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육군 군사연구소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에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많은 한국전 관련 문서들이 보관 되어있다. 벌써 66년이나 지났는데도 찾을수록 새로운 자료들이 계속 나타난다. 수십만건의 서류더미에서 한 장의 문서가 시선을 끌었다. 이것은 한국전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이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보낸 전문이다.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공군은 내 아들 지미의 실종 후 최선을 다해 수색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더 이상의 수색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내 아들 지미가 한국전쟁에서 희생당한 16만명 이상의 사상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 위안을 찾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던 1951년 4월 한국에 온 밴 플리트 장군, 그의 외아들 지미 밴플리트도 한국전에 참전했다. (지미 밴플리트 중위).
그런데 그의 아들 지미가 임무를 수행하다가 실종된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장군의 아들 지미의 실종을 대대적으로 알렸고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밴플리트 장군 아들 한국에서 실종-밴플리트 장군이 수색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장군이 수색을 중단시킨 것이다.
콘래드 크레인 박사/US Army 해리티지 센터-결국 아들은 찾지 못했습니다. 아들 지미는 2년후인 1954년 사망선고 되었습니다. 콜린 맥클레이/밴플리트 장군의 고손자-수색중단을 지시했을 때 힘들었겠지만 여전히 자신은 유엔군 사령관이고 자신의 아들도 수색중단을 이해할 거라 믿었습니다. 아버지이기에 앞서 한국전쟁 지상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아픈 결단이었다. 브래들리 콜맨 교수/버지니아 군사학교-조국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헌신이 바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피 눈물 나는 역사다. 그런데 외면해도 되고 거부해도 되는 178만명의 미군들이 한국에서 피를 흘렸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미국 뉴욕 맨해튼).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6년, 미국인들에게 이 전쟁은 이미 잊혀진 전쟁이다. 미군이 입은 피해에 비해 뚜렷한 승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unknown war 즉 이름없는 전쟁이라고 불린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미국 뉴욕 맨해튼). 그런데 전쟁을 기억하고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모임이 있다. 조 맥크리스천/밴플리트 장군 외손자-밴플리트 장군의 리더쉽은 그가 우수복무훈장을 얼마나 받았는지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특히 밴플리트 후손들에겐 영원히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전쟁이다.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밴 플리트 가문에서 세번째로 장군의 반열에 오른 제임스 밴플리트는 1, 2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뒤엔 그리스 군사고문까지 지낸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국전쟁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1950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 소식은 곧 바로 타전됐다. 미국인들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한국인들과 거의 같은 시간 전쟁을 알게 됐다. (북한 선전포고 6만명의 공산군 200마일 전선 전체에서 공격개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지원요청). 그때 밴 플리트 장군은 아프리카 케냐의 사막에 있었다. 아들 지미와 함께 휴가를 즐기던 중 전쟁소식을 듣게 된다. 1973년에 작성된 한 보고서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콜린스 보고서/1973년). 이 보고서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밴 플리트 장군을 인터뷰한 뒤 작성된 문서다. – 내 기억에 6월 25일 아니면 26일이었습니다. 나는 ‘올게 왔다’ 나는 (한국에) 가서 한번 더 싸워야겠다’ 하고 다짐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아버지가 간다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었죠. 그리고 그는 결국 왔습니다. (지미 밴플리트 중위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그러나 밴 플리트 부자가 한국에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미국은 전쟁 발발 이틀 만에 곧 바로 참전을 결정했고 대규모 파병까지 꾸려졌다. 2차 대전 승전국으로서 작은 나라 한국의 전쟁에 대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구). 파병단은 징집된 군인과 지원자들로 구성됐다. 밥 핸더슨 참전용사-(한국에) 가고 싶었냐고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나는 (한국에) 도착 할 때까지 전쟁 중 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럼 아무것도 몰랐던 것인가요? 그렇죠. 스물한 살짜리가 뭘 알겠습니까.
잭 로빈슨 참전용사-제 생각에는 참전을 그냥 애국적인 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공산주의와 싸운다는. 에디 존슨 참전용사-당신은 징집병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지원했습니다. 한국전쟁이 개전됐을 때 내 친구들이 전부 육군, 공군, 해군에 지원했습니다. 자국이 아닌 외국의 전쟁인데도요? 젊었을 때는 생각이 몰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른 세대였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정말 달랐죠. 우리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1950년 7월초, 첫번째 파병단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브래들리 콜맨-(미국의) 여론은 남한을 방어하기 위한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을 압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루이스 번스틴 박사/워싱턴 군사연구소-그것은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으로 인식됐습니다.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전쟁초기 미군들은 여유가 있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몰랐다. (일병 로버트 입니다. 오하이오의 가장 작은 마을출신입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소콜 일병입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전합니다. 곧 집에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곧 집에 돌아갈 겁니다). 병사들 사이에서도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것이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곧 끝날 거라 믿었던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전쟁발발 1주일만에 부산까지 밀려 내려간 한국군은 미군의 참전으로 대반격을 시작한다. 서울을 탈환하려는 연합군과 내놓지않으려는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고 결국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서울수복/1950년 9월 28일). 연합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다. (38선 통과/1950년 10월1일).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이르렀고 11월엔 두만강 일대까지 도달했다. 승리가 목전에 있는 듯 했다. (마오쩌둥). 그런데 11월말 전혀 예상치 못했던 30만의 중공군과 맞닥드렸다.
(중공군 한국전쟁 개입). 그리고 미군 역사상 가장 처참한 전투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장진호 전투에서 패하며 후퇴가 시작됐다. 이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 아닌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이게 됐다. 루이스 번스틴-(1951년) 당시 미국에는 한국전쟁에 대한 여론이 달라졌다. 전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우리가 왜 싸우고 있는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싸울 것인가 아니면 전쟁 이전 분단의 상태로 돌아갈 것인가? (논란이 일었습니다).
바로 그때 1951년 3월, 밴플리트 장군에게 한국으로 가라는 임무가 부여됐다.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고 벌어진 일이었다.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콜린스 장군님, 나는 내 임무가 중책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군인으로 가며 미국 정부에서 최선을 다해 나를 지원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미 한국전 참전을 예견하고 있었던 밴 플리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더욱이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전쟁의 실질적 최고 사령관, 미8군 사령관이었다.
브래들리 콜맨 교수-미8군은 연합군의 핵심 부대였을 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위치한 유엔군 사령부의 본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8군은 1950년대 이후 유엔군 사령부 설립의 토대가 되었고 유엔군으로 파견되는 모든 병력은 미8군에 소속됐습니다.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취임/1951년 4월 14일).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에 왔을 때 전세는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총공세를 벌릴 것인가 아니면 휴전을 논의 할 것인가 (메트 리지웨이 장군/유엔군 총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서둘러 전선을 돌아봤다. 1951년 봄,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 사령관인 그에게 주어진 첫번째 임무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중공군 춘계 대공세/1951년 4월초). 무려 50만에 이르는 중공군이 총공세를 시작했다. 막강한 병력과 화력을 앞세우고 그들은 전쟁을 끝낼 작정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전선을 넓혔고 필요한 곳에 전력을 집중시켜 대대적인 폭격을 단행하는 전술로 중공군을 교란시켰다. 결국 중공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남정옥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중공군이 춘계공세를 했던 목적은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국군과 유엔군을 서울 이남으로 몰아 붙여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밴플리트 장군에 의해서 중공군의 공세가 저지되고 중공군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춘계공세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무사히 적의 공격을 막아낸 밴플리트 장군은 소위 39도선 북진계획을 세운다. 전선을 39도선으로 높여 적군을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미국정부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콘래드 크레인-전쟁의 마지막 2년은 아주 어려운 싸움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제한이 많아서 행동에도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사령관에게 어려운 싸움이었고 특히, 밴플리트 같이 공격적인 지휘관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을 참아야 했으니 더 어려웠습니다. 1951년 7월에 접어들자 휴전협상이 시작됐다. 이제 전쟁은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고지전의 형태로 바뀌었다. 하룻밤에도 승리와 패배가 업치락 뒷치락 하는 답답하고 힘든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1952년 3월, 한 정년이 장군을 찾아왔다. 장군의 외아들 지미였다. 아버지가 최고 사령관이자 장군인데 그의 아들이 일부러 자원해서 참전한 것이었다. 과연 지미에게 이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미 밴플리트 중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공군으로 간 지미는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참전 당시 계급은 중위. 맡은 임무는 B-26 폭격기 조종사였다. 당시 그는 해외 파병 대상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탄원서까지 써가며 한국에 오고 싶어했다.
아버지가 참전하고 있는 전쟁, 전세는 불투명하고 많은 사상자가 나고 있는 전쟁, 한국으로 오면서 지미의 각오는 남달랐다.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떤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다짐과 각오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어머니의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제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지미가-
지미는 밴플리트가 결혼 10년만에 얻은 외아들이다. 더우기 그는 이미 결혼해서 한 살된 아들도 있었다. 이런 귀한 아들의 참전을 밴플리트 장군은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콜린 맥클레이-나는 밴플리트 장군을 직접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역사를 명확하게 돌이켜 보는 시점에서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장군의 아들 (지미 밴플리트)은 진정한 군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본인의 행동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인 밴플리트 장군은 그것을 존중했죠. 아들을 사랑했지만 장군으로서 아들이 군인이 된다는 것, 미군 장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지미 밴플리트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 그를 기억하는 친구를 만나보기로 했다. 올해 90세인 카터 클락 주니어씨, 그 또한 한국전쟁에 참전한 장군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카터 크락 장군은 일본 사령부에서 맥아더 장군을 보필했다.
(카터 클락 Jr/지미 밴플리트와 웨스트포인트 동기). 그는 지미와 미군사관학교 동기생이었다. 잘 생겼죠. 멋진 남자였어요. 카터 클락 주니어씨와의 기억 속에 지미는 공부는 물론 운동도 잘하고 배짱이나 기발함까지 갖춘 친구로 남아있다. 더욱이 지미는 엘리트 군인가문 출신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된 것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카터 클락 Jr-지미 밴플리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교관들도 그를 좋아했지요. 그는 머리가 좋아서 공부는 시험을 통과할 만큼만 하고 남는 시간에는 자기 관심사에 집중했습니다. 대부분은 항공기였습니다.
그는 항공기 모형을 만들었고 항공기와 공군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공군이 아니라 육군이었지만 지미는 공군으로 가고 싶어했습니다. 지미 밴플리트 중위의 임무는 B-26 폭격기를 몰고 적진으로 날아가 폭격하는 것이었다. 처음 세번은 다른 조종사와 함께 출격했다. 신참이 단독 비행을 하기에는 위험요소가 많았다. 지미가 임무를 수행하던 1952년 3월 미공군의 폭격은 평안남도 순천 지역에 집중됐다. 중공군의 병력과 물자가 모여 있는 곳, 공군이 이 지역에 타격을 입힌다면 전세는 크게 유리해 질 것이었다.
남정옥-순천지역은 평안남도, 다시 말해 평양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당시 공산군의 병력과 물자가 만주에서 들어오는데 주로 신의주와 만포진, 중강진을 통해서 들어오는 물자가 거치는 곳이 바로 순천입니다. 그래서 순천지역에 미군이 폭격을 하지 않는다면 중공군의 전략이 증강되기 때문입니다. 순천이 워낙 중요했기에 이곳을 지키려는 중공군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대공포로 미군폭격기를 요격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중공군은 하늘에서의 공격도 강화했다. 소련제 미그 21기를 앞세운 중공군의 공격에 미공군 폭격기는 속수무책이었다. 순천지역을 폭격하거나 순찰하는 일을 맡았다면 그건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았다. 밴플리트 장군은 아들이 맡은 임무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1952년 3월 19일, 장군의 60세 생일잔치에 아들이 찾아왔다. (밴 플리트 장군 60세 생일/1952년 3월 19일). 이것이 이들 부자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4월 4일 오전 1시 5분, 지미 밴플리트 중위는 출격했다. 이때가 한국전에서 네번째 출격, 처음으로 단독 폭격임무를 맡은 날이었다. (지미 밴플리트 중위 단독비행/1952년 4월 4일). 지미 중위와 두 명의 승무원이 탄 B-26 폭격기는 군산 비행장을 출발해 북으로 날아갔다. 안개가 짙게 내려 앉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적의 요충지 순천 일대, 오전 3시경 지미 중위와 교신이 이루어졌다. 안개가 심해 임무수행이 여의치 않다는 것, 그리고 3시 30분경 고도를 높여 이동해 다시 새로운 표적을 찾아보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 뒤 교신은 중단됐고 지미 중위의 폭격기는 레이다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중위는 귀대예정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실종된 것이다.
콘래드 크레인-다음 날 미군본부에서는 상당한 우려가 있었고 사람들은 누가 8군 사령관인 밴플리트 장군에게 본인의 아들이 실종되었다고 말해 줄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군은 실종 사실을 조금 더 지연하고 싶어 했는데 유엔군 사령관이던 리지웨이 장군이 그것을 거부하고 밴플리트 장군에게 최대한 신속하게 알려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날 오전 10시 30분 보고를 받았습니다. 지미가 탄 B-26 폭격기의 실종상황이 기록된 보고서였다. (PNTAL 26 실종상황 리포트). 펜탈 26은 지미 중위가 몰고간 폭격기 애칭이다.
(05시 30분 군산기지와 PNTAL 26 최초 교신실패). 기상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임무를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적진으로 날아간 지미 밴플리트 중위. (05시 45분 군산기지에서 모든 채널을 동원해 PNTAL 26과 다시 교신시도 했으나 실패). 06시 10분 PNTAL 28보고, 02시 48분에 PNTAL 26과 교신했다. 지미는 6000 피트에서 안개가 많아 고도를 8500 피트 이상으로 상승하겠다고 했다. 06시 50분 PNTAL 29보고 04시 16분에 PNTAL 26에서 교신이 왔지만 응답실패.
06시 55분 구조팀이 06시 50분에 순천지역을 수색했지만 부정적인 결과. 그가 살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다음 보고를 기다렸다. 아무리 상황이 좋진 않아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장군에게 전달된 두번째 보고서, 24시간 동안 수색한 결과 사고예상 지역주변 논에서 화재의 흔적이 보이고 연기가 나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지역을 찍은 사진에서는 기체를 발견 못했다. 다시 수색을 벌였지만 지미 중위와 기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브래들리 콜맨-실종 장병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는 한 야전에서 수색작전은 지속됩니다. 아군 지역 밖인 북한지역에서는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2군단 창설식/1952년 4월 5일. (강원도 화천).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났다. 실종 다음날인 1952년 4월 5일은 한국군 2군단 창설식이 열린 날이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 행사에 참석했다. 이 날은 한국군이 두개의 군단을 보유하게 되는 감격스런 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과 미국의 고위 지휘관들은 밴플리트 장군의 노고를 치하했다. 한국군 2군단 창설을 위해 가장 노력한 이가 바로 밴 플리트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밴플리트 장군은 아들의 실종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당시 이곳에 모인 지휘관들은 전날 벌어진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 실종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것은 모든 행사가 끝난 뒤였다. “밴 플리트 장군은 한미 지휘관들에게 아들의 실종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뒤돌아 서서 눈물을 흘렸다”—백선엽 장군 회고록 속에서—
조 맥크리스천-비극이지만 삶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고통을 공유하지만 또 계속 살아갑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 중 하나는 4월 5일에 밴 플리트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나는 내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그 고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시 군사령관이고 동맹국의 대통령과 함께 있습니다. 아들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일에 집중하고 있지만 얼굴에서 그 걱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슬픈 사진입니다. 장군은 끝내 의연했다. 그의 슬픔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 뒤에 감추어져 있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분신과도 같다. 대를 잇고 정신을 잇고 마음을 나눌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를 장군은 잃은 것이다.
그런데 사태는 심상치 않게 전개됐다. (밴 플리트 장군 아들-한국에서 실종). 미국 언론은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온갖 억측과 루머가 난무했다. 적군에 포로로 잡혀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한국전 임무 수행중 실종).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루머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조 맥크리스천-우리는 (당시) 소련 내무성 중위가 외국포로를 한 캠프에서 다른 캠프로 호송하면서 포로 중 한 명이 지미와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는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포로가 자신이 미국 4성 장군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 이 소련 내무성 중위 보고서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후) 러시아는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기에 우리도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카터 클락 Jr-나는 늘 그가 낙하산을 타고 탈출했거나 기계고장이 있어서 항공기에서 탈출했다면 포로로라도 살아있거나---그런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를 찾을 것이라는 ---공군에서도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미가 사라진 곳은 적진 한 가운데, 결코 수색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지역이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때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 아버지로서 아들의 최후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전쟁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먼저 생각했다. 그가 나서서 수색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 공군은 내 아들 지미의 실종 후 최선을 다해 수색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더 이상의 수색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내 아들 지미가 한국전쟁에서 희생당한 10먄명 이상의 사상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조 맥크리스천-그는 ‘안된다’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아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낼 수는 없다.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그 어떤 조종사였어도 정해진 수색시간이 지난 후 수색을 종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콘래드 크레인-밴 플리트는 사령관이라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 자신의 아들만 한국에서 실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특별 대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장군답게 받아들였습니다.
1952년 4월 15일 지미가 실종되고 열흘이 지난 뒤 이승만 대통령과 밴 플리트 장군이 경복궁을 걷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 대통령은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장군을 위로하고 조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콘래드 크레인-이것은 오히려 계속 잘해 나가겠다는 밴 플리트 장군의 결심을 더욱 강하게 하였고 그는 절대로 속도를 늦추거나 사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다른 수천명의 미군 가족들처럼 그 희생을 받아 들였습니다. 한국전쟁에는 총 178만명의 미군이 참전했다. 곧 끝날 전쟁, 승리를 장담했던 전쟁이었지만 3년간 계속되면서 미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14만명이 넘는 미국의 젊은이가 한국전쟁에서 죽거나 실종됐고 부상을 입었다.
잭 로빈슨 참전용사-그들은 엄청난 양의 사격을 했습니다. 내 친구중 하나는 목에 총상을 맞았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열 다섯명이 그날 밤 죽었습니다. 우리 중대에서 나를 포함해 백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고, 저도 목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출혈이 꽤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에디 존슨 참전용사-나의 전우는 전투 1일차인 바로 첫날에 전사했습니다. 또 기억나는 것이 부상을 당해 헬기를 타고 병원선으로 가는데 시체가 땅에 있는 것을 봤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협정문에 유엔군 대표로서 서명했던 클라크 장군은 전쟁이 끝난 뒤 의미있는 조사를 벌린다. 과연 장군의 아들도 한국전에 참전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 회고록-[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 클라크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전쟁에서 142,000명의 미군이 사망, 실종, 부상을 당했다. 한국전쟁에는 142명의 장군의 아들이 참전해서 35명이 사망, 실종, 부상을 당했다. 놀랍게도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의 아들, 윌리암 클라크 소령도 참전했다. 그의 아들은 전쟁 중에 입은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했다.
미해병 제1항공 사단장 필드 해리스 중장의 아들(윌리엄 해리스 중령)도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그는 장진호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알링턴 국립묘지 (미국 워싱턴 DC). 어떤 장군은 아들을 잃었지만 어느 장군의 아들은 아버지를 잃기도 했다. 월튼 워커 장군, 한국전쟁 당시 첫번째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전쟁 중에 사망했다. 워커 장군은 미국 사관학교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군인으로 1차 대전 당시 패튼 장군을 도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야전 지휘관으로 크게 활약한 전쟁영웅이다.
그 워커 장군의 아들 또한 한국전에 참전했다. 샘 워커 대위, 이들 부자의 참전은 당시 미국 언론에 보도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월튼 워커 장군과 아들 샘 워커 대위가 한국전에 동반 참전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 워커 장군 부자는 미육군 역사상 유일하게 나란히 4성 장군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워커 장군의 며느리, 즉 아들 샘 워커의 부인(샬롯 워커)과 그의 아들 월튼 워커 주니어(샘 워커의 아들)를 만났다. 그대로 따서 손자의 이름으로 지었다. 샘 워커 장군은 지난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샘 워커 대위, 젊은 시절 늘 아버지 같은 군인이 되고 싶었던 샘 워커는 한국전이 발발하자 망설임없이 스스로 자원했다. 그때 그는 어린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샬롯 워커-솔직히 저는 별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샘 워커가 한국에 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 적은 없나요?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가 원하던 것임을 압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참전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했는데 이번 한국전쟁에는 꼭 참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미8군 사령관으로, 대위였던 아들은 미24사단에 배속돼 함께 한국땅을 밟았다. 그때는 1950년 8월, 한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던 그 때였다. 워커 장군은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전략을 세운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말을 남긴다. ‘버텨라, 그렇게 못하겠으면 죽어라’ 낙동강 전투/1950년 8월~9월. 낙동강 전투는 치열했다. 아직 채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한국군과 미군은 오로지 이겨야 한다는 각오 하나로 싸웠다. 워커 장군의 말대로 버티지 못하면 끝이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승리를 경험한다.
남정옥-낙동강 방어전의 큰 의미 중 하나는 당시 대한민국이 최대의 위기에 몰려 있었는데 낙동강 방어선에서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고 또 연장선상에서 대한민국을 도우러 왔던 유엔군과 유엔의 위신을 살렸던 것이 바로 월튼 워커 장군이 추진했던 낙동강 방어전투가 되겠습니다. 낙동강 전투에서 패배한 북한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워커 장군은 곧 바로 서울까지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미24사단에 아들 샘 워커 대위(중대장)가 있었다.
낙동강에서 올라온 워커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 대전의 미24사단, 그리고 인천에서 들어오는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 서울수복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때 공로를 인정받아 워커 장군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 훈장은 이제 워커 가문의 가보가 되어 있다. 워커 장군의 며느리는 오랫동안 간직해 두었던 훈장을 꺼내 왔는데 놀랍게도 두개였다. 하나는 아버지 워커 장군, 다른 하나는 아들이 받은 훈장이었다.
한국전 참전 당시 어린 아기였던 샘 워커의 아들은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한다. 월튼 워커 Jr-아버지는 저를 봐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규율을 엄격하게 지켰고 가족들에게도 그랬습니다. 저를 강인하게 키우셨습니다. 늘 하시던 말씀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강인한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말이었습니다. 중단하는 사람은 승리하지 못하고 승리하는 사람은 중단하지 않는다. 저는 이 말을 모토로 삼고 자랐습니다.
그렇다면 며느리는 시아버지인 월튼 워커 장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녀는 한국에서 보낸 워커 장군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워커 장군은 손자의 이야기를 감격해 하는 평범하고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4월 4일에 네가 보낸 그 훌륭한 아이의 사진과 연필 스케치가 며칠 전에 도착했다. 편지 정말 고맙고 그림도 소중히 보관하겠다. 나를 닮았다고 이야기 해주는 네 마음이 너무 고맙고 아주 자랑스럽다. 곧 모두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랑하는 시아버지가-
샬롯 워커-나는 남편에게는 별로 편지를 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야전에서 싸우는 전투병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아버지와 주로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시아버지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내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또 남편의 소식까지 담아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1950년 12월은 미군에게는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 뒤 병사들의 사기는 뚝 떨어져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 23일 그날 오후 갑자기 비보가 전해졌다.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장군은 현장에서 바로 사망했다. 지금의 서울 광진구 워커힐 그 자리였다. 이 예상치 못한 사고 소식은 곧 바로 타전됐다. 한국은 물론 미국도 큰 충격에 빠졌다.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 교통사고로 비극적 사망).
콘래드 크레인-사령관의 사망은 늘 큰 사건입니다. 모두에게 충격이었고 언론에도 많이 실렸습니다. 특히 전쟁 상황이 매우 안좋은 시기여서 미8군이 혼란에 빠졌는데 악운이 겹친 것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장군의 사망사고를 기록한 영상을 보면 군 관계자들이 급히 달려와 사고경위를 조사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최고 사령관, 장군의 죽음 앞에 미군들도 크게 슬퍼했고 장군의 유해는 곧 바로 본국으로 송환하기로 전격 결정됐다. 당시에는 전래가 없는 일이었다.
장군의 유해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는 임무는 한국에 있었던 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주어졌다. 워커 장군의 유해는 본국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 잠시 일본 하네다 공항에 들르게 됐다. 미군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장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이때 모습을 나타낸 샘 워커 대위, 그런데 본국으로 돌아가는 건 그의 뜻이 아니었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즉시 본국으로 돌아가라. 샘 워커 대위: 장군님,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아직 전쟁 중이고 저의 부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저 혼자만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맥아더는 이건 명령이다. 아버지 장례식에 아들이 있어야 한다. 워커 장군의 장례식은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성대하게 진행됐다.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미국에 승리를 안겨주었던 장군의 죽음 앞에 미국인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장례식 후 샘 워커 대위는 또 다시 한국으로의 귀환을 요청했다.
샘 워커 대위: 장례식이 끝났으니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샬롯 워커: 맥아더 장군이 남편인 샘 워커에게 다시 한국의 전쟁터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차라리 자신의 부관으로 일하겠냐고 제안 했지만 남편은 거절했습니다. 마셜 장군이 장례식에 왔었는데 그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샘, 당신은 돌아갈 수 없소” 왜냐하면 샘이 독자였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생존자였기 때문입니다.
샘 워커 대위가 그토록 간절히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샘 워커: 다시 한번 요청드립니다. 한국전에서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샬로 워커: 그는 참전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마무리 하려 했습니다. 제대로 복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는 24사단 병사들과 함께 있고 싶어했습니다. (전쟁은 계속되는데) 뭔가 임무를 포기한 느낌을 가졌던 거죠. 그래서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병사들과 함께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를 원했습니다. 샘 워커 대위에게 아버지는 인생의 모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군인의 임무를 먼저 생각한 그는 결국 4성 장군이 되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며 52세의 나이에 육군대장으로 진급, 위대한 정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다.
열열히 한국을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의 임무를 다 했던 아들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죠지 패튼 장군의 아들 (죠지 패튼 4세 중위)도 한국으로 달려와 복무했고, 당시 미 CIA국장이었던 덜레스의 아들(앨런 덜레스 Jr. 중위)도 한국전에 참전했다.
1952년 가을, 미 제34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아이젠하워 장군, 그는 당시 한국전을 최대한 빨리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결국 당선됐다. 1952년 12월 3일, 수십대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기 한 대가 비밀리에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바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전쟁이 한창인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는 당선자 신분임에도 한국전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달려왔다.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직접 전선으로 달려가 병사들을 위로 했는데 이때 꼭 만나고 싶어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들 죤 아이젠하워 소령이었다.
당시 아들은 중부전선 최전선에서 창설한 부대의 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역시 자원해 참전한 케이스, 하지만 그는 특별히 한국땅을 밟기까지 아버지를 비롯해 숱한 사람들의 만류를 이겨내야 했다. 콘래드 크레인-(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신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아들의 참전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적군이 아들을 포로로 잡으면 전쟁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이젠하워와 아들 죤은 참전에 대해 긴 대화를 했습니다.
죤 아이젠하워 소령: 한국전에 참전하고 싶습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나는 미국의 대통령 후보다. 만약 전쟁 중에 네가 포로라도 된다면 전쟁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한국전 참전을 허락할 수 없다. 아들: 만약 적군에 포로로 잡히면 제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절대 아버지와 미국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콘래드 크레인-죤은 결국 한국으로 갔고 사단 정보장교로 3사단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는 최전선에 서서 적군의 포격을 받기도 하고 상당한 위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아이젠하워는 밴 플리트 장군에게 뜻밖의 요청을 한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 아들을 후방으로 빼 주십시오. 밴 플리트: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통령: 아들이 전쟁에서 전사하는 것은 가문의 명예로 생각하겠으나 만약 적군의 포로가 된다면 전쟁에 악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밴 플리트: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려하는 상황에 대처하겠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아버지로서 아들의 안전을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선자로서 정치적 군사적 판단이었다. 이렇게 장군의 아들들은 한국전쟁으로 달려와 성실히 군인의 임무를 수행했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미제34대 대통령), 필드 해리스 중장 (미해병 제1항공 사단장), 앨런 덜레스 (한국전쟁 당시 미CIA 국장), 월튼 워커 장군 (한국전 초기 미8군 사령관), 죠지 패튼 장군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 (휴전 당시 유엔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 (미8군 사령관), 당시 142명에 달하는 미군 장군이 이런 아들의 선택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했다. 그들에게는 목숨보다 군인의 명예가 더 중요했고 지도자로서 사회적 책임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콘래드 크레인-참전은 매우 다른 악마의 희생입니다. 한국도 군복무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도자들의 자녀가 군복무를 하지 않는다면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녀를 군대에 보내지 않는다면 일반 국민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일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 지난 5월, 미국 뉴욕에서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20년이 넘게 계속돼 온 행사다. (밴 플리트 어워드 시상식). 1992년 밴플리트 장군이 사망한 뒤 장군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만들어진 상이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증진과 협력을 위해 활동한 이들에게 상이 주어진다.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여러 형태로 한국과 인연을 맺고 교류해온 밴 플리트 장군의 마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처참했던 전쟁의 기억은 뜨거운 동지애를 갖게 했죠. 살아 남은 자들이 할 일은 먼저 쓰러져간 전우를 잊지않고 그 뜻을 이어받는 일이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 밴플리트 장군도 그랬다. (밴 플리트 장군 환송식/1953년 1월).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을 떠난 것은 1953년 1월, 22개월 동안 한국전쟁을 지휘했던 그는 숱한 목숨이 받쳐 졌음에도 남북분단 상태로 전쟁이 끝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한국인의 마음을 닮아 있었다. 그해 3월 미국에서는 밴 플리트 장군의 전역식이 거행됐다. 평생을 군인으로 전장을 누벼온 장군은 60대 중반의 나이에 민간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후 장군의 행보는 한국과 깊게 연결된다. 한국을 지원하고 한미재단을 만들고 한국군 증설과 체계를 만드는데 앞장섰다.
콜린 맥클로이-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에 깊은 애정이 있었고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했습니다. 한국을 위해 그가 할 일들을 보며 이 사람이 자신의 임무 때문만이 아닌 한국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국인들이 생각해 줬으면 합니다. 그는 한국에 좋은 유산을 남기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지미가 이런 노력을 하게 만든 힘이었습니다.
아들 지미의 친구 카터 클락 주니어는 1988년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밴 플리트 장군을 기억하고 있다. 카터 클락 Jr-밴 플리트 장군은 내게 웨스트포인트 출신이냐고 물었고 나는 졸업생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아들이 웨스트포인트 다녔으며 나에게 몇 년도에 졸업했는지 물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밴 플리트 장군이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나는 그의 아들 지미와 좋은 친구였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의 얼굴에서 아직도---슬퍼하고 있다는 걸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지미의 시신과 그의 항공기 조차 찾지 못했으니까요.
(미국 플로리다주/1989년). 1989년에 플로리다의 밴 플리트 장군의 집, 장군은 한 언론에 그 모습을 공개했다. 이때 그의 나이 97세, 한국언론에 공개된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당시 나이 97세). 그는 3년 뒤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장군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아들 지미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 (생전 인터뷰)-내 아들은 전사했습니다. 인천(서해안) 앞바다에서 격추되었습니다. 시신은 찾지 못했습니다. 만약 찾는다면 나는 시신을 한국에 남겨두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그가 자유를 위해 생명을 바친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사망/1992년 9월 23일).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밴플리트 장군의 묘비에는 시신을 찾지 못한 아들, 밴 플리트 중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미 밴 플리트, 1952년 4월 한국에서 실종). 그의 이름은 이제 아름다운 헌신으로 기억될 것이다. 장군과 아들,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6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노블리스 오블지주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보여준 참된 용기, 그들의 헌신과 봉사에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이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