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방현철
스무 살 되던 해였다. 그때는 ‘나’라는 존재에 매몰되어 심각하게 고민한 시기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내 안의 질문이 끊임없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친구와 부모님에게 물어봐도, 목사님을 찾아가 질문을 해 보아도 속 시원한 답은 얻지 못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산다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 있는 것인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롯해 ‘죽음에 이르는 병,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와 인간의 삶에 관한 파라켈수스의 견해, 참회록, 팡세’ 등 철학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답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가 되나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느 날 남산국립도서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계단 위로 걸어 올라가던 중간쯤, 갑자기 내 앞에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눈은 뒤집히고 온몸을 떨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간질이라고 했다. 그때 반대편에서 내려오고 있던 중년 신사 한 분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손을 잡아보더니 간질이 아니라고 하면서 기도하였다.
“아이에게 들어간 악한 영아, 어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일 분쯤 지나자마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팔을 짚거나 무릎을 구부리며 일어나지 않고 발가락 끝으로 막대기처럼 곧게 일어섰다. 거짓말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신사는 다시 아이를 계단에 앉히고는 무슨 말인가 몇 마디 했다. 그러자 아이는 세상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온갖 욕설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말에 그렇게도 많은 욕이 있는지를 그때 알았다. 어떻게 아이 입에서 세상에서 들었던 욕과 들어볼 수도 없는 쌍스런 욕이 수돗물처럼 쏟아내는지 의아했다. 신사는 “네가 아직 완전히 나가지 않았구나” 하면서, 아이를 다시 앉히더니 기도했다. 그러자 아이는 온순해졌다. 악한 욕을 뱉어낼 때만 해도 남자아이처럼 악다구니를 쓰던 아이는 아주 얌전한 여자아이였다. 그 신사는 악한 영이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신앙을 가지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났다.
사람은 육신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체인 사람과, 내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확인한 기회였다. 나쁜 영이 그 아이 몸 안에 들어가 거친 남자아이로 보이면서 악한 욕설을 내뱉은 것이다. 반면에 좋은 영이 육체에 들어 있을 때는 외모 역시 선한 사람의 얼굴을 한다는 것도 보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에게 실존의 문제는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하루는 친구 상인이가 나에게 좋은 동아리가 있는데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노래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노래엔 자신이 없었지만, 친구가 부탁하는 거라 참석해 보는 셈 치고 따라나섰다. 그 동아리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한 ‘미가엘 노래 선교단’이다. 금요일 저녁에 충현교회에서 합창 연습을 하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대 부속병원에 가서 찬송가를 불렀다. 나는 노래도 못하니 찬송으로 선교하는 일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하자, 친구는 나와 함께 꼭 다니고 싶다 하여 마지못해 얼마 동안 함께했다. 이 시기에도 신기한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
어린이 환자들은 우리에게 와서 함께 부르기도 했고, 어떤 환자는 듣기 싫다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마구 집어 던졌다. 그러던 어느 날, 찬송을 듣기만 하여도 화가 났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가 뭐냐고 다그치듯 물어보았다. 이러한 경험 역시 나를 실존에 한 걸음 다가가게 했다. 사람은 무언가 그 마음 깊은 곳에 내재 되어 있는 존재가 있을 거라는 어설픈 짐작이 감지되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단지 육체와 영으로 살며 세상을 마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토요일 새벽에 이대부속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동대문에서 내려 상가길을 지나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칙칙” 하는 소음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니 버스의 큰 차바퀴 하나가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굴러왔다. 피할 틈도 없이 온몸을 가방으로 막으면서 옆으로 넘어졌다. 가방끈은 끊어지고 책들은 쏟아지고 팔이 좀 긁혔는데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
이십여 회원들과 함께 입원 환자 병동 층층마다 방문하고, 6층 소아병동에서 노래를 부를 때였다. 찬송가를 펴서 부르는 내 오른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철아! 현철아!”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시 또 들렸다. “현철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아직도 모르겠니?”라는 소리에 왈칵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육신은 눈물이 나지 않는데, 심연에 있는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고, 죽었을 상황에서도 나를 구해주셨으니,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분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나는 영적인 존재이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다. 이 세상은 나쁜 영과 좋은 영의 싸움터이기에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순간 육체가 주어지지만, 끊임없이 기도 하면서 변화하면 영원한 삶을 구하게 된다.’라는 놀라운 지혜를 얻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이전까지는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내가 싫었는데, 영원한 존재인 사실을 깨달았다.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을 주님께 받은 날이다. 아직도 깨달음의 선물을 받기엔 부족함이 많지만, 오늘도 최고의 선물을 받기 위해 나는 기도한다.
내 안에 좋은 영으로 가득 찬 하루가 되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