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코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 서문에 이런 글이 써 있습니다.
저자가 뉴욕의 한 지하철을 탔습니다. 지하철을 타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모양이 저마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고 어떤 사람은 신문을 보고 또는 책을 본다든지 어떤 사람은 깊은 사색에 잠겨 있거나 눈을 감고 쉬고 있는 사람들등 주변이 조용하고 평화로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전체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남자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은 크게 떠들석 거리며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 애 아빠인 남자가 바로 이 코비의 옆에 앉더니 눈을 감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잊어버리려는 듯한 표정 같았습니다.
그 어린 아이들은 이리로 갔다 저리 갔다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신문까지 잡아채는 등 매우 혼란스럽게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이 애 아빠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 코비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옆에 앉은 남자가 아빠가 되어가지고 자신의 어린아이들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태연하게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나?
마침내 참다못해서 선생님! 당신 자녀들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좀 아이들을 자제시켜주시지요?
그 때 이 애 아빠가 처음으로 그 상황을 알았다는 듯이 얼굴을 들고는 말합니다.
예, 당신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애들이 법석을 떨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전에 애들의 엄마가 죽은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하는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나는 우리 애들도 역시 그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이 저자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렇구나! 이 애 아빠가 아이들을 통제하지 못하였던 이유가 있었구나! 오해가 풀렸습니다.
그 애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 저자가 처음 가졌던 아이들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은 이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찼습니다. 감정이입이 마음속에 자유로이 넘쳤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방금 돌아가셨다구요? 음 저런!,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한 순간에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스트븐 코비는 뉴욕의 치하철 안에서 삶을 보는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전에는 아이들의 천방지축과 애아빠의 무관심을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가장 큰 죽음의 이별을 맞이한 불쌍한 아이들과 아이들을 짊어지고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야할 무거운 가장의 침묵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21세기를 위한 교회”를 쓴 리더 앤더슨은 21세기 교회가 어떻게 변모할 지를 상고하면서 마찬가지로 교회도 문화와 교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모형의 변화가 요구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바뀌어야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바뀌어야하겠습니까?
칼빈은 교회는 항상 개혁 되어야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교육만하더라도 이제는 각 교실마다 TV가 설치되어있어서, 옛날 운동장에서 조회 하던 시대는 지났고 TV를 통해 방송실에서 말씀하시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각 교실에 전달이 됩니다.
서울시는 21세기를 위한 초등교육의 변화를 위해 교실 마다 멀티미디어 칠판을 설치하고 프로젝트와 파워포인트 등 컴퓨터와 노트북을 이용해 칠판없는 학교, 종이와 연필 대신 노트북으로 선생님의 수업을 받아 적는 그런 학교를 만들자고 예산을 세우고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이런 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무엇을 말해줍니까?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너무 영특하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전등불도 없어서 호롱불에서 종이와 연필도 없어서 아껴서 써야했던 시대와는 달리 모든 것이 풍족한 사회 속에서 우리 어린이들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영상매체를 통해서 각종 정보를 취득하고 스스로 교육이 가능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부모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습니다.
영상매체를 통해 주입식 교육보다는 더 재미있고 흥미있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주일학교 아이들을 옛날식으로 주입식으로 붙잡아 놓고 1시간씩 설교한다면 특히 신앙이 없는 아이들은 다 도망가고 말것입니다.
너희 교회 가는 것보다는 집에서 TV보는 것이 더 낫더라, 또는 차라리 게임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일학교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는 성인들도 세상의 쾌락과 유혹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게다가 경기가 어려워지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에 모든 인생을 전념하다보니 신앙생활이라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변화하게 했습니까? 옛날과 다른 목회 상황이 펼쳐지면서 학자들마다 목회자들마다 21세기에 대한 교회 연구에 나섰습니다. 어떻게 교회가 달라질 것인가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변화하고 개혁되어져야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왜냐하면 시대적인 환경이 이제는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어가고 , 환경이 변화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의식의 전환이 없이 교회의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유럽의 교회처럼 교회는 점점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면에서 변화하지 말아야합니다.
신앙적인 진리 면에서 교회는 그 진리를 고수해야합니다.
교회는 어떤 면에서 변화해야합니다.
물고기들은 점점 다양화 되어가고 변화되어지는데 세상의 물고기들을 잡기 위해 옛날식으로 아직도 대야 하나들고 물고기를 잡아보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우습습니까?
낚시 대도 바꾸고, 때에 따라서는 그물도 써보고, 어떤 때는 물고기 밥도 바꾸어보고, 어떻게 하면 물고기를 많이 낚을 수 있을까 방법을 연구하며 변화해야합니다.
진리는 변화되어지지 않지만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이 달라져야합니다. 진리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방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전환의 방식을 찾는다면 교회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하는지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는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지혜를 가져다 줍니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그 진리는 바뀌지가 않는 것입니다.
오늘 계시록의 말씀을 보니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각 시대와 각 교회를 향하여 편지형식으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라 주님은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어떤 삶의 양식과 의식의 전환이 있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담은 교회가 변하지 말아야할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첫번째로 이런 교회가 되자 에베소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살펴보면서 첫사랑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자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계시록을 살펴보면, 요한 계시록의 서론에 해당되는 일곱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거의 동일한 공식과 같은 방식으로 말씀이 전달됨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 신학자 중에서는 최초로 세계 신학 잡지에 올라간 유명한 논문이 있는데
이필찬교수가 쓴 요한 계시록 해석 방법입니다. 세계 학자들이 인정한 그의 저서를 보면,
요한 계시록을 동일한 원칙을 가지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일곱메시지들은 구약선지자들의 말씀 선포 형식을 띕니다. -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둘째로, 일곱메시지들은 심판과 회개의 촉구 메시지이다.
셋째로, 일곱메시지들은 종말론적 약속이 있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들이 들어있다. 각 메시지마다 후렴처럼 이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공통된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서신서의 특징인 서두와 결론을 생략하고 있다.
둘째, 각 메시지들은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약속과 성취의 공식을 형성하고 있다.
셋째, 요한은 추상적인 교회에게 일곱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교회에게 전하고 있다고 보여준다.
넷째, 일곱메시지는 일곱교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전체의 교회에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가 각 교회에 전달된 메시지를 공유하였던 점을 볼 때 알 수 있다.
다섯째, 일곱 메시지는 요한 계시록 저자의 주요 관심이 교회에 있음을 보여준다.
복잡한 데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냐 한마디로 말하자면,
결국 ,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곧 우리 송탄 중앙교회를 향한 메시지임을 알아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믿고 이 말씀을 듣는다면 귀가 있는자에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지혜가 생겨서 말세를 당한 이 때에 주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섬기는 믿음의 종들이 될 것입니다.
첫째로 나의 환경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계속해서 바뀌어도
주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바뀌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변하여도 주님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말아야한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은 어떤 분이기에 우리가 그분에 대한 시각을 바꾸지 말아야합니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1절-4절을 보면,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계십니다.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형편을 아시며, 칭찬받을 일과 책망받을 문제를 아시고 판단하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본문말씀은 영적인 컴퓨터를 갖다 대시고 정확하고 완벽하게 진단을 내리시고 처방을 내리시는 말씀입니다.
흔히 에베소 교회를 사랑이 없는 교회라고 별볼일 없는 교회라고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2:2-3절을 보면
주님은 그 교회의 상황을 낱낱이 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대단한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왜 우리 목사님은 나의 형편을 나의 환경을 몰라줍니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합니까?
왜 내가 열심히 전도하는데 왜 열매가 안맺힙니까?
주님은 말합니다. 내가 다 안다. 너의 어려운 사정 내가 다안다. 네가 수고한 것 내가 다안다...
여러분 주님이 나의 모든 괴롬과 나의 모든 수고와 나의 모든 눈물을 다 아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시며 위로를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신앙 행위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변화해도 우리의 신앙은 변화하지 말아야한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 주님은 세 가지로 칭찬합니다.
첫째, 에베소교회가 행한 수고와 인내를 알고,
둘째, 악한자들을 특히 이단사상을 거절하고 대적한 사실을 알고
셋째, 참고 인내함으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게으르지 안고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한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한국교회가 탄식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실천이 없다고 말을 많이 합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그리스도인들을 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장사나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소위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자칭하는 교인들과 대면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남을 베려할 줄 모르고, 말만많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업을 하다보니 신용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소리입니다. 그런 교인이 우리들 중에는 하나도 없어야하겠습니다.
실제로 스위스 한인 촌을 가면 교회예배가 시작하는 전후로 슈퍼에서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뭐 슈퍼 주인이 주일 성수를 하기위해 문을 닫는게 아니라, 교인들이 예배시간 전후에 이 슈퍼에 와서 바쁘다는 핑계로 질서도 지키지 아니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꼴도 보기싫으니 우리 슈퍼에 오지 말라고 문을 닫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현대의 병들은 교회와는 달리 에베소 교회는 삶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믿음만 있고 행위가 없는 교회는 송장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실천의 모양이 에베소 교회에는 있었습니다.
그 모양을 소개하는 단어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실천의 모양-수고
이 실천의 행위들의 성격을 수고라고 하는 것은 에베소 교회가 주님을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할 때에 대충 적당하게 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덕 위로 리어카를 밀어 올리다 보면 교인들 중에 어떤 분은 입으로만 밀어 올리고, 어떤 분은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고 , 어떤 분은 한 손으로 밀어 올리고, 어떤 분은 두 손으로 밀어 올리고, 또 어떤 분은 온 몸을 집어 넣어서 밀어 올립니다. 에베소 교회는 입으로나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는 교회가 아니고 온 몸으로 실천하는 교회, 피곤할 정도로 노동하는 교회입니다.
수고라는 말이 그런 뜻을 포함합니다.
이 실천의 성격을 인내라는 말로 썼습니다.
처음에는 거창하게 시작을 하다가도 도중에 가서 그만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한 일도 피곤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시작했던 일을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밀고 나갑니다. 특별히 인내는 고난을 당할 때 필요한 데 주님은 3절에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즉 참는다는 말을 반복하시며, 견딘다는 말을 다시 쓰십니다. 게으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원문을 보면 지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참다가도 인내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치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참고 견디고 지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칠 수 있습니다.
아휴 이제 기도하기도 지쳤어.. 아휴 이제 찬송부르는 것이 지쳤어. 아휴 이제 전도하기도 지쳤어 그렇게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때로는 지칠 때가 있다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모습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한일을 하다가 낙심치 말아라 권면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지치지 않고 잘 견디고 인내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요? 그 비결을 알아야 우리도 써먹을 것 아닙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참고 견디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성취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요 15:16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6: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지는 기도응답이 있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구한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또한 순수한 신앙을 지녔습니다.
이단들을 대적하고 그 거짓된 것들을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며 수고하며 지치지 않는 이와같은 신앙 열정을 지니시고 이단들도 대적하며 이단사상에서 자기를 지키는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는 믿음을 지니시는 에베소교회와 같은 신앙의 행위를 지니시는 송탄 중앙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던 주님은 또한 에베소 교회가 고쳐야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교회가 변화되지 말아야할 것이 무엇인가?
셋째로, 세상이 변화해도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말아야한다.
에베소 교회는 순수한 사랑을 지닌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에베소 교회의 건강을 진단하니, 위장도 건강하고 폐도 건강하고 간도 건강하고 콩팥도 건강한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슴에 문제가 있던 것입니다.
여기 4절을 보면 주님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사랑이 식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처음 사랑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장 2절 처음 사랑을 설명해 주는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 신혼 초의 사랑을 말합니다.
옛날 결혼식을 보면 신부를 꽃가마에 태워서 신랑에게로 데려가게 됩니다. 가마꾼들이 사랑스러운 신부를 가마에 태우고 신랑의 집으로 갑니다. 앞에 서 있는 가마꾼은 앞을 볼 수있습니다. 하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가마꾼들은 앞을 볼 수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에 선 가마꾼들은 소망을 보면서 걸어갑니다. 뒤에 선 가마꾼들은 믿음을 가지고 따라갑니다.
가마를 타고 가는 신부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신랑의 집에 가마가 도착하면 신랑인 신부만 신랑의 방에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신부만이 사랑을 가지고 신랑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꽃가마 행렬에서 사랑이 빠져 버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는 빈가마와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같이 주님께 대한 헌신이 있고 주님께 대한 충성 봉사의 손길은 있는데 교리적으로 튼튼하고 순수한 믿음은 있는데, 정작 중요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니 어떻해야합니까?
주님은 그 사랑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확인하고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의 처음 행위 처음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을 가보니까 에베소 교회는 말씀을 사모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바울이 들어가 선교했을 때에 두란노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고, 어떤 사본에는 5-10시라는 시간도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시간으로 말하자면 10시부터 16시까지 주님을 위해 하루에 6시간씩 투자를 했다는 말입니다.
시간의 개념을 빼더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열심이 바로 하루 중 대부분을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데 투자하였고 이 말씀 전파 덕에 골로새와 소아시아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즘 설교 시간 때 시간을 재다가 30분만 딱 지나면 시계가 눈이 가기 시작합니다.
긴 설교를 듣지 않으려합니다.
성경 공부는 아예 길다고 참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모습을 보면 서울에서 하는 사경회 말씀을 듣기 위해서 강원도에서 쌀자루를 짊어지고 두 주 동안 걸어 올라와 천막 속에서 말씀을 듣고 아무데서나 자고, 그리고 다시 내려갔다는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처음 행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갈급하게 사모해서 듣는 행위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행 20장 36절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에베소 교회의 처음 행위의 단면을 사도행전에서 살펴보면 바울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권면하는 그 시간에 뜨거운 사랑이 오고갔습니다.
하나님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무사하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세마디하고 나면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처음 행위의 모습을 보십시요.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40년이 지난 후 AD 95년 처음 행위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복 하라
어떻게 회복해야합니까?
먼저 인정해야합니다.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순간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 처음 순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우리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면 이 말씀에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나는 처음 사랑을 회복했는데 하면서 속에서 뭐가 올라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의 모습 또한 이렇구나 내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정하십시요.. 옛날만 못하죠?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합니다.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
5절 회개하지 아니하면 교회를 없애 버리겠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이 임하신다는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와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축복이 없는 교회가 됩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 인정합시다.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합니다.
어떻게 회복해야합니까?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생각해야합니다.
어디서 부터 그들의 처음 사랑이 떨어졌는지 깊이 생각하라하십니다.
신앙은 무조건 생각도 하지 않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것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 더듬어 보고 각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 더듬어보고 각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하고 회개해야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명령이 처음 행위를 가지라 입니다.
처음 행위를 다시 가지라.. 이렇게 회개하고 돌이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처음 사랑을 확인했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빈 무덤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 그의 발 앞에서 그들의 의를 확인하고 그들의 처음 사랑이 거듭나는 일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는 특권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생명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었던 나무입니다. 이 생명나무과실을 먹을 수 있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에덴 동산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먼 미래에 천국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상상하기 쉬운데 이러한 삶 뿐 만 아니라 현재에도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풍성한 삶 속에서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있다고 하는 확신과 성령충만과 능력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주님께 대한 이와같은 사랑을 회복하시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캐나다 알버타에서는 겨울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계속해서 푸른 잔디가 유지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푸른 잔디가 일년 열두달 그렇게 유지될 수 있느냐? 거기에는 카도민 탄광이 있는데 1919년 그 카도민 탄광 지하에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불은 아직까지도 꺼지지 아니하고 계속 타기 때문에 다른 곳은 아무리 추워도 그 위에만은 푸른 잔디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화될찌언정 여러분의 환경이 변화되어질찌언정 , 어떤 환난의 바람이 불어닥칠지언정 사시사철 푸른 잔디가 유지될 수 있었던 카도민 탄광의 꺼지지 않는 불처럼
여러분의 가슴 속에 솟아나는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모든 환경을 정복하며 예수의 이름이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 승리를 유지하는 비결이란 사실을 믿고 이 첫사랑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하겠습니까?
에베소 교회와 같이 주님에 대한 시각이 변함이 없어야하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의 행위가 수고하며 애쓰며 지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믿음과 헌신의 열매들이 많아야하겠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빠지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야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그 때 경험했던 감정들과 나의 신앙의 모습을 상기해 봅시다. 어떠 했습니까 어떤 믿음의 표현들을 그 때 지녔었습니까 어떤 열심을 그 때 보였었습니까 그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봅시다. 생각하고 회개하고 그 처음 행위를 지니셔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과같이 이 땅에서 생명력 넘치는 믿음 생활 에녹과 같이 주님과 동행하는 풍성한 신앙생활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