山淸福賀兼全 蕉儂亦是同庚者 另把餘箴恐墜淵
회갑은 선천에 속하는가 후천에 속하는가. 그대의 생일이 올해이네. 새해를 맞아 측백나무 잎사귀가 술잔에 띄우네. 잔칫상 앞에 아름다운 구슬이 넘치네. 세월이 빛과 같이 날아가니 온갖 감정이 아련하게 느껴지네. 호수와 산이 많은 곳에서 청아하게 사는 복과 축하받는 일 모두를 가졌네. 파초 그대 역시 나이가 같은 자이네. 헤어질 때 남은 바늘을 붙잡을까 두려워 연못에 떨어뜨리네.
灑掃堂春眺
春天照眼百花明 客到淸齋樂意生 乍暖微添醺酒暈 新晴尤喜讀書聲 野簷風定茶爐熟 山逕泥乾葛屨輕 別有吾人觀物趣 非關綠膩較紅情
봄날 하늘은 눈이 부시고 온갖 꽃이 훤히 보이네. 나그네 이르러 몸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삼가니 즐거움이 생겨나네. 잠깐 푸근해져 조금씩 술을 마시니 취해 눈앞이 어질어질하네. 모처럼 날이 맑게 개고 책 읽는 소리 들리니 더욱 기쁘네. 들에서 불어온 바람 처마 끝에 머물고 화롯불에 찻잎이 익어가네. 질퍽한 산속 작은 길 마르니 칡 껍질 신발이 가볍네. 헤어지고 우리만 남아 사물의 정취를 보네. 잎사귀의 푸르름과는 관계없이 붉은 꽃만으로도 정감이 넘치네.
三川精舍和高進士寶鉉
交欲忘形便忘年 相看嘲我髮蒼然 靑衫最少題名院 麗藻偏多覓句遾 宿雨花心紅灼爍 和烟草色綠芊綿 三溪溪上殷勤月 打破春愁到枕邊
체면을 차리지 않고 나이도 안 따지고 편하니 만나고 싶네. 서로 마주 보며 내 머리가 푸른색을 띠는 걸 비웃네. 청삼을 입고 가장 적은 글자 명원을 제목으로 정하고 시를 짓네. 아름다운 시를 지으려고 멀리까지 가서 글귀를 찾으려 하네. 여러 날 비가 계속 내려 꽃의 마음이 붉고 밝게 빛나네. 무성한 초목이 안개와 조화를 이뤄 풀빛이 더욱 푸르네. 삼천정사 계곡 계곡마다 물 위로 은근한 달이 비치네. 뒤숭숭한 봄의 시름을 때려 부수고 베갯머리고 가네.
月洞精舍和高寶卿
溪上桃花落晩風 重來便與武陵同 沙晴橋斷疑難覓 岸翠林紅與不窮 客路句成山色裡 仙窓夢覺水聲中 尊翁八十猶强痴 話到前賢貫一通
저물녘에 바람 부니 개울 위에 꽃이 떨어지네, 자주 오다 보니 무릉도원 같은 느낌을 주네. 맑게 갠 모래 위로 다리가 보이지 않는 이유가 이제야 풀리네. 언덕 위 푸른 숲에는 붉은 꽃이 궁하지 않네. 나그네 산 그늘 속 길 위에서 시를 짓네. 신선들 모인 방에 있다가 꿈을 깨니 물소리 속에 있네. 팔십 먹은 노인은 지금도 여전히 어리석을 정도로 강하네. 도착 전에 말하니 현명하게 지나쳐 한 곳으로 통하네.
過福州酉橋
懸崖十尺落來波 傍有空明一石窩 疑是仙山香霧窟 金牀玉榻影搓砑
열 척 높이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물결이 이네. 그 옆에는 달그림자 비치고 돌 움막 한 채가 서 있네. 향기로운 안개가 움에서 피어나니 내가 선산에 온 듯하네. 금상과 옥탑을 만드느라 문지르고 가는 모습이 비치네.
靑魚次韻
魚非鯖也亦云靑 散出江船入野亭 生鮮腮赤錢相落 白熟肌淸酒不停 東海臘供魚網雪 西湖春産蟹燈星 賤品今年還貴直 騷人病肺若難醒
물고기라고 다 청어가 아니고 짙푸른 것이어야 청어다. 강으로 흩어져 나간 배들이 들판에 있는 정자로 들어오네. 생선은 아가미가 붉어야 돈이 떨어지네. 푹 익힌 고기만 있으면 맑은 술이 멈추질 않네. 동해에서는 납일에 고기가 그물에 눈처럼 걸리라고 제사를 지내네. 서호에서는 봄에 등잔불과 별빛을 통해 게를 잡는데, 천했던 것이 올해는 귀한 것이 되어 돌아왔네. 시인의 가슴에 병이 드니 아마도 깨어나기 어려울 듯하네.
鼎谷書舍和李仁瑞
石北群山地面尊 扶疎繞屋長桐孫 林深合置藏書局 歲儉猶謀濁酒盆 野客看花穿石逕 山人裁竹護柴門 俗眼不知直境在 還從物外覓仙源
석북은 군산 지역에서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다. 무성하게 자란 오동나무 가지가 길게 뻗어 집을 덮었네. 숲 깊은 곳에 책을 모두 모아 보관해뒀네. 흉년이다 보니 술 동이마저 지저분하네. 나그네 돌길을 뚫고 나온 꽃을 돌아보네. 산 사람은 대나무를 심어 사립문을 지키네. 속세의 눈으로는 일직선으로 쭉 가면 경계가 나온다는 걸 알지 못하네. 속세에서 벗어나 선원 마을을 구경하고 다시 돌아오네.
芝谷與友村小山共賦
滿庭修竹晝常陰 客到衣衫冷不禁 小閣噓凉簾影動 圓甃引濕蘚紋沉 當春病骨醫三洗 遇境詩機悟四深 聞說東岡新買屋 花風吹我此登臨 釋皎然云詩有四不四深二要二廢
정원에 기다란 대나무가 빽빽이 자라 낮에는 항상 그늘이 지네. 적삼 옷을 입고 온 나그네 추위를 참지 못하네. 작은 문설주에 매달아 놓은 주발 그림자가 선선한 바람에 움직이네. 둥근 우물 벽이 습기를 빨아들여 이끼가 문양처럼 두껍게 끼었다. 봄을 맞아 뼛속 깊이 병이 드니 의원이 세 번씩 씻어주네. 시의 경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시에는 네 가지 깊이가 있다는 걸 깨닫네. 동강이 새로 집을 샀다는 말을 듣고, 꽃바람이 부는 이번 참에 나는 그곳에 오르네. 석교연이 말하길 시에는 거리를 둬야 할 네 가지와 범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가 있고, 중요한 요체 두 가지와 폐기해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다 했다.
小屋東頭積翠陰 啼禽盡日若難禁 山中病起梨花發 野外春來草色沈 衰懶任從詩力退 閒愁全付酒盃深 故人却喜奇緣在 偶到思時輒一臨 友村
작은 집 동쪽 머리에 드리운 그늘이 짙네. 날짐승 울음소리 종일 그칠 것 같지 않네. 산중 병석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보니 벌써 배꽃이 피었네. 들판에 봄이 찾아와 풀색에 젖네. 늙고 게을러 시를 쓰려 해도 힘이 달리네. 틈틈이 생기는 근심은 전부 술잔 속에 묻네. 고인이 뒤로 물러남을 기뻐하다니 기이한 인연도 다 있네. 생각한 것처럼 우연히 이르러 갑자기 한꺼번에 시 짓기에 임하네.
一晴一雨暖春陰 石友來時意不禁 野色斜通簾戶展 山光半入硯池沈 花卉相交托隣近 松筠自在卜居深 允擬平生多得酒 名亭無處不登臨 小山 魏鳳祚
하루는 날이 개고 하루는 비가 따뜻한 봄날이 음침하네. 뜻하지 않은 때에 석우와 우촌이 왔네. 들판의 경치가 주발이 달린 창문을 비스듬히 통과해 집 안에 펼쳐지네. 산 경치는 반쯤 들어와 벼루 연못에 잠기네. 꽃과 풀은 가까이 붙어 서로 사귀었다 밀었다 하네. 소나무와 대나무는 자기 마음대로 깊은 곳에 살 곳을 정하네. 평생 술을 쉽게 얻을 수 있을지 진실로 의문이 드네. 이름난 정자에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오를 수가 없네.
又占五律
早起春山醒 幽人病快晴 深園桃李落 高樹鵓鳩聲 溪風侵座冷 林日漏窓明 拓地培新竹 消遙足此生
일찍 일어나 봄의 산을 깨우네. 산속에 묻혀 사는 사람의 병이 쾌청해지네. 커다란 나무에서는 비둘기 소리 들리네. 계곡 바람이 앉은 곳으로 들어와 서늘해지네. 숲의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훤해지네. 죽순이 땅을 점점 넓히어 곳곳에 돋아나네. 이번 생은 모든 걸 버리고 유유자적 사는 것만으로도 족하네.
村南茅舍靜 病客喜春晴 井暖苔常暈 園空竹自聲 衰齡慚伯玉 醉與托淵明 惟有老張籍 數來尋友生 友村
마을 남쪽에 있는 띠를 얹은 집이 고요하네. 봄이 찾아와 날씨가 맑아지니 병든 나그네 기뻐하네. 포근해지니 우물에 항상 이끼가 희미하게 끼네. 동산 공중에서는 대나무가 스스로 소리를 내네.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니 백옥이 부끄럽네. 흠뻑 취해 도연명에게 도움을 청하네. 오직 늙은 석우에게만 책이 있네. 수차례 찾아와 친구가 살아있는지 살피네.
郊原草色暖 籬落花陰晴 庭竹細生語 溪禽各有聲 今日知晥晩 他夜夢分明 一春淹臥病 白髮愧吾生 小山
도성 주변 풀들은 빛깔이 파릇파릇하네. 울타리 옆에 핀 꽃은 어두웠다 맑았다 하네. 정원 안 대나무는 가늘어도 소리는 생생하네. 골짜기 날짐승은 자기들만의 소리가 있네. 오늘에서야 저물도록 하늘이 환하다는 걸 알았네. 다른 날 밤 꿈이 또렷이 떠오르네. 병이 들어 한 해의 봄이 다 가도록 누워 있네. 머리가 허옇도록 살아있는 내가 부끄럽네.
芝谷聯句
屛居非是欲離羣 石西
무리와 떨어져 집에서만 지내려고 하는 건 옳지 못하네.
爲謝先生此問存 小山
이번에 안부를 묻게 되어 선생께 죄송할 따름이네.
剔燭話詩醒病眼 友村
등잔 심지를 돋우어 놓고 시를 이야기하니 흐리멍덩한 눈이 밝아지네.
凭欄聽雨惱春魂 石西
난간에 기대어 빗소리 들으니 봄의 혼이 괴로워하네.
滿庭竹護新茅屋 小山
정원 빽빽이 들어찬 대나무는 새로 지은 띳집을 지키네.
連徑苔侵小石門 友村
길게 이어진 길을 걸으니 작은 돌문에 이끼가 끼었네.
安得長携千斛酒 石西
어디에서 천 두의 술을 얻어 항상 가지고 다니리.
看花日日笑談溫 小山
매일 꽃을 보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따뜻해지네.
石低村訪蕖史先生不遇
석저 마을에 가서 거사 선생을 만나지 못하다
琬瑚知是廟堂珎 遺落岩阿歲月新 注眼案留千古友 藏身門絶五僕賓 風情深似桃花水 道味醲於竹葉春 認得分明芳草路 如何不見鄭山人
옥과 산호는 묘당에서도 진기하다는 걸 아네. 바위 언덕에 떨어뜨려 없애도 세월은 항상 새로 돌아오네. 눈을 모으고 보면 책상에는 항상 천년의 벗이 있네.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으니 다섯 명의 하인과 손님 말고는 아무도 없네. 풍광이 어찌나 깊은지 복숭아 꽃이 물처럼 흐르네. 죽엽춘이라는 술에 곁들여 도의 참맛을 느끼면, 풀숲의 길이 향기로운지 분명히 알게 되겠지. 그런데 어찌하여 정 산인을 보지 못하게 되었단 말인가.
石低次谷城湖上齋韻 柳氏書室在木寺洞
古槐東畔竹西邊 瀟灑茆堂眼豁然 滿壁書香聞錦繡 遶簷淑氣結雲烟 相從莘野耕春叟 又作嵋山詠月仙 一曲棹歌江上夕 芙蓉采采有誰先
오래된 홰나무는 동쪽 두둑에 있고 대나무는 서쪽 끄트머리에 있네. 소쇄원 묘당 앞이 자연스레 확 트였네. 담벼락 가득 책 향기 풍기고 아낙네들 수놓는 소리 들리네. 맑은 기운이 처마를 둘러싸 구름과 안개가 맺혔네. 서로 좇아 풀들이 자라는 들판으로 나가니 늙은이 봄을 맞아 발을 가네. 또 신선이 미산을 만들어 달을 읊네. 노 저으며 부르는 노래 한가락이 강 위쪽에서 날이 저물도록 들리네. 과연 누가 먼저 부용 꽃을 따오려나.
過金忠壯公墓
忠壯遺碑碧蘚痕 寒杉老栢擁荒原 可憐當日春山曲 未燒英雄不宛魂
충장공 비석에 푸른 이끼의 흔적이 남았네. 차가운 삼나무와 늙은 측백나무가 황량한 들판을 지키네. 그날 지은 춘산곡이 가련하네. 영웅은 소멸하지 않고 혼백을 굽힐 수는 없네.
贈石下齋生
晴囱瀟灑夜燈處 一架葡萄一草廬 寄語諸君勤課業 文章從古佩金魚
활짝 갠 날 천장을 보고 있으니 밤에 등불 켜진 소쇄원에 마음이 가네. 한 줄기 포도 넝쿨과 한 개의 초가집.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학업에 매진하는 제군에게 열심히 하라고 전하네. 글월은 옛것을 따라야 황금 물고기를 지닐 수 있네.
輓希齋趙進士
文昌曾是蒼仙班 八十花籌落世間 旅夢至離游洛社 天恩珍重返鄕關 殘星長笛今何在 滿月空樑未可攀 見我先君爲我語 往年同來白蓮還
글월이 뛰어나 일찍이 임금을 보필하는 관직에 올랐네. 팔십 개 꽃 떨기가 세상에 떨어졌네. 낙사계 모임에 떠나려던 나그네의 꿈이 갈기갈기 찢어지네. 임금이 베푼 은혜로 고향 집으로 되돌아왔네. 별이 지고 피리 소리 길게 울리는 지금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빈 들보에 달이 가득 찼건만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네. 선군께서 나를 보더니 내게 시를 지어보라 하셨네. 예전에 함께 와서 하얀 연꽃을 보았던 그때가 다시 오려나.
輓墅隱文同知
八十二籌墅隱翁 曾經沈痼尙春風 處家勤約心還逸 持己和平福亦洪 晩節追先升寵秩 早年敎子入庠宮 自漸浪跡違攀紼 落日鰲山悵不窮
서은 노인은 여든둘 해를 살았네. 일찍이 낫기 어려운 병을 겪었던 터라 봄바람이 솔솔 주면 좋아했네. 집안일을 처리할 때 늘 근검절약하고 안일한 마음을 먹었다가도 바로 되돌아왔네. 몸가짐을 화평하게 하니 많은 복을 받았네. 늦도록 절의를 지켜 먼저 오른 이를 따르니 임금이 특별히 사랑하여 벼슬을 주었네. 젊었을 때 아들을 가르치려고 서원에 들어갔네. 부끄럽구나, 정처 없이 떠돌다 상여 줄을 붙잡지 못했으니. 오산에 해가 지니 서글픈 마음이 끝이 없네.
回憶鰲山種稙初 孫桐子竹繞閒居 主翁去後香猶在 一朶蓮花十丈餘
오산을 회상하니 가장 먼저 볍씨를 뿌리네. 길게 뻗은 오동나무 가지와 새로 자란 대나무가 한가한 집을 에워쌌네. 주인장은 가고 없으나 향기는 여전히 남아있네. 연 줄기는 한 개뿐이나 꽃잎은 열 장이나 남았네.
輓筠山文雲甫
균산 문운보의 죽음을 애도하며
吾友筠山子從師蘆下翁處貧 能濶狹守拙亦英雄 先蹟勤褒美兒程篤啓蒙行年 纔踰命宿草泣靑風
내 벗 균산이 스승의 뒤를 따라가 버리니, 갈대를 얻은 늙은이의 처소가 더욱 처량해 보이는구나. 의협심이 강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는 쉬이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으니 능히 영웅이라 할만하다.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평생을 어린아이들을 독려하고 깨우치는 일에 매달리다, 이제야 겨우 끝마치고 먼 길을 떠나니, 그의 혼이 깃들어 있는 풀들이 청풍과 함께 구슬피 우는구나.
次競堂原韻二首 鄭都事伯瑞号
歲丁亥殷秋余自鳴陽之 琴嘯舘宿于西林之弄環堂 適東橋詞伯在 座誦競堂原韻敢 此露拙如左
정해년(1887) 8월 나는 명양(창평)에 갔다. 금소관에서 잠을 자고 서쪽 숲에 있는 농환당으로 갔다. 동교로 가니 시문이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 자리에 앉아 과감히 경당 원운을 외웠다. 왼쪽에 적힌 내용과 같이 이번에 나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芝谷靑山似屋廬 中包結局此幽居 竹邊爲沼花邊石 架上而琴案上書 舊業修藏閒自適 新心照撿澹如處 從來履薄臨深處 誦子華扁擥子裾
지곡의 청산은 초가집과 비슷하네. 결국, 이곳 지곡 청산을 가슴에 품고 숨어 사네. 대나무가 옆에 있는 건 연못을 위함이고 꽃이 옆에 있는 돌을 위함이네. 선반 위에는 거문고가 있고 책상 위에는 책이 있네. 오래전부터 모은 재산은 공부하는 데 써버리고 한가하니 유유자적하네.
새로운 마음으로 깨우치고 사는 곳을 조용히 살피네. 깊은 곳에 들어가듯 살얼음을 밟듯 조심조심 거처에 따라 들어왔네. 암송하는 사람은 편액에 화려하고 뽑는 사람은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네.
天南瑞石是匡廬 下有幽人舊卜居 三酌無巡傾宿釀 千金不惜買新書 春回凍木非長晦 月到纖埃凈太處 餉福林泉無過此 朱門何必曳華裾
하늘 남쪽에 있는 서석산은 광려산이라 하네. 서석산 밑에서는 오래전부터 살 만한 곳으로 점찍고 몰래 들어와 숨어 살았네. 돌아가면서 술을 마셔봐야 석 잔도 못 마실 것 같아 머무는 집에서 술을 빚네. 새 책을 천금을 주고 사더라도 아깝지가 않네. 봄이 돌아왔건만 꽁꽁 언 나무는 오랫동안 속내를 감추고 싹을 틔우질 않네. 달이 비추니 커다란 곳에 작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네. 산과 들에 복을 내리니 이곳에 어떠한 허물도 없네. 붉은 문은 왜 하필 화려한 옷자락을 잡아끄는가.
重陽日對菊悵然有懷三絶寄蒼史 丁亥
9월 9일 일 국화를 보고 서글픈 마음이 들어 세 수의 절구를 지어 창사에게 주다
常年九日菊花遲 九日今年發菊枝 我思故人千里外 此心猶有菊花知
상년 9일은 국화가 늦게 피네. 올해 9일에는 가지에 국화가 피었네. 옛 벗을 생각하니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네. 이내 마음을 알아주는 국화가 있으려나.
良辰小酌擧遲遲 試把籬香嗅宿枝 自憐蕉骨稜稜瘦 風落鳥巾髮不知
좋은 날 작은 술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네. 시험 삼아 울타리를 붙잡고 냄새를 맡으니 옛 가지에서 향기가 풍기네. 가련한 파초는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시들해졌네. 바람이 불어 새가 내려앉은 건 아는데 두건 밖으로 머리가 삐져나온 건 알지 못하네.
衡門歲晏此棲遲 誰把茱萸寄一枝 想得洛陽餻字宴 黃花酒煖有新知
해가 저무는 초가삼간 이곳에서 하는 일 없이 느긋이 돌아다니며 사네. 누가 수유나무를 붙잡아 가지 하나를 꺾어 주려나. 한양에 있을 때 餻자로 시를 지으며 잔치를 벌이던 때가 생각나네. 국화주는 따뜻하게 데워야 제맛이라는 걸 새롭게 아네.
芝谷競堂會諸益
夢把靑藜自往還 洞霞深處水雲閒 路穿巷北微黃葉 家在橋南淡碧山 石氣遶欄通硉矹 泉聲入戶續潺湲 覺來風物渾相似 賓主淸譚共醉顔
꿈에 명아주 지팡이를 붙잡고 멀리 갔다 돌아왔네. 구름과 물 사이만큼이나 깊은 곳에 있는 마을에 노을이 지네. 북쪽 마을로 통하게끔 뚫어놓은 길에 노랗게 물든 잎 적네. 다리 남쪽 연푸른 산에 집이 있네. 돌의 기운이 난간을 위태롭게 감싸 지나가네. 샘물 소리 집으로 들어와 잔잔히 이어지네. 문득 깨달으니 세상 만물이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닮았네. 손님과 주인이 서로 취한 얼굴을 마주 보며 터놓고 이야기하네.
次韻賀友菊抱孫
先生喜得抱孫名 況復奎開異滿平 吉日初回黃菊節 和風新結紫蘭萌 已占犀角懷中羙 酷愛驪珠掌上明 百寶晬盤心祝語 文淸家聲繼賢聲
선생이 손주를 얻어 이름을 지으니 몹시 기뻐하네. 더군다나 규와 개가 겹친 날 특이하게 운수가 평원에 가득하네. 그래서 길일은 처음 돌아오는 노란 국화가 피는 중양절이네. 온화한 바람이 부니 자줏빛 난꽃 촉이 새로이 맺히네. 무소의 뿔로 이미 점을 보니 새끼 양을 품고 있었네. 모두가 탐을 내는 여의주가 손바닥 위에서 밝게 빛나네. 돌상에 백 가지 보물을 올려놓고 진심으로 축원을 말을 남기네. 문청 가문의 명성을 계승하여 어진 가문의 명성을 꼭 이루길 비네.
次友菊見贈
東橋處士住東林 老屋蕭蕭澗上臨 去路初穿靑嶂入 來時重訪白雲深 穩眠甘似新醅酒 好句精於百鍊金 芝谷親朋如有問 年來蕉骨病沈吟
동쪽 다리를 건너 동쪽 숲에 거사가 사네. 노인의 집에서 쓸쓸히 부는 바람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네. 새로 뚫은 길을 지나 푸른 산봉우리로 들어가네. 거듭 올 때마다 하얀 구름이 자욱하네. 이곳에서 편안히 잠이 들면 달콤하기가 새로 빚은 탁주와 같네. 좋은 글귀를 골라 쇳덩이를 백번 단련하듯이 다듬네. 지곡에 있는 친한 벗이 어떠냐고 물으니, 근년 들어 초췌해질 만큼 뼈에 든 병이 깊어 끙끙 앓는다 하네.
次香坡曺文行回甲韻 曺秉旭
歲丁亥菊月念二香坡子懸弧回甲也 說盃酌速賓友以詩倡和綺霞珠月輝暎 篇章香坡子後 我一年又二日若飮以屠蘇當推少年盃矣 床琴偕樂園箎同和善慶滕滕皆在余上尤可賀也 忘拙續貂
정해년 음력 9월 22일은 향파의 회갑 일이네. 술잔치에 손님으로 벗들을 불러 아름다운 놀이 지고 붉은 달이 휘영청 뜨면 시를 짓고 화답하는 놀이를 하자는 말을 들었네. 편장은 나중에 향파가 하겠지. 일 년 하고 이 일이 지나 내가 만약 도소를 넣은 술을 마신다면 당연히 소년이 술잔을 골라야 하겠지. 평상 위에 가야금과 함께 낙원 피리가 같이 어울리고 선을 쌓아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니 가서 축하할 만한 일이다. 나쁜 것은 다 잊고 훌륭한 사람의 뒤를 따르려 하네.
絳甲初回黃菊開 香坡心地凈無埃 平居留客常時酒 何況邀朋吉日盃 惠雨芳蘭生砌戺 長春老栢蔭亭臺 主翁養得无量福 五竺三山入畵來
진홍색 회갑 날이 처음 돌아와 노란색 국화가 피었네. 향파의 본바탕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네. 평소에도 나그네가 머물면 항시 술을 내주었네. 하물며 길일 날 친구를 만나 어찌 술잔을 내주지 않겠는가. 은혜로운 비가 내리니 섬돌 옆에 향긋한 난초가 피어나네. 봄에 오래된 잣나무가 길게 가지를 뻗어 정대에 그늘이 졌네. 주인장 자식들을 길러 헤아릴 수가 없는 복을 얻었네. 인도 세 개의 산이 그림 속에 들어왔네.
弄環堂與友菊同宿
林居散跡亦淸班 萬壑烟霞供喜顔 匹馬完城相送去 閒雲瑞石浪吟還 襟虛賓主元無別 睡熟仙凡只一間 到老無端錢癖甚 多多我欲買名山
숲속에 살면서도 자취를 남기지 않으니 역시 청빈한 양반이네. 수많은 골짜기에 안개가 끼니 얼굴에 기쁨을 주네. 한 필의 말로 성을 완성하고 서로를 떠나보내고 가네. 한가한 구름 서석산을 멋대로 휘돌아 돌아오네. 가슴을 터놓으니 손님과 주인이 원래가 구별이 안 되네. 단 한 순간이라도 선인과 속인이 충분히 푹 자봤으면 하네. 늙으면 무장 심해져 돈 욕심이 끝이 없네. 나는 아무리 많아도 좋은 산을 항상 갖고 싶네.
次友菊見寄疊字格
推來物物細看看 月暎空潭水暎欄 種德由吾難亦易 揚名在彼易而難 風瀾非險機關險 天地雖寬道體寬 石北靑山溪上屋 一身安處一心安
벗이 찾아와 모든 물건을 세세하니 검사하네. 밝은 달이 허공을 비추고 맑은 물이 난간을 비추네. 남에게 은덕을 베푸는 일이 나에게는 말이 쉽지 역시나 어려운 일이네. 이름을 드날린 그대에게는 어렵지만 쉬운 일이겠지. 바람에 물결이 일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한테나 위험하지 보통 사람한테는 위험하지 않네. 천지가 관대하면 지체 높으신 분도 관대해지네. 돌이 많은 북쪽 푸른 산 계곡 위에 집이 있네. 이내 몸이 편안하니 마음도 평안하네.
友菊詩一代揚名猶可易百年種德正爲難 우국의 시에서 한 세대를 사는 동안 이름을 날리기는 쉬우나, 백 년 동안 올바르게 남에게 덕을 베푸는 건 어렵다는 걸 나타냈다.
石低訪蕖史鄭丈二首
竹籟松聲愜素心 星河的歷破陰陰 將軍樓閣碧山暮 處士園庭黃葉深 赬果劈來醒病胃 殘燈剔盡費曼吟 二年弧負衡門約 策策芒鞋此更尋
댓잎 스치는 바람 소리 소나무 스치는 바람 소리 상쾌한 것이 평소 내 마음과 같네. 별들의 무리가 부서져 밝고 명확하니 하늘이 깊고 어둡네. 대장군 누각과 푸른 산이 어둠에 잠기네. 처사의 정원에 노란 잎사귀 무성하네. 붉은 과일 가르니 주린 위가 깨어나네. 꺼져가는 등잔불이 다 타도록 밤새 시를 읊네. 이 년이나 홀로 짊어진 누추한 집이 갈수록 빈곤해지네. 짚신에서 쓱쓱 바람 소리 나도록 이곳을 다시금 찾네.
名山驢笈負初心 若憶先生住洞陰 雪意徑尋千嶂暗 書香坐對一燈深 紙囱有影寒梅瘦 竹屋無聲冷鳥吟 白首憐吾消渴甚 隣家酒熟夜相尋
당나귀 안장에 짐을 얻고 유명한 산에 한번 가보자고 처음으로 마음먹었네. 선생이 사는 마을을 떠올리니 눈앞이 캄캄해지네. 눈이 내리려는지 길 위에서 바라본 천 개의 봉우리가 어둡네. 혼자서 마주 보고 앉아 책 향기를 맡으니 등불 켠 밤 깊어지네. 종이 바른 창문에 추위에 수척해진 매화가 비치네. 대나무가 둘러싼 집에 아무 소리도 안 나고 냉랭한 새소리만 들리네. 머리가 허연 나 자신이 가련해 애타는 가슴만 더 심해지네. 이웃집 술이 익어가는 밤에 서로를 찾네.
未報君詩尙愧心 重來十月坐山陰 蔫紅委地楓初落 逈白棲岺雪未深 殘瀝乾壺難慰渴 寒燈照鬢强沈吟 舊要如今張思叔 款段何時辦一尋 蕖史
그대의 시에 보답을 못하고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부끄럽네. 10월에 또 온다고 하니 앉아서 바라보는 산이 어둡네. 시든 붉은 꽃이 땅에 나뒹구니 단풍이 이제 막 떨어지기 시작하네. 멀리 보이는 백서령은 눈이 아직 깊이 쌓이지 않았네. 물병에 남은 몇 방울 물마저 다 떨어져 갈등을 달래기 어렵네. 성성한 귀밑머리를 쓸쓸히 등불에 비추고 곰곰이 생각하네. 오랜 친구는 장사숙과 같네. 걸음걸이 느리니 언제쯤 준비해 찾으러 가야 하나.
北村鄭公休書室月梧楓岳共賦
梅邊有屋竹雙扉 短策相尋路轉微 客夜初題紅葉句 老年猶帶綠藍衣 天寒星斗光芒潔 地僻園林俗事稀 待到長安春色早 看花一約莫相違
매화 옆에 대나무로 엮은 두 사립문이 달린 집이 있네. 짧은 막대를 짚고 서로를 찾고 길은 갈수록 희미해지네. 밤에 찾아온 손님이 홍엽을 첫 번째 시제 글귀로 정하네. 몸은 비록 늙었지만 푸른 띠를 두른 옷을 입었네. 추운 하늘에 떠 있는 북두칠성 빛줄기가 참 맑네. 구석진 곳에 있는 원림에 속세의 일이 적네. 장안에 봄 색깔이 빨리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꽃구경 가자는 약속 서로 어기지 않기로 하네.
時公休發解有明春西笑之約 정공이 내년 봄에 과거 시험에 합격해 쉬고 있으면 그렇게 하자고 서쪽을 향해 웃으며 약속했다.
寓言
衆嫌於鼠鼠嫌貍 縱欲相圖不敢搖 畢竟奇功落誰手 漁人蚌鷸坐無勞
사람들은 쥐를 싫어하고 쥐는 이리를 싫어하네. 서로 내쫓으려 하지만 감히 흔들지는 못하네. 마침내 누구의 손에 기묘하게 일이 떨어졌네. 고기 잡는 사람이 조개와 물총새를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잡았네.
魚鳥詩
潛魚困處羡飛鳥 飛鳥窮時羡潛魚 終也飛潛逃未得 不如隨分各安居
헤엄치는 물고기는 자기를 탐내며 하늘을 나는 새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놓이네. 하늘을 나는 새는 배가 고플 때마다 헤엄치는 물고기를 쫓네. 결국에는 새가 날면 헤엄쳐 도망치니 물고기를 얻을 수 없네. 각자 떨어져 편안히 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네.
和友菊見寄
未見君詩已識心 林窩何處寄山陰 凍梅全活憐春早 惡石平埋悟雪深 素計嗟違丹仗粒 白頭其奈病況吟 從今願結東隣社 誠正工夫課日尋
그대의 시를 보지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이미 알고 있네. 움막집이 숲속 어디쯤 있기에 가야 할 산이 이리도 어두운가. 꽁꽁 언 매화가 완전히 소생하도록 어여삐 여겨 봄이 빨리 왔으면 하네. 울퉁불퉁한 바위가 평평하게 묻혀있는 걸 보고 눈이 깊다는 걸 깨닫네. 낟알을 붉은 의장으로 감싸고 알뜰히 계획한 일이 어긋나 저절로 탄식이 나오네. 머리가 허연 그대는 병세가 어찌하기에 끙끙 앓는가. 지금 당장 쫓아가 동쪽에 있는 이웃과 모임을 맺었으면 하네. 성실히 올바른 자세로 공부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찾네.
和金善鳴僑江陵回鄕
강릉에 있는 김선명에게 잠시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오다.
寒窓書燭影亭亭 初見君時已盡情 千里江陵爲客跡 重來瑞石有詩聲 野梅俗放春心穩 山雪留痕夜氣明 鏡浦遺題曾玩未 吾先琴操世知名
추운 날 책 읽는 창문에 드리운 촛불 그림자 크네. 그대의 시 처음 보는데 이미 정이 듬뿍 들어 있네. 나그네 자취를 남기려고 천 리나 떨어진 강릉을 찾았네. 서석에서 거듭 올 때마다 시의 소리가 들리네. 들판의 매화 흐드러지게 핀 봄날의 마음 평온하네. 산에는 눈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고 밤의 기운이 밝네. 경포에 남긴 시어는 거듭 봐도 정숙하고 아름답네. 나의 선조가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네.
先祖僕射公有鏡浦詩後江南人爲琴操出江陵誌 나의 선조 복야공께서 경포에 시를 남기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강남 사람들한테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강릉지에 실려있음.
除夜
雞鳴挑燭追湯婆 新歲平安舊歲過 六十三翁何所祝 看花有酒有詩多
닭 울음소리 들리니 촛불 심지를 돋우고 더운 물통에 들어가 몸을 씻네. 묵은해가 갔으니 새해는 평온했으면 하네. 예순셋 노인 어찌 축복하지 않으리. 꽃을 보면서 술을 마시고 시나 많이 지었으면 하네.
齋洞和兪蒼史以畵梅一紙臨別贈詩 戊子二月
去年爲客長安陌 寒食今年又是客 相對悵然無一言 此心惟寄梅花驛
지난해 나그네 서울 큰길을 찾았네. 올해 한식에 나그네 또 그러했네. 서로의 얼굴을 보니 서글픈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못 했네. 이 마음 생각하라고 활짝 핀 매화꽃에 담아 주네.
春雨春風洛陽陌 年年惆愴賦送客 歧路贈君梅一枝 夢魂應在江南驛 蒼史
봄비와 봄바람 서울 거리를 휩쓰네. 매해 나그네 떠나보낼 때마다 개탄스러운 마음이 들었네. 갈림길에서 매화 가지 하나를 그대에게 주었네. 꿈에 넋이 먼저 알아차리고 벌써 강 남쪽 역참에 가 있네.
完山賀白樂元昇庠
白參奉喆洙子年十五以 恩賜付之榜末
豊沛杏花春正繁 白頭司馬賀新恩 五百員中年最少 知應圓月照天門
풍패의 살구나무 꽃이 봄을 맞아 흐드러지게 피었네. 머리가 허연 진사가 새로 진사시에 합격한 자에게 축하를 건네네. 오백 명 중 나이가 가장 적네. 둥근 달도 그걸 알고 대궐 문을 훤히 비추네.
完山賀金命圭昇庠
金樂安序曾孫與白樂元同榜
篤孝家中晩祉繁 斑衣司馬荷天恩 榜人若問芳年幾 大學初頭入德門
효성이 지극한 가문에 오래오래 복이 많기를. 하늘의 은혜를 입어 효자 진사가 되었네. 만약 누가 진사가 될까 묻는다면 꽃다운 나이의 청년이 아닐까 싶네. 대학까지 마치고 덕스러운 문에 가장 먼저 들어왔네.
完山和竹
琅玕一寸抵千緡 箇箇繃孫長玉麟 掠地涼風鳴琵響 橫庭落月碎金鱗 虛心與我同淸瘦 堅節惟君耐苦辛 數曲漁歌江上夕 楚人愼勿伐爲薪
아름다운 옥 한 마디는 동전 천 꾸러미와 맞먹네. 오래된 것 새것 각각 묶으니 옥 기린이 되네. 선선한 바람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니 비파소리 울리네. 정원을 가로질러 달이 지니 황금빛 비늘이 산산이 부서져 떨어지네. 속이 텅 빈 그대의 마음 수척한 내 모습과 같네. 그대 매서운 고통 참고 절개 견고히 지키네. 강 위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어부의 노랫소리 날이 저물도록 이어지네. 초나라 사람은 신중치 못하게 대나무를 베어서 땔나무로 써버렸네.
素沙途中
百步雙株合抱材 村丁竭力響如雷 朝家云有安邊策 萬里金繩電報來
백 걸음 걸으니 두 사람이 재능있는 한 사람을 품고 있네. 마을 장정들 우뇌와 같은 함성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하네. 아침에 집으로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세우고 있다 전하네. 만 리에서 쇠줄을 타고 전보가 오네.
成歡驛聞宋左溟下世悵賦一絶
痛飮西湖酒 朗讀西湖詩 不見西湖叟 惟餘古梅枝
서쪽 호수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네. 서쪽 호수에서 소리 내어 시를 읽네. 서쪽 호수에 늙은이가 보이지 않네. 혼자 남은 늙은 매화 가지를 누가 생각하려나.
和石犀遊賞詩𨋀
佳麗蘇湖是海陽 石犀亭子俯晴江 綠楊院裡人三五 芳草洲邊鷺一雙 老屋仍抛書半部 好隣相送酒全缸 殷勤爲謝僉詩伴 袖拾芸香叩竹窓
호수에 아름답고 고운 풀들이 자라는 이곳을 해양이라고 하네. 석서정에 누우니 강이 참 맑네. 푸른 버드나무가 둘러싼 담장 안에 사람이 십오 명 보이네. 방초가 자라는 섬 주변에 해오라기 한 쌍이 나네. 해묵은 초가에 거듭 버려지는 책이 반이나 되네. 사이좋은 이웃 항아리의 술 전부 비우고 서로를 떠나보내네. 함께 시를 짓는 친구 모두에게 성의껏 사례하네. 운향 꽃향기 모아 소매에 감추고 죽창을 두드리네.
社湖春晴
終廢詩工着手低 但要言志不要題 爲客支離遊北洛 尋春晼晩到東溪 郭外微風桃李落 山中晴日鵓鳩鳴 白頭司馬猶狂習 醉把芳樽坐竹西
마침내 하던 일 그만두고 바짝 엎드려 시 짓는 일에 착수하네. 단지 말의 뜻이 중요하지 시제가 중요하지 않네. 나그네 되어 북쪽 서울 구경하러 뿔뿔이 흩어지네. 봄을 찾아 동쪽 개울가로 가니 벌써 날 저물어 어둑어둑해지네. 성곽 밖에 바람이 솔솔 부니 복숭아꽃 배꽃 떨어지네. 화창한 날 산중에 산비둘기 울음소리 들리네. 머리가 허연 진사 지금도 여전히 미친 듯이 지식을 습득하네. 향긋한 술통 붙잡고 취해 죽서루에 주저앉네.
南齋與白雲山金善鳴共賦
書童嘲我老書生 午睡方成句未成 十日看花晴者少 暫時抛酒病還輕 雪山居士梅如瘦 金谷詩人竹似淸 白首猶關春事好 旋將綠意較紅情
서당 아이가 나보고 늙은 서생이라고 놀리네. 낮에 잠을 이루다 보니 시구를 짓지 못했네. 맑은 날이 적어 꽃을 본 게 고작 십 일뿐이네. 병에서 돌아와 몸이 가벼워질 때까지 잠시 술은 멀리하려 하네. 설산에서 사는 거사 매화처럼 수척하네. 금곡에 사는 시인은 대나무처럼 푸르네. 머리가 허연 노인 봄을 겪고 나니 만사가 잘 풀리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어찌 뜻깊은 숲과 정겨운 붉은 꽃을 서로 견주려 하는가.
芝山齋訪主人不遇時階花盛開
黃白蒼紅盡此山 花心次第客初還 只憐笑笑先生竹 特地淸風未可攀
누렇고 하얗고 푸르고 붉은 것이 이곳 산에 다 있네. 꽃구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나그네 초심으로 돌아오네. 다만 대나무 어여삐 여겨 선생 웃음꽃 피우네. 특별히 선선한 바람까지 부는데 끝까지 매달리질 못하네.
佳林書室訪沈丈 能權
松籬短短竹簷高 客與尋春晩更挑 隴陌播綿耕犢倦 池塘況穀吠蛙豪 少年情款新供飯 大耋身輕且覓醪 草野如今多逸足 誰能相馬九方臯
소나무 울타리는 짧고 짧은 대나무 처마는 높네. 나그네와 함께 늦은 봄에 다시금 찾으려 하네. 목화씨 뿌리러 갈아엎는 들판에 송아지 게으름 피우네. 때마침 웅덩이에 사는 개구리 목청 높여 우네. 새로 밥을 차려서 주는 소년의 마음 정겹네. 나이 많은 늙은이 배 속이 비어 또다시 막걸리를 찾네. 궁벽한 시골 지금 다들 발이 바쁘네. 구방고 만큼이나 말을 잘 보는 자 과연 누구인가.
宿白岩書室
堆案新書散不收 林窩幽寂此淹留 缺牆通戶迷三逕 凹硯添波倒十洲 觀海文章方是達 落花風雨易生愁 石榴一樹遲遲發 似向群芳也解羞
책상에 언덕처럼 싸여 있던 책이 사방으로 흩어져 거둬들이기가 쉽지 않네. 깊고 고요한 이곳 숲속 움막에 묻혀 사네. 무너진 담장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니 세 갈래로 길이 갈라져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매네. 움푹 들어간 벼루에 물결이 일어 신선의 바다에 있는 열 개의 산이 뒤집히네. 관해의 글월을 보니 바야흐로 통달하지 않았나 싶네. 비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니 쉬이 시름에 잠기네. 석류 한 그루는 느릿느릿 꽃이 피네. 향기로운 꽃들을 향해 부끄러움을 잊으라 하네.
用畵梅韻五首寄蒼史兪司馬 三月
緩緩歸來花發陌 洛陽司馬義湖客 恰似風流鄭當時 朝朝置騎長安驛
느릿느릿 봄이 찾아와 언덕에 꽃이 활짝 피었네. 서울에서 온 진사 가슴 속에 품은 뜻은 자연의 벗 삼아 세상을 떠도는 것이네. 이는 풍류를 즐긴 정당시와 흡사하네. 매일 아침 말을 타러 서울 역참으로 가네.
銀燭晨光耀紫陌 奎章學士金門客 相得耆詩賡進遾 越裳翡翠來三驛
은촛대 불빛과 새벽녘에 햇빛이 비치니 서울 서리가 빛나네. 규장각에 공부하는 선비는 금문객이네. 늙은이 서로 화답하여 시를 얻네. 월상국 물총새 삼역으로 오네.
黃鳥春風楊柳陌 年年慙愧長爲客 一枝梅畵一篇詞 多謝贈行千里驛
꾀꼬리 봄바람 부니 버드나무 언덕으로 날아오네. 해마다 오랫동안 나그네 되어 떠도니 몹시 부끄럽네. 매화 그림에 가지가 하나요 시가 한 편이네. 감사하는 마음 듬뿍 담아 주려고 천 리나 떨어진 역참으로 가네.
光山是我舊鄕陌 牢閉紫門不見客 終朝尋柳陟林皐 盡日看花臨水驛
광산은 나의 오랜 고향 땅이네. 자문을 걸어 잠그고 굳게 지키니 나그네 보지 못하네. 아침 내내 버드나무 찾아 숲 우거진 후미진 곳을 오르네. 종일 꽃을 보고 수역으로 들어가네.
翠雲亭下古槐陌 知是焚香讀易客 攀取宮花第一枝 好音須寄江南驛
취운정 밑에 오래된 회나무 언덕 있네. 나그네 향 피우고 책 읽기 쉬운 곳이라는 건 다 아네. 기어 올라가 궁궐에서 제일 먼저 꽃 핀 가지를 꺾네. 좋은 소식 있거들랑 강 남쪽에 있는 역참으로 보내주오.
賀蒼史兪益卿登第 四月
劈柳光風吹綺陌 銀袍換作龍門客 百花頭上一枝梅 向者詩函憑達驛
봄볕 따사로운 날 도읍 거리에 바람이 부니 버드나무가 흔들리네. 등용문에 오른 나그네 은포로 갈아입고 시를 짓네. 머리맡에 있는 온갖 꽃들 그중에 한 가지가 매화네. 시함을 맡기러 가는 사람 역참에 도달하네.
奎花學士難兄弟 蘭石相公有子孫 最賀高堂雙白髮 聯翩丹桂荷天恩
형제가 규화 학사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네. 난초와 돌멩이도 모두 자손이 있네. 최고의 축하 말은 그대의 부모가 모두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사는 것이네. 붉은 계수나무 가지를 연달아 머리에 달고 펄럭이는 건 하늘의 은덕이네.
金榜高懸姓字香 分明折得一枝芳 從此雲泥千里隔 故人新貴例相忘
금방이 높은 곳에 걸리니 성씨에서 향기가 나네. 향긋한 꽃을 하나 꺾어 잡은 게 분명하네. 뒤쫓는 구름과 질퍽한 땅은 천 리나 떨어져 있네. 오래된 벗과 새로 사귄 벗은 서로를 잊게 마련이네.
續婦詞十三絶
同巷事紅工 夜夜聚隣婦 吾家冷無油 借坐餘光否 老舅卷綿桶 老姑轉紡車 札札夜中杼 山屋一燈疎 秋田拾遺花 續之猶未及 忽被稅錢催 沒數官家入 賣絲償社錢 短裳幅幅裂 尊姑尙露肩 此身何足恤 暫止機上杼 哺兒救兒啼 舂年且爲飯 山日已傾西 今春結價高 甁儲只升米 飢餓不須憂 恐被官庭箠 女婚已過時 郞材最相合 前秋失綿農 布尺奈空篋 東隣初嫁娘 紡織稱第一 霎時彈十斤 兩日斷全疋 西社一懶婦 抱兒常晝眠 猶恨夕炊空 碎瓢投郞前 土鍋易破底 三時奈漏何 君家新買鼎 鐵價幾許多 君自覲親來 親庭遠耶逋 吾家半日程 不見已三祀 老人常不冠 朝起始盥手 稚子在傍言 今日何處市 斷了一段布 持向城市易 翁醉夕陽來 買魚向前擲
마을에서 베 짜는 일을 함께하다 보니, 밤마다 이웃집 여자들이 모이네. 내 집은 춥고 기름이 없어, 남은 자리를 빌려도 불빛이 비치지 않네. 늙은 시아버지는 솜통을 말고, 늙은 시어머니는 물레를 돌리네. 밤중에 찰찰 베틀 북 왔다 갔다 하는 소리 들리고, 산속 집 한 개의 등만 아주 드물게 켜져 있네. 가을 밭에서 버려진 목화 주워와, 이어보지만 미치지 못하네. 갑자기 세금을 내야 한다며 돈을 내라고 닦달하더니, 관가에서 몰수해 몽땅 가져가 버리네. 실을 팔아 마을에서 공동으로 돈을 모은다고 하니, 다들 짧은 치마 폭폭 찢네. 시어머니는 여전히 어깨를 드러내고, 이 몸은 어찌 돌보라는 것이냐 하네. 베틀 위 북을 잠시 멈추고,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아이를 돌보라고 울부짖네. 방아 찧은 때가 되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 하네. 산속의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고, 올봄은 토지에 붙은 세금이 높네. 쌀을 더 걷어 비축해 둬야만, 배고픔을 걱정 안 할 것 아닌가 하네. 관가의 뜰에서 채찍을 맞을까 두렵네. 여자가 혼인할 시기를 놓쳤으니, 신랑감으로는 가장 잘 맞는 사내이지 않은가. 지난가을 목화 농사를 망쳤으니, 빈 상자에 베 수척을 무슨 수로 채운단 말인가. 동쪽에 있는 이웃 마을로 처음으로 시집을 간 아가씨가 베 짜는 일을 제일 잘한다 하네. 아주 짧은 시간에 열매를 열 척이나 타고, 이틀 동안 전필을 끊었네. 서쪽 모임에 게으른 아녀자가 한 명 있었으니, 아이를 안고 항상 낮잠만 잤네. 날이 저물어 밥을 지어야 하는데 뒤주가 텅 비어 너무나 억울해, 신랑 앞에 표주박을 내던지고 박박 긁네. 질그릇은 바닥이 깨지기 쉬워, 삼시 세끼 새는 물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대의 집에서 새로 솥단지를 산다고 하니, 쇳덩이 가격이 얼마나 비싼가. 시집간 딸이 그대를 보러 온다는데, 친정이 멀다고 도망치기야 하겠는가. 우리 집은 하루에 해야 할 일의 반을 끝내버려, 세 번의 제사를 이미 지내 더는 보지 못하네. 늙은이는 관을 늘 쓰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면 손부터 씻네. 어린아이가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오늘은 어느 시장으로 갈 거냐고 하네. 먼저 베를 끊고, 도시로 가져가 바꿔야 하네. 잔뜩 취해 해 질 무렵에나 돌아온 늙은이, 사 온 물고기 앞으로 가서 던지네.
琴嘯館聞喜宴用竹翠樓韻呈金使君
戊子(1888)元月侯之次子憲洙將赴會余與侯同鑣戾洛 憲洙昇庠以四月念一設宴于昌 衙之琴嘯館時侯之胤子正言 與洙病症差却故尾聯及之
무자년 정월에 제후의 둘째 아들 헌수가 나를 만나려고 제후와 함께 말을 타고 어지러이 서울에 도착했다. 헌수를 사월에 향교에 보내려고 잔치를 성대히 열 생각이었다. 고을에 있는 금소관에 머물 때 제후가 집안에 대를 이을 아들로 정언이었는데, 헌수와 함께 오니 병의 증세가 조금 나아져 미연을 마칠 수 있었다.
妙年司馬擅風流 曲院題名最上頭 洛社聯鞭千里路 江城歌鼓一高樓 繁陰客會樽如海 樂歲民功麥已秋 又喜臺官身漸健 氷啣從此選瀛洲
묘년의 진사 자유로이 풍류를 즐기네. 곡원 가장 높은 곳에 표제가 붙었네. 서울에 모임이 있어 나란히 말을 타고 천 리 길을 가네. 강가 성곽 가장 높은 망루에서 노랫소리 북소리 들리네. 녹음 짙은 곳에 나그네 바다 같은 술 단지 끼고 모여 있네. 즐거운 세상 이미 가을이 지나 백성들 보리를 뿌리네. 기쁘게도 대관이 찾아오니 몸도 점차 좋아지네. 얼음을 입에 물고 좇으니 이 좋은 곳이 바로 신선이 산다는 그 영주 아닌가.
次韻寄東橋詞伯兼呈晩松競齋
日余過西林之弄環堂見東橋爲我言晩松 海奎 種老梅一樹競齋 伯瑞 貯古書千卷一以換花看 書一以換書看花 石西子聞而擊節曰 古有換鵝經換羊詞 今見梅書相換直 千古奇絶事可謂 發前人未發也
전에 내가 서쪽 숲에 있는 농환당을 지나, 내 말을 만송에게 전하려고 동교에서 만났다. 수령이 오래된 매화 한 그루가 경재에게 있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오래된 책 천 권을 꽃을 한 번 보는 것과 바꿀 수 있느냐고 하자, 책 한 권과 꽃을 한 번 보는 것과는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석서가 무언가를 탁 치며 말하기를 옛날에 거위와 경서를 바꾸고 양와 시를 바꾼 적이 있는데, 오늘 매화와 책을 서로 바꾸는 걸 직접 보게 되는데,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극히 드문 일이라고 일컬을 만하고, 꽃이 만발하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먼저 만발했다.
老梅樹傍古書臺 若爲儲耶若爲培 白石庵中千卷載 西湖籬畔一枝來 償債許分紅錦帕 買香不費碧錢苔 當時公案誰看證 菊史先生慧眼開 右屬競齋 菊史東橋号
옛 책을 모아둔 곳 옆에 늙은 매화나무 있네. 쌓아야 하는가 불려야 하는가. 백석 암자에 천 권이 들어 있네. 서쪽 호수 울타리 옆으로 가지 하나가 쭉 삐져나왔네. 붉은 비단 휘장을 반으로 잘라 빚을 갚으려 하네. 푸른 돈에는 이끼만 끼네. 향기는 사는 데 쓰지 않으면 푸르게 동전에 이끼가 끼네. 조금 전 말한 그대들의 안건을 누가 증명해 보일 것인가. 국사 선생의 지혜로운 눈동자가 활짝 열리네.
花馥書芬間一臺 好書愛似好花培 堆案煙霞藏史在 隔墻春雪送香來 兩地分占隣舍柳 一門同看異岑苔 梅書論價誰多小 明月淸風好面開 右屬晩松
꽃향기과 책 향기 사이에 높은 단이 하나 있네. 좋아하는 책을 사랑하는 건 좋아하는 꽃을 늘리는 것과 같네. 안개와 노을 같은 서류가 장사각에 쌓여있네. 담장 사이의 춘설을 떠나보내니 꽃향기가 찾아오네. 두 개의 땅을 나눠 가진 이웃집에 버드나무가 있네. 한 개의 문을 함께 보는데 봉우리와 이끼 만큼이나 서로 다르네. 매화와 책을 놓고 가격을 논한들 어느 게 많고 적겠는가. 밝은 달과 청량한 바람이 좋아 얼굴이 펴지네.
爲買芳隣近石臺 千篇爭似一枝培 書爲公器誰賓主 花亦天心任去來 已把蠟香分院樹 閒看鳥迹卬階苔 採華剝實無餘蘊 還此經函空殼開 右屬晩松
향기 좋은 꽃을 사려고 하니 인근에 석대가 있네. 천 편의 시가 경쟁하듯 쌓여있는 것이 한 개의 가지가 쭉쭉 뻗은 것과 같네. 공동으로 보는 책이라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모르네. 꽃 또한 하늘의 마음이니 마음대로 오가네. 꿀 향기 맡는 걸 그만두고 서원의 나무를 나눠 갖네. 한가로이 새들의 자취를 둘러보고 계단에 붙은 이끼를 바라보네. 꽃을 따고 과실을 벗기니 더는 남은 게 없네. 텅 빈 경서 상자를 돌리니 뚜껑이 열리네.
書癖梅顚各占臺 西隣爲底老根培 嗜如菖歜分香去 價似梧梧送月來 萬古公評抽案簡 先春消息過墻苔 君家淸債因兼得 書顧自如花自開 右屬競齋
책에 빠진 사람과 매화에 미친 사람이 각자 높은 곳을 차지했네. 땅속 깊이 뿌리가 박히듯 서쪽에 이웃이 늘었네. 즐겨 먹는 창포 김치 향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네. 가사의 오오를 떠나보내니 달이 뜨네. 오래전부터 서류와 편지를 뽑아 공정히 평가하였네. 봄소식이 오기도 전에 담장에 이끼가 너무나 많이 끼었네. 그대의 집이 빚을 다 갚은 까닭에 그 이상의 것을 얻네. 저절로 꽃이 피듯 저절로 책을 돌아보네.
萬壽洞與友村三槎小山游賞
穿雲入洞路又橫 世盧旋消覺體輕 案對靑山當劒立 座間流水朁琴鳴 名區再到林花落 劇句深思鬢雪生 客夜餘酲猶未祛 根盃更洗尾壺傾
구름 뚫고 만수동 길로 들어 다시 가로질러 가네. 티끌 같은 세상 돌려서 쓸어버리니 깨달아 몸이 가벼워지네. 청산과 마주하니 당장에라도 칼이 일어설 것만 같네. 앉은 자리 사이로 물이 흘러 이내 거문고 소리 들리네. 유명한 곳에 있는 숲에 들어오니 꽃이 떨어지네. 글귀를 재빨리 쓰려고 생각을 깊이 했더니 귀밑머리가 눈처럼 하얗게 세네. 나그네 밤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숙취를 떨쳐내지 못하네. 술잔 바닥을 다시 씻고 가느다란 술병을 기울이네.
友村書舍夜宿
我愛芝園 叟一生遊物初招朋傾宿釀敎子讀新書 世事藏蕉鹿禪心警木魚 居貧元匪病吾道樂猶餘
나는 지실의 동산을 사랑했네. 늙은이 일생은 태초의 세상에 벗을 불러들여 노는 것이고, 드러누워 잠을 자고 술을 빚고 자식을 가르치고 새로운 책을 읽는 것이네. 세상일이라는 것은 파초로 감춰둔 사슴같이 덧없는 것이니, 마음을 고요히 하고 목어의 외침에 두려워해야 하네. 가난하게 살더라도 가장 으뜸은 내가 병들지 않는 것이고, 여유를 부리며 도를 깨우쳐 즐기는 것이네.
초록몽 : 인생의 득실(得失)이 꿈과 같이 허무하고 덧없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중국 정(鄭)나라 사람이 사슴을 잡아 땔나무로 덮어 감추어두었으나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장소를 잊어버려 찾지 못하고, 그것을 한바탕 꿈으로 체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열자(列子)》 〈주목왕편(周穆王篇)〉에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나라의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다가 사슴을 한 마리 때려잡았다. 그는 남이 볼까 두려워 허둥지둥 구덩이 속에 사슴을 감추고 땔나무로 그 위를 덮었다. 그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가 그만 사슴을 숨겨 놓은 곳을 잊어버렸다. 그는 꿈을 꾼 것으로 생각하고 길을 걸으면서 그 일에 대해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그의 곁에서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사슴을 찾아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조금 전에 어떤 나무꾼이 사슴을 잡은 꿈을 꾸었는데 그 장소를 모른다고 했소.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사슴을 찾았소. 그 나무꾼은 바로 진실한 꿈을 꾸는 사람이오.”라고 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당신이 나무꾼이 사슴을 잡은 꿈을 꾼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그런 나무꾼이 있겠어요? 지금 당신이 이렇게 사슴을 찾아왔으니 당신의 꿈이 진실된 것이지요.” 하고 말했다. 이에 남편이 “내가 그의 꿈을 근거로 하여 사슴을 얻었는데 그의 꿈이 나의 꿈임을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무꾼은 사슴을 잃은 것을 잊지 않고 있다가 그날 밤 꿈에서 그 장소를 알아냈으며, 사슴을 가져간 사람에 대해서도 꿈을 꾸었다. 날이 밝자 꿈을 따라 그를 찾아가 만났다.
그리하여 사슴을 두고 소송이 벌어져, 이 사건은 사사(士師)에게로 넘어갔다. 사사가 나무꾼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사슴을 잡고 꿈이라 말했고, 사슴을 잡은 꿈을 꾸었을 때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저 사람은 그대의 사슴을 가졌으면서도 그대와 사슴을 두고 다투게 되었다. 저 사람의 아내는 꿈에 남이 사슴을 잡아놓은 것을 알게 되었으나 남이 사슴을 잡은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 사슴을 둘로 나누어 가지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정나라 임금이 “아아! 사사는 다시 꿈에서 사슴을 나누어준 것일 게다.”라고 말하며, 이에 대해 재상에게 물었다. 그러자 재상이 “꿈을 꾸었는지 꾸지 않았는지 저로서는 분별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생시의 일인지 꿈속의 일이었는지를 분별하실 분은 오직 황제나 공자 같은 분일 것입니다. 지금은 황제도 공자도 없는데 누가 그것을 분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사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초록몽(蕉鹿夢)’은 인생의 득실이 꿈과 같이 허무한 것임을 비유하여 쓰인 말이다. 이 이야기는 노자의 청허무위(淸虛無爲) 사상이 녹아 있는 것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비교해볼 만하다.
暑雨榴烘後 凉飇麥熟初 相逢數盃酒 共話一床書 林徑時聞鵲 溪沙晩 釣魚 殷勤終夜枕 懷抱罄無餘 友村
석류 같은 불볕더위가 물러간 뒤에 비가 내리네. 서늘한 바람이 부니 비로소 보리가 익어가네. 서로 만나 셀 수 없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시네. 한 개의 책상에서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네. 숲속 지름길을 지날 때 까치 소리가 들리네. 개울가 모래에서 늦도록 고리를 잡네. 부지런히 일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네. 가슴속에 품은 회한을 다 쏟아내 더는 남은 것이 없네.
碧峯數茅畔 紅日半竽初 張旭三盃草 鄴侯千𨋀書 對鬢雙癯鶴 忘機共隊魚 欲和長城句 還愧續貂餘 三槎
봉우리는 푸르고 물가에는 띠가 엄청 많네. 붉은 해가 절반쯤 기우니 비로소 피리 소리 들리네. 장욱은 술을 석 잔 마시고 초서를 썼네. 업의 제후는 천 축의 책을 쌓아놓고 읽었네. 가냘픈 한 쌍의 학이 귀밑머리를 맞대네. 물고기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서로 무리를 지어 가네. 긴 성과 같은 글귀에 화답하려 하네. 결국 훌륭한 사람 뒤를 못난 사람이 따를까 부끄러워 돌아가네.
張旭 : 자 백고(伯高). 장쑤성[江蘇省] 우현[吳縣] 출생. 초당(初唐)의 서예의 대가 우세남(虞世南)의 먼 친적이다. 술을 몹시 좋아하고 취흥이 오르면 필묵을 잡았으며, 때로는 머리채를 먹물에 적셔서 글씨를 쓰는 등의 취태(醉態)가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장전(張顚)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욱에게 필법(筆法)을 배운 안진경(顔眞卿)은 그의 서법(書法)이 진정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얼핏 보아서 분방하게 느껴지는 광초(狂草)에도 그 바탕에는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서법을 배운 소양을 엿볼 수 있다. 장욱이 자신의 서풍(書風)을 세우게 된 유래를 적은 《자언첩(自言帖)》이 전해진다.
環碧堂與友村諸賢共賦
先賢題咏去 吾輩酒籌添 一水環形合 群峰笏樣尖 蒼凉噓石氣 老大見 松髥 而我猶生客 林禽似亦嫌
선현의 시를 읊으며 가네. 우리는 산가지를 더하며 술을 마시네. 한 방울 물처럼 둥그렇게 하나가 되네. 봉우리가 뾰족한 홀 모양으로 무리 지어 있네. 돌에서 처량한 기운이 불어오네. 큰 어른께서 소나무 잎사귀를 보네. 이에 나는 낯선 손님이 되네. 숲속의 새 싫어하는 것 또한 닮았네.
人以一枝筇贈余詩以謝之
客自邊山寄一筇 丹痕猶帶彩霞濃 明年擬入金剛路 莫向壺仙學化龍
나그네가 변산으로 오더니 지팡이 하나를 주었네. 붉은 흔적이 길게 띠를 두른 짙은 노을 빛깔과 같네. 내년에는 금강산 길 들어가려 하네. 물병 속 신선에게 가서 용이 되지 않았으면 하네.
和尼峰高上舍景七 尼峰 高濟斗
秋懷寥落野村西 極日雲烟草樹堤 蟋蟀音淸通夜話 芭蕉心碧曩時題 歲荒酒國交偏絶 身老詩枰手更低 願借金丹康濟力 蒼生百萬免黃泥
가을을 생각하니 쓸쓸하기만 하고, 서쪽 들판에 마을이 있네. 해 질 무렵 구름 안개 자욱이 피어나고, 제방에는 풀과 나무 무성하네. 귀뚜라미 소리 처량하고 밤에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 들리네. 접때 파초의 푸르른 마음을 주제로 시를 지었네. 흉년이 드니 나라에서 술을 허락했다가 완전히 금했다 하네. 몸이 늙으니 시와 바둑 기량이 떨어지네. 만병을 고친다는 금단을 빌려서라도 마음을 편안히 하고 체력을 기르고 싶네. 백만이 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누런 진흙 길에서 벗어났으면 하네.
近來酒禁方嚴病渴難解項聯有交偏絶之歎 근래 술을 엄격히 금지해 소갈증이 해소되기 어렵다 보니, 시의 앞 연에서 자꾸 막혔다 풀렸다 해 탄식이 절로 나왔다.
答禽語
今年南土大旱甚於丙子(1876)自五月初至八月無雨
泥滑滑語多端苦 竹村西日欲殘 四朔今年無一雨 不愁泥滑怕泥乾
진흙이 미끌미끌하다는 말은 괴로운 일이 많다는 뜻이네. 서쪽에 있는 죽촌에 날이 저물려고 하는데, 올해는 사 개월이나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아 진흙이 미끈거리면 수심이 없고 진흙이 건조하면 두려워했네.
鼎小也莫咨嗟 落葉秋山夜月多 鼎小釜鬵非不可 今年無粟奈炊何
솥단지가 작다고 한탄하지 마라. 낙엽 지는 가을 산에 달빛이 밤을 밝히네. 솥단지는 작고 가마솥은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올해는 어째 조도 나오지 않아 무엇으로 밥을 지어야 할지.
贈蒼史兪注書三疊 九月三日
一派靈源杞水淸 穰穰茀祿闡家聲 六旬九歲神仙老 五白三紅子婿榮 湖海投簪償塵債 田園植杖賦閒情 自慙千里江南跡 未趁華筵賀酒傾 右屬春堂
신령한 수원에서 흘러내린 한줄기 물이 맑네.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복의 공덕이 집안의 명성을 드높이네. 예순아홉의 세월 동안 신선의 노인이 되었네. 오백삼홍 같은 아들과 사위가 창성했네. 호수와 바다에 관직의 욕심 내던지고 먼지처럼 쌓인 마음의 빚을 갚네. 전원에 나무를 심고 지팡이를 짚으며 한가로이 거니네. 강 남쪽에 자취 남긴 걸 스스로 부끄러워하네. 좋은 잔칫상이 벌어져 축하의 술 따르고 싶으나 나아가지 못하네.
奎章學士氷啣淸 鎻直金門趂漏聲 一樹靈春无量壽 雙枝丹桂又生榮 花前小別還如夢 雁際相思不禁情 手把琅玕誰所贈 虛欄消倚日西傾 右屬杞軒
규장각 학사 맡은 관직 청현하네. 直閣 금문 잠그고 물시계 소리를 쫓네. 신령스러운 봄에 자라는 한 그루 나무의 수령은 끝이 없네. 붉은 계수나무에서 자라난 한 쌍의 가지 즐거운 삶을 누리네. 꽃이 피기 전 맞이한 짧은 이별 후 다시 돌아와 만나니 꿈만 같네. 기러기 돌아올 무렵 서로를 그리워하고 생각하니 정겨운 마음 금할 길이 없네. 손에 쥔 푸른 주옥은 누가 준 것인가. 텅 빈 난간을 거닐다 기대니 해가 서쪽으로 기우네.
【유진필(兪鎭弼)】
생몰은 1860(철종 11)∼1925.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우경(右卿), 호는 기헌(杞軒).이다. 예조판서 장환(章煥)의 손자이고, 공조참판 치희(致喜)의 아들로 치량(致良)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머니는 이공민(李功敏)의 딸이다.
1879년(고종 16) 진사로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얻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6년 수찬·규장각직각을 거쳤고, 다음해 홍문관부교리가 되어 신기선(申箕善)·지석영(池錫永)을 갑신정변관련자로서 추국(推鞠)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또한 4년 뒤에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지석영의 사면에 반대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민비정권하에서 교리·검교·대사성·승지 등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갑오경장이 시행되면서 다시 등용되지 못하였다.
文垣風彩玉如淸 梁楚緣何得此聲 司馬多年鉛槧契 登龍今日錦標榮 鄕山結夏偏占勝 洛社來秋更管情 惆悵江南吟病客 黃花白酒與誰傾 右屬蒼史
문원의 풍채 옥처럼 맑네. 양과 초의 질긴 인연 이 소리를 어찌 들을 것인가. 사마가 되기까지 수년간 모임에서 글씨를 쓰고 닦고 익히었네. 오늘에서야 장원급제하여 비단 표식을 받으니 영광스럽네. 고향 산에서 여름날 한 방에 모여 공부할 때 혼자서만 승리를 독차지하였네. 가을에 반드시 다시 서울 모임에 왔으면 하네. 강 남쪽에서 시를 읊는 나그네 병이 들어 너무나 슬프네. 노란 꽃은 피는데 하얀 술을 누구와 마셔야 할지 모르겠네.
賀友菊抱孫次原韻
年年膝下慶志喜以詩歌 雛鶴松陰積祥鸞竹色丰容其克肖晩福 此無過吉 日樽前祝心香注百和
해마다 슬하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겨 기쁜 뜻을 시가를 지어 전하네. 학의 새끼가 소나무 그늘에 모이다 보면 대나무 빛깔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상서로운 난새가 나올 것이니, 이를 잘 따르면 늙을 막에 복을 누릴 수 있네. 이번에 길일을 지나치지 않고 술 단지 앞에 두고 축하의 말을 전하니, 향긋한 마음이 스며들어 화목해지네.
次可川李都事回甲韻
鐵樹花開香觸天 日峯之下可川邊 蘭盆政屬中元節 蓬射回思古甲年 嚮福由於心氣厚 酬恩必也髮膚全 星籌海屋無量祝 繞膝斑衣箇箇賢
소철나무 꽃이 피니 향기가 하늘에 닿네. 일봉 밑으로 가면 가천 변두리가 나오네. 난 화분을 정리 정돈하는 건 중원절에 하는 일이네. 봉사에서 예전 갑년을 회상하네. 마음의 기가 두터워야만 비로소 복을 입을 수 있네. 은혜를 갚으려거든 반드시 육신이 온전해야 하네. 해옥에 별 만큼이나 쌓인 산가지처럼 축하의 말이 여기저기서 무한정 들리네. 색동옷 입고 무릎 위에서 노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현명하네.
李志容(1825-1891)은 寶城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로 蘆沙 奇正鎭을 존모하여 아들을 從學하게 하는 한편 편지를 왕복하면서 교류하였고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말년에 지방 수령직을 수행하다 모함을 받아 유배를 당한 끝에 병으로 졸하였다.
저자의 문집은 두 차례에 걸쳐 간행이 되었다. 초간은 1891년 저자 사후에 곧바로 아들 李敎文(1846~1914)이 喪中임에도 가장되어 있던 유문을 수습 정리하여 松沙 奇宇萬(1846~1916)과 상의하여 간행하기로 한 뒤 시문을 7권으로 편차하고, 이교문이 지은 家狀을 바탕으로 기우만이 1892년에 작성한 행장을 붙이고, 奇陽衍(1827~1895)에게 서문을 받아 1893년에 활자로 인행한 것이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382), 규장각(奎5921), 장서각(K4-6168)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아들 이교문이 초간 당시 빠뜨린 왕복 서간문 약간 편을 수습하여 원집에 넣고 花樹詩 및 遺事, 墓誌銘, 墓碣銘을 부록 2편으로 첨부하여 재편하였다. 이를 1898년 여름 月皐 趙性家(1824~1904)에게 가지고 가서 대략 編摩하고 가을에는 三山齋로 기우만을 찾아가 함께 다시 교감을 한 뒤 9월에 印役을 시작하여 10월에 중간본을 완성하였다. 《중간본》 이 본은 현재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811.98/이지용/소-목), 규장각(古3428-508),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경화당D1-A1265)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의 아들 李敎文이 1898년 활자로 인행한 중간본으로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장본이다. 본 영인저본 중 권7의 제9판은 卷次가 누락되어 있다.
贈茅峴申斯文羽瑞
茅山處士玉中珍 一別多年意更新 案上會心千古友 門前歛跡五侯賓 白羊淸債曾消夏 黃菊佳辰晩酌春 似我猖狂何足道 江湖髫髮已陳人
모산처사는 옥중의 진품이네. 한번 헤어지고 수년이 지나 다시금 뜻을 새로이 하네. 책상 위에서 서로 마음을 모은 아주 오랫동안 사귄 벗이네. 문 앞에서 다섯 명의 제후와 손님이 발자취를 남기길 바랐네. 하얀 양으로 모든 빚을 깔끔히 갚아 일찍이 여름의 더위를 잊게 하였네. 노란 국화가 피는 경사스러운 날에 늦도록 봄 술을 마시네. 내가 비치지 않고서야 어찌 지금의 덕행에 만족하겠는가. 강호에 머리 풀어헤치고 있으니 이미 썩을 인간이 다 되었네.
次文同敦焚黃韻
篤孝令聞上徹天 朝家褒典此爲先 僉論齊發傾當世 加贈非常共一年 身後欲知名姓貴 生前須盡髮膚全 楸原誠力焚黃夕 趾美皆稱子又賢
효성이 도타워 수령 귀에 들어가고 위로는 하늘을 뚫었네. 이러한 선생을 기리어 조정에서는 포전을 내리었네. 모두가 논의하여 당시의 세상으로 일제히 돌아갔네. 벼슬을 올려줘야 하는데 일 년이나 늘 함께하지 못했네. 죽은 이후에 명성이 존귀함을 알려고 했네. 살아있을 때는 모름지기 육신을 온전히 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하네. 묘소에 정성껏 힘쓰고 황색 종이를 불사르니 해가 지네. 그의 미덕을 계승하여 모두의 아들이라 부르고 또 현인이라 부르네.
題九二樓
昌平官樓擬金正言作
層樓飛出彩雲間 十二瑤臺逈可攀 地古弦歌聞百里 時晴鼓角報重關 襟前繚白三支水 笏外浮靑萬德山 省退悠然拈易坐 龍洲風物此中還
다층의 누각이 하늘 위로 날아올라 다채로운 빛깔의 구름 사이에 놓여있네. 열두 개의 요대가 너무 멀어 붙잡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백 리나 떨어진 오래된 땅에서 거문고 노랫소리 들리네. 날씨가 맑아지니 중관에서 북과 나발을 불어 알리네. 옷깃 앞에 세 갈래의 맑은 물이 휘감아 도네. 홀 밖으로는 푸르른 만덕산이 떠 있네. 조심조심 뒤로 물러나 느긋이 붙잡고 올라 쉽게 자리를 잡네. 용주의 온갖 물건이 이곳 둘레에 다 있네.
芝谷酬唱
書燈炯似夜明珠 圓照靑山屋小隅 俚語皆詩評木客 淸心是藥謝茶奴 更深竹氣侵疎 榻冬暖梅魂起病 株浪迹尋眞無近 遠年來自笑一傖夫 宿友村書室
서실의 등이 밝은 것이 밤에 밝게 빛나는 구슬을 달아놓은 것 같네. 푸른 산 작은 집 모퉁이에 둥근 달이 비치네. 속된 말로 나무꾼 같은 자들이 시를 평하네.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게 약이니 찻물을 끓이는 아랫사람이 감사할 뿐이네. 다시 깊숙이 들어가니 대나무 기운이 스며드네. 걸상에 걸터앉아 있으니 겨울이 따뜻해, 매화의 혼이 병든 몸을 일으키네. 지팡이 짚고 참된 곳을 찾아 떠돌았건만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네. 오랜만에 오니 하찮은 사람이 껄껄껄 웃네.
君有新詩萬斛珠 靑藜來惠碧峰隅 臨溪拾石爲棊子 汲井和苔煮酪奴 聽雨屢驚寒竹韻 評花先到古梅株 相逢顧影還相笑 一樣霜毛二老夫 友村
그대한테는 새로 지은 시가 만 휘의 진주만큼이나 있네. 명아주 지팡이 짚고 아름다운 푸른 봉우리 속으로 들어오네. 계곡에 들어가 돌을 집어 바둑을 두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이끼와 함께 찻물을 끓이네. 빗소리가 들리니 거듭 까무러쳐 한죽이 소리를 내네. 꽃을 평하기에 앞서 오래된 매화나무 쪽으로 가네. 서로 만나 고개를 돌리니 그림자가 따라와 함께 웃네. 늙은이는 둘인데, 서리 내린 허연 머리는 하나네.
宿石門書室二首
不其村畔歲華催 中有高人步石臺 此地皆山臨水住 全冬無雪見春來 竹包風韻寒逾碧 梅本天心病亦開 書帶草香誰采來 新詩欲和愧非才
불기 마을 들판을 보니 세월이 참 빠르네. 그 가운데에 지조 높은 사람 석대 위를 걷네. 이곳 땅과 근처 모든 산이 물을 바라보고 있네. 겨우내 눈이 내리지 않아 봄이 곧 올 듯 보이네. 바람 소리 품은 대나무 추워지니 더욱 푸르네. 매화는 본디 하늘의 마음이니, 병든 몸도 낫게 하게. 향기로운 서대초는 누가 캐서 가져올 것인가. 새로 시를 지으려고 하나 재주가 없어 부끄럽네.
不其村鄭玄所居 불기 마을은 정현 선생이 사는 곳이다.
서대초(書帶草) : 한(漢)나라 정현(鄭玄-호 康成)이 불기산(不其山) 기슭에서 후학을 가르칠 때 자라났다는 풀로, 줄기가 부추처럼 길고 질겨 책을 묶는 띠로 사용하였다 한다. 스승의 유허지를 말할 때 인용된다.
書燭亭亭夜已闌 居然百感逼毫瑞 誰能妙解毛三代 無奈流光指一彈 梅杪吹香知野暖 星芒垂穗覺天寒 若要蘇息蒼生命 試把丹經仔細看
서실에 촛불이 우뚝 솟은 걸 보니 밤이 이미 저물었네. 자연을 벗 삼아 살다 보니 온갖 감정이 떠올라 붓끝이 좁아지네. 삼대에 걸쳐 쌓인 털을 누가 교묘히 풀 수 있을까. 흘러간 세월은 손가락에서 이미 튕겨 나간 것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네. 매화 가지 끝에 향기가 풍기니 들판이 따뜻함을 아네. 별이 반짝이는 빛깔과 고개 숙인 이삭을 보고 날이 춥다는 걸 깨닫네. 혹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막힌 숨통이 트이듯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네. 시험 삼아 붉은 경전을 붙잡아 자세히 보네.
暫住遊笻莫更催 山陰秀色近樓臺 沈綿甘自三冬伏 携蠟敎誰七日來 園鳥偎人啼不盡 橋梅供客倩輕開 百般未易親三益 名下皆知司馬才 石門 蕖史号
잠시 머물다 지팡이 짚고 떠나더라도 다시는 서두르지 말게. 경치가 빼어난 그늘진 산 가까이 누각이 있네. 겨울 석 달 동안 엎드려 있었더니 묵은 병이 떨어져 상쾌하네. 꿀 한 통을 들고 가르치러 누군가 칠 일에 오네. 동산의 새들 사람 가까이 다가와 울음소리 그치지 않네. 다리에서 매화꽃을 건네고 나그네를 대신해 입을 가벼이 여네. 세 가지 이로운 벗과 친해지기가 여러 가지로 쉽지가 않네. 사마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명성이 있는 사람은 다 아네.
悄悄幽懷夜向闌 忽驚書月起林瑞 靑衫袖裡來禽帖 綠綺琴中流水彈 宇宙茫茫孤注熱 江湖渺渺小微寒 愧吾樗散龍鍾甚 不滿時人一把看 石門
쓸쓸히 마음속 생각 깊어지는 밤 끝을 향해 가네. 책을 읽다 숲 끝으로 달이 떠올라 화들짝 놀라네. 푸른 적삼 소매 속에 금첩을 집어넣네. 푸른 비단으로 장식한 거문고를 가운데 놓고 流水曲을 연주하네. 아득한 우주에 홀로 열정을 쏟아붓네. 강호는 아득히 멀고 小微星은 차갑게 식네. 늙어빠진 몸뚱이가 더욱 심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럽네. 만족하지 못하고 당시의 사람 중 한 명을 붙잡아 돌아보네.
小微星 : 별자리 이름. 태미원(太微垣)에 딸린 별자리로, 지금의 사자자리와 작은 사자자리에 걸쳐 있다.
宿楓岳書室二首
客到仙庄好會多 吟魂纔定睡仍魔 無風林院鶴心穩 明月滄江鷺夢和 一粒丹成想句漏 六根塵淨呪阿羅 覺來不在邯鄲枕 星斗闌干夜正何
나그네 서실에 도착하니 모임에 사람이 많네. 시를 어떤 마음으로 읊을지 비로소 정해졌는데 졸음이 몰려오네. 바람 한 점 없는 숲속 서원에 학의 마음 온화하네. 달은 밝고 강물은 푸르고 해오라기 꿈을 꾸네. 句漏山에 가서 한 알의 단사를 만드는 걸 상상해보네. 그동안 쌓인 여섯 근의 먼지를 털어내려 부처에게 엎드려 비네. 깨닫고 돌아오니 아무것도 없어 일장춘몽이네. 북극성은 기우는데 밤은 참으로 어디로 가는가.
句漏丹砂 - 불로장생하는 금단(金丹)의 제조법을 말한다. 구루산(句漏山)은 도서(道書)에서 말하는 제22번째의 동천(洞天)으로서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금단을 만들며 수도한 것이다.
邯鄲枕 :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人生)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虛無)함을 이르는 말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여옹(呂翁)이라는 도사가 있는데, 하루는 한단(邯鄲)이라는 곳에 있는 한 주막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허름한 차림의 노생(盧生)이라는 젊은이가 들어와 한참 신세타령을 하더니 여옹의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그 베개는 도자기로 된 베개로 양쪽에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이 차차 커지는 것이 아닌가! 노생(盧生)이 이상히 여겨 그 속으로 들어가 보니 훌륭한 집이 있었다. 노생(盧生)은 거기서 최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진사시험에도 급제하여 경조윤(京兆尹)을 거쳐 어사대부, 이부시랑에 까리 올랐다. 그는 한때, 모함(謀陷)으로 좌천(左遷)되기도 했으나 다시 재상(宰相)으로 등용(登用ㆍ登庸)되어 천자(天子)를 보필했다. 그러다가 모반(謀反)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포박(捕縛)되었다. 그때 그는 고향(故鄕)에서 농사(農事)나 지을 걸 하는 후회 때문에 자결(自決)하려다가 아내가 말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몇 년 뒤, 노생(盧生)은 무죄로 판명되어 다시 중서령(中書令)이 되고,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져 천자(天子)의 두터운 신임(信任)을 받았다. 그 후 다섯 아들과 십여 명의 손자(孫子)를 두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노환으로 죽고 말았다. 노생(盧生)이 언뜻 깨어 보니 모든 것이 꿈이었다. 주모가 끓이던 조(粟)가 아직 익지도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노생(盧生)이 이상히 여겨 「어찌 꿈일 수 있는가?」하자 여옹은 웃으며 「인생 지사 또한 이와 같은 것이라네.」하고 말했다고 함
亂草滋成不厭多 先從靜域伏詩魔 梅窓讀畵參三昧 蘭室聞香注百和 理詠同隨流水至 起居相接達峰羅 艶君奇骨淸如玉 輝世文章不琢何
잡초가 번성해도 그다지 싫지가 않네. 먼저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 시의 마귀 앞에 엎드리네. 매화꽃 핀 창가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삼매경에 빠지네. 서실에 온갖 것이 스며들어 향기가 풍기네. 天理와 시가가 물 흐르듯 함께 따라와 두루 미치네. 사는 것이 서로 접하여 줄줄이 늘어선 봉우리에 이르네.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그대 용모가 뛰어나고 눈동자 맑은 것이 푸른 옥과 같네. 세상을 빛낼 좋은 문장인데 어째서 다듬지 않는가.
起居相近 飮食相接 而賤曹多事 使我苦惱 살아가는 것이 서로 비슷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 서로 접해 천한 무리의 일이 나를 고뇌케 하네.
宿景先書舍四首
移筇咫尺似尋眞 瀟灑門庭不受塵 信宿支離遊北社 狂吟次第到西隣 參天凍栢非長晦 撥地香萱已早春 皓首靑年將影坐 傍人錯道景中人
지팡이를 짚고 아주 가까운 거리를 가더라도 진경을 찾듯 해야 하네. 소쇄원 문 안쪽 정원은 먼지 하나 보이지 않네. 이틀 밤을 머무르고 뿔뿔이 흩어져 북쪽 모임을 향해 떠나네. 미친 듯이 시를 읊은 뒤 서쪽 이웃 마을에 이르네. 하늘 높이 치솟은 동백은 어두워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네. 향기로운 원추리 땅을 뚫고 나오는 걸 보니 이미 봄이네. 늙은이와 젊은이 그림자 거느리고 자리에 앉네. 옆에 사람이 풍경 속에 사람이 있다고 잘못 말하네.
荒園數畝拓新庭 弟竹兄梅各稱情 林邃和烟眞澹泊 峰尖帶雨不分明 病吾强敵攻難去 詩爭奇兵遇輒平 聞道丫鬟能解字 君家疑是鄭康成
황폐한 동산 수백 평을 넓혀 정원을 새로 짓네. 각자 뜻을 맞혀 동생은 대나무 형은 매화나무 심네. 숲속 깊이 안개가 피어올라 참으로 담박하네. 뾰족 튀어나온 봉우리마다 비가 내리니 어디가 어디인지 분명치 않네. 강적인 병이 나를 공격하니 앞으로 가기가 어렵네. 문득 평지에서 기이한 병사를 만나 시를 다투네. 듣건대 道라는 것은 여복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하네. 그대의 집은 정강성의 집인가 의심이 드네.
한나라 때 저명한 학자인 정현(鄭玄)은 자가 강성(康成)인데 그가 불기산(不其山)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그 산 아래 염교〔薤〕를 닮은 풀이 자라서 잎의 길이가 1척(尺)이 넘고 특이하게 질겼다.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이 강성서대(康成書帶)라 불렀다. 《太平御覽 卷944》 소식(蘇軾)의 〈서헌(書軒)〉에 “뜰 아래 이미 서대초가 생겼으니, 사군은 아마도 정강성인가 보오.〔庭下已生書帶草 使君疑是鄭康成〕” 하였다.
仙山郍採草金光 住我韶華六十霜 生於納納今天地 坐看區區一海陽 春風秋月幾時樂 薊北江南萬里長 倚劒狂歌君莫笑 英雄可奈髮蒼蒼
신선이 사는 산에서 어떻게 황금빛이 나는 풀을 캘까. 나는 육십 년이나 화창한 봄의 경치를 즐기며 살았네. 축축한 데서 태어나 지금은 천지간에 있네. 앉아서 돌아보니 해양은 하나인데 생각은 제각각이네. 봄에는 바람이 불고 가을에는 달이 뜨는 이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가. 북쪽 계주에서 남쪽 강까지 만리장성만큼이나 길다네. 칼을 휘두르며 미친 듯이 노래하는데 그대는 웃지 않네. 영웅은 어찌 머리칼이 창창한가.
林涇逶迤石剗危 南莊一宿本無期 松疎竹密家深處 雨乍烟多客到時 夜燭撿書虫自落 晨窓起夢鳥先知 都將雪水千尋碧 瀜作詩人一硯池
구불구불 이어진 숲속 지름길에 박힌 돌을 없애려니 위험하네. 남쪽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본격적으로 무기한 여행을 떠나네. 소나무는 적고 대나무만 많은 그런 깊은 곳에 집이 있네. 나그네 이르렀을 때 비가 잠깐 흩뿌리더니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네. 밤에 촛불 켜놓고 책을 살피자 벌레들 저절로 떨어지네. 새벽이 오니 창가에서 꿈꾸던 새들이 먼저 아네. 높고 푸른 절벽에 모든 게 눈이요 물이네. 시를 하도 많이 지어 시인의 연못 먹물로 물드네.
千嶂碧環一水西 寒梅樹下路高低 鳥皮凭滑甘消日 蠟齒行輕不泊泥 狂客題詩擔杏夯 主人無事謝輪蹄 鸕鶿岩畔葡萄綠 願使春江作酒堤 訪北村書舍
푸른 고리 모양의 천 개의 가파른 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 서쪽으로 흐르네. 추운 매화나무 밑으로 난 길 높고도 낮네. 검은 가죽 신을 신고 부드럽고 달콤한 나날을 보내네. 꿀을 먹듯 나이만 먹다 보니 진흙이 얇게 깔렸을 뿐인데 가는 길이 가볍지 않네. 미쳐 날뛰는 나그네 시제가 부담스러워 살구나무에 매달리네. 주인은 쓸 일이 없다 보니 수레와 말을 거절하네. 가마우지는 바위 끝에 앉아 있고 포도송이는 푸르네. 봄의 강물로 술을 빚어 제방을 가득 채웠으면 좋겠네.
次柳氏 贈施焚黃韻
在浴川木寺洞
幽居篤行際明時 天日於昭在上知 里表焜煌丹楔竪 臺啣珍重袞章垂 筍靑魚白多生感 玉篆金銘永世期 眉老遺風江上宅 行人指點過遲遲
지금같이 앞날이 밝은 날에 독하게 마음먹고 들어가 고요히 묻혀 사네. 하늘에 밝은 해가 떠 있는 곳에 지혜로운 사람 있네. 집 앞에 세워진 붉은 문설주 겉과 밖이 광채를 뿜네. 사헌부에서 아주 소중히 여겨 곤장 베풀었네. 푸른 죽순과 하얀 물고기가 많이 생동감이 넘치네. 옥 같은 이름 金銘 두 글자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하길 바라네. 바람 부는 강 위쪽에 눈썹이 허연 노인이 남긴 집이 있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가다 보니 길이 늦어지네.
冬暖麥苗茁茂飢民賴以救活口占一絶
冬郊麥葉似春郊 爲是風喧雪不驕 菜色南民和作飯 神功可敵萬千包
겨울의 교외 보리 잎사귀가 봄의 교외 보리 잎사귀가 같네. 이는 바람이 따뜻하고 눈이 적당히 내려준 덕분이네. 얼굴빛이 푸성귀 같은 남쪽 백성이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밥을 짓네. 신의 공덕으로 쌀 수만 수천 포로 갚았으면 하네.
甲兒次韻曰 冬喧花發似春郊 麥葉靑靑太侈驕采采荒年民食足何論 石廩萬千包時十五歲也
갑돌이가 차운하며 말하길 따뜻한 겨울에 핀 꽃은 봄날 교외에 핀 꽃과 같다 했네. 푸릇푸릇 자라는 보리 잎사귀가 사치스러울 정도로 무성하면 흉년에 백성들이 밥해 먹기 충분할 건데 따져 무엇하리. 돌 곳간에 쌀이 수만 수천 포가 쌓여있던 때가 있었으니, 내 나이 십오 세 때였네.
和蒼史兪注書三疊
臨風回首漢江津 千里披函似面陳 院職平安鶴髮壽 閣啣珍重雁行均 淸心是藥渾忘病 休暇猶恩足養神 但願加飧深自愛 太平爲國補昌辰
바람이 불어 한강 나루터로 머리를 돌리네. 천 리에서 편지를 펼쳐보는 것은 눈앞에서 말하는 것과 같네. 승정원에서 일하는 직책이라서 평안해 학처럼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오래 살 듯하네. 규장각 일은 몹시 진중하여 기러기가 날 듯 치우침 없이 똑발라야 하네. 마음을 맑으면 건망증에 약이 되네. 임금의 은혜로 휴가를 얻었다 하니 심신의 피로를 풀기에 부족함이 없네. 단지 바라는 게 있다면 밥 잘 챙겨 먹고 자신을 더욱 아끼는 것이네. 국운을 번성케 하는 것이 태평한 나라에 보답하는 길이네.
歲暮倀倀路失津 江湖鬂髮已成陳 齒根漸沿呑逾大 眼瞖方濃字不均 病渴堪嘆逢酒禁 逐貧無賴寫錢神 年過六十始稱意 新婦靑廬此吉辰
한 해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 나루터 가는 길을 잃어버렸네. 강호에 묻혀 살다 보니 귀밑머리가 크게 자랐네. 치아 뿌리에서 점점 흘러내려 목구멍으로 꿀꺽 삼키네. 눈에 백태가 끼어 글자 濃 끄트머리가 흐릿해 보이네. 소갈증이 심해 한숨만 나오고, 만나더라도 술은 마시지 못하겠네. 가난한 삶 따르다 보니 기댈 곳 없어 돈의 신만 그리네. 나이가 육십이 넘으니 비로소 마음에 드네. 푸른 천막 속 신부 이제 좋은 날만 있기를 바라네.
棹歌初發廣陵津 夢入鄕山社酒陳 挽古回今功最著 思親憂國道相均 秋晴蒪菜占新味 春早梅花作喜神 天下元無陽盡理 君民堯舜此其辰
뱃노래 들으며 비로소 광릉진으로 가네. 꿈을 꾸니 고향 산에 모여 술잔치를 벌이네. 지난날을 돌아보니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길은 지금 성공하는 것이네. 부모를 생각하는 도리와 나라 걱정하는 도리는 서로 고르게 해야 하네. 가을 하늘은 맑고 양하 채소 입맛을 당기네. 이른 봄에 매화가 피어 모두를 기쁘게 하네. 하늘 아래 가장 으뜸은 어둠 속에서 궁극의 이치를 찾는 것이네. 임금과 백성 하면 요순 임금 시절인데, 지금이 그 시절이기를 바라네.
附蒼史原韻
有客從來汭水津 開緘擎讀舊情陳 比來頤養康寜在 況審渾覃平迪均 貧雖爲病何傷道 歲亦云荒易惱神 聞道芳鄰接秦晉 令咸吉禮迨佳辰
예수진에서 찾아온 손님 있네. 편지를 뜯어 높이 들고 읽으니 눈앞에 옛정이 펼쳐지네. 요즘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수양하며 마음 편히 잘 있네. 상황을 살피니 정신이 흐릿하여 예민할 때도 편안할 때도 있고 골고루 나타나는 것 같네. 비록 가난하다고는 하나 병도 깊으면서 어째 몸을 망가뜨리는 길로만 가는가. 세월이 또다시 바뀌어 흉측해질 것 같다 하니 마음이 괴롭네. 듣자 하니, 秦과 晉은 서로 붙어 오가는 길이 좋았다고 하네. 그대의 조카가 혼례를 치른다 하니 좋은 날이 있기를 바라네.
紙尾云但求言志不拘時律體 종이 끝에 이르길 다만 한 말씀 구하자면 율체로 시를 지을 때도 뜻하는 바에 구속받지 않는지요.
雪中書懷奉寄東橋詞伯兼呈石底諸益三首
눈 오는 날 글에 마음을 담아 동교 어르신과 석저 여러 벗에게 보냄
今冬無雪暖荊關 蠟屐雲游去復還 朝起溪南多白屋 夜來簾外失靑山 迷離月掛三鐘後 項刻花開萬樹間 誰識芭蕉圖畫裡 索安霜髮臥淸閒
올해 겨울은 눈도 안 내리고 따뜻하여 荊浩와 關同의 그림을 보는 듯하네. 밀랍을 입힌 나막신을 신으니 구름 속을 헤엄쳐 갔다가 돌아오는 것 같네. 아침에 일어나 시냇물로 나가니 남쪽에 하얀 집이 많네. 밤이 찾아오니 발 밖에 푸른 산이 멀리 달아나버리네. 세 번 종이 울린 후 하늘에 걸린 달이 흐릿해 보이네. 수많은 나무 사이에 하나하나 새기듯 꽃이 피었네. 그림 속에 芭蕉圖가 들어 있는 걸 누가 알리. 편안한 곳을 찾아 머리가 허연 노인 누우니 맑고 깨끗하며 한가롭네.
幽居世事不相關 鶴氅何人涉雪還 幻景都歸銀色界 淸綠如在玉華山 陽春歌曲琴三疊 疎水生涯屋一間 遙想東橋梅下老 挑燈覓句未全閒
초야에 묻혀 사니 세상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네. 학 깃털로 만든 옷 입고 눈밭을 지나 돌아오는 사람 누구인가. 도시의 환상적인 정경 구경하고 돌아오니 온통 은색 빛깔의 세상이네. 청록빛으로 둘러싸여 옥화산에 들어와 있는 것 같네. 햇살 좋은 봄날 노래 부르고 거문고 연주하며 시 삼 첩을 짓네. 작은 물줄기 샘솟는 물가에 집 한 채 서 있네. 매화나무 밑 노인을 보니 동교 위를 서성거릴 때를 생각나네. 등잔불을 돋우고 시구를 찾다 보니 온전히 한가롭지는 못하네.
洗盡靈臺夢覺關 斜斜整整引風還 千林皆肅排花陳 萬戶如豊庤米山 乍散復收空色界 將疎旋密霎時間 石村梅屋題詩伴 倘念淸貧一漢閒
마음을 말끔히 씻어내니 비로소 꿈속에서 빠져나오네. 바람이 휘몰아쳐 끌어당기니 비틀비틀 걷다 똑바로 걸었다 하네. 가지런히 늘어선 모든 숲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네. 풍년이 들어 쌀이 산처럼 쌓이듯 수많은 집이 보이네. 갑자기 흩어졌다가 다시 돌아와 거둬들이는 곳이 인간 세상이라, 아무것도 없다가도 삽시간에 꽉 막힌 곳으로 돌아서네. 석촌에 있는 매화와 집을 주제로 짝을 이뤄 시를 짓네. 청빈한 한 사내 한가로이 어정거리며 상념에 잠기네.
詠雪三疊效東坡禁白體覓和
吟病呵寒早掩關 霏微亂點打空還 頓覺衾稠如潑水 好敎簾幕捲重山 地角埋平完有力 天機洩盡妙無間 假使家家爲積廩 荒年計活足安閒
이른 추위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들어가 병으로 끙끙 앓으니 꾸짖네. 가랑비 점점이 흩어져 허공을 때리고 돌아오네. 이불이 물벼락 맞고 흠뻑 젖듯 갑자기 깨닫네. 가르침 받기 좋아 발과 장막을 둘둘 말아 올리니 산이 둘러싸고 있네. 구석진 곳에 반반하게 묻은 뒤에도 여전히 힘이 남아있네. 중요한 기밀이 교묘히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네. 거짓으로 꾸며서 말하자면 집집에 곳간이 가득 쌓여있으니, 흉년에도 충분히 편안하고 한가로이 살 수 있네.
良宵詩興動江關 欲向剡川弧棹還 折竹蕭蕭風勁院 封松密密歲寒山 漁人戴笠歸湖上 詞老呵毫繪壁間 想見諸公同此意 淸泉掬取碾茶閒
좋은 밤 시의 흥취에 젖어 강가 관문으로 향하네. 섬천으로 가려고 하나 굽이치는 강물에 노 젓는 소리만 들리네. 솔솔 부는 바람 잽싸게 정원 숲으로 들어와 대나무를 휘젓네. 소나무가 빽빽하게 뒤덮은 산이 몹시도 춥게 느껴지네. 고기 잡는 어부 삿갓 머리에 쓰고 강을 거슬러 돌아오네. 벽 사이에 놓고 가는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말하니 노인이 야단치네. 떠올려 보니 여러분이나 나나 뜻이 같네. 맑은 샘물 두 손으로 떠다가 한가로이 가루차를 끓이네.
惻惻寒風吹竹關 天公會事故敎還 日輪恐仄埋黃道 坤軸思擎幻碧山 莫使緇塵侵宇內 忮將恩澤洗人間 此身宛在光明界 淸徹心肝夢亦閒
대 사립문으로 차가운 바람 몰아치니 구슬프네. 하느님 때마침 알고 나타나 한 말씀 하시네. 둥근 해가 무섭게 기울어 하늘길 속으로 사라지네. 물구나무를 서니 푸른 산이 나를 홀리네. 더러운 먼지를 털어내지 않으면 집 안으로 들어오네. 은혜로운 덕택에 힘입어 인간 세상 깨끗이 씻으리라 뜻을 굳히네. 이 몸 밝게 빛나는 세상에 완연히 있네. 마음속 맑고 깨끗하니 꿈속에서도 한가롭네.
和友村冬夜書懷二絶
儉歲難逢濁酒色 荊扉深掩少親知 誰憐病骨淸無賴 猶寫梅花雪後詩
흉년이 들어 탁주 색깔 보기도 어렵네. 가시나무 문짝 깊숙이 닫으니 찾아오는 사람 드무네. 너무나 가난해 기댈 곳 없는 이 병든 몸뚱이 누가 불쌍히 여기리. 매화 그림 그리어 눈 그친 후에 시를 짓네.
歲暮江湖兩驚鬂 寒燈相伴雪華明 山深園靜無人間 臥聽蕭蕭折竹聲
강호에 한 해가 저물고 양옆 귀밑머리 놀랍게 자랐네. 눈송이 밝으니 쓸쓸히 비치는 등불과 짝을 이루네. 깊은 산과 고요한 정원에 사람 보이지 않네. 누워서 귀를 기울이니 바람 몰아쳐 대나무 꺾이는 소리 들리네.
燈前强試菊花色 落了燈花醉不知 傍人莫怪他譫語 夢中吟遍許多詩 友村
등불 앞에 놓고 국화주 빛깔 자세히 살피네. 등잔 불꽃 이미 졌건만 취했는지 알지 못하네. 다른 사람 잠꼬대 소리 듣고 옆 사람 괴상히 여기지 않네. 꿈속에서나마 시 많이 지어 두루두루 읊으시게.
曉寒惻惻夢初驚 簾外無人月獨明 擁着紬衾慵不起 黃鷄鳴到第三聲 友村
새벽에 오들오들 추워 꿈에 놀라 깨었네. 주발 밖에는 아무도 없고 달만 홀로 밝네. 명주 이불 부둥켜안고 게으름 피우며 일어나지 않네. 누런 닭 차례로 세 번 우네.
次金正言與洙東湖韻
仙鰲撑碧海之東 下有名湖一棹通 洛北春雲鴻信早 江南秋水鷺心同 平生憂樂當天下 處世行休以道中 泛泛虛舟閒自在 來時應待濟川功
동쪽 바다로 나가면 신선의 큰 거북이 푸른 하늘을 받치고 있네. 밑에는 이름난 호수가 있는데 노를 저어 오가네. 편지 일찍 오려나 낙양 북쪽에 봄 하늘 구름 떠가네. 강 남쪽에 가을철 맑은 물 흐르니, 해오라기랑 마음이 같네. 세상과 맞서 평생을 살다 보면 슬픈 날도 있고 기쁜 날도 있네. 사람과 어울려 살려면 죽는 그 날까지 도덕과 중용을 잘 지켜야 하네. 빈 배 둥둥 떠가듯 한가로이 살고 있네. 내를 무사히 건너려면 다가오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네.
宿芬洞書室三疊
溪風吹雪入山園 屋角無聞冷鳥喧 素壁靑燈三宿夜 寒梅疎竹雨家村 境淸合置金丹鼎 歲儉郍謨濁酒樽 可愛惠連能好句 聊將池草夢中論 右屬粹如
산속 별장 찾아 들어가니 산골짜기에 바람 불고 눈보라 몰아치네. 집 모퉁이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새들만 쌀쌀맞게 짖어대네. 흰 벽에 푸른 등불 켜놓고 삼일 밤을 지새우네. 겨울 매화와 성긴 대나무 있는 집과 마을에 비가 내리네. 사는 곳이 맑고 깨끗하여 금단 만드는 솥단지 함께 둬도 될 듯하네. 흉년이 들다 보니 술 단지 어찌 구해야 할까나. 혜연을 가히 사랑하매 좋은 시구가 나올 듯하네. 꿈속에서 연못과 풀을 논하니 그저 그렇네.
謝惠連 (397년 ~ 433년) 남조 송나라 진군(陳郡) 양하(陽夏, 지금의 河南 太康縣) 사람. 사방명(謝方明)의 아들이다. 족형(族兄)인 사령운(謝靈運)과 함께 ‘대소사(大小謝)’로 병칭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장을 잘했는데, 하장유(何長瑜)에게서 시를 배웠다. 10살 때 글을 지어 사령운의 인정을 받았다. 처음에 그가 살던 주(州)에서 그를 주부(州簿)로 임명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해 회계군(會稽郡)에 거주하면서 군의 관리인 두덕령(杜德靈)과 시로 증답하다가 죄를 얻어 관직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은경인(殷景仁)이 재주를 아까워해서 자주 그에 대한 변호를 올렸다. 이에 원가(元嘉) 7년(430)에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의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나갔다가 10년에 세상을 떴다. 원래 문집 6권이 있었지만 전해 오지 않고, 명나라 사람이 그의 작품을 한데 모은 『사법조집(謝法曹集)』이 현재 전하고 있다. 그의 시와 부(賦)는 사령운의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 현재 전하는 30여 수 중에는 구절이 누락된 시들이 상당수 있다. 대표작으로 「제고총문(祭古冢文)」과 「설부(雪賦)」가 있다.
十載經營半畝園 幽居事事少塵喧 瘦竹千竽山下屋 寒梅一樹水邊村 白雪宜題今夜句 靑蔬回憶曩時樽 石湖風物依然在 且把花松爲子論 右屬茫觀述
십 년 동안 돈을 벌어 반 이랑 동산을 샀네. 인적 드문 곳에 묻혀 사니 번잡한 소리 들을 일이 거의 없네. 산 아래 집 삐쩍 마른 대나무 가득 찼네. 냇물 근처 마을에 겨울 매화 한 그루 서 있네. 오늘 밤 詩句 주제는 마땅히 하얀 눈이어야 하네. 파릇파릇한 푸성귀 보니 지난번 마신 술 단지 떠오르네. 돌과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경치 구경하며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네. 또다시 꽃과 소나무 가지고 자식 삼아 논하네.
閒居我欲賦田園 懶性從來厭俗喧 白髮披雲穿峽路 靑燈帶雪坐溪村 力全要試千斤弩 用拙還慚五石樽 除却淸風明月外 蒼茫時事不須論 右自述
한가롭게 사는 나의 욕심은 시골에 살며 시를 짓는 것이네. 성품이 게을러 여태 속인들 속에 들어가 시끄럽게 떠들어본 적 없네. 백발의 노인 구름 헤치고 산속 좁은 길 뚫으며 나아가네. 푸른 등잔 밝히고 눈 덮인 곳에 앉으니 마을에 시냇물 흐르네. 천 근짜리 쇠뇌를 있는 힘을 다해 쏴보려 하네. 오 섬의 술 마시고 쓸모없이 돌아오니 부끄럽네. 밝은 달 저 밖으로 맑은 바람 사라지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끝이 없어 감히 논하지 못하네.
次松蔭堂韻
右題松蔭書室老石先生所述也 先生之胤季述築室而扁之盖就 松江松沙之松而取其蔭也 君以礌砢勁貞之姿愛淸高後凋之 節宜其善繼而善述矣 詩云如松之茂無不爭或承季述揭堂韻一首 全用唐人句至尾聯畧述已志而點化之 此亦詩家一調也 忘拙續和 時戊子蜡月旣望歸 視其家松蔭滿庭
오른쪽 松蔭書室이라는 제목은 노석 선생이 지은 것이다. 선생의 윤계가 집을 짓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평평하게 펴서 덮었다고 했다. 소나무와 강이 있고 소나무와 모래가 있으면 소나무가 얻는 것은 그늘이다. 그대가 돌무더기 같은 굳세고 올바르며 자태가 아름답고 고결하여 가장 늦게 시드네. 節制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고 잘 따르는 것이네. 시에서 말하길 소나무는 무성하지도 않고 다른 나무와 다투지도 않고 늘 계절을 이으므로 이와 같은 내용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정자에 걸었네. 당나라 사람들 전부가 마지막 연에 간략히 쓰는 시구가 있는데, 뜻을 고쳐서 새로이 하는 것이네. 이것 역시 시 쓰는 사람들이 한번 헤아려봐야 할 내용이네. 졸렬한 솜씨를 깜빡 잊고 남이 지은 시의 韻字를 써서 答詩나 쓰고 있으니. 무자년(1888년) 음력 12월에 이미 보고 돌아왔는데, 그때 봤던 집에 소나무 그늘이 정원에 가득 찼네.
貞姿特立歲寒中 不畏嚴霜不畏風 肯伴春紅嬌灼灼 須看晩翠蔚蔥蔥 三槐必賴培根力 雙栢終成建厦功 最賀門庭遺蔭在 松翁勁節拄蒼空
꼿꼿한 자태는 한겨울 추위에 돋보이네. 된서리도 두렵지 않고 바람도 두렵지 않네. 봄에 피는 붉은 꽃과 반짝반짝 빛나는 아리따운 미인과 기꺼이 짝을 이루네. 늦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소나무 돌아보니 빽빽이 들어차 무성하네. 세 그루 회화나무 반드시 서로 의지하여 뿌리 힘을 북돋워야 하네. 한 쌍의 잣나무 큰 집 짓게끔 큰 공 세웠네. 가장 축하할 일은 문 안 정원에 조상의 은혜를 남겼다는 것이네. 늙은 소나무 굳건히 푸른 하늘을 떠받드네.
和贈友蘭
州妓香心号善歌舞 能詩語而三首示余己丑(1889)正月也
노래와 춤 잘하는 고을 기생 향심을 불러, 시어로 시 세 편을 지어 보인 것이 기축년 정월이다.
佳人枕畔畵靑島 云自京城信息催 也識瑤池淸野宴 碧桃花下老仙來 右畵靑島
아름다운 사람 베갯머리에 청도 그림이 있네. 이에 저절로 경성에 소식을 보내라 재촉하네. 옥빛 연못 있는 맑은 들판에 잔치 있다는 건 다 아네. 푸른 복숭아꽃 아래로 늙은 시선 걸어오네.
兄梅弟竹一盆中 竹自靑靑梅自紅 許作人間三益友 香蘭與爭素心同 右梅竹盆
형 같은 매화와 아우 같은 대나무가 한 화분에 들어 있네. 대나무는 몸소 푸르고 매화는 몸소 붉네. 인간에게는 사귀어서 이로운 세 가지 벗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하네. 향기로운 난초와 소박한 마음 같다고 함께 다투네.
靑春如可買 長在貴人家 金帛還無賴 朝朝鬂雪斜 右除夕
청춘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귀인의 집에 오랫동안 있네. 황금 비단 가지고 돌아왔건만 의지할 곳 없네. 아침마다 눈처럼 허연 귀밑머리 옆으로 기우네.
友蘭詩云 黃金買靑春 白髮盡貧家 雖使金爲谷 難回星斗斜
友蘭의 詩에 이렇게 적혀 있네. 황금으로 청춘을 사네. 백발노인의 집 지극히 가난하네. 황금으로 골짜기를 바꿀 수는 있으나, 빙빙 도는 별들을 기울기는 어렵네.
怪石畫題十疊
雲根磅礡儘淸奇 霮䨴靑山戊削之 芸窓寫出參差影 政是珠星隕下時
구름의 뿌리(돌무더기) 뒤섞여 정말 맑고 기이하네. 먹구름 낀 푸른 산 칼로 깎은 듯하네. 글방 창문에 베끼듯 들쭉날쭉 비친 그림자. 구슬 같은 별들이 제때 떨어지듯 백성을 다스려야 하네.
八門羅列玩三奇 太乙星圖錯落之 幻骨仙翁留有蹟 丹藜飛下古橋時
여덟 개의 문에 장난치듯 삼 기가 나란히 늘어서 있네. 태을과 천문도가 뒤섞여 떨어지네. 신선으로 변해 머물던 자리에 자취를 남기네. 옛날 다리를 건널 때 붉은 명아주 지팡이 밑으로 던졌네.
八門 곧 휴문(休門)·생문(生門)·상문(傷門)·두문(杜門)·경문(景門)·사문(死門)·경문(驚門)·개문(開門) 등을 이른다. 일가팔문은 일진(日辰)이 각 궁에서 3일씩 머물면서 음양둔(陰陽遁)의 포국순서를 쫓아 이동하며, 음양둔은 동일하게 간궁(艮宮)에서 일어나 순행 또는 역행한다. 구궁의 본 자리는 땅에 속하고 팔문은 하늘에 속한다. 천은 동하고 지는 정하고 두루 흘러가면서 쉼이 없고 끝없이 변화한다. 이로부터 기일이 돌아옴이 나온다. 먼저 삼오신진시(三五申辰時)를 살펴보고 다음에 삼칠인진시(三七寅辰時)를 살펴보면 하락의 이치에 이른다. 멀리는 육합(上下四方 즉 우주)의 바깥을 알고 가까이로는 백리안을 살핀다. 넓게는 한 국가의 길흉을 알고 좁게는 한 집안의 화복을 알 수 있으며 멀리는 1년을 알고 가까이는 하루를 알 수 있다. 각 문은 휴문·생문·상문·두문·경문·사문·경문·개문 등을 말하며 각 문에 대하여 토(土), 목(木), 목, 화(火), 토, 금(金), 금, 수(水)의 오행을 의미한다.
三奇 사주 내에서 3기는 3살(殺)의 것이라고도 하며 재관인(財官印)을 뜻한다. 3기(奇)는 인간이 원하고 바라는 복록수(福祿壽)를 아울러 관장하는 신으로 일(日)을 주로 하고 사주가 순(順)하면 길운, 역(逆)의 것은 흉운으로 한다. 사주가 3기에 대하면 다재다능하고 천을귀인이나 천월이 덕을 겸하면 흉신이 제거된다. 또 3합하여 국(局)이 되면 입신양명한다. 오행에서의 재(財)는 생활의 자원이 되는 신이고 관(官)은 명예ㆍ권위의 신이며 인(印)은 복록(福祿)을 지키고 아(我)를 생하는 신이다. 따라서 이 3신이 파하지 않으면 복수록가후한 것은 물론이요 평생에 길사가 많고 흉사가 적은 길행한 사주의 보유자이다. 외삼기격(外三奇格)과 내삼기격(內三奇格)이 있는데 외삼기란 천간에 재관인의 3기가 갖추어 있는 것이고 내삼기란 지지 장간에 재관인을 대하는 것이다. 사주에서 천간을 외(外)로 하고, 지지를 내(內)로 한다. 외는 외부로 보기 때문에 타인에게 빼앗기기 쉽다고 보고 기(氣)가 희박한 것이 되고 지지에 3기를 대하는 것은 내로 보기 때문에 더욱 길한 것이 된다.
太乙 ①별자리 이름. 자미원(紫微垣)에 속하는 태일(太一)의 딴 이름. 도교(道敎)에서는 천제(天帝)가 머문다고 믿는 태일성(太一星:북극성)을 말하는데, 병란(兵亂)과 재화(災禍) 및 생사(生死)를 관장한다고 함. ②북극(北極), 즉 천극(天極)의 신(神)을 가리키는 말. 천지만물의 출현 또는 성립의 근원인 우주의 본체를 인격화한 천제(天帝)•천황대제(天皇大帝)를 뜻하기도 함. ③구궁법(九宮法)에서 길흉을 점칠 때, 배치하는 구성(九星)의 하나. 음양도(陰陽道)에서는 해와 달은 1년에 12번 서로 만나며 그 중 7월에 만나는 곳이 태을로 사방위(巳方位)에 해당함. ④→태을법(太乙法). ⑤궁전(宮殿) 이름. 한(漢) 나라 장안(長安)의 궁전 또는 송(宋) 나라 인종(仁宗) 때 서태을궁(西太乙宮). ⑥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의 딴 이름.
九宮 ≪주역(周易)≫의 후천수(後天數)인 낙서(洛書)에 연월일시(年月日時)의 수를 적용하여, 관록(官祿)•사송(詞訟)•시험•날씨•운명•재물•여행•가택•질병•혼인 등의 길흉을 점치는 방법인 구궁법(九宮法)에 쓰이는 구성(九星)과 팔문(八門) 중 구성을 가리킴. 구성은 천봉성(天蓬星)•천예성(天芮星)•천형성(天衡星)•천보성(天輔星)•천금성(天禽星)•천심성(天心星)•천주성(天柱星)•천임성(天任星)•천영성(天英星) 등 임.
天孫機上弄瑰奇 欲向成都一問之 簾下有人人不識 星槎八月載歸時
직녀가 베틀로 짜놓은 듯 진기하고 빼어나네. 성도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네. 주발 밑에 있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네. 팔월에 별 뗏목에 몸을 실어 제때 돌아오네.
白羽黃間擅技奇 陰山秋鶻杳何之 北平落葉蕭蕭夜 云是將軍射虎時
하얀 날개 달고 활처럼 빨리 날아 멋대로 재주 부리는 솜씨 뛰어나네. 가을날 음침한 산에 사는 송골매 어디로 갔는지 묘연하네. 밤이 되니 북쪽 평원에 우수수 낙엽이 지네. 활을 쏴서 호랑이라도 잡아야 비로소 장군이지.
麤頑硬骨琢成奇 手摘黃花坐乂之 幅巾藜杖逍遙意 誰識先生醉醒時
거칠고 무딘 돌덩이를 쪼아서 기이하게 만들었네. 노란 꽃 손으로 딴 후 앉아서 베어내네. 머리에 복건을 쓰고 명아주 지팡이 짚으며 뜻 내키는 대로 거니네. 선생이 취하고 깨어나는 때 누가 알리.
樹記花名第次奇 幽庄排置又兼之 一片苔紋期勿壞 平泉老相誡兒時
아무도 모르게 나무에 차례로 꽃 이름을 적네. 한적에 별장에 가지런히 놓고 다시 포개놓네. 한 조각 이끼 무늬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네. 평천장 늙은 재상 아이 훈계할 시간이네.
平泉莊 당(唐) 나라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낙성(洛城) 30리에 있는데 기화요초와 진귀한 소나무, 괴석(怪石) 들이 많았음.
太湖水涸露精奇 五岳三山並畵之 甲乙中間淸絶格 牛公題品冠當時
물이 마른 큰 호수에 이슬 그윽이 맺혀 기이하네. 다섯 개의 큰 산과 세 개의 작은 산을 나란히 놓고 그림을 그리네. 갑과 을 사이가 격조 있고 더없이 깨끗하네. 당시에 우공의 평가가 으뜸이었네.
華山道士著神奇 綠篆丹文日誦之 借得丁鞭驅造化 千頭個個幻羊時
화산의 도사가 신기하게 나타나네. 녹색 전자와 붉은색 문자를 매일 외우네. 빌린 채찍 휘두르며 말 달리니 조화롭네. 천 개의 머리 하나하나가 제때 양으로 변하네.
白塔家中最絶奇 三牛有力曳何之 騷人莊誦菱溪記 富貴浮雲亦一時
집 안에 있는 하얀 탑 더없이 기묘하네. 힘 좋은 세 마리 소 끌고 어디로 가는가. 시인 외워서 마름 계곡 돌에 기록하네. 부귀는 뜬구름 같아서 한때뿐이네.
眯眼蒼苔怪怪奇 松根何事又纏之 千年道骨華陽洞 認是猿公竊飮時
푸른 이끼 같은 티끌이 눈에 들어가니 괴괴하고 기이하네. 소나무 뿌리가 무슨 일로 또 얽혀 있는가. 화양동은 천 년을 이어온 도가의 골격이네. 원숭이는 훔쳐먹을 때를 잘 아네.
米顚酷愛醜文奇 袍帶雍容輒拜之 載取誰家書畫舶 滄江虹月貫時時
미전이 지독히 사랑한 추잡한 글 기이하네. 도포에 띠를 두르고 몸가짐 얌전히 하여 갑자기 절을 하네. 책과 그림을 큰 배에 실어 누구 집으로 가져가는가. 푸른 강물 위로 붉은 달이 때때로 지나가네.
미불米芾 1051(북송 황우 3)년 ~ 1107(대관 1)년 이명자 : 원장(元章) 호 : 녹문거사(鹿門居士), 양양만사(襄陽漫士), 남궁(南宮) 별명 : 미전(米顚) 이칭 : 미치(米痴) 직업 서가, 화가 중국, 북송의 서가, 화가. 명은 처음엔 불(黻)자를 쓰고, 41세 이후에 불(芾)을 썼다. 자는 원장(元章), 호는 녹문거사(鹿門居士), 양양만사(襄陽漫士), 또는 거소(居所)에 따라 해악(海岳), 관(官)에 의해 남궁(南宮)이라 부른다. 조상(祖上)은 서역 미국(米國, 마이무르구)의 귀화인이라 하며, 후에 양양(후베이성) 사람이 되었다. 모친이 영종(英宗)의 황후를 모셨던 관계로 과거에 의하지 않고도 처음엔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만년엔 서화학박사에 발탁됐지만 관직이 맞지 않았음. 돌을 애호하여 기석(奇石)에 대고 빈다거나, 혹은 지나친 결벽증 등의 기행(奇行)이 많았으므로 미전(米顚), 미치(米痴)라 불리기도 했다. 서화의 제작, 감상, 수장에 진력하였다. 서는 널리 진∙당 제명가의 서를 배웠으나 특히 진(晋)인의 풍운을 전하고, 송대 4대가의 한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화는 동원(董源)을 배우고, 후세 미법산수(米法山水)라고 하는 산수화법의 조형(祖型)을 만들어 문인화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자재(蔗滓, 사탕수수를 짜낸 찌꺼기)나 연방(蓮房, 연밥이 든 송이)을 써서 고목송석(枯木松石)을 그리고, 묵죽도 잘 했다. 전칭(傳稱)작품 수종이 현존하지만 화풍을 충분히 전해줄만한 것은 없다. 저에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서사(書史)』, 『화사』, 『연사(硯史)』, 시문집에 『보진영광집(寶晋英光集)』이 있다. 『촉소첩(蜀素帖)』, 『초서 9첩』이나 『미불진적(眞跡) 3첩』등에서 진적을 볼 수가 있다.
和友村相思三疊 己丑(1889)正月
日昨琴嘯館戱作 訪梅詞 效東坡 賞花詞體 瓊函適到 可謂針芥相投 卽欲噴飯滿案 率爭搆和以供新年 一笑資人 日詩負逋大矣 此亦歉荒所 致待秋成 當備報耳 來詩即書角寒暄 何必更爲
며칠 전 금소관琴嘯館에서 소동파의 상화사체賞花詞體를 본받아 방매사訪梅詞를 재미 삼아 지었는데, 마침맞게 옥구슬 함이 도착했다. 그야말로 겨자씨와 바늘이 서로 맞힐 만큼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라서, 곧 입속에 든 밥을 밥상 가득 뿜어내듯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경쟁하듯 이끌려 화답시를 지어 새해 선물로 드렸는데, 한 마디로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매일 시를 쓰는 게 부담스러워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것 역시나 흉년으로 수확이 형편없을 바 열심히 일하고, 곡식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땅히 빚을 모두 갚을 뿐이었다. 보내준 시가 곧 안부편지라면 다시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別來何日不相思 正是新元月滿時 潑水衾裯淸不寐 峭寒猶似曉寒詩
따로 떨어져 있던 뒤에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언제였던가. 바로 정월 초하룻날 달이 가득 찼을 때이네. 물 뿌린 이부자리처럼 잠은 오지 않고, 살을 찌르는 듯한 추위가 마치 새벽 추위에 쓴 시 같네.
別來何日不相思 正是溪南春雪時 顧影蕭蕭還自笑 評花擎讀古梅詩
따로 떨어져 있던 뒤에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언제였던가. 바로 남쪽 골짜기 봄눈이 녹을 때이네. 그림자 돌아보니 쓸쓸하여 도리어 스스로 웃고 마네. 꽃을 평하고 옛 매화 시 받들어 읽네.
別來何日不相思 正是山西獨酌時 琴嘯館中香萬斛 前宵戱作賞花詩
따로 떨어져 있던 뒤에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언제였던가. 바로 산 서쪽에서 혼자 술 마실 때이네. 금소관 속에 향기가 만 휘나 되어, 지난밤 재미 삼아 상화시賞花詩 지었네.
附友村韻
우촌에게 보낸 운시
此是去臘所搆 病懷之涔寂 別緖之繚繞 想應諒到 幸賜郢和 副此新春詹望云云
이것은 지난 섣달에 지은 것인데, 병을 앓는 동안 품은 음침하고 고요한 생각과 휘감아 도는 이별의 슬픔으로 시를 짓는 데 빠져 있었으며, 생각건대 진심이 닿았는지 다행히도 화답시를 주시어, 부응하여 이번 새해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생각을 말했다.
別來何處不相思 正是江南雪後時 獨有寒燈窓下影 烟然猶似夜珠詩
따로 떨어져 있던 뒤에 그리워하지 않은 곳이 어디이던가. 바로 강 남쪽에 눈이 내린 뒤이네. 쓸쓸히 등불 밝히고 혼자 있으니 창문 밑으로 그림자 드리우고, 피어오르는 안개 밤에 지은 주옥같은 시 닮았네.
別來何處不相思 正是寒梅月下時 十幅彩箋蒼史畵 逢人說着賞花詩
따로 떨어져 있던 뒤에 그리워하지 않은 곳이 어디이던가. 바로 추운 매화 달빛 아래 있을 때이네. 열 폭짜리 무늬 있는 색종이 창사蒼史가 그렸네. 만나는 사람마다 달라붙어 상화시賞花詩 이야기하네.
別來何處不相思 正是山中獨臥時 怊悵竹根盃裡酒 至今難忘壽溪詩
따로 떨어져 있던 뒤에 그리워하지 않은 곳이 어디이던가. 바로 산속에 홀로 누워 있을 때이네. 대 뿌리 술잔 속 술 너무나 서글퍼, 수계시壽溪詩 지금도 잊지 못하네.
北村見魔驅戱戱作
북촌에서 마귀를 보고 히히 웃으며 지었다.
强莫强兮强莫强 鏗鏗金鐵復鏘鏘 上毛似電搖頭轉 法鼓如雷信手忙 彩袖峩冠都是幻 工砲僧衲又何狂 一場喧動風塵色 十二群魔盡遁藏
가장 강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며, 갱갱 쇳소리 쟁쟁 돌아오네. 머리를 흔들고 굴리니 위로 뻗은 머리털 번개 같고, 절에서 능숙하게 바삐 두들기는 북소리 천둥 같네. 화려한 옷소매와 높은 갓 모두가 환상인데, 교묘하게 포를 쏴 승려 또 왜 미치게 하는가. 한바탕 소란을 피워 바람에 먼지가 날리는가 싶더니, 열두 마리 마귀 무리가 전부 도망쳐 숨네.
和友村人日見寄二首
화답시 두 편을 지어 우촌에게 초이렛날 부쳤다.
佳節逢人意未闌 籬根凍雪尙餘殘 麵蚕祈福寧辭醉 彩燕迎新不畏寒 可奈流光欺髮白 懸知初計誤金丹 疎慵孤負山家會 堪歎年來道路難
좋은 계절에 사람을 만나도 뜻은 막힘이 없고, 울타리 밑에는 아직 얼음과 눈이 남았네. 국수와 누에 번데기 놓고 복을 비니 어찌 취하길 마다하랴. 제비 모양의 채색 비단 머리에 달고 새해 맞으니 추위가 두렵지 않네. 흰 머리 보기가 너무나 흉해 흐르는 세월 너그러이 참을 수가 없네. 처음 생각한 불로장생의 약이 잘못되리라는 걸 이미 알았네. 옹골차지 못하고 게을러 산속 집 모임 홀로 저버리고, 지난 몇 해 걸었던 험난했던 길 탄식하네.
逢新還覺歲華闌 爲是詞人鬢雪殘 栢葉浮香驚臘暮 銀花剪巧妬春寒 嘗辛菜有千絲碧 到老灰餘一寸丹 縱遇靈辰懷未定 常陰看得少晴難
새해를 맞아 화려했던 세월이 끝났음을 깨닫고 나니, 시인의 귀밑머리에 흰 눈만 남았네. 섣달이 무섭게 저무니 측백나무 잎사귀에 향기가 떠돌고, 은빛 꽃 곱게 자르니 봄추위 시샘하네. 실처럼 가느다란 푸른 채소 수없이 많아 맛보니 맵고, 늙고 나니 한 마디 단사丹沙 재만 남았네. 비록 좋은 날 만나도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항상 날씨가 흐리니 잠깐 맑은 날 보기도 어렵네.
杜詩 入春纔七日 未有不陰時 盖傷時語也
두보의 시 [봄에 들어선 지 겨우 칠 일인데, 흐리지 않은 날이 없네]가 있는데, 어쩌면 시절을 가슴 아파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附友村韻
우촌이 보내준 운시
風光澹蕩霽暉闌 春物昭蘇臘雪殘 楊柳細搖溪水暖 梅花潜破野籬寒 戱簪金縷忘頭白 强借銀盃愛頰丹 却喜山家饒勝事 佳辰佳客兩相難 友村
날씨가 개어 한창 빛이 나니 경치가 맑고 화창하네. 섣달 눈은 아직 남아있건만 봄의 생명은 밝게 소생하네. 계곡물이 따뜻해지니 수양버들 미세하게 떨고, 울타리 밖은 아직 추운데 매화 잠잠히 꽃봉오리 터뜨리네. 하얀 머리 까마득히 잊고 재미 삼아 금실 옷 입고 머리에 비녀 꽂고, 애써 은 술잔 빌리어 술 마시니 붉어진 볼 예쁘네. 산속 집에 좋은 일 많아 무척 기쁜데, 좋은 날 반가운 손님 양쪽 모두 서로 함께하기가 너무나 어렵네.
白髮蕭條暮景闌 況逢新節暗催殘 彩旙照眼驚春艶 凍酒澆腸覺臘寒 雪裏細芽蔬半綠 風前七葉莢初丹 幽懷欲把吟詩遣 不奈吟詩老更難 友村
백발이 되니 내 삶의 끝 무렵 쓸쓸히 막을 내리고, 하물며 남은 계절 재촉해 새로운 계절 맞이하네. 봄기운이 깨어나니 채색 깃발 더욱 눈이 부시고, 차가운 술이 뱃속 적시니 섣달 추위가 문뜩 떠오르네. 눈 속 여린 싹과 나물 절반이 푸르고, 바람 앞 일곱 잎사귀와 꼬투리 드디어 붉어지네. 마음속 깊은 생각 시를 읊어 보내려는데, 막상 시를 읊으려 하니 늙을수록 어려워 어찌하지 못하네.
琴嘯館與春坡金德有戱賦
금소관에서 춘파 김덕유와 재미삼아 짓다
琴館寥寥晝似年 條風有意作春姸 山茱吐蕊黃粘玉 岸柳垂絲碧裊烟 几淨詩朋修墨帖 鈴閒衙卒打靑錢 如今剩借慈悲力 普濟家家大願船
한낮인데도 나이를 먹듯이 고요한 금소관 쓸쓸하고, 북동쪽에서 부는 바람 아리따운 봄 지으려는 뜻 담고 있네. 누런 찰옥수수 심으니 산수유 꽃술 틔우고, 강 언덕 위 버드나무 실처럼 드리우고 푸른 안개 하늘하늘 피어오르네. 시 쓰는 친구와 함께 정갈한 책상에 앉아 묵첩墨帖 손질하고, 방울 한가한 관아 하인 푸른 동전 두드리네. 지금 같이 자비의 힘 실컷 빌리고, 커다란 원력의 배 타고 집집이 널리 구제하네.
時金侯以俵灾均賑 民望大洽
고을 수령 김덕유가 흉년에 세금을 감면함으로써 고르게 구휼하여, 백성들의 바람에 크게 미치었다.
過后山杏亭有感
후산 은행나무 정자를 지난 후 느낀 점 있다
翰林庭畔樹二百有 餘朞三顧頻繁地 猶餘繫馬枝(仁祖微時繫馬云)
한림 뜰 가에 나무가 이백여 그루 있는데, 해를 넘겨 세 번 찾아가 청한 땅에 말을 맸던 가지가 여전히 남아있었다(인조가 미천할 때 말을 붙들어 맸다고 전한다).
說에 의하면 조선(朝鮮)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금의 호남지방을 돌아보던 중에 이곳 후산에 살고 있던 선비 명곡 오희도(明谷 吳希道, 1583∼1623)라는 분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명곡의 북쪽 정원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들 나무 밑에 인조(仁祖)가 타고 온 말을 맸다고 한다.
赤城江途中
적성강赤城江(섬진강)을 지나는 길에
赤城霞散軟風吹 沙岸依微路不知 江上人家籬落背 杏花初發兩三枝
바람이 솔솔 부니 적성강 노을 흩어지고, 모래 언덕 어렴풋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네. 강 위쪽 사람 사는 집 울타리 뒤로, 살구나무 두세 가지에 꽃이 드디어 피었네.
雲水縣五柳途中
운수현雲水縣(임실任實) 오류五柳를 지나는 길에
陰雲作意蕩春空 小杏花開野店紅 儉歲行人消渴甚 家家烏有酒樽中
탕춘대蕩春臺 창공을 바라보니 먹구름 몰려올 듯하고, 작은 살구꽃 피니 들판 주점 붉네. 흉년이 들어 길 걷는 사람 소갈증 더욱 심해지고, 집집마다 술통 속에 무엇이 들어있겠는가.
訪館田崔進士明淑
임실 관전館田에 사는 최명숙崔明淑 진사를 방문하다
(在任實上洞時 明淑弟錫斗宰南原 임실 상동에 있을 때 명숙의 동생 석두錫斗가 남원 관원이었다.)
洞陰深處磵聲喧 瀟灑茅堂晝掩門 頭白詩翁饒晩福 花前長醉弄兒孫
음침한 마을 깊은 곳에 계곡물 소리 시끄럽고, 기운이 맑고 깨끗한 띠 얹은 집 낮에도 사립문 닫혀 있네. 머리가 허연 시 쓰는 노인네 복이 참 많아, 꽃 앞에서 흠뻑 취해 어린 손자들과 장난치며 노네.
館田春雨
관전 마을에 봄비가 내리다
春陰漠漠午鷄喧 小雨如絲入洞門 老圃花心看次第 微紅礬弟綠蘭孫
봄 날씨 흐리니 막막하여 오후에 닭들 시끄럽고, 실처럼 가는 비 내리니 다들 마을 문으로 들어오네. 오래된 밭에서 꽃의 마음 차례로 보니, 미홍색 산반山礬은 동생이요 푸른 난초는 손자네.
花樹亭留宿
화수정花樹亭에서 머물러 묵다
(관전 심씨네 재각 館田沈氏齋室)
穿雲入洞少塵喧 溪上新亭叩石門 柳檻迎風招燕子 麻畦帶雨防雞孫 靑童課業書千卷 上舍豪情酒一樽 試看分明花樹字 古家敦睦有淵源
구름을 뚫고 마을로 들어서니 약간 먼지가 일어 소란스럽고, 계곡물 위쪽 새로 지은 여인숙으로 올라가 돌문 두드리네. 버드나무 옆 난간에 서서 바람맞으며 제비 부르고, 삼밭 두둑에 비 맞으며 병아리 막네. 푸른 옷 입은 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천 권의 책 읽는 것이고, 진사의 호탕한 감정은 술 한 통 마셔야 나오네. 시험 삼아 보니 화수花樹 두 글자가 또렷이 보이고, 오래된 집 근본이 있는 곳이라 정이 두텁고 화목하네.
五愚軒次韻 幷小序
오우헌五愚軒에 차운하고 아울러 짧은 서문을 쓰다
愚嘗讀八愚詩柳子 非愚於心 特愚於名也 是歲之春暮 訪盧司馬於五柳溪上 以五愚顔其軒 其略曰 於文愚於農愚於世愚於山愚於水愚 今司馬詩禮名門 種學績文 涵泓演迤 以蓄其有 非愚於文也 居家有薄田數項課 奴耕穫以饘以粥 非愚於農也 處世 舍章以貞 靑白不形 雌黃不出 非愚於世也 明矣至 若於山水 亦以愚辱之奚也 特假借一愚字以自貶之耳 盖柳與愚音相近 五愚之愚 非五柳之柳也歟 雖然司馬年踰知命 養拙林泉 懷抱利器不見用於時 雖謂之愚 亦宜矣 愚何敢一語砭愚也 此可與知者言
내가 일찍이 유자柳子(유종원柳宗元)의 팔우시八愚詩를 읽었는데, 마음속의 어리석음이 아니고 이름 속의 특별한 어리석음이었다. 이 해의 봄날이 저물어, 오우헌五愚軒 얼굴인 오류五柳 계곡 위에 사는 노 진사를 방문했다. 오우五愚를 간략히 말하면 학문의 어리석음, 농사의 어리석음, 처세의 어리석음, 산의 어리석음, 물의 어리석음이었다. 지금 진사는 시경詩經과 예기禮記의 명문 집안답게 학문의 씨를 뿌리고 문장의 베를 짜고, 큰물이 넘쳐 흘러가듯 그 실력을 쌓는 건 학문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사는 집에 척박한 밭이 있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는데, 하인이 죽을 먹고 밭을 갈고 곡식을 거둬들이는 건 농사일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곧음으로써 아름다움을 머금고, 눈 속에 청과 백의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자황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세상에 나아가 어리석지 않아야 명료해지는데, 산과 물도 마찬가지다. 역시나 무엇 때문에 愚 자 씀으로써 욕을 보는 것일까. 특별히 愚 자 하나를 빌려 씀으로써 자신을 깎아내릴 뿐이다. 어쩌면 류柳와 우愚의 음이 비슷하여 五愚의 愚는 五柳의 柳가 아닐까 싶다. 비록 쉰 살의 나이를 넘겼더라도 샘솟는 숲속에 숨어 살며 어리석음을 기르다 보니, 마음속에 품은 뛰어난 재능을 현재 쓰는 걸 보이지 못하여, 비록 어리석은 자라는 소릴 듣더라도 또한 마땅한데, 어떻게 감히 글자 하나 愚를 고치겠는가.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다.
자황雌黃 : 유황과 비소의 화합물인 결정체를 이용하여 만든 노란색의 채료(彩料)를 말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자황을 오늘날의 지우개처럼 이용하여, 종이에 글자를 잘못 썼을 때 이것을 칠해 지우고 다시 썼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하여 자황은 시문(詩文)을 첨삭하거나 시비를 가리는 일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垂垂五柳澗之濱 栗里高風有逸人 耕稼聽奴因地力 琴書爲友自天眞 湖山痞碧元非病 塵世雌黃莫謾嗔 鏟彩鞱光愚亦好 玉溪明月照心新
계곡 물가에 다섯 버드나무 줄줄이 늘어져 있고, 은자隱者가 사는 율리栗里 마을에 바람 높이 부네. 하인이 밭 갈고 씨 심는 소리 들리는 건 곡식을 키우는 땅의 힘 때문이고, 벗을 위해 책을 읽고 거문고 연주하는 건 스스로 순진하고 꾸밈이 없기 때문이네. 호수와 산이 푸른 빛을 잃은 건 원래 병든 게 아니고, 티끌 많은 세상에 시비 가리는 건 꾸짖는 게 아니네. 무늬를 깎아내고 빛을 감추어 어리석게 보여도 역시나 좋고, 옥처럼 맑은 시냇물에 뜬 밝은 달 마음속까지 새롭게 비추네.
輓屯溪李進士興宇
진사 둔계屯溪 이흥우李興宇 만사輓詞
一派天潢注海東 忠言剴切故家風 如今怊悵屯溪路 淚灑蓮花兩世紅
한 집안을 일구어 수많은 자손을 나라로 흘려보내었고, 아주 적절히 충고의 말을 올리는 건 오랜 가풍이었네. 둔계屯溪의 길이 지금처럼 슬펐던 때가 있었던가. 눈물을 뿌리니 연꽃이 양쪽 세계를 붉게 물들이네.
過三溪石門
삼계三溪 석문을 지나며
滙合三溪鎭一門 字心深入碧苔痕 兩岸桃花紅不落 此間誰識有仙源
세 개의 계곡물 돌고 돌아 한 곳에 모이어 한 개의 문 억누르고, 푸른 이끼의 흔적을 보니 글자가 마음속 깊이 들어오네. 양쪽 기슭에 핀 붉은 복숭아꽃 아직 떨어지지 않아, 이곳에 신선이 사는 곳 있는 줄 누가 알리.
輓東嶠金進士顯文
동교東嶠 김현문金顯文 진사 만사
岹岹東嶠 子家在澗之阿 志操如水月 文章似江河 早年橫草氣 晩節採蓮歌 平生同舍友絃 斷意如何
높고 높은 동쪽 산 계곡 시냇가 언덕에 그대의 집이 있네. 의지와 기개는 물과 달 같고, 문장은 강물과 하천을 닮았고, 젊어서는 뻗어 나오는 기운으로 공을 세우고, 늘그막에는 채련가採蓮歌 부르고, 평생 거문고와 벗하며 함께 지냈는데, 어째서 갑자기 뜻을 끊었단 말인가.
再到五柳村與盧上舍南老兄弟同賦二首
다시 오류 마을에 이르러 진사 노남로盧南老 형제와 함께 두 편의 시를 짓다
編茅爲屋拓山坡 十畝閒閒失晤歌 興到枯碁消白日 吟成凹硯注黃河 透窓石氣還嫌冷 入座出光不厭多 最愛濛濛春夜雨 紅情綠意較如何
띠 엮어 집 지으러 산비탈 넓히고, 열 묘의 집에서 한가로이 실오가失晤歌 부르네. 흥이 일면 바둑 두며 한낮을 보내고, 오목 벼루에 황하의 물 부어 시를 짓네. 창문을 통해 돌의 기운 들어오니 도리어 추워하고, 앉은 자리에 나오는 빛 많을수록 싫지 않네. 봄날 밤에 자욱이 내리는 비 가장 사랑하고, 붉은 꽃의 정과 푸른 풀의 뜻 비교한들 어떠하리.
晴餘春物媚陽坡 一兩禽聲朁笑歌 招客豪情樽北海 課兒宿業帳西河 名區再到紅桃落 缺界相看白髮多 聞道華山稱絶妙 明朝蠟屐不遊何
날이 개니 양지바른 아리따운 언덕에 봄철에 소생하는 새싹들 여유롭고, 하나둘 새소리 들리니 일찍이 웃으며 노래하네. 손님 초대해 북해의 물처럼 엄청난 술통의 술 마시며 호탕한 정 나누고, 아이에게 서쪽 강 같은 긴 전생의 업 가리라 하네. 유명한 곳에 다시 이르니 붉은 복숭아꽃 떨어지고, 이지러진 세상에 서로를 보니 흰 머리가 많네. 화산華山에서 도 들으니 절묘하게 칭찬받고, 밝은 아침에 밀칠 한 나막신 신고 어찌 놀러 가지 않으리.
附南老次韻
차운한 시를 지어 노남로 盧南老에게 보내다
全靑草色繞春坡 雨後應傳瑞麥歌 路出雙鞋閒日月 情深萬斛倒江河 淸緣未了來時復 白髮居然別裏多 未辨三盃今夜好 此鄕何以變無何
봄날 둑 둘러싼 풀빛 온통 푸른색이고, 비 내린 후에 응당 서맥가瑞麥歌 전하네. 세월이 한가하여 신발 한 짝 신고 길을 나서고, 깊은 정 가득 싣고 강물 거슬러 오르네. 맑고 숭고한 인연 끝내지 못하고 때때로 다시 오고, 흰 머리는 남몰래 늘어 속에 유달리 많네. 술 석 잔 마시니 오늘 밤이 좋은지 구분 못 하고, 이곳 시골은 어째서 아무 변화도 없는가.
花紅葉綠染山坡 瀟灑行裝發浩歌 楊柳池塘掀白日 文章詩酒進黃河 三時供客羞羹薄 半畝呼奴種菜多 舊篋新詩爲我貯 老年相別悵如何
붉은 꽃과 푸른 잎사귀 산비탈 물들이고, 기운이 맑고 깨끗한 날 행장 매고 길 나서며 큰소리로 노래 부르네. 버드나무 자라는 못에 해 높이 뜨고, 글월과 시 술 즐기며 황하로 나아가네. 삼시 세끼 손님에게 나오는 음식과 국 박하고, 많은 사람이 반 이랑 밭에 하인 불러 채소 심네. 나를 위해 새로 시를 지어 묵은 상자에 넣고, 나이 들어 서로 헤어지려니 얼마나 슬픈지 모르겠네.
五愚席上次愚溪老人松庵韻
五愚가 위에 앉고 다음 愚溪 노인과 송암이 앉아 운을 짓다
全秉海号松庵 自安義 僑淳化
전병해全秉海는 호가 송암松庵이고, 안의安義에서 와서 순화淳化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해 살았다.
松髥與翁髮蒼白 不嘗同 惟有貞心在相期 歲暮中
솔잎과 함께 창백한 노인의 머리는 일찍이 같지 않고, 오직 세밑 중에 서로 기약한 곧은 마음에만 있다.
紅綠靑黃二月時 時人但畵牧丹枝 誰憐老屋風霜裏 百尺孤高柱石宜
붉고 푸르고 파랗고 누런빛으로 가득한 이월에, 당시 사람들 다만 목단꽃 가지만 그리네. 풍상 속 오래된 집에 누가 애달파하고, 백 척의 홀로 고귀한 주석柱石 아름답네.
赬甲蒼髥可十圍 高人風彩長而頎 已經寒苦氷霜質 不比尋常草木輝 大地龍盤根最厚 千年蟉曲葉全稀 山翁巾服逍遙處 茅屋三間竹兩扉
붉은 얼굴의 어른 반백의 수염 십 위나 되고, 뜻이 높은 사람 풍채가 길쭉하고 크네. 고통스러운 추위는 이미 지났건만 찬 서리는 그대로이고, 보통 때와 달리 풀과 나무 빛나네. 용이 서린 대지에 가장 두텁게 뿌리내리고, 천 년 동안 구불구불 굽어 온전한 잎사귀 드무네. 산속에 사는 늙은이 머리에 건 쓰고 사는 곳 거닐고, 세 칸짜리 초가집 두 문짝 대나무 엮었네.
主人庭畔一株松 生長湖山積氣中 萬劫風霜筠節老 太淸雷雨栢心同 平生苦守叢叢碧 抵死羞爲灼灼紅 若把藝臺公案筆 蒼官獨許效丹忠
주인집 뜰 가에 한 그루 소나무 서 있고, 호수와 산에 쌓인 기운 속에서 나고 자라네. 만겁의 풍상 겪으니 대나무 곧은 절개 쇠하고, 날벼락 치는 하늘은 굳은 심정과 같네. 총총한 푸르름 평생 애써 지키더니, 죽음에 이르니 부끄럽게도 불타는 듯 붉네. 예문관에서 그대 책상에 앉아 붓만 잡은 것처럼, 소나무만 오직 참된 충성 보이네.
竹軒翁八十晬宴次韻
죽헌竹軒 노인의 팔십 생일잔치에 차운 시를 짓다
館田楊老人方叔齋號
竹軒은 관전리의 양노인 방숙方叔의 재호齋號다.
歲在戊子八月十日 竹軒翁八十晬辰 翌年暮春 余與盧司馬南老訪翁於館田里 氣宇軒豁 談快暢 年八十一 猶跨馬如少年時云 出示晬詩一拳 忘拙續貂 八月弧辰八耋年 欣欣 軒竹笑天然 尋常 初度猶能酒七十云 稀況 此筵 絳甲 老人應在下 皓眉仙客莫爭先從 今海屋無量籌 五竺三山入畵圓
무자년 팔월 십 일은 죽헌竹軒 노인의 여든 번째 생일이었다. 이듬해 늦은 봄에 나와 진사 노남노盧南老와 함께 관전리館田里에서 노인을 방문했다. 기개와 도량이 훤히 트여서 매우 넓고 말씀하는 모습이 쾌창했다. 나이가 여든하나인데도 젊었을 때처럼 말을 탈 수 있다고 전했다. 생일날 시집 한 권을 꺼내어 보여줬다. 졸렬함을 잊고 못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의 뒤를 따른다 했다. 팔월 여든 번째 생일날 기뻐서 죽헌이 천연덕스럽게 웃고, 예사롭게 처음부터 술을 칠십 잔이나 마실 수 있다고 전하는데, 드문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 진홍색 환갑날에 노인도 응당 아래에 있어야 하고, 흰 눈썹은 신선을 다투듯 좇지 않았다. 지금 신선이 사는 해옥海屋에 산가지가 무수히 많아, 인도의 세 개의 산에 들어가 둥근 원을 그렸다.
用玉川宰尹侯韻和八巖楊奉瑞 名鍾麟
옥천玉川의 벼슬아치 윤후尹侯의 시에 차운하여 팔암八巖 양봉서楊奉瑞에게 화답하다
春山何處訪閑居 雲裏樵歌也答漁 桃水深蹊通小棹 松陰老屋展奇書 眉稜霞碧千尋秀 心緖灰丹一寸餘 希世吾知麟瑞出 朝家結網未應疎
봄날의 산 어딘가에 있는 한가한 거처 찾아오니, 구름 속에서 나무꾼 노래 부르고 어부가 답하네. 복숭아 물 흐르는 깊은 물길 작은 노 저으며 지나니, 소나무 그늘 속 오래된 집에 기이한 책 늘어져 있네. 미간에 비친 천 길이의 푸르스름한 노을 빼어나고, 마음속에 품은 느낌 붉게 불타 한 치나 남았네.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상서로운 기린 나오는 것만큼이나 만나기 어렵고, 아침에 집에서 그물 짜는 일 소홀히 하지 않네.
過萬壽灘與黃上舍乃涉盧上舍南老口占
만수탄萬壽灘을 진사 황내섭黃乃涉 진사 노남노盧南老와 함께 지나는 길에 즉석에서 시를 짓다
乃涉名源龍
내섭乃涉의 이름은 원용源龍이다.
萬壽灘前石露頭 聯翩三策溯淸流 江兒不用篙竿進 日索輕輕一葉舟
만수탄萬壽灘 앞쪽에 돌덩이 머리 드러내니, 세 사람 지팡이 연달아 내흔들며 맑게 흐르는 물 거슬러 오르네. 강가 아이 삿대도 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날마다 가벼이 한 척의 조각배 타고 찾아 나서네.
宿甲洞韓處中書室
갑동甲洞 마을 韓處中 서실에서 묵다
圭燮大人與余同庚 三子八孫晩慶源源 号梧下
규섭圭燮 대인은 내와 동갑인데, 세 명의 아들과 여덟 명의 손자까지 늦도록 경사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호는 오하梧下다.
一樹梧桐出屋頭 中間五載水聲流 如今子葉繁陰下 無事閒翁送玉舟
한 그루 오동나무 너머로 지붕이 드러나 보이고, 오 년 동안 흐르는 물소리 들리네. 지금처럼 그늘 밑에 새싹이 번성하고, 할 일 없는 한가한 늙은이 옥주玉舟 보내네.
訪蘆洞韓君彦精舍
노동蘆洞 한군언韓君彦 서실을 방문하여
剗崖築石露頭頭 排置名花別品流 客到衣巾淸不耐 庭陰如水屋如舟
벼랑 깎고 돌을 쌓아 머리와 머리 드러내고, 좋은 꽃 배치하고 특별한 물건 떠나보내네. 청빈 참지 못하고 손님 의관 차려입고 도착하니, 뜨락의 그늘은 물이고 집은 조각배네.
過華灘津
화탄진華灘津을 지나며
峭壁巉巖壓水頭 纔通線路汗漿流 險世波瀾皆若此 無心盡日一虛舟
가파른 절벽 가파른 바위 물 머리 가로막고, 땀 뻘뻘 흘리며 좁은 길 겨우 지나네. 파란만장한 험한 세상 모두가 이러하니, 종일 한 척의 빈 배만 무심히 떠 있네.
宿愚溪楊子鉉精舍次華溪齋韻
우계愚溪 양자현楊子鉉 서실에서 묵고, 화계華溪 재실 운에 시를 짓다
華灘一局抱中開 此屋重新歲幾回 可愛山屛晴似畵 何嫌野艇小如盃 漁兄樵弟同隣住 墨色書香滿座來 次第工程須進步 於文亦有九層臺
화탄華灘 한쪽으로 감싸 돌아 가운데로 열리고, 이곳 집 새로 지은 지 몇 해이던가. 병풍처럼 둘러싼 산이 사랑스럽고 날씨가 맑으니 한 폭의 그림 같고, 들판에 멈춘 술잔 같은 작은 배 어이 싫어하리. 이웃에 함께 살면서 형은 고기를 잡고 아우는 나무를 하고, 먹 빛깔과 책 향기 앉은 자리로 다가와 가득 채우네. 공부 과정의 다음 차례는 한 발을 더 내딛는 것이고, 배워야 할 글은 구 층의 누대에도 또한 있네.
登漁隱亭
어은정漁隱亭에 오르다
黃乃涉 盧南老 楊汝平 韓君彦 同會幷余五人
황내섭 노남노 양여평 한군언 더불어 나까지 다섯 명이 함께 모였다.
一闋滄浪一棹開 攀崖綠壁路縈回 雲排華岳三峰畵 香泛蘭亭九曲盃 穀雨春晴魚族大 花風晝寂燕賓來 傳家泉石靑氈在 認是先生舊釣臺
창랑곡滄浪曲 한 곡 끝이 나니 뱃노래 한 곡 시작하고, 벼랑 붙잡고 오르니 푸른 절벽 길 꼬불꼬불하네. 세 봉우리 우뚝 솟은 화려하고 큰 산에 구름 막히니 그림 같고, 향기 떠도는 난초 모양 정자에 올라 구곡가九曲歌 부르며 술잔 기울이네. 맑게 갠 봄날 곡우에 물고기들이 풍성하고, 꽃바람 부는 한적한 낮에 제비 손님 찾아오네. 샘물과 돌처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푸른빛 융단이 있어, 선생이 예전에 낚시하던 곳이었음을 알려주네.
楊氏先漁隱公搆此亭
양여평의 선조인 어은공漁隱公이 이곳 정자를 지었다.
又占短律
또 짧은 율시를 짓다
山畔孤亭碧水頭 當時風詠盡名流 後人若畵滄江景 五老衣巾共一舟
산기슭에 외로이 서 있는 정자에 오르니 물 머리 푸르고, 당시 시를 읊던 이름난 사람들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네. 후세 사람이 만약 푸른 강물의 풍경 그리면, 의관 차려입은 다섯 늙은이 함께 배를 타고 있으리.
漁隱亭贈別諸賢五首
어은정漁隱亭에서 여럿이 이별의 정을 담아 다섯 수를 지어 줬다.
游戱湖山已白頭 荷潭明月最風流 一段詩緣抛未得 秋來擬涉赤江舟 右屬乃涉号荷潭
호수와 산 찾아 놀고 보니 이미 백발의 머리 되었고, 연꽃 핀 연못에 밝은 달 뜨니 풍류 즐기기에 최고네. 일단 시의 인연은 떨치지 못하고, 가을이 오면 배 타고 붉은 강 건너리.
多情難別柳溪頭 鸎語頻繁鷰語流 行到漁亭三十里 春風吹送木蘭舟 右屬南老
정 많이 들어 유계柳溪 앞에서 헤어지기 어렵고, 꾀꼬리 울음소리 자주 들리고 제비 울음소리 물 흐르듯 들리네. 가다가 삼십 리에 떨어진 어은정漁隱亭에 이르니, 봄바람 불어 목란주木蘭舟 떠나보내네.
龜岺碧處更回頭 隔岸桃花來水流 也識壽灘歸去路 一竿明月載漁舟 右屬汝平
숲 울창한 거북 고개에서 다시 머리 돌리니, 건너편 언덕에 복숭아꽃 피고 강물 흘러오네. 수탄壽灘이 돌아갈 길이라는 걸 알아, 달 밝은 날 고기잡이배 올라타 낚싯대 드리우네.
幽人家在碧山頭 楡柳成行午影流 鋤月耕雲閒趣味 也應勝似釣虛舟 右屬君彦
은자의 집 푸른 산 머리맡에 있고, 줄지어 늘어선 느릅나무 버드나무 위로 오후의 해그림자 지나가네. 달 밭 호미로 매고 구름 언덕 쟁기로 가는 일 한가롭고 좋아서 자주 하니, 응당 빈 배에 앉아 낚시하는 것보다는 나으리.
亭在山回水盡頭 離筵文酒亦淸流 浮生會合元無定 等是搖搖不繫舟 右自述
산을 돌아 물길 끝나는 머리맡에 어은정漁隱亭 있어, 글과 술 놓고 송별연 벌이니 냇물 또한 맑게 흐르네. 떠도는 인생 원래 정해진 모임이란 없으니, 잡아매지 않아 흔들리는 배와 같네.
附乃涉次韻
내섭이 차운시를 보내다
離家忘却大刀頭 環盡淳南水合流 爲送光山張上舍 行行路出亦江舟
머리맡에 큰 칼 두고 떠나온 집 까마득히 잊고, 순창과 남원 완전히 돌아 물 모여 흐르네. 장 진사 광산으로 떠나보내려고, 길을 가다 다시 강에 들러 배 태우네.
再訪蘆洞贈韓致九
노동蘆洞을 재차 방문하여 韓致九에게 보내다
林盤留客簇山珍 靑眼重逢意更新 江路周行鷗作伴 溪簷信宿燕爲賓 透窓石氣虛凉夜 入室花香醞籍春 巖下修藏於此足 朱門高笑曳裾人
손님 머무는 조릿대 자라는 산속 숲과 반석 진기하고, 거듭 만날 때마다 반갑게 맞이하니 기분도 다시금 새로워지네. 갈매기와 짝을 이뤄 강 길 따라 두루 돌아다니다, 이틀 밤 머무르니 물가 처마의 제비 손님 되어주네. 창문 뚫고 돌의 기운 들어오니 밤이 서늘하고, 꽃향기 방으로 들어오니 봄날이 온화하네. 바위 아래에서 책 읽고 학문에 힘쓰는 건 이만하면 족하니, 긴 옷자락 늘어뜨린 사람 붉은 문 앞에서 크게 웃네.
次金愼之銀川韻
九曲歌成我思幽 凄凄葭露滿汀洲 君應識氣昏黃夜 客欲乘槎漾碧秋 已許淸音絃上在 那期白髮鏡中流 此心宛照銀花子 風月溪山送玉舟
구곡가九曲歌 들으니 내 생각이 깊어지고, 물가 모래섬에 이슬 맺힌 스산한 갈대 가득하네. 어슴푸레한 밤의 기운 그대는 응당 알 것이고, 나그네 뗏목 타려 하니 푸르른 가을 강물 출렁이네. 이미 허락하니 맑고 깨끗한 소리 가야금 줄 위에 있고, 백발이 거울 안에 흐를 줄 어찌 알았으랴. 이 마음 은빛 꽃 씨앗에 완연히 비치고, 계곡 산의 바람과 달빛 담아 옥주玉舟 보내네.
用珍字呈梯庵丁司馬國卿
珍 자를 써서 시를 지어 진사 제암梯庵 정국경丁國卿에게 드리다
梯谷文章世所珍 家風孝友久逾新 氣節無雙湖海士 功名太薄國庠賓 長我一年身最健 同君半晌座猶春 從今塵臼都忘了 方丈山中讀古人
제곡마을 문장 세상의 보물인 바, 효와 우애 지켜온 가풍 오래될수록 더욱 새롭네. 기개와 절조가 호수와 바다 같은 사람 둘도 없고, 성균관에 손님으로 들어가 이름 떨치기란 몹시 희박하네. 내가 크게 성장한 일 년이 가장 건강했던 때이고, 그대와 반나절 동안 함께한 자리는 오히려 봄처럼 따뜻했네. 이제는 속세의 구렁텅이는 모두 잊고, 산속 고승의 방에서 옛사람 글 읽으리.
國卿有方丈 舊居同訪之約
국경國卿한테는 오래전에 기거했던 방장方丈이 있는데, 함께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和渠史先生木筆筒韻
거사渠史 선생의 나무 필통에 운을 지어 화답하다
瘤根腫節可詩鉤 圓外虛中似玉舟 兩竅心通藏管蚤 孤杓頭揷露毫秋 容蟠有力蛩須蚷 鉛槧隨緣鷺伴鷗 多事長安簪筆客 珊瑚寶架謾相留
혹 뿌리와 종기 마디 시를 낚는 갈고리라 할만하고, 동그라미 바깥쪽 텅 빈 곳은 옥주玉舟 닮았네. 양쪽 구멍으로 마음이 통하고 대통에 벼룩 감추고, 머리에 외따로 자루 꽂으니 붓 드러나 보이네. 귀뚜라미가 노래기 구하듯 얼굴에 힘이 서리어 있고, 해오라기와 갈매기 짝을 이루듯 붓과 종이 인연 따르네. 서울에 일이 많아 객마다 붓 휴대하고, 산호와 보배 다리 놓아 서로 속이어 붙들어 잡네.
芝谷與友村小山同賦
지곡에서 우촌 소산과 함께 시를 짓다
筠吾高弟石吾兄 分占林泉世莫爭 戲答禽言移座淨 閒箋蟲字對窓明 桃花結局收春令 芳草專權主夏盟 誰道幽居無事業 山人都管物之淸
筠은 나의 학식이 높은 제자이고 石은 나의 학식이 높은 형이고, 숲과 샘 나누어 차지하니 세상에 다툴 일 없네. 옮긴 자리 맑으니 익살맞게 새소리로 답하고, 한가하여 蟲 자 써서 붙이니 마주한 창문 밝아오네. 복숭아꽃은 결국 봄 전령 거둬들이고, 향기로운 풀은 전권 휘둘러 여름의 맹세 주관하네. 누가 은거하는 자는 힘쓸 일 없다 하는가. 산속에 사는 사람이나 절에서 사는 사람이나 청빈하여 물질에 욕심이 없네.
琴嘯館晬宴
금소관琴嘯館 생긴 날 잔치에서
草香麥色雨餘生 吉日琴堂雅會成 杯酌細添花氣暖 簿書閒與竹心淸 吉祥幷溱由陰厚 宿癢族消覺體輕 儉歲不煩絲管閙 風簷語鳥自呼名
비 온 뒤에 새록새록 돋아나 풀 내음 풍기고 보리 색으로 물드니, 좋은 날 금소관琴嘯館에서 우아한 모임 이뤄지네. 술잔 따르고 꽃 기운 약간 더하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장부와 문서 일 한가롭고 더불어 푸른 대나무 맑네. 몰래 후하게 베푸니 길하고 상서로운 일이 아울러 성하고, 묵은 가려움증 깡그리 사라지고 가뿐한 몸 느끼네. 흉년이라 현악기 관악기 시끄럽게 떠들어 괴롭히지 않으니, 바람 부는 처마에서 새들 지절대며 혼자서 이름 불러대네.
二禽語
野客從來昩昧鳥名 忽驚山夜一雙鳴 也渠曾是農家者 效得驅牛嘖嘖聲 右嘖嘖鳥俗名雇鳥
야인은 오래전부터 말조昩鳥라 이름하니, 놀랍게도 산에서 밤에 한 쌍의 새소리 들리네. 그 사람 일찍이 농사짓는 집 사람이라, 소를 끌고 가니 책책새 울음소리 들리네.
深園怪鳥自呼名 纔到三更爲底鳴 山家豆粥聞初熟 忽忽嘗來吸吸聲 右吸吸鳥俗名武鳥
깊은 동산에서 괴상하게 생긴 새 스스로 이름을 부르고, 겨우 도착하니 한밤중에 나지막이 새소리 들리네. 산속 집에서 드디어 콩죽 익는 소리 들리고, 어느새 맛보러 온 흡흡새 울음소리 들리네.
蚕
蛹筒卵紙稱三生 大葉扶桑灑雨聲 滿腹經綸潛吐日 靑梯百尺告功成
번데기와 대통 잠란지蠶卵紙 삼생三生이라 일컫고, 부상扶桑의 큰 잎사귀 씻기는 소리 들리네. 날마다 잠기어 뱃속에 가득한 경륜 토해내고, 백 척의 푸른 실마리 공이 이루어졌음을 알리네.
次栗湖怪石二絶
율호栗湖 괴석으로 칠언절구 두 편을 짓다
毛疑於蝟尾嫌魴 趹坐庭陰合尙羊 甲乙題名雖異品 看來都是鹿邊獐
고슴도치는 털이 의심스럽고 방어는 꼬리가 싫어, 서성거리다 합치어 뜨락 그늘에 빨리 들어가 앉네. 비록 특이한 물건이어도 갑을甲乙이라고 표제가 붙고, 보건대 모두 다 사슴 근처 노루네.
麻姑編髮綠蘭膏 閱歷風霜畵白毫 醜頑化作千年骨 開落仙窓幾碧桃
마고 할매 편발 같은 녹란 살찌우고, 오랜 세월 동안 겪은 온갖 고난 하얀 털로 그리네. 천년을 지켜온 골격 추하고 완고하게 변화시키고, 仙窓 내다보니 벽도碧桃 꽃 몇 개가 피고 지네.
失鏡歎
거울을 잃고 탄식하다
寶月光沆玉影遮 初看堪怪更堪嗟 隍人如夢身藏鹿 水母無端眼失蝦 囊裏探形餘古匣 床頭撿字奈昏花 從今亂色都忘了 寘日觀心悟老迦
보배로운 달빛 넓게 드리워 맑은 옥 그림자 가로막아, 처음으로 보니 못내 괴이해 더욱 한탄스럽네. 사슴 몸을 숨기니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 꿈만 같고, 해파리는 바르지 않고 새우는 눈을 잃네. 옛 상자 여유가 있어 주머니 속 형태 찾으니, 책상머리에 있는 撿 자 어째 잘 보이지 않네. 이제부터는 음란한 여색은 모두 잊고, 날을 두어 마음의 본성 살피니 노가 老迦 깨닫네.
自栗湖還適東橋見訪喜次二絶
율호에서 다시 동쪽 다리로 가다가 방문하니 기뻐서 절구 두 수를 차운하다
深深門柳綠斜斜 分付山童好護家 一片吾心舍未吐 待人惟有滿庭花
깊고 깊은 곳 문 옆 푸른 버들 삐뚤삐뚤 서 있고, 산에 사는 아이에게 집을 지키라 분부하네. 한 조각 내 마음 아직 드러내지 않고, 사람을 기다리는 건 오직 정원에 가득 핀 꽃들뿐이네.
閒雲倦鳥日將斜 已料殷勤客到家 半晌歸鞭三千里 逢君果是有情花
구름은 한가히 흐르고 새는 게으르게 날고 해는 장차 지려 하니, 손님이 이미 집에 이르렀을 거라 은근히 헤아리네. 반나절 동안 채찍 휘둘러 삼천리 길 돌아와, 그대를 만나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정다운 꽃 피어 있네.
與東橋往瑞石伽藍途中口占
더불어 동교에서 서석산 사찰로 가는 도중에 즉흥시를 짓다
白石灘頭線路斜 夕陽山店兩三家 荒年從此生涯足 隴麥黃兼野菜花 仙觀店
하얀 돌 널려 있는 여울 가에 좁은 길 구불구불하고, 저녁해 비치는 산속에 가게와 두세 채 집뿐이네. 흉년에 이만하면 생계는 만족하고, 고갯마루에 보리는 누렇고 아울러 채소는 꽃이 피었네.
溪南亭樹綠陰斜 病渴行人訪酒家 入洞頗知謠俗厚 田田耘耔木綿花 茂陽亭
개울 남쪽 정자에 녹음 짙은 나무 비스듬히 기울어 있고, 소갈증 있는 행인 술집 방문하네. 마을에 들어서니 푸짐히 풍속 노래 부르는 까닭 자못 알아차리고, 밭마다 김매고 목화 북돋우네.
次雲谷齋韻
운곡 재실에 차운하다
碧螺簇立小盤平 窓對西南缺處明 春後林屛添畵色 晴餘澗瑟助詩聲 岩高曙旭支離上 洞邃暝烟頃刻生 數墨尋行閒事業 千年雲谷已傳名
평평한 소반에 벽라춘碧螺春 차 빽빽이 늘어서 있고, 창문 마주하니 서남쪽 갈라진 곳 밝네. 봄이 온 뒤에 병풍 같은 숲 그림의 색 더하고, 날이 개어 여유로우니 비파 같은 개울물 시 읊는 소리 돕네. 새벽에 높은 바위 위로 아침 해 지리멸렬 떠오르고, 깊은 골짜기에 저녁 안개 순식간에 생겨나네. 하는 일 한가로워 한 문장 한 문장 읽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니, 천년의 운곡 제실 이미 이름을 떨치었네.
澄寺步小陵韻二首
맑은 절을 걸으며 소릉의 운을 써 시 두 편을 쓰다
尺地諸天近更遙 丹藜扶我越平朝 境虛水石涵淸鏡 園靜風篁替玉簫 賴有高僧談法海 相從詞客夢仙橋 形呼神釋空山裡 另把狂吟也答樵
이 좁은 땅에 제천諸天이 가까웠다 다시 멀어지고, 붉은 명아주 지팡이에 나를 맡기고 평화로운 아침을 건너뛰네. 심경이 텅 비니 맑은 거울 속에 물과 돌 넣고, 정원 고요하니 대숲에 바람 불어 옥 퉁소 대신하네. 다행히 고승이 있어 불법佛法을 이야기 나누고, 서로 따르는 시객 몽선교를 건너네. 고요한 산속에 신령의 형체를 부르니, 나무꾼이 따로 붙잡아 미친 듯이 노래하며 대답하네.
名藍寄在碧峰遙 從古煙霞隔市朝 雲外舍人簪玉笏 月中仙客弄淸簫 石身如悟苔爲榻 潭影空心竹作橋 十載湖山漫浪跡 誰憐白髮隱漁樵
유명한 절에 머물며 푸른 봉우리 거니니, 예로부터 붉은 노을 저잣거리와 거리가 머네. 구름 밖에는 식객 머리에 옥 홀을 꽂고, 달빛 속 선객 맑은 퉁소 멋대로 부네. 돌 몸뚱이 깨달아 이끼 낀 평상이 되고, 연못 그림자에 마음 비우고 대나무 다리 만드네. 십 년 동안 호수와 산 찾아다니며 부질없이 흔적 남기니, 숨어 사는 백발의 어부와 나무꾼 누가 애달파 하리.
輓羅和彦
文垣彩筆行雲斜 謹厚平生善繼家 瑞石靑山君去後 典型猶有二蘭花
구름이 기울어 가는 듯한 문장 솜씨로 문단에 이름을 떨치고, 평생을 근후히 집안에 잘 계승하였네. 그대 떠난 후에도 서석 푸른 산에는, 전형적인 두 그루 난꽃 여전히 피어 있네.
和贈景陽丞崔龍三 (江西人 壬午應製登第)
경양승景陽丞 최용삼에게 화답하여 드리다. (최용삼은 강서 사람으로 임오년 과거에 응시해 급제하였다.)
當軒梅竹第耶昆 對此吟哦朁日番 千里爲官眞逆旅 一郵無事是田村 賓來喜接樽醪洽 病起全鎖簿牒煩 借問馬曺何所得 睡餘山色破昏昏
처마에 닿은 매죽이 가장 뛰어나니, 이에 대하여 일찍이 낮 동안에 시를 읊네. 관직에 오르러 가는 천 리 길이 진정한 여관이고, 밭 일구는 마을 한 역참 할 일이 없네. 손님이 찾아와 반갑게 맞이하여 막걸리 술 단지 마시고, 문서와 장부 귀찮아 병석에서 일어나 모두 잠그네. 묻노니 마조馬曹 벼슬로 무엇을 얻었는가. 잠을 깨 산색을 보니 흐릿한 머리가 깨어나네.
月峰店見蓮花有感
월봉점에서 연꽃을 보고 느낀 바가 있다
亭亭紅綠水晶盤 太液曾沾雨露懽 怊悵月峰山下路 明粧只許野人看
붉은색과 푸른색이 쭉쭉 뻗으니 수정 쟁반이고, 태액의 연못 일찍이 비와 이슬 젖어 기뻐하네. 슬프구나, 월봉산자락 길이여. 밝게 화장한 모습 단지 야인에게만 보기를 허락하네.
次聾嘿窩韻 幷小序
余友丁斯文時海隱居 福州之密陽縛數間茅椽 厭紛占閒鞱光鏟彩 不欲與世相聞以聾嘿 顔其軒 余叩之曰 許瓢去耳 李匏無口 固 君子之善行 今主人以聾嘿自號則善至 若於山水 咸以聾嘿辱之奚也 余反以解之曰 山本無聞 響之而應 水本無聲 激之而鳴 夫調調刁刁 紛紜轇轕 豈山水之性也哉 然則聾嘿匪辱之也 廼寵之也 山乎水乎 受而勿辭 易曰 含章可貞 主人其殆庶幾乎 和以詩曰
나의 벗 유학자 정군이 바닷가에 숨어 살 때, 동복 양지바른 곳에 몇 칸 안 되는 초가집을 지었는데, 어지러운 것을 싫어해 한가로이 지내려고 빛과 무늬를 숨기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듣지 않으려고 했다. 그 집에 편액을 써 붙이고 나를 두들기며 말했다.
“허표許瓢는 귀를 없애고, 李匏는 입이 없다 하지 않았소. 진실로 군자의 선한 행실이오.”
지금 주인이 스스로 농묵聾嘿이라 호를 지어 부르며 잘하고 있는데, 산과 물과 같이 모두가 귀를 막고 입을 닫는다고 욕해서야 쓰겠는가? 내가 역으로 풀어서 말했다. 산은 본래 아무 소리도 안 들리나 소리쳐야 호응하고 물은 본래 소리가 없으나 부딪혀 흘러야 소리가 나는데, 도대체 요동치고 떠들썩하고 뒤섞인 것이 어찌 산과 물의 성질이겠는가. 그렇다면 귀가 막히고 말을 못 한다 하여 욕된 것이 아니다. 이내 총애하여 산이고 물이고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주역에서 말하길 아름다움을 간직해야 곧을 수 있다 하였듯이 주인이 그것에 거의 가까울 것이기에 시로써 화답해 말했다.
水幽山靜屋西頭 也有癡癲絶俗流 强聒祗爲形外役 希夷端合物初遊 課書燈月兒遶榻 賖酒籌花客上樓 可笑世人徒口耳 誰知皮裏一春秋
물은 깊고 산은 고요하고 집은 서쪽을 향하니, 속된 무리 멀리하는 바보천치도 있구나. 억지로 떠들어봐야 고작 밖에 나가 일할 때뿐이고, 심오한 도리와 들어맞으니 만물이 처음으로 노니네. 아이는 걸상에 둘러앉아 등불과 달빛에 의지해 글을 쓰고, 술 사 들고 장수 기원하며 나그네 누각 오르네. 세상 사람들 입과 귀가 가히 우습구나. 말하지 않아도 사람마다 마음속에 속셈이 하나씩은 있다는 걸 누가 알리.
李匏 : 송나라 어진 정승 이항李沆이 매우 과묵하여, 사람들이 그를 ‘無口匏’라고 하였다.
七月旣望福川觀獵
칠월 십육 일에 동복 냇가에서 사냥하는 장면을 보다
水淺江心露石頭 飛來何處一閒鷗 山客提壺穿小逕 漁人晒網下中洲 白纈晴沙生亂篆 凉噓綠樹似高樓 坡仙赤壁知今夕 不恨當時未共舟
물이 얕아 강 가운데 돌덩이 머리 들어내고, 한가한 한 마리 갈매기 어디에서 날아오나. 산에 사는 나그네 술병 들고 작은 샛길로 들어가고, 어부는 섬 가운데로 내려와 그물을 말리네. 하얀 비단 고운 모래에 전서체 같은 연기 어지러이 피어나고, 높은 누각 같은 푸른 숲에서 시원한 바람 부네. 오늘 밤 소동파는 적벽을 알려나. 당시 함께 배를 타지 않은 걸 원망하지 않네.
八月初吉密陽齋罷硏贈別
팔월 일 일 양지바른 날 재가 끝나 헤어질 때 벼루를 갈아 시를 지어 건네다
林泉逃暑瀨科頭 一任江湖泛泛鷗 早結靑雲遊洛社 誰知白髮老滄洲 山將畵意晴當戶 溪與秋聲夜入樓 寄語諸君須努力 蓮歌同上木蘭舟
더위를 피해 숲속 샘으로 들어가 여울물에 머리 내미니, 갈매기 강호에 몸 맡기고 둥둥 떠 있네. 일찍이 靑雲의 꿈 안고 서울에서 유학했건만, 창주滄洲의 백발노인 누가 알리. 집이 맑으니 산이 장차 그림을 그리려 하고, 시냇가에 함께 있다가 가을바람 소리 들리니 밤에 누각으로 들어가네. 여러분의 힘써 애씀을 전해달라 부탁하고, 작은 거룻배 타고 함께 연꽃 노래 부르며 오르네.
西林納凉亭次韻
서림 납량정에서 차운하다
客逃炎熱此中尋 老樹亭臺白日陰 流水縈林寒更淥 徧茅覆竹野還深 樽前轉碧千峰氣 袖外噓凉亂石心 也有子眞淸債足 一天風月不論金
나그네 무더위 피해 이곳 속으로 찾아드니, 늙은 나무와 누각에 가려 한낮인데도 음침하네. 숲이 감돌아 흐르는 물 서늘하고 또 맑고, 띠를 두르고 대나무 뒤덮으니 들판이 도리어 깊네. 술 단지 전 앞에 두니 수많은 푸르른 봉우리 기운 옮겨오고, 소매 밖으로 시원한 바람 부니 돌덩이 같은 굳은 마음 혼란스럽네. 그대 있으니 빚 갚은 것에 참으로 만족하고, 한 하늘 아래 바람과 달 있으니 황금 논한들 무엇하리.
五月旣望環碧堂宴會次韻 幷序
오월 십육 일 환벽당 연회에 차운하고 더불어 서문을 쓰다
環碧故文淸鄭相公杖屨所也 溪山園林之勝甲於湖南 三淵先生嘗曰 竹間流水天下第一景 是歲己丑新經大無旁 近村落無一人仳離 色於是洞中長老合辭以 五月旣望宴 五十以上於此堂與會 凡四十二人 石門鄭詞伯言曰 燕毛所以序齒分序次 是日衣冠齊整尊俎芳潔 依然若三山五竺出於丹靑人手 各賦四韻一篇以志 其喜 余非洞中人適與有榮焉 忘拙續貂 且爲序
名山淑氣結爲雲 叢桂招招歌一翻 洞裡衣冠眞率會 亭前花樹太平痕 賢風有自儀分序 儉歲纔經醉莫昏 四十二人蘭社契 應將圖繪耀衡門 (四十二員計年數合爲二千八百零)
환벽당은 문청文淸 정철이 지팡이 짚고 신발 끌며 와서 놀던 곳이다. 시냇물과 산이 있는 정원 숲으로는 경치가 호남에서는 으뜸이었다. 삼연三淵 김창흡 선생이 일찍이 “대나무 사이로 흐르는 물로는 천하제일의 경치다.”라고 말하였다. 이해 기축년은 새로운 길로 지나기가 무척 어려워, 근처 촌락에는 헤어져 흩어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곳 마을 안에 사는 어른들이 오월 십육일 연회에 함께 모여 상소를 올리자고 하여 오십 명 이상이 이곳 환벽당에 함께 모였는데, 모두 사십이 명이었다. 석문에서 정 사백詞伯이 말하길 “머리의 희고 검은 색깔로 나이가 많고 적은 순서를 나누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의관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받들어 대접하니 꽃답고 깨끗하였다. 여전히 삼산오측이 단청한 사람들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각자 사운시四韻詩 한 편을 지으니 그 기쁨을 기록하였다. 나는 동네 사람도 아닌데, 마침맞게 함께하여 영광이었다. 졸렬함을 잊고 담비의 꼬리를 잇는 건 아닌지 모르나 또 서문을 썼다.
유명한 산 맑은 기운 구름 만들고, 계수나무 숲 한 곱절 노래 부르며 오라 손짓하네. 마을 안에는 의관 차려입고 진솔한 모임 벌이고, 정자 앞에는 꽃나무 피어 태평스러운 흔적 남았네. 어진 바람이 부니 순서 나누어 스스로 예의 다하고, 흉년이라 겨우 끝마치니 취해도 멍하지 않네. 사십이 명이 시 모임 맺고, 당차 그림을 그리려 하니 형문이 빛났네. (사십이 명의 나이 수를 합하여 계산하니 이천팔백 살이었다.)
友村書舍會吟 小山三槎月梧楓岳同會
우촌의 공부방에 모여 시를 읊다. 소산 삼사 월오 풍악이 함께 모였다.
霞心愛子碧山居 尺大爲軒斗小廬 養竹園添千挻密 看花隣借一枝疎 興多詩力驅氷馬 病間調箴吸沼魚 也識今年蠶事足 風簷索索響繅車
노을의 마음 사랑하는 자 푸른 산에 살고, 한 척의 커다란 집 지으니 작은 초가집 뾰족 튀어나왔네. 대나무 길러 정원에 천 그루 보태니 조밀하고, 꽃을 보려고 가까운 경치 빌려오니 가지 하나 멀리 떨어져 있네. 흥겨워 시에 힘쓰니 빙마가 달리고, 병중에 비녀 가지런히 하고 못 속의 물고기 끌어당기네. 올해 누에치기 만족스러운 줄 알겠네. 처마에 바람 불어 벌벌 떨며 고치 돌리는 소리 들리네.
與友村夜吟用前韻
앞 운을 써서 우촌과 함께 시를 읊다
諸公相發我因居 爲愛靑山宿草廬 瑟瑟林風吹簟細 娟娟楓月入簾疎 頻來眠榻同棲鶴 向者詩函替字魚 喜子猶能雙脚健 明朝溪策不須車
여러분 서로 깨우치니 나 그로 인하여 살고, 청산을 사랑하여 초가집에 머무르네. 숲에서 솔솔 부는 바람 대자리 사이로 스며들고, 아름다운 단풍과 달빛 주렴 속으로 성기게 들어오네. 같이 사는 학 자주 찾아와 평상에서 잠을 자고, 지난번 시 상자 꺼내 魚자로 바꾸네. 두 다리가 건강해 능히 갈 수 있으니 그대가 기뻐하고, 내일 아침에는 지팡이 짚고 시냇물 건너니 수레가 필요 없네.
石低村與東橋賦喜雨
석저 마을에서 동교와 함께 시를 지으니 반가운 비가 내렸다.
去歲全無雨 今年雨及時 初從風細細 直到夜遲遲 大地三農足 仁天萬物滋 荒餘逢此喜 莫歎賣新絲
작년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올해는 비가 때때로 내리네. 처음에는 바람이 하늘하늘 불더니, 곧장 밤에 이르니 꾸물거리네. 커다란 땅은 농업 농촌 농민이 만족하고, 어진 하늘은 만물이 번성하네. 흉년 여파가 남은 때 이런 기쁜 날을 만나니, 새 고치실 내다 팔더라도 탄식하지 않네.
用前韻寄東橋
앞 운을 써서 시 지어 동교에게 부치다
相從忠孝里 兩夜雨多時 山寺春游晩 溪亭午話遲 煙霞詩上積 歲月鬢邊滋 未忍暫分手 綠楊千萬絲
충효 마을에 함께 가니, 이틀 밤 때마침 비가 많이 내리네. 저물도록 산속 절에서 봄나들이 즐기고, 낮에 개울가 정자에서 나눈 이야기 늦어지네. 안개와 노을을 보니 시구만 쌓이고, 세월 흐르니 귀밑 가 흰머리만 늘었네. 잠깐 헤어지는 것도 참지 못하고, 푸른 버드나무 수많은 실 같네.
盟字三疊和友村
盟 자로 세 번 반복 시를 지어 우촌에게 화답하다
同隣樵弟伴漁兄 雨後懽呼坐席爭 野野筐蔬春杼歇 家家舂麥夜燈明 天心臨下元無遺 社飮如前不負盟 病起蒼生猶圉圉 寬徭祇思縣官淸
동생은 같은 이웃과 나무하고 형은 어부와 동무하고, 비 내린 후 환호성 지르며 자리 차지하러 다투네. 봄에는 베틀 그만두고 들판에 나가 광주리에 푸성귀 담고, 밤마다 등불 훤히 밝히고 집집이 보리를 찧네. 하늘에서 임하는 마음 원래 남김이 없고, 시 모임 술자리에서 했던 맹세 여전히 저버리지 않네. 병석에서 일어나니 세상 사람이 오히려 비실비실하고, 현령 청렴하니 노역이 너그러워 편안함 떠올리네.
環碧堂中宴友兄 高笻大笠後先爭 樽前竹樹當心綠 檻外榴花照眼明 好是芝蘭聯夙契 莫敎猿鶴渝深盟 流觴白髮年年會 不讓山陰曲水淸
환벽당에서 우촌 형님 잔치 벌이니, 긴 지팡이 큰 삿갓 뒤서거니 앞서거니 다투네. 술 단지 앞 대나무 당연히 마음이 푸르고, 난간 밖 석류꽃 눈동자에 밝게 비치네. 이 지초와 난초 좋아하여 일찍이 나란히 약속을 맺고, 원숭이와 학 같이 깊은 맹세 변하지 말게나. 백발이 되어도 술잔 물 위에 띄우러 해마다 만나고, 산에 그늘이 져도 마다하지 않고 굽이쳐 흐르는 물 맑기만 하네.
案有雲孫盃露兄 幽居心事本無爭 情深結社隣陶謝 老益工詩倣宋明 誰道煙霞成宿痼 知應泉石不寒盟 若敎許割靑溪半 蕉漢生涯分外淸
구름 같이 먼 손자 책상에 있는 술잔 깰까 걱정하고, 그윽한 곳에 살면 마음의 일 본래 다툼이 없네.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 같이 정이 깊어 인근에 시 모임 만드니, 송과 명 본받아 늙어갈수록 시 좋아지네. 안개와 노을같이 버릇이 굳어진다고 누가 말하는가. 물과 돌은 맹세 어기지 않음을 응당 알지 않는가. 만약에 둘로 쪼개도록 허락한다면 푸른 냇물이 절반이고, 나무만 하고 사는 사람 평생 참으로 마음이 맑네.
竹可稱君梅可兄 蝸廬不入觸蠻爭 繁陰匝徑晴猶濕 落照含山遠更明 夢懶任敎啼鳥喚 心閒宜與狎鷗盟 它時隣巷如能卜 爲割溪流一半淸
대나무가 군자라고 하니 매화는 맏형이라 하고, 촉觸과 만蠻 다투기만 하고 달팽이 집에 들어가지 않네. 울창한 나무 그늘 속 오솔길 돌아 나오니 맑은데 오히려 습하고, 해가 지는데도 함산 멀고도 밝네. 꿈꾸며 게으름 피우다 새 울음소리에 깨어나고, 마음 한가로워 마땅히 친숙한 갈매기와 더불어 맹세하네. 다른 시간 인근 마을에서 만약 점친다면, 둘로 쪼갠 계곡물 절반이 맑네.
乳鳥雙飛逐弟兄 蒲村紅綠鬧如爭 微風苔髮梳來短 小雨花腮洗得明 藥裏支離嗟臥病 林泉遊賞愧違盟 也知芒屩穿應盡 踏遍何山興更淸
동생이 형을 뒤쫓듯 어린 새 두 마리가 하늘을 날고, 부들 붉으락푸르락 자라는 마을 싸움터처럼 시끄럽네. 수염처럼 길게 자란 이끼 빗질하듯 산들바람 쓸고 지나가니 짧아지고, 잠깐 내린 비에 꽃잎 씻기어 한결 밝네. 병든 몸 누워 탄식하니 속에 든 약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은자가 사는 곳 떠돌며 감상하자던 맹세 부끄럽게도 지키지 못하네. 짚신 신고 혼신 다해 뚫고 지나가면 알 텐데, 어느 산 밟고 지나가야 흥겨워 다시 맑아지려나.
睡來閒步賴方兄 病竪猶能老力爭 麥壟乍凉秋色淺 花畦通烘夕陽明 誰將霞酒相酬興 獨有雲山可結盟 幽處不妨成小憩 綠莎連徑竹陰淸 (李德裕以方竹杖贈 甘露寺 僧 竹産大宛後問 僧曰 方兄無恙 否曰 已削圓矣)
졸음이 쏟아져 방형 힘입어 한가로이 거닐고, 병들어 비루해도 오히려 늙은이 힘써 싸울 수 있네. 보리밭 갑자기 서늘해져 가을빛 옅어지고, 꽃밭에 횃불 비치니 저녁해처럼 밝네. 어느 누가 장차 흥겨워 노을빛 술 서로 주고받을 것인가, 구름 덮인 산에 홀로 서니 명세 맺을만하구나. 그윽한 곳에 방해받지 않고 잠깐 쉬어 가니, 푸른 풀 깔린 길 이어져 대나무 그늘 맑네. (이덕유가 모난 대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주었다. 감로사甘露寺 스님이 대나무로 크고 완만하게 만들어 나중에 물으니, 스님이 말하길 “방형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했다. 부정하며 말하길 “이미 둥글게 깎았습니다.” 했다.
答禽語和友村
새소리로 답시를 짓자 우촌이 화답시를 지었다.
山家早起借隣牛 爲治原田廢綠蕪 去年失稔無丁健 縱欲力驅所得驅 雇工鳥
산속 집에 아침 일찍 일어나 이웃 소 빌려, 푸른 잡초 무성한 버려진 고원의 밭 일구려 하네. 작년 흉년이 들어 건강한 장정이 없어, 욕심부려 힘써 소를 모네.
東家去市賣農牛 山下春田半已蕪 林禽不識官租急 猶自催耕盡日駈 友村
동쪽 이웃집 시장에 나가 농사짓는 소 팔고, 산 아래 봄 밭에 반은 이미 잡초 무성하네. 숲속 날짐승 관청에 내야 할 세금 급하다는 걸 알지 못하고, 오히려 혼자만 종일 소를 몰아 밭 갈라고 재촉하네.
答禽語二絶寄友村覓和
새소리로 답시를 지어 우촌에게 보내 화답시를 구하다.
海棠寂寂柳絲絲 一半山窓欲曙時 枕外春聲休喚起 看花餘想夢猶詩 右喚起
해당화 얌전하고 버드나무 살랑살랑 흔들리고, 한쪽 산속 창문으로 새벽 오려 하네. 머리맡에 들리는 봄 소리 잠 깨우지 말게나. 꽃을 보니 여운이 남아 꿈속에서 시를 짓네.
村南村北雨如絲 而我春田久廢時 縱使催歸歸未得 名山着處愛吟詩 友催歸
마을 남쪽 마을 북쪽 비가 실처럼 내리네. 하지만 나의 봄 밭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 폐허가 되었네. 돌아가려고 아무리 재촉해도 돌아가지 못하니, 이름 있는 산 발 닿는 곳에서 즐겨 시를 읊네.
次金善鳴客湖西還鄕
김선명의 나그네 되어 호서지방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오다 시에 차운하다
湖西佳麗遍行經 背郭孫村一草亭 客路云尋東海碧 詩緣연不負舊山靑 身閒竹策宜吟嘯 歲熟匏樽任醉醒 相對應憐病司馬 淸癯無復去年形
호서지방 아름다운 곳 두루 지나쳐 가니, 성곽 등진 손가네 마을에 갈대 얹은 한 정자 있네. 여행길에 동쪽 바다 찾으니 푸르고, 시가 인연이 되어 되찾은 옛 산은 저버리지 않고 여전히 푸르네. 몸이 한가하니 죽책 펼쳐놓고 마땅히 시를 소리 내어 읊고, 한 해가 무르익어가니 표주박 술 단지 껴안고 마음대로 취하고 깨네. 두 진사 병들어 서로 마주하니 가련하구나. 맑고 야윈 몸 예년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가 없네.
次枕泉奇斯文聖伯回甲韻
유학자 침천 기성백 회갑시에 차운하다
大吉祥人受福遐 今年戊子昔年華 偏宜塤瑟湛和日 復有芝蘭善繼家 白業千秋同瑞石 淸尊十月又黃花 請看餘慶源源在 枕下香泉一道斜
상서롭고 운이 좋은 사람 길이길이 복을 받고, 화려했던 지난날처럼 올해 무자년도 그러하리. 몹시도 화창한 날 질나발 불고 거문고 타며 즐기니 좋구나.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지초와 난초 같은 향기로운 사귐 다시금 잘 이었네. 선한 행실은 서석산처럼 오래오래 이어지고, 맑은 술 마시는 시월에 또 황국이 피었네. 청컨대
경사스러운 일 대대로 끊이지 않고 남아 보기를 바라네. 머리맡 향기로운 샘물 한 길로 기울어 흐르네.
聞道林講會喜賦一絶
도림 강회에서 강의를 듣고 절구 시 한 편 기쁘게 짓다
松沙與遠近士友行相揖禮于 道林吳室
송사와 멀고 가까운 선비와 벗들과 함께 도림 오서방 댁에 가서 서로 읍하는 예를 갖췄다.
滿眼群賢會道林 松楓九月氣蕭森 陶山儀節於今覩 興起儒門講學心
현명한 사람들 도림 서원에 모여 눈에 가득하고, 소나무와 단풍나무 물든 구월의 기운이 쓸쓸하고 을씨년스럽네. 이제야 보니 도산 서원 예의 절도가 있네. 유생의 집 학문 갈고닦는 마음 왕성히 일어나네.
泉洞講會有相赴之約未果
천동 강회가 있을 때 함께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
周旋風彩動經林 槐影疎疎竹影森 可惜泉齋今日會 緣吾多病負初心
바람이 두루 돌 듯 광채가 움직여 숲을 지나니, 홰나무 그림자 듬성듬성 대나무 그림자 빽빽하네. 아쉽게도 천동 서원에 오늘 모임이 있네. 내가 병이 많아 처음 먹은 마음 저버리네.
八音八卦兼二十八宿體和友村
金蘭入室喜三益 石髮星星我老師 絲管聽虛詩合節 竹梅看畢坐支頤 匏樽澆胃終多損 土窟安心且不離 革舊更張新化賁 木天奎璧願相隨
다정한 벗과 방에 들어가면 세 가지 이익이 있어 기쁘고, 나의 늙은 스승 돌에 낀 이끼처럼 희끗희끗하네. 현악기 관악기 소리 들으니 공허하고 시를 지어 경쟁하니 절도가 있고, 턱 괴고 앉아 대나무 매화 다 보네. 표주박 단지 술 부어 위에 닿으니 잃는 게 많고, 토굴 속에 있으니 마음이 놓여 또 떨어지지 않네. 옛것 고치고 다시 펼치니 새롭게 아름다워지고, 목천木天에 뜬 규성奎星과 벽성壁星 서로 따르길 원하네.
泉齋次春潭奇平仲
천동 서재에서 춘담 기평중에게 차운하다
爲愛名泉路入眞 門庭瀟灑不容塵 氷梅甚少猶淸士 露菊雖殘是大賓 座上高譚憑酒力 燈前傑氣逼詩神 向來風月渾閒事 一等書看一等人
사랑하는 이름 있는 천동 길 지나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고, 문 안 정원 맑고 깨끗하여 티끌 하나 용납하지 않네. 얼어 있는 매화 같은 청빈한 선비 매우 적고, 이슬 머금은 국화 비록 쇠잔해도 큰 손님이네. 술기운 의지해 자리에 앉아 고상한 이야기 나누고, 앞에 있는 등잔불 보니 호탕한 기운 치솟아 시의 신 다그치네. 본래 달과 바람 모두 한가로운 일이고, 가장 먼저 글 읽는 사람이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네.
輓新村奇丈師恒氏
신촌에 사는 스승인 어른 기항 씨 만사
瑞石爲南極吾鄕敬大年燕居持素履 奕世水靑氈展也 齋老胡然紫府仙 平生床下客桂操 酹寒泉
서석산 남쪽 끝자락 나의 고향에 존경스럽게 오랫동안 한가로이 지내며 본분을 지켰네. 대대로 물처럼 푸른 자리 펼치었네. 상복 입은 노인 어찌 선계의 신선이 되었는가. 평생 평상 밑에 손님이 찾아와 계수나무 붙잡고 차가운 샘물에 술을 부었네.
訪黃湖 李友文瓚
친구 황호黃湖 이문찬을 방문하다
來訪雲溪主 呻吟廢看書 黃花惟不病 十月滿庭除
운계 주인 찾아오니, 신음하며 책 보기 그만두었네. 누런 국화만 오직 병들지 않고, 시월 뜨락에 가득하네.
謝曺進士寬賢夜訪
감사의 말을 전하러 진사 조관현을 밤에 방문하다
隣朋招我夜相過 欲向田村有酒家 可奈芭蕉吟病骨 一庭明月負黃花
근처에 사는 벗이 나를 불러 밤에 찾아가네. 농사짓는 마을 향하는 건 술집이 있기 때문이네. 어찌하여 파초처럼 병으로 몸이 허약해 신음할 수 있단 말인가. 온 뜰에 밝은 달빛 가득한데 누런 국화 저버리네.
珠洞僑舍謝李友致瑞惠酒
주동 단층집에 서는 이치서의 술대접에 감사하며
峯西買得屋三間 隣友初招夜叩關 賢抱儀容淸似玉 殷勤更載酒樽還
봉우리 서쪽에 있는 세 칸짜리 집 살 들여, 근처 벗 부르러 밤에 문 두드리네. 손자 녀석 몸가짐 맑은 구슬과 같고, 은근히 대접하고 또 챙겨주니 술 단지 들고 돌아오네.
友村書舍夜和
우촌 글방에서 밤에 화답하다
雲樹蒼蒼我思遙 松籬缺處尺軒高 入深列嶂雙肩聳 話穩疎燈萬念消 晩楓夾徑紅侵屐 脩竹當窓綠染袍 向來石窟相尋約 劇醉曼吟敢曰勞
구름 덮인 숲 울창하니 나는 먼 곳 생각하고, 몇 척 높이의 집 소나무 울타리 떨어져 나갔네. 줄줄이 늘어선 봉우리 깊이 들어가니 두 어깨 으쓱하고, 희미한 등불 밝히고 평온히 이야기 나누니 온갖 잡념 사라지네. 늦가을 단풍에 좁은 길 걷는 나막신까지 붉게 물들고, 가늘고 긴 대나무 창가에 비치니 겉옷 푸르게 물드네. 요전 날 서로 석굴 찾아가자고 했던 약속, 심하게 취해 한없이 읊조리며 수고했다고 감히 말하네.
盡興看山不憚遙 芒鞋無底角巾高 樽前歌曲春難和 別後吟髭雪未消 解下莫辭徐穉榻 戀來要贈范睢袍 憶曾竹屋寒燈夢 幾處相尋夜夜勞 友村
산을 보니 흥겨워 멀리 가는 걸 꺼리지 않고, 각진 두건 높이 세우고 짚신 신고 끝없이 걸어가네. 술 동이 앞에 두고 봄 노래하니 화답하기 어렵고, 이별 후에 시 읊으니 코밑수염에 묻은 눈 녹지 않네. 서치徐穉의 의자 풀어놓을 테니 마다하지 말게나. 그리운 이 온다 하면 범수范睢의 솜옷 구하여 보내겠네. 차가운 등불 켜놓고 대나무 집에서 꿈꾸던 때 생각나네. 서로 찾는다고 얼마나 많은 곳에서 밤마다 애썼던가.
溪堂和律
石作亭臺松作門 幽居事事厭紛煩 客來紅葉供題律 歲久蒼藤補缺垣 大熱今年差可樂 浮休往劫不須論 貧家鷄黍猶荷意 肯歎詩遙欠一罇
돌로 정자 주춧돌 쌓고 소나무로 대문 만들고, 그윽하게 지내며 하는 일마다 어지럽고 번거로워 싫어하네. 손님이 찾아오니 붉은 잎사귀로 시 짓도록 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니 푸른 등나무 넝쿨이 허물어진 담 메우네. 너무나 더워도 올해는 나름 즐길 만하니, 떠돌다 쉬었다 가는 억겁의 세월 논할 필요가 없네. 가난한 집에서 닭 잡고 기장으로 밥 짓는다 하니 마땅히 그 뜻만 받아들이고, 시 지으며 거닐면 되는데 한 동이 술 없다고 한탄할쏜가.
爲愛林泉久鑰門 蒲輪戔帛不曾煩 秋來黃菊全三逕 雨後蒼苔只一垣 細引澗流猿共飮 閒評琴曲鶴叅論 寄言同志張司馬 須卜新隣爛把樽 友村
숲과 샘 사랑하여 오랫동안 문 걸어 잠그고, 포륜과 전백 때문에 괴로워한 적 없네. 가을이 오니 세 개의 좁은 길 모두 국화가 누렇게 피었고, 비 내리고 나니 한 개의 담장만 이끼가 끼어 푸르네. 계곡물로 이끌려 가니 원숭이 함께 술 마시고, 한가로이 거문고 곡조 평하니 학 참여해 논하네. 장 진사와 뜻이 같아 한마디 나누고, 새로운 이웃과 잠시 점을 치니 술 동이 붙잡고 속을 썩이네.
知足
知足常自足
永足常不足
莫恨財不足
惟患學不足
분수를 지키고 욕심내지 않으면 늘 만족할 것이나,
끝없이 욕심을 내면 늘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재물이 없다고 후회만 하면 재물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고,
학문을 익히기 전에 근심부터 생각하면 만족한 수준이 이르지 못할 것이다.
寓言足明人句 사람이 만족을 깨우치게 하는 우화
大漁食中魚
中魚食小魚
小魚無所食
所食惟沮洳
小者旣不保
大者獨殘欺
會看枯魚肆
大小俱歔欷
큰물고기가 가운데 물고기의 먹이를 뺏어먹고
가운데 물고기는 작은놈 물고기 먹이를 뺏어먹는다.
작은놈 물고기는 먹을 게 없으니까
물이 얕고 습한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게 된다.
결국 작은 놈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사라지고 나면
큰놈 홀로 남게 되면 다 죽게 된다.
물고기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 서로 되돌아보면
큰물고기나 작은 물고기나 함께 슬퍼할 것이다.
힘센 자가 자기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약한 자의 것을 뺏어가게 되면, 결국 약한 자는 먹을 게 없으니까 굶어죽게 된다. 힘이 약한 자가 죽게 되면 힘센 자 또한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사람은 욕심 부리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
유진찬(兪鎭贊)
1866년(고종 3)∼1947년. 일제 강점기 유학자‧관료. 자는 익경(翊卿)이고, 호는 창사(蒼史)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본적은 서울시 종로구(鍾路區) 종로6가이고, 서울시 북서(北署) 양덕방(陽德坊) 계산동(桂山洞)에 살았다.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장흥도호부사(行長興都護府使) 유치희(兪致喜)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형 유진익(兪鎭翊)과 유진필(兪鎭弼)이 있다.
1885년(고종 22) 식년시 진사 3등 124위에 합격하였으며, 1888년(고종 25) 정시문과 병과 12위로 급제하였다.
1894년(고종 31) 내무아문주사(內務衙門主事)‧내무아문참의(內務衙門參議)‧승선원우부승선(承宣院右副承宣)을 지냈고, 1895년(고종 32)에는 내각추서관 겸 임찬서관(內閣秋書官兼任參書官) 서주임(敍奏任)을 지냈고, 1896년(건양 1)에는 충청북도 제천군수(堤川郡守)에 발령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900년(광무 4)에는 비서원승(祕書院丞)을, 1902년(광무 6)에는 내부참서관(內部參書官)‧외부참서관(外部參書官)‧법부사리국장(法部司理局長)‧법률기초위원‧한성재판소검사를 지냈으며, 1903년(광무 7)에는 함경남도 안변군수(安邊郡守)를, 1904년(광무 8)에는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 서칙임 4등(敍勅任四等)을 지냈다. 1906년(광무 10)에는 전라남도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지냈고,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에 촉탁되었고, 1935년에는 심전개발 간담회와 조선총독부 주최 사회교화연합회에 참석하였다. 1938년에는 명륜학원 강사를 지냈고, 1939년에는 조선유도연합회에도 참여하였으며,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부터 1943년 해방직전까지 조선총독부의 직속기구인 경학원 부제학으로 재임하면서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조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때 유림 399명과 경학원 직원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찬양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의 한시를 모아 『성전성시집(聖戰誠詩集)』을 발행하였다. 이때 그는 『성전성시집』의 편찬 겸 발행인으로서 서문을 지었으며 신궁참배에 대한 시를 게재하였다.
유치희(兪致喜)[1820~?]는 1846년(헌종 12)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여 의빈부도사, 공조 좌랑, 한성부 주부 등을 거쳐 과천·황주·진주·광주 등의 목사를 지내고 공조 참의, 승정원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결백하여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향리인 제천시 금성면에 살면서 탐관오리와 지방 토호의 횡포를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1860(철종 11)∼1925.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우경(右卿), 호는 기헌(杞軒). 예조판서 장환(章煥)의 손자이고, 공조참판 치희(致喜)의 아들로 치량(致良)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머니는 이공민(李功敏)의 딸이다.
생애
1879년(고종 16) 진사로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얻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6년 수찬·규장각직각을 거쳤고, 다음해 홍문관부교리가 되어 신기선(申箕善)·지석영(池錫永)을 갑신정변관련자로서 추국(推鞠)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또한 4년 뒤에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지석영의 사면에 반대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민비정권하에서 교리·검교·대사성·승지 등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갑오경장이 시행되면서 다시 등용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