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등 교육, 교회의 사명인가?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을 위하여-
유해무
2002년 7월 23일부터 25일까지 미국 기독개혁교회(The Christian Reformed Church)가 직영하는 칼빈대학의 교수들이 연사로 나선 기독교수 개발 세미나가 서울 장신대학교에서 열렸다.1) 고신대학교도 공동 주최의 책임을 맡았는데, 기독교대학인 고신대학교에 속한 교수들에게는 많은 유익을 주는 세미나였다. 이 뿐 아니라 교인과 학부모의 입장에서도 아주 유익한 세미나였다. 과연 고신대학교는 신뢰하고 우리 자녀를 보낼 수 있는 기독교대학인가? 또 이 세미나는 교회의 교육적인 책임의 관점에서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의 관계를 반성하고 바람직하게 정립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위에서는 교회가 직영하는 고신대학교에 관선이사가 파송될 수 있다는 우려가 거론되고 있다.2) 그럴 경우 직무상 교회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이들이 신학교육을 포함한 교육 전반을 실질적으로 감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대학으로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극단적인 위기를 뜻한다.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교회의 교육적 책임을 논하면서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교회가 직영하는 고신대학교와 미국 칼빈대학을 비교하면서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 및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고신대학교가 안고 있는 현안들을 풀기 위한 제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먼저 우리는 고신대학교/신학대학원의 약사와 칼빈대학의 약사를 각각 살펴 비교하고 양 기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교훈과 교회사 특히 개혁교회의 역사로부터 교회의 교육적 사명에 대한 가르침을 얻으려고 한다. 과연 교회가 기독교고등교육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지니며, 이것이 신학교육과는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올바른가 논의의 중심에 설 것이다. 나아가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이 안고 있는 현안들을 제시한 뒤에, 신학대학원의 장래를 위한 제안을 하려고 한다.
1. 고신대학교/신학대학원의 약사(略史): 교회와의 관계를 중심으로3)
고신대학교는 고려신학교(1946-70), 고려신학대학(1971-1980), 고신대학(1981-1992), 그리고 1993년 3월부터 종합대학교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신대학교는 목사 교육을 위하여 설립된 고려신학교에서 나왔다. 따라서 두 기관의 역사를 살피기 위해서는 고려신학교의 설립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고려신학교는 처음부터 교회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역사적 상황 때문에 설립자가 사설 신학교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투옥되었던 이들은 1945년 9월 20일에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다섯 가지 기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다섯 번째가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의 복구였다. 이에 근거하여 교장 서리로 일하게 될 박윤선 목사의 제의로 출옥 성도인 한상동, 주남선 목사를 설립자로 하고서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가 부산에서 개교하였다.4) 1947년 10월 14일에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1948년 5월에 사임하였다. 박박사의 사임에는 신사참배를 한 직분자에 대한 권징에 관한 그의 미온적 태도도 작용하였지만, 고려신학교를 서울로 옮기고 총회 직영으로 삼자는 그의 의견을 설립자 한상동 목사가 받아들이지 않음도 크게 작용하였다. 한목사는 교회 정치와 교권에 의해 좌우되기 쉽다는 이유로 신학교를 사립으로 운영하기를 원했다.5) 한목사는 심지어 박형룡박사로부터도 “새 교단을 형성하려고 한다”는 오해까지 받아가면서 신학교가 총회의 직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6) 1948년 6월에 박윤선 목사가 2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1946년 7월에 모인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인허하였다가 1948년 9월에 이를 취소하였다. 1949년 4월 총회는 전권위원을 선정하였고, 이들은 경남노회에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갖지 말 것과 고려신학교 관계자들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말 것을 결정하였다. 1952년 4월 제37회 총회는 “고려신학과 그 관계 단체와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결의하였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들은 독립 신학교를 원했는데도 당시의 총회는 이 학교의 존재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1956년 9월, 신학교가 교회의 직영이 아님에 대해서 반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목사는 1957년 2월에 교회당 소송건에 대해서 반대를 제기하면서 고려신학교를 떠났다가 소송 거부를 교육 이념으로 삼는다는 동의를 받고서 그해 9월에 복귀하였다. 그런데 교회당 소송건으로 그의 비판을 받고있던 송상석 목사는 국면을 전환하려고 경남노회를 통하여 제8회 고신 총회(1958년)에 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건의하였다. 이후 3년간 이 논의는 계속되었으나, 실질적인 직영 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961년 12월에 승동측과의 합동으로 인하여 고려신학교는 형식적으로는 총회 직영신학교가 된다. 그러나 복교 선언(1962년 10월)을 시발점으로 삼은 환원 과정 자체가 암시하듯이 고려신학교는 여전히 한상동 목사를 설립자로 하고 있는 사립 신학교였다.
1964년 9월의 제14회 총회에 경기노회는 “고려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하고 신학교 운영비를 각 노회로 할당하게 해달라”는 건의를 제출하였다. 또 사설 고려학원 이사장도 “고려신학교와 고신대학 및 고려고등성경학교와 복음병원을 본 총회가 맡아 달라”고 청원하였다. 이런 건의와 청원을 받아서 위 총회는 위의 기관들을 총회가 직영하는 기관으로 만들었다. 총회 직영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먼저, 총회가 이 기관들의 운영에 직접 재정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 액수나 비율에 있어서 모든 예산을 다 감당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둘째, 교회가 파송한 이사들을 통하여 이 기관들을 감독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써 신학교는 교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책임 있는 목회자들을 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처음으로 ‘고신대학과 복음병원’에 대해서 듣게 된다. 먼저 고신대학에 대해서 살펴보자. 고려신학교는 설립 시부터 1955년 9월까지 9년동안 2년 과정의 예과를 운영하였다. 이 예과가 그 해 10월에 2년제에서 4년제로 개편되어 교명을 칼빈학원(칼빈대학)이라 정하고 신학교로부터 독립하였다. 이 학원은 인문교육을 강화하여 신학교육을 효율화할 뿐 아니라 성도가 가진 문화적 사명을 고등교육과 학문을 통하여 계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학원의 운영을 맡았던 한명동 목사는 기독교 종합대학교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부산 감천의 부지 문제와 경영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1963년 12월에 양 교수회의 연석회의는 이 학원을 다시 고려신학교의 예과로 통합, 흡수하기로 하였다. 다음 해 1월 교수회는 ‘고신대학’이라는 명칭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결의하였다. 1965년부터 대학부 학생들은 송도로 완전히 옮겼다.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를 모방한 이 학원은 흡수되었지만 현재의 고신대학교를 지향한 첫 시도라 할 수 있다.7)
복음병원은 장기려 박사가 전영창 선생과 한상동 목사의 요청을 받아서 전쟁 중에 구호와 복음 증거를 목적으로 1951년 7월 1일에 개원하였다. 초기 3년간은 무료 진료를 시행하였다. 1956년 4월 당시의 총노회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복음병원을 돕기 위하여 이사 9명을 파송함으로써 법적으로 교회의 기관이 되었다. 1961년 8월에는 비영리 의료기관으로서 복음병원의 개설 허가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목사 양성을 위하여 출발하였던 고려신학교였으나 이를 운영하던 이사회는 신학교 이외에 고신대학과 복음병원에 대한 운영과 감독을 총회에 요청하였다. 이것은 현재 우리 고신교회가 겪고 있는 복잡한 현상의 첫 출발점이라고 하겠다. 1965년에 총회적으로 구성된 새 이사회는 총회 유지재단을 구성하였고, 이사장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제16회 총회(1966년)에 고신대학이 대학 인가를 받을 수 있도록 유지재단을 교육재단으로 명의 변경하여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총회는 이사를 대폭 교체하고 새 이사회는 이사장에 송상석 목사를 선출하였다. 새 이사장이 대학 인가를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지 않자 대학 당국은 이사장과 이사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가(假)이사회를 조직하여 재단의 설립 인가를 받고 인가 즉시 본 이사회에 넘긴다는 각서를 쓰고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가(假)이사회’ 사건이다. 67년 5월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설립 인가가 언론에 알려졌을 때에야 송 이사장이 이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송목사는 교수들을 사설학교 설립을 시도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 문제는 이사장과 이사 한상동 목사가 동반 사퇴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대학 교무회의는 대학 인가 추진을 위하여 백지 위임하여 줄 것을 이사회에 청원하기로 한다는 결의를 여러 차례 하였다. 그러나 이를 이사장이 알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다. 게다가 백지 위임이라는 것 자체가 공적인 문서를 위조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직 대학 인가라는 이 목적을 위하여 학교 당국은 총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1968년 9월 제18회 총회는 이사를 새로 선임하였고, 새 이사장에는 송목사가 다시 선임되었다.
학교 법인 고려학원의 인가 후 1968년 2월에 대학에 준하는 각종 인가를 받았고, 1969년 9월에는 대학 동등 학력 인정 지정학교가 되었다. 드디어 1970년 12월 22일에 고려신학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복음병원은 고려학원의 수익기관으로 편입되었고, 신학교와 고신대학교의 역사에 큰 변화가 오게 된다. 그때까지는 대학 과정이 예과로서 신학교육에 종속되어 있었고, 독립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흡수되었지만 신학교로부터 독립하려고 계속 노력하였었다. 그때까지 이사회는 대학을 운영하는 이사회가 아니라 신학교를 운영하는 이사회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사회는 수익기관인 복음병원을 포함한 대학을 운영하는 이사회가 되었다. 그때까지 고려신학교가 주체였고, 다양한 형태의 대학과정은 부속 기관이었으나, 그때부터는 부속 기관이었던 대학이 주체가 되고 주체였던 고려신학교는 ‘신학 본과’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무인가 부속 기관이 되어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다.8) 이렇게 주객이 바뀌면서 1946년에 개교하였던 고려신학교는 이후 역사가 보여주듯이 고신교회의 중심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문교부 인가는 그것을 요청하는 과정과 획득한 뒤에 교육법이냐 교회법이냐의 시비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송목사는 1968년에 이사로 선임되었고 1972년 9월에 임기가 만료되는데, 그의 이사장직에 대해서는 문교부가 1971년 9월부터 1975년 9월까지 임기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송목사는 1972년 총회시에 퇴임을 거부하였다. 그는 다른 한 사람의 이사와 참석도 하지 않은 다른 두 사람이 이사로서 회의에 참석한 것처럼 회록을 꾸며서 자신의 이사 승인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학교법인 역사에서 두 번 째 문서 위조 사건인 셈이다. 가이사회 사건의 피해자가 이제는 가해자로 등장하였다. 이사회는 송목사를 사문서 위조로 검찰에 고발하고, 이사장 직권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하였다. 결국 송목사는 법정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고, 이사장 직무정지를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신학대학 교수회는 1973년 6월 13일에 발표한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 문제”라는 논문에서 로마서 13장과 고린도전서 6장의 주석에 기초하여 사법권이 없는 교회가 형제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취급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논지를 밝히면서, 이사회의 세속법정 소송을 신학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런데도 제23회 총회(1973년)는 “성도간의 법정 제소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신앙적이 아니며, 건덕상 방해됨으로 (제소)하지 아니 하는 것이 본 교단 총회 입장”임을 밝혔다. 그렇지만 제24총회(1974년)는 소송문제에 관한 제23총회의 결의는 우리 교리표준(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에 위배된 결의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수정, 가결하였다: “사회 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부덕스러울 수 있으므로 소송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 이 결정은 직전 총회의 결정을 파기하였고, 실제로는 성도간의 세속 법정 소송을 허용하고 말았다. 성도간의 세속 법정에서의 송사 문제에 있어서 신학교수회가 송사를 독려하는 글을 썼고, 총회가 이전의 옳은 결정을 번복함으로써 고신교회와 신학교 역사에서 큰 오점을 남겼다고 하겠다.
제27총회(1977년)가 구성한 위원회는, 고려신학대학과 신학교의 분리를 원칙적으로 확인하였다. 다음 해인 1978년 4월 이사회는 신학본과와 대학을 분립하고 대학은 일반대학으로 변경하되 교명은 고신대학으로 하기로 가결하고 총회에 건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모인 제28회 총회(1978년)는 이 건의를 부결시켰다. 이런 건의의 배경에는 이미 의과대학의 설립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9회 총회(1979년) 시에 이사회는 의과대학의 설립을 건의하였다. 총회는 고려신학대학을 개편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의과대학의 설립을 연구하기로 가결하였다. 이것은 독립된 의과대학의 설립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제30회(1980년) 총회 시에, “교명 변경에 대한 것은 책임자가 사과하고 목회 신학대학원 인가를 추진키로 하고 위원 선정은 이사회에 맡기고 학장이 즉석에서 사과하니 박수로 받다”라는 회록 기록이 있다. 총회는 이전의 결정을 무시하였고 재론이나 합의 없이 고려신학대학이 일반대학인 고신대학으로 바뀌었다. 이제 고신대학은 의과대학과 부속 대학병원을 갖춘 일반대학이 되었다. 이리하여 신학 분야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다른 전공 분야를 갖춘 종합대학교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9) 신학교는 주객이 바뀐 10여 년의 세월을 보낸 뒤, 이제는 그 양적 규모에 있어서도 소수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신학본과는 1980년 11월에 ‘신학대학원’의 법적 지위를 받고서 이전의 무인가 과정에서 벗어났지만, 행정적으로 고신대학(교)에 소속되어서 감독을 받는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고, 신학대학원교수회는 신학대학원위원회로 격하되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고신대학교는 이렇게 하여 출발하였다. 신학교를 운영하던 이사회와 이들을 임명한 총회의 관심은 점차로 의과대학과 대학부속병원을 가지고 있는 대학교로 쏠리면서, 모체였던 신학교는 점차 관심 밖으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신생 대학으로서 고신대학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82년 3월에 고신대학 학생들이 주도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하였고, 강의 공간과 학교 부지 및 의과 대학의 실습실의 부족의 문제로 내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의 연장선상에서 1988년에는 의과대학생들이 주도하는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혼란으로 인하여 교회가 대학에 갖는 관심은 식기 시작하였고 신학교도 불필요한 오해를 받게 되었다. 특히 재정적인 지원은 격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대학원과 대학의 분리에 대한 논의는 당시 고신대학 교무회의, 교수회의, 이사회와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결의되었다. 교수회는 1982년 1월에, 신학대학원교수회의와 대학교수회의로 분리하여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1년이기는 하지만 신학대학원위원회가 이제는 다시 신학대학원교수회로 회복되었고, 1982년부터 졸업식도 따로 거행하였다. 제32회(1982년) 총회록에는 “신학대학과 의과대학을 분리 운영하기로 가결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특히 1988년을 전후한 학교내 폭력 사태는, 신학대학원의 독립이라는 이전의 결정을 다시 음미하게 만들었다. 1988년에 신학대학원교수회는 재정, 학사, 행정, 인사 면에서 대학과의 분리를 결의하였고, 고신대학 교무회의는 그 해 8월에 “신학대학원은 목회자 양성의 독립 학교로 문교부에 신청하기로 하고 교명은 고려신학대학원(가칭)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을 이사회가 받아서 총회에 청원하였고, 제38회 총회(1988년)는 “신학대학원과 고신대학의 분리 운영을 허락하기로 결정”하였다. 제39회 총회(1989년) 는 신대원을 위한 교회 경상비 1%의 지원을 의무 부담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총회 교단발전 연구위원회는 제42총회(1992년)에 “이사회의 양분”을 제안하였고, 다음 해 총회에다 단설 신학대학원 설립과 별도의 이사회 구성을 제안하였다. 이를 받아서 1993년 총회는 이사 분할을 이사회에 맡겨서 연구토록 가결하였으나, 제44회 총회(1994년)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가 없다. 신학대학원은 1998년 8월에 천안으로 이전하였다. 2001년 12월에는 고신대학교가 교육인적자원부의 감사를 받는 불명예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복음병원을 중심으로 한 경영의 문제와 노사 분규와 (불법) 파업이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다. 이때부터 관선이사 파송이라는 걱정스러운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제52 총회는 단설대학원(대학원대학교)의 설립 추진을 또 다시 결정하였다(2002년 9월 27일).
2. 약사에서 얻는 몇 가지 결론들과 의문점들
1) 총회 직영에 대한 뚜렷한 이해가 확립되지 못했다.
고려신학교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설립 후 18년이 지나서야 총회 직영 신학교가 되었다. 설립자 한상동 목사는 신학교를 교권으로부터 보호하기를 원하였다. 물론 사립이어야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한 목사의 순진한 생각을 노정한다 하더라도 그는 새 교단을 형성하려고 한다는 오해까지 받으면서 신학교의 교회 직영을 원치 않았다. 그는 신학교가 고신교회와 협력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이것은 신학교가 아니라 고신대학교가 1970년 이후부터 총회 직영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조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총회 직영은 총회가 이사회를 통하여 대학교의 재정 및 운영과 감독을 책임을 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 고신교회와 교육 기관의 역사에는 토론과 설득의 역사가 결여되어 있다.
신학교가 총회 직영으로 인정되고 고신대학(교)과 복음병원을 총회가 선임한 이사회가 운영하고 감독하는 현 체제에 이르기까지 고신교회 전체의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약사에서 나오는 대로, 치리회인 총회와 치리회가 임명한 이사회가 내적으로 결의하고 인가를 취득하였지, 이를 위하여 공청회를 거치거나 연구보고서를 제출한 적은 없다.
신학교수회도 이런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실제로 이사회를 설득하면서 신학교와 대학의 관계가 주객이 바뀌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 이들은 결과적으로 신학교수들이다. 신학교수회가 성도간의 세속 법정에서의 송사를 조장하는 글을 논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것 이외에, 교회와 신학교육, 교회와 기독교 고등교육의 상호 관계와 책임에 대해서 발표한 글은 전무하다. 게다가 가이사회 사건이나 1980년도 교명 변경건에서 나타나듯이, 일을 벌여 놓고 추인 받는 좋지 못한 전례를 남겼다. 물론 신학교수들이 성도가 가진 문화적 사명에 대한 책과 논문들을 썼지만 이 점이 교인들에게 깊이 보급이 되거나 총회가 바로 이런 입장에서 대학과 병원의 문제를 접근하고 논의하였다는 흔적을 찾기 힘든다.
3) 신학교수회는 고신대학교의 현재적인 파국의 씨앗을 뿌린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교회의 교사로서 신학교수는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에 가르치고 교회에 길을 제시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다. 그런데 신학교수들은 전면적이지 않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스스로 학교 경영자의 책무도 졌다. 과연 어느 책무가 더 중요한가? ‘기독교 대학’의 정체성을 제시하고 교육 내용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며 이를 초기 단계에서 실제로 적용하는 책임은 신학교수들에게 있었다. 초기 칼빈학원은 인문교육에 기초를 둔 목회자 양성과 신자 자녀의 교육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인문교육, 특히 의과대학의 설립에 대해서는 이런 목표가 분명하지 않았다. 교회의 교사요 학자들인 신학자들이 앞장서서 총회의 결정도 없이 의과대학의 인가를 신청하고 취득한 것은 바람직한 처신이 아니다. 또 신학교수회는 의과대학을 발판으로 종합대학교로 확장되어 나갈 때, 대학의 정체성 확보의 가장 중요한 요인인 교수 요원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신학자들이 교회의 교사라는 책무보다는 경영자의 모습을 하고서 교회를 대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4) 기독교대학의 원리와 정체성에 대한 기본적인 범교회적 합의가 없었다.
고등교육은 건실한 초등/중등 교육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기독교대학으로서의 고신대학교의 정체성을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교회를 고등 교육의 주체라 할 수 있는가? 교회가 기독교 고등교육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해서 고려신학교의 설립 이후 지금까지 논의되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지만, 지금이라도 이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찾는 것이 이 논문의 주요한 목적이다.
3. 미국 칼빈대학의 예
미국 기독개혁교회(CRC)가 운영하고 있는 칼빈대학은 고신대학교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학교’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 교회는 19세기 화란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개혁파 교인들이 세운 교회이다.10) 4개의 지역 교회들이 1857년에 기독개혁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이들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은 질적으로 수준이 높아야 함을 인식하고서 1876년에 ‘신학교’를 설립한다. 이 신학교는 서양 고전어와 현대어를 공부시키는 예과 과정을 두었다. 1896년에 신학교에 문과를 신설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와서 이 과정에 목사 후보생이 아니지만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기로 하였다. 가장 실제적인 이유가 기독교 초등/중등학교의 교사를 양성이었다. 실제로는 1902년에야 비신학 전공 학생이 입학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민온 자들 가운데는 카이퍼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독립된 대학을 원하였다. 이들은 아주 신중하게 대학 설립을 준비하였다. 1907년에 2년제 칼빈전문대학이 설립되었고, 1910년에는 2년제가 3년제로 발전하였다. 1920년 가을에는 완전히 인가를 받은 4년제 과정이 시작되었다. 1928년 교회 지도부는 세 가지 세상적인 오락을 금했는데, 곧 춤과 카드놀이와 극장 관람이었다.11)
이처럼 교회가 신학교를 운영하는 가운데 예과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하여 4년제 대학이 된 칼빈대학은 자연스레 교회의 학교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칼빈대학을 소유하고 운영한다는 점에 대해서 1896년부터 1926년까지 매 총회시마다 열 여섯 번의 논의가 계속되었다.12) 1894년 총회는 예과와 신학교의 분리 요청을 처음으로 거부하였다. 1896년과 1898년 총회는 독립적인 대학의 설립과 협회(society)의 구성이 바람직하다고 결의하였고, 1900년 총회는 예과를 4년제로 발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분리의 찬반을 떠나서 개혁파 신조 위에 기초한 학문 연구와 교육 기관인 대학의 설립 자체에 대해서는 전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기독개혁교회 안에서는 신학교와 대학의 분리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13) 1912년 총회는 예과를 형성하는 문과 교육은 원리상 협회가 운영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대학의 개혁파적 성격, 학문적 수월성(excellence)과 재정적 안정을 보장하는 협회가 구성되면 교회가 대학을 넘겨주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음 총회는 협회 구성이 여전히 시기상조라는 결정을 하였다.14) 1924년 총회는 교회와 칼빈대학 간의 기존의 관계를 재확인하였다.15) 그리고 1926년 총회는 기존 관계를 확인하는 결정을 마지막으로 하였다.16)
미국 기독개혁교회는 기독교고등교육에 대하여 원리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을 다 아우르는 토론을 30년간 진행하여 결론을 도출하였다. 먼저 이들은 일반 학문 연구를 위한 학교는 고등교육까지 포함하여 교회가 아니라 부모들이 구성한 협회가 주도해야 한다는 원리를 확인하였다. 칼빈신학교가 예과 과정을 포함한 초기 상황에서 보자면, 교회가 지니고 있는 ‘교수권’로부터 교회가 자동적으로 일반 학문을 증진시키며 학교를 설립할 임무를 지닌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현실적인 측면이 고려된다. 교회가 교회의 유익에 필수적이라고 여길 때에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지원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현실적인 고려에서 교회가 학교를 직접 운영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현실적인 이유들로, 대학을 재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협회의 조직이 어려울 때나 고등교육을 원하는 이들의 신앙을 보호하며 교회의 면밀한 감독을 요하는 자유주의의 발흥 등을 꼽았다.17) 기독개혁교회는 이 토론과 결론을 존중하면서 4년제 인문대학을 교회의 교육적 사역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지역교회의 부담금으로 칼빈대학의 재정의 대부분을 해결하고 있다.
칼빈대학이 기독개혁교회의 학교가 되고 재정을 감당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그 교회는 기독교 고등교육을 위하여 많은 토의의 절차를 거쳤다. 특히 교회의 직영과 협회의 운영을 선택하기 위하여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토론하였다.18) 이 교회는 이런 과정에서 많은 토론과 연구를 하면서 분명한 원리를 확보하였다. 즉 기독교 고등교육의 책임은 교회에 주어져 있지 않다는 원리를 명백하게 천명하였다. 다만 이미 위에서 거론된 현실적인 고려에서 이 원리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교회가 직영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총회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개혁교회 안에 있는 여론 형성 언론 매체를 통하여 다양한 논의들이 오고 갔다.19) 이런 식의 여론 형성을 통하여 부모인 교인들의 의견이 수십년간 개진되었다. 즉 총회의 공식적인 보고서나 결정이 교육의 주체인 부모들의 의견과 상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역교회의 부담금만으로는 칼빈대학의 운영이 어렵기 때문에 교회당에 별도의 헌금함을 두거나 가가호호 방문하여 모금도 하고, 취학 자녀가 없는 성도들의 협회 참여도 권유하였다. 총회가 칼빈대학에 대해서 이런 결정을 하였다는 것은 이와 같은 다양한 행사를 공인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즉 대학의 운영과 이에 따르는 재정 확보 방법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미국 기독개혁교회의 교육적 책임에 관해서는 고등교육과 신학교의 직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먼저 기독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20) 운영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기독교학교 협회이다. 이민 초기 시절에는 교회가 학교를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다. 총회는 1870년 이후부터 각 교회가 기독교학교를 운영하도록 권고하였다. 1892년 총회는 기독교학교를 교회가 아니라 협회가 운영한다는 것을 가결하였고, 곧장 협회가 조직되었다. 협회 조직의 기본 원리는, 자녀들에 대한 교육적 책임은 국가나 교회가 아니라 부모라는 사실이었다. 국가나 교회는 부모의 책임 수행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기독교 학교는 교회 소유가 아니라 교회와 유관할 뿐이며, 결코 교회학교나 교구학교가 아니다. 물론 교회의 재정적인 도움 받을 수는 있지만 교육의 주체는 부모이다. 그러므로 이 교육을 위한 재정적 부담도 부모가 큰 몫을 져야 한다. 대체로 이들이 그 당시 부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자녀 교육을 위하여 기독교 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보통 큰 희생이 아니었다.
그러면 기독개혁교회가 부모를 교육의 주체로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례의 기초가 되는 언약이다.21) 자녀들은 천국과 언약의 후사로서 세례를 받으며, 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것들을 가르칠 교육의 책임을 진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을 세례 받게 하기 전에 다음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해야 한다: “자녀들이 분별력을 갖게 될 때 언약의 교리를 가르치며 힘이 닿는 대로 교육받도록 하겠는가?”22) 부모가 직접 가르치든 가르침을 받게 하든 교육의 주체는 부모이다. 이 때문에 부모는 집에서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개혁교인들은 가정의 식탁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친다. 그리고 자녀들이 교회의 교리문답 교육에 참석하게 하여 성경의 대요을 교육받게 한다. 이를 소흘히 하면 경고를 받고 그래도 소흘하면 결국은 출교를 당하게 된다. 이 교리문답 교육은 설교에서 계속된다. 설교는 성경 본문에 대한 폭 넓고 깊은 강해와 적용으로 이루어진다. 개혁파 전통에서 목사는 설교자이면서도 교사이다. 이런 교회의 교육적 작업은 심방을 통하여 그 결과를 확인한다. 목사와 장로는 팀을 이루어서 매 가정을 심방하면서 이 교리와 생활에서 교육의 결과를 질문하고 파악한다.
기독교 교육과 고등교육을 말하기에 앞서 미국 기독개혁교회는 부모를 교육의 주체로 보며, 가정과 교회가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는 책임을 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가정과 교회의 지속적인 교육적 활동 위에 학교 교육과 기독교 고등 교육이 계속 이어진다.23) 이 연장선상에서 1926년 총회는 기독교 초등/중등 교육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도 교회가 아니라 사적인 협회, 곧 교육의 주체인 부모로 구성된 이사회가 교육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원리를 확인하였다. 비록 현실적인 이유에서 기독개혁교회가 칼빈대학을 직영하지만, 이 원리 자체는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현재 기독개혁교회는 두 이사회를 임명하여서 각각 대학과 신학교를 감독하게 하고 있다.24)
이런 역사 과정을 통하여 칼빈대학은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위한 인문대학을 목표로 삼고 있다.25) 이 목표는 기독교대학이 ‘미션 스쿨’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대변한다. 채플과 기도회가 있다 하여서 기독교대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칼빈대학에도 채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 목적이 아니라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한 말씀 묵상의 성격을 지닌다. 기독교대학의 정체성은 언약에 기초한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칼빈대학은 교수 임용에 있어서 아주 철저하다. 이 대학은 스스로를 ‘신앙고백적 공동체’로 규정한다.26) 교수들이 기독개혁교회의 교인일 뿐 아니라 교수로 임용되기 위하여 이 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신조들을 지키기로 서약한다. 어떤 교수가 비록 학문적 수월성이 있어도 성경과 신조에 위배되는 바가 있다면 학문적 성과와는 관계없이 그에게 사임을 요구할 수 있다. 신임 교수는 신앙과 전공 분야의 통합을 위하여 15개의 세미나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 청강이 아니라 해당 교수는 자신의 신앙 고백의 관점에서 자기 전공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업적을 발표할 것이냐를 아주 집중적으로 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선임 교수가 멘톨(mentor)의 역할을 담당한다. 신앙과 학문을 각각 살필 뿐 아니라 통합의 관점에서도 부족함이 있다면 승진에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종신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을 두 번 더 거쳐야 한다. 이런 체제에서 교수의 확보 없이 학과를 증설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다른 대학보다 보수가 떨어지고 업무량은 더 많지만, 칼빈대학 교수들의 연구 업적은 미국 안에서도 인정받고 있으며, 졸업생들의 진출도 뛰어나다.
이들은 신앙과 학문을 통합하는 교수가 기독교대학의 정체성을 담당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시간 강사를 채용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대학원 학생이 주로 시간 강사로서 강의하는데, 칼빈대학은 의도적으로 대학원을 두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유능한 교수들이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있어도, 기독개혁교회는 대학원 문제를 계속 논의를 하고 있지만 설치하지는 않고 있다. 대학원의 존재가 때로는 강의의 질을 위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재정적인 부담도 가중시킨다. 재정적 부담은 따지고 보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대학원 교육과 교수들의 연구를 통하여 기금을 충분하게 확보할 가능성은 상존하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교육 목적을 제시하고 무리한 경영을 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자세에는 개혁파 특유의 정신이 잘 배어 나온다. 이 대학은 학생들에게 잘 통합된 인문 교육을 시켜서 석사와 박사 과정은 다른 세속 대학교에서 받도록 유도한다. 졸업생들의 신앙에 기초한 학문적 경쟁력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학문 연구와 세상 이해에 있어서 폐쇄성을 극복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과 교수들은 자녀들에게 칼빈대학을 진심으로 추천한다. 즉 자신들이 자녀들의 세례 시에 서약하였고, 재정적인 부담을 감내하며, 스스로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통하여 생을 헌신하는 학교에 기꺼이 자녀들을 보내어 학문의 방식으로 자녀들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언약 사상에 기초한 신실성이 삶을 통하여 표현되기 때문이다. 다른 명문 대학에 갈 수 있는 학생들이라도 이런 권유를 받고 부모들이 다닌 칼빈대학을 선택한다. 이 때문에 칼빈대학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있다.
4. 칼빈대학의 역사와 고신대학교의 역사의 비교에서 얻는 교훈
1) 기독개혁교회는 칼빈대학을 직영할 것이냐를 두고서 장기간 토론하였고 많은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토론은 교단의 다양한 언론 매체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보고서는 노회와 총회의 결정과 위임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이들은 일을 벌여 놓고 공적인 결정으로 추인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고신대학교의 경우에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토론의 절차를 거친 적이 없다. 다만 노회와 총회 차원의 결정의 과정은 거쳤지만, 연구보고서는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가이사회나 교명 변경에서 보듯이, 일을 벌여 놓고 총회가 추인하는 형식을 취하는 비개혁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절차에 젖어 있다.
2) 토론과 보고서의 내용도 중요하다. 기독개혁교회는 교육의 주체가 부모임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때문에 이들이 구성하는 협회가 교육의 실제적인 책임을 진다. 즉 국가나 교회가 아니라 부모가 주체이며, 이들이 협회를 구성하여 자녀의 세례시에 서약한 대로 자녀들의 교육을 성경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시행한다. 이들은 이런 언약 사상에 기초하여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전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신대학교의 경우, 교육의 주체에 대한 논의나 협회 구성에 대한 논의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물론 이를 언급하고 있는 논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27) 그러나 이런 논문이 토론을 유도하였거나 공식적인 연구보고서 작성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또 고등교육에 앞서 초중등교육에 대한 관심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3)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서 칼빈대학은 고유한 전통을 형성하였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대학의 정체성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의 임용과 훈련과 감독이 아주 면밀하며 철저하다. 교인과 교회가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아주 신중하고 철저하게 기독교대학을 교회의 학교로 삼은 다음에, 이 대학의 정체성을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통하여 확보하기 위하여 다양한 조처와 지원을 강구하고 있다.
고신대학교에도 교수 연수 프로그램이 있다. 그러나 과연 신앙과 학문의 통합의 관점에서 이 연수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살펴볼 문제이다. 특히 학과를 개설하기 전에 신앙과 학문의 통합 의지를 갖춘 교수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서 일을 진행시켰는지도 살펴볼 부분이다. 교수의 승진에 이 통합의 성과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지도 점검이 필요하다.
4) 기독교대학이 자신의 자녀를 신뢰하고 맡길 수 있는 학교라는 부모의 자세를 살펴보자. 기독개혁교회 교인들과 교수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칼빈대학을 기꺼이 추천한다.
우리 교인들이나 특히 교수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고신대학교로 기꺼이 추천하는지는 살펴볼 문제이다. 이전에 인가도 나지 않은 평화중고등학교에는 많은 목사 장로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보냈었다. 과연 이런 분위기가 지금도 고신대학교 주위에 감돌고 있는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5.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의 관계
우리는 다시 칼빈대학과 칼빈신학교의 관계에서 우리의 문제를 접근하려고 한다. 기독개혁교회는 교회가 고등교육기관을 운영해도 된다는 현실적인 이유들을 제시하였다. 이 배경에는 교회가 신학교를 직영하는 원칙에서 볼 때, 신학교에서 파생되어 나온 대학까지도 직영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예시한다. 물론 지금은 양 교육기관이 대등한 입장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칼빈신학교와 칼빈대학의 주객의 관계는 한 순간도 바뀐 적이 없었다. 말하자면 학교의 운영과 교육 내용에 있어서 상호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의 관계는 주객이 바뀌고 말았다. 근본적으로 교육의 주체에 대한 의미 있는 논의를 한 적도 없이, 행정적으로 고려신학대학이 설립 인가를 받으면서 신학교는 비인가 과정으로 전락하였고, 신학대학원이 인가 과정이 되면서도 고신대학교라는 파생된 기관에 예속된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제는 교육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교육부라는 국가적 권위를 힘입어서 신학대학원은 고신대학교의 휘하에 들어와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들려온다.28) 이것은 법적 문제이기 이전에 교육의 주체의 문제이며, 양 기관의 역사의 문제이다. 비록 한 이사회가 두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하더라도 미국 개혁교회의 예에서 보듯이 양자의 동등한 독립은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 신학교수들로 이루어진 교수회의가 기독교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하여 교회와 교육 관련 국가 기관에 문서를 통한 작업을 진행했을 뿐이지 교회의 본질과 교육의 주체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와 교인들을 향한 신학적 토론 작업을 거치지 않았던 과거가 이런 주객 전도의 배경에 깔려 있다.
이런 일을 범교회적인 토론이 아니라 단순히 사무적이고 행정적으로 진행하였다는 사실은 이사회를 임명하는 본 총회의 임무에 고신대학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고신교회의 교회정치 제102조는 총회의 직무를 다루고 있는데, 제7항에서 “총회는 신학대학원을 설치하고 경영 관리하며, 교역자를 양성한다”라고 말하고 있다.29) 신학교육의 주체는 교회이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가지는 교육과는 다르며, 개혁교회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30) 그러나 교회 정치는 고신대학교에 대해서는 직접 말하고 있지 않다. 물론 신학대학원을 기초로 하여서 고신대학교를 감독하는 이사회가 총회에서 선임된다는 것을 예상할 수는 있다. 교회의 직접적인 교육적 책임은 여전히 신학대학원에 국한되어 있으며, 고신대학교에 대한 책임은 이에 기초하여 파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자적인 해석과 형식 논리만을 따르자면 학교 법인의 법적 지위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 총회의 직무에 고신대학교의 설치와 경영 관리를 삽입하는 것은 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미국 기독개혁교회가 거쳤던 것과 같은 광범위한 토론과 연구보고서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6. 교회의 본질과 영역 주권의 관점에서 본 교회의 교육적 책임
부활하신 주님은 열한 제자에게 복음 전파와 성례를 명령하셨다(마 28:19-20). 이 말씀은 사도의 임직식이며,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에 대한 재확인이기도 하다(마 16: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회 설립을 명령하셨고, 이 일을 위하여 말씀 전파와 성례 집행을 위임하셨다. 교회는 말씀 전파와 성례 집행이라는 사도직의 수행을 통하여 설립되고 존속한다. 지금은 이 일을 목사가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는 목사가 없는 곳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백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31) 사도직 자체와 이 직의 수행에는 많은 또 다른 사역들이 수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부과적인 업무는 본업에 충실하도록 도움을 주거나 충실할 때 파생되는 일들이다. 사도들에게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는 사도행전의 기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도들은 말씀 전파에 온 힘을 다 하였고,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 사도들은 직접 공궤하였고, 이 때문에 본업인 말씀 전파와 긴장이 발생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교회 내에 분규가 일어났다. 이 때에 사도들은 새로운 직분과 직분자를 세워서 그들에게 공궤를 포함한 구제의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말씀 전파에 전무하였다(행 6:1-7). 교회의 사명에는 구제도 있지만, 이 일을 위임받은 자는 말씀의 사역자는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교육은 교회의 사명인가? 그렇다. 사도들이 받은 직무도 가르치는 일이다. 교회의 교육적 사명은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교리문답 교육을 교회의 교육적 책임으로 보았다. 이 교육은 세례를 받는 성인에게나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이 나중에 공적인 입교를 할 수 있게 구원의 도리의 개요를 가르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도리를 가르치는 일을 교회에만 국한하지 않고 가정과 학교도 이 교육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보았다. 중세에 부모들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지 않았다. 이런 일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녀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칼빈은 언약에 기초하여서, 주께서 구원하여 자녀로 삼은 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32) 개혁자들은 학교 교육을 통하여서도 순수한 복음을 확장시키려고 하였다. 중세에는 자녀를 사제와 수도사로 만드는 것이 공로의 행위로 간주되었으나, 이신칭의로 이런 그릇된 생각은 제거되었다. 개혁자들은 유아 세례에서 부모가 자녀를 학교에 보내어야 하는 근거를 찾았다.33)
칼빈은 제2차 제네바 사역(1541-1564)을 시작하면서 목사와 공무원을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에 대한 관심도 표방하였다. 그 결실로서 1559년 6월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개교할 수 있었다. 비록 재원의 부족과 제네바가 당시 국제 사회에서 겪는 정치적인 약세로 인하여 이 학교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나 레이든(Leiden)과 같은 대학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신학교 수준에 머물렀으나, 기독교고등교육을 증진시키려 노력했던 좋은 본보기이다. 선제후(elector)가 재정을 충당하던 하이델베르크나 왕이 경비를 담당하였던 레이든과는 달리 제네바 아카데미는 제네바 시의회가 재정을 담당하였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두 대학교와는 달리 제네바 목사회가 이 아카데미의 실질적인 운영 주체였다는 사실이다. 칼빈이라는 개혁자가 이 아카데미의 설립과 운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사회를 통한 교회의 역할이 아카데미의 신앙적 순수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이것은 아카데미의 독립을 보장하지 않았고 결국 대학교로 발전하지 못하게 만든 중요한 한 요인이 되고 말았다.34)
현대 교육은 불란서 혁명을 통한 국가 권력의 확산과의 관련성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카이퍼는 영역 주권이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불란서혁명 이후 전권을 행사하려는 국가의 권력의 제한을 제안하였다. 국가가 정치적 권세를 가지고 교회의 사안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카이퍼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하신 세계의 모든 현상들과 영역에 영속적인 질서와 구조의 법을 주셨는데, 이 고유한 질서와 법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위에 지배하는 이는 오직 만유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만유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인간의 삶에서 한 치도 없다.”35) 각 영역은 하나님이 주신 법과 질서를 따라 고유한 자체 권한을 가지며 다른 영역을 지배할 수 없으며 지배받을 수도 없다. 식물, 동물과 사물과 인간 사회의 각 영역이 가진 고유한 법과 질서는 각 영역의 모습과 발전을 결정한다. 가정은 질서상 기업과 다르며, 기업은 대학과 다르다. 이런 삶의 영역들도 위로부터 받은 고유한 내적 법질서를 지니며 고유한 권위와 활동 영역을 가진다. 같은 형태의 영역에는 지배와 종속이 가능하다. 가령 시청과 국가와의 관계이다. 또 모기업과 자기업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러나 영역 상호 간에는 협력은 가능하지만 지배는 불가능하다. 카이퍼는 국가가 교회와 가정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이것은 교육의 영역에서 더 분명하여 진다. 카이퍼는 언약 사상에 기초하여 교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으며, 종교(신앙)적 확신을 따라서 자녀들을 교육시킬 권한과 임무를 가진다고 보았다. 즉 학교는 부모가 가정에서 일차적으로 지고 있는 교육적 책임의 연장선상에서 파생한다.36)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 학교가 아니라 부모들이 협회를 구성하여 신앙의 확신을 따라 자녀들을 교육하는 사립 학교를 설립하며 교사를 임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37)
카이퍼는 이런 정신으로 기독교학교의 설립을 장려하였고, 1880년에 자유대학교를 설립하였다.38) 이 때 자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국가와 교회로부터 학문의 자유를 보장받겠다는 말이다.39) 그가 교회로부터 자유를 추구한 것은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 당시의 화란교회는 국가의 지배를 받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다. 아니 신학적 자유주의에 먹이가 되고 말았다. 이런 교회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자유대학교가 먼저 신학부를 주축으로 출발한 것을 고려하면, 이 신학부도 사립 신학부의 성격을 지니었다. 졸업생이 배출될 때, 이들이 화란(국가)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카이퍼와 그의 지지자들은 그 교회로부터 분리하여서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1886년). 물론 그 교단 교회가 신학부만을 관장하는 이사를 파송하였으나, 그럼에도 신학부와 교단은 직영의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다. 신학부를 포함한 자유대학교는 협회가 운영하지만 그 속에 있는 신학부에 대해서만 교회가 이사를 파송하는 어중간한 형태를 취하였다.40)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육의 주체를 국가나 교회로 보지 않고 부모로 보면서 뜻을 같이 하는 성도들이 협회를 구성하여 대학을 설립하도록 가르친 것은 카이퍼의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41) 미국 칼빈대학은 이런 카이퍼의 사상적 배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상황이 가져온 현실적인 이유들을 고려하면서 교회가 대학을 직영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신학교를 직영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속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신학교육의 주체는 (부모가 아니라) 교회이다. 신학교는 ‘교회의 학교’이다.42) 그러나 기독교고등교육이 역사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신학교의 예과 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고려할 때, 이 과정이 기독교 고등교육기관으로 독립하게 되면 양 기관의 관계와 교회와의 관계, 곧 직영의 문제는 항상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학교와 대학을 교회가 직영할 수도 있고, 양 기관을 직영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한 기관만을 직영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목사후보생의 교육을 교회의 임무로 인지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신학교육기관을 직영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신학교를 직영하는 과정에서 고등교육기관이 활성화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난국에 처해있다.
6. 고신대학교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점들
우리는 고신대학교가 총회 직영이 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보았고 교육의 주체의 관점에서도 살펴보았다. 교회가 대학교를 직영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범교회적인 토론과 여론 수렴 과정 없이 특정 인물들과 모임의 행정적인 결정으로 지금의 고신대학교가 있게 되었다. 설령 현재의 고신대학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하여도, 교회의 본질의 관점에서 심각하게 논의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점들이 많이 있다.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이제는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복음병원과 의과대학이 고신대학교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이다.
대학과 신학교와의 분리 문제는 의과대학이 생기기 전에도 거론된 적은 있었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의과대학 설립 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교회는 교명 변경 자체를 반대하였다. 만약 고신대학교가 의과대학을 휘하에 두고 있지 않고, 의과대학의 설립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자연과학부가 없는 상태라면, 신학대학원의 단설 문제나 분리, 또는 대학의 직영 자체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의과대학을 갖고 있지 않는 현재의 총신대학교나 장로회신학대학교와 같은 규모라면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43) 그러나 의과대학은 그 성격상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연구기관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신학교수들이 중심이었던 교수회와 교수회의 제안을 받았던 이사회는 근본적이고 세밀한 검토도 없이 의과대학을 신설하였다. 이후에 있었던 면학 여건에 대한 학생들의 분규는 정당한 것이라 하겠다. 설령 이런 분규의 배경에 운동권의 영향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지도 않고 교회의 이름으로 의과대학을 개설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당시의 병원장이나 대학장이 의과대학 신설의 정당성과 정책을 교회와 교인들에게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한 적은 없다.
2) 어떤 의미에서 복음병원이 고신교회와 고신대학교의 자랑거리인가?
지금 고신교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내홍이 병원임을 고려할 때, 이전의 비영리 병원이었던 시절은 잃어버린 낙원과 같기도 하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의 관점에서도 논의해야 할 문제이다.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병원과 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교의 방편이지 영리가 목적이 아니다. 복음병원이 지금도 설립 정신을 따라 오직 비영리 구호 기관이요 전도 기관이라면, 1970년대까지 교회 예배에서 기도하고 헌금하던 관례를 따라 교회가 헌금하고 전도하는 교회의 기관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고신교회가 복음병원을 자랑거리로 삼아도 좋다. 그러나 복음병원은 영리 기관이 되었고, 학교법인의 수익기관이 되었다.
첫째로, 병원이 전도기관이라면 목사가 운영을 맡을 수도 있겠지만, 영리 기관이라면 의사와 의료 경영 전문가가 맡는 것이 옳다. 현재 병원 경영의 실무는 병원관계자들이 맡고 법적인 경영은 이사회가 맡고 있다. 이 구조가 복음병원의 분규의 원인 중 하나이다. 이사회는 총회의 대리 기관이기도 하지만, 교육부로부터도 권한과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래서 병원 분규 뿐 아니라 학교법인 및 신학대학원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면서 교육부의 권한을 앞세운다. 설령 교육부가 부여한 권한을 행사한다 하더라도, 현재 상태에서 총회가 교육의 주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의 치리회인 총회가 수익기관을 경영할 수 있는가? 설령 교회가 고등교육기관을 운영할 수 있다 하더라도, 미국 기독개혁교회처럼 교회가 학교 재정을 담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수익기관을 통하여 학교 재정을 충당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의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하지 않다.44)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야 하는 교육적 사명을 부여받은 목사가 이사로서 학생들이나 병원 노조에 의하여 감금당하거나 차 안에서 이사회를 하는 것은 직분의 위기를 뜻한다.
둘째로, 복음병원이 총회의 감독 하에 오게 된 이후부터, 의사와 간호원과 직원들의 임용 과정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도 필요할 것이다. 고려신학교가 가교가 되어서 고려신학대학이 설립될 수 있었고, 고신대학을 가교로 하여서 의과대학이 있게 되었다. 복음병원이 적자에 허덕이면서 전도와 구호를 하던 시대의 임용은 난외로 부쳐도 좋다. 그러나 복음병원의 관심이 이 설립 목적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임용된 임직원에 대한 점검을 제안한다. 기독교대학의 정체성을 책임지는 주체가 교수라면, 교회의 본질에 합당한 병원의 정체성을 책임진 주체는 의사와 간호원들이다. 칼빈대학이 교수 임용에 철저하듯이, 우리는 얼마나 철저하게 신앙과 의료를 통합하려는 의사와 직원들을 채용하였는가? 이사회가 할 일은 실제적인 경영이 아니라 인사를 통한 복음 전파가 아닌가? 한국 사회에 편만한 학연, 지연, 혈연의 관례를 따라 임용된 직원은 없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복음과 개혁신앙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도록 이사회와 병원은 직원들을 어떻게 훈련시켰는가? 지금 이사회와 병원장이 강조하듯이 불법 파업을 주도하고 참여하고 있는 직원들을 누가 채용하였는가? 이 중에 이전에 이사나 총회의 임원을 한 목사 장로의 인척들은 없는가?
셋째로, 무엇보다도 (불법) 파업은 노동법이나 교육법에 앞서 신앙의 문제이다. 교육의 주체나 교회의 본질의 문제를 떠나서 병원이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면, 다른 병원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리베이트(rebate)가 없고 모든 환자에게 친절하며 특히 가난한 자에게 동정적일 뿐 아니라,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어서 세상적인 의료파업을 초월하며 진료와 간호에 성실한 병원이어야 할 것이다. 2001년 의료대란 시에 기독의사들의 모임인 누가회가 무조건 진료를 결정하기 전에 고신의료원이 이런 결정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3) 고신대학교의 경쟁력의 문제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 보자. 교회의 학교로서의 기독교적 정체성과 학문적 수월성과 재정적인 측면이다.
고신대학교의 기독교적 정체성에 대해서 지금까지 고신교회가 전체적으로 논의하고 요구하고 기대하지 않았다. 범교회적이고 대대적인 논의를 통하여 기독교대학의 목표를 제시하고 정체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학문적 수월성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교수가 진다. 이것이 정체성과 충돌할 위험은 상존한다. 미국의 기독교 대학들이 세속화되는 과정에는 학문적 수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칼빈대학이 자연과학부도 가지고 있지만 인문대학이라는 특성을 살리려 한 것을 참고할 만하다. 우리는 정체성과 학문의 수월성에 대한 점검을 통하여 경쟁력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대학은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지방대학일수록 생존을 위한 무한대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결국 대학은 앞으로 풍부한 재정과 우수한 교원과 쾌적한 학습 여건으로 승부하여서 생존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고신대학교가 이런 재정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건실한지를 객관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4) 고신대학교가 신학교에서 파생된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목사후보생 교육에는 예과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서양 고전어와 현대어를 중점적으로 교육하던 초기 칼빈학원의 교육과정과는 달리 현재의 신학과는 이런 예과의 성격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목사 교육과 인격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학문을 접하는 것이 신학교육에 줄 수 있는 기독교대학의 기여이다. 그러나 신학대학원의 교정이 대학교와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현실에서 신학대학원이 기독교대학의 성격을 갖추어야 하는 고신대학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많지 않다.45)
7. 교회의 교육적 사명과 영역 주권에서 본 이사회의 사명과 구성
총회가 현행 제도 하에서 이사회를 구성하고 고신대학교와 의과대학과 고신대학원을 운영하는 것이 교회의 교육적 사명과 영역 주권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합당하며 효과적인가?
복음병원의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현 제도 속에서 이사회는 위의 세 기관을 다 살피고 관장하기에는 여러 측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아울러서 교회의 본질과 직분의 이해에서 볼 때에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현금 이사회가 종종 총회의 결의는 존중하지 않고 교육부의 지시나 감사 결과를 앞세우고 대학과 신학대학원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일방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교육법을 내세우는 이 주장 자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립학교를 경영하는 학교법인 이사회의 정관은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작성하여 하달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법인이 고유한 교육 목표에 따라 정관을 작성하고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시행하는 것을 고려할 때, 이른바 교회법과 교육법의 충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교회의 본질이나 교육적 사명에 근거한 근본적인 합의도 없이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된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의 존재가 문제의 근원인데도, 근본적인 출발점이나 원리에 대한 점검과 합의도 하지 않고 총회의 임명을 받은 이사회가 교육부 법만을 고집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목사/장로의 사명을 존중한 태도는 아니다.
둘째로, 총회라는 치리회에서 이사를 선임하는 제도 자체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정관은 목사와 장로만이 이사로 피선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46) 그런데 영적인 직무를 위하여 훈련받고 교회를 봉사하는 대부분의 목사는 카이퍼와 같은 비범한 인물을 제외하고 목회 이외의 일에는 전문가가 아니다. 목사가 학교법인의 이사가 된다는 것은 전문 경영인이나 의료인의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해당 기관의 영적 상태를 감독하고 설립 목적대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살핀다는 뜻이다. 장로가 이사로 선임되는 것은 전문성을 고려해야 한다. 현 노회와 총회의 구조상 총대가 되어야 상비부나 특별 부서 그리고 총회 기관의 이사에 선임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성을 가진 장로가 이사가 되기 힘든다. 적어도 지명도가 어느 정도 있어야 이사에 피선될 것인데, 장로로서 여러 차례 노회 총대가 되고 다시 총회 총대가 되어야 비로소 피선될 수 있는 지명도를 얻게 된다. 자유업이 아니라 매일 출근해야 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장로가 이런 경로를 통하여 이사에 선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총대 위주로 총회가 운영되는 것은 당연한 듯 보이지만, 장로교 정치의 원리에서 볼 때 바람직한 발전은 아니다. 현행 장로교 제도는 칼빈의 장로교 제도가 지향하였던 민주적인 면을 많이 상실하였다.47) 정관의 규정상 총회 총대가 아닌 장로나 전문성을 구비한 일반 교인이 이사가 될 수 있는 길은 아예 차단되고 말았다. 이런 제도 안에서 이사 선임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교회와 교인들의 여론을 수렴할 수 있는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지금까지와 같이 토론보다는 사무적이고 정치적으로 사안을 다루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사 선임은 총회 안건 가운데 항상 초미의 관심을 받는다. 이사 선임이 교회 정치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교회가 병원을 경영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는데, 총회가 치리회로서 영적인 문제를 살피기보다는 합법에 기초한 교회 정치의 대결장이 되고 말았다. 비록 바람직하지는 않았으나 한상동 목사가 신학교를 사립으로 두려고 하였던 제일 중요한 이유가 교권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 점에서 그의 혜안은 돋보인다.
셋째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총회는 전문가들을 이사에 임명하여 병원과 고신대학교를 관장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사들이 병원 경영의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이것은 현행 이사회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나타난 난맥상을 보완하자는 제안이다. 즉 교회가 고등교육의 주체인가의 여부와 이사 선임의 제도적인 측면을 따지지 않아도 영역 주권의 입장에서 학교와 병원 경영에 유능한 전문인에게 봉사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사도들은 본분인 전도와 설교에 전념하였다. 이 때 구제라는 사역이 뒤따랐으나, 이들은 이 일을 설교에 감화받은 은혜와 성령에 충만한 자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기로 하였다. 이를 예로 삼아서 목사는 대학교나 병원의 영적인 일에만 관여하고 의사나 회계사나 변호사 등 전문인 신자가 대학과 병원을 경영하도록 하여야 한다. 의과대학을 가진 대학교를 운영하는 이사회에 의사가 이사로 참여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착오이다. 말씀의 사역이 올바르고 왕성하게 이루어졌다면 이런 전문인들도 많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병원의 모든 문제를 이사회에 물어야지 치리회인 총회에서 이런 문제로 인하여 소란이 일어나며 내분이나 고소와 고발이 오가는 것은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릴 위험이 크다.
고신대학교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을 감독하는 이사회에 지금까지 대학 운영자나 대학교수가 이사로 참여한 경우는 많지 않다. 대학은 그 속성상 교육의 내용과 방법과 시기를 교회와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한다. 영역 주권의 입장에서 가능한 주장이요 자유대학교는 이런 입장 위에 서있다. 그러나 현재의 고신대학교는 그렇지가 않다. 교회가 이사회를 통하여 통제하고 감독해야 한다. 문제는 교회가 이사회를 통하여 대학의 고유권한을 인정하고 정체성을 책임지는 교수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겠지만, 감독의 책무도 동시에 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 전폭적인 재정적 지원도 책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 당국을 향한 진정한 감독은 불가능할 것이다.
8. 맺으면서
우리는 성경의 교훈과 교회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고등교육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라 교인 곧 부모의 사명이라고 본다. 교회와 목사는 이 일을 위하여 교인들을 독려할 수 있다. 물론 미국 칼빈대학의 경우처럼 이 원리를 분명히 하되 교회가 현실적인 이유에서 대학을 직영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교회와 교인의 사명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고신교회가 총회에서 이사들을 선임하는 방식으로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을 경영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 그리고 개혁교회의 역사에서 볼 때에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고신대학교는 부모들의 협회에 맡기고, 복음병원은 성도인 전문인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속하며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신학교를 직영해야 한다. 교회는 이사회를 통하여 신학교육을 잘 감독하여야 한다. 교수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지만, 신학교육에 대한 교회의 요구를 전달하며 신학교수들이 교회의 교사로서 더 열심히 연구하고 성실하게 가르치고 교회에 다양한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살펴야 한다. 여기에는 재정적인 책임도 포함된다. 교회는 교회다울 때 가장 아름답고 힘이 있다. 교회가 신학교육의 주체가 되어서 훌륭한 목회자들을 양성하면, 이 목회자들이 훌륭한 교인들을 배출할 것이고, 이들이 고등교육과 병원도 잘 경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을 벌여 놓고 추인받으며 사후에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역사를 안고 있다. 우리는 원리를 찾으려고 토론하고 연구하고 발표하는 전통을 아직도 확립하지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있는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을 어찌 하라는 말이냐는 식의 불평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을 포기하자는 단순한 방식을 제안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비록 병원을 포함한 고등교육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라고 보지만, 현실을 맹목적으로 무시하지도 않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위에서 살핀 대로 현 제도상의 이사회로는 복음병원과 이를 안고 있는 고신대학교를 경영하기 결코 쉽지 않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를 또 다른 임기응변으로 대처하지 말고, 전교회와 전교인 사이에서 합의점을 도출하고 협력을 얻어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행정적으로만 일어나서는 안 된다. 고신교회 안에 있는 모든 언론 매체를 이용하고 지역적으로 협회의 발생을 촉진하며 이들이 토론하고 어떤 재정적 희생도 감수할 수 있게 광범위한 공감대를 이루어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에 서있었던 선배 교수들의 공과를 생각하면서, 신학교수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고신대학교를 그냥 포기하려는 입장은 아니다. 문제를 바로 제시하고 범교회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대의를 수렴하자는 뜻이다. 이런 토론 과정을 거쳐서 총회의 직무에 대학교 경영에 대한 법적 근거를 첨가하여야 한다. 단설신학대학원을 지금 당장 할 수도 있고 미룰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신학교육의 주체는 교회요, 기독교고등교육의 주체는 부모와 뜻 있는 교인들이 만드는 협회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 원리적 측면에서 미국 기독개혁교회가 취했던 지혜로운 현실적인 결정에서 배울 점이 많이 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