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년 방초정 이호민(李好閔,1553~1634)
■이호민(李好閔,1553~163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 · 남곽(南郭) · 수와(睡窩).
증조부는 호조판서 · 적개좌리공신 연안군(延安君) 이숙기(李淑琦), 할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세범(李世範)이며 아버지는 이천현감(伊川縣監) 이국주(李國柱)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비안 박씨(比安朴氏) 사직 박여(朴旅)의 딸이다.
1611년 書雲觀 提調로서 大丘胎室을 살피러 가다. 가는 길에 선산을 참배하고 舊宅을 방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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芳草亭。書示宗孫廷馥。
방초정. 글로써서 종손 이정복에게 보여주다.
이호민(李好閔,1553~1634)
雨露丘原倍愴情(우로구원배창정) 고향길에 비와 이슬 내려 서글픈 심정 더해지니 / 선산에 이슬비 내려 서글픈 심정 더하는데
行人纔得祭淸明(행인재득제청명) 행인은 겨우 날이 청명하기만을 기원하네./ 행인들 간신히 날 맑기만 기도하네.
白頭未判南歸計(백두미판남귀계) 남녘으로 돌아갈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늙어만 가는데 / 늙어서도 귀향 계획 세우지 못하여
慚愧春山杜宇聲(참괴춘산두우성) 봄 산의 두견새 울음소리에 부끄럽기만 하네. / 춘산 두견새 울음에 부끄럽기만 하네.
送慶尙監司尹海昌 助 序 辛亥三月
1611년 이호민(李好閔,1553~1634)
今年二月。僕以書雲觀提調。有事于大丘府之胎室。奉使嶺南。嶺宲吾郷也。洎入境。在處父老坌集迎勞外。問吾觀察李相公善治。以病辭。未知准辭否。誰其代者。答說僕來時。只見准。未及見代也。因問公輩得何人代。方副屬望耶。臧否在黜陟。得攬轡澄淸如范滂者如何。父老曰。未也。黜之果得其否。代之者未必賢。而或有甚焉。是徒勞迎送往來而已。曰。得保障如尹鐸者如何。曰。未也。城鎭亭障之設。非有異智者。難得其形便。而雖得之。每一人去。幷與所設者而去之。荒城廢壘。纍纍於空山榛莽之間。可惜一番民力。不如初不役之爲愈也。曰。尙文敎得如文翁之化蜀如何。曰。未也。兵火之餘。人散家貧。子弟不暇於詩書。道內書院。設有十餘區。而絃誦寂寥。渠渠厦屋。夐然於山林寂寞之中。惟有雀噪空梁而已。幾何其不風飄而雨摧也。曰。設法察奸。得如趙廣漢尹翁歸如何。曰。未也。以今地步。法雖善而難行。號牌令下。逋民見束。有着跡恒産之機。而果見掣肘。柰設法得善何。况察愈密而奸軓益生。何用察爲。曰。得文學如子夏。才辯如子貢者如何。曰。未也。儂輩居此。見前後爲方伯者。學非不優也。才非不長也。始至。各以所學所思者。將大有布置。而每朝廷號令差調之下。需應不暇。日亦不足。回視向者所自布置者。則不覺已荒凉矣。然則爲公輩方伯地者難矣。僕亦有一說焉。僕首尾三年。凡三到此矣。戶口田畒財力。每見每不及前。然則公輩亦有負於朝廷。而自爲難方伯地耶。父老乃輾然而咍。愍然而嘆曰。當賊之甫退也。人知免賊之苦而復業之樂也。各有生生之意。而猶人未復十分之一二。地未墾十分之二三。而持之十年。人不加集。地不加墾。而賦日增加。人皆謂國事可就緒於一日。興作遽盛。節文遽繁。百爲雲興。徵督川至。以一人之力。當百人之爲。人不以散而走也難矣。人散則地荒。地荒則財薄。爲儂輩地者誠難。而爲方伯地者亦難。非儂輩自爲之難也。然則亦何謂李觀察善治耶。曰。無橫調別作以擾之。且善報罷。僕聞其言而悲之。及入城則吾海昌君以老實膺上簡。已代李觀察矣。其行也。搢紳親舊。皆以詩贐之。僕以所新目見而耳聞者。叙以識之。爲諸君倡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