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 유공의 신도비〔統制使柳公神道碑〕
공의 휘는 림(琳)이고, 자는 여온(汝溫)이다. 유씨는 본디 유주(儒州)의 대성(大姓)으로, 차달(車達)이 그 시조이다. 그 뒤에 언침(彦琛)이란 분이 있어 공을 세움으로 인해 진주(晉州)에 봉해졌으므로, 드디어 진주 유씨(晉州柳氏)가 되었다. 고조의 휘는 자문(子文)으로 사예(司藝)를 지냈다. 증조의 휘는 한평(漢平)으로 진사였으며,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진동(辰仝)으로 공조 판서를 지냈는데, 장상(將相)의 재주가 있었다. 아버지의 휘는 회(淮)로, 청하 현감(淸河縣監)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음성 박씨(陰城朴氏)는 사평(司評) 박염(朴恬)의 딸이며,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이는 모두 공이 귀하게 되어서 추증된 것이다.
공은 만력(萬曆) 신사년(1581, 선조14)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임진왜란 때 형과 형수가 모두 왜적들에게 죽음을 당하자, 공은 직접 시신을 져다가 선영의 곁에 매장하였다. 당시에 공의 나이가 겨우 12살이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칭찬하면서 탄복하였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서 당형(堂兄)인 유형(柳珩)의 집에 가서 의지해 지냈다.
계묘년(1603, 선조36)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유형이 회령(會寧)에 있을 때와 북병사(北兵使)가 되었을 때 반드시 공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는 대개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훈련도감 초관(訓鍊都監哨官)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이 제조(提調)로 있었는데, 공과 이야기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겼다.
신해년(1611)에 이성 현감(利城縣監)에 제수되었다. 그때 마침 수령들이 모두 모여서 군사 훈련을 하고, 이어 타위(打圍)를 행하였는데,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이성현의 군졸들이 잡은 꿩을 빼앗아 갔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타위는 바로 군법(軍法)을 적용받습니다. 어찌하여 빼앗아 가고 돌려주지 않습니까. 오늘의 이 다툼은 꿩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려주지 않을 것 같으면 의당 궁마(弓馬)를 가지고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하니, 영흥 부사가 곧바로 돌려주었다. 당시에 장만(張晩)이 함경 감사로 있으면서 그 소리를 듣고는 공을 불러 술을 따라 주면서 마시게 하고 말하기를 “이성 현감의 기백이 참으로 좋다.” 하였다. 치적을 고과함에 있어서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아 발탁되어 이산 군수(理山郡守)에 제수되었다. 어사(御史)의 포계(褒啓)로 인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었다.
무오년(1618, 광해군10)에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제수되었는데, 군정(軍政)이 잘 다스려졌다. 이에 특별히 승진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기미년(1619)에 황해 병사(黃海兵使)에 제수되었다. 이보다 앞서 유형(柳珩)이 황주성(黃州城)을 수축하다가 공역을 마치지 못하고 졸하여 이경심(李景深)이 대신하였는데, 장만이 말하기를 “유림(柳琳)이 아니면 해낼 수가 없다.” 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임술년(1622)에 체차되어 북병사(北兵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장흥 부사(長興府使)에 제수되었다. 반정(反正) 이후에 혼조(昏朝) 때 제수된 자들을 모두 파직하였는데, 공만은 홀로 잉임(仍任)되었다. 갑자년(1624)에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공로로 인해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이해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개축하는 역사가 있어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이 역시 조정에서 선발하여 옮긴 것이다.
병인년(1626)에 서산 군수(瑞山郡守)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충청 병사(忠淸兵使)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에 북쪽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로 행행하였는데, 공은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한강의 남쪽에 진을 쳤다. 이때 한 군졸이 선릉(宣陵)의 나무 한 그루를 베자, 공은 즉시 그 군졸을 참수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공을 좋아하지 않던 자에게 모함을 받아 의금부에 나아가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상께서 공의 원통함을 환하게 알아차리고는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무진년(1628, 인조6)에 또다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곧바로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에 제수되었다. 또다시 군정(軍政)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감사가 표창하라고 아룀으로 인해 특별히 가의대부(嘉義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경오년(1630)에 중국 장수 유흥치(劉興治)가 그의 주장(主將)을 살해한 다음 가도(椵島)에 들어와 웅거하고 있어 동쪽으로 침입해 올 걱정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공을 양서 도방어사(兩西都防禦使)로 삼아 이를 방비하였다. 그때 마침 유흥치가 그의 부하에게 살해되었으므로, 공 역시 파직되어 돌아왔다. 당시에 용마(龍馬) 두 오랑캐 장수가 와서 안주(安州)에 주둔하면서 몹시 심하게 공갈하였는데,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있던 유비(柳斐)가 침해와 곤욕을 많이 받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곧바로 유비를 체차하고 공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자 오랑캐 장수들이 더욱더 교만 방자하게 굴면서 칼을 빼 들고 공을 겨누며 좌중에서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도 공이 조금도 안색을 변하지 않자, 오랑캐 장수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공을 놀리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감히 다시는 공을 범하지 못하였다.
신미년(1631)에 가솔(家率)을 많이 거느리고 갔다는 이유로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임신년(1632)에 석방되어 돌아왔다. 계유년(1633)에 영변 부사(寧邊府使)에 제수되었다. 영변에는 예전에 성이 없었는데, 공은 지세의 험함을 인하여 성을 쌓고는 군수 물자를 마련하여 저장해 놓았다. 이에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 때 여기에 힘입어서 살아난 백성들이 많았다.
갑술년(1634)에 평안 병사에 제수되었다.
을해년(1635)에 내직으로 들어와 부총관 겸 포도대장(副摠管兼捕盜大將)이 되었다.
병자년(1636)에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제수되었다가 어떤 일로 인하여 체차되었다. 당시에 북쪽 오랑캐들이 반드시 쳐들어올 조짐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당초에 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았는데, 어떤 자가 ‘부원수의 자리는 사무를 전체적으로 관장하는 병사(兵使)만 못하다.’라고 함에 따라 병사(兵使)로 고쳐 제수되어 순변사(巡邊使)를 겸임하였다. 공은 이에 드디어 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병기(兵器)를 날카롭게 하였으며, 정장(丁壯)들을 모아 별대(別隊)를 만들어 날마다 훈련을 시켰고, 군량미를 많이 쌓아 놓아 싸우고 지킬 계책을 마련하였다. 그러자 사졸들이 모두 그 일에 종사하기를 좋아하였다.
겨울에 오랑캐들이 과연 침입해 들어왔는데, 어떤 자가 공에게 먼저 가속(家屬)들을 피난시키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차마 나의 가속들로 하여금 홀로 면하게 하고 이 성의 군사와 백성들의 부모를 팽개칠 수 있겠는가. 의당 그들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할 것이다.” 하고는, 태연한 기색으로 동요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랑캐의 장수가 성 밖에 도착하자 공은 사람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킨 의도를 물었으며, 또한 맹약(盟約)을 어긴 것을 따졌다. 며칠 뒤에 오랑캐의 한(汗)이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뒤따라 이르러서 청천강(淸川江)의 가에다가 진을 쳤다. 그러고는 멀리 성 위를 바라보고는 방비책이 세워져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감히 침범하지 못한 채 몰래 지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습격을 받을 것이 두려워 풀을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피우고는 연기 속을 따라서 지나갔다. 공은 조정과 소식이 통하지 않는 것을 답답해하면서 날마다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으며, 장사들 가운데 걸음이 빠른 자를 구해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보내어 마침내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게 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에 영변 부사(寧邊府使) 이준(李浚)이 본성(本城)에 머물러 지킴에 따라 휘하의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장차 근왕(勤王)하러 들어가기 위하여 감사 홍명구(洪命耈)와 더불어 전후하여 함께 진격하였는데, 공이 선봉(先鋒)이 되었다. 공은 김화(金化) 지역에 도착하여 적들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들과 가축을 탈취하니, 사람들이 기뻐 날뛰었다.
어느 날 밤에 공은 적병들이 크게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정탐하여 알아차리고는 감사와 더불어 각각 산에 기대어서 진을 쳤는데, 공은 잣나무 숲 사이에 숨어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뜨자 적들이 산 위로부터 압박해 들어왔으며, 또 군사를 내어 양쪽 진 사이를 끊었다. 그러고는 계속하여 많은 군사를 보내어 감사의 군대를 시험해 보았다. 순안 현령(順安縣令) 허로(許輅)의 군사가 먼저 패하자, 오랑캐들이 승세를 타고 양쪽에서 공격하여 좌우로 충돌해 와 아군이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감사가 전사하였다. 오랑캐들이 잠깐 사이에 공의 진영까지 압박해 들어왔는데, 전영(前營)의 군사들이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저절로 무너졌으며, 공의 진 역시 거의 보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군중에 있던 어떤 자가 공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공을 큰소리로 불렀는데, 공은 높은 언덕에 말을 세우고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지금 나는 이곳에 있다. 그러니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였다. 군사들이 모두 평소에 공을 믿어 의지하였으므로, 공의 말을 듣게 되자 모두가 용기를 내어 굳게 지켰다.
공은 장사(將士)들에게 이르기를 “저들의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어 맞상대하기가 어려우니,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마라.” 하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포와 활을 쏘는 데 익숙한 자들로 하여금 일제히 화살과 탄환을 발사하게 하였다. 적장 가운데 한 사람이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포성이 들리는 곳은 모두 무너져 쓰러졌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적병들이 크게 패하였는데, 죽어 넘어진 시체가 즐비하였다. 밤이 되자 오랑캐들이 더욱더 많은 군사를 투입시키면서 다음 날 다시 싸우고자 도모하였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외로운 군사로 멀리까지 왔다. 지금 비록 요행히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화살과 탄환이 이미 다 떨어졌다. 그러니 우선은 계책을 써서 피하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고는 잣나무 숲 사이에 의병(疑兵)을 숨겨 두고는 그들로 하여금 서로 이어서 포성을 울려 오랑캐들이 추격해 오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밤을 틈타 군사들을 움직였는데, 오랑캐들이 과연 감히 뒤쫓아 오지 못하였다.
청나라에서 가도(椵島)를 칠 때에 오랑캐들이 반드시 공을 얻어 장수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는 대개 평소에 공의 위엄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공은 그 전역을 실로 수치스럽게 여겨 오랑캐 장수를 꾀어 말하기를 “전투에서 승리하는 날 너희가 취할 부녀자와 재물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오랑캐들이 가도를 얻으려고 하였던 것은 그 뜻이 바로 그것들을 취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공의 말을 듣자 곧바로 다른 장수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으므로 공은 가지 않았다.
오랑캐들이 도로 돌아갈 적에 오랑캐들에게 사로잡힌 우리나라 사람들을 공이 기이한 계책을 써서 많이 숨겨 주어 남아 있게 하였다. 그리고 또 은폐(銀幣)를 내어 500명을 속환(贖還)하였다. 오랑캐들이 가도에서 승리를 거둔 뒤에 우리 장사들에게 전폐(錢幣)를 나누어 주었는데, 공은 말하기를 “이것을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되돌려 주었다. 그러고는 그 값을 따져서 아주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속환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이해에 오랑캐들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어쩔 수 없이 공을 백마성(白馬城)으로 유배 보냈다.
무인년(1638, 인조16)에 석방되어 돌아와 평안 병사(平安兵使)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오랑캐들이 우리나라에서 징병하면서 공을 장수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심양(瀋陽)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공은 조정의 이 거조가 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 고의적으로 행군을 늦추어 기일 안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과연 저들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군사들을 데리고 되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조정에 묻지 않고 군사들을 파하였다는 이유로 공을 잡아다가 심문하고서 파직하였다.
기묘년(1639)에 통제사(統制使)에 제수되었다. 경진년(1640)에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 두 오랑캐가 만상(灣上 의주(義州))에 와 조정의 재상(宰相)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공의 이름 역시 그 가운데 들어 있었다. 당시에 공은 통영(統營)에 있다가 명을 듣고는 밤낮없이 달려 용만(龍灣)까지 갔다. 오랑캐의 장수가 무슨 일을 관할하며 어느 지역에 있는가를 묻자, 공은 남쪽 변경 지역에 있으면서 수군(水軍)을 다스려 왜적들을 방비한다고 답하자, 오랑캐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기색이 있었는데, 이는 대개 공을 몹시 꺼려서 반드시 공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자 해서였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중추부(中樞府)에 제수되었다. 오랑캐들이 또 군사를 징발하면서 공을 장수로 삼기를 청하였다. 공은 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상의 명이 있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저들 지역에 도착하여서는 곧바로 병을 칭탁하면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는 부장(副將)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할하게 하고 공은 그저 오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끝내 평소에 품고 있었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가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상께서 인견하고는 위로하고 유시한 다음 초모(貂帽)를 하사하였으며, 곧바로 총융사(摠戎使)에 제수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켰다.
임오년(1642)에 통제사(統制使)에 제수되었는데, 대간이 공이 권귀(權貴)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다고 논핵하면서 잡아다가 추고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대개 전임관이 한 짓인데, 전하는 자가 잘못 전한 것이었다. 대질 심문함에 미쳐서는 곧바로 석방되었다. 계미년(1643)에 포도대장에 제수되었으나, 병세가 심하여 대궐에 나아가 숙배하지 못하였다. 6월 16일에 사제(私第)에서 졸하니, 향년이 63세였다. 두 차례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는 이유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은 생김새가 괴걸하고 우뚝하였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구차하지 않았고, 행의(行誼)에 있어서 볼만한 점이 있었다. 열 차례 정절(旌節)을 세웠고 일곱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맡은 곳마다 다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병자년의 난리 때 홀로 능히 떨쳐 일어나서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굳센 적들을 깨뜨려 완연히 한때의 명장이 된 자로는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다. 김화(金化) 전투에서의 승리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모두 말하고 있으며, 오랑캐들 역시 공의 이름을 칭하면서 두려워하였다.
공의 초취 부인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선전관(宣傳官) 윤기빙(尹起聘)의 딸이며,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원걸(元傑)은 일찍 요절하였고, 딸은 현감 강원희(姜元禧)에게 시집갔다. 재취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참봉 김흔(金昕)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지방(之芳)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로 있고, 차남 지발(之發)은 문과에 급제하여 아무 관직에 있다. 딸은 아무 관직에 있는 이익상(李翊相)에게 시집갔다.
지방은 목사 이면(李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으며,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지발은 사인(士人) 윤상은(尹相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아직 어리고, 딸은 사인 윤지경(尹趾慶)에게 시집갔다. 강원희는 1남을 두었는데, 강만석(姜萬碩)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아무 관직에 있으며, 자녀는 10명을 두었다. 이익상은 3남 1녀를 두었다.
김씨 부인은 만력(萬曆) 경자년(1600, 선조33)에 출생하여 숭정(崇禎) 임오년(1642, 인조20)에 죽어 향년이 43세였으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어질어서 아녀자의 도가 있었으며, 자제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였다. 고양(高陽)의 도정리(陶井里)에 있는 정향(丁向)의 언덕에 공과 합장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조정에선 강포한 자 두려워 않고 / 在朝廷不畏强禦
곤외에선 화살과 돌 아니 피했네 / 在閫外不避矢石
문장 보면 백성들이 따르게 했고 / 文以附衆
무예 보면 흉적들이 겁을 내었네 / 武以威敵
잣나무 숲 속에서의 그 싸움에서 / 栢林之戰
다시 더욱 그 명성을 떨치었다네 / 益振厥聲
아아 이분 진짜 장군이었거니와 / 嗚呼此眞將軍
그것으로 명을 짓기 충분하다네 / 是爲銘
[주-D001] 유주(儒州) : 황해도 문화(文化)의 고호(古號)로, 고려 때 이와 같이 칭하였다.[주-D002] 차달(車達) : 고려 태조 때의 공신으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시조인 유차달을 가리킨다. 태조 때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워서 대승(大丞)에 제수되었으며, 삼한 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高麗史 卷99 列傳12》[주-D003] 타위(打圍) : 군사 훈련을 하기 위하여 사냥하는 것을 말한다. 본래는 임금과 함께 사냥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군사 훈련을 위한 사냥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주-D004] 선릉(宣陵) : 성종(成宗)과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다.[주-D005] 유흥치(劉興治)가 …… 있었다 : 1621년(광해군13)에 청나라 태종이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명나라의 요동 도사(遼東都司)로 있던 모문룡(毛文龍)이 의주(義州)로 쫓겨 들어왔다가 이듬해에 가도(椵島)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모문룡은 처음에는 우리나라와 명나라에 도움을 주었으나, 뒤에는 우리나라로 나와 약탈을 자행하면서 피해를 주었으며, 명나라 측에도 피해를 끼쳤다. 이에 명나라에서 요동 경략(遼東經略) 원숭환(袁崇煥)을 시켜 모문룡을 여순(旅順)의 쌍도(雙島)로 유인해 죽였다. 모문룡이 죽은 뒤 모문룡의 부하로 있던 진계성(陳繼盛)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도에 주둔해 있다가 유흥치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이후로는 유흥치가 가도에 주둔하였다.[주-D006] 용마(龍馬) : 청나라의 장수인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를 가리키는데, 용골대는 영아이대(瑛俄爾代), 마부대는 마복탑(瑪福塔)이라고도 칭한다. 이들은 병자호란 때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장수들이다.[주-D007] 오랑캐의 한(汗) : 청(淸)나라 태종(太宗)을 가리킨다. 한은 오랑캐 부족장(部族長)의 칭호이다. 태종은 이름이 황태극(皇太極)이며,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