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출처>: 문화재청
*포석정지 |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면적은 7,432㎡이다. 역대 왕들이 전복 모양으로 생긴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술잔을 띄워 놓고 시를 읊으며 연회를 하던 장소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음이 알려지고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됨에 따라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원래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며, 이 물을 받는 원형 석조(石槽)가 있어 이곳에서 구불구불한 모양의 곡석(曲石)이 타원 모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배수구의 마무리가 분명하지 않다. 오랜 세월을 거쳐온데다가 일제강점기에 임의로 보수하여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이 많이 파손되었다. 이러한 석구는 중국 동진(東晉) 시대부터 있었다 하나 대개 자연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완전히 인공적인 점이 그 특색이다.
[출처] 네이버 백과
일반 설명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전문설명
포석정지(鮑石亭址)는 경주 남산(南山) 서쪽 계곡의 포석계(鮑石溪)의 계류(溪流)가에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랑(處容郞) 망해사조(望海寺條)에 보면 「헌강왕(憲康王)이 포석금(鮑石今)에 놀러나와 남산신(南山神)의 춤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했다」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경애왕(景哀王) 4년(927) 11월에 왕이 포석정에 나가서 잔치를 하고 놀다가 후백제 견훤(甄萱)의 기습을 받아 왕은 죽고 왕비와 신하들이 모두 함몰되는 비극의 기사가 실려있다.
포석정지(鮑石亭址)는 신라의 이궁(離宮)에 있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배거(流盃渠)의 유적이다. 유상 곡수연의 시초는 중국 동진시대(東晋時代)까지 올라간다. 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에 중국(中國) 절강성(浙江省) 남서에 있는 회계산(會稽山) 북쪽 난정(蘭亭)에 왕희지(王羲之) 등 42인(人)의 현사(賢士)들이 모여 흐르는 개울에 몸을 깨끗이 씻고 결제사(潔祭祀)를 올리고 개울 위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詩) 한수를 지어 읊는 놀이를 하였다. 이때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3잔을 마시었다. 이 시회(詩會)의 서문이 유명한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이다. 이런 고사(故事)를 본따서 동양(東洋)의 왕궁(王宮)에는 유상곡수연의 유배거(流盃渠)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유배거(流盃渠)는 북경(北京)의 고궁(古宮)에도 있고 일본(日本) 나라시(奈良市) 평성궁(平城宮) 유적(遺蹟)에도 있으며 조선(朝鮮)의 왕궁(王宮)인 창덕궁(昌德宮) 옥류천(玉流川)의 소요암에도 있다.
경주 포석정지(鮑石亭址)의 유배거(流盃渠)는 굴곡진 타원형인데 긴 지름이 6.53m, 짧은 지름이 4.76m이며 타원형 수로(水路)의 구배차는 5.9cm이다. 수로(水路)의 너비는 약 30cm, 깊이는 20cm이며 타원형의 수로의 길이는 약 22m에 이른다. 이 유배거(流盃渠)에 물을 담아 술잔을 띄워본 결과 술잔의 크기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고, 술잔 속에 술을 담은 양에 따라 다르며, 절묘(絶妙)한 수로의 굴곡진 곳에서 물이 돌면서 흐르기 때문에 타원형의 수로를 술잔이 흐르는 시간은 약 10여분이 걸리었다. 이 시간이면 오언시(五言詩)나 칠언시(七言詩) 한 수는 쓸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유배거(流盃渠)의 머리쪽에 큰 느티나무 뿌리가 수입구(水入口) 쪽을 밀어 올려서 높아진 상태이며 흘러 나가는 배수구 쪽은 포석계의 개울에 유실되면서 급속히 낮아져 있다. 포석정지(鮑石亭址)의 전복같이 된 유배거(流盃渠)는 그간에 보수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유배거(流盃渠)에 인수(引水)한 물은 남산 포석계의 개울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여 대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상곡수연을 하는 장소의 풍치는 험한 산과 무성한 대숲과 맑은 개울이 여울을 이루는 그런 경승지이다. 포석정지의 유적은 「어무상심무」라는 신라 춤이 생겨난 현장이며 시회(詩會)를 하는 청유(淸遊)의 장소인 것이다. 포석정은 유상곡수연을 하던 놀이공간이 아닌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이다.
[신라왕실의 제의와 연회지]로서의 포석정지
-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있으며 화강석으로 만든 수구(水溝)의 길이는 약 6m이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라는 신라춤이 만들어졌다고 전해 준다.
경애왕(景哀王) 4년(927) 왕이 후백제 견훤(甄萱)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경주 포석정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guide.gyeongju.go.kr%2Fccms%2Fresource%2F34%2F13134_image2_1.jpg)
| 출처: 문화재청과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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