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誌事項
Ⅰ. 書誌事項
본 해제는 1919년 藍溪書院에서 木板으로 간행된 『一蠹先生遺集』과 『一蠹先生續集』 합 二冊을 대상으로 하였다(이하 이를 각각 『遺集』, 『續集』이라 한다).(주1: 필자가 본 해제를 작성하면서 검토한 것은 民族文化推進會에서 편집·발행한 영인본『一蠹集』(『韓國文集叢刊』제15집에 수록)이다. 본 영인본은 國立中央圖書館 의산 문고 藏本(圖書番號:의산 古3648-문60-85)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 비교적 자세한 해제가 『韓國文集叢刊解題』1집. p.234~238에 실려 있다. 이 밖에 『奎章閣 韓國本 圖書解題』제3집, p.189~190에도 역시 『一蠹先生遺集』, 『一蠹先生續集』에 관해 각각 해제가 실려 있다.) 『遺集』과 『續集』이 모두 半葉 十行 十八字, 四周雙邊이며 크기는 半廓 23.5(cm)x17(cm)이다. 上下二葉는 花紋魚尾가 있다. 현재 국립 중앙 도서관 서울 대학교 규장각, 고려 대학교 만송 문고 등에 소장되어 있다.
刊行經緯
Ⅱ. 刊行經緯
선생의 遺稿는 戊午士禍 때 부인이 모두 소각하였기 때문에 家藏되었던 것은 이 때 모두 없어졌다 한다. 선생의 遺文을 수습하기 시작한 것은 선조(1568~1608)가 즉위한 후 己卯名賢을 推獎하고, 이들의 道學과 政治理念을 본받고자 行蹟과 관련된 기록과 저술을 모으게 하면서부터였다. 이를 선조 3년에 당시 부제학 柳希春이 편찬하여 『國朝儒先錄』이라 이름하여 공경대부에게 배포하면서 선생의 행적과 유문의 일부가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國朝儒先錄』은 孔孟 이후 儒道의 진흥과 異端의 배척에 공이 큰 정자·주자의 행적을 밝힌 『伊洛淵源錄』을 모방하여 우리 나라에서 鄭夢周 이후 性理學에 정진한 四名賢(선생과 金宏弼·趙光朝·李彦迪)에 관한 기록을 모은 것이다. 전체 다섯 권 가운데 선생의 행적과 관련된 것은 卷二에 수록되었는데 여기에 선생의 行狀과 遺事·名設·疏 등이 전한다. 모두 見聞을 토대로 하거나 『經筵日記』에서 수집한 것이었다 한다.
그 뒤 寒岡 鄭逑(1543~1620)가 선생의 언행이 전하지 못하는 것을 애석히 여겨 그 밖의 관계 기록을 수습하고, 이를 藍溪書院에서 旅軒 張顯光(1554~1637)의 跋을 붙여 『文獻公實紀』라하여 一冊으로 간행하였다(이하 이를 『實紀』라 한다). 그 후 藍溪書院에 있던 『實紀』 초간 판본이 세월이 오래 되어 刓缺이 심하여 院儒들의 발의로 改刊을 하였다. 이 때의 改刊에서 초간본과 달라진 부분에 대해서는 李縡(1680~1746)가 쓴 重刊本 『實紀』의 跋文중 다음의 언급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초간본이 중간의 部次가 가지런하지 못하고 후대의 讚述에도 闕漏함이 많아 부득불 수정을 약간 가하였다. "事實" 및 ‘史禍首末’ 諸條는 이미 鄭先生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주2: 『一蠹先生遺集』. 「實紀重刊跋」)
그 뒤 1919년 藍溪書院에서 선생의 시문과 諸賢의 讚述을 搜得하고 「世系」 및 「師友錄」을 보태어, 이를 선생의 후손 煥周의 所輯本과 상호 檢定하여 합쳐서 6권(?)을 만들어 艮齋 田愚(1841~1922)의 跋을 붙여 『一蠹先生遺集』, 『一蠹先生續集』 各一冊으로 간행하였다.(주3: 田愚의 발문을 청할 당시 간행하려던 문집의 총 권수는 6권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一蠹先生續集』은 四卷 一冊으로 총 二冊 七卷이므로 차이가 있다. 무슨 착오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遺集』과 『續集』의 구분 및 『遺集』이 舊本의 『實紀』와 달라진 부분을 『遺集』卷首의 凡例에 의거하여 밝히면 다음과 같다.
1) 『實紀』는 部次가 가지런하지 않고 事實에도 누락된 것이 많으나. 이미 여러 선생의 勘正을 거쳤으므로 『實紀』에 실렸던 것만으로 이를 原著와 附錄으로 나누어 『遺集』이라 칭하고, 후대에 수습한 文字로는 따로 『續集』을 만들었다.
2) 『遺集』과 『續集』은 각기 원저와 부록으로 나누어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하였다.
3) "事實大略"과 ‘史禍首末’의 諸條는 『實紀』에서 정한 대로 하되, 褒典 중 혹 빠뜨리거나 착오가 있는 곳은 『國朝實錄』 및 『經筵日記』에서 補遺·釐正하되, 끝에 출처와 사유를 나누어 써서 참고토록 하였다.
4) 수집해서 추가로 실은 것은 連書하지 않고 따로 구분해 기술하였다.
5) 『實紀』의 褒贈祀典 끝에 있던 敎書와 敎文 및 讚述 끝에 있던 祝文과 祭文은 모아서 뒤에 부쳤다.
6) 『實紀』의 讚述 가운데 「薦學行疏」는 「行狀」 앞에 옮겨서 편하였다.
7) 「世系源流」 및 「師友門人錄」은 朱子大典의 규례를 대략 모방하여 첨입하였다.
선생의 生涯
Ⅲ. 선생의 生涯
선생의 휘는 汝昌, 자는 伯勖, 호는 一蠹 또는 睡翁, 본관은 河東이다. 선생은 判典農寺事 復周의 손자이고, 咸吉道兵馬虞侯 六乙의 아들이다 고조(諱 賢)때 까지만 하더라도 본관지 하동에 世居하였다가, 그의 증조(諱 之義)가 처향을 따라 함양에 이주하면서부터 함양인이 되었다.
선생은 세종 32년(1450)에 咸陽 德谷里 介坪 村第에서 태어났다. 세조 6년(1460, 11세)에 부친을 따라 義州府에 갔는데 명나라 사신 張寧이 마침이 곳에 왔다가 선생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보고 "汝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주4: ‘汝昌’이란 능히 정씨의 가문을 창성케 할 인물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며, 이 때 그 아우도 ‘汝裕’라는 이름을 얻었다.(『遺集』卷 二, 「事實大略」. “張公‥命長曰汝昌 命次曰汝裕 將其其能昌鄭氏之門 而克裕其後也”))
18세 되던 세조 13년 (1467) 5월, 李施愛의 난에 부친이 위국 순절하였다. 부친의 유체를 거두어 함양에 돌아와 장사 지낸 후 10여 년간의 행적은 자세치 않다. 이 무렵 선생은 함양 군수로 와 있던 佔畢齋 金宗直을 師事하였고, 寒暄堂 金宏弼는 道義로서 사귀고, 秋江 南孝齋·朱溪君 李深源·茂豊副正 李摠과는 서로 존중하며 형제같이 지냈다. 선생이 程伊川의 "天地間一蠹"라는 데서 뜻을 취하여 ‘一蠹’라 자호하였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선생은 29세 되던 해인 성종 9년(1478) 무술 4월에 任士洪 등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李深源·南孝溫 등이 昭陵을 追復하여 세조조의 勳舊諸臣을 배척코자 선생을 비롯해 丁克仁·姜應貞·朴演 등 士林 진용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훈구 韓明澮 등이 도승지 任士洪, 동부승지 李瓊을 사주하여 소릉 추복에 관한 일은 모구가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탄핵하였으나, 이 일은 성종이 求言에 따라 간한 것이라 하여 불문에 부쳤다.
성종 11년(1480) 왕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선비"를 추천토록 하니 성균관에서 선생을 제일로 천거하였다. 이 해는 金馹孫이 처음 점필재 문하에 들었는데, 그가 여기서 사귄 벗에 대해 뒷날 말한 중에 道德으로는 선생과 김굉필, 이심원이 뛰어났다고 하였다.
선생이 33세 되던 성종 13년(1482) 가을 花開를 떠나 南冥 中方里에 있는 楸溪 尹孝孫을 방문하여 함께 朱書를 강론하였으며 이듬해 성종 14년(1483)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성종 17년(1486)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3년 동안을 養性讀書한 적이 있는데, 이 때 다시 산중에 들어가 도를 체득키 위한 노력을 더욱 독실히 하였다.
성종 20년(1489) 4월에 金馹孫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였는데 이 때의 수일간 행적은 金馹孫의 頭流山錄을 통하여 비교적 소상히 전하는 편이다. 이 때 金馹孫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한 후 배를 띄워 섬진강을 내려오며 읊은 시 一絶이 전하기도 한다. 이 무렵 진주에 사는 木溪 姜渾을 방문하여 시문을 논하고, 또 밀양의 점필재 김종직을 찾았다. 당시 점필재는 형조 판서로 致仕하고 고향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선생은 보름 정도 여기에 묵으며 가르침을 받다 돌아왔다.
성종 21년(1490) 咸陽郡에서 趙孝仝, 尹兢이 선생을 학행으로 천거, 昭格署參奉에 제수되면서 비로소 관로에 들었다. 선생이 소를 올려 이를 극구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12월에 문과 별시에 합격, 또 金馹孫의 천거로 예문관 검열에 選補되었다. 얼마 뒤 侍講院說書를 역임하였고, 성종 25년(1494)에는 安陰縣監이 되었다. 이 때 김굉필이 합천군 야로현 末谷에 있어서, 그 중간인 거창 加祚縣 山際洞의 경치 좋은 곳에서 그와 자주 만나 강론하기도 하였다.
무오 사화에 연좌되어 鍾城府에 유배되었던 것은 선생이 49세 되던 연산군 4년(1498)이었다. 마침 이 해 6월에 김일손이 선생을 내방하여 이후 함께 靑溪精舍에 머물렀기 때문에 7월에 먼저 金馹孫이 체포되는 현장에 선생이 같이 있었고, 이어 선생도 사화에 연루되어 종성부에 유배되었다. 55세 되던 연산군 10년(1504) 4월 1일 적소에서 졸하고, 이 해 6월 함양군 昇安洞 묘원에 묻혔다 이 해 9월에 사화가 다시 일어나 화가 泉壤에까지 미쳤다.
이상에서 세종 32년(1450) 함양군 덕곡리에서 태어나, 연산군 4년(1504) 동군의 승안동 묘원에 묻히기까지의 선생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았다.(주5: 이상 선생의 행적에 대해서는 『遺集』卷二. 「事實大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선생은 당대에 영남 지역의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으로 특히 성리학 방면의 학문적 업적과 도덕적 행적으로 당대 및 후세에 이름이 높았던 분이었다.
선생이 영남 출신의 사림으로 관로에 들었던 성종 대는 개국 이래 추진해온 유교적 문물 제도가 정비되어 왕조의 기반이 확립된 시기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고, 유교 정치를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 유교적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 참신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성리학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정착·성행하였던 영남 지방의 사림이 대거 중앙 관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선생은 점필재 문하에서 寒暄堂 金宏弼과 함께 특히 道學으로 이름 높았던 분이기 때문에 선생의 학문은 계통상 吉再·金叔滋·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조선조 성리학의 정통에 연결된다. 길재는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신왕조에서 벼슬하는 것을 거부하고, 고향인 경상도 善山에 은거하며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던 인물로 그의 학통은 金叔滋 등 여러 제자에 의해 이어졌으며, 손제자인 金宗直(김숙자의 아들)에 이르러서 그 문하에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김종직이 수많은 제자들을 기반으로 師宗이 되면서부터는 영남 사림은 당시의 사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세력으로 등장 되었다.
영남 출신의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당시 중앙 정계를 지배하던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와 은연중 대립의 형국이 나타나게 되었다. 훈구파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세조의 공신을 주축으로 하였는데, 이들은 세조·예종 대를 거쳐 성종 조에 들어와서도 원로 훈신으로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정치·경제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어 현상 유지에 급급한 보수적 성향의 노성한 인물이었다.
성종 대까지만 하더라도 잠재되었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표면화되었다. 暗君의 치세에 양파의 대립은 政爭으로 진전되어, 그 결과 성종 대에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 관료들은 훈구파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무오 사화와 갑자 사화였다.
선생이 무오년 사화로 종성에 유배되어 이 곳에서 졸하고 갑자년 사화로 부관 참시를 겪는 것은 이러한 영남 사림으로서의 출신 배경과 시대적 조건에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문묘에 종사된 인물의 한 분으로, 선생이 조선조 성리학의 도통연원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됨도 아울러 이와 같은 시대적 조건과 출신배경에 기인하는 것이다.
文集의 구성과 내용
Ⅳ. 文集의 구성과 내용
선생의 文集은 『一蠹先生遺集』 一冊 三卷 『一蠹先生續集』 一冊 四卷의 총 二冊 七卷으로 구성되어 있다. 『遺集』의 卷首에 범례와 목록이 있고, 『續集』에는 卷首에 목록만이 있을 뿐이다. 『遺集』 중 卷一은 선생의 遺文을 詩·疏·祭文·雜著로 편술한 것이며, 卷二와 卷三은 모두 附錄이다 한 卷을 이루고는 있으나 권 一에 수록된 것은 「岳陽」, 「辭參奉疏」, 「祭兪㵢溪文」으로 題한 詩·疏·祭文이 각각 한 편 뿐이고, 雜著인 「庸學註疏」, 「主客問答」, 「進修雜著」는 제목만 보일 뿐이다. 이 가운데 잘 알려진 「岳陽」이란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드러운 부들이 바람에 휘날리어/사월 화개에는 보리 이미 가을이네
두류산 천만 겹을 두루 다 돌아보고/조각배로 다시 큰 강으로 흘러가네
(風蒲泛泛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
선생은 평생에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다만 이 한 편의 시가 『遺集』에 전할 뿐이다.(주6: 선생이 지은 시는 이 한 편뿐인 것으로 전해져 왔다. 『續集』에 수록된 일곱 편의 시는 그 뒤에 수습한 것이다.) 이 시를 읊으면 흉중이 쇄락하고 세상의 속된 점이 하나도 없는 선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이로써 선생의 인품을 짐작할 수가 있다. 「辭參奉疏」는 1490년 선생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 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을 때 이를 사양하여 상소한 것이다. 성종은 그의 사직 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 쓰고 사임을 허가치 않았다.(주7: 『遺集』卷一. 「辭參奉疏」) 나머지 한 편은 㵢溪 兪好仁에 대한 祭文이다.
卷二 부록에는 「事實大略」, 「史話首末」, 「褒贈祀典」이 실려 있다. 「事實大略」은 선생의 生平에 관해서, 「史禍首末」은 무오 사화의 발단 경위에 대해서, 「褒贈祀典」은 선생 사후 褒贈에 관한 사실과 文廟從祀 및 선생을 향사키 위한 서원의 건립 내력에 대한 기술이다. 卷三부록은 庚戌年 文廟從祀時의 「敎書」, 「頒敎文」, 「告由文」, 여러 書院「奉安文」, 「香祝文」, 鄭逑의 「祭墓文」, 趙孝仝의 「薦學行疏」, 「行狀」, 鄭蘊의 「神道碑銘幷書」, 林薰의 「鄕祠堂記」, 諸家의 文集 등에서 발췌한 讚述 및 詩章으로 구성되었고, (주8: 卷三. 부록된 것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庚戌年 文廟從祀時 柳夢寅이 製進한 敎書. 李廷龜가 「製進頒敎文」, 吳勣의 「文廟奉安時告由文」, 「道南書院奉安文」(鄭經世). 「藍溪書院春秋香祝文」(盧禛), 「永溪書院春秋香祝文」(金誠一), 「龍門書院春秋香祝文」(吳勣), 「行狀二」(從子 希參), 「行狀三」(姓名逸) 「神道碑銘幷序」(鄭蘊), 「鄕祠堂記」(林薰), 讚述(『秋江冷話』·『秋江集』·『秋江師友名行錄』·『濯纓頭流錄』·『退溪集』·『南冥集』(「南冥遊頭流山錄」, 「南冥年譜」)·「盧蘇齋撰盧信古堂碑」·『盧玉溪長水錄』·「柳○巖鍾城記聞」·『任輔臣丁巳錄』·『鄭寒岡伽倻錄』·『輿地勝覽』), 詩章(兪好仁의 「岳陽亭」·曺伸의 「賀宰安陰」·金安國의 「咸陽鄕校」·金安國의 「安陰鄕校」·李滉의 「藍溪書院」·李滉의 「和陶詩」·盧禛의 「花開洞憶先生遺跡」·金昌翕의 「永溪書院」) 끝에 張顯光의 『實紀』「跋文」과 李縡의 重刊本 『實紀』「跋文」이 붙어 있다.
선생의 학행에 대해서는 그의 遺文을 통해서 보다 이 부록 가운데 있는 諸賢의 讚述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제현의 찬술 가운데 『秋江冷話』에서 취한,
鄭伯勖은 周·程·張·朱의 견해가 있고 五經에 정통하면서도. 홀로 시를 공부하는 선비를 취하지 않아 말하기를 시는 性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어찌 애써 억지로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비록 시를 짓지 못하더라도 德이 갖추어지고 경전에 통하면 병통이 될 수 없다는 뜻이리라.
라는 데서. 비록 사화로 말미암아 선생의 유문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선생이 경학을 중시하여 시문에 별로 공을 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찬술 가운데는 南冥이 선생을 높이 평가하여, “東國의 제현 가운데 오직 선생만이 허물이 없는 분이다”라고 하였음이 이채를 띤다(「南冥年譜」에서 취한 것).
『續集』의 卷一은 선생의 유문을 시·서·잡저·행장으로 편술한 것이고 卷二와 卷三은 부록이다. 卷一의 선생 유문 가운데 詩·書는 諸家의 文集과 內閣 및 諸家의 古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주9: 詩는 「謹次栗亭李先生(寬義)韻」. 「題文江城君(益漸)木棉花記」, 「題族弟(汝諧)海望幽居」, 「江頭詩贈友人權(名欠攷)」, 「按嶺待風」, 「杜鵑」, 「題碧松亭」의 7편이며, 書는 「答朴馨伯(彦桂)」, 「答或人」, 「答李仲平(守恭)」, 「答(缺)察訪」의 3편이다. 이들 詩·書 가운데 내각 및 제가의 문집에서 나온 것은 충분히 徵言할 만하고, 古箱에서 나온 것은 零殘하기는 하나 선생의 諱字와 職銜이 붙어 있어 아울러 편록한다고 하였다.) 雜著는 「理氣說」, 「善惡天理說」, 「立志說」 세 편으로, 行狀은 「文忠宣公行狀」(藏在碧溪書院 被燒不傳)과 「宣平襄公行狀」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잡저와 행장이 수록된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의 언급이 보인다.
右三篇은 40년 전 玄風 郭孝根의 집에서 보관해 오던 것이다. 행장은 이미 『實紀』 가운데 실었던 것이므로 논할 필요가 없고, 이 三篇은 비록 확실한 증거를 아직 얻지는 못했으나 本草에 이미 선생의 號가 실려 있는 까닭에 감히 泯沒할 수가 없어 부록해서 後考를 기다린다.
卷二는 書院賜客時의 제문, 正祖御製의 「華城聖廟西廡位告由文」, 賜祭文 및 제문 「書院奉安文」 및 「春秋香祝文」, 藍溪書院의 廟庭碑. 金馹孫의 「薦檢閱疏」. 從祀文廟詩의 「請願疏」. 金千鎰의 「道山書院春秋香祝文」으로 되어 있다. 卷三은 尹孝孫·楊熙止의 書, 書院 및 樓亭의 詩文과 각종 上梁文 및 序·跋·讚述·詩章으로 되어 있다. 卷四는 『世系源流』, 『師友門人錄』으로 되어 있고, 끝에 思愚의 발이 붙어 있다.(주10: 『師友門人錄』에 약력이 소개된 분은 다음의 39인이다. 佔畢齋金先生·栗亭李先生·金宏弼·南孝溫·李深源·李摠·趙偉·兪好仁·朴漢柱·表沿沬·楊熙止·尹孝·朴亨達·金馹孫·姜渾·曺伸·鄭汝諧·李守恭·林大仝·權五福·權景裕·李穆·許磐·李黿·李胄·姜謙·鄭希良·洪瀚·姜景敍·鄭承祖·李宗準·崔薄·任熙載·康伯珍·李繼孟·李仁亨·盧友名·李希會·高崇傑)
『遺集』과 『續集』을 통틀어 볼 때 선생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결국 『유집』에 수록된 「岳陽」, 「辭參奉疏」, 「祭兪㵢溪文」과 『續集』에 있는 詩·書 약간 편과 잡저인 「理氣說」, 「善惡天理說」, 「立志說」 등의 세 편, 그리고 선생이 지은 「宣平襄公行狀」한 편이 있다.
[김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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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집 (一蠹集) 글자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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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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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내용
서명 일두집 (一蠹集)
저자 성명 정여창 (鄭汝昌)
자 백욱 (伯勗)
호 일두 (一蠹)
판사항 木版本
발행지
발행자
발행년 1919
권수 2
책크기 31.2×22.3㎝
사부분류 별집류
기타사항
『일두집』은 정여창(鄭汝昌 ; 1450~1504)의 시문집이다. 정여창의 자는 백욱(伯?), 호는 일두(一?),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이 책은 정구가 실기 1권을 편집하였고, 장현광(張顯光)이 간행하였다. 이재(李縡)가 수정, 중간하였고, 1919년 남계서원(藍溪書院)에서 간행하였다. 문집에서 시의 「두견(杜鵑)」은 충신·지사로서의 일편단심을 다짐하는 시이다. 서(書)의 「답혹인(答或人)」은 성현의 자질에 관한 것을 인용하여 이기설(理氣說)을 설명한 내용이다. 잡저에는 「이기설」·「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이 있으며, 학자는 성인을 배우며 지자(志者)는 그 배움을 이룬다고 한 「입지론(立志論)」이 있다. 잡저의 「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主客問答)」 ·「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은 모두 산일되었다.
정여창은 육을(六乙)의 아들로 함양(咸陽)에서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을 사사하여 날마다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또 지리산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오경(五經)과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1483년(성종 1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유생이 되어 이학(理學)에 조예가 깊어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이 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었다가 1494년(성종 25)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어 백성의 고통은 조세와 부역이 과중함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義數十條)를 만들어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고 옥사(獄事)를 공정히하며 교학(敎學)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좌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죽었다. 그는 성리학의 대가로 경사(經史)에 밝고 실천 역행(實踐力行)에 힘써 『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主客問答)』,『진수잡저(進修雜著)』등 저술이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모두 불태웠다. 지금은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유저(遺著)가 전할 뿐이다. 1517년(중종 12)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고, 1575년(선조 8) `문헌공(文獻公)`이라 시호를 받고,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봉향되었으며, 도남서원(道南書院),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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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선생유집(一蠢先生遺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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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선생유집(一蠢先生遺集) | 鄭汝昌(朝鮮) 撰 | ||
일두선생유집(一蠧先生遺集) | 정여창(조선)찬(鄭汝昌(朝鮮)撰) | ||
K4-6415 | MF16-46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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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고서/한국본 | 전자도서관(SJ_LI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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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64 |
一蠢 先生 遺集 |
鄭汝昌(朝鮮) 撰 |
木版 |
1919 |
K4-6415 |
MF16-460 |
線裝 遺集 3卷, 續集 4卷, 合 2冊:四周雙邊, 半郭 23.9 × 17 ㎝, 有界, 半葉 10行18字, 註雙行, 內向二葉花紋魚尾;33 × 22.1 ㎝ |
印 : 李王家圖書之章 |
~ 18-2001 * 일두유집 (一<두0x5C65>遺集) 조선 전기의 문신 정여창(鄭汝昌)의 시문집. 7권 2책. 정유자복각본. 정구(鄭逑)가 실기 1권을 편집하였고, 장현광(張顯光)이 간행하였다. 이재(李縡?)가 수정, 중간하였고, 1919년 남계서원(藍溪書院)에서 유집 3권, 속집 4권으로 간행되었다. 유집 권말에 장현광·이재의 발문이 있고, 속집 권말에 전우(田愚)의 발문이 있다. 유집 권1은 시 1수, 소(疏) 1편, 제문 1편, 권2·3은 부록으로 사실대략(事實大略)·사화수말(史禍首末)·포증사전(褒贈祀典)·교서(敎書)·반교문(頒敎文)·문묘봉안시고유문(文廟奉安時告由文)·도남서원봉안문(道南書院奉安文)·남계서원춘추향축문(藍溪書院春秋享祝文)·용문서원춘추향축문(龍門書院春秋享祝文)·이연서원춘추향축문(伊淵書院春秋享祝文)·제묘문(祭墓文)·천학행소(薦學行疏) 각 1편, 행장 3편, 신도비명·향사당기(鄕祠堂記)·찬술(讚述) 각 1편, 시장(詩章) 12수, 속집 권1은 시 7수, 서(書) 5편, 잡저 3편, 행장 2편, 권2∼4는 부록으로 서원사액제문(書院賜額祭文) 3편, 어제화성성묘서무위고유문(御製華城聖廟西<무0x60EB>位告由文)·사제문·향사당봉안시제문(鄕祠堂奉安時祭文)·서원봉안문·서원춘추향축문·남계서원묘정비(藍溪書院廟庭碑)·천검소(薦檢疏) 각 1편, 종사문묘소(從祀文廟疏) 3편, 종산서원청액소(鐘山書院請額疏)·남계서원청액계·도산서원청액소(道山書院請額疏) 각 1편, 서(書) 2편, 남계서원기(藍溪書院記)·광풍루기(光風樓記) 각 1편, 풍영루기(風詠樓記) 2편, 악양정중건기(岳陽亭重建記) 1편, 서원상량문 2편, 유선록서(儒先錄序)·계첩서(契帖序)·화개도발(花開圖跋)·찬술 각 1편, 시장 5수, 세계원류(世系源流)·사우문인록(師友門人錄)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두견 杜鵑〉은 충신·지사로서의 일편단심을 다짐하는 시이다. 서(書)의 〈답혹인 答或人〉은 성현의 자질에 관한 것을 인용하여 이기설(理氣說)을 설명한 내용이다. 잡저에는 〈이기설〉·〈선악천리론 善惡天理論〉이 있으며, 학자는 성인을 배우며 지자(志者)는 그 배움을 이룬다고 한 〈입지론 立志論〉이 있다. 잡저의 〈용학주소 庸學註疏〉·〈주객문답 主客問答〉·〈진수잡저 進修雜著〉 등은 모두 산일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도서·국회도서관·경북대학교 도서관·국민대학교 도서관·성균관대학교 도서관·한양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權虎基〉 @ ^ |
01_K4-6415 |
고서 > 장서각 본도서 > 한국본 > 集部 > 別集類 > 詩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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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선생유집(一두先生遺集)속집(續集)7권2책완질 정여창(鄭汝昌)
일두선생유집(一두先生遺集)속집(續集)7권2책완질 정여창(鄭汝昌)(1920년 목판본)
상품 상세설명
1920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정여창(鄭汝昌)선생의 시문집인 일두선생유집(一두先生遺集)속집(續集)7권2책완질 상태좋으며 파장없음 크기:32.8*22센치 **정여창 (鄭汝昌) 1450-1504 (세종32-연산군10)字: 伯·自; 號: 一두; 本貫: 河東 父: 六; 母: 崔氏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써다가 金宏弼과 함께 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魯論≫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성종 11)년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8월에는 성균관 上舍의 同列에서 그를 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하고‚ 어머니가 죽자 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岳陽洞에 들어가 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趙孝仝과 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그대의 행실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는구나! 그대의 효자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이 말하니 이 점이 바로 그대의 선한 행실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로 있을 때 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하였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安陰현감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疾痼가 賦斂에 있음을 알고 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 때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광해군 2)년 문묘에 陞廡되었다. 나주의 景賢書院‚ 상주의 道南書院‚ 함양의 灆溪書院‚ 종성의 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文獻이다. **본집에서 ≪일두유집≫은 원래 鄭逑가 정여창의 후손 秀民과 함께 1635년에 수집 간행하였고 1743년에 李縡가 중간했던 <文獻公實紀>의 새로운 이름이다. 그래서 유집 권말에 張顯光과 이재가 발문을 쓰면서 제목을 <跋>로 달지 않고 <實紀跋>이나 <實紀重刊跋>로 쓰고 있다. 그 뒤 새로 증보한 시문 및 관계기록을 재편집하여 田愚의 교정을 거쳐 1919년 남계서원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것이 ≪일두속집≫을 포함한 ≪일두집≫이다. ≪일두집≫ 판본에는 규장각본(유집 <奎 15507>‚ 속집 <奎 15508>)과 국립중앙도서관 의산문고장본(<의산古 3468-文70-85>)이 있다. ≪일두유집≫이 규장각본에서는 2권본으로 되어 있고 의산고본에서는 3권으로 되어 있다. 차이를 본다면 의산고본에는 <事實大略>·<史禍首末>·<褒贈祀典>이 권2에 별도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나 규장각본에는 <사실대략> 제목에 나머지 두 내용을 포괄하여 권2에 수록되어 있다(규장각본 <일두선생유집범례>를 참조). 또 규장각본의 권2에 수록된 내용이 의산고본에서는 권3에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일두속집≫의 경우에 두 판본은 모두 4권으로 편집되어 있으나‚ 의산고본 권1의 <答李仲平>·<答缺察訪>과 권2의 <道山書院請額疏>가 규장각본에는 卷之四 追錄의 형태로 문집의 말미에 부기되어 있다. 이에 대한 규장각본의 문집 말미를 보면 문집을 판각한 후 위 3편의 글을 추가로 수집하게 되어 차서를 재정비하지 못하고 편의상 편말에 부기한다고 주를 달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본다면 규장각본은 ≪일두집≫이 의산고본의 형태로 완비되기 이전의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일두집≫은 정구의 <문헌공실기>→이재의 <문헌공실기>중간본(즉 ≪일두집≫ 舊本)→규장각본→의산고본의 과정으로 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여창의 시문은 무오사화로 거의 일실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그의 유문이나 관련 사적을 수집하여 문집을 만들었다. 따라서 자료의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글의 저자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고‚ 글의 중간 중간에 <缺>자로 표시되어 내용이 탈루된 곳도 많고‚ 정여창의 본인의 작품인지 의심되는 경우도 있다. 즉 ≪일두유집≫ 권1의 <答缺察訪> 끝의 소주를 보면 ≪일두유집≫ 권1에 수록된 시 7수와 서 5편은 다른 사람의 문집·內閣·다른 사람의 古箱에서 수집했다고 한다. 앞의 두 경우는 어느 정도 자료로서의 신빙성이 있지만 마지막의 경우에는 글자의 탈루가 많고 저자로 정여창의 이름이 쓰여 있어 수록하지만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를 달고 있다. 또 ≪일두유집≫ 권1의 <立志論> 끝의 소주를 보면 ≪일두유집≫ 권1의 論 3편(<理氣論>·<善惡天理論>·<立志論>)과 <宣平襄公行狀>을 현풍의 郭孝根 가장본에서 수집했다고 되어 있다. <宣平襄公行狀>은 정여창의 <실기>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많다. 3편의 論은 자료로서의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저자로 정여창의 호가 기재되어 있어 수록한다고 주를 달고 있다. 저자의 측면에서 볼 때 약간의 시와 제문이 정여창의 저술임이 분명하고 나머지의 경우 저자 문제가 불확실하다. 또한 대부분의 글이 정여창을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문묘종사하거나 서원에 배향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어 현행 ≪일두집≫을 통해 정여창 본인의 사상을 추적하기에는 불충분한 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一두集』解題수록잡지명 : 南冥學硏究 5輯(1995), p. 235-243 김해영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비치일 : 20041019 청구기호 : 151.5205-경196ㄴ-5
『一두集』解題수록잡지명 : 南冥學硏究 3輯(1997), p. 235-243 김해영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비치일 : 20041019 청구기호 : 151.5205-경196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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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遺集 일두선생유집
15-16c |
CE |
일두유집 (一蠹遺集) |
奎 15507 |
본집에서 ≪일두유집≫은 원래 鄭逑가 정여창의 후손 秀民과 함께 1635년에 수집 간행하였고 1743년에 李縡가 중간했던 <文獻公實紀>의 새로운 이름이다. 그래서 유집 권말에 張顯光과 이재가 발문을 쓰면서 제목을 <跋>로 달지 않고 <實紀跋>이나 <實紀重刊跋>로 쓰고 있다. 그 뒤 새로 증보한 시문 및 관계기록을 재편집하여 田愚의 교정을 거쳐 1919년 남계서원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것이 ≪일두속집≫을 포함한 ≪일두집≫이다. ≪일두집≫ 판본에는 규장각본(유집 <奎 15507>‚ 속집 <奎 15508>)과 국립중앙도서관 의산문고장본(<의산古 3468-文70-85>)이 있다. ≪일두유집≫이 규장각본에서는 2권본으로 되어 있고 의산고본에서는 3권으로 되어 있다. 차이를 본다면 의산고본에는 <事實大略>·<史禍首末>·<褒贈祀典>이 권2에 별도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나 규장각본에는 <사실대략> 제목에 나머지 두 내용을 포괄하여 권2에 수록되어 있다(규장각본 <일두선생유집범례>를 참조). 또 규장각본의 권2에 수록된 내용이 의산고본에서는 권3에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일두속집≫의 경우에 두 판본은 모두 4권으로 편집되어 있으나‚ 의산고본 권1의 <答李仲平>·<答缺察訪>과 권2의 <道山書院請額疏>가 규장각본에는 卷之四 追錄의 형태로 문집의 말미에 부기되어 있다. 이에 대한 규장각본의 문집 말미를 보면 문집을 판각한 후 위 3편의 글을 추가로 수집하게 되어 차서를 재정비하지 못하고 편의상 편말에 부기한다고 주를 달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본다면 규장각본은 ≪일두집≫이 의산고본의 형태로 완비되기 이전의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일두집≫은 정구의 <문헌공실기>→이재의 <문헌공실기>중간본(즉 ≪일두집≫ 舊本)→규장각본→의산고본의 과정으로 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여창의 시문은 무오사화로 거의 일실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그의 유문이나 관련 사적을 수집하여 문집을 만들었다. 따라서 자료의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글의 저자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고‚ 글의 중간 중간에 <缺>자로 표시되어 내용이 탈루된 곳도 많고‚ 정여창의 본인의 작품인지 의심되는 경우도 있다. 즉 ≪일두유집≫ 권1의 <答缺察訪> 끝의 소주를 보면 ≪일두유집≫ 권1에 수록된 시 7수와 서 5편은 다른 사람의 문집·內閣·다른 사람의 古箱에서 수집했다고 한다. 앞의 두 경우는 어느 정도 자료로서의 신빙성이 있지만 마지막의 경우에는 글자의 탈루가 많고 저자로 정여창의 이름이 쓰여 있어 수록하지만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를 달고 있다. 또 ≪일두유집≫ 권1의 <立志論> 끝의 소주를 보면 ≪일두유집≫ 권1의 論 3편(<理氣論>·<善惡天理論>·<立志論>)과 <宣平襄公行狀>을 현풍의 郭孝根 가장본에서 수집했다고 되어 있다. <宣平襄公行狀>은 정여창의 <실기>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많다. 3편의 論은 자료로서의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저자로 정여창의 호가 기재되어 있어 수록한다고 주를 달고 있다. 저자의 측면에서 볼 때 약간의 시와 제문이 정여창의 저술임이 분명하고 나머지의 경우 저자 문제가 불확실하다. 또한 대부분의 글이 정여창을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문묘종사하거나 서원에 배향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어 현행 ≪일두집≫을 통해 정여창 본인의 사상을 추적하기에는 불충분한 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
정여창 (鄭汝昌) |
1450-1504 (세종32-연산군10)字: 伯勗·自勗‚ 號: 一蠹‚ 本貫: 河東‚ 父: 六乙‚ 母: 崔氏 |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써다가 金宏弼과 함께 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魯論≫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성종 11)년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8월에는 성균관 上舍의 同列에서 그를 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하고‚ 어머니가 죽자 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岳陽洞에 들어가 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趙孝仝과 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그대의 행실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는구나! 그대의 효자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이 말하니 이 점이 바로 그대의 선한 행실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로 있을 때 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하였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安陰현감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疾痼가 賦斂에 있음을 알고 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 때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광해군 2)년 문묘에 陞廡되었다. 나주의 景賢書院‚ 상주의 道南書院‚ 함양의 灆溪書院‚ 종성의 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文獻이다. |
내용제목 | 一蠹遺集 내용개요 | 청구기호 | 奎 15508 |
권제 권제목:卷之一
詩 | 岳陽 |
辭參奉疏 (1) | 1490. 상과 벌이란 人君이 한 시대의 사람을 선으로 권유하고 악을 징계하는 수단이다. 상벌이 시행될 때 행위자의 실상과 부합되어야 한다. 만약 선을 행한 실상이 없는데도 상을 주게 되면 요행수를 누리는 사람이 승진하게 되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요행히 벌을 면하게 되면 속이는 기풍이 일어나게 된다. 자신이 관직 제수를 수락하게 되면 어머니의 상을 치르며 안으로 측은해 하는 마음이 적으면서 밖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꾸미게 되어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효자의 실상을 의심하게 만든다며 사직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성종은 “그대의 행실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는구나! 그대의 효자다운 행실을 숨길 수 없는데도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이 말하니 이 점이 바로 그대의 선한 행실이다.”라며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
祭兪克己-好仁-文 (2) | 정여창이 유호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학덕을 칭송하고 있다. |
庸學註疏 (3) | 내용결락. 정여창은 주자의 ≪중용장구≫를 尊信하며 ≪중용≫에 대한 깊은 학식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내용이 전해지지 않아 ≪중용≫과 ≪대학≫에 대한 그의 연구를 알 수 없다. |
主客問答 (3) | 내용결락. |
進修雜著 (3) | 내용결락. |
내용제목 | 一蠹遺集 내용개요 | 청구기호 | 奎 15508 |
권제 권제목:卷之二 (附錄)
敎書-庚戌從祀文廟時 (1) | 1610. 柳夢寅(1559-1623)이 쓴 글로 정여창의 孝悌‚ 학덕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참다운 유자(眞儒)와 유가의 영원한 스승(百代師儒)으로 부르고 있다. 1610년은 공식적으로 정여창의 신원이 문묘종사의 형식으로 완성되는 해이다. |
頒敎文 (2) | 1610. 五賢(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의 성리학적 업적을 기리며 그들을 문묘 동서廡에 종사하라는 내용. 李廷龜(1564-1635)이 지었다. |
文廟奉安時告由文 (3) | 1610. 예를 갖쳐 정여창을 문묘에 봉안하니 조선의 文敎가 발양되도록 도와주기를 요청하는 글. 吳勣이 썼다. |
道南書院奉安文 (3) | 1606(?). 鄭經世(1563-1633)가 정여창과 김굉필의 학덕을 추모하는 글. 도남서원(경북 상주시 도남동 소재)에서는 1606년에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 등의 위패를 봉안했기 때문이다. |
蘫溪書院春秋享祝文 (4) | 1552(?). 盧禛(1518-1578)이 남계서원에서 배향하는 정여창과 김굉필의 性理와 孝義를 추모하는 글. 남계서원(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소재)에서는 1552년에 정여창의 위패를 봉안했기 때문이다. |
永溪書院春秋享祝文 (4) | 金誠一(1538-1593)이 정여창의 학덕과 후대에 끼친 영향을 추모하는 글. |
龍門書院春秋享祝文 (4) | 1583(?). 정여창이 正道를 조선에서 발명했고 그의 仁이 온 나라에 혜택을 주었다는 내용. 吳勣이 썼다. 1583년에 지방 유림의 건의로 정여창을 추모하기 위해 용문서원(경남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소재)을 창건했기 때문이다. |
伊淵書院春秋享祝文 (4) | 1587(?). 정여창이 仁本을 실행했고 학문적으로 眞知를 궁구했다며 그를 추모하는 내용. 姜大遂(1591-1658)가 지었다. 1587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굉필과 정여창을 추모하기 위해 이연서원(경남 합천군 가야면 매암리 소재)을 창건했기 때문이다. |
祭墓文 (4) | 세도가 혼란되어도 文詞를 숭상하는 풍조에서 정여창이 김굉필과 도학을 진흥했던 공덕을 추앙하고 있다. 鄭逑(1543-1620)가 지었다. |
薦學行疏 (5) | 趙孝仝이 尹兢과 함께 정여창의 가계‚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 성리학에 대한 조예 등을 거론하며 그를 성종에게 천거하는 글. 정여창은 본래 과업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간청으로 1483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을 했다. 1486년에 어머니를 보려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집안에 돌림병이 창궐했다. 이웃사람이 모두 집밖에 머물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곧이 듣지 않고 곧바로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자 자신도 음식을 먹지 않고 滅性의 지경에 이르렀다. 장사날을 잡아 장사지내려는데 장마가 20일 이상되어 계곡에 물이 넘칠 정도여서 사람들이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날 갑자기 비가 멎고 하늘이 개어 고을 사람들이 정여창의 사람됨을 기이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 감사가 그의 효행을 전해 듣고 관을 만드는 넓고 긴 널빤지를 제공하려 했는데 그는 민을 번거럽게 만들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욕되게 하는 처사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
行狀 (8) | 李勣과 종자 希參 등이 정여창의 가계·작명의 유래·학덕 등을 쓴 글이다. 마지막 <행장>의 경우 쓴 사람이 성명이 전해지지 않는다. 정여창이 8살때 부친 六乙을 따라 義州府에 있을 때 명나라 사신 張寧이 그의 재주를 신통하게 여겨 “너로 인하여 너의 집안을 번성하게 되리라”라고 한 데서 이름을 ‘汝昌’으로 짓게 되었다. 그는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만족스런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자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학문에 열중했다. 그 결과로 그는 五經을 연구하여 전체의 일관된 의미를 파악했고 ≪魯論≫에 훨씬 더 정통하게 되었고 性理의 근원을 탐구하여 마침내 體用의 학을 꿰뚫게 되었다. 어머니의 상 이후 3년 동안 시묘생활을 하며 산을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상복을 벗고서 두 동생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던 중 岳陽洞의 풍경에 반해서 결국 처자를 거느리고 蟾津 호구에 집을 집게 생활했다. 1490년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관직생활을 하다가 시강원설서가 되어 동궁(후일 연산군)을 正道로써 보도했으나 동궁이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이의 마지막 <행장> 말미에 보면 <행장>을 세 개 수록하게 된 연유를 기록하고 있다. 원래 정여창의 행장이 <儒先錄>(≪일두속집≫ 권3의 <儒先錄序>(17)의 내용개요를 참조할 것)에 2개 수록되어 있는데 둘다 내용이 너무 간략하여 아쉬움을 가졌다. 문집을 간행하려고 유고를 수집하던 중 鄭氏 문중에서 <행장>을 구했는데 내용이 앞의 두 <행장>보다 좀더 자세하나 작자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神道碑銘-幷序 (19) | 鄭蘊(1569-1641)이 정여창의 가계·학덕·효성·덕행 등을 적은 글. 1456년에 정여창의 부친이 李施愛 반란을 평정하던 중 사망하게 되자 난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 아들에게 관직을 수여하려 했다. 이에 그는 아버지의 죽음 덕택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릴 수 없다며 사양했다. 또 정여창을 문묘에 종사하려던 시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1610년에 결실을 보게 된 경위를 적고 있다. |
鄕祠堂記 (24) | 林薰(1500-1584)이 함양의 유림들이 정여창을 추모하는 사우를 건립하려 하는 경위와 추진 인물 등을 기록하고 있다. |
事實大略 (26) | 1450년 정여창의 출생‚ 작명의 유래‚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 수학‚ 3년 동안 지리산 입산 학문연마‚ 김굉필 등과의 교우‚ 등과 후 태학에서 수학할 때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일‚ 윤긍 등의 천거로 관직에 나간 뒤 동궁을 보도한 일‚ 지방관으로 나가 선정을 베푼 일‚ 무오사화 관련일지‚ 정여창 사후 정여창을 비롯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의 현창 과정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글이다. 문집 안의 다른 곳에서는 작명의 유래가 결론만을 서술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부친 鄭六乙과 명사신 張寧 사이에 오고간 말이 대화 형식으로 길게 서술되고 있다. <史禍首末>과 <褒贈祀典>이 합쳐져 있어 무오사화의 전말과 그의 현창 운동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글은 ≪일두집≫에서 단일 제목으론 가장 많은 분량의 글이다. |
讚述 (52) | 이 글은 남효온의 ≪秋江冷話≫·≪秋江集≫·<師友名行錄>‚ 이황의 ≪退溪集≫의 <與任虎臣書>‚ 조식의 ≪南冥集≫의 <遊頭流山錄>‚ 노수신의 <盧信古堂碑>‚ 노진의 <長水錄>‚ 유희춘의 <鍾城記聞>‚ 任輔臣의 ≪丙辰丁巳錄≫‚ 유성룡의 <戊午黨籍>‚ ≪海東野言≫‚ 정구의 <伽倻錄>‚ ≪輿地勝覽≫ 등에서 정여창 관련사적을 전재하고 있다. 남효온의 글에서 정여창의 자를 伯勗라 쓰지 않고 自勗로 쓰고 있다. |
詩章八 (58) | 岳陽亭(兪好仁)‚ 賀宰安陰(曹伸)(五首)‚ 咸陽鄕校(金安國)‚ 安陰鄕校‚ 灆溪書院(李愰)‚ 花開洞憶先生遺跡(盧禛)‚ 永溪書院(金昌翕) |
實紀跋 (61) | 글제목이 <跋>이 아니고 <실기발>인 이유는‚ ≪일두유집≫이 ≪일두속집≫과 합간되어 간행되기 이전에 ≪일두유집≫이 먼저 간행되었는데 그 때의 책이름이 ≪실기≫였기 때문이다. 이재의 <실기중간발>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정구가 편집한 정여창의 <실기>의 간행에 즈음하여 張顯光(1554-1637)이 쓴 글. 정여창의 도와 덕을 혼자서 완전하게 구명함(自盡)과 스스로 터득함(自得)으로 평가하고 있다. |
實紀重刊跋 (62) | 李縡(1680-1746)가 정여창의 <실기>를 중간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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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 일두선생속집
15-16c |
CE |
일두유집 (一蠹遺集) |
奎 15508 |
본집에서 ≪일두유집≫은 원래 鄭逑가 정여창의 후손 秀民과 함께 1635년에 수집 간행하였고 1743년에 李縡가 중간했던 <文獻公實紀>의 새로운 이름이다. 그래서 유집 권말에 張顯光과 이재가 발문을 쓰면서 제목을 <跋>로 달지 않고 <實紀跋>이나 <實紀重刊跋>로 쓰고 있다. 그 뒤 새로 증보한 시문 및 관계기록을 재편집하여 田愚의 교정을 거쳐 1919년 남계서원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것이 ≪일두속집≫을 포함한 ≪일두집≫이다. ≪일두집≫ 판본에는 규장각본(유집 <奎 15507>‚ 속집 <奎 15508>)과 국립중앙도서관 의산문고장본(<의산古 3468-文70-85>)이 있다. ≪일두유집≫이 규장각본에서는 2권본으로 되어 있고 의산고본에서는 3권으로 되어 있다. 차이를 본다면 의산고본에는 <事實大略>·<史禍首末>·<褒贈祀典>이 권2에 별도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나 규장각본에는 <사실대략> 제목에 나머지 두 내용을 포괄하여 권2에 수록되어 있다(규장각본 <일두선생유집범례>를 참조). 또 규장각본의 권2에 수록된 내용이 의산고본에서는 권3에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일두속집≫의 경우에 두 판본은 모두 4권으로 편집되어 있으나‚ 의산고본 권1의 <答李仲平>·<答缺察訪>과 권2의 <道山書院請額疏>가 규장각본에는 卷之四 追錄의 형태로 문집의 말미에 부기되어 있다. 이에 대한 규장각본의 문집 말미를 보면 문집을 판각한 후 위 3편의 글을 추가로 수집하게 되어 차서를 재정비하지 못하고 편의상 편말에 부기한다고 주를 달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본다면 규장각본은 ≪일두집≫이 의산고본의 형태로 완비되기 이전의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일두집≫은 정구의 <문헌공실기>→이재의 <문헌공실기>중간본(즉 ≪일두집≫ 舊本)→규장각본→의산고본의 과정으로 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여창의 시문은 무오사화로 거의 일실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그의 유문이나 관련 사적을 수집하여 문집을 만들었다. 따라서 자료의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글의 저자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고‚ 글의 중간 중간에 <缺>자로 표시되어 내용이 탈루된 곳도 많고‚ 정여창의 본인의 작품인지 의심되는 경우도 있다. 즉 ≪일두유집≫ 권1의 <答缺察訪> 끝의 소주를 보면 ≪일두유집≫ 권1에 수록된 시 7수와 서 5편은 다른 사람의 문집·內閣·다른 사람의 古箱에서 수집했다고 한다. 앞의 두 경우는 어느 정도 자료로서의 신빙성이 있지만 마지막의 경우에는 글자의 탈루가 많고 저자로 정여창의 이름이 쓰여 있어 수록하지만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를 달고 있다. 또 ≪일두유집≫ 권1의 <立志論> 끝의 소주를 보면 ≪일두유집≫ 권1의 論 3편(<理氣論>·<善惡天理論>·<立志論>)과 <宣平襄公行狀>을 현풍의 郭孝根 가장본에서 수집했다고 되어 있다. <宣平襄公行狀>은 정여창의 <실기>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많다. 3편의 論은 자료로서의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저자로 정여창의 호가 기재되어 있어 수록한다고 주를 달고 있다. 저자의 측면에서 볼 때 약간의 시와 제문이 정여창의 저술임이 분명하고 나머지의 경우 저자 문제가 불확실하다. 또한 대부분의 글이 정여창을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문묘종사하거나 서원에 배향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어 현행 ≪일두집≫을 통해 정여창 본인의 사상을 추적하기에는 불충분한 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
정여창 (鄭汝昌) |
1450-1504 (세종32-연산군10)字: 伯勗·自勗‚ 號: 一蠹‚ 本貫: 河東‚ 父: 六乙‚ 母: 崔氏 |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써다가 金宏弼과 함께 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魯論≫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성종 11)년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8월에는 성균관 上舍의 同列에서 그를 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하고‚ 어머니가 죽자 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岳陽洞에 들어가 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趙孝仝과 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그대의 행실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는구나! 그대의 효자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이 말하니 이 점이 바로 그대의 선한 행실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로 있을 때 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하였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安陰현감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疾痼가 賦斂에 있음을 알고 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 때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광해군 2)년 문묘에 陞廡되었다. 나주의 景賢書院‚ 상주의 道南書院‚ 함양의 灆溪書院‚ 종성의 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文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