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 불교철학 01 신심명
수호천사
불교철학 01 신심명
윤홍식의 “신심명” 강의(00:00-01:10:51)
삼조三祖 승찬僧璨 지음
윤홍식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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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심명(信心銘)은 믿는 마음에 대해서 명(銘)은요, 쇠 금(金)자죠. 쇠예요. 쇠에다가 이름 명(名)자니까요 이름 새겨 놓은 거죠. 요즘 어디 가면 잘하는 짓 있잖아요, 한국인들이. 아주 그 벽, 돌에다가 자기 이름 새기는 거. 그러니까 이거는요, 돌에다 새긴 건 오래 가죠, 마음에 새겨둘 글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신심(信心)에 대해서 내가 아주 마음에 새겨둘, 돌에다 새긴다 쇠에다 새긴다 생각하고 새겨둘 말, 이런 식으로. 이게 신심은 믿는 마음인데 이 말이 되게 좀 다르죠. 일반적으로 신심은요 내 밖에 있는 뭔가를 믿어요. 이 믿을 신(信)자 자체가요 말씀, 남의 말이에요. 남의 말. 이 사람 인(人)자가 남이거든요, 한문에서는. 남의 말을 제가 믿는 거예요. 얼마나 오죽하면 믿겠습니까. 말이 좋으니까 믿죠. 그래서 대상이 밖에 있어요. 하나님을 믿고 부처를 믿고. 불성이 내 안에 있다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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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못 느끼니까 어차피 밖에 있는 거예요. 내 생각에 있는 개념이거든요. 그 개념을 믿어요. 그걸 일반적으로 신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신심명은 자체가 뭐냐면 그게 신심이 아니라는 얘기를 할려고 쓴 거예요. 진짜 신심이 뭔지 들려줄게. 고거 좀 새겨둬라. 이런 거죠. 그래서 이런 얘기가 이제 나오는 근거는 화엄경에 근거해요. 화엄경에서요 한 보살이 나오려면 처음에 믿어요. 별수가 없죠. 내가 부처인지 모르니까 남의 말을 믿어요. 처음에 믿다가 그다음에 뭐가 들어가냐면 10신(信) 열 가지 단계의 믿음을 성취한 다음에 10주(住)에 들어가요. 화엄경 계제(階梯)에서 보살이 10주 보살에 들어가면 믿다가 탁 머무를 주(住) 탁 안주(安住)가 와요. 뭐냐 하면 이때 깨쳐요. 예, 그래서 이때가 “초발심(初發心)이 곧 정각(正覺)이다”라고 하는 얘기가 이때예요. 왜냐하면 이 10주 중에 제 1주가 발심주예요, 1주가. 진짜 발심을 해요. 이유가 뭐냐 하면요 믿음이 꽉 차면 부처님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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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이렇게 믿다가 진짜로 딱 뚫리면 “아! 부처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부처였네”라는 걸 알아요. 그 깨달음, 불(佛)이라는 걸 탁 깨달을 때가 진짜 발심(發心)이 되고, 그때가 정각이라는 게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가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그래요. 초발심이 정각이다. 이게 화엄철학의 핵심이에요. 이 신심명이라는 건 그걸 말해요. 우리가 처음 믿기 시작한 그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꽉 차 가지고 불성이 밖에 있는, 좋다는 걸 알고 믿었는데 “내가 부처였구나” 하는 걸 깨닫는 자리예요. 진짜 깨달음을 얻은 게 진짜 신심이다. 내가 부처라는 걸 바로 아는 게 신심이다. 이 얘기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전체 내용이요 요즘 불교에서 얘기하는 화두선(話頭禪)이 아니에요. 화두선은 송나라 때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스님이 이제 개발한 걸로요. 이제 뭐죠. 그 전에 당나라 때 선사들이 해 놓은 “너가 바로 부처다” 이런 얘기들을 잔뜩 모아 가지고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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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의심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뭐꼬? 또 뜰 앞의 잣나무. 근데요 그 선문답의 내용도 그렇고요 이 신심명도 그렇고 지금 화두 그런 걸 쓰기 이전의 시대 글들이라서요 이 글들은 바로 너가 부처라는 얘기만 합니다. 화두로 우리가 삼는 선문답이나 화두 자체도 사실은 너가 부처라는 얘기만 있지 화두 잡으라는 얘기는 없어요. 곧장 너가 부처라는 걸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지금 화두가 하나의 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알고 화두를 하셔야 돼요. 하시더라도 원리를 알고요. 그래서 이 신심명은 곧장 너가 부처다 하는 그걸요 반조선(返照禪)이라고 합니다. 조가요 조가 이게 후라쉬 비치는 겁니다. 그렇죠. 이게 한자로 비출 조(照)자예요. 태양이 비춘다고 그래 가지고요. 그런데 우리가 보통 후라쉬를 비춰서 어딜 비칩니까? 요런 거 비치죠. 오감이던가 내 생각 내 감정에요. 내 생각 내 감정 내 오감에 요걸 비치고 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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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는요 뒤집을 반(返)자입니다. 이걸 갖다 탁 뒤로 비치면 이게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 격이 돼요. 나는 항상 내 생각의 동일시라고 “나는 이게 옳다고 생각해.” 생각이죠. “나는 기분이 좋아.” 감정이죠. “나는 뭘 보고 있고 뭘 느끼고 있어.” 오감. 요거 아니면 내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혼자 앉혀 놓으면 죽어요, 혼자 있으면 심심해서. 뭔가에 동일시를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진짜 도인은 혼자 있을 때 표가 나죠. 이걸요, 반조를 해요. 자기가 자기랑 연애해요. 너무 좋아요. 자기가 자기를 만나서. 우린 보통 밖에 있는 뭘 만나야 좋을 것 같은데, 도인은 다른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부처를 봐요. 내가 원래 부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보고 있으면요 둘이 아니게 돼버리고 하나가 돼버려요. 이게 신심입니다. 그래서 반조선이란 이 반조란 말이 실제 신심명에서 나와요. 안에서 반조하라고, 자기를 돌이켜 비추라고. 근데 그냥 반조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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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쓰구요. 그냥 비추란 말이 나오면요 신심명에서 나쁜 뜻이에요. 밖을 비춰보고 있는 거예요. 내 생각 내 감정 내 오감 그것도요 살아와서 지금까지 수백 번 수억 번 변했고 지금도 계속 변하고 10년 뒤에는 제가 뭘 생각할지 무슨 감정 느꼈는지 뭘 봤는지 몰라요. 무상히 흘러가 버리는 것에만 계속 거기에 동일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거를 흐름을 갖다가 거슬러서 안을 들여다보라. 그럼 내 안에는 생각 감정 오감에 물들지 않는 뭐가 있냐면요? 이게 있어요. 생각이 일어나는 걸 알아차리는 자, 생각이 가는 걸 알아차리는 자, 감정은 일어나고 사라지잖아요.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에 무대가 되는 나가 있어요. 그게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글자만 보면 글자만 있는 것 같지만 여백이 계속 있어요. 글자 사이에도 계속 여백이 있어요. 우리 마음의 여백을 찾으시라는 거. 거기만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안 변했어요. 생각에 물들지 않는 자리. 생각에 물든 자리는, 감정에 물든 자리 오감에 물든 자리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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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변하고 있습니다. 무상해요. 그래서 변치 않는 자리가 부처라는 걸 알고 내 마음에 원래 있는 그 고요한 그 자리를 찾은 거 이게 신심입니다. 진짜 믿음. 이 정도 지금 제가 설명 드리고요. 바로 들어갈게요. 이 첫 번째가요 모든 선문답에서 주요 주제로 쓰이는 구절입니다. 워낙 유명해요. 지도(至道)는 무난(無難)하니 지극한 도는 무난, 어려움이 없으니 어려울 게 하나도 없으니. 그래서 제가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쉬워요. 지극한 도는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유혐간택(唯嫌揀擇) 오직 간택(揀擇)함을 싫어할 뿐이다. 이거다 저거다 따지지만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지금 이 순간요 성함도 모르십니다. 지금 여긴지 어딘지 모르세요. 그쵸. 성함 모르십니다. 간택 안 하고 있는 겁니다. 근데 존재는 하시죠. 존재는 하시는데요 지금 이름도 몰라요. 여기 어딘지 모릅니다. 상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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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요 나는 존재감은 있지만 어떤 생각도 없이 고요하실 겁니다. 그게 지도(至道)예요. 그게 도예요. 그게 견성 자리입니다. 지도는 무난하니 어렵지 않으니 간택만 하지 마라. 근데요. 거기서요 그 고요함에 머물다가도요 “이게 진짜 견성이야?” 하면 간택입니다. 다시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다시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요 다시 내려놓으세요. 몰라라고 하세요. 저는 몰라라는 법 하나면은 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벽암록(碧巖錄)에요 첫 번째 나오는 화두가 몰라입니다. 양무제(梁武帝, 464~5490), 달마가요 양무제 만났는데 “당신 뭐냐? 뭐하는 사람이냐?” “몰라요.” 그랬어요. “저는 모르는데요. 제가 저를 모르는데요.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요.” 몰라하는 순간요 다 내려놔 버리신 거예요. 그게 벽암록 제일 첫 번째 화두예요. 그 화두를 풀면요 나머지는 다 풀립니다. 이게 똑같아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그냥 몰라만 하시면 된다. 간택만 하지 마라. 그 설명을 한 번 더 해줍니다. 단막증애(但莫憎愛)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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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莫)이 하지 마라는 겁니다. 증애만 하지 마라. 증오와 애정. 싫어하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마라. 그러면 통연명백(洞然明白) 확, 통연이라는 건 확 튀였다는 겁니다. 확 트여 명백할 것이다. 지금 성함 모르시는 모르는 마음에요 뭔가 걸리는 게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걸리는 건요 생각이 일어났을 때만 걸려요 그 텅 비어 있는 상태에서는요 걸리는 게 하나도 없고 좋다 싫다도 없습니다. 예, 그쵸. 그 자리가 지도(至道)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쉬운 법이에요. 그런데요. 이걸 들어가야지 하면서 결국은 내가 화두를 통해야 되고 또 의심을 해야 되고 이렇게 하는 건 이미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냥 이 말 그대로 믿고 그냥 하세요. 그러면 이미 신심을 얻으신 거예요. 그러면 왜 그러냐면 여기서 한 생각을 일으키면요 세 번째 단계에 빠져요. 미세한 차이가 나도 호리유차(毫釐有差) 호리는요 터럭 호(毫)자인데 터럭만큼의 눈금이에요. 눈금이에요. 리(釐)는 눈금인데요. 터럭만한 눈금의 차이만 있어도 천지현격(天地懸隔) 하늘과 땅처럼 크게 벌어져 버린다. 현격해진 현격한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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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게 뭐냐면요 모르는 마음 텅 빈 마음에서요 한 생각을 일으키면요 “근데 이 자리가 진짜 이 자리 맞아?”라고 하면요 이미 에고의 세계 작은 자아의 세계에 떨어져 버려요. 근데 생각만 안 일으키면요 나는 천지와 하나인, 우주와 하나인 상태예요. 자연과 하나예요. 제가 여기까지만 내 몸이라고 말하기 전에 저는 그냥 자연의 일부죠. 가만히 있으면 자연인데 여기까지만 내 거라고 생각하면 에고가 생기고 남의 것 뺏어다가 내 것 채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요. 그게 따라서 일어나죠. 그래서 미세한 차이 하나가 천지처럼 현격하게 멀어지게 한다. 네 번째요 눈앞의 나타나게 하고 싶거든, 욕득현전(欲得現前) 참도를요 그럼 그게 견성하고 싶거든 이에요. 도를 눈앞의 보고 싶거든, 현전하게 하고 싶거든 막존순역(莫存順逆) 좋다 싫다 하지 마라. 순(順)은요 아 편한데요. 역(逆)은요 이 상황 짜증나. 직장생활도요 아 짜증나. 딱 좋아 요즘. 두 말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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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는 겁니다. 도는요 동양에서 음양을 초월하라고 하거든요. 그게요 현상계는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어요. 양의 힘과 음의 힘, 플러스 마이너스, 좋다 싫다. 예 이 두 개는요 절묘해요. 항상 공존해요, 이 두 개는. 왜냐하면요 제가 너무 좋아 죽겠다고 할 때도요 싫은 게 없는 것 같죠. 너무 좋아 죽겠다 할 때도 싫다는 걸 전제하고 하는 얘기예요. 싫은 상황이 올 수도 있는데, 내가 지금 좋다는 거지 싫다는 게 없으면요 좋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거든요. 비교가 서로 비교해서 지금 존재해요. 그러니까 항상 우주는 뭔가 비교치가 있어요. 짝이 있어요. 그러니까 짝이 없이 해버리면요 그냥 도예요. 이 두 개를 나누지 않으시면 도예요. 이 두 개를 항상 좋다 싫다 하지 마시라는 게 아니고요. 이거예요. 제가 맛있어요. 먹고 “아 맛있다” 하면 돼요. 맛있는데요. 제가 맛있다가 돼버리면 안 돼요. 제가 오감이 돼 버리면 안 돼요.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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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모르는 텅 빈 마음에 뿌리를 두고 살면서 이 상황에 대해서 맛있다라고 하고요. 맛없는 걸 보면 맛없다고 하고요.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요. 좋으면 좋다고 하는데요. 늘 이게 텅 빈 상태에서 나오는 말이랑 내가 좋아가 되고요. 내가 싫어가 되고 내가 죽겠어가 돼 버려요. 매순간 동일시가 일어나요. 동일시만 안 하시면요 별걸 다 부릴 수가 있어요. 그래서 노자가 무위(無爲), 아무것도 안 하면 무불위(無不爲) 못할 게 없다고 그래요. 나라는 것만 떼놓으면 우주에 두려울 게 없고 못할 게 없다고 하는 게, 예 그게 초월, 도랑 자연과 하나가 된 마음에는요 우주가 다 나랑 둘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바다 위에 파도인데요, 바다 위의 파도인데 파도 얼마나 무상합니까요. 태어나서 죽기까지가요 한 순간이에요. 그런데 이 파도가요 내가 원래 바다라는 걸 알고 사는 파도와 파도라고만 생각하는 파도는 정말 슬프겠죠. 순간순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겁니다. 그 짧은 순간 살다가는 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근데 내가 원래 바다에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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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다른 모습이라는 걸 알면요 우리가 자연의 다른 모습이고 자연 자체는 영원하다는 걸 알면 다른 인식을 갖게 되고 다른 그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순역(順逆)을 아주 없애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좋다 싫다 절대 안 하리라. 의지로 그걸 해보리라. 그게 아니고요. 좋건 싫건 거기에 한 걸음 떨어질 수 있냐는 거죠. 그건 뭐냐면요 모르는 마음입니다. 모르시는 거죠. 지금 이 순간요 좋다 싫다 말만 하지 마세요. 그 상황이 좋건 싫건요 말하지 말고 나는 늘 나의 텅 빈 자리, 오염되지 않는 자리를요 늘 인식하실 수만 있다면요 좋다고 해도 상관없고 싫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여기서 좋다 싫다 하지 마라는 건요 그 말 한번 하지 말아 보시면 내면의 그 고요한 자리가 바로 드러나요. 그 자리를 아신다면요 좋다 싫다 해도 상관없어요. 거기 안 빠질 테니까요. 근데 다시 좋다 하면서요 좋다의 시야가 좁아지면서 이 좋아서 이 상황 바꾸기 싫다라는 마음이 생기면 이미 집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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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텅 빈 마음이 아니에요. 그 마음에는 바로 또 그 반대 에너지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거스르고 순함이 서로 다투는 것은요 거스르는 건, 내가 싫구요. 순한 거 편한 건 내가 좋아요. 요 두 개를 서로 내 마음에서 계속 다투고 있는 것이 마음의 병통이다. 왜냐? 이거예요. 좋은 상황이 펼쳐지면요 “이 상황이 오래 갔으면 좋겠는데 제발 다시는 힘들어지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거고요. 힘들어지면요 “죽겠네.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네.” 예요. 마음이요 사람이 여기 롤러코스터를 타는 거죠.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어요. 올라가면 소리 지르고 좋다고 오래 있고 싶다고. 내려가면 죽겠다고 소리 지르고 그런데 도인은요 이 평정심을 갖는 겁니다. 도인은 그래서요 올라가도요 올라간 걸 알지만 이 중심을 잃지 않아요. 떨어져도요 중심을 잃지 않으니까 올라가도 더 오래 올라가요. 오바를 안 하니까요. 떨어져도요 좌절을 안 하니까 금방 회복하고 올라와요. 오히려 더 잘 사는 도인데 좋다 싫다를 집착하면 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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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빨리 떨어져요. 올라가서요 “와 좋다” 하면은 오바를 하게 돼 있고 거만 떨게 돼 있어요. 그러면요 엄청난 사람들이 와서 끌어내리고 싶어 해요. 그 상황을 깨게 하는 우주의 움직임이 생긴다는 겁니다. 노자에서 이런 얘기를 계속하거든요. 노자 또 보시고요. 그래서 위순상쟁(違順相爭) 좋고 싫음이 자꾸 다투는 거 이게 마음의 병통이다. 요것만 내려놓으면 부처다 예요. 근데 이 말을요 곧이곧대로 안 들으세요. “그거 내려놓는다고 부처되겠냐?” 지금도 그런 마음이 드신다면 지도무난 유혐간택을 좀 잘 이해를 못 하신 겁니다. 그냥 그 생각 하지 마세요. 편하시지 않나요? 아무 생각하지 마세요. 힘들어도요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 거지 내가 힘들다는 것까지 보탤 필요는 없거든요. 예. 모른다 하세요. 괜찮다고 하세요. 모른다나 괜찮다가 좋아요. 생각을 끊게 만들어줍니다. 시끄러운, 이 마음의 병은 다 어디서 나오냐면요? 우리 마음에 두 가지가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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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고차원 마음이죠. 참나가 있어요. 이거는 생각 이전의 마음입니다. 생각 감정 오감이 없어요. 그럼 이걸 어떻게 표현하냐면요 옛날 성인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텅 빔과 알아차림으로 표현해요. 텅 비어 있는데요 그냥 허공이랑 달라요. 허공은 인식능력이 없잖아요. 그런데 신기하게 이 자리는요 다 알아차리고 다 바라보는 자예요. 에고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바라보는 자, 알아차리는 자예요. 그래서 이거를 티벳 같은 데서도 “텅 빈 각성”이라고 그래요. 텅 빈 각성이라는 게 뭘 깨쳐서가 아니고요. 알아차려요. 아프면 아픈 줄 슬프면 슬픈 줄 그 알아차리는 자가 있기 때문에 이 자가 있으니까요 생각 감정 오감이 우리 에고의 마음이 존재해요. 이 자리가 있으니까요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난 줄 알아차리고요. 눈에 뭐가 보이면 보이는 줄 알아차리고 들리면 들리는 줄 알아차려요. 그래서 이 내용물에 집착하는 게 에고예요. “요건 내 거다” 하는 마음이에요. 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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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생각도 있고요. 감정도 있고 오감도 있어요. “내 생각 내 감정 내 오감” 우리가 가진 건 이것밖에 없어요. 그럼 이것도 갖지 않았냐. 이게 오감에 안 보인다면 우리가 이걸 알 수 있나요? 그래서 우리 오감밖에 없어요. 오감 생각 감정 빼고는 우주에 존재하는 게 없어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게. 더 좋은 게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한테는 그것밖에 안 보여요. 뭐 은하니 뭐 우주를 얘기해도요 오감에 안 들어오는 우주를 어떻게 얘기합니까? 그래서 요 세계에 들어온 거 요걸 내 거다 하고 있는 마음이 에고예요. 여기까지 내 거, 이 몸뚱이까지 내 거, 요게 마음의 병통을 일으키는 근원입니다. 자꾸 따져요. 좋다 싫다, 좋은 거 나쁜 놈 이렇게 따지고 있는데, 얘는요 이 에고를 따지지 말라고 하면 안 돼요. 얘는 그러려고 원래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 몸살림을 위해서. 냅두세요. “넌 따져라” 하고 참나를 모르는 게 문제지 에고가 시끄러운 게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요 성인도 에고는 시끄러워요. 왜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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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면 밥 달라고 그러고 계속 졸라요. 성인도 육신 있는 한에는요 별의별 마음이 일어나게 돼 있어요. 이거 없애는 게 부처가 아니고요. 참나 모르는 게 지금 중생이 된 이유입니다. 참나 알면 부처예요. 참나를 알면요 이 에고살림이 질적으로 변해요. 달나라 갔다 온 분이 지구에서 똑같이 산다고 해도 이미 인식 세계가 달라져 있어요. 그래서 이 참나를 정확히 알고 사시면요 이 에고가 아무리 보채고 시끄럽게 해도요 애기 돌보듯이 그냥 보게 돼요. “너가 그렇지.” 하고 안 따라가요. 근데 참나를 모르는 분은 이게 전부기 때문에 따라가요. 좋다 그러면 거기 빠지고, 싫다 그러면 죽겠다고 하고. 자기 소중한 생명도 놓아버릴 정도로 빠져요. 네, 요것만 잘 보시면 마음의 병통은 다 이 에고가 좋다 싫다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면 좋다 싫다 하지 마라가 아니고요. 한 걸음 빠져나오시라. 좋다 싫다가 원래 없는 그 상태로 바로 들어가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른다 하시면 바로 들어가요. 모르시죠? 이름 모르세요. 여기 어디인지 모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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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른다는 게 근본적으로 뭘 모른다는 거냐면요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겠다거든요. 주객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 에고의 세계에서는요 나라는 에고가 주가 되면요 상대방은 객이 돼요. 그래서 늘 에고는 따져요. 나와 남. 이 두 가지로 나뉘거든요. 나라는 존재와 내 눈에 비친 저 남. 저 카메라도 남이고 친구도 남이고 다 남이세요, 저한테는. 근데 제가 이거를 안 가르면요 둘이라고 생각을 안 해버리고 “몰라” 하면 알아차리고 다 보고 듣되 제가 몰라 라고만 하면요 생각을 안 세우기만 하면 하나가 돼요. 오감은 오히려 참나를 방해를 덜 해요. 우리가 좋은 음악 듣고 좋은 경관 보면요 그대로 깨어나요. 둘이라고 생각이 안 들어요, 자연과 제가. 근데 이 생각이 끼어들면 망쳐요. 저거는 뭐고 저거는 뭐고 하고 나면은요, 다 갈라져 버려요. 그럼 아까 같이 하나 된 감정을 못 느끼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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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국어에서 시 공부하는데 시 읽고 좋으면 되는데 그거 다 쪼개서요 여기서 님은 조국이고 뭐는 뭐고 다 하고 나면 재미가 없어요. 똑같아요. 그걸 알았더라도 모른다 하실 수 있으면 다시 재미있어져요. 순수하게 그냥 나와 남을 안 가르셔야 재밌는 게, 재미는요 외부 대상에서 이 대상들이 주는 재미가 아니라 참나 자체가 원래 엄청 재밌는 놈이에요. 재밌는 자리예요. 늘 행복이 넘치는 자리예요. 왜냐하면 여기는 고뇌가 없거든요. 참나는 죽을 걱정도 안 하고요. 이 생각 감정 오감이 없으니까 힘들 일이 없어요, 세상살이가. 늘 행복한 자리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힘들 때는요 이 에고를 다스려서 좋게 하려면요 생각을 바꾸고 감정을 바꾸고 오감을 바꾸려고 하면 너무 힘들어요. 그냥 원래 행복한 자리인 참나를 바로 인식해버리면요 그냥 여기서 이렇게 관점만 이동하면 돼요. 내가 작은 이 몸뚱이에 갇힌 자아라는 생각을 잠시 잊고 “몰라” 라고 하고 세상과 나를 둘로 안 가르는 순간 내면에서 희열이 나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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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육체적으로 뭐가 나오냐면 세로토닌이 실제 나와요. 그래서 이 몸까지 기분이 좋아지게 돼 있어요. 명상이 잘 됐냐 안 됐냐는 세로토닌이 나왔냐 안 나왔냐 예요. 안 나오면 그거는 안 좋아요, 기분이. 진심으로 저 속까지 안 풀려요. 그 정도는 지금 뭐냐면 이 에고가 가지고 있는 어떤 저항력이 엄청 크다는 겁니다. 그래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에고는 무시할수록 저항력이 약해져요. “에고가 저항이 세니까 내가 더 세게 한번 밀어붙여 보자.” 이게 아니구요. “그러든지 말든지. 에고 너는 그래라”라고 해야만 참나가 깨끗하게 인식이 돼요. 생각을 안 해야 참나를 인식하는데 에고랑 자꾸 싸우고 있으면 어떻게 참나로 갑니까? 예, 이런 겁니다. 그래서 6번이요. 현명한 종지를 알지 못하고 이 원리를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구나. 제가 말한 지금 그 내용입니다. 불식현지(不識玄旨) 현명한 종지를 잘 모르고요. 이 현 자 검을 현(玄)자니까 잘 안 보이는 종지(宗旨)라는 거예요. 신비한 종지. 그런데 도로(徒勞) 이게 도가 한갓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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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히. 공연히 수고만 하는구나. 염정(念靜), 고요하게 할려고요 생각을 고요하게 할려고 수고만 하는구나. 안 된다는 거예요. 이 얘기입니다. 이 에고를 고요하게 자꾸 잡으려고 하지 마라는 겁니다. 에고는 원래 시끄러운 게 맛이에요. 그러게 놔두세요. 문제는요 참나를 고요한 자리를 인식 못 하는 우리가 문제예요. 이 자리는요 이 참나 자리는 둥글기가 허공과 같아서요 원동태허(圓同太虛) 원만하기가 동 같을 동(同)자죠 태허랑 같아서. 태허는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상태죠. 큰 허공인데요. 무흠무여(無欠無餘) 흠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모자라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요 모자라고 남는 게 보인다는 건 우리 인식 범위 안에 들어왔을 때거든요. 인식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모른다 해서 텅 비어있는 마음을 어떻게 재겠습니까? 생각도 없는데 뭘로 재겠습니까? 그 비유를요 예전에 이런 저기 인도에서도 이런 말을 많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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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인형이 바다를 재려고 들어간다 에고가 소금인형이에요. 소금인형이요. 바다 재겠다고 참나를 한 번 내가 크기를 얼마나 태허한지 보겠다고 들어갔다간요 사라져버려요. 모른다로 들어가려면요 없어요. 잴 사람도 없어지고 재야 할 대상도 사라지고 텅 빔빈만, 텅 빈 알아차림만 존재해요. 텅 빈 알아차림이 부처 자리입니다. 텅 빈 알아차림만 존재하실 때 뭘로 재고 뭘로 남고 모자란지 따지겠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근데요. 여기서 이게 더 좋고 저게 더 좋고 이 상태가 더 낫고 요 말이 나오면요 뛰쳐나오겠죠. 그 상태에 못 머물겠죠. 양유취사(良由取捨) 진실로 취사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 그와 같이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 그러는 게 맞는데 텅 빈 알아차림이 늘 흘러야 되는데 좋다 싫다, 이게 맞다 저게 틀렸다라고 따지는 순간 우리는 빠져나온다는 거죠. 그러면 여기 어떻게 들어가셔야 되겠습니까?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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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까지 강의했잖아요. 참나로 곧장 들어가는 법 이제 좀 아시겠죠. 올바른 태도만 취하실 수 있으면 돼요. 완벽할 필요는 없고요. 어떤 태도를 취하셔야 되겠습니까? 마음이 시끄러워요. 지금 좋다 싫다가 올라오고요. 어떻게 해야 될까 고뇌가 올라올 때 어떻게 대처하시는 게 제일 맞겠습니까? 여길 따라가도 안 되고요. 그렇다고 “나는 고요한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라고 해도 안 돼요. 왜냐하면요 참나는 원래 고요한 자리지 고요하고 싶다고 해서 고요한 자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그냥 이 상황을요 “모른다”고 하시면 그냥 이미 고요함이라는 겁니다. 그냥 고요한 자리로 도망가세요. 그냥 들어가 버리세요. “고요하고 싶어”라고 말을 하고 있는 동안은 어차피 고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도 하시면 안 돼요. 그렇죠. 깨끗하게 고요해지셔 버리면 된다는 거죠. 모른다 하는 순간 깨끗하게 고요해져요 그런데 “고요해야지. 뭐 이렇게 뭐 허공으로 들어가야지” 이런 생각도 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모른다”고만 하세요.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인연을 쫓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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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 세계를 따라가지도 말고요. 좋다. 싫다를 따라가지도 말고 공함을 인가함에 머물지도 마라. “아, 텅 빈 세계, 난 텅 비었구나.” 이 말도 하지 마라는 겁니다. 말도 생각이에요. 진짜 텅 빈 사람은요 텅 빔을 즐기는 거지 “텅 비었네 아까보다 낫네” 이런 말 안 해요. “텅 비어야 하네” 이런 말 하지 마라는 겁니다. 하나로 하나를 바르게 품으면 그 자리요. 그 좋다 싫다를 다 내려놓은 한 자리, 텅 빈 알아차림의 자리를 바르게 품으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그런 번뇌는 눈에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리라. 이게 어려운 것 같죠? 그런데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간장맛 짠 줄 알면 견성할 수 있다.” 이 얘기는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생각 감정에 빠질 때도요 엄청난 집중력으로 빠지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게 좋아 보여서 빠지는 거예요. 똑같아요. 지금 “모른다” 한번 해 보세요. 모르십니다. 텅 비었죠? 그 고요하시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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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데 힘드시나요? 힘 안 드세요. 그냥 간장 맛 짜다는 것처럼요 이건 고요하고 아까 시끄럽다 예요. 그럼 고요한 줄 아셨잖아요. 그냥 여길 즐기세요. 고요하단 말도 하지 마시고. 그럼 진짜 고요해지겠죠. 요 정도의 집중력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만 품으면은요 나머지는 다 사라져요. 그게 뭐냐면요 지금 저를 보시면요. 저를 보세요. 저를 보시면 제 뒷배경이 좀 덜 보이시죠. 그냥 저를 보셨는데도 저한테 엄청 집중해야 뒤에가 사라지는 게 아니고요 관심 가는 거 보면요 다른 게 안 보여요, 잘. 그래서 참나만 보고 에고가 잘 안 보이면 삼매예요. 에고가 너무 생생히 느껴지고 참나가 잘 안 보이면 속인이고요. 참나가 너무 잘 보이면 도인이에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 관심이 더 많을 뿐이에요. 간장 맛 짠 줄 알면 하실 수 있습니다. “세수하다가 코 만지듯이 견성한다”는 게 절대 빈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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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고요한 조금이라도 고요한 자리가 느껴지신다면요 자리를 갖다요 그 자리를 좀 더 관심 있게 보세요. 다른 내 마음의 소리가 덜 들릴 정도로 그냥 보세요. 푹 빠져보세요. 그럴 만한 매력이 있는 자리예요. 텅 비고 고요하고 평온한 자리이기 때문에 맛이 있어요. 은은한 맛이지만 처음에 자꾸 그거 보시면요 그게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날이 옵니다. 11번째요. 지동귀지(止動歸止) 움직임을 그치게 하여 고요함에 돌아가고자 하면 내 생각 갖다가 휘어잡아가지고요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려고 하면요 지갱미동(止更彌動) 고요함이 다시 더 움직이게 된다. 오히려 더 요동하게 된다는 겁니다. 생각 억지로 멈추어 하지 마세요. 그냥 무시하세요. 생각은요, 일어나고 사라지는 존재예요. 우리가 눈더러 보지 마라고 하면 되나요? 귀더러 듣지 마라고 하면 안 되듯이 에고한테요 에고는 생각이 본능이에요, 생각 감정이. 이거 일으키지 마라고 하면 죽습니다, 에고는. 세상에 안 사실 거 아니면요 허용하시고요 끌려가지만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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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만 끊으세요. 관심 끊는 법만 배우세요. 모른다 하시면요 모른다 하시면서 곧장 반조하는 거, 안으로 들여다보는 법만 익히시면 됩니다. 유체양변(唯滯兩邊) 이는 오직 양변에 막혀있는 거다. “움직이는 거를 갖다 고요하게만 만들면 내가 좀 편할 텐데” 이런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요함이니 움직임이니 이런 거에 막혀있다는 거예요. 진짜 고요하면 고요하다는 생각도 안 나는 자리인데요. 영지일종(寧知一種) 어찌 하나를 얻을 수 있겠는가? 텅 빈 마음 얻겠는가? 하나를 통하지 못하면 두 자리에서 모두 공덕을 잃게 된다. 그 예를 들어줍니다. 이게 일종불통(一種不通)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인데요. 어떻게 잃어버리냐면요 견유몰유(遣有沒有) 있음을 버리고자 하면은 있음에 매몰, 빠져버리구요. 그쵸. 내가 “아 좋다. 싫다. 버려야 되는데 왜 못 버리고 있지?” 하는 소리 하고 있는 동안 있음에 빠지구요. 종공배공(從空背空) 공함을 따르고자 하면 “내가 진짜 공에 들어가야 되는데” 하는 순간 아직 공에 못 들어가고 있어요. 말 멈춰야 들어가요. 예. 공은 텅 빈 자리이기 때문에 “부처가 돼야 되는데” 하는 요 생각하는 동안 부처가 못 됩니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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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선사들이 “부처가 뭡니까?” 그러면 “똥 막대기” 그래요. “똥 막대기다. 그거 더러운 똥 막대기 들고 있지 마라.” 해요. “고 말만 안 하면 너 부처인데.” “부처가 뭡니까?” “차나 마셔라. 고 말 제발 하지 말고 그냥 깨어서 차나 마셔라. 정신 차리고 차나 마셔라. 그 자리에 부처가 있다.” 입 틀어 막아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요 공을 따르고자 하면 공에 못 들어가요. 그러니까 그런 분한테 선사들이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으려고 하면은 뭐라 그러죠? “당나귀 해에나 견성한다.” 이래요. 당나귀 해는 간지(干支)에 없기 때문에 견성할 일이 없다라는 거예요. “마음을 내려놔야 부처인데 그 마음 가지고요 내가 부처를 멋진 부처를 한번 만들어 보리라 하는 동안에는 부처 못 된다” 하는 겁니다. 요것만 내려놓으시면 그냥 부처라는 겁니다. 15번째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요 오히려 도와 상응하지 못하니 다언다려(多言多慮) 하면요 전불상응(轉不相應) 안 돼요. 도랑 합쳐지질 못해요. 말만 하지 말고 생각을 버리면 절언절려(絶言絶慮)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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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처불통(無處不通)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을 것이다. 텅 빈 마음이 바로 생기잖아요. 그 텅 빈 마음이 부처기 때문에. 모든, 보세요. 이게 재밌는 게 생각 감정 오감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건 없어요, 우주에. 그쵸. 그러면 요거 넘어간 이 텅 비는 건요 우주의 뿌리입니다, 사실은. 우주의 가장 순수한 밑바닥이에요. 그러니까 그 자리를 바로 알면 통하지 못하는 게 없다는 겁니다. 이 얘기를요 부처님 때 이렇게 얘기를 해요. 아난(阿難)한테요 산에 가서 낙엽 이렇게 쌓였는데 낙엽 한 주먹 쥐어보라 그래요. 그럼 “저 산에 있는 낙엽이랑 니 손에 있는 낙엽이랑 같냐 다르냐?” 그래요. “똑같습니다.” “그렇다.” 사념처(四念處: 身·受·心·法). 부처님이 강조하시는 몸 마음 개념 감정 요 네 개가 저 산에 있는 거나 니한테 있는 거랑 똑같다. 그러니까 각자 자기 안에 있는 이 생각 감정 이 오감만 잘 관찰하면 온 우주가 그거 아닌 게 없기 때문에 그거나 이거나 너가 정확히 다 알게 된다. 밖에 있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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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 감정 오감의 뿌리를 알게 된다면 중용에서요 희노애락미발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하는 얘기랑 같은 겁니다(喜怒哀樂之未發 天下之大本也). 내가 생각을 하나 안 일으켰을 뿐인데 왜 거기가 천하의 중심이냐? 천하는 다 그걸로 이루어졌거든요, 희노애락으로. 생각 감정 오감으로. 그러니까 다른 데 어디 세상 어디에 던져지셔도 중심을 잡아서 균형을 맞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유교 중용 얘기할 때 그게 첫 번째 나오는 이유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바로 중심으로 돌아가 버리면요 귀근득지(歸根得旨) 하면 종지를 얻게 되고 수조실종(隨照失宗) 밖으로 비춤을 따르면, 이게 비춤이 이겁니다. 생각에 빠지고 감정에 빠지고 오감에 빠지면 종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실종. 예. 18번째 수유반조(須臾返照) 잠깐이라도 자신의 내면, 바라보는 자를 돌이켜 보면, 자신을 반조해 보면 여기서 반조라는 말이 나오죠. 그래서 반조선(返照禪)이라는 겁니다. 자기만 돌이켜 보면 승각전공(勝脚前空) 눈앞의 허공보다 뛰어날 것이다. 요 말 좀 이상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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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우리가 명상한다고 눈 감고 가만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으면요, 보세요, 눈 감고 있으면 눈앞이 텅 비어 있죠. 그게 눈앞의 허공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또 허공이 좋다는 말을 들어서 눈앞의 허공에 집착해요. “내가 좀 도를 얻었나 보다. 눈앞이 텅 빈 거 같다.” 그게 아니거든요. 그거는 오감이에요, 지금 눈앞의 허공은. 이 허공(참나)을 찾으라고 얘기했더니 눈앞의 허공을 찾아 있어요. “마음이 확 트여 좋은 것 같다.” 이건 허공이에요. 내 감각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자기 내면을 보라, 그걸 보고 있는 자를 돌이켜 보라는 겁니다. 그 자리가 텅 빈 자리니까. 텅 비되 알아차림이 있어야 돼요. 거기는 그냥 텅 빈 자리잖아요. 그렇죠. 전공전변(前空轉變) 눈앞의 허공이 굴러 변하는 거. 이 눈앞의 허공은요 금방 변해요. 이 허공이 하나의 음이라면 양이 펼쳐지면 뭐냐면요 온갖 산과 나무와 이런 게 들어와요, 그 허공이 변해서. 그것도 한 생각 굴러서거든요,. 내 에고가. 개유망견(皆由妄見) 망령된 견해로 말미암은 것이다. 전공전변(前空轉變) 전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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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변하는 것은. 이건 한자가 한글이 안 돼 있네요. 개유망견(皆由妄見) 때문에 그렇다. 내가 “여기 이 몸만 나다.” 작은 나에 딱 집착이 생기는 순간 나와 남이 생기면서 남들이 변해간다는 겁니다. 남이 인식이 된다는 겁니다. 남이 인식이 된다는 겁니다. 남이라는 것들이. 저건 남이고 이건 나구나. 이런 게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거는 텅 빈 게 변한 거잖아요. 근데 그 허공은 그런 현상계의 씨알, 이 변화의 터전이었던 것뿐이지 참나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참나를 지켜보라. 20번째요 참됨을 구함에 쓰지 말고 오직 견해를 그쳐라. 이 말이 그겁니다. 참되려고 하지 마라, 제발. 불용구진(不用求眞) 부처 되려고 하지 마라. 유수식견)唯須息見) 그냥 생각만 멈춰라. 그러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 뭐니 자꾸 나오는 겁니다. 멈추려고요. 저 뜰 앞의 잣나무를 너랑, “뜰 앞의 잣나무 보라”고 했더니요 “저건 잣나무고 나는, 보는 자는 나고.” 이러고 보고 있으면요 부처랑 아무 관계가 없죠. 둘이 아니게 봐야 돼요. 뜰 앞의 잣나무, 당시 그게 앞에 있었겠죠. 고거 보라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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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정신 차리고 보기만 하면서 알아차리기만 하되 나와 남이라고 안 가르고 저게 잣나무니 뭐니 안 따지고 그냥 보면요 그 마음이 부처 마음이에요. 텅 비어서 보고 있는 마음. 그런데 한 생각이 굴러요. “부처 돼야 되는데.” 이러면 다시 빠져나와요. 부처 자리에서 튕겨 나와요. 이견부주(二見不住)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 좋다 싫다 맞다. 그르다 이 말만 하지 말고 신막추심(愼莫追尋) 조심하여 추구하지 말아라. 재유시비(纔有是非) 시비가 있자마자, 옳고 그름을 따지자마자 즉각 어지러워져 분연실심(紛然失心) 어지러워지면서 마음을 잃어버릴 것이다. 참마음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럼 옳고 그름은 따지지 말란 말이냐? 죽을 때까지 바보처럼 살란 말이냐?” 이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아무리 따지셔도 돼요. 근데 거기에 빠지시면 끝이에요. 옳고 그름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끝이고요. 내 마음이 텅 비어서 옳고 그름을 따져도 더 선명하게 보이면 그건 부처입니다. 그렇죠. 23.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니 하나도 지켜선 안 된다. 이유일유(二由一有)니 일역막수)一亦莫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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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요 “나는 지금 텅 빈 마음을 지키고 있다.” 이런 생각도 하지 마라는 겁니다. 둘은요 하나로 인해 생겨나잖아요. “텅 빈 마음이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두 개가 되는 겁니다. 또 두 개가 나뉜다는 겁니다, 생각이 자꾸. 그러니까 하나에 머물지 마라는 게 아니라 한마음에 머물되 한마음이란 말도 하지 마라는 겁니다. 아무 말하지 말고 머물러라, 제발. 그렇죠. 부처 똥막대기다. 부처라는 생각도 하지 마라. 하나의 마음 생기지 않는다면요 일심불생(一心不生) 하면은 만법무구)萬法無咎) 만 가지 법이라는 건요 많은 존재들을 말합니다. 온갖 존재들이 다 허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요 내가 지금 한 생각이 일어나면요 저건 내 거, 저건 누구 거, 저건 좋아 저건 싫어 해서 만물이 다 허물이 생겨요. 제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라벨을 붙이고 다녀요. 내 감정 내 생각으로 다 물들여요. 네 에고로요. 그런데 한 생각이 안 일어나면 만물도 그대로 깨끗해요. 저랑 둘이 아니게 하나로 그렇게 조화롭게 있어요. 예. 25. 마음의 허물이 없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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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무법(無咎無法) 하면은 허물이 없으면 법이 없고 이게 딱히 뭔 밖에 있는 존재란 말도 필요 없어지고요. 법이 없으면 불생불심(不生不心) 법이 생겨나지 않으면 마음도 없다. 이해되십니까? 남이 없으면 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나라는 걸 세우려면 반드시 남을 전제해야 돼요. 그러니까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같이 생겨나요. 그리고 같이 사라져요. 능수경멸(能隨境滅) 경축능침(境逐能沈) 마음은 경계를 따라 사라지고 경계는 마음을 따라 사라진다. 사라지면 같이 사라져요. 이 얘기는요 둘 중에 하나만 없어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요, 제가 눈앞의 이렇게 잣나무를 보고 있어요. 이게 잣나무라고 생각하고. 잣나무를 볼 때요 내가 나라는 걸 잊어버리고 모른다 하시면 잣나무도 사라져요. 이 존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잣나무라는 구별이 사라지거든요. 반대로요 저게 잣나무란 생각을 안 해 버리시면 나도 사라져요. 둘이 같이 존재하게 돼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대주거든요. 잣나무를 보는 나잖아요. 에고는요 조건이, 제약이 붙어야 에고거든요. 참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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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나라면 에고는 잣나무, 지금 이 시간에 저런 특정 A라는 잣나무를 보고 있는 나는 에고예요. 그 특정 A라는 잣나무는 하나의 객체고요. 둘은 반드시 서로 의지해서 생겨나요. 제가요 나는 그냥 나로만 존재해 버리면 잣나무가 사라져요, 제 시야에서. 그렇죠? 특정 A를 보고 있는 나가 아니라, A라는 잣나무를 보는 나가 아니라 그냥 순수한 나를 느껴버리면 모른다고 느껴버리면 특정 A란 잣나무라는 존재는 제 마음에서 사라져요. 반대로 저게 특정 존재라는, 특정 A라는 잣나무다라는 생각을 제가 놔버리면 몰라 라고 해버리면요 저도 사라져요. 그걸 보고 있던 저도 사라져요. 두 개는 같이 다닌다는 겁니다. 두 개를 다 놔버리면요 텅 빈 마음만 남아요. 이해되시죠. 경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경계가 되고 마음은 경계로 말미암아 마음이 된다. 그래서 경(境)이 경계(境界)고요 능(能)이 그걸 보는 존재라는 뜻에서 주관입니다. 경유능경(境由能境)이고요 능유경능(能由境能). 양단을 알고자 한다면, 보는 자인 마음과 보이는 경계인 대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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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자 한다면은 원래 하나의 텅 빔이다. 사실은 텅 빈 자리다, 본래 둘 다. 욕지양단(欲知兩段)인데 원시일공)元是一空). 원래 하나의 공인데, 저거라는 말이 생겨나는 순간 저거를 보는 내가 생겨나고요. 나라고 하는 순간 나의 눈에 들어온 저것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29번이요. 하나의 텅 빔은 양단과 한 가지라. 텅 빔은요 일공동양(一空同兩) 하나의 텅 빔은 양,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죠, 원래. 온갖 형상을 두루 포함하였으니 제함만상(齊含萬象)이니. 30번이요. 정밀함과 추함을 보지 않으니 “그거 참 괜찮네 나쁘네 추하네 아름답네” 요런 소리 안 하면요 불견정추(不見精觕)면 영유편당(寧有偏黨) 어찌 편당을 지임이 있겠는가. 이게 더 좋고 저게 더 나쁘고 이런 소리가 안 나오고 마음이 확 트여서 태허(太虛)와 갔을 거라는 겁니다. 우리 마음을요 작게 쓰고 있는데요. 확 한번 트이게 해보실 수 있다는 겁니다. 뭐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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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거 남의 것만 안 따지면 돼요. 나와 남만 안 따지고 탁 마음을 “모른다” 하고 계시면 이미, 이미 확 트였다는 겁니다. 그때 마음은요 우주랑 같아요, 사실은. 아무것도 구별이 없잖아요. 근데 하나라는 게 생기면요, 나라는 게 생기면 남이 생기고 남을 세우면 내가 생겨서 좁아진다는 겁니다. 그게 편당이고요. 31번 큰 도의 본체는 광활하여 대도체관(大道體寬) 대도의 본체는 넉넉하여서요 광활하여 무이무난(無易無難) 쉬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네. 쉽다 어렵다가 없어요. 원래. 텅 비어 있을 뿐이지, 그런데 32번이요. 작은 견해는 여우처럼 의심하여 서두를수록 더욱 늦어지게 되네. 소견호의(小見狐疑) 하여 전급전지(轉急轉遲) 자꾸 부처가 빨리 되려고, 남보다 좀 빨리 부처되겠다는 마음먹는 순간 더 멀어진다는 겁니다. 점점 멀어져요. 부처에 못 들어가요. 그래서 33번 붙잡는 자는 법도를 잃게 되니 집지실도(執之失度) 하니라 필입사로(必入邪路) 반드시 사특한 길 사악한 길에 접어들게 된다. 한 생각 일으키고 조급해지면요 바로 잘못됩니다. 그러니까 모른다 하실 때도요 조급해지시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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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하고 조급한 마음이 일어나더라도요 “넌 조급해라. 난 모르겠다”는 태도만 유지하시면 돼요. 잡념을 없애려 하지 마시고요. 저의 태도만 분명히 하시면 됩니다. “난 너희들을 모르겠다”는 태도만 지키시면 알아서 진정이 돼요. 신기하죠. 그러니까 말단에 가가지고 보세요. 에고가 시끄럽다고 이게 말(末)이에요. 말단에 와서 자꾸 뭘 바로잡고 싶어 하는데요. 뿌리만 튼튼하면요 말단은 알아서 잡힌다는 겁니다. 그게 참 신기하죠. 그래서 나무도요 아무리 꽃이 이쁘다고 꽃에다 비료를 줄 순 없죠. 비료는 뿌리에다 줘야 돼요.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뿌리인 참나 자리에 주면요 에고는 알아서 진정이 됩니다, 신기하게. 먹구름이 밀려와요. 에고가 막 흥분하면요 하늘이 무섭게 먹구름이 밀려오듯이 밀려오는데 “너는 그래라” 하고 제가 잠시 “모른다” 하고 돌아보면, 제 마음을 돌아보면 먹구름이 온데간데없다는 겁니다. 흔적도 없어요.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걸 알고 사는 분들이 도인이에요. 뭐 신기한 거 알아서 도인이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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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신기한 무슨 펼쳐지는 게 아니고, 그런 세계가. 이게 신기한 거죠. 이게 기적이죠. 이거 아신 분은요, 절대 마음을 우울하게 방치하실 일이 없고 마음을, 자기가 마음의 주인이 돼요. 그래서 운문(雲門文偃 864~949) 선사처럼 “매일매일 좋은 날”이란 말 할 수가 있어요. 일은 별일이 다 생기고 험한 일이 계속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러건 저러건 그건 에고가 힘들어할 일이지 내 참나는 늘 고요하다는 거 아시고, “나는 늘 참나를 참나와 하나 돼 살 수 있다”라는 확신이 서신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좋은 날을 살다 갈 것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려놓으면요 방지자연(放之自然) 이렇게 내려놔 버리고 자연을 따르게 되면, 따를 뿐이니 본체는 가고 머묾이 없다. 체무거주(體無去住) 본체는요 가고 머묾이 없어요. 늘 여여(如如)해요. 우리 안에 그 고요함이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걸 내려놓기만 하면 돼요. 이게 진짜 무소유입니다. 뭐 돈 갖다 버리고 물건 갖다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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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니구요. 제 마음에 있는 이 집착 내려놓는 사람이 무소유고 진짜 도인이에요. 예. 돈 없는데요. 난 돈 없이 가난하게 살았다는 걸 늘 자랑하고 다니시면 그거 집착입니다. 고거 내려놓으시면 무소유예요. 고거 들고 계시면 늘 안 좋아요. 남이 그거 인정 안 해주면 또 기분 나쁘잖아요. 뭐 하나 들면요 반드시 반대 것이 따라와요. 내려놔 버리신 분이 도인이에요. 본성에 탁 맡기면 임성합도(任性合道) 도랑 그냥 하나가 돼 버려요, 진리랑. 소요절뇌(逍遙絶惱) 그 자리에서 소요하면, 그 상태로 노니시면 이 세상을요 번뇌가 그냥 끊어져요. 번뇌더러 “없어져라”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내 내면의 텅 빈 고요함 자리만 찾고 그 자리와 함께 살아가시면 번뇌는 온데간데가 없어질 거다 36번. 생각에 붙잡히면 참됨에 어긋나며 계념괴진(繫念乖眞) 잘해 볼려는 생각도 안 돼요. 잘해 볼려는 생각을 일으키실 바에는 그냥 내려놓고 그냥 그 텅 빈 자리에서 쉬세요. 잘해 볼려는 생각을 일으키면요 의식에 빠져요 .의식은 도가 아니에요. 흐리멍덩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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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지면, 혼침불호(昏沈不好) 혼침도 좋지 않다. 그거는 무의식에 빠져요. 그래서 우리 마음이, 보세요. 이 참나자리를 제가 텅 빈 알아차림이라고 한 이유가 참나자리는요 요즘 말로 하면 뭐랄까요? 이게 초의식 자리예요. 의식도 아니고 초의식이에요. 의식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니에요. 그 증거가 이거예요.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텅 비어 있어요. 의식은 시끄럽거든요. 이 자리는 텅 비어 있어요. 근데 무의식은요 알아차리는 자도 없어요, 무의식에 빠져 있으니까. 근데 이 자리는요 선명히 알아차려요.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제가 “5분 몰입의 기술”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게 다른 게 아니라 이거예요. 뭐냐면 이 의식을 쓰는 사람이 몰입하는 사람이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몰입하시려면요 우리가 뭔가에 가장 즐거운 행위, 본인마다 있을 겁니다. 가장 재밌는 취미 하실 때는 이 상태예요. 다른 생각이 텅 비어있고요 그 대상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요. 시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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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고 있어요.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요. 내가 어디있는지도 몰라요. 그게 텅 빔이고요. 그때 정신은, 뇌에는 최고로 활성화돼 있습니다. 그게 알아차림이에요. 그래서 이 도라는 건요 방금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승찬(僧璨, ?년~606년) 조사가 생각에 붙잡히면 어긋나고 흐리멍덩해도 안 된다. 흐리멍덩하면 좋지 않다. 좋지 않은 불호노신(不好勞神) 좋지 않으면 정신만 수고로워진다. 그것도 괴로운 짓이라는 겁니다. 어찌 멀고 친함을 쓰겠냐. 뭐가 낫단 말 못 하겠다는 겁니다.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둘 다 초월해야 된다. 하용소친(何用疎親) 누가 더 친하다는 말 못 하겠다. 그렇죠. 일승에 나아가자 한다면, 곧장 부처에 가고 싶다면 욕취일승(欲趣一乘) 인데 몰오육진(勿惡六塵) 하라. 육진을 미워하지 마라. 육진은요, 이 여섯 경계의 세계예요. 생각 감정 오감이 세계예요. 오감이 오식(五識)이죠. 불교식으로 계산하면 생각 감정이 육식(六識)이고요. 오감이 전오식(前五識)이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거 다 해서 육식입니다. 이 육식의 대상이 되는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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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진(六塵)이에요. 그러니까 뭐냐면요? 눈의 대상이 되니까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개념, 개념이나 감정 요것들이 대상이에요. 요거를 육, 여섯 경계를 싫어하지 마라. 왜냐면요 싫어한다고 하는 순간 그거랑 나랑 둘이 되고 도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고거 싫다 좋다 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돼요. 그것도 역시요 이 텅 빈 참나에서 나온 마음이기 때문에 생각 감정 오감은 다 참나에서 뿌리를 둔 파도잖아요. 참나라는 바다의 작은 파도에 불과해요. 그 파도 하나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뭐 화내고 그럴 일이 없어요. 잘 왔다 잘 가게 그냥 내버려 두시면 되고요. 적절히 균형만 맞게 해주시면, 돼요. 근데 균형을 맞춰주려면 어떤 마음이 있어야 되냐면 내가 원래 바다라는 걸 아셔야 돼요. 그러니까 텅 빈 마음 가지고 계시면요 여섯 경계를 미워하지 않고 잘 쓰십니다. 예. 색깔 볼 때 색깔 필요할 때 색깔을 쓰고 말이 필요한 말을 쓰고 다 잘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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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가장 힘든 경계에 있을 때도 그 힘들게 하는 건 이 여섯 경계가 힘들게 할 겁니다. 어떤 생각들, 어떤 감정들, 어떤 오감의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대상들, 고거를요 미워하지만 않으시면 그 힘든 중에 견성하신다는 겁니다. 참나를 깨치신다는 겁니다. 육진불오(六塵不惡) 여섯 경계를 싫어하지 않으며 도리어 환동정각(還同正覺) 바른 깨달음과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게 지금 초발심이 바로 정각이라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진정한 신심은 그대로 정각이다. 진정한 신심은요, 부처를 믿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부처다. 나와 남이 이미 둘이 아니다.” 요거 깨닫는 마음이거든요. 그게 바로 정각이다. 지자무위(智者無爲) 지혜로운 사람은요, 하는 게 없다. 하는 게 없다는 건요 인위적인 조작을 할 필요가 없다. 원래 퍼펙트 하니까요. 우인자박(愚人自縛) 어리석은 사람은요 퍼펙트한 걸 추구하다가 오히려 자빠져요. 자기가, 자기가 생각하는 퍼펙트함은요 우주가 생각하는 부처가 부처자리에서 원하는 그 완벽함하고 거리가 멀어요. 내가 보고 들은 거 가지고 완벽함을 추구하지 마라는 겁니다. 원래 자연한테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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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맡기면 안 될 것 같지만 자꾸 맡겨 보시면요, 텅 빈 마음으로 해 보시면 텅 빈 마음을 갖는 순간 감정이 조절이 되고 편해지실 겁니다. 당장 몸이 편해지실 거예요. 바로 체험하실 수 있어요. 먼 얘기가 아니고 몸과 마음이 편해지세요. 쥐고 있던 걸 좀 놓으니까 이완이 되면서 편해지세요. 당장 변화를 일으키잖아요. 이 무위라는 거는 그걸 따르시라는 거고요. 41번째 법에는 다른 법이 없는데 법무이법(法無異法) 뭐 더 빠른 법 늦은 법 없다는 겁니다. 이거 진리 하나인데 망자애착(妄自愛着) 스스로 애착하여 내 법만 옳다라는 소리 하지 마라는 겁니다. 이 진리가 아무리 옳아도요 내 것만 옳아 하는 순간 또 부처 자리에서 튕겨 나갑니다. 이거 다 튕겨나갈 짓이에요. 나누지 마세요. 42번. 마음을 가지고 에고의 그런 알음알이를 가지고 또 마음을 쓰려고 하니 어찌 크게 그르치지 않겠는가. 장심용심(將心用心) 하니 기비대착(豈非大錯)가. 예. 43번째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며 깨달으면 좋고 싫음이 없다. 둘로 안 나눠요. 미생적란(迷生寂亂)은요 미혹하니까 “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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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좀 고요했는데 아까 명상 잘 되던데 또 시끄러워졌네.” 이런 걸 자꾸 따지고 있는 마음이 미혹한 마음이라는 겁니다. 지금요 에고의 마음을 써 가지고 명상을 찾으세요. 그러지 말고 좋고 싫고를 따지지 말아 보시라는 겁니다. 시끄럽다고 싫은 게 아니고요. 고요하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그걸 내려놓으시면 그대로 깨어난다. 그리고 이 얘기고요. 마흔, 44번 일체양변(一切兩邊)은 양유짐작(良由斟酌) 이게 우리말로 짐작입니다. 일체양변(一切兩邊)은요, 짐작으로 말미암은 거다. 그 어림짐작이에요. 명확한 게 아니구요. 그냥 제 생각이라는 거예요. 각자 자기 생각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꾸 좋고 싫고를 따지니까 일체의 그 양변들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배기 가장 명확한 자리를 찾으면요 아무 의심 없는 상태, 텅 빈 상태거든요. 그 상태에 머무르시면 둘로 나뉘는 마음도 사라질 거다. 45번 꿈이, 몽환공화(夢幻空華) 꿈이고 환영이며 헛된 꽃일 뿐이다. 요거는 이제 우리 요즘 말로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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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램 같은 거라는 겁니다. 실체가 있는 게 아니에요. 홀로그램이요 꼭 실체가 있는 것 같지만 안 만져져요. 뭐냐면 빛 쏘는 카메라에서 빛 쏘는 거 가지고 나타나는 허상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가짜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꿈이고 환영이라고 해서요. 이 현상계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짜라는 게 아니고요. 무상하다는 거예요. 그거 실체가 없는 거라는 겁니다. 아까 말한 바다 위의 파도, 뭐 파도라는 거예요. 바다란 존재가 없으면 파도는 의미가 없고 파도는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거든요. 근데 파도가 없다는 게 아니고 꿈과 환영과 같고, 헛된 꽃과 같다는 건요 그게 실체가 아니라 텅 빈 자리가 더 실체다는 얘기고요. 하로파착(何勞把捉) 어찌 수고롭게 붙잡으려고 하는가? 46번 득실시비(得失是非) 이득과 손실 옳고 그름을요 일시방각(一時放却) 한꺼번에 내려놔 버려라. 이거 차근차근 내려놓지 마시구요 지금 곧장 모른다 하세요. “이익인지 손해인지 모르겠다. 맞는지 틀린지 모르겠다”라고 바로 나가시면요 곧장 도랑 하나가 됩니다. 그 자리만이 진짜입니다. 나머지는요 기준 따라 조건 따라 다 바뀌는, 컨디션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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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는 얘기들이에요. 47번 눈이 잠들지 않는다면, 잠을 자지 않는다면요, 잠자지 않는다는 건요 우리가 잠들고, 우리가 지금 사는 세계가 잠들어 산다는 거잖아요, 우리가. 우리가 지금 자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자고 있냐면요 내가 따로 있고 남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산다는 거예요. 잠이 깨버리면요 나와 남을 둘로 안 갈라라요. 뜰 앞의 잣나무랑 나랑 둘이 아니에요. 그러면요 꿈이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헛것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안약불수(眼若不睡)면은 제몽자제(諸夢自除)다 심약무이(心若不異)면 만법일여(萬法一如)라. 그러니까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 마음에서 나와 남을 따지지만 않는다면 만법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될 거다. 우주 전체가요 나라는 거랑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주가 내가 되고 내가 우주가 돼요. 왜냐하면요 나라는 것만 있지, 지금 텅 빈 마음에서는요 나라는 것만 있지 나와 남을 안 가르고 있거든요. 그 우주랑 나랑 어떻게 가릅니까? 같다 틀리다 어떻게 말합니까? 그냥 하나죠. 그래서 “우주를 체험했다. 우주와 하나가 됐다.” 이런 체험하신 이런 얘기를 하시는 분이 있는데 나와서 하시는 얘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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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선 그 말도 없어요. 그냥 하나로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게 이제 깨지고 나면 말하는 거예요. “내가 아까 우주랑 하나였다.” 그러니까 그런 말도 필요 없습니다. 그 말 하지 마라. 그냥 그렇게 살아라. 하나면 하나인 줄 알고 살지 그건 남한테 자꾸 얘기하지 마라. 하더라도 깨어서 말하라는 거죠. 놓치지 말고 말하라. 49번 한 덩어리와 같기만 하면 일여체현(一如體玄) 현묘함을 체득하여 올이망연(兀爾忘緣) 우뚝하게 딱 홀로 서서 우주의 인연을 잊게 될 것이다. 양변을 잊어버리고요, 나와 남을 잊어버리고 하나가 돼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말은 많지만 별거 아닙니다. 다 내려놓으라는 거예요. 이원성(二元性), 온갖 이원성은 잠시 내려놓고 계셔보시라. 그 텅 빈 마음을 느껴보시라. 만법제관(萬法齊觀) 만법을 한 덩어리로 간주하면, 지금 만 가지 법이라는 것은 이것도 다르고 이것도 다르고 서로 다르다는 게 전제되어 있는데, “그게 하나야” 라고 보시면, 가르지 않고 보세요. 이거 관조하는 법 다시 말씀드릴게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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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란 친구 B란 친구 C라는 친구가요 “모두 하나야”라고 말하고 있으면 여전히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도 잡으면 안 돼요. “하나야”라는 말이 필요가 없죠. 그냥 둘이 아니라고 느끼시기만 하면 돼요. 둘이라고 가르지만 마세요. 그거 하나라고 굳이 말하시면 안 돼요. 하나라고 하는 거는 하나는 또 둘을 불러낸다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의 상이니까요. 생각이니까. 그냥 그렇게 만법이 하나야라고 보고 계시면 관조하시면 귀복자연(歸復自然)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51번이요. 민기소이(泯其所以) 그 원인, 소이는 원인이거든요. 원인을 놔버리면요 주객을 가르지만 마시면 불가방비(不可方比) 바야흐로 방비가 방이 서로 비교할 짝이 없을 것이다. 나와 남이 없으니까 비교할 상대가 없어진다는 거죠. 그 원인만 없애면, 그냥 나누지만 않으면 비교할 상대가 없어질 것이다. 당연한 얘기죠. 그래서 5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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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무동(止動無動) 고요하면서도 움직여서 움직임이라고 할 수도 없고 동지무지(動止無止) 움직이면서도 고요해서 그쳤다고도 할 수 없다. 이 얘기는요 움직였니 고요했니를 다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움직일 수도 있고 고요할 수도 있고 이걸 가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죠. 나는 지금 움직였어. 나는 고요했어. 이렇게 뭔가 하나의 상황에 집착을 안 하기 때문에요 텅 비어 있으면 그중에 그 안에 움직임도 있고 고요함도 있고 다 하나로 한 덩어리가 돼 있기 때문에 가르지 않고 쓰시는 단계입니다. 움직일 때 움직이고 고요할 때 고요하되 내가 어떤 상황에 어느 한 국면에 집착하지만 않으신다면요 이미 도라는 겁니다. 편한 상황에 있든 힘든 상황에 있든 도라는 겁니다. 오히려요 편한 상황이 더 무서워요. 편한 상황에 들어가면요 순경이 더 무서운 게요 도인한테는 순경은요, 그 좋다는 상을 붙잡고 싶어 해요. 역경은요 본능적으로 내려놓고 싶어요. 역경에서는 내려놓는 게 잘 되는데 순경은요, 그게 어디 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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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중지하게 됩니다. 순경이 더 안 좋아요, 도인한테는 수행자한테는. 역경일수록 빨리 내려놓고 싶어 해요. 그래서 역경에서 견성하는 경우가 많죠. 아주 힘들 때 견성해요. 인연 있는 분은요 아주 힘들 때 오히려 도를 얻어버려요. 그걸 다 내려놔 버리거든요. 아주 힘들 때 하도 힘드니까 다 내려놨더니, “나는 원래 텅 비고 순수한 존재였구나.” 이걸 얻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53번이요. 양기불성(兩旣不成) 둘이 이미 이루어질 수 없다면 일하유이(一何有爾) 하나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도 세울 때 필요가 없다는 거죠. 54번 구경궁극(究竟窮極)의 경지, 구경궁극이라 이 상태가 일정 법칙이 있지 않다 부존궤칙(不存軌則) 어떤 특정 법칙을 여기서 따지지도 마라. 다 내려놓고 텅 비어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55번요 계심평등(契心平等) 마음이 평등, 나와 남을, 자타불이(自他不二)죠, 나와 남을 가르지 않으면 소작구식(所作俱息) 소가요 경계 대상이에요. 대상과 작용, 그것을 보는 작용을 일으키는 나, 그래서 경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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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은요 주관과 객관입니다. 이렇게도 표현해요. 이거죠. 보세요. 제가, 작(作)은요 이걸 가지고 제가 이걸 닦았습니다, 작. 소(所)는요 대상이 되는 요 지우개랑 요게(칠판) 대상입니다. 저의 작용과 대상, 그래서 나와 남이에요, 결국에는. 소작이 다 사라진다. 나와 남이 다 사라져 버려요. 저거랑 나랑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제가 지우면요 굳이 대상이 나와 남이 안 선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에서요. 텅 빈 마음에는 안 따지고 있으니까요. 56번은 호의정진(狐疑淨盡) 여우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져 버리면요 정진해버리면 정신조직(正信調直) 진정한 바른 믿음이 조화롭고 곧도다. 그 상태에서는 그게 진짜 믿음이다. 이런 의심이 사라진 상태가 믿음이라고 했을 때요. 지금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이분이. 왜 이걸 신심이라고 하느냐? 누군가를 믿어서 믿음이 아니고요. 의심할 수가 없어서 신심이라는 겁니다. 하나가 딱 돼버려 가지고, 부처랑 나랑 하나가 돼버려서 둘로 나눌 수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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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아니냐는 겁니다. 진짜 신심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니까요. “나는 그 대상을 믿어.” 계속 이렇게 “나는 보지 못했지만 믿어.” 이거는요 둘이에요. 근데요. “하나야.” 그건 확신, 여기서 말한 바른 신심은요 확신이에요. “그건 부정할 수가 없어. 둘이 될 수가 없어.”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믿거나 말거나의 믿음이 아니라 확신을 말합니다. 체험에 기반한 확신. 57번요 일체불류(一切不留) 일체 머물지 않으면 무가기억(無可記憶) 기억할 게 없다. 마음을 텅 비워놓으면요 딱히 기억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수련법도 있죠. 기억을 자꾸 밖에 버리면요 일체 머물지 않게 돼서 터진다는 수련법도 있습니다. 그것도 맞는 얘기예요. 기억을 내려놓는, 모른다고 해서 해보세요. 그러면 마음이 텅 비게 돼 있습니다. 그 상태가 우리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에요. 그래서 늘 이 상태에 머무시려고요. 짬짬이 자꾸 해보시면요 언젠가 이게 우리 삶 전반에 확 흐를 때가 와요. 그러면 지금 신심명에서 말하는 게요 내면에서 그냥 펼쳐질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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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니다. 늘 평온할 때가. 그러면 도가 한 단계 올라가신 겁니다. 58번에요. 허명자조(虛明自照) 텅 비어 비되 밝게 스스로를 비추면, 내 자신을 반조해 보라는 건 똑같습니다. 자조(自照) 스스로를 비춰보면 불로심력(不勞心力) 정신력을 수고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자꾸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시라는 겁니다. 59번 비사량처(非思量處) 생각할 곳이 아니니, 생각으로 따질 수 있는 곳이 아니면 정식난측(情識難測)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가 없다. 우리가 이 참나 자리는요 텅 비어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대충 얘기해 가지고 해결할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대충 추측해 가지고 해결할 자리도 아니고요. 진짜 생각을 놔보셔야 거기 들어갈 수 있어요. 차원이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4차원에 들어가려면 3차원의 조건을 잊어야죠. 3차원에서 아무리 뒤진다고 4차원을, 그 문을 볼 수 있나요? 4차원 세계를. 잠깐 놔버리면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큰 도는 문이 없다는 게요 들어갈 문이 없어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이 상태 그대로 두고요. 텅 빈 세계거든요. 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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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대도무문이고요. 큰 도는 문이 없고 만로개문(萬路皆門) 그다음 말이 그겁니다. 모든 길이 다 문이다. 어디 계시건 그 조건만 잊어버리면요 내가 지금 어느 몸으로 어디에 뭐하고 있다는 것만 놔버리면 그대로 들어가신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곳이 문이고 실제로 문이 없어요. 딱히 눈에 보이는 문은 없어요. 그래서 따질 수가 없습니다. 없고요. 60번째 진여법계(眞如法界) 진여의 법계는요 진여의 세계는 법계는 그 진리의 세계예요. 진여라는 그 진리의 세계는 무타무자(無他無自) 나와 남을 안 갈라요. 그래서 지금 아까 평등이라 그랬는데, 여기 이 말이죠. 자타(自他) 불이(不二)라고도 하고요. 일여(一如).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나와 남이 하나다. 이게 진정한 평등입니다. 그래서요 이것도 생각으로 하면 가짜예요. “나와 남은 하나다. 하나다.” 하지 마시구요 하나라고 그냥 느껴보세요. 나를 내려놓으시면 돼요. 나를 모른다 하시면요 이미 하나라고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그러면 요급상응(要急相應) 요 자리와 상응하고자 한다면, 이 자리 들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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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다면 오직 유언불이(唯言不二 )둘이 아님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둘이 아니다라고만 생각해라. 이 생각으로 들어가라. 결국 이 생각도 내려놔야죠. “둘이 아니다” 하고 들어가 보시라는 겁니다. 62번 불이개동不二皆同 둘이 아니면 모두 똑같다는 얘기니까 무불포용無不包容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우주를 다 나랑 하나로 여기게 된다. 이게 어렵죠. 우주를 나랑 하나로 여기라. 그러면 어려우실 거예요. 요것도 하나랑 나랑 하나 요것도 나랑 하나. 어렵죠. 하나하나 따지고 있으면. 그러지 마시고요 모른다고 하세요. 그냥 여기까지가 나라는 걸 모르겠다만 하시면요 그냥 이미 하나입니다. 그렇죠. 우주랑 이미 하나세요. 둘이라는 생각만 하지 마세요. 시방지자(十方智者) 시방은 상하 전후 사방 팔방이죠. 팔방에 그 뭐죠? 이 팔방에 위아래 해서 십방입니다. 시방우주에 지자(智者) 뭐 좀 얻었다는 사람, 지혜롭다는 사람은 개입차종(皆入此宗) 다 이걸 얻었다. 이 온 우주에서요 저 은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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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은하계 부처도 부처란 부처는 다 이걸로 들어갔다. 다른 거 하나도 없다. 자기 안에 있는 텅 빈 자리. 왜냐면요 인간인 한에는 다른 수가 없잖아요. 인간이면요 생각 감정 오감을 다 가지고 살고 있는데, 그 안에는 텅 빈 자리도 있어요. 이 글자의 여백처럼. 그럼 그 여백을 안 들여다보고 진리를 얻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겁니다. 생각 감정 오감에서 진리 찾은 사람 없다. 그건 다 무상한 세계니까요. 그런 당연한 얘기만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도 그 텅 빈 자리에서 찾아야 돼요. 생각 감정 오감으로 자꾸 찾는 건요 다 자기 얘기입니다. 종비촉연(宗非促延) 이 종지는 길지도 짧지도 않다. 시간을 초월해 있다는 겁니다. 길고 짧음의 시간으로 잴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차원대가 아니거든요. 시공간의 차원대에 안 잡혀요, 이 자리는. 텅 빈 마음을 어떻게 잡겠습니까? 시간 공간을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그걸로. 한 찰나가 만년이다. 일념만년(一念萬年)이라는 건요 이 얘기는요 무슨 얘기냐면 만년의 긴 시간도 지금 이 찰나랑 구분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시간성을 초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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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의 세계에서는. 그러니까 이 순간이 영원이라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요 보세요. 한번 집중해 보세요. 과거는 지금 지나갔으니까 없습니다. 과거는 지금 흔적도 없어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없어요. 존재하는 건 지금 이 순간 찰나찰나밖에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건요. 그렇죠. 예, 요 순간에 만년이 다 녹아있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요 순간에 집중해 주시면요 우리가 막연하게 사니까 과거 현재 미래가 펼쳐지지만 정확히 집중해 보면요 지금 이 순간순간만 존재하고 있어요, 모습을 바꿔가면서. 그게 시간을 나눌 수 없다는 겁니다. 참나의 세계, 그 텅 빈 자리에서 보면요 이 순간만 존재해요. 있음도 없음도 없으니. 공간을 초월한다는 얘기입니다. 시방이 눈앞이다. 지금 오직 여기만 존재해요, 우주에. 깨달은 자리에서는요. 그러니까 마음을 텅 비어놓고 보시면요 우주를 가를 수가 없어요, 있다 없다를. 그냥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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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는 그 자리가 우주의 전체가 되는 거죠. 모른다 하시면서 느껴보세요. 이 순간만 존재하고 이곳만 존재해요. 다른 게 없어요. 가를 수가 없으니까. 여기 말고 다른 세계란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요렇게 시공간을 초월해 보시라는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얘기는 별 얘기 아닙니다. 극소동대(極小同大) 극소랑 극대랑 같다는 겁니다. 지극히 작은 거랑 지극히 큰 게 거기선 하나고, 나누지 못하니까요, 경계가 끊어져 버리고 망절경계(忘絶境界)고. 극대동소(極大同小) 지극히 큰 거랑 지극히 작은 게 같아버리니까 불견변표(不見邊表) 그 끝과 겉을 볼 수가 없다.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겉이고 안이고 이걸 나눌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안팎을 나눌 수가 없고 끝과 시작점을 나눠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유즉시무(有卽是無) 있다는 게 없는 거고, 무즉시유(無卽是有) 없음이 바로 있음이니. 왜냐? 있음과 없음을 거기선 안 갈라요. 있다 없다 따지는 건요 생각 이후의 세계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이거 안 가릅니다. 그냥 텅 비어서 알아차리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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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죠. 이것도 말이지만요. 69번 약불여차(若不如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이런 게 아니라면, 당신이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경지가 이런 게 아니라면 불필수수(不必須守) 반드시 지켜야 할 거 아니다. 그거 반드시 챙길 거 아니다. 그거 하지 마라는 겁니다. 이런 경지의 수행이 아니라면 하지 마라는 겁니다. 뭔가를 지금 단단히 붙들고 있구요. 오감으로 부처님을 그려놓고 보고 있어도요, 눈앞의 부처님이 계신 것처럼 보고 있어도 그거 아니라는 겁니다. 나와 남이 있고 시공이 초월이 안 되고 나와 부처가 이미 갈라져 있다면 그거 가짜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 그래요. 부처가 나오면 부처를 죽이라고 하는 이유가요 부처님 뭐 경망스럽게 어떻게 그거 경거망동 아니냐. 이게 아니구요. 내가 내 마음에 그려놓은 부처는 내 마음의 허상일 뿐이니까 지우라는 거예요. 그거 진짜 부처가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요렇게 그려놓고요. 나는 하나님이 요런 옷을 입었으면 좋겠고 요런 의자에 앉아 계셨으면 좋겠고. 한참 그려놓고 있어요. 뭐 이거 아니면 가짜라고 생각해요. 이거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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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내려놓으면 어떻게 진짜 하나님 만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불(佛)도 그래요. 진짜 불 만나고 싶으면 당신이 마음속에 그림 불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그게 살불살조라는 거예요. 부처가 나오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나오면 조사를 죽이라는 게 어딘가에도 집착하지 말고 나와 조사, 나와 부처 가르지 말고 한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자리가 이미, 당신은 순간 이미 부처랑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죠. 나머지는 지킬 거 아니다. 할 거 아니다. 70번째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하나가 바로 일체이며 일체가 하나이다. 전체가 한 덩어리니까요. 보세요. 전체가 한 덩어리라는 관점에서 보면요 요 펜 하나와 우주를 가를 수 있을까요? 요 펜는요 지금 우주의 일부예요. 이것만 따로 뗄 수가 없어요, 하나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이 현상계에서는 이걸 딱 따져보는 게 복잡하죠, 오감이 실감나니까. 꿈을 생각해 보세요. 꿈에서요 우리가 물건 들고 나올 수 있나요? 한 물건만. 그건 다 꿈이랑 그냥 한 덩어리예요. 그거 하나 떼올 수가 없어요. 이 현상계 존재 하나도요 이 현상계에 다 인과관계에 얽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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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가 존재하려면요 지금 지구가 받쳐줘야 되고요 하늘이 비춰져야 되고 지금 이 순간에 이 펜을요 은하계가 어떤 은하계는 어디서 어느 은하계는 어디서 비춰주고 있어요. 그 관계 속에서 얘예요. 그러니까 관계 속에서 존재를 따져보면요 절대 얘만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일체가 하나라는 거예요, 실제로도. 현상계적으로도 일체가 하나예요. 텅 빈 자리에서는 당연히 하나지만 나와 봤더니, 여전히요 자타불이가 그 텅 빈 자리에서만 하나가 아니고요. 우리 모두가 본래 파도인데 A라는 파도 B라는 파도가 한 바다라고 생각하면요 사실은 A, B란 파도도 사실은 하나예요. 우리 존재가 하나로 엮여 돌아간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좋은 차 몰고 다니면은요 다른 분들이 마음이 괴로워지죠. 하나니까요. 제가 악을 하면요 다른 분들이 열 받아요. 하나니까 계속 영향을 주고받고 가고 있습니다. 어느 별이 하나 터지면요 지구에 영향이 와요. 하나니까요. 관계 속에서도 하나예요. 어느 우주 저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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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미세한 그 변화도 전체 우주에 영향을 줍니다, 실제로. 아주 미세할지라도. 예. 그게 이렇게도 생각해 보셔야 돼요. 전체가 하나라는 걸요 현상계에서도 하나다. 우리가 본래 바다란 측면에서 하나지만 파도가 존재하더라. 이 파도끼리도 서로 사실 하나다라는 거. 연결돼 있다는 거. 이 바다가 출렁이는데 어느 파도 하나가 영향 안 받는다는 게 말이 안 되죠. 그래서 71번이요. 단능여시(但能如是) 다만 이와 같이만 한다면, 하려불필(何慮不畢) 어찌 공부 마치지 못할 거를, 부처 못 될 걸 근심하겠는가? 지금 이 방법 다 이해하셨다면 부처될 길은 단단히 닦인 거다 이겁니다. 신심불이(信心不二)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닌 마음이고 불이신심(不二信心) 둘이 아닌 마음이라야 진짜 믿는 마음이다. 여전히 둘로 갈라놓고 그걸 믿겠다고 덤비면 아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 하고 언어의 길이 끊어져야 되고 그 자리는, 진정한 신심은요, 말이 끊어지고 비거래금(非去來今) 거래금이요. 거(去) 과거 래(來) 미래 금(今) 현재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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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제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고 그랬는데 그럼 그거는 과거 현재 미래 중에 현재만 중시하는 거 아니냐? 이게 아닙니다. 나와 남이 세트듯이요 과거 현재 미래도 한 세트예요. 제가요 현재란 생각 안 하고 지금 이 순간만 집중하고 있으면요 과거 미래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쵸. 여기까지가 현재라는 말을 제가 해야 과거가 전제가 되고 미래가 전제가 돼요. 그 말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만 보시라는 거예요. 그러면 순간이 영원히 되고, 그쵸, 시간을 초월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 법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단박에 내려놓으시라 그래요. 이거를요 지금 신심명 3조 대사는 이렇게 신심이라고 얘기했다면, 유명한 황벽(黃檗希運, ?~850) 스님, 유명한 황벽 스님 이걸 뭐라고 했냐? 직하 곧을 직(直) 직하무심(直下無心) 부처되고 싶으면 요것만 하라 그랬어요. 직하무심(直下無心), 곧장 마음을 비우라는 거예요. 곧장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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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면 돼요. 여기에 지금 화두선, 화두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화두할 새도 없어요. 직하무심, 저 때는 화두란 말이 없어요. 화두가 안 나와요. 그냥 무심(無心)하면 그대로 부처다 입니다. 요거 못한 사람들이 공부하는 거예요. 그냥 모른다 하시면요 그냥 모르는 거예요. 거기 그렇게 돼 있어요. 이게 안 되면 몇 십 년이라도 해야 된다. 하지만 이게 곧장 되면은 이미 부처다. 황벽 스님의 전심법요(傳心法要), 이 신심명(信心銘) 이런 것들은요, 성철 스님이 조계종(曹溪宗) 바이블로 우리 임제종(臨濟宗) 바이블로 해야 된다고 그래가지고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고 따로 뽑아서 책이 따로 나와 있어요. 장경각에서 선림보전(禪林寶典)이라고 따로 책이 나와 있는데, 수많은 선어록 낸 다음에 그건 따로 뽑은 거예요. 육조단경(六祖壇經), 황벽 스님의 직하무심을 핵심으로 하는 전심법요(傳心法要), 방금 신심명(信心銘). 지도무난(至道無難)하니 그냥 간택(揀擇)만 하지 마라. 좋다 싫다만 하지 마라는 이 신심명, 요거 다 바이블입니다. 증도가(證道歌)도 똑같아요, 내용이. 요렇게 해서 바이블이거든요, 지금 현재 조계종에서도. 예 그 화두가 끼어들 새가 없습니다. 화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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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자는 거고요. 이게 이미 화두예요. 이거 뭐꼬? “이머꼬?”란 화두가 원래 선문답의 화두로 쓰던 거 아니에요. 그냥 물어보던 거예요. 그거 뭐냐? 너 거기 어디 있냐? 지금 당신의 그 찾는 자리 어디 있습니까? 요거예요. 이거 뭐꼬? 그걸 자기한테 물어보라는 거예요. 이 자린 뭐지? 요거 다 읽고 나셔서요 고요함을 자꾸 생각이 밖으로 향할 때, 생각 감정 오감으로 마음이 향할 때 안으로 돌이키라고 하는 신호입니다. 이머꼬는요 돌아가. 자리로 돌아가. 생각 감정 오감을 알아차리는 자리는 뭐지? 하고 스스로한테 던져보면 이 질문만 하고 있으면 안 돼요. 이 질문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로 찾아보세요, 안으로. 아까 반조하라는 게 이뭐꼬예요. 이건 뭐지 하고요 밖으로 나가는 마음을 안으로 한번 돌려보세요. 그러면 이것만 하고 제가 마칠게요. 나라고 하는 이 텅 빈 알아차림이요 이게 나인데 순수한 나인데 아무것도 제약이 안 붙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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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참나예요. 이게 뭐랑 붙냐면요 밖으로 이게 조(照)죠. 비춥니다. 밖으로 비추면요 생각이랑 붙이면 나는 무슨 주의자,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고요. 감정이랑 붙으면요 기쁘고 슬프고 웃고 하루 종일 바뀌어요. 이거는 수시로 바뀌어서 아까 10분 전을 지금 기억 못 하실 겁니다. 오감도 그래요. 보고 들리고 하는 것들은요 계속 바뀌어요. 하루 종일 일어났다 사라지는 자리들입니다, 이거는. 계속. 이 나만 안 바뀌어요. 이거 바뀐다 안 바뀐다 말할 수가 없죠, 사실은. 이 입장에서 보면 안 바뀌는 것처럼 보여요. 요 자리, 이머꼬는 이거예요. 반조(返照). 이걸 뒤집어 보자는 거예요. “요걸 보고 있는 나는 누구지? 지금 슬퍼하고 있는 나는 누구지? 내가 지금 이걸 이 주장을 우기고 있는 난 누구지? 지금 이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누구지?” 하고 안으로만 돌아가 보시면 항상 같은 나가 기다리고 있고 이건 천 년 전에 찾아도 그 자리고요. 천년 뒤에 찾아도 이 자리입니다. 뭐 별다를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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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반조를 하셔도 그 자리고요, 텅 빈 자리. 지금 깨쳐도 그 자리고요. 앞으로 10년 뒤에 깨치셔도 그 자리예요. 그래서 이 자리를 항상 여여한 자리, 이걸 여여라고 그래요, 불교에서. 왜냐하면, 같을 여(如) 같을 여(如) 항상 같거든요. 이 여여한 자리를 찾으시는 분은요 삶 자체가 여여해져요, 그분도. 매일매일 좋은 날이 돼버리고,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 세계도 느끼지만 변하지 않는 세계, 태풍의 눈을 알면서 태풍을, 태풍의 세계를 이렇게 다스리기 때문에요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런, 이렇게 가는 게 도인이다 하는 이거 내용 나온 게 신심명이고요. 그 신심이라야 진짜 신심이고 그거 얻은 이라야 진짜 이제 부처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하는 그 내용입니다. 예.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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