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the right to choose)를 주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에서 당신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당신의 개성(personality)을 거의 상실합니다.
당신은 ‘종교적’이고 ‘심리학적인 비인격(psychological non-person)’이 됩니다.
당신은 누구든지 또는 무엇이든지 “신(god)”으로 높이도록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당신은 원하는 것을 더 이상 선택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인지, 종교의 이런 견해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어져 내려왔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그러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예수님께 나오면 당신 자신을 상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글쎄, 내가 거듭난다면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테지. 나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릴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진실과 거리가 먼 소리입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기독교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인해 이 잘못된 생각을 영구화시키는데 일조를 해왔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예수님께 올 때 예수님은 당신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수년 전에, 한 자매가 어떤 친구가 그녀에게 찾아와서는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친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자기가 그녀와 결혼해야 한다고 지시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끔찍함을 느꼈습니다. 그녀가 원치 않는데도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을 하시는지 즉 남편감으로 원치 않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말씀하시는지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그 신사를 존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훌륭한 목회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도 그게 하나님의 뜻임을 믿도록 그녀에게 이야기해주는 법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내가 성경으로부터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여자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 누구나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성경이 진짜 그렇게 말씀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내가 그것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고, 그녀가 성경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 “와!”라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나는 설명할 때까지는 그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자기 문제에 대해 내게 전부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남편을 건네주셨기 때문에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그와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네가 결혼할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네가 결혼해야 하는 상대는 바로 그 사람이다. 혹은 네가 그 직장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네가 그 좋은 직장을 갖길 원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nobodies)’가 될 때까지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진정한 삶은 당신이 당신의 삶을 당신의 창조주께 드리고, 그분이 당신에게 실재를 대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 시작됩니다. 이것은 좋은 인생(good life)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우리는 바디매오라는 이름을 지닌 한 소경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견합니다. 바디매오는 구걸하기 위해서 항상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평상시처럼 구걸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가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시끄러운 소리를 듣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달라고 누군가를 불렀습니다. 그가 바디매오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큰 소리로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막 10:47)라고 부르짖기 시작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바디매오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가 있는 곳까지 이르렀을 때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에 의하면, 당신이 병자이거나 소경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을 반대하시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병은 당신의 죄에 대한 반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경우에 당신은 치유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이 의미는 당신이 치유를 감히 구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디매오에게 ‘그만 해.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주께서 오고 계신다. 조용히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경은 바디매오가 더 크게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소리 질렀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렀을 때 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자기에게로 데려오라고 요청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막 10:51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 의미는 ‘너는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발견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소경 바디매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줄 준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하는 지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그들에게 하나님께 어떤 것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나 그들의 볼품없는 생각과 갈망을 들어줄 시간이 없으시다는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당신은 보잘 것 없는 존재다(God, Who is Almighty, and you, so insignificant).”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종교는 그들의 현재 상황에 무관심한 것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들에게 말해왔습니다. 한쪽 귀가 먹은 사람이 그렇게 된 까닭은 그것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게 당신의 가족이 살아왔던 방식입니다. 가난은 당신에게 속한 것이지요. 당신의 가족을 겸손하게 해 오신 하나님의 방식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패배를 당해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식이 없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패배를 당해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진정으로 알지 못합니다.
또 다른 경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거리를 걷고 계셨는데,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을 만났습니다(요9:1-3), 제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쳐왔던 것에 대해 주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주님, 이 사람이 눈먼 채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이 사람 죄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누구의 죄도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런 질문을 한 이유는 누군가가 눈먼 채로 태어나는 것은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부모 둘 중의 하나가 죄를 지었음에 틀림없다는 종교적 교육으로부터 연유한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입니까! 그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떻게 죄를 지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이 제자들의 사고방식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어떤 상황도 여하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는 오직 선하고 완전한 선물만 오기 때문입니다(약 1:17).
또 다른 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보았던 베데스다 연못에 계셨습니다. 그곳에는 각양각색의 질병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요 5:1). 성경은 예수님께서 38년이나 질병에 시달린 한 사람을 만나시자, 그에게 낫기를 원하는지 물어보셨다고 말씀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런 종류의 갈망을 품어본 적이 절대로 없었습니다. 아무도 치유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평생 그렇게 지내야 한다고 추론하였을 때, 그들이 어떻게 치유를 구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질병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라고 아직도 말합니다. 언젠가 한 여인이 어떤 목사님을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저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제게 병을 주셨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하나님께서는 많은 겸손한 자들이 필요하십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버지, 이 여인이 더 겸손해지도록 이 여인에게 더 많은 질병을 내려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안 돼요! 저는 더 많은 질병을 원치 않아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목사님은 짐짓 놀란 척하면서 “하지만 병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인 병을 더 많이 갖기 원하지 않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속박합니다. 종교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종교 자체가 이미 인간의 한계에 묶여 있는 노예입니다. 종교는 누군가 하나님께 이르려는 노력이요, 하나님을 만지려는 시도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는 수고이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시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유형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기독교에 관한 전부 즉 하나님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시도록 애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다른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너희를 만지길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많은 랍비들이 있었지만, 이분은 다른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유일한 랍비셨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달랐습니다. 다른 모든 랍비들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에 대해 말했지만, 이 랍비(예수님)는 오셔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위해 이미 무언가를 하셨다.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작은 견해는 이런 것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막10:51),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요 5:6)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당신이 예수님께 온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개성(personality)을 소멸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개성에 능력을 부여하시며, 당신을 효과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당신이 예수님께 나오면, 예수님께서는 죄의 본성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하시고, 당신 안에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갈망과 능력, 즉 바르게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자유 안에 두시며, 자유롭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크리스 오야킬로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권리』 Paula Kim 옮김. 용인: 믿음의 말씀사, 2010. pp. 1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