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문학마을,1999)- 근린공원 부근

[자운]

* 단편소설(78매)






근린공원 주변



최 학




1.

주택가를 둘러싸고 있는 야트마한 야산이지만 산은 산이라고 산정(山頂)에 오르니 제 사는 동리는 말할 것 없고 큰길 너머편의 아파트 단지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디디고 선 산봉이 높지않아서 15층 아파트 건물조차 아래로 내려다보질 못하고 눈 높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차길을 벗어난 자동차의 소음은 어김없이 상수리나무 숲을 타넘어서 산마루까지 치받아 올라왔다. 사람들이 퍼뜨려대는 그 소음에 저항이라도 하는 듯이 메마른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한결 소란스러워졌다. 서로 이질적이다 못해 적대적인 느낌마저 들게하는 소음들에 갇혀있던 현규는 한 순간 예상치 아니한 요의(尿意)을 느끼곤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 사람의 형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는 천천히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둘레가 한 아름은 될 성싶은 상수리나무 밑둥을 향해 오줌줄기를 뻗혔다. 아무런 쾌감도 가질 수 없는 배뇨(排尿).

거친 나무 껍질에서 흰 김이 피어나고 있는 때에도 산 아래의 병아리같은 여자 중학생들은 끊임없이 혜천양로원 모퉁이를 돌아 저희 학교 교문으로 뻗은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은 나뭇가지 사이로도 빤히 내려다 보인다. 학교 담장을 따라 포석(鋪石)을 깐 인도가 따로 있건만 교문을 통과한 녀석치고 운동장을 가로지르지 않는 녀석이 없다. 운동장을 질러오는 동무라도 봤음인가. 한 여학생이 2층 교사(校舍)의 창틀에 허리를 걸치고 소리를 질러댄다. 지퍼를 올리고나니 현규는 문득 남학교쪽 사정이 궁금해졌다. 남자고등학교는 얕은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중학교와 따로 떨어져 앉아있다. 짐작을 하여 시선을 고쳐보았지만 학교 후문으로 통하는 도로는 시야에 잡히지가 않았다. 운동장도 벽돌 건물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허지만 지금은 등교시간, 아이들의 모습을 직접 보지못한다 해서 녀석들의 걸음걸이며 웃음소리, 지껄임을 머리 속에 새기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녀석들 가운데는 저 혼자 아침밥을 먹고 저 혼자 대문을 나선 기태놈도 끼어 있으리라, 현규는 생각했다. 동네 야산 꼭대기에서 다시금 가지게 되는 고절감(孤絶感).

허술한 판자때기를 집어 갈 위인은 없겠지, 현규는 좌판을 놔두고 온 등산로로 돌아가 볼 요량이었다. 이제는 산을 찾아오는 사람도 한결 뜸해졌으리란 속셈도 있었다. 봉우리를 마악 내려서려는 때였다. 무례한 트럭 행상꾼이 불시에 스피커 소리를 키워 호객을 하듯 갑작스런 음악소리가 숲을 흔들어왔다. 여학교쪽에서였다. 그 음악소리가 신호인 모양이었다. 양로원 모퉁이를 돌던 아이들, 비탈길을 오르던 아이들 가릴 것 없이 한 순간에 뜀박질을 시작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교복 치마들이 일제히 팔락였다. 모이를 주러 온 주인을 보고 한꺼번에 몰려드는 양계장 병아리떼 같다고나 할까, 아침 햇살 한 줄기에 요란스레 꽃망울을 터뜨리는 채송화 꽃송이들 같다고나 할까. 아이들의 그 경쾌하고도 놀라운 변신에 현규는 저도 모르게 혼자 탄성을 놓았다. 뛰는 아이들 뒤편으로는 드문 지각생만 남았다.

산봉에서 백여 미터도 내려오지 않아 의외의 외침을 만났다. 30대 중반은 됐을까.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하관이 빠른 남자. 낯빛이 하얳다. 신문지를 깔고 앉은 그는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바라보는 편에서는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물푸레나무를 등지고 앉은 그는 강약의 어조를 잘 섞어 노래하듯 쉼없이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지만 현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주여, 역사하소서, 두 마디 뿐이었다. 그 모습에서 현규는 퍼뜩 ‘산상기도'란 말을 떠올리긴 했지만, 이내 연이은 생각은 사내의 모습 또한 좌판 앞을 서성이는 제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허지만 남자는 신앙속에 잠겨 있고 자신은 아무런 믿음조차 가지질 못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그가 부러워졌다. 그래서 현규는 나머지 능선길을 내려오는 동안 혼잣말로 역사하소서 역사하소서를 욀 수밖에 없었다.



손님 하나 맞아보지 못한 좌판을 걷었다. 좌판이라고 해야 허술하게 각목으로 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다 대충 판자를 걸쳐놓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 하나 만든다고 이틀을 씨름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톱질이고 망치질이었기에 손등이며 손가락에 긇히고 멍든 자국을 흠씬 남기기도 했다. 재민이 와서보곤 푸 한숨부터 내쉬고 난 뒤 볼품있는 기성품을 사주겠다고 제의를 했지만 현규는 굳이 친구의 호의를 사양했다. 이왕 안 하던 짓거리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시작부터 각오만큼은 단호해야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좌판을 들고 산에 올라서는 양동이에 담은 순두부 봉지조차 꺼내놓질 못했다. 판자를 덮을 비닐 깔개며 손님을 끌기 위해 공들여 쓴 안내쪽지도 그대로 박스 안에 쳐박혀 있었다.

진짜, 숨두부가 맞어 순두부가 맞어? 별스럽지 않은 표기법을 갖고 아내와 시비를 할 때만 해도 현규는 장사꾼으로 환골탈퇴하여 떳떳이 사람들을 맞이할 자신이 있었다. 새벽부터 산에 오르는 이들은 왜 그리도 많은 것일까. 대개는 나이 든 이들인데 남자보다도 여자가 더 많아 보였다. 저마다 행색을 달리한 이들은 마치 야산 꼭대기에 숨겨진 보물이라도 있는듯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다투어 산길을 올라왔다. 플라스틱 물통이며 빈 병을 든 이도 많았다. 배드민턴 코트 옆을 지나온 그들은 능선에 오르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이 약수터 가는 샛길로 빠졌다. 그래서 미리 점 찍어 놓았듯이, 이곳 능선 마루턱은 산속 장사를 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애당초 이 길목에서 순두부며 비지를 팔아볼 작정이었다. 어이쿠, 올라오시느라고 힘드시죠. 여기 따끈한 순두부가 있는데 한 번 드셔보시죠. 식전 공복에 이 순두부 한 그릇만 드시면 하루가 거뜬합니다. 네에, 틀림없습니다. 이건 저희 집에서 백 프로 국산 콩만 구입해서 직접 만든 것입니다. 무공해 건강식으로 이보다 나은 게 없지요....

그새 손님을 청하는 연습도 무수히 해봤다. 이렇게 오가는 이들을 불러 세우기만 하면 못해도 다섯에 한 명은 좌판 앞에 앉으리라 셈했다. 싸늘한 산 속 대기에 적셨던 몸을 따뜻한 순두부 한 그릇으로 풀고자 좌판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미 수백 번도 더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다. 이 산책로를 오르는 이가 최소한 이백 명은 된다고 해보자. 그래서 마흔 명이 순두부를 사 먹는다. 그러면 얼마인가. 한 그릇에 2000원을 받으면 8만원이 된다. 이것저것 드는 재료비가 3만원은 된다 해도 5만원이 그저 떨어진다. 한 달 스무 날 장사라고 하면 100만원 수입이 되는 것이다. 하다못해 열 명에 한 명밖에 없다해도 50만원이 된다. 이게 얼마나 큰 벌이인가! 벌이에 대한 욕구만큼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사람을 불러 세울 수가 없었다. 스스로 산책객이 되어 산을 오를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감정 때문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뭇가지와 돌멩이들마저 저를 보고 수근거리는 듯했다. 저 봐, 저 치가 여기서 장사를 하겠대, 한때 잘 나가던 월급장인데 말이야, 몇 달 놀고 나니까 다급해지긴 다급해진 모양이야. 순두부를 싸들고 왔어. 허나 장사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잖아, 안 그래?... 수치심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홀로 모질게 가꾸었던 다짐이며 각오 같은 것은 막상 산에 오르자 일순에 부질없는 것이 돼 버렸다.

좌판이며 양동이, 그릇가지들을 능마루까지 옮기는 일조차 아내가 거들어주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리를 정해 간신히 좌판을 차리긴 했지만 안내문이며 메뉴 쪽지를 내걸고 가스불에다 순두부를 덮힐 엄두는 진즉에 내질 못했다. 일 나갈 시간에 늦었다며 아내마저 황급히 산을 내려간 다음에는 자못 길가에 내버려진 어린애 심정같기만 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좌판 주위를 서성이다간 그것도 견디기 어려워 산봉쪽으로 슬쩍 자리를 피했었는데도 답답하고 객적은 기분은 좀체 바뀌질 않았다.

첫날인데 어쩔 도리가 없지 뭐... 이왕에 장사도 하지 못할 것, 차라리 일찌감치 판을 걷어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뭐 하시게 이런 건 여기 갖다놨수?”
용을 쓰며 좌판의 짝을 접고 있는데 왠 노인네가 다가와 참견을 했다. 큰 산 다니는 사람처럼 등산용 자켓에 지팡이까지 쥔 노인장이었다. 문득 현규는 그가 부풀리고 있는 은빛의 백발이 탐스러워 보이기조차 했는데 온화한 낯빛만 봐도 무슨 책망의 뜻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못된 짓 하다 교사한테 들킨 학생처럼 현규는 괜스리 얼굴을 붉혔다.
“나, 아까 올라오면서부터 봤구려. 전에 없던 것이 차려져 있긴 했는데 사람도 없구해서 이상타 했지”
“그러셨어요”
“뭘 팔러 나왔으면 때 좋을 때 힘써 팔고 그래야지 시늉도 안 내고 판을 걷으시면 어떡하나”

참견을 쉬 그칠듯한 노인은 아니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이 노인네는 양동이 속의 순두부 봉지까지 집적거려 보지 않았는가 싶기도 했다.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도 거듬세”
하릴없는 노인네의 참견이라 여겼는데 이번엔 일손까지 거들겠다고 나섰다. 현규가 사양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 쪽인지 모르지만 가시는 데까지 나 이거 하나는 들어다 줌세”
힘 자랑하듯 순두부가 담긴 양동이를 가볍게 쳐들었다. 민망하기는 하지만 노인덕에 짐 나른다고 두 번 걸음을 하지않아도 된 건 고마운 일이었다.

“조오기, 배드민턴 아주머니가 이것들을 맡아 주시기로 했으니까 멀지는 않습니다”
“나야 게의치를 말고 어서 앞장이나 서슈”
이 궁상스런 것들을 집에까지 들고 다니지 않게 된 것만도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좌판 하나는 오른 편 어깨에 걸치고, 다른 손으로는 주전자며 비닐깔개, 일회용 그릇들을 담은 상자를 들고 노인네에 앞서 산길을 걸으며 현규가 가진 생각이었다. 배드민턴 코트 옆에다 천막을 치고 구멍가게을 열고 있는 아낙을 설득한 이도 아내였다. 좌판 하나만 맡아달라고 사정을 했던 것.
“이런 말 들어 본 적이 있소이까?”
뒷편에서 노인네가 또 말을 걸어왔다.

“농사꾼한테 물도둑질은 도둑질도 아니라고... 가뭄이 들어서 다락논이 다 타들어간답니다. 그런데 저 밑에는 어떤 부자집이 파 놓은 물웅덩이가 있지요. 남들이 그 물을 퍼다 쓸려면 돈을 내야 했지요. 그런데 다락논 쥔은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지 뭡니까. 벼는 타 죽어가고... 하다못해 다락논 쥔은 야밤에 그 물을 퍼 날라서 타죽어 가는 벼들 숨을 쉬게 했답니다. 허지만 부자집에서 그냥 있을 리가 없지요. 도둑으로 몰아서 송사를 일으켰는데 고을 원님이 이런 판결을 내렸답니다. 벼가 타들어가는데도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농사꾼이 죄인이지 남의 물이든 누구 물이든 그 물을 길어다 농사를 살린 이는 죄가 없다고 말입니다. 요즘 세상에 나와도 이런 사또는 명사또가 아닐까요?”

현규는 등골이 아리게 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드물게, 세상 물정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이런 노인네를 맞닥뜨렸을 때 가지던 청신한 감동도 오늘에는 통증을 동반한다는 사실도 처음 깨달았다.
“저는...”
뭔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현규는 마땅한 언사를 찾을 수 없었다. 오래 세상을 살면서 절로 지혜를 얻은 이들은 상대의 곤궁한 언어까지 헤아려 줄 줄 안다던가.
“나, 꼭 그쪽땜에 하는 소리는 아니요. 보아하니 안 해보던 일을 처음 해 보시려는 것 같은데 이왕 그렇게 힘든 작정을 했으면 아뭇 생각말고 씩씩하게 하는 것이 보는 이도 좋지 않겠는가,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라오. 올해 몇이우?”
제 할 말을 다 해놓고 가장 손쉬운 대꾸만을 청할 줄 아는 노인. 한 순간 현규는 이런 노인과 같은 동리 살고 있다는 사실이 복됨으로 여겨졌다.

거푸 배드민턴 여자에게 치례를 하느라고 정작 노인한테는 제대로 인사조차 차리지 못했는데 어느새 노인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아래편 정자를 돌아 내려가고 있었다.

팡, 팡, 팡... 여느 때처럼 코트에서는 셔틀 콕의 청명한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소리보다 더 요란한 함성과 웃음소리. 라켓에서 튕겨난 고것들이 재빠르게 허공에 새기는 하얀 궤적쯤은 직접 보지 않아도 선연히 망막에 그릴 수 있었다. 두 개의 코트를 가진 배드민트 연습장은 사방이 망으로 둘러쳐져 있지만 날렵하게 그곳을 움직이는 인적은 곳곳의 터진 망 사이로도 쉬 구경할 수 있다. 현규는 오늘따라 망 울타리 안의 남녀들이 뿜어넘기는 그 건강한 함성과 웃음에 자신이 더욱 위축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갑을 확인하고는 사람 내왕이 없는 오솔길로 접어 들었다. 일찍 집에 돌아가 봐야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두 시간이나마 햇살 바른 곳에 낙엽을 깔고 드러누워 한가히 담배연기를 날리고 싶었다.

산이 얕으면 그 품 또한 빈약한 법, 능선 너머편에서 겨우 오목한 자리 하나를 찾았다. 마른 아카시아 이파리들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이곳에서는 정자의 사각 지붕만 내려다 보이고 배드민턴 하는 이들의 고함소리 또한 꿈결에서인듯 아득히 들렸다. 한적한 데서 비로서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쯤, 잘 사는 이의 안방을 치우고 있거나 그들이 먹고 비운 아침식사 그릇들을 씻고 있을 그녀. 어느덧 아내가 남의 집 일하러 다닌 지도 다섯 달이 돼 가는데 이맘때껏 그녀는 그 잘 사는 집들의 살림살이에 대해 얘기를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적잖이 힘들고 감정이 상할 법도 한데 그런 불평을 하지않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요, 할만해요.... 어쩌다 이편에서 말을 붙일라치면 단지 간소하기 짝없는 대꾸를 보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투명한 햇살이 산속 골고루 퍼지는 이 아침, 지극히 못난 지아비의 처지에서 문득 그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가지는 제 자신이 딱하기만 했다. 그 아내가 내일은 재민네 손님상을 봐 주기로 했다. 재민이 제 부서의 직원들을 초청했다는 말은 딱히 그런 뜻에서 한 것이 아니겠지만 그 나름으로 아내에게 일감 하나라도 더 주고자 하는 속 깊은 배려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제가 가서 도와 드릴께요. 물론 아내도 하루 일감을 얻는다는 뜻에서 먼저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님은 현규도 잘 알았다. 재민의 부인이 특히 그런 일에 더 무디다는 것은 아내도 잘 알았던 것이다.

수고가 고맙다고 해서 돈으로 사례를 할 수도 없고 또 사례를 한다해도 받을 수도 없는 그런 관계에서 아내의 자청은 순전히 그편의 어려움을 도와준다는 진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옆에서 그 말을 듣는 현규로서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이제는 마누라를 친구집 일에까지 내보낸다는 자조의 심사가 아주 없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는 이제나저제나 일터에서 돌아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자는 아내를 보면서도 온전히 위로의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는 못난 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그 아내가 등을 두드리면서까지 힘을 실어 줬는데도 좌판에 그릇가지 하나 내놓질 못한 채 짐을 싸들고 되돌아 가고 있었다. -씹새끼 좃 까고 있네, 전혀 뜻밖의 말소리에 현규는 화들짝 놀랐다. 어딘가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형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 새꺄, 네가 봤어? 봤냐 말이다. 아카시아 나무들이 우거진 반대편 능선 너머편에서 나는 소린 듯싶었다. 어린 음성들. 다투고 있기라도 한듯 그들의 음색이 한결 예리해졌다. 현규는 다시 몸을 일으켜 양동이와 상자를 쳐들었다. 능선길로 올라 서 봤다.

교복을 입은 세 녀석이 아카시아 나무 밑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다. 책가방들이 그들 곁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그들이 똑같이 고개를 들어 현규를 쳐다봤지만 그리 놀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비스듬히 손 자세를 고치긴 했지만 곧장 담배불을 끄는 시늉이라도 하는 녀석은 한 놈도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은 됐을까. 제법 난감한 심정으로 현규는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산길은 그들이 깔고 앉은 것 하나 뿐이었다. 못 본 양 그냥 지나쳐야 하나, 아니면 그만한 자식을 둔 어른이랍시고 한 마디 듣기싫은 말이라도 던져야 하나. 그들에게 다가가는 짧은 시간에도 현규는 심각한 고민을 했다. 그런데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말이 저 먼저 알아서 입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너희들 학교도 안 가고 여기서 뭣해?”
두려움은 그 뒤에 엄습했다. 곧장 녀석들이 욕지껄이라도 퍼부으면 어떡해, 떼거리로 덤벼들어 발길질이라도 하면?
“좀 있다 갈 거예요”
한 녀석이 불량스런 시선을 날리며 대꾸라도 해주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그사이 담배불을 치우는 녀석도 있어서 퍽 고맙기조차 했다.
“그래, 까닭이 있겠지만 지금쯤 학교에 있어야 될 학생들이 이런 데 있으면 좋질 못해”
“알았어요, 아저씨부터 먼저 내려가세요”

그들이 비켜주는 산길로 해서 현규는 그들을 지나쳤다. 정자 가까이 내려와서야 뒷편을 쳐다보았는데 그때까지도 녀석들은 좀전과 똑같은 자세로 열심히 담배를 빨아대고 있었다.



2.

내가 못 살어. 아내의 한탄은 그 한 마디로 끝났다. 무능한 남편을 나무라기보기 그런 남편에게 또한번 기대를 걸었었다는 자책의 뜻이 더 많이 내포돼 있는 하소이기도 했다.

희붐하게 어둠이 걷히는 시각, 아내가 서둘러 앞장을 섰다. 현규로서는 저 때문에 아내가 쉬지도 못한다는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다른 한편으론 팔소매를 걷어부치는 아내를 보니 내심 큰 응원꾼을 얻은 듯 든든한 감도 없지가 않았다.

세상엔 잠을 자지않고 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일까. 그 이른 시각에 운동기구들이 놓인 산자락에서는 벌써 헛, 헛, 헛 기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얀 입김을 뿜으며 층계를 뛰어 오르내리는 면장갑의 사내, 윗몸 일으키기를 하는 40대의 여자, 철봉에 턱걸이를 하고 있는 노인... 남달리 운동에 욕심이 많은 이들이 서둘러 시월 하순의 쌀쌀한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저 봐요, 되레 우리가 늦었다니까요”
그들을 보고 아내가 더 조바심을 쳤다.
“저렇게 유별 떠는 것도 좋아 보이질 않아, 몇 백년을 살겠다고...”

현규의 시선은 어느새 정자쪽으로 쏠렸다. 어제까지도 보지못했던 텐트 하나가 동그마니 정자 마루를 올라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붕이며 마루가 시멘트로 쳐발라진 정자이긴 하지만 모양새 만큼은 옛날의 그것을 흉내낸 것이기에 그 가운데 들앉은 하늘색 텐트는 주위의 구조와 전혀 어울려 보이질 않았다. 거기다 일부러 부조화의 극치를 내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텐트의 주인은 아예 낡은 구두 켤레를 계단참에 내놓고 옷가지들은 정자 난간에 걸어놓은 채 텐트 안에 드러누운 듯싶었다. 쯧쯧, 어디 갈 데가 없어면 저기다 거처를 정했을까.

아내도 유심히 텐트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혀를 찼다. 빤히 쳐다보이는 위치인데도 사람의 형체는 살펴 볼 수 없었다. 여러 날의 방랑 끝에 또하나 얻어걸린 임시 거처, 낡은 구두를 끌고 온 사내는 새벽 한기쯤 아랑곳않은 채 신새벽의 깊은 잠에 떨어져 있음이 분명했다. 비스듬히 반쯤 닳아없어진 구두 뒷축, 구두 측선에 낀 황토 등이 그동안 한 불우한 사내가 걸었던 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텐트 밖으로 내놓은 검정 가방이며 난간에 걸린 허름한 양말짝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에게는 제 몸뚱이 말고 텐트 안에 들여 놓을만한 다른 물건이 없는 것 같았다. 사내의 낡은 구두가 제 가슴을 눌러오는 듯한 느낌에 현규는 이내 눈길을 돌렸다.

“점점 더 추워질텐데, 저기서 며칠이나 버틴다구... 구청이며 동네 사람들이 그냥 놔두기나 할런지 모르겠어요”
아내의 쯧쯧은 정자를 지나치고나서도 계속됐다.
“이슬이나마 피하겠다는 사람을 내쫓는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애써 단호하게 말하긴 했지만 현규는 자신의 말이 요즘 자기가 견뎌내는 여느 날처럼 아무런 힘도 싣지 못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제발이지, 튼실한 육신을 더욱 튼실히 하겠다고 어둠이 채 가시지않은 새벽부터 산에 올라와서 헛헛 소리를 질러대는 인간들이 저 사내의 아침잠을 훼방놓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아내의 손을 거치고 보니, 그 어려워 보이던 일들이 손쉽고도 모양있게 치루어졌다. 좌판에 비닐을 깔고 그릇가지들부터 늘어놓았다. 드리워진 깔개 자락에는 손님을 끄는 쪽지들도 붙였다. <아침 운동 뒤에 드시는 따끈한 순두부 한 그릇, 하루의 원기를 보장합니다> <집에서 직접 만든 순두부, 100% 무공해 국산콩 사용> <비지를 포장해 드립니다>... 아, 손님들한테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집에서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순덕스러운 천호시장 아줌마의 손을 빌었다... 아내가 버너의 불을 켜 순두부를 데우는 사이 현규는 물을 길어오기 위해 주전자와 피티 병들을 들고 약수터로 갔다.

건강한 사람, 그래서 더 건강해지려는 사람들이 참 무섭다는 생각은 현규가 약수터에서 새삼 가졌다. 산속의 어둠이 다 가시지않은 시각에 약수터의 그 애기 오줌줄기보다 더 빈약한 물줄기 앞에는 벌써 스무 개가 넘는 물통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그것도 피티 병은 열 개가 되지않고 대부분 석유통 크기의 플라스틱 물통이었다. 나름으로 남들에게 덜 피해를 주겠다고 2리터 짜리 주전자와 피티 병 두 개를 들고 왔던 현규로서는 아연 참담한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시간을 기다린다고 해서 제 차례가 돌아올 성 싶지 않았다. 표주박 하나라면 몰라도 됫짜 주전자를 들고서는 앞선 이에게 차례를 양보 받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맨 앞의 남자는 그사이 플라스틱 물통 두 개를 채웠는데 또 새 물통을 물줄기에 들이밀고 있었다. 아예 바퀴달린 손수레에다 댓개 물통을 싣고 온 이였다. 그는 제 물통에는 대장균 한 마리, 티끝 하나도 묻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헹굼질에도 열성을 부렸다. 마개는 물론 물통의 밑바닥까지 몇 차례씩 씻고 나서야 물을 담았던 것이다. 참을 성 좋은 사람들은 물통은 물통대로 놔두고 근처 숲에 흩어져 헛 둘, 헛 둘, 체조를 했다. 꿀차와 라면을 끓여 파는 30대 남자는 약수터 옆 자리에서 여느 때와 같은 자세로 새벽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규가 궁리 끝에 순두부 장사를 생각해 낸 것도 실은 그 남자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가가 인사라도 건네고 싶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거,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저 위 능마루에서 순두부를 팔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많이 도와 주십시요...

“뒷 사람 생각도 좀 하셔야지...”
물구멍에서 너댓 자리 떨어져 순서를 기다리던, 몸피가 큰 여인네가 마침내 참을 성 없이 한 소리 뇌까렸다. 그녀는 플라스틱 물통 두 개를 양 손에 나눠 쥐고 있었다.
“나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단 말요”
남자가 퉁명스레 한 마디 대꾸하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제쳐 나섰다.
“물통이 한두 개라면 또 몰라, 시상에... 수레로 싣고 와서 혼자 물구멍을 차지하는 법이 어딨어요”
“억울하면 아줌씨도 트럭으로 싣고 오면 되잖소. 아니면 저녁답부터 와서 기다리든가...”
“시상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시네”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
“누가 할 소린데...”

현규는 신새벽부터 싸움구경을 할 마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목청이 높아지기 전에 주전자만 그 자리에 두고 약수터를 벗어났다.
산길을 벗어나 인천 이씨네 무덤들이 있는 곳까지 가는 동안에도 악쓰듯한 남녀의 목청은 등줄기를 쫓아왔다.


“물 길르러 간 양반이 애 하나 키워서 오시는 줄 알았구려. 쯧쯧”
하 어이가 없어서일까. 시간 반만에야 물주전자를 들고오는 남편을 보고도 아내는 퍼쓱 빈 웃음을 날릴 줄 알았다. 그사이 두 차례나 배드민턴 아줌마한테 물을 빌어왔단다. 아무려나, 현규가 물 길러 간 사이에만 순두부 열한 그릇을 판 것이 아내를 그렇게 너그럽게 만든 듯싶었다.


상차림만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던 아내는 밤 열한 시가 다 돼서야 초인종을 눌렀다. 상기된 얼굴, 술냄새가 풍겼다. 애써 내색치 않으려 했는데도 술냄새까지 맡고보니 현규는 더럭 화가 치밀었다.
“뭐 하는거야. 남의 집 가서 이렇게 늦게까지 있어도 돼?”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친구 마누라를 이맘때까지 붙잡고 있은 재민이한테도 섭섭한 마음이 없잖았다.
“난들 있고 싶어서 있었겠수. 나 없으면 안 된다고 형철이 엄마가 하도 붙잡으니까 있었지. 요량껏 음식을 만들었데도 하두들 먹어대니까 남아나는 게 있어야지, 그 양반들 지금까지 버티고 앉아 있었다우. 그리고, 남편 출세해서 이맘때껏 손에 물 한 번 묻혀 본 일이 없는 형철이 엄마가 할 줄 아는 음식이 뭐 있겠수. 이 양반아, 그래서 나두 쉬지도 않고 일했다우. 그리곤 너무 고생했다며 형철이 아빠가 술 한 잔 주시길래 고맙다고 마셨구... 왜, 당신 삐졌수? 늙은 마누라 남의 집 일 보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친구집 보내놓고 보니 불안하고 그럽디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취한 것 같은데 어서 잠이나 자”
평소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음색이 달라지던 아내였다. 턱없이 화를 냈다는 자책감은 뒤늦게 들었다. 초조하게 아내를 기다릴 때만 해도 사실 몇 차례 재민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부끄럽고 민망한 일. 나 자신 어느새 이렇게 초라하게 변해 버렸나 싶은 자기 모멸감은 한지에 물 번지듯이 그렇게 천천히 전신에 끼쳐왔다. 마루에 퍼질고 앉은 아내가 들고온 장 바구니에서 이것저것 물건들을 꺼내면서 혼잣 소리처럼 말했다. 재민이 챙겨 줬을 법한 것들, 말린 옥돔과 미역 타레, 양주병과 오징어축...

“당신, 친구분 하나는 참 잘 뒀더이다. 이것저것 하나라도 나한테 더 못 쥐어줘서 안달을 하시니... 이눔 제주도 옥돔 한 번 봐요, 우리가 언제 이런 거 먹어보고 못봤수. 우리 기태 도시락 반찬 해주면 얼마나 좋아하겠수, 여기 전복도 있수, 지금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놈이라우. 형철이 아빠가... 그래요, 곧 당신한테 전화 한다고 했으니까 받거든, 당신이 고맙다고 그러우...”

현규가 얼른 티비 화면으로 눈길을 돌리고 말았는데도 아내의 취한 음성은 그치질 않았다.
“참, 우리 순두부 아저씨, 나 내려오고 나서 몇 그릇이나 더 팔았수? 오늘 처음 해봤지만 괜찮지요, 그죠? 그런 벌이만 있어도 우리 식구들 굶어죽지는 않겠지요, 그지요? 난 싫어.... 남이 덮고 자던 이불 호청 빨고... 빤스까지 나와... 싫어...”



3.

경찰 둘을 뒤달린 사복 형사가 아침부터 능마루까지 올라와서 별 걸 고치고치 캐물었다. 장사는 언제부터 했느냐, 하루 몇 그릇이나 파느냐, 그리고 어제는 몇 시까지 장사를 했느냐... 현규는 그들이 불법영업 단속을 나온 줄 알았다. 대꾸를 하는데도 절로 진땀이 났다. 이런 때 곁에 아내라도 있어면 훨씬 요긴하련만, 오늘 새벽 현규는 곤히 잠자는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어제 저녁답엔 뭐 했수?”
뜻밖의 질문을 받고서야 이네들이 영업단속을 나온 위인들이 아님을 눈치챘다.
“테레비 보다가 마누라 하고 잠 잤지 하긴 뭘 했겠수”
제법 자신이 생겨 그 자들의 말투를 흉내내 대꾸를 해보기도 했는데 좌판를 떠나기 직전에 사복이 불쑥 던진 한 마디에는 아무래도 속이 켕겼다.
“그건 그렇구... 이런 데서 이런 장사해도 괜찮대요? 구청에서?”
“범인 잡으러 왔으면 범인이나 잡지 왠 쓸데없는 참견이람”
경찰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 차지한 이는 그제께 봤던 그 노인네였다. 손수 양동이를 들어주던 고마운 노인. 반가운 마음에 후딱 순두부를 챙겼는데 노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서, 나도 돈내고 사먹을 손님이니까 김이 폭폭 나도록 실하게 데워봐요”
뜸을 둬서 노인이 덧붙여 말했다.
“순두부라.... 생각 잘 했어요. 물어 보지는 못했지만 실은 나도 무슨 장산가 궁금했었거든. 암, 날 차가울 땐 이런 게 제격이지...”
입을 쩝쩝 하면서 노인은 정말 맛있게도 먹었다. 그리곤 끙하니 트림을 한 번 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못된 놈들 같으니라구...”

간밤에 산에서 강간 사건이 있었다는 소리는 노인네한테서 처음 들었다. 밤늦은 시각에 학원을 다녀오던 한 여중생이 못된 놈들에게 붙잡여 산 속으로 끌려왔다는 것이었다.
“밤 지나고 나면 여기저기 풀섶마다 나뒹구는 것이 소줏병이요 담배꽁촌데 별 해괴한 놈들이 없을라구, 쫙 깔린 것이 순사라지만 그놈들이 쉽게 잡힐까. 헌데도 저 자들은 만만한 것이 가진 것 없는 놈이라고 보따리 하나밖에 없는 떠돌이 놈부터 잡아가요”
경찰이 정자에 텐트를 치고 자는 사내를 제일 용의자로 지목해서 벌써 경찰서로 끌고 갔다는 말이었다.
“아이가 아무리 어리고 혼겁했다 해도 한 놈이 그랬는지 셋 놈이 그랬는지 그걸 모를까. 그리고 그놈들이 열일 곱 살 쳐먹었는지 서른 살 쳐먹었는지 그걸 구분하지 못할라구. 벌써 그 애가 다 불었다는데도 굳이 그 떠돌이를 끌고 가요 허 참”

현규는 갑자기 손가락 마디 마다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국물만 남은 두부그릇조차도 제대로 손에 쥐질 못했다. 눈 앞에서는 자꾸만 황토묻은 낡은 구두짝이 어른거렸다.
장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녀! 마다하는데도 노인는 완력을 쓰듯 굳이 지폐를 찔러주고 횡하니 등을 돌렸다. 현규가 저만치 걸어가는 노인을 뒤쫓아 가서 비지 한 봉지를 쥐어줬는데 노인도 그 성의만큼은 사양치를 않았다.

일요일에는 낮동안에도 산책객의 내왕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규는 열 시 조금 넘어 판을 걷었다. 손님들한테 좋은 낯을 지어보일 기분이 아니었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병아리처럼 학교 교정으로 모여드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녀들의 팔락이는 치마자락, 하얀 종아리 그리고 황토 묻은 구두.

노인의 말대로, 정자마루에는 주인을 잃은 파란 텐트가 허량한 품세로 서 있었다. 출입구의 지퍼가 벗겨져 있어서 그 속의 널브러진 침낭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몇 켤레의 양말짝들은 그대로 난간에 걸려 있는데 그 뒷축 닳은 구두는 보이질 않았다. 멀리서 보면 텐트는 바람에 쓸린 비닐부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직도 잠을 자고 있으리라 여겼던 아내는 집을 비우고 없었다. 현규는 그릇가지들을 덮은 식탁의 상보자기를 살핀 다음 냉장고 문에 붙여놓은 쪽지를 읽었다.
<형철이 집에 가요. 아무래도 설거지일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애요. 밥상 차려 놨으니까 드세요. 미순>
몇 년만에 보는 아내의 이름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