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방가사, 부녀자들이 지은 노래
조선 시대 여성들은 봉건적 관습에 얽매여 활동하는 데에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부엌일, 바느질, 손님 접대 등 주로 집안 살림을 돌보기에 바빴고, 사회적 활동이나
대외적인 문화 활동은 기대하기 어려웠지요.
그런데 부녀자들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선비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한글로 시가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학자와 문인은 훈민정음을 천대했지만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에게는 두루 보급되었습니다.
이들은 사대부들의 노래 중에 우리말 위주로 창작되는 가사 문학에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되었고
작품까지 창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방가사는 주로 영남 지방에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학자들에 따르면 영 · 정조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지어져서
일제 강점기 시절과 해방 직후까지 약 6,000여 편의 내방가사가 창작되었다고 합니다.
내방가사가 영남 지방에서 주로 지어진 까닭은 영남 지방에 한글을 깨우치고
교양을 갖춘 부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서민들이 지어 부른 민요 대신 사대부의 가사를 선택하여 자신들의 감정과 정서를 노래했을 것입니다.
내방가사의 주요 내용은 상당수가 양반 부녀자들의 생활 주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양반 사대부가 유교적인 이념을 전달하기 위해 골몰했던 것과 달리 실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 놓고자 했지요.
따라서 사대부의 가사와는 큰 차이를 보였고 어떤 점에서는 서민들이 지은 가사와 그 성격이 유사했습니다.
관념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다루었기 때문에 내방가사는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표현할 수 있었지요.
내방가사의 주요 내용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부녀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노래한 작품들이 다수 있습니다.
시집간 딸이 지켜야 할 내용을 노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사친가」도 있고,
자신의 환경을 탄식하는 「여탄가」, 「여자탄식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봉건적 인습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의 고민과 정서를 호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내방가사라고 해서 현실이나 환경을 한탄하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화전가」나 「향원행락가」와 같이 때로는 여성들이 지닌 취미라든가 놀이도 노래로 지어 불렸고
당시의 문물이나 풍속도 소재로 활용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방가사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허난설헌의 「규원가」를 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