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그리 거침없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내면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로 이르는 어둡고도 협착한 그 무엇까지도 속속들이 파헤쳐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 듯하다. 나는 서울발 경주행 열차에서, 작가들의 다양한 형태의 그림들을 떠올리며 갖가지 상념에 잠겨 보았다. 상념 중에 어디론가 자연스럽게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불교 미술의 보고인 향수 어린 고도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번 여행의 본 목적을 떠올리며 경주의 여러 능들을 뒤로하고 어느덧 한적한 교외로 달리는 차안에 앉았다.
역정의 흔적 묻어있는 '석화산방'
작가 김호연이 손수 지었다는 작업실은 '석화산방'이라는 구수한 한글 필체와 함께 낡은 창고를 연상케 했으며 작가의 손때까지 더해져 있었다. 그 허름함이란, 목조를 잇대어 만든 투박한 구조의 창고보다 더해 보였다. 먼지를 한 움큼이나 뒤집어 쓴 작품들이나 어림 잡아 수백 권이 넘을 듯한 때묻은 스케치북들은 화가로서의 힘들었던 역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규모가 큰 작품을 그려야만 예술적 권위를 세울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의 제자를 마치 공장장 다루듯이 하는 요즈음 세태에 견주어 볼 때, 그의 작업실은 매우 숙연하면서도 싸늘한 정적이 감도는 꽤 괜찮은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구미술 무비판 수용 '일침'
가필 흔적 없는 즉흥적 그림
마음 속 이미지 자연스레 표출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주 앉은 자리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술을 마셨다는 텁텁한 인상의 화가는 술 이야기부터 운을 떼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의 그림과 술은 불가분의 관계일 거라는 생각이 뇌리에 잠깐 머무는 동안, 작가는 벌써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흐르고 주변을 둘러싼 그림들로 시선이 옮아간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의 얼굴에선 모종의 고뇌와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림과 함께 하며 낭만적인 삶을 즐기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세상을 그리워하는 듯한 그런 류의 고독이었다.
사실 나는 서양화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90년 대 초에 그가 그렸다는 테크닉이 뛰어난 서양화 몇 점을 보고도 마음속으로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는 서양화를 하는 작가들이 많다. 추정하건대 그 비율이 아마 70% 이상이리라. 그러나 서양화를 그리면서 서양화라는 매체와 예술성 자체를 극복한 경우는 박수근 등 소수의 화가에 불과할 정도다. 우리 나라 서양화가들의 그림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들 중에서 상당수는 서양화를 그린다기보다는 서구 미술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이러한 느낌은, 그들이 주장하는 예술론마저 서양의 화가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유사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런 경우 그들의 그림은 그저 모방으로 시작해 모방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작가가 미국 유학 중에 서양화의 기본 재질인 기름에서 좀 더 새로운 재질로 전환했다는 말에 큰 관심을 가졌다. 미국에 유학 간 이후의 그의 작품들은 주로, 불완전하게 떠도는 영혼을 완전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무당의 노래를 소재로 한 '황천무가(黃泉巫歌)'나, 망자들의 한을 풀어주고 저승으로 인도하는 다리 역할을 했던 '바리공주의 설화' 등을 제재로 종이에 흙과 먹, 물 등을 주로 사용한 작업들이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이전에 그렸던 서양화에 비해 작품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무척 궁금한 사실은 서양화의 재질을 완벽하게 소화해 낼 정도로 뛰어난 기교를 보인 그가 서양화 핵심인 기름을 잘 사용하지 않게 된 까닭이었다.
나는 내가 이러한 것을 무척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작가가 미리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질문에 신중을 기했다. 혹시라도 진실에서 벗어나 단지 자신을 미화시키기 위해 그럴듯하게 수식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나의 기우일 뿐이었다. 몇 차례의 질문 끝에 그 연유를 알게 되면서 그의 작업이 무척 진솔하고 진지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에게는 큰 소득이었고 오랜만에 투박하고 뚝심 있는 작가를 만난 것 같아 즐거웠다.
"'흙'을 향한 관조는 인간사에 대한 깊은 애정"
'욕심'뗀 그림 위해 혼신
그가 서양화와 거리를 두게된 동기는, 그림을 그릴 때 서양 재료로는 마음속에 스쳐 가는 그 무엇인가를 순간적으로 포착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부연 설명으로, "서양의 유화는 더디게 완성되기에 재료를 바꾼 것 뿐"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되새겨보면서 그가 우리 미술 발전에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했음을 확신했다. 그의 그림은 즉흥적이며,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을 무의식적으로 끄집어낸 듯한 그림이다. 따라서 그가 그려놓은 형태들은 가필한 흔적이 없어 보인다. 형상이 있건 없건 간에 그의 손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에 순응하고자 한다.
그는 처음에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대개의 화가들은 한번 서양화를 하면 좀처럼 바꾸지 못한다. 줄곧 서양화를 해온 어느 원로 화가도 화선지나 먹을 사용하고 싶은데 쉽게 바꿀 수 없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술에서 이러한 틀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가 정신과 장인정신이 중요할 따름이다. 자신의 작품 세계에 진지하게 몰입한다면 굳이 재료를 한정시킬 이유가 없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재료를 사용한 그림이 혼이 담긴 그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호연은 이러한 예술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그는 서양의 미술 속에서 한국 미술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고 실천한 용기 있는 화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그에게 혹자는 형식을 무시하여 그림의 기본 틀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달빛 벗삼아 그림 그릴 듯
그러나 그는 서양화나 동양화라는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그림이라는 작품 자체와 작품성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격식도 어울리지 않는다. 조각이든 서양화든 공예든 불화든 그는 그의 작품 세계에 필요한 것이라면 모두 실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경험이 풍부하고 사려가 깊은 화가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가 넘나드는 예술세계는 우리 미술의 취약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우리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일차적으로는 불교나 샤머니즘, 원시적 요소, 죽음, 무녀, 바리 공주의 이야기 등을 소재로 전개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샤머니즘이나 불교 등 종교와 관련된 전통적 소재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미술, 아니 자신만의 숨소리를 소중히 간직하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이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흙을 사용하기도 했다. 관조(觀照)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의 흙에 대한 관심은 곧 우리 인간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또한 이러한 흙은 "나는 서구 미술 사조의 일편 추종이나 그 작가의 모방, 즉 카피 모더니즘이 아닌 나만의 숨소리를 그림으로 옮기고 싶다"는 그의 독백과 같은 표현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지주이자 뿌리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오늘도 술과 달빛을 벗삼아 큰 틀의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가 화가로서 성공할지의 여부는 자신의 말처럼, "욕심이란 그림자를 떼어낸 그대로의 그림"을 그리는 데 얼마만큼 혼신의 힘을 다하느냐에 달려있다.
주요작품 감상
황천무가·60cm×60cm.
이 작품은 김호연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작한 것이다. 감로탱화를 자신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하였는데, 불교적 소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회화적 묘미를 높인 작품이다.
그는 인체를 매우 즐겨 화면에 그리는 작가로, 거추장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단순화되어 있으면서도 본능적이다. 형태나 구도의 단순 변형만큼 색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절제되면서도 자연스럽다.
황천무가·120cm×250cm.
한국의 전통 회화적 요소들을 잘 소화하여 현대적 감각으로 작품화하였다. 작은 틀의 그림들이 모여 큰 작품을 형성시키는 수법을 사용한 이 그림은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사후 세계와 관련된 삶의 이야기를 담아 내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서양의 컴바인아트에서 볼 수 있는 이질적인 오브제의 결합과는 또 다른 우리 정서가 마치 전통 보자기의 미묘한 결합처럼 조그만 사각 틀들의 조화 속에서 새롭게 묻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