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신학교 1편
자료: 가톨릭 대사전
파리 외방전교회가 1808년 말라카(Malacca) 해협 북부에 있는 페낭섬의 품라우티쿠스(PuIauTikus)에 세운 신학교. 설립 이래 아시아 지역 사세 양성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665년 시암(Siam, 현 태국)에 세워진 신학교의 후신으로, 박해로 지역 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중국과 조선 등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신학 교육을 받은 곳이다. 1970년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현지 교구로 운영권이 이관되었으며, 1984년에는 풀라우티쿠스에 서 현재의 위치인 마리오필(Mariophile)로 이진하였다.
〔설립과 변화〕1658년에 설립 뒤 파리 외방전교회는 현시인 성직자 양성을 주된 목표로 하였다. 고래서 코친차이나(Cochinchina) 대목 랑베르 드 라 모트(P. Lambert de la Mottc, 1624-1679) 주교와 통킹 (Tongking) 대목 팔뤼 (R Pallu, 1626-1684) 주교는 1665년 시암의 수도 아유티아(Ayuthia) 에 신학교롤 설립하고 현지인 사제 양성에 착수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시안을 비롯하여 중국, 코친차이나, 인도, 일본 등 여러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공부하였고. 학교 이름도, 천사들의 신학교’ Crhe Se
minary of the Holy Angels) 에서 점차 오늘날과 갖은, 종합학교' (College General)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교황청에 등재된 이 학교의 공식 명칭은 성 요셉 가톨릭 대신학교. (St. Joseph’s Catholic Major Seminary) 였다.
신학교가 설립된 지 100년이 되던 1765년,버마(현, 미얀마)인들이 시안 왕국을 침공하였다. 이 전쟁은 1767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아유티아를 점령한 버마인들은 성당을 공격하고 선교사와 신자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1767년 아르토(J.-B. Artaud, ?~1769) 신부는 신학생들을 이끌고 캄보디아 국경에서 가까운 시암의 항구 도시 찬타부리 (Chanthahuri)로 피신하였다가 몇 달 후 다시 캄보디아의 혼다트(Hondai)로 옮겼다.
하지만 그곳 역시 안전하지 못하였다. 아르토 신부는 1767년 말경 이곳을 지나던 시암 왕자를 숨겨 주었다는 의혹 때문에 이듬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769년에는 중국과 캄보디아의 해적들이 여러 차례 학교를 약탈하고 학생들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결국, 신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좀 더 안전한 장소로 피신해야 하였고, 1770년 발라카를 거쳐 인도 남동부 해안에 있는 풍디셰리(Pondicherry)로 학교를 이전하였다. 풍디세리는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신학생들을 파견하는 중국. 인도차이나 동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으며. 기후도 학생들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시암이나 인도차이나의 다른 지역으로 학교를 옮기 고자 하였고,결국 1782년에 적당한 장소가 구해질 때까지 신학교를 일시 폐교하기로 하였다.
신학교의 재건 필요성은 1790년대에 대두되었다. 그리나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파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마카오(Macao)의 경리 책임자였던 르통달 (C.-F. Lctondal, 1753-1813) 신부가 그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재원 마련을 위해 필리핀과 멕시코 등지를 순방하였으며, 1803년 마카오로 돌아온 후에는 스페인의 영향 하에 있던 마닐라(Manila) 에 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측에서 협력에 대한 대가를 요구함에 따라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1804년에야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페낭에 신학교가 세워질 수 있었다.
1807년 12월. 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롤리비에 (M. Lolivicr,1764-1833) 신부가 페낭에 도착하면서 이듬해에 조지 타운(George Town) 내의 풀라우티쿠스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개교 당시 2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페낭 신학교는 점차 학생수가 증가하여 1855년에는 128명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1848년 이후 수학, 지리, 교회사. 측량, 물리, 한문 등이 추가되면서 교육 내용도 풍부해졌다. 교육 과정도 체계가 잡혀 1856년 페낭 신학교에는 라틴어, 수사학, 철학, 신학 과정이 개설되어 있었고. 각 과정은 학생들의 학습 능력과 진도에 따라 다시 몇 개의 반으로 나뉘어 운영 되였다. 그러나 점차 각 교구에 신학교들이 설립되면서 페낭 신학교의 학생 수는 감소하게 되었고. 1892년에는 67명으로 즐어 들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진(1914~1918) 때에는 전쟁으로 인해 신학교가 폐쇄된 지역의 학생들이 입학하면서 일시 증가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때에는 사정이 달랐다. 1941년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점령하자, 신학생과 교수들은 신학교 별장이 있는 마리오필로 피신하였고, 1945년 2월에는 일본 해군이 마리오필에 주둔함에 따라 이곳에서도 떠나야만 하였다. 종전과 함께 다시 개교하였지만, 1950〜1960년대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 미얀마, 태국 등지에 신학교가 생기고, 또 공산화된 지역에서의 박해 때문에 학생 수는 계속 줄었다. 그 와중에 페낭 신학교는 1965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와 제휴를 맺어, 시험에 통과된 학생들은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U962~1965) 이후 페낭 신학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영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로마에서 공부한 말레이시아와 태국인 교수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최초로 아시아인 교장이 탄생하면서 학교의 운영권도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현지 교구로 이관되었다.
아울러 1975년 이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출신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1983년 싱가포르에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페낭 신학교는 이제 말레이반도에 있는 세 교구만의 신학교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 수에 비해 풀라우티쿠스에 있는 건물이 너무 크고 낡았기 때문에, 1984년 1윌에는 장소도 헌재의 위치인 마리오필로 이전하였다.
[페낭 신학교와 한국 교회〕페낭 신학교가 한국 교회의 성직자 양성과 관련을 맺은 것은 ]855년 6월 이만돌 (바울리노). 김 요한, 임 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이 페낭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1854년 3월 조선을 출발,5월 19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홍콩 경리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1년 정도 머문 후 이듬해 6월 12일 페낭 신학교에 도착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만돌은 1년 만인 1856년 10월에 페낭을 떠나 홍콩으로 갔다가 1861년 4월 조선으로 귀국하였고, 나머지 2명은 신학교의 전 과정을 마치고 1862년 2월에 페낭을 떠나 1863년 6월에 귀국하였다,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도 페낭 신학교와 관계가 있다. 즉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 Imbert, 范世亨〉주교는 1821년 3월 페낭에 도착한 후 신학교에서 몇 달 동안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고,샤스탕(J.H. Chaste, 鄭牙各伯) 신부는 1828년부터 4년 동안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후에 초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브뤼기에르(B. Brugui산e,蘇) 주교는 1829년 주교로 축성된 뒤 페낭 섬에서 1831년까지 사목을 하였다.
페낭 신학교에 다시 조선 학생들이 파견된 것은 1882년의 일이었다. 즉 1876년 일본과의 수호 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블랑(G.-M.-J. Bkrnc,
白圭三) 주교는 신학생 파견을 재개하기로 하고.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이내수(李迥秀. 아우구스티노)등 7명을 페낭 신학교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1881년에 일본의 나가사키(長畸)로 보내져 예비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이이 홍콩으로 보내졌다가 싱가포르를 거쳐 1882년 페낭에 도착하였다. 이후 조신 신학생의 페낭 유학은
1884년까지 지속되어 1882〜1884년에 페낭으로 보내진 유학생은 총 22명이었다.
그러나 기후가 달랐기 때문에 신학생들은 풍토병으로 심한 고생을 하였다. 이에 1884년부터 학생들이 귀국하기 시작하였고, 1892년에는 뮈텔(G.-C.-M. Mutel閔德孝) 주교의 소환령에 따라 모든 유학생들이 조선으로 돌아왔다. 물론 신학생들이 귀국하게 된 이유에는 한국에 신학교가 설립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신학생들은 1885년 여주 부엉골에 세워졌다가 1887년 이전한 예수 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한 것이다. 그리고 페낭 유학생 중 강성삼,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한가근(韓基根, 바오로),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이내수,김 원영(金元永 . 아우구스티노). 홍병철(洪采喆,루가), 이종국(李鍊國,바오로〉,김문옥(金紋玉, 요셉), 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 등 11명이 1896~1900년에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편 개항 이후에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 중 빌렘 (N. Wilhelm. 洪錫九) 신부는 1883~1888년까지 페낭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고, 우도(P. Oudot
吳保祿) 신부는 1888-1890년까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뮈텔 주교는 1890년 말 제8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오던 중 며칠 동안 페낭 신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따라서 빌렘 신부와 우도 신부는 페낭에서 조선 신학생들을 직접 가르쳤고, 뮈텔 주교도 그곳에서 유학 중이던 조선 신학생들을 만나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리보(A.J.Larribeau, 元亨根) 주교, 폴리(J.PoHy), 조제 U.Jaugey,楊秀春〉신부는 1907년에 페낭 신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조선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이다.
현재 폐낭 신학교에는 조선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앵베르 주교 .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부, 샤스탕 신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으며 신학교 교정에는 페낭 신학교의 교수를 역임한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페낭 신학교 1편
자료: 순교자의 땅 (오영환.박정자 지음. 가톨릭 출판사)
말레이시아(MALAYSIA 馬來西亞) 페낭신학교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입헌군주제를 택한 연방제 국가로,말레이 반도 남부와 보르네오섬 북안(北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레이계,중국계,인도계,원주민인 오랑 아슬리(Orang Asli), 중국인과 말레이인의 혼혈 인종인 페라나칸인,그리고 유럽계의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다. 아름다운 해변과 크고 작은 섬들과 정글로 뒤덮인 산악 지대와 휴양지가 공존하는 이곳 말레이 반도 남부에 15세기에 말라카 왕국이 세워졌고,18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의해 점령되었으며,19세기에는 영국의 지배를 받는 등 20세기 초까지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말레이시아의 이해
-. 말레이시아의 역사
말레이시아는 입지 조건상 해로가 넓게 개방되어 있어 주변국들로부터 접근이 쉬웠기 때문에 서쪽에서는 힌두교와 불교의 인도,이슬람교의 중동 그리스도교의 유럽,동쪽과 북쪽에서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이웃 국가들,중국,일본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 다층적인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5,6 세기 인도로부터 유입된 힌두교와 불교 문화가 말레이시아의 역사를 지배했는데,이는 수마트라를 기반으로 한 스리비자야 제국 시기에 정점에 달하였다 7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는 스리비자야 시기에 수마트라,자바,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일부가 그 영향권으로 편입되었다.
이슬람 세력은 10세기경에 이미 말레이시아 근해를 항해하고 교역을 시작했으나,14~15세기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말레이 반도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15세기에는 다수의 술탄국이 현 말레이시아 지역에 존재하게 되었는데,그 중 가장 힘 있는 국가는 말라카 술탄국이었다. 이 시기부터 말레이시아 지역에 정착된 이슬람 문화는 말레이인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으며,이 영향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말라카 해협 (Straits of Malacca) 을 중심으로 13세기까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한 말레이시아는 식민 열강들이 향료가 풍부한 말라카에 침범하기 시작하면서 외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인들이 1511년에 말라카를 접수함으로써 처음으로 이 지역에 세력권을 형성하였고,이후에 네덜란드의 말라카 점령을 거쳐 18세기 영국이 지금의 코타 키나발루(Kota Kinabalu), 쿠칭(Kuching), 페낭(Penang)을 점령하면서 말레이시아 지역은 20세기 초까지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바다 건너 보루네오 섬에 있는 사라왁 주는 1841년 이후 영국 모험가인 제임스 브룩(James Brooke)과 후손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1888년 사라왁주와 북 보루네오(추후 사바로 개칭됨)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57년 8월 31일 말라야 연방(Malayan Union)이 대영 세국에서 독립하였다. 사바 주,사라왁 주는 싱가포르와 함께 1963년 9월 16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현재의 말레이시아 연방을 성립하였다
2년 후인 1965년 8월 9일에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하여분리,독립하였다.
-. 지리
말레이시아는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크게 말레이 반도의 서 말레이시아,보로네오 섬 북부의 동 발레이시아 두 부분으로 나뉜다.
국토는 329,758km²로, 3/4이 민림 및 습지대로 구성된다.
서 말레이시아 또는 말레이 반도는 북쪽으로는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남쪽으로는 싱가포르가 조호르의 다리로 연결되어있다. 이 지역은 11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동 말레이시아는 보르네오 섬(Pulau Borneo)의 북쪽을 차지하고 있으며,인도네시아와 브루나이와 내륙 국경을 접하고 있다.
-. 인구
말레이시아의 인구는 약 2,800만 명으로 인구의 60% 이상이 말레이 반도에 살고 있다. 다민족 국가인 말레이시아는 여러 종교를 축으로 각각의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인 부미푸트라(Bumiputra)가 인구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으며,기본적으로 이슬람교에 기반을 둔 계율을 따른다. 중국계가 약 25%, 인디아계가 약 8%로 전통 가옥에 살면서 각 부족들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독특한 전통 문화를 지키고 보존 하고 있다. 원주민들인 오랑 아슬리(Orang Asli)들을 포함한 기타가 약 10% 정도이다.
중국인과 말레이인의 혼혈 인종인 페라나칸인(Peranakan), 그리고 유럽계의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다. 유럽계는 주로 포르투갈,네덜란드, 영국의 후손들이며 대부분 말라카에 있는 주거 지역 내에 살고 있다.
-. 언어
말레이시아의 공용어는 말레이어 (Bahasa Melayu, Bahasa Malaysia)이며, 영어가 널리 통용된다 중국어,타밀어,아랍어, 이반어(사라왁의 원주민인 이반족의 언어)도 사용된다. 말레이시아는 적어도 70여 개의 다른 어족(語族)에서 생성된 다양한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국어인 바하사 멜라유(Bahasa Melayu) 외에 영어는 말레이시아의 공용어로서 상업과 공업에서 널리 쓰이며,말레이시아 학생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어 교육을 받는다
-. 종교
말레이시아의 국교는 이슬람교이지만,실제로는 여러 종교가 혼재하는 다종교 국가이다 일반적인 종교는 이슬람교,불교,도교,힌두교,그리고 그리스도교 등이 있다. 전체 국민의 60.4%가 무슬림(수니파, 시아파 전부)이며,불교 신자가 19.2%, 힌두교 신자가 6.3%, 그리스도교인이 9.1%(이 가운데 대부분은 동 말레이시아에 거주)를 차지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이슬람교가 국교이며,종교의 자유는 허용되지만 국민, 특히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활동은 할 수 없다. 각 민족은 여러 종교를 축으로 각각의 국민성을 지니고 있으며,전통 가옥에 살면서 각 부족들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독특한 전통 문화를 지키고 보존하고 있다. 각각의 지역 사회를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말레이시아만의 조화로운 공존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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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카 Malacca
말레이 반도의 남서부 말라카 해협에 면한 말라카 주(州)의 주도(州都)로 말라카 강《江) 어귀에 있으며, 강의 좌안에 세인트폴 언덕이 솟아 있다. 말라카 해협 해상교통상 요충이며, 동남 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도시이다.
원래는 한촌에 불과하였으나 1 4 세기에 수마트라 섬에서 온 파라메스바라가 이곳을 중심으로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였으며,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동서 무역의 중계지로 번창하였다. 151 1년 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아시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로 만들어 향료 무역의 독점과 그리스도교의 선교 기지로 삼았다. 그 후 1641년 네덜란드가 빼앗아 해협을 지배하였고, 1824년 영국의 소유가 되었다.
이러한 각국의 쟁탈사는 결과적으로 말라카에 많은사적을 남겼는데,세인트폴 언덕의 유적을 비롯하여 세인트존 언덕의 성채가 그것이며, 이밖에 박물관도 있다. 근세에 와서는 화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싱가포르에 밀려 연안 무역항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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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
말레이시아는 적도와 가까워서 4계절이 없고 우기와 건기가 있는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에 속한다. 열대 지역에 속하는 말레이시아의 기후는 연중 고온 다습한 편이다.
연평균 기온이 21껏〜32꼇,연평균 강우량 2,000mni~2,500n皿,평균 습도는 63%〜80%이다. 건기와 우기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으며, 우기라도 일시적인 열대성 소나기의 횟수가 증가하는 것이므로 여행에는불편함이 없다.
페낭의 위치는 적도 근처에 있고,이는 날씨가 열대 기후에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기온은 따뜻하고 1년 내내 다소 안정적이다 온도 범위는 밤에 평균 22X?로 낮고 낮에는 32*0 정도이다. 습도는 90% 정도로 높게 지속된다.
페낭에는 뚜렷한 계절이 없고 연평균 강수량은 2 20 〜2 50 cm이다.
강우는 1 년에 걸쳐 내리며 9 월부터 1 1 월에 대체로 가장 많이 내린다.
1. 초기 한국 신학생들의 성소의 여정
페낭 섬(Penang Island)은 페낭 주의 일부이다. 말레이 반도의 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은 18세기 말까지는 반도 쪽 케냐의 술탄 영이었는데,말라카 해협의 북쪽 입구를 제한하는 전략적 요지를 위해 1786년 영국동인도회사 선장 프란시스 라이트에 의해 점거되어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다. ‘동양의 진주’로 불리며,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특히 동서 문화의 합류 지점이었던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식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다.
2. 낭의 천주교 전래
천주교는포르투갈의 식민지 때 전래되었는데,이때는 이미 이슬람교가 정착한 후였다 1511년 최초의 사제들이 말라야의 말라카에 도착하여 주로 포르투갈 주둔군과 상인들,그들과 말레이인들의 혼혈아들을 위한 교회를 세웠다.
그 후 以57년에 말라카는 포르투갈의 보호권(Padroado) 아래 있는 교구가 되었지만,1641년에
말라카를 점령한 네덜란드에 의해 70년 동안 반 가톨릭 법규가 시행됨으로써 교회는 침체되고말았다.
그러나 1702년에 인도 고아(Goa)에서 온 사제에의해 성당이 건축되고 신앙생활이 계속 유지되던 중, 태국에서 발생한 박해로 방콕에서 쫓겨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 두 명이 이곳에 와서 1782년부터 설교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1807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르통달(Letondal,1753-1813) 신부가 페낭에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3. 파리 외방전교회의 페낭 신학교
-. 1665년 아유티아(Ayuthia)에 신학교 설립
1658년에 설립된 파리 외방전교회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주된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코친
차이나 대목 랑베르 드 라 모트주교와 통킹 대목 팔뤼 주교는 1665년 샴(현 태국)의 수도 아유
티아에 ‘천사들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현지인 사제 양성에 착수하였다.
-. 1765년 찬타부리(Chanthaburi)로 이전
신학교가 설립된 지 100년이 되던 1765년,버마(현 미얀마)인들이 샴 왕국을 침공하였다. 아
유티아를 정령한 버마인들은 성당을 공격하고 선교사와 신자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1767년 아르토(J.B. Artaud, ?~1769) 신부는 신학생들을 이끌고 캄보디아 국경에서 가까운
샴의 항구 도시 찬타부리로 피신하였다가 몇 달 후 다시 코친차이나의 혼다트로 옮겼다.
-. 1767년 혼다트(Hondat)로 이전
하지만 혼다트 역시 안전하지 못하였다 아르토신부는 1767년 말경 이곳을 지나던 샴 왕자를 숨겨 주었다는 의혹 때문에 이듬해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769년에는 중국과 캄보디아의 해적들이 여러 차례 학교를 약탈하고 학생들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결국 1770년 인도 남동부 해안에 있는 풍디셰리로 학교를 이전하고 성 요셉 신학교’로 개칭하였다.
-. 1770년 폼디세리(Pondicherry)로 이전
풍디셰리는 신학생들을 파견하는 중국 • 인도차이나 등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으며, 기후도 학생들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결국 1782년에 적당한 장소가 구해질 때까지 신학교를 일시 폐교하기로 하였다.
-. 1783년 신학교 일시 폐교
신학교의 재건 필요성은 1790년대에 대두되었다. 마카오의 경리 책임자였던 르통달 신부는 스페인의 영향 하에 있던 마닐라에 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측에서 협력에 대한 대가를 요구함에 따라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1804년에야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페낭에 신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 1808년 페낭 신학교 설립
1807년 12월 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롤리비에(M.Lolivier, 1764니833) 신부가 페낭에
도착하면서 이듬해에 조지타운(George Town)내의 풀라우 티쿠스(Puhu Tikus)에 신학교가 설
립되었다.
조선의 신학생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던곳도 바로 이 신학교이다. 1855년 이만돌을 비롯한 조선 신학생 3명이 입학하였고, 1882~1884년 몇 차례에 걸쳐 조선 신학생 21명이 입학하였다. 1970년에는 신학교 운영 일체가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현지 성직자들에게 이관되었으며,말레이시아 ‘교구 신학교’로 개칭하였다
-. 1984년 페낭 신학교 이전
1984년에는 풀라우 티쿠스에서 현재 위치인 페낭의 마리오필로 이전하였다. 구 신학교 건물이 목조 건물이라 흰개미로 인한 파손이 심해 유지 보수가 힘들어 1984년에 매각하여 매각된 대금으로 동말레이시아,싱가포르,버마,태국과 현재 페낭 신학교 등 5개국에 신학교를 건립하였다. 현재 구 신학교 터에는 대형 쇼핑몰 거니 플라자(Gurney Plaza)가 있다.
-. 1770년 폼디세리(Pondicherry)로 이전
풍디셰리는 신학생들을 파견하는 중국, 인도차이나 등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으며,기후도 학생들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결국 1782년에 적당한 장소가 구해질 때까지 신학교를 일시 폐교하기로 하였다.
-. 1783년 신학교 일시 폐교
신학교의 재건 필요성은 1790년대에 대두되었다. 마카오의 경리 책임자였던 르통달 신부는 스페인의 영향 하에 있던 마닐라에 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측에서 협력에 대한 대가를 요구함에 따라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1804년에야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페낭에 신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 1808년 페낭 신학교 설립
1807년 12월 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롤리비에(M.Lolivier, 1764니833) 신부가 페낭에
도착하면서 이듬해에 조지타운(George Town)내의 풀라우 티쿠스(Puhu Tikus)에 신학교가 설
립되었다. 조선의 신학생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교육 받았던 곳도 바로 이 신학교이다. 1855년 이만돌을 비롯한 조선 신학생 3명이 입학하였고, 1882~1884년 몇 차례에 걸쳐 조선 신학생 21명이 입학하였다. 1970년에는 신학교 운영 일체가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현지 성직자들에게 이관되었으며, 말레이시아 ‘교구 신학교’로 개칭하였다.
-. 1984년 페낭 신학교 이전
1984년에는 풀라우 티쿠스에서 현재 위치인 페낭의 마리오필로 이전하였다. 구 신학교 건물이 목조 건물이라 흰개미로 인한 파손이 심해 유지 보수가 힘들어 1984년에 매각하여 매각된 대금으로 동말레이시아,싱가포르,버마,태국과 현재 페낭 신학교 등 5개국에 신학교를 건립하였다. 현재 구 신학교 터에는 대형 쇼핑 몰 거니 플라자(Gurney Plaza)가 있다.
4. 페낭 신학교College General in Penang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1808년 페낭에 세운 신학교로 박해받는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신학 교육을 받은 곳이다. 김대건 신부 이후 조선 신학생 24명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위치 Jalan Cengai, Tanjung Tokong, 11200
Tanjong Bungah, Plau Penang, Malaysia
전화 +6_-890 2002
홈피 http://www.collegegeneral.org
페낭 신학교의 어제와 오늘 폐교한지 25년만인 1808년에 부활된 페낭 신학교는 페낭의 풀라우 티쿠스(Pulau Tikus)에 정착하게 되었다. 현재의 페낭 신학교(College General)는 페낭 섬의 북쪽 해안 언덕에 새 교사를 신축하고 1984년에 이전한 마리오필(Mariophile)의 신학교다. 탄중 붕가(TanjungBungah) 지역의 잘란 센가이(Jalan Cengai) 골목에 있다.
1665년 샴에 세워진 신학교의 후신으로,박해 때문에 지역 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중국과 조선 등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학생들이 신학 교육을 받은 곳이다. 개교 당시 20 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페낭 신학교는 점차 학생 수가 증가하여 1855년에는 128명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점차 각 교구에 신학교들이 설립되면서 페낭 신학교의 학생 수는 감소하게 되었고, 1892년에는 67명으로 줄어들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때에는 전쟁으로 인해 신학교가 폐쇄된 지역의 학생들이 입학하면서 일시 증가하기도 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1939니945) 때에는 사정이 달랐다.
1941년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점령하자, 신학생과 교수들은 신학교 별장이 있는 마리오필로 피신하였고, 1945번 2월에는 일본 해군이 마리오필에 주둔함에 따라 이곳 에서도 떠나야만 하였다. 종전과 함께 신학교는 다시 개교하였지만, 1950~1960년대 캄보디아,베트남, 중국,미얀마, 태국 등지에 신학교가 생기고,또 공산화된 지역에서의 박해 때문에 학생 수는 계속 줄었다.
그 와중에 페낭 신학교는 1965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와 제휴를 맺어, 시험에 통과된 학생들은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페낭 신학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영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로마에서 공부한 말레이시아와 태국인 교수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최초로 아시아인 교장이 탄생하면서 학교의 운영권도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현지 교구로 이관되었다.
아울러 1975년 이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출신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1983년 싱가포르에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페낭 신학교는 이제 말레이 반도에 있는 세 교구만의 신학교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수에 비해 풀라우 티쿠스에 있는 건물이 너무 크고 낡았기 때문에, 1984년 1월에는 장소도 현재의 위치인 마리오필로 이전하였다.
-. 현재의 페낭 신학교
현재 마리오필 언덕으로 옮겨진 신학교 교정에는 인도양을 바라보고 있는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반갑게 한국 순례자들을 맞아 준다. 페낭 신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한 한국의 성인들이다.
그 앞 성인. 순교자 정원에는 페낭 신학교 출신 베트남 사제 성인 5명의 동상, 46명의 베트남 . 캄보디아 . 버마(미얀마) 순교자 명패 석이 안치되어 있다. 작은 신학교 성당, 성인의 유 해
가 담겨 있는 여러 성광과 성합 가운데는 한국 성인들인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샤스탕 신부,그리고 김채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성합도 있다.
페낭 유학생으로 사제가 된 11명 중 4명이 사십을 넘기지 못하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들이 지낸 페낭 신학교, 지금 그 장소는 옮겨지고 신학생 기숙사도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조선 신학생들의 애환과 열정이 담겨 있다.
2011년 9월 현재 페낭 신학교에는 8명이 재학하고 있다고 한다. 철학부에 들어가기 전에 영어 수업만 받는 1년 과정에 2명, 2년 과정의 철학부에 5 명, 철학부 종료 후 과정에 1명이 재학하고 있다. 철학부 이후 4년 과정의 신학부는 2004년 싱가포르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5명이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학생만 입학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을 확보하지 못해 현재 교황청에 다른 나라 학생들도 입학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학생 수 감소로 교내 기숙사 3동 중 2동은 Sri Perita School에 임대하고, 한 등만 사용하고 있다.
2011년 9월 현재 페낭 신학교는 교장(Rector)Gerard Theraviam 신부와 학장(Dean of Studies) Julian Leow 신부가 책임을 맡고 운영하고 있다.
페낭 신학교와 한국 신학생
- 1기 신학생 3명 유학
페낭 신학교가 한국 교회의 성직자 양성과 관련을 맺은 것은 1855년 6월 이만돌(바울리노),김 요한, 임 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이 페낭에 도착하면서부터 이다.
이들은 1854년 3월 조선을 출발, 5월 19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홍콩경리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1년 정도 머문 후 이듬해 6월 12일 페낭 신학교에 도착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만돌은 1년 만인 1856년 10월에 페낭을 떠나 홍콩으로 왔다가 1861 년 4월7일에 랑드르(J. M. P. E. Landre, 洪,1828-1863), 조안느(P. M.Joanno, 吳,
1832~1863), 리 델(F. C. Ridel, 李福明,1830-1884)칼레 (A. N. Calais, 姜,1833~1884)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귀국하였고,나머지 2명은 신학교의 전 과정을 마치고 1862년 2월에 페낭을 떠나 1863년 6월 23일에 오메트르(P.Aumaitre, 吳, 1837시866) 신부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 후 이들은 충청도 배론 골짜기에 설립되어 있던 ‘성 요셉 신학교’에서 기쁨의 상봉을 했지만, 아쉽게도 김 요한은 얼마 안 되어 신학교를 떠나고 말았다 1864년 말,배론 신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교구장 베르뇌(장경일 시메온) 주교가 임 빈첸시오에게 소품(小品)을, 이 바울리노에게는
삭발례를 준 것이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스승 신부들은 체포되어 순교하고, 신학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 신학교 생활
페낭 신학교 안에서는 일상생활이나 수업이 모두 라틴어로 이루어졌기에 언어가 제 각각 이었지만 별 무리가 없었다. 조선 신학생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언어가 아니라 낯선 풍토와 음식이었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조선을 떠난 뒤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연장자 이만돌(바울리뇌이 열대 섬 특유의 풍토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만 것이다.
홍콩의 루세이유(Rousseilk) 신부도 진작부터 바울리노의 병약함을 걱정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페낭에서 온 전갈을 받고는 즉시 바울리노를 홍콩으로 데려오도록 하였고, 그곳에서 요양을 하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바울리노는 풀라우 티쿠스에 있는 페낭 신학교에 도착한 지 정확히 1년 만인 1856년 10월 12 일에 그곳을 떠나 홍콩으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그러나 바울리노의 홍콩 귀환이 별리의 슬픔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 한참 공부에 열중하던 바울리노는 1857년 3월 30일에 제주에서 풍랑을 만나 광동 앞 바다까지 떠내려갔다가 영국 배에 구조되어 온 김기량을 만났고, 그가 1857년 5월 31일에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 통영에서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제주의 유일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 1기 신학생들의 학생 명부와 성적
1855년 6월 입학한 이만돌(바울리노),김 요한,임 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의 학생 명부와 이들의 성적표를 2011년 8월 페낭 신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교 측의 배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이 지났고 또 보관장소인 박물관이 수리 중이라 자료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페낭 신학교 교장(Rector) Gerard Theraviam 신부의 배려와학장 (Dean of Studies) Julian Leow 신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50년 전 우리 신학생들의 자료를 살펴볼 수있었다.
-. 1기 신학생들의 성적표
김 (요한)
신앙심 : 보통, 성격 : 좋음
행실 : 좋음, 재능 : 평균 수준
학업 : 매우 만족스러움
건강:…하는 경향 있음
이 (바울리노)
신앙심 : 보통,성격 : 아주 좋음,꾸임없음
행실 : 좋음, 재능 : 평균에 가까움
학업 : 매우 만족스러움
건강 : 매우 …함
임 (빈첸시오》
신앙심: 보통,성격: 좋음
행실 : 좋음,재능 : 평균보다 약간 나음
학업 : 매우 만족스러움
건강: 좋음.
(점선은 글씨 확인이 어려운 부분임)
-. 2기 신학생들의 유학
페낭 신학교에 다시 조선 학생들이 파견된 것은 1882년의 일이었다. 즉 1876년 일본과 의 수호 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블랑(Bhnc,白圭三) 주교는 신학생 파견을 재개하기로 하고,이내수(李내秀, 아우구스티노,1862니900)와 강성삼(姜聖參,라우렌시오,1866니903) 등 7명을 페낭 신학교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18 81년에 일본의 나가사키로 보내져 그 곳에서 코스트 신부로부터 1년간 지도를 받은 후 1882년 페낭 신학교를 향해 떠났다. 이를 시작으로 188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모두 21명의 신학생들이 페낭 신학교에 입학 하였다.
조선 신학생들은 “(신학교) 장상들의 헌신적인 가르침에 아주 잘 순종하고 있다.”는 좋은 평 가를 받기도 했지만, 언어 문제,음식 및 풍토에 대한 적응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 2기 신학생들의 귀국
그로 인해 1884년 12월 한기근(韓基根,바오로, 1867/1868-1939), 이내수, 전 안드레아가 2년만에 페낭 신학교를 떠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 블랑 주교는 1884년을 끝으로 페낭으로의 신학생 파견을 중지하고 국내에서의 신학생 양성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885년 국내에 신학교가 설립되어 체계적인 신학생 양성이 가능해짐에 따라 페낭으로 신학생을 파견할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1892년 6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소환령에 따라 페낭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신학생들이 귀국을 위해 신학교를 떠남 으로써 페낭 신학교 유학은 끝을 맺었다.
귀국한 신학생들은 1885년 여주 부엉골에 세워졌다가 1887년 이전한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페낭 유학생 중 강성삼, 강도영(姜道永,마르코), 정규하(鄭圭夏,아우구스티노),한기근(韓基根, 바오로). 김성학(金聖學,알렉시오),이내수. 김원영(金元永,아우구스티노),홍병철(洪秉喆루가),이종국(李鍾國, 바오로),김문옥(金紋玉요셉),김승연(金承淵,아우구스티노) 등 11명이 1896〜1900년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 선교사와 페낭 신학교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도 페낭 신학교와 관계가 있다.
즉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주교는 1821년 3월 페낭에 도착한 후 신학교에서 몇 달 동안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고,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는 1828년부터 4년 동안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후에 초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브뤼기에르(Brugui흔re, 蘚) 주교는 1829년 주교로 축성된 뒤 페낭 섬에서 1831년까지 사목을 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에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 중 빌렘(N.Wiihdm. 洪錫九) 신부는 1883~888년까지 페낭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고,우도(Oudot. 吳保祿) 신부는 1888〜1890년까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뮈텔 주교는 1890년 말 제8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오던 중 며칠 동안 페낭 신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따라서 빌렘 신부와 우도 신부는 페낭에서 조선 신학생들을 직접 가르쳤고, 뮈텔 주교도 그곳에서 유학 중이던 조선 신학생들을 만나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폴리(Polly)신부,조제(Jaugey,楊秀春)신부는
1907년에 페낭 신학교에서 사제품을 받은후 조선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이다.
현재 페낭 신학교에는 조선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앵베르 주교,모방(Maubant. 羅伯多祿),신부, 샤스탕 신부,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이유 해가 보관 되어 있으며,신학교교정에는 페낭 신학교의 교수를 역임한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구 페낭 신학교 모습
1808년 신학교가 부활되어 페낭에 정착할 당시에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던 신학교 건물은 현재 페낭 신학교에서 동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조지타운의 북서쪽 지역인 풀라우 티쿠스였다.
풀라우 티쿠스의 신학교 자리에는 지금 거니 플각자(Gurney Plaza)가있다.
옛 모습과 학교 규모는 남아 있는 사진으로만 추측될 뿐이다. 구 페낭 신학교 뒤편은 플라자 정면으로 페낭 섬 북쪽 해안 도로와 접해 있다 인도양의 바다와 열대 수목들,야자수가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건물이 너무 크고 낡았기 때문에 1984년 1월 현재의 위치인 마리오필로 이전하였다. 이곳에 게재된 구 페낭 신학교의 사진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성모 무염시태(성모의원죄 없으신 잉태) 성 당(Parish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Penang)의 Michael Cheah 신부가 제공한 것이다. Cheah 신부는 구 페낭 신학교 건물에서 3년간 수학하였으며,때문에 건물 배치도도 그의 구술에 의해 작성 하였다. 성모 무염시태 성당은 한국에서 순교한 샤스탕 성인이 페낭에서 사목할 때 4대 본당 주임으로 재임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