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취) [원각사 초청강연] 진여와 열반 특강- 견성의 핵심, 청정 광명심 1강(0:05-1:05:13)
0:05
멀리서 이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저도 서울에서 1시쯤에 출발해 가지고요. 또 왔어요. 오랜만에 설혜스님 못 뵌지 한 몇 년 돼 가지고 코로나 때도 못 뵙고. 그래서 그 전에 또 서울 와서 한턱 쏘고 가셨는데 아무튼 화엄경 아까도 얘기하신 그런 예전에 화엄경이나 제가 한참 신촌 토즈 쪽에서 강의실 잡아 놓고 강의할 때 그거 촬영된 거 유튜브 홍익학당에 다 있어요. 뭐 화엄경이나 그때 스님들도 많이 와서 들으시고 해서 저는 절에서도 뭐 부르면 가서 강의하고. 원불교 쪽에서도 부르면 강의하고. 저는 이제 종교는 가리지 않고 수녀님들이 또 부르면 가서 수녀님들한테도 강의합니다. 그런 강의는 다 이제
1:00
웬만한 건 유튜브에 올라가 있고요. 그런데 제가 제일 애착 가지고 처음부터 2011년부터 강의 시작했던 게 견성 콘서트라고 시작했어요. 처음에 불교분들이 그 엄청난 구도열에 제가 뭐라도 도움 드리면 견성은 그냥 원래 그 스님들이 세수하다 코 만지듯이 쉽다는 그 견성해 가지고 이 나라에 위대한 보살들이 많이 나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 원으로 원 세우고 견성 콘서트 열고 그때부터 막 매주마다 경전 하나씩 떼면서 가다가 나중에 하나 제대로 한번 떼보자고 한 게 화엄경을 108강을 해가지고 마지막은 동국대 거기서 해 가지고 회향하고 화엄경도 한번 풀어보고 책으로도 화엄경하고 제가 불교 책 낸 게 수심결 윤홍식의 수심결 강의라고 있어요.
2:03
요거는 BBS에서 4회 분량으로 최근에도 뭐 명작 다시 올리는데 또 제 꺼 올려 주셨더라고요. 거기에도 쉽게 견성해서. 저는 간단해요. 불교의 핵심은 돈오점수 견성과 닦음인데 견성은 최상승선이 지금 화두선이라고 조계종에서는 하는데 화두선의 본질도 반조선(返照禪)이라고 하는 거예요. 경허스님(鏡虛, 1849년-1912년)께서 화두선의 중흥조가 경허스님인데 경허스님의 글을 보면요 반조선이 반조라 그래요. 반조 공부가 제일 귀하다. 곧장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 이게 최상승선입니다. 시간도 안 걸려요. 그거를 돕는 방편이 화두예요. 그 질문이 “이거 뭐냐?”잖아요. 이거 뭐냐 해서 바로 아시면 끝나요. 이거 뭐지 해서 아시면 견성이에요. 점수는 어떻게 닦느냐? 점수는 내 업장이 털려야 되거든요. 사실은 단박에 견성했을 때 부처예요. 이미 부처인 줄
3:04
아는데 요거 이제 성철 스님이 싫어할 얘기지만 단박에 부처인 줄 아는데 별 수 없어요. 자기 업장은 안 녹습니다. 간단해요. 여러분 여러분이 단박에 견성했는데 업장까지 다 녹았는지 안 녹았는지는 가족한테 물어보세요. “내가 어떠냐?”고. 벌써 힘들어하면요 아닌 거예요. 다들 불교공부나 뭐 이렇게 영성 공부하시는 분들이 문제가 본인은 날마다 기분이 나거든요. 그래서 가족한테 강요하는 경우가 있어요. “변하지 않았냐?”고. 더 힘들어 하세요. “저 말만 안 해도 더 살겠다.” 변했다고 우기기까지 하면 더 힘들거든요. 그런데 진짜 업장이 털리면요 제일 가까운 사람이 알아봐요. “너 변했다.” 예전에 이 정도 말하면 지금 싸워야 되거든요. 욕이 나와야 되는데 어 안 나오는 거예요. 이 정도 했는데. 조건이 같은데
4:02
똑같이 반응 안 할 때 여러분 업장이 털린 겁니다. 뭐 아무리 뭐 의식의 뭐 복을 구하는 온갖 짓을 해도요 업장이 털렸다는 건요 모르던 게 알아져야 돼요. 이게 무지의 업장 소지장(所知障)이 털린 거고요. 못 하던 게 돼야 돼요. 못 참던 게 참아져야 돼요. 요게 번뇌장(煩惱障). 심리적인 장애가 털렸다는 거고. 소지장이라는 거는 지적인 장애가 털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매일 업장이 털려가야 신바람 나는 삶이죠. 매일매일 업장이 털리는 게 보살의 삶입니다. 큰 발보리심(發菩提心) 서원을 세우고 날마다 업장을 신나게 털어가야 돼요. 그런데 그 턴다는 게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제가 두 가지 무지랑 아집이라 그래요. 번뇌장을 아집. 나 위하는 심보가 조금씩 털려 나가서 수용 못 할 게 수용이 돼야 되고요. 안 하던 게 돼야 되고 모르던 게 하루하루 한쪽으로 알아져야 돼요. 부처님 진리가 하루하루 하나씩 더
5:03
와 닿아야 돼요. 저는 그래서 하루에 무릎 한번 딱 안 치시면요 그날 업장 안 털린 거예요. 지적인 업장 안 털린 거예요. 털렸으면요 무릎 치게 돼 있어요. “아! 이래서 이랬구나.” 그래도 심리적 업장인 요 번뇌장이 안 털리면요 하는 짓이 또 안 바뀌어요. 이 두 개가 계속 바뀌어야 됩니다. 모르던 게 알아져야 돼요. “아!” 하고 한편으로는 못 참던 게 참아지고 탐진치(貪瞋痴) 올라오는 것 중에 탐진(貪嗔)은 심리적 장애예요. 치(痴)는 지적인 장애예요. 치가 깨져 나가면 “아!” 하는 깨달음이 있고요. 그러면 탐진이 줄어들겠죠. 번뇌장이 바뀐다는 건 탐욕 내던 게 덜 탐나고 분노하던 게 그 욕망이 좌절되면 탐(貪)이 좌절되면 진(瞋)으로 이어지거든요. 탐냈는데 안 되면 진입니다. 화납니다. 짜증나고 슬프고 화나고 다 진이에요. 탐(貪), 간절하게 원하고 집착하고 그거 안 되면 죽을 것 같은 게 탐이고요.
6:04
진짜 안 됐어요. 근데 진짜 죽을 것 같아요. 진(嗔). 그러면 치(痴). 더 어리석어져요. 더 시야가 좁아져서 이제 주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제 이 좁아진 시야에서 또 더 잘못된 탐욕이 나와요. 이제 뭐죠? 나의 좌절을 한 방에 만회할 걸 또 탐냅니다. 점점 더 상태가 안 좋아져요. 주식투자나 뭐나 이렇게 격렬하게 탐진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작용을 보세요. 거기서 다 보입니다. 그래서 평온했던 마음에 물건 하나 견물생심이라고 물건 하나가 딱 보이면 어떻게 돼요? 탐. 오늘 집에 가서 지금 기분 좋으시잖아요. TV 돌리다가 홈쇼핑에서 뭐 하나 마주치면 끝납니다. “아 내가 저걸 몰랐네.” 어제 뭐 하나 샀는데 이게 더 알찬 구성이면 어떡해요. 이거 없으면 사나마나예요.
7:03
옷을 아무리 많이 샀어도요 저 옷이 없으면 옷을 산 보람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동안 산 옷도 의미가 없어요. 그럼 사야 돼요. 자 마음에 한번 구덩이가 패이면 탐욕이에요. 욕망 욕(欲)자가, 칠판에 써야 되네요. 탐진치라는 게 결국 욕망인데 욕망은 계곡(谷)입니다. 이건 하품 흠(欠)자고 하품 흠자는요 입에 이렇게 구덩이가 파였다고 해서 하품 흠자예요. 계곡이 평지에 계곡이 파여서 욕망이에요. 평온했던 마음에 견물생심. 뭘 본다는 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육근작용. 육근 우리가 경험하는 건 육근 밖에 없어요. 온 우주 의미 없습니다. 여러분 육근일 뿐이에요. 각자 1인 1우주를 살고 계세요. 내 시각, 내 눈에 보이는 색깔, 내가 느끼는 촉감, 내가 듣는 소리, 내가 맛보는 맛, 내가 냄새 맡는 거 그리고 내 생각, 내 감정 이렇게 해서 육근이거든요. 여러분은요 세세생생 영원히 여러분의
8:06
마음에 있는 육근 밖에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 육근은 경험할 수가 없어요. 이걸 불교에서 뭐라느냐? 일체유심조. 일체는 마음먹기 나름이다가 아니에요. 불교의 일체유심조는 “일체는 당신 마음이 만든 거다.” 즉 일체라는 건 뭐죠?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전부, 내가 경험하는 세계 전부는 육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 교재에도 나옵니다. 석가모니한테 “일체가 뭔가요?” 하니까 “12처다.” 그럼 그게 뭔데요? 육근. “일체 세계란 거 너 육근밖에 없다. 육근 밖에 다른 게 있다고 하면 믿지 마라.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니까 너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자 그래서 이 여러분 육근밖에 없는데 견물, 여기서 색깔 하나를 봐 버리면 탐욕이 일어나죠. 마음의 구덩이가 파이죠. 평온한 감정이 동요하죠. 그럼 탐진치가 작동합니다. 자 처음에 치가 먼저 전제해야 돼요. 어리석으니까 탐욕이 일어나요.
9:04
어리석으니까 마감 임박하면 완전 시야가 콩알만 해지죠. 자 다 알아요. 여러분 중생심을 다 알고 광고하는 광고회사에서 치를 극대화한는 겁니다. 언제 어리석어지냐? 시야가 좁아진다는 게 치예요. 시야가 콩알만 해지면 여러분 딱 먹힙니다. 이때는 이제 눈앞에 보이는 탐욕에 더 집착하게 돼요. 그게 좌절됐을 때 살맛이 안 나요. 그게 진이에요. 탐진치는요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탐진치 없기를 바라시면 또 안 돼요. 탐진치 없으면 중생이 아니에요. 보살도요 깨달은 중생 보리살타거든요. 깨달은 중생이죠. 보살도 중생심이 있어요. 다만 깨달아서 그렇지.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어서 보살이라고 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가 할 만한 건요 부처보다 보살입니다. 사실 보살되기 너무 쉬워요. 절에 오시면 그냥 보살님이잖아요. 근데 원래는 이 보살이라는 건요 대승의
10:04
아라한을 능가하는 위대한 영적 성취자거든요. 우린 보살이 되겠다. 아라한은요 탐진치를 자기만 극복하지 남을 도와줄 여력은 안 되는 분들이에요. 근데 실제 안 도와주느냐? 도와줘요. 열심히 도와주는데 왜 여력이 안 된다고 하냐면요 아라한들이 기반해 있는 철학은요 “이 육근 작용을 내려놓고 열반에 안주하자”는 거 밖에 없어요. 근데 보살도는 그럼 뭐가 다를까요? 대승불교는? 대소승 구분도요 지금 절에서도 잘 못 합니다. 대소승이 섞여 있어요. 대소승 구분을 정확히 내리기가 쉽지 않거든요. 소승은요 육근 초월입니다. 육근에 접속을 안 하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는 걸 최대한 피하면 어떻게 돼요? 순수한 열반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대승은 뭐라 그러죠? 대승의 핵심은요 “생사에서도 떠나지 말고 열반에서도 떠나지 마라.”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오온이 공이다.
11:04
육근이 그대로 열반이다” 하고 살아야 돼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 저를 보고 계시죠. 제 말 듣고 있죠. 지금 이게 여러분 마음에 탐진치를 일으키고 있죠. 요 일체가 본래 공하고 열반인 줄 아시는 게 대승 도리입니다. 그래서 아라한들이 아는 도리를 아공 도리라 그래요. 내가 없는 줄만 알지 육근에 대해서는 답을 못 내고 있다. 대승은요 반야심경에서 뭐라 그래요? “오온이 공하다”는 건데 오온이 육근이잖아요. “육근이 공하더라.” 육근을 바로 때립니다. 육근이 공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울고 웃고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모든 짓거리가 다 뭐라고요? “본래 공하고 본래 열반이에요.” 이걸 알고 나면요 이 현상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을 구제하러 세세생생 돌아다닐 수 있는 철학적 밑천이 완성돼요. 아라한 철학에서는 육근을 떠나야 끝나니까 내가 업을 지으면 어떻게 돼요? 괜히 중생 돕다가 업을 지어버리면 못 떠나요. 떠나야 돼요. 아라한들도 부처님 제자들이라 열심히 중생을
12:05
도와줘요. 그런데 그분들 마인드에 뭐예요? 아라한들은요 이번 생이 마지막이에요. 여러분 이렇게 도와주는 분은 너무 잘 도와줘요. “근데 미안한데 이번 생까지야.” 이분하고 보살은 어때요? “기다려 또 온다.” I will be back. 또 돌아오고 또 돌아오고. 그래서 아라한은 돌아가시면 “열반에 드셨다”고 끝이에요. 보살은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빨리 오시라” 그래요. 빨리 오셔서 우리 중생 좀 더 건져주라고 해요. 발상이 다릅니다. 그래서 소승불교에다가, 소승불교하신 분들한테 “성불하세요” 하면 이거는 실례예요. 아라한은 성불하려면 계속 윤회를 해야 되는데 이미 아라한이 윤회가 거기는 끝났거든요. “열반에 드세요” 해야 돼요. 그러니까 “성불하세요”는 끝없는 윤회를 통해 부처에 다가가는 대승불교식 가르침에서 맞는 말입니다. 성불하세요. 아라한들은 성불을 포기한 거예요. 그래서 아라한을 목표로 합니다. 우리가 부처처럼 되려면 3아승기겁을
13:03
윤회해야 돼요. 우린 그렇게 해서 공덕을 쌓을 힘이 없어요. 나는 이번 생에 윤회를 끝내고 싶다 하는 분들이 아라한 수행을 합니다. 소승과 대승은 이렇게 다릅니다. 조계종은 대승불교죠. 선불교도 대승불교예요. 일체가 공한 줄 바로 아는 게 최상승선입니다. 그럼 일체가 공한 줄 알려면 밖을 보라는 게 아니라 안팎이 없다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밖을 대상으로 해서 호흡을 관하건 견물생심을 뒤집어서요 견물, 뜰 앞의 잣나무를 보면서도 견성을 하고 뜰 앞의 잣나무를 보면서도 잣나무고요. 그 잣나무가 탐진치의 대상으로서 나한테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깨어서 보면 둘이 아니에요. 여러분 저 지금 보실 때 제가 여러분 우주 밖에 있는 거 같으세요? 각자 여러분 우주 안에 있는 저입니다. 사실 여러분 우주 안에 제가 어떤 모습인지 저는 몰라요. 어떤 분 우주엔 제가 호리호리하게 있을 거고요. 어떤 분 우주에는 제가
14:03
생각하는 저보다 두툼할 수도 있죠. 법계가 다 다르고 여러분 배경음악이 달라요. 여러분 법계의 브금(BGM)이라고 하죠. 배경음악 달라요. 오늘 기분 안 좋으신 분들은 음악이 슬프겠죠. 그런 분들은 하늘도 노래요. 신기해요. 내 마음이 안 좋아지면 진짜 하늘 노래집니다. 이것도 일체유심조예요.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요 사실 내 우주예요. 여러분 영원히 윤회하셔도 영원히 여러분 육근 밖에 못 봐요. 사후세계가 있다면 영계 가시면 어떨까요? 영계 가셔도 여러분 육근 밖에 못 봐요. 꿈을 꿔도 여러분 육근 밖에 체험 못 해요. 꿈에서 보인 거, 들린 거, 맛본 거. 꿈에 어떤 세계가 있었죠? 나와 보니 어떻던가요? 그 보고 듣고 맛보고 남들이 다 여러분 깨보니까 어때요? 다 내 마음 작용이죠. 자 이게 깨어난 거거든요. 꿈에서 깨어나듯이 지금 삶에서 깨어나시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이게 꿈으로 보이세요?
15:00
꿈같이 허망하다는 게 아니에요. 주관적이라는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애들 사이버 게임 컴퓨터 게임할 때요 각자 자기 모니터 밖에 안 보죠. 그럼 그 세계가 있을까요? 아니요? 모니터 안에만 있어요. 각자 모니터. 아니면 요즘 VR. 눈에다 이렇게 대고 자기가 겪어요. 여러분은 마음이라는 VR 마음이라는 모니터만 보고 계세요. 여러분 거 밖에 못 봐요. 그래서 각자가 자기 우주밖에 못 경험해요. 이해되시죠. 타심통을 한다고 해도 역시 나는 다른 사람 마음을 내 마음을 통해서 인식하는 거기 때문에 역시 내 우주밖에 못 봐요. 우주에 들어온 정보를 가지고 우리는 판단하는 거예요. 과학적으로도 여러분 지금요 요 펜이 보이시죠. 요 펜은요, 여러분 눈에 보이는 펜은요 여러분 뇌에서 재구성한 겁니다. 여기서 보내는 빛을 받아서 뇌에서 재구성해서 보시는 거예요. 과학적으로 이 자체가 아니라고요. 불교는 더 나가요. 일체를 우리 마음에서, 뇌 이전에 마음에서 색수상행식, 오감과 그 마음 작용인
16:02
육근을, 육근 작용을 마음을 통해서 우리는 이 우주를 해석하고 보고 있다. 그래서 여러분 사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객관적이란 걸 보신 적이 없어요. 요 펜은요 여러분이 본 펜이라니까요. 여러분 각자 입장에선 이렇게 말해야 돼요. “나는 내가 본 펜을 봤다.” “내 우주에 들어온 펜을 봤다.” 이해되시죠. 이거 엄청난 거거든요. 여러분 철학자가 되고 계신 거예요. 엄청난 불교 철학자가 되신 겁니다. 왜 이게 여러분 철학자 되는 길인지 아세요? 경전 달달 외우면 뭐합니까. 지식인이지 철학자 아니에요. 철학자는 여러분이 여러분 육근을 재료로 해가지고 하나씩 이치를 파악해갈 때 철학자예요. 철학자 되는 거 아주 쉬워요. 여러분이 경험하는 삶의 경험, 재료들을 가지고 여러분이 거기서 법칙 다르마를 알아내면 돼요. 여러분
17:00
눈으로 알아내야 돼요. 그게 여러분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불교에서 해탈하는 거는 초기 부처님 가르침 이래 해탈이나 열반이나 해탈은요 자기 안목으로 자기가 다르마를 인가할 때 이루어집니다. 보통 팔정도를 닦고 선정과 지혜 정혜쌍수를 닦아서 선정을 통해 영적 체험을 하고요. 일반적 육근 체험 너머의 깊은 체험까지 선정 체험으로 하고요. 체험한 걸 바탕으로 거기서 다르마를 뽑아내요. 진리를 뽑아내요. 그래서 그 진리를 딱 당당하게 선언할 수도 있고 인가할 때 해탈하고 열반에 듭니다. 정혜쌍수 밖에 없어요. 플러스 하면 이제 계정혜인데 실천인데 실천적인 걸 모두 녹여서 선정 속에서 우리가 딱 결론을 내거든요.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신 결과물이 뭐죠? 그 체험해 보시고 결국 선정에 든 다음에 내가 모든 체험한 거를 선정으로 녹여낸 다음에, 더 심오한 육근 체험을요 더 심오한 영적 체험으로 녹여내요. 그
18:03
다음에 결론을 내십니다. 내가 경험한 모든 육근 체험은 “일체개고” 괴로운 것이었다. “제행무상” 그 모든 육근 작용은 무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법무아” 그 모든 법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고정된 실체가 없었다. 그런데 결론이 뭐예요? “열반적정” 열반 자리는 안 그렇더라. 열반도 체험해 보신 거거든요. 열반도 체험했더니 거기는 고요하더라. 이게 부처님이 철학자이신 겁니다. 경험한 건 육근과 영적 체험 밖에 없어요. 육근과 선정 체험을 경험해 보신 뒤에 결론을 내신 거예요. 거기서 법칙을 뽑아냈습니다. 다르마는 법칙이고 진리에요. 뽑아냈어요. 그 사법인을 뽑아냈어요. 네 가지 진리의 도장을 딱 찍었을 때 부처가 되신 거예요. 여러분 똑같은 육근 가지고 계신데 왜 안 돼요. 지금 부족한 거 선정체험이 좀 부족하죠. 그건 좀 아쉽지만 선정 체험도 없으신 건 아니에요. 있는데 선정
19:04
체험도요 제대로 지도해 주시는 스승을 못 만나면 선정체험 잘 해놓고도 망칩니다. 제가 이런 분도 봤어요. 멸진정에 드는 체험까지 하고도요. 깊은 선정에 들었어요. 몸도 사라지고 다 사라지고 의식만 있는 그런 상태에 들어가서 그렇게 멋진 체험을 해도 불경에도 나온 체험인데 어떤 스승한테 찾아가면 이렇게 얘기해줘요. “그거 엉터리야” 하면 끝이에요. 거기서 다르마를 뽑아내야 되는데 자기 체험에 대해 의심이 생겨버리면 다 무너져요. 올바른 스승 만나는 게 진짜 중요해요. 그래서 올바른 스승은 여러분을 다르마, 법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스스로 법을 붙잡아야 끝나요. 제가 도와드리려고 이렇게 자료는 준비했지만 이거 다 안 해도 돼요. 중요한 건 여러분이 스스로 법을 읽어내는 힘을 키워 드리는 게 저는 더 중요해서요. 팔정도인데 줄이면 3학이고요. 계정혜(戒定慧). 계율은 실천이고요. 그 실천을요 혼자
20:04
앉아서 선정으로 녹여야 됩니다. 깊은 명상에 드실 수 있어야 되고 그 명상 즉 그 실천적 계율을 체험할 때 겪었던 육근의 경험과 명상에서 경험한 여러분의 영적 경험이 합쳐지면서 지혜로 딱 결론만 나면 돼요. 여러분 또 그 부처님하고 지금 머리가 IQ가 얼마나 다를까요?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IQ가 중요한 게 아니고 영적 지능인데요. 이런 영적인 판단을 내리는 영성지능이라고 할 만한데요. “아 삶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지?” “우주의 이치는 이렇게 굴러가지.” 이거 읽어내는 지능이거든요. 이런 지능은 차이 나겠지만 실제로 일반적인 우리 머리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 특히나 IQ 좋잖아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경험하시고 그 결론을 못 내실 리가 없다는 거예요. 경험만 하셨다면. 육근 경험하시니까 자 이거 결론
21:01
나세요. 제행무상이라는 거 아시겠죠. 이 다르마 인정하시겠죠. 벌써 지금 여러분 철학자입니다. 여러분 이제 딱 이런 말씀하셔야 돼요. 심심할 때 “제행은 무상이지.” 그러니까 이걸 여러분 얘기로 해야지 여러분 거예요. 자 이거 안 돼요. “제행은 무상이라더라.” 힘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거는 지금 아까 지금 홈쇼핑 때문에 흔들리는 그 마음에다가 “제행은 무상이라더라. 이것도 다 무상할 거다.” 이거는 안 먹혀요. 여러분이 선언해야 돼요. 딱 깨어서 정신 딱 차리고 마음 챙김. 마음 챙김이 선정의 핵심이거든요. 딱 정신 모으시고요. 정신을 딱 모으면 안 흔들려요. 정신에 딱 중심이 잡히면 육근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지혜로 딱 한마디 해야 돼요. “제행은 무상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너무 그러면 탐진치, 치가 시야가 좁아졌다가 “아 무상하다”고 하면 왠지 좀 시야가 넓어지겠죠.
22:01
또 왠지 이랬던 경험이 있는 거 같애. 과거에도 왠지 내가 이렇게 내몰렸던 경험이 있는 것 같애. 내몰려서 샀는데 그대로 다시는 안 쳐다본 물건이 있는 거 같아. 자 시야가 다시 넓어지는 계기가 첫째 정신 챙기는 겁니다. 이게 마음 챙김이에요. 마음 챙김은 선정 쪽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지혜가, 깨어있으면 정신 차리면요 시야가 넓으니까 자동적으로 지혜가 작동돼요. 근데 평소에 여러분이 체험을 통해서 결론 내놓은 다르마가 있었다면 더 쉽게 여러분은 그 다르마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냥 외워놓은 거는 도움 안 돼요. 입으로요 “제행무상 제법무아” 뭐 이런 거는 눈앞에 견물 하면 끝나요. 머리에서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정신은 이미 챙겨져 있지 않고요. 정신은 놓쳤고. 그동안 그렇게 외웠던 진리는 여러분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럼 천애고아죠. 그럼 이 나약한 상태에서 중생심이 탐진치의 태풍에 쓸려 가는데 누가 막아줘요?
23:04
이때 자기가 “나무아미타불”이라도 해야 돼요. 나무아미타불하면 다시 정신이 챙겨집니다. 또 부처님에 의지하는 마음도 있으니까 더 잘 챙겨지겠죠. 나무아미타불 하며 정신 딱 모아 가지고 정신이 챙겨지면 다시 작동해요. “제행무상.”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일체개고.” “분명히 이것도 택배 받아보면 후회한다.” 고(苦)라는 건요 고는 뭐죠? 고는 그냥 고통만 고가 아니에요. 여러분 늘 고통스러우시진 않잖아요. 근데 일체개고가 왜? 일체개고는 제행무상 때문에 온 거거든요. 일체는, 제행은요, 육근 작용은 계속 일어나고 사라져요. 벌써 5분 전에 보던 거 계속 저를 보고 계시지만 또 장면 계속 바뀌고 있죠. 소리 계속 바뀌고 있죠. 생각 감정 계속 바뀌고 계시죠. 이렇게 무상하게 흘러가요. 붙잡지 않으면 쏜살같이
24:02
지나갑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건요 붙잡을 때 괴로워져요. 계속 곱씹을 때 괴로워지는데. 염불의 원리가 뭐냐면 지나간 것 쓸데없는 거 곱씹지 말고 뭘 곱씹으라는 거예요? 부처님 이름을 곱씹으라는 거예요. 이왕이면 노느니 염불하라. 뻘 생각하느니 염불하라. 그러면 염불할 때마다 공덕이에요. 다른 게 아니라 내 육근이 정신 챙겨지는 게 공덕이라니까요. 다른 사람 우주는 됐고 내 우주. 여러분은 여러분 우주의 주인공인데 여러분 우주가 지금 육근 운전이 잘 되나요? 운전이 휘청휘청하죠. 정신을 안 챙기고 있다는 건요 운전자가 취한 거 음주운전이랑 똑같습니다. 견물 하면 이미 취한 상태. 시야가 콩알만 해졌고 이제 사물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육근을 운전해요. 계정혜가요 3학이라는 게요 선정은요 운전자가 정신 차린 겁니다. 각성제라도 먹고 깨어나는 거. 그러면 지혜는 뭘까요?
25:04
내비게이션이에요. 내비게이션. 어디로 가야 돼요? 아니 진리에 맞게 다르마에 맞게 가야죠. 제행무상을 가지고 사고를 해야죠. 모든 일에 생각할 때 제법무아를 갖고 생각하고 열반적정을 갖고 생각하고 팔정도를 갖고 생각해야죠. 사성제 고집멸도를 갖고 생각하고. 대승이면요 더 나아가서 육바라밀을 갖고 생각해야 된다. 저는 최고의 내비로 육바라밀을 추천해요. 동서남북 좌표 딱 찍고 갈 때요 육바라밀이 최고입니다. 이러면 팔바라밀입니다. 팔정도구요. 정신 챙겨서 이렇게 보시 지계 인욕. 이것만 오늘 얻어 가셔도 엄청납니다. 맨 뒤에 있어요. 자료 맨 뒤에 있습니다.
26:03
여기랑 제가 지금 그림은 다르게 그릴 겁니다. 일반적인 육바라밀 순서로 그려 드릴게요. 선정 반야 지혜 자 여기가 중심점입니다. 대승불교는 너무 외우기 쉬워요. 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럼 여러분 불교, 대승불교 끝났습니다. 육근을 육바라밀로 운전하라 하면 끝이야. 육근을 육바라밀로 운전하라. 이 중심 자리 뭐 참나라고 안 불러도 돼요. 진여 참나에 막 경기 있는 분들은 진여라고 하면 됩니다. 그럼 진정돼요. 진여도 못 견디는 분들은 열반이라고 해 주세요. 그럼 소승불교 분들도 남방불교 분도 진정돼요.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요 운전자 자리가 중요해요. 자 어떤 일을 딱 할 때 일단 여기가 정신 차리고 있나 보세요. 정신 차리는
27:02
법 제가 가장 쉬운 거 가르쳐 드릴게요. 자 부처님은 호흡념(呼吸念)을 가르쳐 주셨어요. 지금 숨 들이쉬나요? 내쉬나요? 마음 챙기는데 제일 짱인 게요 숨 안 쉰 적은 없거든요. 우리가 숨 안 쉴 때가 없습니다. 하니까 나무아미타불 하려면 의지를 내야 되는데 이거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호흡을 알아차리면 돼요. 호흡의 마음을 챙기는 겁니다. 지금 들이쉴 때는요 “들이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그런 말도 이제 거칠면 그냥 들어오는 거 알아차리고 나가는 거 알아차리고. 딴 생각할 시간이 없죠. 지금 들어오나요? 나가나요? 지금이요 벌써 흘러간 거예요. 지금 관찰하세요. 지금 항상 지금에 초점을 두세요. 존재하는 건 지금 밖에 없어요. 1초 전도 지금 없어요. 앞으로 아직 안 온 미래도 없고요. 지금.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 마음 챙기는 거예요.
28:05
요거는 대상이 있는 수행이에요. 대상 없는 수행도 있어요. 대상 없는 수행을 최상승선이라 그래요. 지금 일단 대상이 있는 것부터 말씀 드릴게요.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먼저 활용해야 됩니다. 육근이 그대로 뭐예요? 육근이 일체유심조, 육근이 여러분 진여의 작용이라니까요. 여러분 참나 불성의 작용이라니까요. 그래서 육근이 공하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요 지금 당장 육근이 공하다니 요 펜이 공하다니. 이런 얘기하면, 근데 절에서 스님들이 왜 자꾸 주장자를 들까요? 이게 뭔가? 이걸 드실 때 스님은 뭘 원할까요? 이게 뭘까요? 주장자(拄杖子)로 보이죠. 주장자가 아니죠. 죽비(竹扉)로 보이죠. 자 이 죽비를 보세요. 대상을 알아차려 보세요.
29:02
요게 뭘까요? 왠지 분위기상 진여라고 해야 될 것 같은데. 왜 진열일까요? 근데 이게 자 이거를 딱 알아차리고 계시면요. 이게 여러분이 보셔서 여러분 마음에 있다니까요. 이게 객관적으로 이게 있다고 전제하니까 그게 무지에요. 이게 나밖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니 저 죽비 들어 놓고 주장자 들어 놓고 뭘 요구하는 거지?” 이런 스님들 있어요. “죽비라고 해도 30방을 때릴 거고 죽비가 아니라고 해도 30방을 때릴 것이다.” 인도 도인을 만났는데 숭산 스님(崇山, 1927.8.1-2004.11.30)이 이런 걸 날린 거예요. 통역사가 아주 힘들어 했대요. 때린다는 말을 해야 되잖아요. 힌두교 도인은 이런 문화가 아닌데. 선불교 문화인데 “당신을 30방 때리겠답니다.” 힌두교 도인이 황당해하고. 그런데 여러분 이 말 아시죠.
30:05
알아차려 보세요. 이게 뭐냐? 이게 여러분 우주에 존재하려면 여러분이 알아차리는 자가 있어야 돼요. “이걸 알아차리는 그 자리를 보라”는 거예요. 불교는 이거 알아차리는 자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이게 객관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객관적이 아니라는 거냐? 그건 아니에요. 왜? 모든 사람이 제가 이거 들었을 때 같이 봤으니까. 이건 똑같아요. 요즘 집에 가시면 아이들이 사이버게임 할 때 모니터는 다 다르지만 다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객관적이에요. 하지만 다 각자의 모니터 밖에 못 봐요. 이 원리로 보세요. 꿈이랑은 달라요. 꿈은 주관적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지금 공통의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걸 들면 다른 사람 여러분 우주에도 다 같이 이게 들려요. 하지만 이게 뭐냐고 물으면요 여러분은 이걸 알아차리는 자리가 있고 그 알아차리는 자의 대상으로서만 이게
31:00
있다고 봐야 돼요. 죽비라는 이름도 붙이기 전에 요놈이 대상으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를 고요히 알아차리는 그 자리가 본질이에요. 그게 여러분의 참나라는 거고 여러분 진여 자리입니다. 불성 자리. 지금 불성 자리 못 느끼실 분이 없어요. 실제로 이런 분 있어요. “이게 불성일 리가 없어.”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에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선불교에서 “지극한 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만 하지 마라. 따지지만 마라.” 지금 방금도 제 얘기 들으시고 “불성일까 아닐까?” 하면 따진 거예요. 따지지 말고 알아차리시면 그 자리입니다. 저를 보고 있는 그 자리가 불성 자리에요. 자 지금 심심하니까 여러 가지 해 볼게요. 저를 보세요. 또렷이 보세요. 제가 점점 빛납니다. 몰입을 잘하시면 제가 빛날 거예요. 보시다가 눈 감으세요. 보고 있는 놈 있죠. 저 보고 있던 놈 그놈이 참나입니다.
32:05
방금 저 보고 있던 놈이 참나예요. 거긴 고요해요. 고요하고 항상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래서 절에서 그 자리를 공적영지(空寂靈知)라 그래요. 텅 비어서 알아차리고 있어요. 눈 뜨고 절 보세요. 또렷이 보세요. 팁을 하나 드릴게요. 망념 날리는 최고의 무기. 달마대사가 가르쳐 주신 겁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한테요 “당신 누구요?” 했더니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모르는데요” 그랬어요. 몰라를 못 당합니다. 몰라 하면요 육근이 다 날아갑니다. 여러분 육근 작용이 아무리 여러분을 괴롭혀도 한방에 다 날려버리고 딱 알아차리는 자만 딱 이 알맹이만 남기는 비결이 몰라 해버리는 겁니다. 몰라 해보세요. 몰라. 자 같이 가볼까요? 제가 한번 인도해
33:04
드릴게요. 자 저를 일단 보세요. 저를 딱 보고 있다가. 원리는 간단해요. 지금 뭐 이것저것 했는데 집에 가서 “모르겠어” 이러시면 안 돼요. 원리는 간단해요. “육근을 주재하는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 참나라고 안 불러도 좋다. 이름이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원래 근데 거기가 불성 자리는 확실한데 이름도 안 붙여도 좋다. 체험하시느냐가 중요해요. 자 지금 저를 보시다가 눈 감으세요. 자 알아차리는 자가 있죠? 모릅니다. 지금 몇 시인지 모르겠습니다. 공간이 어딘지도 모르겠어요. 오직 존재할 뿐이고 오직 알아차릴 뿐입니다. 어떤 것도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 자리에는 부족한 게 없습니다. 오직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34:01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 알아차림은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생각 감정 오감은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줄 아는 그 자리는 영원히 알아차릴 뿐입니다. 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름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존재할 뿐입니다. 어떤 근심 걱정도 침범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이제 저를 보세요. 어떠세요? 잠깐이지만 제가 장담하건대 여러분 집에서 하루 종일 이러고 계시면 다 견성합니다. 지금 모르실 자리가 아니죠. 아는데 거기에서 푹 못 쉬셔서 그래요.
35:00
갑자기 어 졸지에 참나랑 맞선이 들어오니까 당황스러우셔서 그렇지. “이 자리야” 해버리면 여러분은요 날마다 달마다 바뀝니다. 자 어떤 근심이 들어와도 몰라 하면 다 날아가요. 몰라. 이게 화두 중에 벽암록 제1칙이에요. 이걸 강조를 안 해요. 선불교에서 벽암록 제일 첫 번째 화두인데 “달마는 왜 몰라 했는고?” “왜 이름을 모른다고 했는고?” 자기를 몰라요. 몰라 하면요 번뇌가 날아가는 게요 몰라 하면요 무관심이잖아요. 우리 모든 번뇌는 아까 얘기했죠. 보세요. 원래 다르마상 제행무상이죠. 모든 생각 감정 번뇌도 무상해요. 순식간에 흘러가는 게 공식인데 왜 여러분 마음에서 번뇌 하나가 자리 잡고 안 흘러가고 있을까요? 여러분이 계속 관심을 주고 곱씹어서예요. 근데 몰라를 계속하면 어떻게 될까요? 뭘 근심했는지를 모르게 돼요. 자
36:00
장담하건대 몰라 하면 5분 전에 왜 고민했는지를 잠깐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몰라선이 반조선이 최고입니다. 몰라 해버리면 바로 참나예요. 그래서 이게 최상승선이라고 합니다. 화두도 돌아가는 거예요. 사실은 왜 화두도 “이 뭐꼬?” 해야 되거든요. “이거는 뭐지?” 하고 들여다봐야 되거든요. 근데 이걸 더 간편하게 하는 게 “몰라”예요. 그래서 숭산스님이 몰라 이거 가지고 가가지고 현각 스님이랑 아이비리그 천재들 다 생각을 잠재워 버린 거예요. 몰라 하고 나니까 내가 하버드를 다녔는지 이름이 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길이 뭐예요. 여러분 몰라 하고 있으면 존재만 하면 나이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눈 감고 하시다가 눈 뜨고도 이제 해보세요. 눈 뜨고도 몰라 하면요 내 경계가 여기까지라는 구분이 없어져요. 왜냐하면 지금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게 전체가 여러분 우주라니까요. 요건 여러분 거 아닌 줄 알았죠? 여러분 겁니다. 그렇죠? 그래서 스님들이 “이거 뭐냐?”고 하는 거예요. “이게
37:03
뭐냐? 이게 뭐의 작용인 줄 아시는 분이 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내 의식의 작용입니다” 하는 거를 체험적으로 아셔야 돼요. 그래서 뜰 앞의 잣나무, 갑자기 뜰 앞의 잣나무 보는 게 뭔데요? 부처가 뭡니까? 뜰 앞의 잣나무. 뜰 앞의 잣나무 보고 계시면 “왜 나한테 이렇게 하는고?” 이렇게 하지 마시고 뜰 앞의 잣나무를 깨어서 보시면 그대로 잣나무랑 여러분이 둘이 아니고 그대로 나는 부처요. 잣나무는요? 부처의 작용입니다. 오온이 공한 도리를 알게 돼요. 반야심경이 통으로 들어와요. 오온이 본래 공하다는 건요 이 자리만 공합니다. 보세요. 이 알아차린 자를 빼고는요 안이비설신의는요 형형색색 다 색(色)의 존재예요. 쪼개진 존재고 분별의 존재예요. 이 자리만 텅 비어 있는데 알아차리고 있어요.
38:02
그래서 수심결에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하는 거예요. 신기하게 공적 텅 비어 있는데 알아차리고 있다. 어떠세요? 좀 느낌 오세요? 요거 오늘 이것만 아시면요 그동안 불교 공부요 저한테 30년 40년 하신 분들 뭐 스님들 다 오시는데 딱 이거 아실 때 다 눈물 흘리시더라고요. “아 내가 그토록 찾았는데 이거였다고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이거라면 늘 겪었었는데요.” 맞아요. 왜 참나 진여 열반 불성이 여러분과 멀리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했어요. 잠들 때 깰 때 함께 했고요. 여러분 할 말 없을 때 항상 그 자리였어요. 큰일 당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어요. 큰일 당하면 한 생각도 못 일으킵니다. 그래도 “아이고” 소리라도 낼 때는 덜할 때예요. 진짜 큰일 당하면 한마디 말도 못 해요. 한 생각도 괴롭거든요. 한 생각도 탐진치의 극강의 고통을 줍니다.
39:04
그래서 이 고(苦)라는 거는 무상에서 온 거라. 꼭 이런 고만 고가 아니라, 괴로움만 고가 아니라 여러분 뜻대로 안 되는 걸 고라고 하는 거예요. 인생이 여러분 뜻대로 하나도 안 돼요. 그래서 고라고 하는 거지 그러니까 좋은 걸 만나도 고인 거예요. 왜 좋은 게 무상하게 사라지니까. 좋은 식당 가면 먹을수록 화나지 않으세요? 자꾸 줄어드니까. 자꾸 배가 불러지니까. 그러니까 나는 딱 최상의 맛을 보고 싶은데 인생 살다가 이게 안 돼요. 막 봐도 사라져요. 이래서 고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상하니까 고라고 하는 거지 즐거울 일이 없어서 고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무상하다는 거 자체가 내 뜻대로가 아니잖아요. 내 탐욕을 안 이뤄 준다고요. 좋은 거는 흘러가서 그렇죠. 나쁜 거는 계속 만나서. 계속 이렇게 또 돌아서 또 만나고 돌아서 또 만나고. 돌겠는 거죠. 근데 무상한 거 자체가 고다. 우리
40:03
마음대로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이 진리를 알고 우리 삶을 꾸려 가셔야 되는데 지금 무상 고 무아를 삶의 베이스에 깔고 여러분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다르마의 사람입니다. 다르마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훌륭한 진리의 실천자입니다. 이걸 여실행(如實行)이라고 그래요. 진여법 그대로 진실 그대로 수행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육바라밀 그대로 한다는 건 뭘까요? 이제 소승불교에서 대승으로 나왔을 때는 6바라밀을 갖고 나온 이유가 있습니다. 이게 여러분 소승불교만 해도 출가자들의 삶의 룰이었어요. 그러니까 숲속에서 지킬 수는 있는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더 힘든 상황 아니세요? 여러분 지금 숲속에 계시다면, 일단 가정만 떠나셔도 행복하시죠? 가정만 떠나도 뭐가 고민이 있어요. 그럼 출가자들이 그 삶의 룰로 삼고 있던 거를 지금 여러분이 복잡다단한 속세의 삶에서 그걸 적용해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가려면 잘 되시겠어요? 안 되죠. 그래서
41:06
대승불교는요 육바라밀을 정립해 놓은 겁니다. 이거 가지고는 어떤 문제도 풀 수 있어요. 일단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자 육근을 운전하시려면 여러분 운전자가 일단 깨어 있어야 됩니다. 음주 상태면 안 돼요. 정신 챙기실 때 몰라 해보세요. 지금 몰라 하면 정신 차려지시는 거 느껴지세요? 몰라 몇 번씩만 해보세요. 팁 하나 더 제가 드릴게요. 몰라 하고요. 괜찮아까지 같이 해보세요. 그러면 마음이 한결 더 나아지실 거예요. 몰라 괜찮아. 몰라 괜찮아. 그냥 몰라 괜찮아 하세요. 이게요 몰라가 무지예요. 모르겠다. 괜찮아는 무욕이에요. 바라는 게 없다. 모르고 분별하지 않고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을 누가 흔들어 놓을 수 있어요? 어떤 탐진치도 이분을 흔들어 놓을
42:00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찰나라도 좋아요. 5분 뒤에 흔들려도 돼요. 5분만 몰라 괜찮아 해보자. 그러니까 자기 마음한테요 중생심한테 “야 5분 있다 흔들리자. 5분만 내 말 좀 들어줘.” 몰라 괜찮아 배째. 배째죠. 배째 괜찮아. 배째 괜찮아. 몰라 배째. 몰라 배째 한 사람은 못 당합니다. 이거 자녀분한테 가르쳐 주세요. 자녀분 이제 통제 안 됩니다. “너 이러면 중간고사 죽쒸. 등급 떨어져.” “몰라 괜찮아.” “너 수능 떨어져. 너 대학 못 가면 어떡하려고.” “몰라 괜찮아.” 수능은 떨어질지 몰라도 대자유인이 될 겁니다. 왜냐? 사는 동안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삶을 살 거예요. 이게 진리의 힘이에요. 이게 이 정도 정력(定力), 선정 능력이 있어야 돼요. 탐진치에 휘둘리질 않아요. 몰라 괜찮아 이게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이게 최면 거는 게 아닙니다. 뭐냐면 영화만 봐도 이런 거 있잖아요. 막 취업 면접하러 가면서 거울 보고 “괜찮아 괜찮아” 이거는요 중생심이 그냥
43:00
외치는 거고요. 제가 말한 건 몰라 괜찮아 하면서 중생이 중생심이 잠깐만 분별을 멈추면 알아차리는 자인 불성, 진여불성과 딱 합쳐지면서 진여 불성에서 초긍정의 전지전능 자비의 힘이 나오는 이걸 말하는 거예요. 그 힘으로 내가 이겨내야지 중생심 쌩으로 괜찮아 괜찮아 하는 걸 안 괜찮아요. 괜찮아 할 때마다 자기가 알아요. “괜찮아. 안 괜찮아.” “괜찮아 안 괜찮아.” “몰라. 알아.” 중생심 놀음에 빠져 버려요. 이분법적인 이원론적인 놀음에 빠져버리면 안 돼요. 그냥 깔끔한 몰라예요. 아는지 모르는지 몰라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괜찮아 묻지마 몰라랑 묻지마 괜찮아면요 여러분은 그냥 견성입니다. 지금 여러분 그때 정신 상태가 참나 상태예요. 다시 한 번 해볼까요. 자 눈 한번 감아 보세요. 아까는 이제 뭣 모르고 당하셨지만 지금 이제 원리도 아셨죠. 육근을 몰라 해보는 겁니다. 육근이 내가 아니란 말이에요.
44:01
육근은 무상하다고 했잖아요. 육근은 괴롭다고 했잖아요. 육근은 내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럼 육근이 뭐냐? 생각 감정 오감입니다. 생각 감정 오감을 몰라 해볼 거예요. “생각 감정 오감아 모른다. 난 널 모른다.” 그런데 괜찮다. 몰라 괜찮아. 몇 시인지 모릅니다. 어딘지 몰라요. 이름도 모르겠어요. 나이도 모릅니다. 그런데 괜찮아요. 조금도 부족할 게 없어요.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니까요. 존재하는 것만으로 완벽하니까요. 부족한 게 없어서 완벽합니다. 괜찮아요. 딱 좋아요. 모릅니다. 이름도 모릅니다. 나이도 모릅니다. 어딘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의식이 고양되시죠?
45:03
이렇게 노세요. 이렇게 누리세요. 자 저를 보세요. 이게 최상승선이에요. 이건 시간이 안 걸려요. 그냥 들어가요. 자 결국은 나무아미타불을 해가지고 사실 그 상태에 들어갑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다 보면요 그게 몰라 괜찮아 상태예요. 자 어떤 잡념도 몰라져요. 완전히 괜찮은 상태가 돼요. 그때 나무아미타불하고 나밖에 없어요. 이때 나무아미타불을 놔버리면 나만 남아요. 그게 불성이에요. 호흡을 봐요. 호흡 들이쉬고 내쉬고만 봅니다. 몰라 괜찮아 예요. 어떤 잡념도 안 일어나요. 어떤 불편함도 없어져요. 이제 시공을 초월해서 호흡과 나만 있어요. 그러다가 호흡을 보는 나를 “이 뭐꼬?” 하고 들여다보면 그놈만 딱 남아요. 근데 최상승선은 바로 들어가요. 몰라 해버리면 일체 육근을 다 날려버리기 때문에 몰라. 한 번씩이요 딱 남하고 얘기하거나 일상에서 복잡하실 때 잠깐만 눈 감고 멈춰서 몰라 한 몇 번만 열 번만이라도 하시고 정신 딱
46:04
모아서 움직이세요. 이게 운전자 각성입니다. 그 다음 내비.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아는 6가지 육바라밀의 비법을 얘기해 드릴게요. 육바라밀 닦으라고 절에서 다 말은 많은데요. 이렇게 닦아요. 육바라밀 보시, 보시했는가? 아 ARS 오늘 눌렀다. 동그라미. 지계, 동그라미. 아 오늘 뭐 내가 살생을 하진 않았다. 동그라미. 인욕, 오늘 험한 일 당했는데 뭐 아무튼 시어머니를 내가 참아 드렸다. 큰말 나올 수 있었는데 참았다. 인욕 날마다 해도 공덕은 쌓는 거 같은데 내가 변한다는 게 안 느껴질 거예요. 반야, 경전 좀 읽었다. 동그라미. 참선, 5분 참선했다. 동그라미. 정진, 뭐 나 정도면 열심히 살았다. 아니면 절에 오늘 갔다. 동그라미. 자 이런 식 수행으로 육바라밀을 아무리 닦아도 이거는 유량공덕밖에 안 됩니다. 바로
47:02
무량공덕 들어가는 방법은요. 일체가 육근도 참나 작용인데 불성(佛性) 작용인데 육바라밀이라고 불성 작용이 아닐까요? 불성 작용으로 해야 바라밀이에요. 바라밀이라는 뜻은요 완성 궁극이란 뜻입니다. 청정. 그러니까 보시를요 중생심으로 하는 보시는요 보시하면서 인증샷 찍고 막 주변 동네방네 다 알리고 이걸로 세제 혜택 되는지 좀 알아보고 복잡한 보시죠. 중생심이 하는 보시. 이건 유량공덕이에요. 그건 보시라고 하지 바라밀이라고 안 해요. 무량공덕은요 바라밀은요 청정한 보시와 궁극의 보시 보시의 완성입니다. 깨어서 하셔야 돼요. 몰라 하신 그 마음으로 나와 남 둘로 가르지 않는 그 마음으로요 남이 나 같아서 그냥 주는 거예요. 흔쾌하게 그럼 보시바라밀이 돼요. 그러니까 이 육바라밀을 다 그렇게 닦을 수 있다면 엄청난 수행자죠. 이게
48:02
바라밀입니다. 이 바라밀 닦는 게 보살이에요. 그냥 절에 들어오면 “보살님” 이게 원래 이렇게 받으면 안 돼요. 보살되라는 덕담으로 들으셔야 돼요. 진짜 보살은요 육바라밀로 한 생각에 육바라밀이 들어 있어야 보살입니다. 어떻게 한 생각에 육바라밀 담을지 보여드릴게요. 자 만약 오늘 가족하고 싸웠어요. 보시는요 뭐 나눠주는 것만이 보시 아니에요. 보시라는 건요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내가 갖고 싶은 걸 상대방도 갖고 싶을 줄 아니까 상대방한테 주는 게 보시에요. 즉 가족하고 불화가 있을 때 한 생각 돌려서 가족 마음을요 내 마음처럼 헤아려 보는 게 보시입니다. 이미 상대방 이익을 내 이익처럼 중시해 주는 거예요. 보시, 이거 깨어있지 않으면 이런 보시가 안 나와요. 지계, 상대방한테 부당한 룰 어기는 룰 어기는 거, 선 넘는 짓 안 하는 게 지계입니다. 불살생(不殺生)하고 불투도(不偸盜) 하고 오계(五戒)는 지켰지만 집에서 사시는 모습이 계속 가족들한테 선 넘는 분이 있죠.
49:03
우리들 얘기잖아요. 선 넘어요. 상대방은 선 넘었대요. 난 안 넘은 거 같아요. 자 이런 경우 지계바라밀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족들 막 있는데 불쑥불쑥 들어가서 “아 선 좀 넘지 마세요.” “그런 게 어딨어.” 자 한국인의 오지랖은 특히나 이게 지계에서요 여러분 사회 나가면 이것 때문에 힘드신 거예요. 선 넘어오는 직장 동료들, 친구들. 그렇죠. 선 넘어오는 거. 안 그래도 머리 이상해서 진짜 불편해서 나갔는데 “아우 머리 망했네.” 적당히 해줄 수 있죠. 보시하실 때도 많죠. 그걸 또 이쁘다고 해줄 때 보시죠. “와 어디서 했어 잘했네.” 보시. 지계. 파계. 이게 파계예요. 여러분 이걸 파계라고 생각 안 한다니까요. “내가 애정이 있어서 너한테 남 같지 않아서 이런 말 해주는 거야. 망했어. 너
50:06
옷도 엉망이고 지금.” 그러니까 이거를 뭐냐면 이게 선 넘은 거죠. 이게 선이 있어요. 인간관계는 선이에요. 요 선이 계입니다. 그거는 심계(心戒)예요. 마음의 계가 있어요. 정해진 룰만 아니까 일상생활에서 이 심계를 어떻게 지켜요. 그래서 보살이라는 건요 1지보살 2지보살 올라갈 때마다 이런 미묘한 인간관계의 모든 룰을 통달하신 분들이 9지보살 10지보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로 화엄경 9지조에 보면요 중생의 모든 욕망, 근기, 부족함 모든 걸 꿰뚫어보면서 가르침을 편다고 돼 있어요. 쉬운 얘기 아니죠. 엄청난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높은 보살의 경지는요 헤아릴 수 없어요. 말 한 마디로 중생을 살릴 수 있는 경지여야 돼요. 그러려면요 선 안 넘어야 됩니다. 이거(보시)는 선 넘어가서 남을 나처럼 도와주는 거고요. 이쪽(지계)은 선을 지켜 주는 겁니다. 지계는 상대방한테 부당한 짓 안 하는 거예요.
51:04
인욕은요 참아주는 거예요. 인욕은 다른 말로 수용입니다. 수용. 여러분 진실을 수용해 줘야 인욕바라밀인 거예요. 그러니까 화났는데 참는 인욕는요 그냥 인욕이고요. 인욕바라밀, 불교에서 강조하는 인욕은요 지금 이런 불법을 수용하는 것도 인욕이라 그래요. 뭐냐면 이걸 인정한다는 게 내 에고한테는 치욕인 거예요. 오늘도 이런 일이 있으셨죠? 내 에고한테는 나에게 되게 모욕적인 일인 거예요. 근데 내가 참아주는 거예요. 그것도 깨끗하게 마음을 챙겨 가지고 마음 챙겨서 진여의 마음으로 참아주는 거예요. 녹여주는 거예요. 이걸 인욕바라밀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지금 나온 이런 불법의 가르침도 처음에는 “아 내 생각과 다른데” 했다가 들어보니 “자명한데” 하고 수용하시면 인욕바라밀입니다. 나한테는 모욕이죠. 왜?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 되니까. 내가 틀렸다는 걸
52:01
인정하면서까지 수용해 주는 게 인욕이에요. 그러니까 진실을 수용하는 게 인욕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지금 다 보세요. 가족하고 불화가 있다면요 분명히 상대방 이익을 내 이익처럼 생각 안 해주는 부분에서 문제가 있고요(보시). 또 너무 내 이익처럼 생각해 준다는 마음에 선을 넘어서 문제가 되고요(지계). 그다음 상대방이 나는 이래서 괴롭다고 아무리 해도 인정을 안 해줍니다(인욕). 수용을 안 해줘요. “에이 사치다.” “엄마 아빠 저는요 이런 게 이게 안 돼요.” 막 해도 “그럴 리가 없어.” 그건 상대방 입장을 안 받아들여 주는 거예요. 오늘 가족분들의 입장 받아 주셨나요? 그럴 수 있겠다고 하셨나요? 아니면 “에이 이런 게 말이 돼.” 수용을 안 해주면 사람이 미칩니다. 나도 수용 받고 싶죠? 나도 수용 받고 싶으면 먼저 해주는 게 보시에도 맞는 거고요. 수용해 주는 게 인욕입니다. 이게 참아준다는 거예요. 여기 모인 분들끼리도 지금 우리가 서로
53:00
참아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죠. 알게 모르게 우리 상대방 신경 써 주는 거 있죠. 요게 인욕이에요. 지금 벌떡 일어나고 싶어도 가만히 계신 게 인욕이에요. 조화를 추구하는, 즉 인욕은 남과 조화를 추구하면서 내 거를 좀 낮추면서 상대방 입장을 수용해 주는 이게 인욕이지 단순히 화 참았다고 인욕이 아닙니다. 화 참은 것도 그건 그 차원에서 참은 거죠. 우리가 조화를 위해서 수용한 거죠. 상대방의 마음도 입장도 존중해 주느라고 참은 거죠. 정진은요? 쉬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육바라밀을 계속 포기하지 않는 게 정진입니다. 그리고 선정은요? 계속 깨어 있는 거예요. 정신을 쫓아 또 몰라 하세요. 지금 제 얘기 들으면서도 몰라 한번 해보셨나요? 몰라 한번 해보세요. 정신이 맑아지고 맑아집니다. 실제로 시야가 환해져요. 몰라가 잘 되시면요 시야가 환해지게 됩니다. 깨어나시면,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시야가 환해지게 돼 있어요. 안 그러면 시야가 흐릿해져요. 그 다음에 반야는요? 반야는
54:06
목의 칼이 들어와도 자명한지 아니면 찜찜한 구석이 없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는 거예요. 즉 내가 믿는 진리, 내가 아는 진리가, 정보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금 자명하신가요? 여러분 삶의 축이 되는 여러분 각자 법계가 1인 1우주죠. 1인 1우주를 경영하는 법이, 룰이 있겠죠. 여러분 인생을 경영하는 여러분 우주의 통치법이 과연 자명하실까요? 목에 칼이 들어 자명할까요? 근거가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근거가 없는 걸까요? 그게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이게 반야입니다. 반야라는 건요 진실 그대로 아는 거예요. 팩트 그대로 아는 거. 팩트 폭격을 당했을 때 버티실 수 있어야지 반야입니다. 반야가 아닌 것들은요 팩폭 당하면 다 날아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팩폭을 하다니” 이러면서 날아가요. 그러니까 남이 공격하기 전에 스스로 해보세요. 스스로 의심해서 자명한 근거가 없는 것들은 가설로
55:05
돌리고 자명한 것만 자명하다고 하는 게 반야입니다. 자명한지 찜찜한지 모르는 게 무지고요. 자명한 건 자명하고 찜찜한 건 찜찜한 줄 아는 게 반야입니다. 그럼 이런 분들은 입에서요 자명하지 않은 말 안 해요. 자 이런 보살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자명한 말만 해요. 이걸 우리가 뭐라고 그래요. “개념이 있다” 그래요. 개념이 있고요. 보시, 남의 입장을 잘 헤아릴 줄 알고요. 그 헤아린 걸 잘 수용할 줄도 알아요. 그러니까 진심으로 수용해 주고요. 조화를 추구하면서 선을 넘지 않아요. 교묘하게 선 넘을 듯 하다가도 안 넘어요. 상대방이 선을 지켜주는 사람이란 것만 알아도 여러분 안심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 양심에서 아무리 난관이 있어도 이런 양심적인 육바라밀. 이거 양심이거든요. 그대로 불교에서 양심을 보리심이라 그래요.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 보리심이거든요.
56:01
동양에서는 지혜와 사랑의 마음을 양심이라 그래요. 맹자가 양심이라고 했어요. 그 마음을 그래서 그 양심에서 최선을 다하는지? 늘 정신 차리고 있는지? 정신이 흐릿한지? 요거를 쭉 보시면요 육바라밀을 갖췄다는 게 요게 우리가 원하는 원만한 인격상입니다. 10바라밀은요 저 6바라밀을 써가지고 자유자재로 방편력까지 갖춘 존재를, 그 능력들을 말하는 건데 육바라밀이 토대입니다. 저 육바라밀이 동서남북 같은 거예요. 여러분 가족들한테 애들 가르치실 때 인성교육 강조하잖아요. 인성교육은 육바라밀이에요. 우리 아이가 남의 이익을 내 이익처럼 생각하는지? 또 자기 좋자고 남한테 부당한 짓을 하는지? 또 진실을 수용하는지? 그 친구가 항상 심적으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지? 힘들다고 금방 포기하는지? 그리고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는지? 이런 감정의
57:03
그런 탐진치나 감정의 앙금에서 빨리 빠져나오는지?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지? 그리고 항상 자명하고 찜찜한 걸 판단 잘하는지? 요 6가지로 날마다 자기 점검을 해 보시라고. 여기서 제가 어떻게 질문했냐면요 저 한 종목씩 물어봤을 때 4가지로 반응이 나올 수 있다고 봤어요. 자명이 자명함이 완전 자명, 아니면 완전 찜찜, 중간에 뭐가 있냐면요 자찜은요 자명이 더 큰 거, 찜자는 찜찜이 큰 거예요. 자 이걸 모든 거에 적용해 보세요. 여러분 이게 보살도예요. 실전보살도. 모든 일에 적용해 보세요. 오늘 뭐 가서 가족하고 또 만나겠죠. 가족하고 인간관계 맺고 또 친구랑 인간관계 때문에 만약에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상대방 입장을 내가 헤아려 보자. 상대방은 뭐가 좋고
58:01
뭘 원하고 있고 뭘 싫어하고 있는 걸까? 상대방 마음 배워보기. 상대방 입장에서 부당하다고 느낄 건 뭐고? 나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뭐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건가? 또 내가 지금 수용하지 못 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내가 인욕을 해 줘야 되는데 못 하고 있는 상대방의 뭐 처지나 상황은 없는가?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육바라밀로 풀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깨어 있는가? 저는 이런 거 질문할 때 이걸 제일 먼저 물어 보시라고 그래요. 일단 운전자가 깨어 있어야 되잖아요. 선정부터 물어보세요. 정신 차리고 5분 정도 몰라 하시고 이걸 하나씩 물어보신 다음에 마지막 반야로 가서 나의 판단은 자명한가? 내가 이렇게 판단해 가지고 말하고 행동했을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자명한가? 이렇게 하면 물어보시면 이게 화엄경에 뭐라고 나오나면요 “7지 보살은 한 생각에 10바라밀이 다 들어 있다” 그래요. 어디서 봐도 원만한 거예요. 보시 관점에서 봐도 원만하고. 남하고
59:04
나누고 있고. 지계 관점에서 봐도 내 한 생각이 계율을 어기지 않았고. 인욕, 인욕 관점에서 봐도 남들을 다 참아주고 있고. 정진 관점에서 봐도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 보리심 진여불성의 뜻을 구현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고. 선정, 깨어있고. 반야, 자명한 다르마에 근거해서 이렇게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라 그러죠. 올바른 견해로 올바르게 사유하고 있고. 이게 원만한지를 좌표가 있으면 알 수 있잖아요. 동서남북이 있으면 방위를 다 재듯이 육바라밀 있으면 다 잴 수 있습니다. 이 중에 분명히 하나라도 문제가 있으면 결과가 과보가 안 좋을 거예요. 자 절에서 이런 말 쉽게 합니다. “선을 지으면 복을 받고 악을 하면 벌 받습니다.” 근데 선악 판단 기준이 쉬운가요? 선악 판단할 수 있으면 이미 도인이에요. 중생들은 어떻게 해봐요. 아무거나
1:00:02
해봐요. 자기가 선인 줄 아는 걸 해봐요. 자꾸 복이 안 오고 화만 와요.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난 좋은 의도로 했는데 결과가 이상하다. 그럼 분석해야죠. 그 분석할 때 이 잣대가 있어야 됩니다. 이 잣대 없이 분석한다는 건요 정말 힘든 길을 가시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분석해 보시면 금방 나와요. “아 내가 뭘 빠뜨렸구나.” 그 빠뜨린 거 채워주면 원만해져요. 그러면 복이 지어지고 결과물이 좋습니다. 이건 바로 인과법으로 바로바로 인과법으로 실험할 수 있는 거기 때문에 사기 칠 수도 없어요. “저는 평생의 선만 했어요. 근데 이상하게 하늘이 저를 그 자꾸 더 역경으로 모시더라고요.” 뭔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셔야 돼요. 진짜로 뭐 내 전생업보가 커서 이번 생은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아직 복이 안 올 수도 있는 건데 아니면 반대로 선인 줄 알고 자꾸 잘못된 걸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이런 거 다 두루 검토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1:01:03
견물생심에서 시작했는데 견물생심이라는 걸 어떻게 대처하자고요? 3학으로. 운전자는 깨어서. 육바라밀로 내비게이션을 정확히 삼아서. 내가 어디 갈지 분석한 다음 지혜. 그다음 실천. 이대로 하세요. 이게 3학으로 보면 계정혜고 또 달리 보면 대승보살도로 보면 육바라밀입니다. 육바라밀 안에 다 있죠. 지금 결국 보세요. 지계 선정 반야가 3학이에요. 6바라밀은 3학의 확장판이에요. 3학에 몇 가지 항목을 더 확장해 가지고요 인간관계의 모든 데 가서도 다 잴 수 있게 해 놨어요. 육바라밀이 이걸 이게 신통한 겁니다. 그래서 그냥 깨어있기만 돈오(頓悟)만 잘해서는 안 돼요. 점수(漸修), 어디 가서도 중생들하고 수작할 수 있고 나와 남을 자리이타(自利利他), 나도 더 행복하게 탐진치로부터 자유롭게 상대방도 탐진치로부터 자유롭게 인도할 수 있는 이런
1:02:02
방편력이 있어야 되는데 이게 육바라밀에서 나와요. 그래서 견성을 하면 견성에서 지혜가 나오고요. 그 지혜가 뭐냐? 결국 육바라밀 잘하자는 거고요. 육바라밀로 문제를 풀어가는 거는 방편력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와 방편, 지혜와 자비가 원만한 보살도가 만들어집니다. 보살도의 핵심을 지금 제가 다 말씀드렸는데 제가 일부러 이 시간에 교재를 최대한 안 쓰고 한 이유가 이런 개념 빌리지 마시고 여러분 육근에서 지금 충분히 우리 육근에서 그 사고를 해보시라고. 지금 육근에서 설명된 얘기죠. 육근에서 경험하는 탐진치를 6바라밀로 깨어서 몰라 하면서 “깨어서 육근의 중심, 무상(無常)하고 고(苦)고 무아(無我)인 육근을 내려놓고 나니까 알아차리는 순수의식만 남으니까 요 자리가 부처구나” 하고 이 자리에 초점을 두고 다시 여기서 지혜와 능력을 끌어내 가지고 지혜와 자비를 끌어내서
1:03:01
육바라밀로 내 우주를 멋지게 창조해 내겠다는 거. 이게 보살도입니다. 아라한은 왜 육바라밀 얘기를 적극적으로 안 하느냐? 해탈해야 되니까. 사라져야 되니까. “미안한데 난 남은 생이 이번 생이 마지막이야” 이런 분하고 뭘 얘기하겠어요. 잘 가시라고 해야지. 곱게 가시라고 하고 보살들은 달라요. 이번 생 세세생생 다음 생 준비해야 돼요. 보살도는 게임 하는 애들 마음이랑 똑같아야 돼요. 원래 이번 한 생이 한판이에요. 게임 한판. 한판에 어디까지 렙업하실지 생각하셔야 되고, 아이템 모으셔야 되고, 경험치 쌓으셔야 돼요. 애들이랑 얘기해 보세요. 지금 다 잘 알 거예요. 한판 한판 한판 쌓여서 계속 렙업해 가면서 보살도를 닦아서, 무량한 보살도를 닦아서, 또 보살도에서 렙업 하려면 중생 구제를 안 하고는 안 돼요. 나만 도 닦아선 안 돼요. 왜냐? 왜냐하면요 여러분 가족도 여러분 우주에 들어와
1:04:01
있는 존재죠. 여러분이 책임져야 돼요. 여러분 우주의 주인공은 여러분이고 여러분 우주에 들어온 존재들에 대해서 여러분은 방치할 수가 없습니다. 길가의 쓰레기도 왜 주워야 되냐면 내 우주에서 지금 버려져 있거든요. 내 우주의 버려져 있으니까 또 내 책임이기도 한 거예요. 지나친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이 정도 의식으로 살아가셔야, 꼭 그걸 줍고 안 줍고 간에 일체유심조니까 이 모든 게 일체가 내 우주다 하는 거 알고 사셔야 돼요. 여러분 우리 모두의 우주에서 주인공은요 각자의 알아차리는 자리에요. 육근을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가 어디 있나요? 그 자리가 여러분 우주의 중심입니다. 거기서 우주가 나왔어요. 그래서 일체유심조예요. 여러분 그 알아차리는 의식도 여러분 마음이거든요. 여러분 마음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마음이 알아차리는 마음이에요. 그 마음자리 항상 알아차리시면서 사시는 게 진짜 보살도입니다. 일단 하나 끝냈습니다.
1:05:02
여기까지 이야기는 하나 끝냈어요. 제가 5분 쉬고 나서는 요 교재 가지고 한번 우리가 나눴던 얘기 한 번씩 찾아보고 경전적 근거도 한번 찾아볼게요.
1:05:13
[출처] (녹취) [원각사 초청강연] 진여와 열반 특강- 견성의 핵심, 청정 광명심 1강(0:05-1:05:13)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