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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작동되는 원리
믿음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8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롬 10:8, 개정)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믿음은 크게 두 가지를 통하여 움직입니다.
그중의 하나는 우리들의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순히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세의 글을 통하여 믿음이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대하여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믿음의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믿음의 원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었고 또한 믿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원리가 처음 믿을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믿음 생활이 다하는 그날까지 적용될 것입니다.
이런 원리에 대하여 먼저 로마서 1장 17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롬 1:17, 개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옥스포드 원어대전 로마서 1장 17절 주석
『이런 점에서 볼 때 본문에 두 번 나오는‘믿음’이란 단어는 원어로는‘피스티스’로 동일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약간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앞에 나오는‘믿음으로(에크 피스테오스)’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만나 구주로 고백하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실은‘…으로(KJV, from)’에 해당하는 전치사 ‘에코’가 ‘∼로부터’란 의미를 지닌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즉 문맥적으로‘하나님과 인간이 바른 관계를 맺는 길’이란 의미로 사용된‘하나님의 의’는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뒤에 나오는 ‘믿음에 이르게(에이스 피스틴)’에서 믿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의 의’의 출발점으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앞서 나온 믿음과 달리 그 믿음의 결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짓는 성숙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는 ‘이르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가 목표나 결과를 나타내며 ‘∼에(KJV, to)’란 의미를 갖는다는 것에서도 잘 보여진다. 여기서 바로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된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신학적 체계가 세워졌다. ‘신(信)’은 본문에서 앞서 나온 ‘믿음’에 해당되고 ‘의(義)’는 뒤에 나오는‘믿음’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단어인 것이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 로마서1-8장』 서울: 제자원, 2006. p. 99.)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서신을 통하여 바른 믿음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믿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멈추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 4:14, 개정)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믿음의 고백)를 굳게 잡을지어다
믿는 고백을 멈추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는 내용인데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 10:38, 개정)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9, 개정)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예수를 영접하는 단계가 아닌 믿음 생활을 이어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또 다시 믿음을 활용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믿음 생활을 영위해 나아갈 때 믿음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필요성을 중요한 몇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믿음을 활용해야 할 필요성
1) 믿음을 활용해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란 책에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났어야 했는데 안 일어난 좋은 일이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나쁜 일들은 우리가 과거에 하나님의 계획을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미리 기도하게 되는 많은 것들을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에 계획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기름부음으로 기도를 할 때는 우리의 모국어로도 할 수 있고 방언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현재 당신의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은 사실 지난날에 당신이 기도했거나 기도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미래에 당신의 삶 가운데 일어날 일은 현재의 당신의 기도생활의 결과일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p.123.)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이런 가르침과 비슷한 말씀이 시편에 있습니다. 이미 우리들의 삶이 계획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 139:16, 개정)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 139:16, 새번역)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가르치는 또 다른 종들이 있습니다.
하늘 법정으로 가는 기도 (로버트 핸더슨)
https://cafe.daum.net/betterhope2017/gv0N/13
(케빈 제다이 『내가 응답하리라』 임은묵 옮김. 고양: 도서출판 예찬사, 2021. pp. 268-270.)
https://cafe.daum.net/betterhope2017/jLAV/8
https://cafe.daum.net/betterhope2017/jLAV/6
시간 관계상 이분들의 기록을 다 살필 수는 없지만 책들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방언기도를 힘써서 해야하겠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걷고 있을 때 성령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를 향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라”
2) 살아갈 때에 어려움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눅 8:22, 개정)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눅 8:23, 개정)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눅 8:24, 개정)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눅 8:25, 개정)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 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누가복음 8장 25절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말씀의 이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왜 내가 함께 하고 있는데도 두려워 했느냐?”는 의미로 이해하게 되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왜 믿음으로 버티지 못했느냐”는 의미가 됩니다. 그럴 때 이 말씀은 우리들이 믿음을 굳게 했어야 함을 의미하게 됩니다.
하지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너희는 왜 너희의 믿음을 활용하지 못했느냐”로 이해하게 된다면 이 말씀은 “주어진 믿음을 활용하라는 의미이므로 믿음을 사용하여 환경을 다스리라”하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과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맞을까요?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문을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옥스퍼드 원어대전과 카리스 주석에서 이 본문에 대한 원문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있느냐’로 번역된 ‘푸’는 의문사로서 ‘어디에?’라는 의미이며, 이는 마치 난리통에 잃어버린 물건의 존재 여부와 위치에 대하여 묻는 것과 같다. 이는 예수께서 삽시간에 덮친 재난으로 제자들이 순식간에 믿음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어조를 행간 속에서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옥스포드 원어대전)”
그러므로 원문의 의미를 포함하여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자면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활용했어야 하는데 그 믿음을 어디에(장소) 두었기에 믿음을 활용하지 않았느냐?”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들이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이 계셨으니 믿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은 오늘 본문과 같은 병행구절들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8장, 마가복음 4장에도 나오는데 두 곳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그 이후 예수님께서 바람과 풍랑을 꾸짖으시고 그 이후에 바람과 파도가 잔잔하여진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면 되는데 왜? 믿음이 없어서 불안해 하느냐?”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면, 일어나신 이후에 “내가 일어났으니 걱정들 하지 말고 그냥 있어라 내가 있으니 풍랑이 우리들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야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믿음을 가지고 바람과 바다를 향하여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단순하게 “왜 나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 했느냐”는 의미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믿음이 있는데 왜? 믿음을 활용하지 않고 불안해 했느냐”는 의미였음을 확실히 알 수 있고,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헬라어 단어가 이 사실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에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환경에 이런 불편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이런 불편을 주는 일들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그저 바람과 일렁이는 파도들 때문에 불안에 떨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런 삶을 원하실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현실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다면 과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들이 살아가는 중에 만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서 믿음을 활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마귀가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눅 22:31, 개정)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 22:32, 개정)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개정)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예수님을 따라서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결심했던 베드로를 사단이 시험하여 넘어뜨렸습니다. 이처럼 사단이 주는 시험은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단의 시험에 대항하기 위하여 믿음을 활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형제 야고보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약 4:7, 개정)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또한 베드로도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며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벧전 5:8, 개정)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개정)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신앙생활도, 목회도 성실하고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들을 넘어뜨리려고 마귀가 다가와서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귀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믿음을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축복하시면서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실 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들은 오늘도 음부의 권세와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수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기도 하지만 문을 닫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결과로 교회들이 병이 들고 약해지고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외적으로는 건장한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탄식하시는 그런 교회들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베드로의 권면처럼 우리들의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들에게 다가와서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들은 마귀가 역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딤후 1:7, 개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영의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두려움이 다가온다면 그것은 악한 영의 역사임을 알고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영을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번 두려움이 다가오면 그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영들을 대적할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을 살피며 모든 죄를 회개해야만 합니다. 특히 그 악한 영이 역사하게 했던 그 죄들을 회개해야만 합니다.
저의 경우 사람들을 바라볼 때 음란한 마음이 자꾸 들어서 심히 괴로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런 생각들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목사님과 교제를 하면서 방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죄를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음란한 생각이 들때마다 죄를 회개하고 씻었더니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의 경우는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두려움의 문제로 저는 가끔씩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며 교회를 향하여 걸어와서 교회 뒷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세히는 기억이 되지 않지만 대략 하나님의 보호를 믿는 믿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네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는 더 이상 마귀가 너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힘들어 하고 걱정하던 부분이었는데 내가 내 믿음을 하나님께 고백을 하였는데 그 일로 말미암아 그 두려움의 부분에 대하여 자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시편 91편의 기록처럼 제게도 그 말씀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시 91:1, 개정)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시 91:2, 개정)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시 91:3, 개정)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 91:9, 개정)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시 91:10, 개정)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시 91:11, 개정)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믿음의 시험이 다가왔을 때 여러분의 믿음을 활용하여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4)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우리는 믿음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목전인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하고 그들의 보고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10명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가나안 땅과 환경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성과 육신의 눈으로 판단하여 불평을 하고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신으로 이끌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보여주듯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민 14:1, 개정)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민 14:2, 개정)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민 14:3, 개정)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민 14:4, 개정)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만큼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 14:6, 개정)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민 14:7, 개정)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민 14:8, 개정)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 14:9, 개정)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10명의 정탐꾼들과 여호수아와 갈렙이 달랐던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이때 당시의 일을 기억하며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히 3:15, 개정)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 3:16, 개정)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히 3:17, 개정)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히 3:18, 개정)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히 3:19, 개정)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아니하므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이 때 당시의 일을 두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시편 81편입니다.
(시 81:10, 개정)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시 81:11, 개정)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시편 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때 당시의 일을 회상하면서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의 말을 하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우리들은 믿음의 말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믿음의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 믿음의 말입니다. 이런 믿음의 말과 관련해서 크리스 오야킬로메 목사님이 쓰신 “예언”이라는 책에 조용기 목사님의 일화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일화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https://cafe.daum.net/betterhope2017/ghPx/81
(케네스 해긴, 「믿음이 흔들리고 패배한 것 같을 때 승리를 얻는 법」 김진호 옮김, 믿음의 말씀사, 2008, pp.75-83)
https://cafe.daum.net/betterhope2017/ghPx/80
(조용기 『4차원의 영적세계』 서울: 서울말씀사, 1996. pp. 77-81)
간단히 말하면 믿음으로 말했더니 그 자녀들이 변화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목회에서도 이처럼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실 것을 믿음으로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믿음의 말을 할 때 어떤 계시를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계시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을 하였고 그 말대로 그들의 삶에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5)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믿음을 활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신 말씀 중에 시몬 베드로에게 대하여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 16:18, 개정)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 개정)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주님의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음부의 권세에 대하여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음부의 권세와 교회가 서로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기 위하여 반드시 음부의 권세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부의 권세는 어떻게 역사할까요?
우리는 베드로를 넘어뜨리는 장면을 통하여 그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넘어뜨리려는 마귀들의 활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22:31, 개정)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 22:32, 개정)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56, 개정)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눅 22:57, 개정)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눅 22:58, 개정)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눅 22:59, 개정)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눅 22:60, 개정)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마귀의 공격이 어떻게 다가왔습니까?
사람들을 통하여 다가온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https://cafe.daum.net/betterhope2017/gkdP/1
마귀는 패배한 ‘적’이라는 것이 나는 기쁘다. 예수님께서 후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마귀를 처리하기 위해 영분별의 은사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당신이 그것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꼭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은사를 받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영분별의 은사를 갖거나 마귀에게 권세를 행사할 사역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믿는 자는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권세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가장 미천한 자라고 여길 수 있는 자라할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동일한 권리가 있다. 교회 안이나 밖의 사람이 교회의 사역을 위협하거나, 방해하거나, 훼방하거나, 저지하기 위해 행동할 때마다 그것은 악한 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영은 우리가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우리가 사람을 처리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우리가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권세를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서 역사하고 있는 영은 우리가 처리할 수 있다. 그것 어떻게 하느냐고 내가 예수님께 물었다. 너의 기도 골방 은밀한 곳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개의 삶에서 역사하고, 이 교회를 훼방하는 어 더러운 영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너의 술책을 중지할지어다.”
(캐네스 E. 해긴, 『사단, 귀신 및 귀신들림』, 오태용 옮김, 베다니출판사, 2017, p.56-57)
질문 14 :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일을 방해하게 하는 귀신의 활동을 어떻게 중단시키는가?
답 : 만일 어느 누가 교회 사역을 괴롭히거나 위협하거나 훼방 놓거나 그만두게 한다면, 그것은 마귀임을 알아야 한다. 영분별의 은사를 가질 필요는 없다. 마귀를 볼 필요도 없다. 그것을 초자연적으로 알 필요가 없다. 그건 바로 마귀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집에서 은밀하게 그런 활동을 중단시킬 수 있다. 밖에 나가서 그것을 떠벌릴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을 다룰 필요가 없다. 그냥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무개(그 사람의 이름을 대라)를 통해서 교회의 사역을 훼방하고 위협하며 괴롭히고 그만두게 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너 더러운 귀신아,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중단할지어다.”
(캐네스 E. 해긴, 『사단, 귀신 및 귀신들림』, 오태용 옮김, 베다니출판사, 2017, p.195)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기 위하여 믿음을 잘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고백에 대하여 잘 가르치는 찰스 캡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 역사하는 이유를 일곱 가지로 그의 책에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 역사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씨를 뿌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 4:26-27)
하나님의 방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그 방법을 우리 생활에 적용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리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도록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드십시오.
마가복음 4장 26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씨는 하나님이 뿌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뿌립니다. 하나님께서 씨를 준비해 주시기는 하시지만, 뿌리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두 번째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 역사하는 이유는 그것이 믿음이 생기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씨를 뿌림으로 우리의 소망을 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면 믿음이 생겨납니다(롬 10:17).
어떤 분야에서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일에도,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에도, 어떤 영적인 문제에도 이 원리는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 자신이 어떠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큰 소리로 고백하십시오. 말씀을 선포하고 말하고 고백하면 믿음은 생겨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서 거듭나더라도 우리 마음은 거듭나지 못한 채 예전 상태로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에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은 마음을 변화시켜 우리가 하나님처럼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말하는 태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습을 닮도록 합니다. 또한 우리로 하나님께서 행하는 모습을 닮도록 합니다. 두려움 없이, 걱정 없이,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의 모습으로 살도록 합니다.
네 번째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면, 우리는 계속 답을 얻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은 역사합니다.
만일 우리가 항상 어려움에 직면해서, 그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기도 중에 어려움을 입에 담으면 우리는 그 어려움을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에게 우리의 어려움에 대해서만 말하면 정말 어려움이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하면서 “주님 제게 이런 어려움이 있는데 제가 극복할 수가 없어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문제가 심각해지네요”라고 말한다면 틀림없이 매우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힐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만을 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려움을 생각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 때에도 어려움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 먹고 자고 살아갑니다. 어려움들이 우리들을 갉아 먹습니다. 우리 시간들, 우리 생각들, 우리 기도를 갉아 먹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어려움에 대한 큰 믿음이 생겨날 것이며 해결책에 대한 믿음은 조금도 없게 될 것입니다.
조용기 『3차원의 인생을 지배하는 4차원의 영성』이라는 책에 인도의 선교사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스탠리 존스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유명한 저술가요 선교사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존스 목사는 모든 일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건강하게 살았으나 89세가 가까웠을 때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렇게 수개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간호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아침이든 밤이든 자신을 보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해 달라고 말입니다. 자신은 온몸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말을 간호사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호사들은 그를 보면 언제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해 주었고, 그러면 목사는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리석다며 웃어 댔습니다. 그러나 존스 목사는 입으로 하는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히말라야 산지로 잠시 휴양을 떠났을 때도 계속해서 간호사들과 함께 힘을 합쳐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라고 되풀이하여 말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존스 목사는 마침내 89세의 노인의 몸으로 중풍을 완전히 이겨 냈습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의 힘이었습니다. 말로써 믿음을 풀어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용기 『3차원의 인생을 지배하는 4차원의 영성』 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22. pp. 206-207.)
다섯 번째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 때문에 역사합니다.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의 힘의 원천인 우리 마음을 더욱 부지런히 지켜야 할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마가복음 4장은 우리 마음이 돌짝 밭이 될 수도 있고 가시밭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섯 번째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법칙을 작동시키기 때문에 역사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 4:13)
우리는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을 반복할 때마다 더욱 강하게 믿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믿음의 법칙뿐 아니라 믿음의 영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 역사하는 이유는 믿음의 고백은 천사로 하여금 일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고백을 할 때 천사가 그 고백을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분이 많습니다.
천사들이 이 땅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천사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을 통해 나올 때 그것을 듣습니다. 우리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할 때 그 말이 천사들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것은 곧 천사에게 내가 말한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면, 천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리를 내어 말해야 합니다.
(찰스 캡스 『믿음과 고백』 신현호 옮김. 용인: 믿음의 말씀사, 2010. pp. 287-309.)
바른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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