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신뢰의 미소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일세. 그래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은 말을 잘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네. 그래서 귀를 열면 마음도 열리는 법이지.”
-본문 ‘귀를 열면 마음도 열린다.’ 중에서-
믿음과 신뢰
우리나라 경제인들에게 「한국이 수출 3000억 불 시대를 여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꼽는다고 한다. 그만큼 정주영 회장이 우리나라의 경제 개발에 끼친 공로가 지대하다. 그런 정 회장의 사업 포부는 이러하였다.
“전 세계의 육지에는 우리 자동차가, 바다에는 우리 배가 다니는 것을꼭 보고 싶다.”
어느 날, 현대자원개발 대표가 마리브 유전 개발에 관한 프로젝트를 검토하다 사안이 매우 중요하여 정 회장의 승낙을 받고자 하였다. 정 회장은 두꺼운 보고서를보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보고할 필요가 없네. 이것만 대답해 봐. 석유가 나올 것인가?”
“예,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은 얼마야?”
“10% 정도․․․․․․․.”
“그래? 그럼, 자네 돈이라면 이 사업에 투자하겠나?”
“못합니다.”
“자네 돈으로는 못할 사업을 왜 나보고 투자하라고 하지?”
그래도 현대자원개발 대표는 현대그룹에서 최초의 유전 프로젝트인지라 아쉬운 마음에서 한마디를 하였다.
“이것이 제 돈으론 못해도 제가 회장님이라면 합니다.”
정 회장은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즉석에서 서류에 결재 사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업은 반드시 성공할 거네. 기름은 꼭 나오네.”
정직의 힘
미국의 유명한 전기회사의 엔지니어였던 한 간부가 회사의 재정 약화로 곤경에 처했을 때 경쟁사인 필립스 전자의 기술부장 초대를 받았다. 기술부장은 간부에게 회사의 신제품 자료를 넘겨주면 후한 사례를 하겠다고 은근히 제의했다.
점잖은 간부였지만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단호히 말했다.
“그런 이야기라면 두 번 다시 나에게 하지 마시오. 우리 회사가 지금 많이 힘들지만, 양심을 파는 사람은 없소.”
얼마 뒤, 회사는 결국 파산하였고 그도 실업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필립스 사장이 그에게 전화하였다. 꼭 자기를 한 번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라이벌 회사 사장이 자기를 찾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필립스 전자를 찾아간 그는 뜻밖에도 사장의 열렬한 환영에 어리둥절했다.
사장은 그에게 기술부장의 발령장을건넸다. 당황한 그는 뭘 믿고 이런 중책을 맡기는지 묻자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전임 기술부장이 정년퇴임을 하면서 특별히 당신을 추천하였답니다. 당신의 실력은 이미 유명한 데다, 정직함이 나를 다시 한번 감동을 줬습니다.”
그 후, 그는 업무에 대한 전문성과 관리능력을 인정받아 뛰어난 전문 경영인이 되었다. 그가 바로 나중에 필립스의 사장이 된 크니스였다.
귀를 열면 마음도 열린다
어느 날, 미국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에게 해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손님이 찾아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말솜씨가 좋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때마침 휴식을 취하고 있던 루스벨트는 손님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해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사실 루스벨트는 윌슨 대통령 시절에 해군제독이었다. 그래서 해군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전문가였다, 시종일관 루스벨트 대통령이 해군에 관한 내용을 열심히 설명해 주면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맞추며 가끔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건 몰랐네요. 그런 일도 있었군요.”
이윽고 대화가 끝나고 손님이 돌아가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곁에 있던 비서관에게 말하였다.
“오늘 손님처럼 얘기를 잘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순간 비서관은 어리둥절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그 손님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다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루스벨트가 한 말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싱긋이 웃으니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였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일세. 그래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은 말을 잘하는 그것만큼이나 중요한의미가 지니다네. 그래서 귀를 열면 마음도 열리는 법이지.”
부하를 더 신뢰한 리더
고대 중국의 초나라 장왕(?~BC 591)은 보위에 오른 후 3년 동안 향락에 빠진 체하면서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어진 신하의 고언을 받아들여그제야 방탕을 접고, 간신들을 축출하고 눈여겨 보아왔던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였다.
실은 장왕이 허세를 부리기 위해 거짓 향락을 즐기는 척하면서 신하들의 인간 됨됨을 예의 주시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는 쓸만한 인재를 구별하여 국정 기반을 다지고 이를 토대로 초나라를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하루는 장왕이 신하를 모아 연회를 베풀던 중 바람이 불어 방 안의 불이 모두 꺼졌다. 그중 한 신하가 왕의 애첩을 희롱하였고, 애첩은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 뜯어 놓았으니 범인을 잡도록 빨리 불을 켜자고 왕에게 졸랐다.
이 소리를 들은 장왕은 오히려 이런 명령 하였다.
“여자의 정조도 중 하나 그것 때문에 나의 신하를 욕되게 할 수는 없다, 오늘 밤은 불을 켜지 않을 것이니 지위에 연연하지 말고 맘껏 즐기도록 모두 갓끈을 자르시오.”
그런 있고 몇 년 뒤, 진나라와 싸우는 중에 가장 용감하게 싸우는 장군이 있어 장왕이 그를 불러 크게 치하했다. 그러자 장군은 왕 앞에 엎드려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저는 한 번 죽었던 목숨이었습니다, 오래전 폐하께서 관용을 베푸셔살아났습니다. 그 후 저는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기로 맹세했습니다. 갓끈을 뜯긴 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언어 장애가 있는 캐나다 총리
우리는 멋진 말로 상대방을 잠시 현혹할 수 있지만, 영원히 감동하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결함을 솔직히 시인하면서도 굳은 신념을 내보이는 사람이 뭇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런 사람이 바로 장 크레티앵(1934~)이다.
장 크레티앵은1993년부터 캐나다 총리를 세 번이나 연임한 훌륭한 정치가였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19형제 중 열여덟째로 태어났으며 선천적으로 한쪽 귀가 먹었고, 안면 근육의 마비로 입이 비뚤어져 발음이 어눌하였다.
그래서 그의 신체장애가 때론 정치 만화가들의 풍자 대상이 되었고, 크고 작은 사건에도 크게 부풀려져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총리직에 도전하자 많은 사람이 그를 비웃었다. 당시 선거 유세 때 크레티앵은이런 연설 하였다.
“여러분, 저는 언어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스러웠습니다. 지금도 제 가진 언어 장애로 제 생각과 의지를전부 전하지 못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러자 누군가 소리쳤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총리에게 언어 장애가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점이 아니오!”
이 말을 들은 크레티앵은단호하게 되받아쳤다.
“말은 잘 못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10만 척의 상처
세계적인 항구 도시인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는 무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소가 있다. 이 조선소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지금까지 만든 배를 똑같은 모형으로 축소 제작하여 전시해 놓은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배가 항해하면서 겪었던 일들과 운명을 모형 배에 함께 새겨두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조선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엄청난 규모의 조선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천천히 조선소를 구경했다.
“바로 이곳이 10만 척이 넘는 모형 배를 전시해 놓은 특별 전시관입니다.”
가이드의 말에 관광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모두가 몰려들자 가이드는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 전시된 모형 배에는 배가 지나온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이 배는 30년 동안 항해하면서 열 번의 빙하를 만났고, 해적선의 공격도 다섯 번이나 받았습니다. 또한, 일곱 번이나 다른 선박과 충돌했으며, 스무 번이 넘는 고장 끝에언제 어느 바다에서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이곳 조선소에서 제작해서 각지로 보내진 10만 척의 선박 가운데 6천여 척은바다에서 침몰했다. 또 9천여 척은심하게 파손되어 다시 항해할 수없게 되었고, 6만여 척은스무 번이 넘는 크고 작은 재난을 겪었다. 그렇지만 항해를 하면서 상처를 입지 않은 배는 단 한 척도 없었다고 한다.
방해할 수 없는 사람
미국의 ‘월가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펀드 매니저 존 템플턴(1912~2008)은 좀처럼 인터뷰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인터뷰에 할애할 시간을 좀 더 유용한 데에 쓰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진 촬영 시간을 내는 것도 역시 깐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그에게 한 잡지사에서 사진 촬영 요청이 들어 왔다. 그는 딱 30분간 촬영할 것을 허락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 당일에는 무려 7시간 동안이나 사진 촬영에 응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존 템플턴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느 기자가 왜 그 사진 기자에게만 그렇게 오랜 시간 촬영을 허락했는지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자기 일에 어마어마한 노력을 쏟더군요. 그는 나를 촬영하는 일에 온 열정을 다 바쳤어요. 자기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존 템플턴은 사진 기자의 어마어마한 노력을 ‘110%의 노력’이라고 불렀다. 100%를 넘은 110%의 노력 앞에, 그는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준 것이었다.
그는 이따금 동료들에게 이렇게 설파하였다.
“누구도 감히 방해할 수 없는 사람이 돼라.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의 힘은 전심을 쏟아붓는 노력의 모습이다.”
지도자의 신뢰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유교의 시조로서 최고의 덕(德)을 인(仁)이라고 설파한 공자(BC 561~BC 479)에게 그의 제자 자공(BC 520~BC 456)이 물었다.
“한 나라를 제대로 유지해 가려면 어떠어떠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옵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를 정상적으로 유지하려면 식량을 충분하게 마련해야 하고, 무기를 충분하게 마련해야 하며, 백성들이 위정자를 믿게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자공이 다시 물었다.
“그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반드시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버려야 하옵니까?”
공자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무기를 버려라!”
자공이 다시 묻었다.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또다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이번에는 공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는 식량을 버려라.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면 굶어 죽는 사람이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위정자를 믿지 못하면 제아무리 부유한나라도 결국 망하게 되는 법이다.”
공자가 위정자와 국민 사이의 믿음을 그처럼 소중히 여겼음을 오늘날 한 나라의 지도자들이나 CEO들이라면 모두 한 번 새겨 두어야 할 대목일 것이다.
시각을 알리는 시계추
어느 작은 마을의 시계방 앞에 매일 아침이면 한 사내가 멈춰 서서 손목시계의 시간을 맞추곤 했다. 그 사내는 시계방 주인이야말로 마을에서 가장 정확한 시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주인은 매일 아침 이 사람이 유리창 앞에서 멈추는 것에 차츰 익숙해졌다. 어느 날, 주인은 그에게 인사를 하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궁금한 게 있어요. 몇 달 동안 선생님을 뵈니 아침마다 제 가게 앞에서 멈추시더군요. 그 이유를 알고 싶군요.”
남자가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사장님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십니다. 시각을 정확히 맞추는 직업을 가졌으니까요. 또한, 저에게도시간은 돈이나 마찬가집니다. 사실 저는 창문을제작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요. 직원들에게 날마다 점심과 휴식, 퇴근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호각을 분답니다. 이 일을 위해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시각을 알아야하지요.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사장님의 가게에서 시계를 보고, 제손목시계를 맞추는 거랍니다.”
이 말에 주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우리가 서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니! 저는 저녁 시간을 알리는 호각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둘러 제 시계를 맞추곤 했어요!”
덩샤오핑과 닉슨
개혁과 개방이라는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여 오늘의 중국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6)은 키가 152㎝로 ‘작은 거인’이라 불렸다.
그는 쓰촨성의 작은 농촌에서 태어나 프랑스 유학생으로 대장정과 항일운동을 거치며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신임을 얻었다. 숙청의 위기도 여러 번, 마침내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등극하여 중국의 역사를 바꿔놓은 인물이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마오쩌둥이지만가장 고마워하는 지도자는 덩샤오핑이다. 중국인들은 그를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자존심을 되찾아 준 지도자라고 생각하며 그의 여러 잘못에도불구하고 사랑하고 칭송했다. 그가 죽은 뒤 유품을 정리하던 아내와 딸이 구멍이 뚫리지 않은 옷이 단 한 벌도 없음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70년 언젠가 정치적 관계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던 미국의 리처드 닉슨(1913~1994) 대통령과 만났을 때였다. 닉슨 대통령은 키가 작은 덩샤오핑을 우습게 보았다. 그래서 거만하게 덩샤오핑에게 물었다.
“왜 위를 보지 않는 거요?”
그러자 덩샤오핑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왜 나를 보지 않는가?”
우월감에 차 있던 닉슨은 덩샤오핑의 당당한 태도와 재치 있는 언변에 깜짝 놀라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을 생각하는 장사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가 창설한 파나소닉 전자는 1927년 거의 모든 자금을 ‘내셔널 램프’ 생산에 쏟아부었다.제품은 가정에서 사용하기 편리해 출시하기가 무섭게 속속 팔려나갔다. 그러나 훗날에 불황이 닥치면서 파나소닉사의 전 자본을 쏟아부어 생산한 제품의 판로가 막히게 되었다.
결국, 파나소닉은 냉정하게 시장 흐름을 파악한 뒤, ‘내셔널 램프’ 1만 개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판촉 활동을 계획했다. 그런데 이 램프는 꼭 건전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큰 걸림돌이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곧장 오카다 건전지 회사의 총수를 찾아갔다.
“무상으로 건전지 1만 개를 제공해 주시오!”
오카다 건전지 회사의 총수는 이 엉뚱하고 무례한 요구에 당황하면서 화난 표정을 짓자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이렇게 말했다.
“일단 우리 상품의 판로가 열리면 협조해 주신 보답으로 1년 안에 귀사의 건전지 20만 개를 팔아 드리겠습니다. 분명히 약속드리죠!”
자신만만한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총수는 마침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파나소닉은 램프 1만 개를 무상으로 공급하였고, 일단 사용해 본 소비자들은 또다시 ‘내셔널 램프’를 구매하게 되어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오카다 건전지도 약속보다도 더 많은 40만 개나 팔렸다고 한다.
세계적인 명품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블루오션이 열릴 수 있다. 100년에 2초 이상 틀리지 않는 정확성, 철저한 장인 정신, 그리고 전 세계 어디서나 같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사후 관리 등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명품으로 손꼽히는 롤렉스사가 그 대표적인 예다.
어느 날, 롤렉스의 하이니거(Patrict Heiniger) 회장이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에 한 친구가 물었다.
“자네 요즘 시계 장사 잘되는가?”
그러자 하이니거 회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계? 그걸 내가 어찌 아나? 내가 모르는 분야라네.”
친구는 그 말을 듣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아니, 세계 최고의 시계를 파는 자네가 그 시계를 모르면 누가 안단말인가?”
그러자 하이니거 회장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무슨 소리인가. 난 시계 장사가 아니라 보석 장사일세.”
대부분의 시계 업체들이 ‘패션’으로 정의하고 경쟁하는 동안 롤렉스는 자신들이 만드는 것을 보석으로 정의하였다. 그렇기에 모든 시계 업체들이 경쟁하는 시장에서 한 발짝 벗어난 새로운 시장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수 있었다.
모든 일은 정의하기에 따라서 새로운 시장, 즉 블루오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반 사람들은 잘 몰랐던 것이었다.
관객이 알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이미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건만 그는 매일 하루 6시간 이상 피나는 연습을 쉬지 않고 하였다.
어느 날, 친구가 연습실을 찾아와 피아노를 치고 있는 피아니스트에게 물었다.
“여보게, 아무도 자네의 피아노 솜씨를 흠잡는 사람이 없는데, 왜그렇게 매일 연습에 목을 매는 건가?”
피아니스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평론가가 알지. 그리고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 가 안다네.”
그가 바로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 파데레프스키(1860~1941)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의 기초 교육을 받고 1872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들어가 피아노를 전공하기도 하였다.
그는 변치 않는 재능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고의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그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야말로 두고두고 칭송받을만한 진정한 천재의 면모가 아닐는지.
그는 오페라 《만루(Manru)》를 비롯하여 유명한 작품을 많이 남겼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나중에는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리까지 지내기도 하였다.
레이건과 파월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1911~2004) 정부 때의 일이었다. 당시 레이건은 콜린 파월(1937~) 국무장관을 비롯한 몇몇 장관들과 함께 새로운 정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새 정책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을 얻은 파월 장관은 대통령을 설득하려 하였다.
하지만 레이건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허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레이건은 한동안 파월과 입씨름을 벌였지만, 결국에는 파월을 믿고 새 정책을 추진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레이건의 예상대로 실패였다. 언론은 일제히 백악관의 무능을 탓하기 시작하였다. 레이건은 결국 기자 회견 자리에서 정책의 실패를 시인하였다. 그곳에서 어느 기자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이번 정책은 대통령께서 직접 제안하신 것입니까?”
파월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이 질문만은 나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레이건은 조금도 바로 대답하였다.
“네, 모든 게 나의 책임입니다.”
지켜보던 파월의 눈에는 순간 눈물이 고였다. 모든 책임을 깨끗이 인정하였다. 비난의 화살 속에서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준 레이건. 그의 행동은 그를 믿고 따르는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신뢰라는 빛나는 가치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기자 회견이 끝나자 파월은 동료 장관들에게 말했다.
“나는 저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거요.”
명예를 지킨다는 것
세계적인 축구 선수의 이야기이다. 그가 1965년 브라질의 축구 명문가인 산토스 클럽의 선수로 뛰면서 병행했던 사업이 기울자 파산 직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담당 회계사는 상황이 더 악화하기전에 회사를 파산하면 개인의 재산만은 건질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회사를 파산시키면 내 재산은 지킬 수 있겠지. 그러나 내가 고의로 부도를냈다는 사실은 결코 숨길 수 없다. 사람들은 내 행동에 실망할 테고 나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말겠지.’
마침내 그는 수년 동안 쌓아왔던 명예를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산토스 클럽의 회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회사를 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다.
구단에서는 회사가 회생하도록 돕는 대신 계약 기간의 연장, 연봉 동결, 또 계약 마지막 해는 무임금으로 뛸 것을 요구하였다. 누가 봐도 그에게 몹시 불리한 계약 조건이지만 그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 모든 손해를 감수하면서 회사를 살렸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축구의 황제 펠레(1949~)였다. 17세의 나이로 FIFA 월드컵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누렸던 그는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되는 등 살아있는 전설적인 축구 스타였다.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곧다
당나라의 태종은 다른 왕들과는 달리 신하들의 직언을 잘 들어주기로 유명하였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신하들과 조회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온 당 태종이 화를 참지 못하면서 황후에게 말하였다.
“고얀 놈! 언젠가는 내 손으로 그놈의 목을 치리라.”
그러자 황후는 당 태종에게 조용히 그 연유를 물었다. 당 태종은 몹시 격렬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위징이라는 신하가 조회 때마다 다른 신하들 앞에서 대놓고 짐을 욕보이잖소. 짐도 이제 더는 견딜 수가 없소!”
이 말을 들은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복으로 갈아입고 마당에 나가서 태종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당 태종이 깜짝 놀라며 그 이유를 묻자 황후가 대답했다.
“하례 드리옵니다. 폐하! 예로부터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곧다고 하였습니다. 위징이라는 신하가 그처럼 말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폐하께서 어지시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본디 바른 소리는 귀에 거슬리고 아첨하는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입은 하나요, 귀가 둘인 것은 곧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라는 뜻이다.
당 태종은 황후의 이와 같은 말에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그 뒤로는 거슬리는 말을 하는 신하가 있어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줌으로써 지금까지도 중국의 역사상 위대한 황제로 칭송받고 있다고 한다.
성공의 계단
휴 애런슨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 스웨덴을 떠나서 혼자 미국에 이민했다. 그러나 넓은 땅, 누구 한 사람 반겨주는 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흔한 일자리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가지고 있던 돈도 다 떨어지고 말았다.
하루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서 무작정 서부로 가는 열차 화물칸에 올라탔다. 하지만 승무원에게 발각되어 열차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강물에 비친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차라리 저 강물에 몸을 던져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불현듯 그의 마음속에 성경 구절이 하나 떠올랐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는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과연 지금까지 나의 인생길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두 주먹을 쥐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기가 지나온 모든 과거를 흘러가는 강물 위에 털어 버리고 더 열심히 살아보기로 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휴 에런 스는 문에나주의 영광스러운 주지사로 선출될 수 있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선생님, 한 젊은이가 찾아와 선생님을 뵙고자 청합니다. 우리 일을 돕겠다고 하는데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일본말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요.”
이 말은 들은 김구(1876~1949) 선생은 그 젊은이를 데려오라고 했다. 젊은이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던 탓에 가난과 병에 시달려 있었으며,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쓰게 되었다고 했다. 김구 선생은 그 젊은이의 사람됨을 한눈에 알아보고 당시로는 어마어마하게큰돈인 천 원을 선뜻 내주었다.
이 젊은이가 훗날 일본에서 히로히토 왕을 저격하고 교도소에서순국한 이봉창(1900~1936) 열사였다. 이 열사는 서울에서 여유 있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운 뒤 11세 때에 천도교에서 세운 문창 학교에 입학하여 15세에 졸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오랜 지병과 사기까지 당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상급학교의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에 들어가 17세 때까지 일을 하였다.
이 열사는 거사를 위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이 일본으로 떠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평생 나를 신임해 주신 분은 김구 선생님뿐이시다. 그분이 이렇게믿어 주시는데 내 어찌 목숨인들 아끼랴. 나라를 사랑하는 법도선생님에게서 배웠노라.”
적군의 암호 해독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프랑스는 독일군에 의해 수도 파리를 점령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위급 상황에서 프랑스군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그것은 독일군 사령부가 타전한 중요 암호를 중간에 가로챘다. 그 암호에는 바로 파리 공격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암호를 해독할 길이 없었다. 적의 암호는 아군과 체계가 달랐고 지금까지와 다른 신종 암호라 난해하기가 그지없었다.모두 불가능하다고 낙담하고 있을 때 한 젊은 병사 앞으로 나와 자신이 해독해 보겠다고 하였다. 다른 장군들은 반신반의하면서 그 병사에게 맡겼다.
암호를 받아 든 젊은 병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반드시 뜻을 알아내고 말겠습니다.”
그 병사는 일주일 동안 체중이 15kg이나 줄 정도로 암호 해독에 매달린 결과 마침내 암호를 해독하였다.
무엇이든지 적극적인 자세로 임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 최대 화학공업의 총수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파리의 상공회의소 회장까지 지냈다. 그가 바로 조르주 팡반이었다.
그는 훗날 인생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인생에서 최초로 거둔 성공을 반복한 덕분에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흥정의 달인 빌 게이츠
빌 게이츠(1955~ )는 흥정의 달인이다. 갓 마이크로소프트를 차린 빌 게이츠와 컴퓨터업계의 황제 IBM의 흥정은 정말 대단했다.
사업 초기에 IBM의 의뢰를 받아 도스를 개발한 빌 게이츠에게 거액을 주는 대신 도스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하라는 IBM의 요구를 거절했다. 도리어 도스 프로그램을 사용하려면 IBM의 모든 컴퓨터에 도스를 탑재하고 제품 하나하나의 소프트웨어 사용 값도 받겠다고 하였다.
햇병아리 사업가의 당찬 요구에 IBM은 다른 거래처를 알아보겠다며 엄포를 놨지만 그는 자사의 소프트웨어를 타 회사에 팔아도 이의를 제기 말아야 한다는 조건까지도 내걸었다.
결국 IBM은 시중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빌 게이츠와 계약을 체결하지만 이후 IBM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다. 미래는 틀림없이 소프트웨어가 주도하는 시대가 될 거라는 사실을 IBM은 몰랐지만 빌 게이츠는 알고 있었다. 만일 처음 IBM이 제시한 100만 달러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그도 백만장자의 삶에 그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밀고 당기는 흥정에서 승자가 되려면 그는 다음의 원칙을 유념하라고 권고하였다.
“상대를 파악하라. 흥정은 다급한 자가 매달리는 법이다. ‘NO’라는 대답을 들어도 포기하지 말자. 처음에 성사될 흥정이라면 애초부터 흥정이란 것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헐뜯지 마라
고대 페르시아 어느 왕의 이야기이다. 그는 정사를 잘 돌볼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통찰력도 뛰어나 주군으로서 덕목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그의 주변에 어진 신하들이 넘쳐났으며,이로 인해 페르시아 왕국은 날로 풍요와 번성을 누리며 복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태평천하에도 음해의 세력은 있기 마련. 어느 날, 한 대신이 왕이 매우 아끼는 한 측근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이 왕을 매우 곤혹스럽게 하였다.
왕의 측근인 한 신하가 겉으로는 충성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호시탐탐 반역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모함의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심기가 매우 불편해진 왕은 상소에 대한 비답을 쓰기 시작했다. 비답을 쓰는 왕의 손놀림도 매우 무거운 듯했다.
음해의 상소를 올린 대신은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 친히 쓴 비답을 펼쳐 본 그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비답을 읽고 난 뒤에도 얼굴이 귀밑까지 달아올랐다.
왕의 비답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그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바탕으로 그의 능력을 판단할 따름이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 서 판단하지는 않는다. 나는 사람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마음마저통제할 수는 없다.”
내 아이에 대한 믿음
아이를 전적으로 믿어 주고 항상 칭찬해 주며 자랑스러워하는 일은 아이에게 용기를 주게 된다. 200여 개 기업체를 소유하고 50,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영국 버진 그룹의 리처드 브랜슨(1950~)은 독서 장애와 근시에 시달리던 평범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를 변화시킨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리처드 브랜슨의 어머니인 이브 브랜슨은 그 당시 흔치 않았던 여성 조종사였고,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이기도 했다. 이처럼 적극적이고 활달한여성이었던 이브는 그 아들에게도 같은 유산을 물려주었다.
“나는 아들을 부끄럼을 타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충분히 생각할줄 아는 외향적인 사람으로 키우려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러 잣대로 아이들의 가치를 빛나게 해주는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물며 독서 장애증에 시달렸던 리처드 브랜슨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열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돈을 투자해 창업하도록 했다. 그의 취미를 사업으로 연결해 보도록 용기를 불어주었다.
리처드 브랜슨은 그의 어머니가 들려주는 말 중 이 말을 가슴 속에 가장 오래 기억하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 그러니 일단 시작해 보라. 그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찾을 수 없다면 방향을 바꿔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 제아무리 복합한 문제라도 해결책은 있기 마련이다.”
손수 우산 받쳐 쓴 총리
직접 우산을 쓰고 있는 총리와 다른 사람이 받쳐준 우산 속에 서 있는 간부. 최근 대조적인 이 두 장의 사진이 13억 중국인들을 술렁이게 했다.
얼마 전 중국 푸양시에 큰 홍수로 인해 수해가 발생하였다. 원자바오 총리를 비롯해 당국의 관리들은 격려차 수재민들을 방문하였다. 이때 원자바오 총리는 자신이 직접 우산을 받쳐 들고 수재민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장화를 신고 진흙길을 걸어가면서 수재 현장의 참사를 가까이서 둘러보았다.
반면 다른 사진 속의 몇몇 간부들은 누군가 받쳐주는 우산을 쓰고 있었는데, 그중 한 관료는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에게 우산을 들게 한 채 연단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의 연설이 감동을 줄 리 만무하였다.
‘서민 총리’라는 별칭을 가진 원자바오 총리가 중국을 감동하게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1월 시골의 한 농가를 찾았을 때 입은 녹색 점퍼는 11년 전에 산 것이었고, 당시 신고 있던 흰색 바탕의 검은 줄무늬 운동화는 이미 해진것을 여러 차례 기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원자바오 총리는 간수성 말단 엔지니어로 자원 탐사를 다니던 시절부터 거대한 중국의 총리가 된 지금까지 변함없는 소신과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훌륭한 지도자는 자리가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성품이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형님 체면 세우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다비드의 걸작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말이 대관식이지 스스로 황제관을 쓴 나폴레옹(1769~1852)이 황후 조세핀의 머리에 금관을 씌워주고 있는 그림이다.
교황 피우스 7세는 그저 뒤에 앉아 새 황제의 즉위를 축복해 줄 따름이었다. 이처럼 나폴레옹은 누구에게도 머리숙이지 않으나 딱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형 조세프였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조세프는 8남매의 맏이로서 가장이었다. 나폴레옹보다 한 살 더 많을 뿐이었지만 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나폴레옹도 그의 형 조세프에게는 꼼짝도 못 했다. 월급도 몽땅 형에게 맡겨야 했다. 황제가 된 뒤 권력의 서열이 바뀌게 됐는데도 형은 그것을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형은 동생 나폴레옹을 찾아갔다.
“나는 우리 집안의 가장일세. 내 체면 좀 세워주시게.”
나폴레옹은 못마땅했지만, 형을 나폴리 왕으로 봉했다가 2년 뒤에는 스페인 왕까지 겸직시켰다. 그러나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얼마 못 버티고 쫓겨 오고 말았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의 몰락을 재촉했음은 물론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 주변의 실세들은 권력자의 형제이거나 자식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권력자의 첫걸음은 집안 단속부터 잘하는 것이 중요함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수신제가(修身齊家) 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인가 보다.
노벨의 충격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알프레트 노벨(1833~1896)은엄청난 돈과 명성을 함께 얻었다. 어느 날 그는 조간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신문 1면에서 「알프레드 노벨 사망」이라는 큰 제목과 함께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등의 굵은 활자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느 기자가 동명이인의 죽음을 착각한 오보였다. 그렇지만 노벨 자신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노벨은 발명의 기쁨과 공명심에 들떠서 이제껏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다이너마이트의 부정적 기능에 대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결코 죽음의 사업가니 파괴의 발명가니 하는 이름을 세상에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노벨은 깊이 생각한 끝에 그동안 다이너마이트로 벌어들인 자신의 막대한 재산 모두를 평화와 번영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게 줄 노벨상을 제정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은 곧 자신의 얼굴이며 인격이다. 살아있었던 동안의 행적에 대한 온갖 비판들이 그 이름 위에 얹히게 될 것이다. 아까운 사람이야! 잘 죽었어! 혹은 위대한 인물이 사망하다! 등과 같이 말이다.
과연 나 자신이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는지, 또 지금 나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그리고 훗날 나의 이름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한 번쯤 생각해 봄 직하다.
공자의 후회
공자(BC 551~BC 479)가 제자들과 함께 제나라로 가던 도중 양식이 떨어져 채소로 일주일을 버텨야 했다. 지친 그들은 어느 마을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공자가 깜박 잠이 들었던 사이에 제자인 안 회는 어렵게 쌀을 구해 밥을 지었다. 밥이 다 될 무렵에 공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마침 안회가 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먹는 중이었다.
‘안회는 평상시에 내가 먼저 먹지 않은 음식에는 수저도 대지 않았는데 이것이 웬일일까? 지금까지 안회의 모습이 거짓이었을까?’
그때 안회가 밥상을 공자 앞에 내려놓았다. 공자는 제사 음식은 깨끗하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안회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 지내라고 하더구나.”
그런데 안회의 대답은 오히려 공자를 부끄럽게 했다.
“스승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흙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서 제가 그 부분을 이미 먹었습니다.”
공자는 잠시 안회를 의심한 것을 후회하며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고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런 나 이제는 나의 눈과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되구나. 너희들도 알아 두어라.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그것은 진정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여기자의 속임수
미국의 유명한 신문사 워싱턴포스트에 자네트 쿡크라는 여기자가 있었다. 그녀의 꿈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유명한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기자는 정말 놀라운 사건 하나를 기사화했다. 그것은 ‘지미의 세계’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 아홉 살 난 지미라는 소년이 상습적으로 마약 주사를 맞고 있다는 충격적인 기사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독자들을 탄식과 슬픔 속으로 몰아넣었고, 미국 사회에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켜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는데 충분했다.
자네트 쿡크는 이 한 편의 기사로 일약 유명한 기자가 되었고, 기자들의 최고 영예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후, 그녀가 작성한 기사는 허위였음이 드러났고, 퓰리처상도 취소되고 말았다. 유명한 기자가 되겠다는 목적의식만 앞세운 나머지 거짓말을 한 결과였다.
한자에 ‘조장(助長)’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자기 콩밭의 콩 줄기가 다른 밭의 것보다 더 빨리 자라게 하려고 콩 줄기를 조금씩 뽑아 올렸다가 결국은 콩 농사 전체를 망치고 말았다는 고사(古事)에서 생긴 말이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정직하고 성실해야 결과도 좋은 것이다. 성실한 자세로 정직하게 땀 흘려 얻은 결과만이 자기에게 보람을 줄 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보탬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대통령과 100만 달러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청와대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100만 달러가 흘러 들어갔다. 월남전이 한창일 무렵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돈을 들고 온 쪽은 당시 M16 자동소총 수출 업체였던 맥도날드 더글러스회사의 데이비드 심프슨이었다.
비서가 대통령에게 그를 소개하였다.
“각하! 맥도날드 회사의 데이비드 심프슨 씨입니다.”
평소에 집무실과 거실에 부채와 파리채를 두고 에어컨을 끄고 지냈던 박 대통령은 말을 꺼냈다.
“손님이 오셨는데 잠시라도 에어컨을 트는 게 어떻겠나?”
데이비드 심프슨은 인사말과 함께 그는 백만 달러의 수표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각하! 이번에 한국 정부가 저희 M16 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준 신 데 대해감사의 뜻으로 조그만 성의를 드립니다.”
박 대통령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기가 돌았다.
“흠, 백만 달러라. 내 봉급으로는 3대를 벌어도 못 만지는 큰돈이구먼.”
“각하! 우리 회사의 관례적인 성의입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때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박 대통령은 엄숙히 말하였다.
“여보시오. 이 돈을 정말 날 주는 거요? 그렇다면 이 돈만큼 총을 더 주시오. 당신이 준 돈은 내 돈도 당신 돈도 아니요. 내형제들이 타국 천 리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이오.”
히딩크의 마법
거스 히딩크(1946~) 감독이 이끄는 러시아 축구 대표 팀이 지난 6월 22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유로 2008」 8강전에서 네덜란드를 연장 승부 끝에 3대 1로 꺾고 4강에 올랐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신화를 만든 지 6년 만에 히딩크의 마법이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러시아 팀의 공격수 아르샤빈은 감격하여 말하였다.
“한 명의 네덜란드 감독이 11명의 네덜란드 선수를 격침시켰다.”
러시아 선수들도 4강 진출의 공(功)이 히딩크 감독에 있음을 인정한 대목이었다. 다시 히딩크의 말과 리더십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선수들의 잠재력을 읽어내는 능력에 대해서는 영국의 축구 칼럼니스트 랍 휴스도 그를 격찬했다.
“선수 발굴만큼은 히딩크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오로지 능력 위주의 선수 선발과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도 히딩크만의 장점이었다. 이번 「유로 2008」에 대비하면서도 그는 러시아 선수들의 기본 체력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네덜란드전에서도 강력한 압박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선수들의 기초 체력부터 보강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히딩크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선수들이 자신감을 느끼게 하고 전의를 불태우게 하는 마법과 같은 말이었다. 히딩크가 네덜란드전을 앞두고 비장하게 한이 한마디에 러시아 선수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조국 네덜란드의 역적이 되고 싶다.”
노예에서 황제까지
‘노예에서 황제가 된 사나이’ 소설 제목과 같다. 그러나 실화였다. 중남미 카리브해 아이티(Haiti)의 장 자크 데 살린(1758~1806)이 그런 인물이었다.
서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 부모에게서 태어나 30세까지 프랑스인 지주가 경영하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그 후 해방된 흑인 지주에게 팔려가 3년 동안 일하면서 주인의 이름을 본 따 ‘데 살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791년 노예 반란에 참여하면서그의 운명도 바뀌었다. 반란군 지도자 루베르튀르 휘하에서 맹활약하면서 일약 반란군의 실세로 등장할 수 있었고, 루베르튀르가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자 반군의 지도자가 되어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그는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하였고 최초로 노예 국가를 세웠다. 그해 10월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스스로 자크 1세라 칭했다. 재임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예 시절을 깡그리 잊고 포악한 통치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탕수수와 커피 농장을 모두 국유화하였고, 가혹한 노동과 세금을 강요하며 국민을 핍박하였다.
1806년 10월 반란군에게 살해되면서 노예 왕정도 막을 내렸다. 권좌를 차지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더니 아직도 아이티가 쿠데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데살린’의 끝없는 권력욕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도전, 그 원칙의 힘
1375년 성균관 교관으로 재직 중이던 정도전(1342~1398)은 선택의 딜레마에 빠졌다. 친명 정책을 펴던 공민왕이 시해되자, 우왕이 집권하면서 친원 외교 노선 취했다.
정몽주, 이색, 정도전 등 보수적인 친명파들과 신진 개혁의 친원파는 서로 견제에 몰두하며 나름의 묘수를 던졌다. 친원파의 주장대로 친명파의 선봉에 섰던 정도전을 원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영접사로 임명한 것이었다.
정도전이 영접사 임명을 받아들이면 출세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었다. 거부하자니 명령 불복종으로 파직되어 장차 정치적 소신을 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현실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단호했다. 그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그리고 대신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영접사로 가면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든 지, 아니면 그들을 체포하여 명나라로 보내겠습니다.”
정도전은 그날로 파직되어 전남 나주로 9년간 유배되어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궁핍함 속에서 정치적 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그 뒤 이성계와 정치적 동지로 만나 혁명에 성공하여 조선이란 새로운 국가의 청사진을 구상한 것이었다. 원칙을 저버렸다면 그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존경받는 경영자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1910~1987) 하면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생으로, 중동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였다가 1934년에 중퇴하였다.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로 사업에 투신한 후, 1938년 3월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사람이었지만 사소한 일에 집착하거나 작은 실수에 연연하지 않았다. 삼성을 경영하는 50년 동안 단 한 번도 서류에 결재하거나 수표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혼자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아랫사람들에게 인감도장과 수표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사업을 구상하거나 사업 시찰을 다니는 일에 몰두했다. 사소한 일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고 보다 큰 안목으로 자신이 하는 일을 바라본 이병철 회장은 결국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을 일구었고 존경받는 경영자가 되었다.
그는 많은 걱정과 고민거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계 변화를 읽어내는 통찰력과 안목으로 이름을 남긴 불세출의 전문 경영인이었다.
그의 좌우명은 이러하였다.
“위기는 자본과 기술이 아닌 리더십의 부재에서 온다.”
믿음 부족이 곧 멸망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찍이 수나라 110만 병력과 걸출한 당 태종이 이끄는 100만 대군의 침략을 용감하게 막아냈던 막강한 고구려가 왜 한순간에 허망하게 멸망했을까?
70년에 걸친 격전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던 고구려였기에 그 패인이 더욱 궁금하였다. 더구나 당나라 태종은 죽는 자리에서도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훈을 남길 정도였다. 그런데 태종이 죽고 고종에 이르러 고구려는 망하고 말았다. 고종은 황후인 측천무후의 치마폭에 쌓인 유약한 인물인데도 그에게 패한 이유는 뭘까?
연개소문이 죽은 뒤 장남인 남생이 막리지(총리)가 되어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할 때 수도 관리를 맡은 남건ㆍ남산 형제에게 어떤 자가 이간질을 하였다.
“남생이 두 아우를 제거하려고 하니 대비책을 세우세요.”
두 형제는 이 말을 믿지 않자 형인 남생에게도 이간질하였다. 그러나 아우들과 달리 남생은 그 말을 믿고 말았다. 정탐꾼을 평양에 보내 상황을 엿보게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 남건은 형인 남생을 제치고 스스로 막리지가 된 뒤, 군사를 내어 형을 토벌하려 나섰다.
남생은 사태가 위급해지자 국내성으로 도망가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나라는 남생을 길잡이로 세워 고구려로 침략해 들어옴으로써 드디어 고구려는 망하게 되었다.
최 부자 집안의 급구인전
경주 갑부 최순성 집안은 대대로 내려온 부자였다. 어느 날,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집안사람을 불러 놓고 말했다.
“우리 집의 재산은 모두 선친이 근면하여 벌어들인 것인데 많은 재산을 나만을 위해 쓴다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1년간생활비와 손님 접대비를 뺀 나머지 돈은 급구인전(急求人錢)으로 처지가딱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한다.”
그 후부터 최순성은 돈이 없어 혼사를 못 치른 처녀 총각을 도와주고,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관을 사주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급구인전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인 임두라는 사람이 며칠씩 굶고 있다는 소문이 듣게 되었다. 최순성은 그의 집으로 매달 양식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임두는 친구의 자식에게까지 신세 지는 것이 미안하다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 굶어 죽을 작정이었다.
최순성은 그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 그를 설득했다.
“예부터 훌륭한 군자 중에는 가난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른께서는 목숨을 끊으려 하십니까? 제가 사는 동안어진 선비가 굶어 죽었다면 사람들은 저를 뭐라 하겠습니까? 저를 봐서라도 부디 밖으로 나오십시오.”
그의 간곡한 말에 임두 부부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문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훗날 최순성의 아들인 최진관도 급구인전을 만들었다, 흉년이 들면 산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으면 남몰래 곡식을 전해 주며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고 한다.
목숨도 내놓은 우정
옛 중국의 어느 마을에 순거백이라는 젊은 선비가 있었다. 하루는 그가 먼 지방에 사는 친구의 문병하러 갔다. 마침 흉노족이 그 마을 습격하여 주민들은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다.
마을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순거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픈 친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픈 친구는 다급하게 그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병든 몸이니 지금 죽은들 아깝지 않으니 자네는 어서 피신하여 살길을 찾게나.”
그러자 순거백은 정색하며 말하였다.
“나 혼자 살려고 자넬 두고 의리 없이 도망가다니. 나도 여기서 자네와 생사를 같이하겠네.”
이윽고 흉노족이 마을에 도착하여 보니 성안의 사람은 모두 도망쳤는데 두 사람만이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의아한 생각이 든 흉노족 장수는 순거백에게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를 다그쳐 물었다.
“제 친구가 중병에 걸려 거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친구를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차마 혼자 도망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감동한 흉노족 장수는 이렇게 탄식하고 나서 즉시 군사를 모두 철수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의롭지 못한 우리가 의로운 나라에 쳐들어 왔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옛날 그리스의 아테네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어느 길목이 있었다. 이 길은 여행자와 우마차로 항상 붐비는 길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이 길은 해가 떠 있는 낮에만 지나갈 수 있었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 경계하며 지나가야만 하는 무서운 길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길목을 지키며 온갖 나쁜 일을 일삼는 도둑 프로크루스테스 때문이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밤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하여 잠자리를 제공하는데 그 잠자리라는 것이 딱딱하고 얼음같이 차가운 쇠침대였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강제로 그 침대에 묶은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의 몸길이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길이를 늘려서 죽였고, 몸길이가 침대보다 길어 밖으로 일부가 나오면 나온 부분을 잘라 죽였다.
그 침대와 몸길이가 똑같은 사람만이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런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도 결국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끝을 맺게 되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도 그동안 저질러 왔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침대에 묶인 채 죽었다. 그도 결국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서 파멸을 초래했다.
구부리지 않으면
규슈 하카타의 성복사 스님이었던 센가이는 어느 날 매매 장부와 주판의 그림을 그리고 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손목을 올리면 주판알이 저쪽으로 가고 손목을 내리면 이쪽으로 온다. 부디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겨라.”
주판을 잡은 손목을 위로 올리면 주판알이 아래쪽으로쏠리고, 손목을 밑으로 내리면 주판알이 위쪽으로쏠리는 법이다. 이는 바로 나쁜 물건에 비싼 값을 매기면 단골손님들도 저쪽으로 가버리나 좋은 물건에 싼값을 매기면 반대로 손님은 이쪽으로 오게 되어 가게는 번창할 수밖에 없다는 비유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센가이는 아들에게 또 이렇게 당부하였다.
“병풍과 장사는 구부리지 않으면 세울 수 없다. 부디 이 사실을 잊지 말라. 같은 상품이라도 품질을 개선해서 저렴하게 판매한다면 사업이 번창할 수 있단다.”
이렇듯 사람을 속여서 돈을 벌면 언젠간 반드시 신용을 잃고 마는 법임을 이렇게 강조하였다.
“자기 잇속만 채우려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르나결코 영원히 성공을 거머쥘 수 없다. 그래서 장사꾼에게 신용만큼 중요한 재산은 없다. 돈을 번다는 저(儲)라는 글자는믿을 신(信)과 사람 자(者)의 합성어로 「믿을 수 있는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국사로서의 도리
중국 진나라의 예양은 자기가 섬기던 주군인 지백이 조나라 양자에게 멸망해 죽게 되자 깊은 산 속으로 달아나 반드시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뒤 이름을 바꾸고 초라한 일꾼으로 변장한 예양은 가슴속에 비수를 숨기고 양자의 집으로 들어갔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긴 양자의 신하들에게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양자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멸망한 옛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는 예양을 의롭게 여겨 풀어주었다.
얼마 후, 예양은 또다시 몸에 숯 칠을 하고 지저분하게 꾸민 뒤,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거지 노릇을 하다가 양자가 지나가는 다리 밑에 숨어서 이제나저제나 기회를 엿보았으나 역시 빈틈없는 양자의 부하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화가 난 양자는 예양에게 꾸짖었다.
“그대는 먼저 범씨와 중행씨를 섬기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들이 망했을 때는 원수를 갚지 않았다가 어찌 지백을 위해서만 유독 이렇게 원수를 갚으려 하는가?”
그러자 예양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본인이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지만, 그들은 모두 나를 보통 사람으로 대했기에 나 또한 보통 사람으로 보답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백은 나를 국사(國師)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배고픔이 최고의 입맛
옛날 한 국왕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면서 전국의 요리사를 다 모았다. 요리사들이 어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도 호의호식한 국왕의 입맛을 맞출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맛이람. 요리를 더 잘하는 사람을 찾아봐라!”
신하들이 곤혹감에 빠졌을 때 멀리서 한 남자가 찾아왔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요리사이옵니다.”
“내가 만족할 만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하지만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하옵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그래, 네 부탁을 들어줄 테니 맛있는 음식이나 만들어 보거라.”
“그러면 앞으로 사흘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마십시오.”
“앞으로 사흘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말라고? 좋다, 그 대신 음식이맛있지 않으면 너의 목이 날아갈 줄 알 거라!”
국왕은 오기를 부리며 남자의 제안을 허락했다.
그때부터 남자는 음식을 만들기는커녕 국왕의 곁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음식은 언제 만들 거냐?”
“네, 조금만 있으면 만들어 드리겠사옵니다.”
사흘째에 접어들자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국왕에게 남자는 백성들이 흔히 먹는 야채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가 완성되었습니다. 많이 드시옵소서.”
국왕은 게걸스럽게 야채 요리를 모두 비우면서 말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생전 처음이다. 대체 어떤 재료로 어떻게 요리한 거냐?”
기초의 중요함
한 청년이 이탈리아의 유명한 음악가를 찾아가 음악 공부를 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음악가는 음악 공부가 너무 힘들다면서 단호하게 거절하였으나 청년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면서 간곡히 부탁하였다.
음악가는 청년이 절대로 불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청년은 음악가의 집에 기거하였고, 집안일도 같이 하며 틈틈이 음악 수업을 받았다.
처음의 일 년은 음계를 배웠다. 다음 해에도 역시 음계를 배웠다. 삼 년째 되는 해에도 역시 음계를 배우는 것으로 끝났다. 사 년째에도 음계를 배우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청년은 더는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제는 음계 말고 다른 악보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악가는 청년이 다시는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호되게 야단쳤다. 그리고 오 년째에 접어들자 반음계와 저음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눈 깜짝할 새에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오 년째의 연말을 맞이했다.
“이제 너는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더는 가르칠 게 없구나. 너는누구 앞에서 노래해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거다.”
그 청년이 바로 이탈리아 최고의 가수가 된 카파렐리로이다. 그도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서 기초만큼 중요한 게 없다.”
남을 믿는다는 것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병으로 위독했다. 그러나 어떤 의원도 감히 왕의 병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괜히 나섰다가 병을 고치지 못하면 해를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 의원이 왕의 병을 고치겠다고 나섰다. 그 의원은 왕에게 바칠 약을 만드는 사이 왕은 의원을 시기하는 무리로부터 그를 모함하는 편지를 받았다.
마침내 의원이 약을 다 만들어 왕에게 바치자 왕은 자신이 받았던 모함의 편지를 내밀었다. 왕에게 받은 편지를 읽는 동안 왕은 아무 의심 없이 의원이 만든 약을 모두 마셨다.
편지를 다 읽고 겁에 질려 있는 의원에게 왕은 말했다.
“나는 그대를 믿소.”
얼마 뒤 왕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
자기 목숨을 걸고 남을 믿었던 왕은 바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BC 356~BC 323) 대왕이었다. 대왕은 13세 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정교사로 초빙해 철학과 왕도 등을 배우며 왕자로서의 학문과 지혜를 닦았다.
그 후, 그리스를 평정한 후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아시아로는 인도의 인더스강까지 동진하여 도처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또 그는 이들 국가를 서로 연결 짓는 도로망, 운하 등을 확충함으로써 동서의 단일 문화권 형성을 앞당기는데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다.
아버지와 아들
어느 날, 어린 아들이 오래 묵은 사과나무에 올라갔다. 아버지는 나무 아래에서 아들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오래된 나무는 아들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져 부러지려고 하였다.
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키라고소리쳤고,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나무 곁에서 멀리 피했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이 곤경에 빠진 것을 보고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애야, 어서 뛰어내려라. 아빠가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뛰어내려라.”
아들은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자신 있게 외쳤다.
“아빠, 아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그렇죠? 아빠! 저는 아빠를믿어요.”
그리고 난 후, 아들은 안전하게 아버지의 두 팔로 뛰어내렸다.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며 마음에 깨닫는 것이 있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이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저는하나님만을 믿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 주었듯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양심 대 양심
굴지의 필립스 회사에 감광지(減光紙)를 납품하던 중소기업이 있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5만 매를 납품하다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25만 매로 늘었다. 당초의 단가는 2달러 2센트였지만 수량이 늘다 보니 많은 이익이 생겼다.
재단(裁斷)을 개선하고 포장을 합리화하자 처음에 15%로 산정한 이익이 60%나 커졌다. 납품업체 사장은 친분이 필립스사의 두터운 담당 이사를 찾아갔다.
“미안합니다. 단가를 내려 주세요.”
그러나 담당 이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지금 값으로 납품해도 됩니다.”
30%는 자기 회사의 이익으로 나머지 30%는 담당 이사의 이름으로 저축해서 수만 달러가 되었을 때 납품 회사의 사장이 통장을 내보이자 담당 이사는 버럭 화를 내었다.
“여태까지 나는 당신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치사한 짓을 할 줄은 몰랐군요.”
“그때 처음 단가 그대로 납품해도 좋다고 한 뜻은…….”
“이 보십시오. 내가 필립스사에 입사한 지 28년. 그동안 숱한 물건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온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단가를 내려 달라고 말한 사람은 당신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더욱 좋은 제품을 내놓을 그것이 고, 능력 있는 우리가 지원해 줄 필요가 있다고 자랑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납품 회사의 사장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나친 욕심
사막 한복판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 밑에는 샘물이 솟는 오아시스가 있었다. 불볕이 타는 사막에서 샘물은 마치 생명의 물 같았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나무 아래에 쉬면서 목을 축이곤 했다. 그런데 그 샘물은 주인이 있었다. 주인은 돈을 받고 샘물을 팔았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샘터를 돌아보던 주인은 커다란 나무가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슬인지 모른 주인은 이런 생각 했다.
‘만약 저 나무를 베어 버린다면 나무가 머금고 있는 물도 샘에 고일것이고, 그러면 장사도 그만큼 더 잘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주인은 곧장 나무를 베어버렸다. 그런데 이거 어찌 된 일인지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샘물은 며칠 지나지 않아 말라버리는 것이 아닌가!
햇볕을 가려 주고 비바람과 모래를 막아 주던 나무가 없어진 샘에서 물이 솟을 까닭이 없는 것이었다. 주인의 어리석은 돈 욕심으로 모두를 다 잃고 만 것이었다.
주인은 허탈해하면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결국, 지나친 욕심이 내 눈 앞을 가려 더 멀리, 더 높이 보지 못하고다된 일도 그르치고 마는 화를 자초하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