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동 네 |
마을굿 명칭 |
당종류·이름 |
신격 |
치성형태 |
치성일 |
향유주체들의 생업 |
1 |
한남동 |
큰한강 부군당굿 |
·부군당 ·용궁당 |
·부군님내외 및 삼불제석 등 ·용왕님내외 |
굿, 고사(굿식) |
정월1일 |
경강상인 |
2 |
한남동 |
작은한강 부군당굿 |
부군당 |
부군님내외,삼불제석,산신,물탕할머니 등 10神 |
굿, 고사(굿식) |
정월1일 |
|
3 |
보광동 |
부군당 (명화전) |
부군님(김유신장군)및 삼불제석,산신 등 15분 |
굿(굿+祭), 고사(굿+祭) |
정월1일 |
객주여각(땟목·목재위탁업), 짐꾼 | |
4 |
산천동 |
부군당 |
부군님내외 삼불제석 |
굿과 고사 (최근 유교식고사) |
동짓달택일→3월택일→10월택일(現) |
||
5 |
동빙고동 |
부군당2 (윗당, 아랫당) |
·큰마나님(윗당) 단군내외분 ·작은마나님(하당) 단군내외분 삼불제석,군웅등 |
굿, 고사(祭식) |
정월1일→ 3月15日(現) |
얼음채취업, 객주여각(곡물위탁), 정미소, 뱃사람. 목로주점 | |
6 |
서빙고동 |
치성 드린다 |
부군당 |
·부군님내외(이성계와 강씨부인), 삼불제석 |
굿과 고사 (고사는 유교식) |
정월1일 (대동굿은 택일) |
얼음채취업 |
7 |
청암동 |
·대동굿 ·고사치성 |
부군당 |
부군님내외 및 삼불제석등12분 |
굿, 고사 (고사=유교식+굿) |
정월15일 →10월1일 |
|
8 |
용문동 |
남이장군 대제 |
남이장군사당 (부군당) |
남이장군, 부군대감내외, 삼불제석 등10여 분 |
굿, 유교식제례 (祭식) |
4월1일, 7월1일, 10월1일 |
|
9 |
금호동 |
대동굿 (부군당굿) |
부군당 |
부군님내외.산신 삼불제석,오방신 |
굿(10월) 고사(2월) |
2월1일 10월1일 |
솥 만드는 장인, 나루터사공 등 |
10 |
옥수동 |
부군당 (큰형님당) |
부군님내외, 도당할머니.산신 |
굿과 고사(굿식) |
10월2일 |
||
11 |
옥수2동 (두모리) |
부군당 |
부군님내외, 삼불제석, 산신 칠성, 일월성신 등 |
굿, 고사 |
10월3일 |
뗏목관계 | |
12 |
보광동 (둔지미) |
대동굿(3년) 춘계치성 |
무후묘 (부군당) |
제갈공명(부군님) 산신, 당할머니 |
굿(3년) 고사(祭식) |
정월1일 3월1일 10월1일 |
중국상인 |
13 |
창전동 (밤섬) |
·부군당굿 ·진지치성 |
부군당 |
부군님내외 삼불제석, 군웅 |
굿 고사(굿식) |
정월2일 |
조선업, 조선공 |
14 |
당인리 |
부군당치성 |
부군당 |
부군님내외 산신, 삼불제석, 용궁용왕 등 12 |
굿 고사(비손) |
10월1일 |
조기잡이배 창고업, 뱃일, 장사 |
15 |
창전동 |
와우산 대동제 |
·산신당 ·공민왕사당 (부군당) |
공민왕,노국공주 (부군님내외) 삼불제석, 최영장군, 마부 |
고사(祭식) |
10월1일 |
창고지기 세곡선(선주·선원 |
16 |
마포 |
부군대동굿 대동고사 |
·불당 ·서낭당 |
대신할머니, 화주장군3, 산신, 삼불제석 칠성, 용왕 등 |
굿(3년) 고사 |
5월20일(굿) 10월20일 |
어물행상 객주여각 뱃사람 |
17 |
이태원 |
부군당굿 |
부군당 서낭당 |
부군님내외,산신 삼불제석, 군웅 걸립신 등 12신 |
굿(굿+祭) 고사(祭) |
1,4,7,10월 택일 → 4월1일,10월1일 |
|
18 |
성산동 |
대동치성 |
금성당 |
금성왕, 토지지신 오악지신 |
고사(祭) |
10월1일 |
농사 |
이들 지역의 당들은 모두 ‘부군당’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따라서 당에서 받들어 모시는 신령님도 부군님이다. 대부분 부군할머니, 부군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부군님들이 주신이다. 당의 이름이 다른 경우도 발견된다. 성산동의 금성당, 창전동의 공민왕사당, 보광동(둔지미)의 무후묘, 용문동 남이장군사당, 보광동의 명화전이 그러하다. 모두들 인물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금성당은 금성대군, 공민왕사당은 공민왕, 무후묘는 제갈공명, 용문동은 남이장군, 명화전은 김유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당들은 부군당이라고도 불린다. 이들 인물신들은 바로 부군님으로 인식되어 받들어지고 있다. 부군님은 부군님이되 부군님으로 모시는 신령님이 특별한 인물신일 경우 그 인물신을 기리는 또 다른 이름이 당의 이름으로 명명되어 불리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군당이라고 하면서도 인물신을 부군님으로 인식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동빙고동은 2개의 부군당이 있었으며, 부군님들은 단군과 그의 두 부인으로 되어 있다. 서빙고동은 부군당이면서 부군님은 이성계와 강씨부인으로 되어 있다. 이 지역 부군당들의 부군님들이 인격신이 많다는 특성을 보이면서도 한결같이 ‘부군님=인격신’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특성에 있어서는 한결같다.
이 권역의 부군당에서는 부군님만 모시는 것이 아니라 10여분의 신령님을 함께 모신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삼불제석, 용왕, 군웅, 칠성, 산신, 오방신 등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용왕의 존재, 그리고 삼불제석의 존재가 부각되어 있다. 당인리(용궁부인), 큰 한강부군당(용왕), 작은 한강부군당(물탕할머니, 용장군님), 마포(용왕), 청암동(용왕)이 용왕을 모시고 있다. 큰 한강부군당의 경우는 용궁당이 따로 있어 용왕을 크게 모셨음을 알 수 있다. 한강이남 지역의 영등포본동과 노량진본동에는 ‘용궁당’이라 불리는 독자적이 당이 있었다. 명화전의 경우도 상당 하당 축문이 전하는데 축문에 의할 것 같으면, 상당은 천룡존신(天龍尊神)이고 하당은 당산지신(堂山地神)을 모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강변의 모든 부군당들에서 용왕이 모셔진 것은 아니지만 용왕에 대한 신심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용왕의 존재와 더불어 크게 부각되는 신격은 삼불제석이다. 삼불제석은 모든 부군당에서 부군님과 더불어 모셔지고 있다. 이 삼불제석에 대한 신심은 부군님 못잖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삼불제석이 자리하는 위치에서 드러나는데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부군님의 좌측 편(부군님이 참배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기준으로 하여) 첫 자리에 모셔지고 있다. 큰한강부군당의 경우 주신을 모시는 중앙 전면에 3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데 부군님 내외와 나란히 삼불제석이 좌측 편에 자리하고 있어 그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서빙고동의 경우 부군당 안에는 세 분만을 신령으로 모시는데 이성계와 강씨 부인, 그리고 삼불제석이다. 창전동의 공민왕사당의 경우도 공민왕과 노국공주, 그리고 삼불제석이 모셔진다. 그 외 한 분이 더 모셔지는데 최영장군이다. 부군당에 모셔지는 신격의 숫자와 위치, 그리고 그 구성에서 드러나듯 삼불제석은 부군당과 부군신앙에 있어서 부군님 못지않은 중요성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 건너편에 있는 당산동 부군당의 경우 치성을 드릴 때에 부군님과 더불어 삼불제석에 대한 신심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평소에 옥수를 올릴 때는 부군님과 삼불제석 그리고 군웅님께 올리며, 아무리 경제가 힘든 상황이라 하여도 부군님 시루와 삼불제석 시루는 반드시 쪄야 한다는 원칙이 견지되었으니, 풍족한 상황인 현재까지도 이 원칙에 대한 이야기가 강조되어 전해진다. 삼불제석의 중요성은 거의 부군님의 존재에 비견된다. 삼불제석의 실체는 부군당 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다.
용왕, 삼불제석과 더불어 군웅님에 대한 신심도 일부 마을에서 발견된다. 동빙고동, 이태원동, 밤섬에서 군웅님이 발견된다. 특히, 밤섬의 경우 군웅님의 화분이 독특한데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지 않고, 8도의 귀한 식물이나 바위로 형상화 되어 있다. 이들 마을에서는 군웅님이 아주 무서운 분으로 인식되어 있다.
부군당이라고 부르지 않는 당과 마을도 발견된다. 불당이라는 존재이다. 현존하는 불당으로는 마포불당이 건재하며, 바로 이웃한 대흥동과 용강동에서 불당의 흔적이 발견된다. 모두 삼개나루 영역권에 분포한 마을들이다. 불당의 생성 이유는 화재방지에 있었다. 그 생성시기가 100여년을 조금 넘어가는 것으로 보아 마포 일원에 형성된 상권의 활성화가 가져다준 건물의 밀집으로 인해 잦은 화재가 발생함으로서 이의 예방을 통해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바람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판단된다. 이들 불당은 부군당이라는 명칭과는 무관하게 불당이라는 독자적인 명칭으로 불린다는 특성을 보이나 청암동의 부군당을 불당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부군당문화권의 생산토대와 유통방식이 그대로 견지되면서 시간이 많이 흘렀다면 부군당으로도 인식되었을 개연성은 남아 있다.
치성의례와 방식에 대해 살펴보면, 철저히 굿과 굿식에 입각한 고사방식으로 이뤄진다는 특성을 보인다. 현재도 굿이 왕성하게 이뤄지는 마을의 경우, 부득이 경제적 사정 등으로 굿을 할 수 없어 고사로 대체할 경우라도 단골무당을 불러 무당이 주도하는 굿식의 고사로 치러낸다. 12거리를 다 하되 약식으로 간단하게 한다는 차이점과 치성물을 간소하게 차린다는 차이점만 발견된다. 현재 유교식의 치성의례가 도입되어 있는 마을에서도 대동굿을 왕성하게 했던 그 시절에는 유교식의 제례의식이 침범하지 못했을 것이란 강한 추측을 낳게 한다. 당인리의 경우, 굿이 단절된 지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식 제례를 도입하지 않고 비손식의 고사만으로도 훌륭하게 치러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위와 같은 추론이 유추 가능해진다.
치성의례가 치러지는 날짜를 보면, 정월, 2월, 3월, 4월, 7월, 10월에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분포 빈도가 높은 시기가 정월, 4월 10월이다. 그 중에서도 정월달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다.
3월의 경우는 근래에 설정된 경우뿐이다. 무후묘의 경우 정월달에 고사를 지내다 임의로 3월로 바꿨으나 정월초하루를 잊고 넘어갈 수가 없어 몇몇 사람만이라도 진지를 차려 올리고 있다. 동빙고동의 경우 정월초하루에서 임의로 단군이 돌아가신 어천절로 알려진 3월15일로 바꾼 것은 2000년도부터다. 따라서 3월 달 치성은 본래 이 지역 부군당 치성시기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4월 치성의 경우 위에서 소개한 18개의 마을 중 용문동 과 이태원에서 발견된다. 지금은 단절되었지만 마포 도화동부군당의 경우 치성일이 4월15일이었다. 도화동을 제외한 용문동과 이태원의 경우 일년에 여러 번 치성을 드리는데 4월 치성은 그 일부이다. 그러나 그 치성 횟수가 줄어들면서 4월과 10월로 압축된다는 사실에서 4월의 중요성을 배제할 수 없다.
7월의 경우는 용문동과 이태원에서만 발견된다. 단절된 마을로서는 대흥동(정월 굿, 7월 고사)에서 발견된다. 그에 비해 10월의 경우는 이태원동, 성산동, 마포, 당인리, 보광동(무후묘), 옥수동, 금호동, 용문동, 산천동 등에서 골고루 나타난다. 특히, 10월 치성의례는 현대로 가까워질수록 늘어난다는 특성을 보인다. 산천동(동짓달 →3월 →10월)이 그러하며, 청암동(정월 →10월)이 그러하다. 현재 10월에 치성의례가 행해지는 마을은 농사가 일부 행해졌던 마을이었다는 특성도 유념할 대목이다.
정월의 경우 과거의 사례를 포함하여 18마을 중 8곳에서 대동치성이 치러졌다. 마을굿이 단절된 마을이지만 정월에 치성이 이뤄졌던 동네도 많았는데 대흥동 불당은 정월초하루, 신수동 도당(복개당; 세종대왕을 주신으로 모셨음)과 용강동 불당은 정월 15일이었으며, 강 건너편의 흑석1동 부군당은 정월14~16일 3일간 치러졌다. 흑석동의 경우 15일에는 풍물굿도 참여하였다.
정월이라 하더라도 대보름보다는 정월 초하루가 대부분이며 2일(밤섬)도 발견된다. 대부분 정월 초에 집중되어 있어 바닷가 마을굿의 특성과 일치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정월에 치성의례가 분포한 마을로서 일 년에 대동치성이 여러 번 치러질 경우, 굿은 반드시 정월에 한다는 원칙에 가까운 현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강변의 부군당굿은 ‘정월 초’의 ‘대동굿’ 의례가 그 중심에 있으며, 이런 점들로 보아 부군당 문화권은 원래 정월 초순에 치러지는 바닷가 마을굿에서 출발하여 형성된 문화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판단이다.
이 추론에 설득력을 더하게 하는 것은 향유계급과 생업에서 드러난다. 대부분 바다나 물과 관련이 있는 생업에 종사하였다. 고기잡이, 뱃길을 이용한 운송업(쌀, 소금, 목재, 땟목 등) 에 관계하는 뱃사람, 어물의 위탁판매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객주·여각의 운영자나 그에 연관된 일꾼들, 짐꾼, 정미소 등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부군당을 중심으로 살아간 이 지역 마을들의 구성원들이거나 내방객들이었다. 이들 마을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센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용문동의 경우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이는 마포나루가 바로 옆이고, 한강을 건너는 뱃길이 용산에 있었기 때문에 뱃사람들을 위시해 힘센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란 추론을 낳게 한다.
②한강이남 강변권 (88올림픽대로 변)
번 호 |
동네 |
마을굿 명칭 |
당 종류 및 이름 |
신격 |
치성형태 |
치성일 |
향유주체들의 생업 |
1 |
신길3동 (신기리) |
도당제 |
도당 |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
굿 → 고사(祭) |
1월3일, 7월7일(舊) → 10월3일 |
뱃사람 농사, 과수 |
2 |
염창동 |
대동굿, 고사 |
도당 |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
굿, 고사(굿식) |
7월1일 10월1일 |
뱃사람, 옹기장 |
3 |
염창동 (증미) |
대동산고사 |
도당 |
산신 |
고사(비손) |
10월1일 |
뱃사람 |
4 |
양평동 (선유도) |
당고사지낸다 |
도당 |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
고사(비손) |
10월1일 |
뱃사람 |
5 |
영등포 |
상산 (부군당) |
대황님, 군웅할아버지, 군웅할머니, 대신할머니, 마부 등 <터주가리> |
굿, 고사(굿식) |
7월1일 |
과거시험생 나룻배사공 농사. | |
6 |
당산동 |
당산부군당제(대동굿) |
부군당 |
부군님내외 삼불제석,산신 대동할아버지, 칠성, 군웅 등 |
굿(굿+祭) 고사(祭+굿식) |
7월1일(고사) 10월1일(굿) |
농사 |
7 |
신길2동 (방아곳지) |
대동굿 |
부군당 |
부군할아버지 부군할머니, 군웅할머니 삼불성님 |
굿, 고사(굿식) |
4월1일 7월1일 10월3일 |
뱃사람 농사 |
같은 한강을 공유하는 지역이지만 이 지역은 한양 도성과 바로 맞닿아 있는 성저십리권의 강 건너편 마을 부군당굿과는 약간의 차별성을 보인다. 당의 명칭이 부군당이라 부르는 지역과 도당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대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신격에 있어서도 부군님과 더불어 도당님이 주요한 신격으로 받들어진다. 영등포 상산부군당의 경우는 주신이 군웅할아버지·할머니이다. 부군당임에도 불구하고 주신은 부군님이 아니고 군웅님이라는 사실은 강 건너편 부군당과는 차별성을 보이게 하는 요인들이다. 염창동의 경우도 도당이며, 도당할아버지·할머니가 주신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지역의 무가를 들어보면 부군과 도당을 함께 인식하거나 대등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햇곡맞이 신곡자랑 받으시고
원풀고 한풀어 원한을 풉소사
기미년 모두다가 상산호구 본향호구
도당호구 부군호구 서천받아 용신호구
도당호구 부군호구 서천받아 용신호구
이는 이 지역이 배후에 큰 농업생산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로 보인다. 염창동과 신길동의 경우 한강과 안양천이라는 강줄기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등포 일원의 농사 권에 직접 위치하기도 한다. 염창동의 경우 증미동과 더불어 바로 농토와 연결되며, 배후의 등촌동, 화곡동은 농사를 짓는 농사권이며, 이들 마을의 당은 도당으로서 도당굿을 하던 마을들이다. 한양으로 건너가는 나루의 하나였던 상산부군당의 경우, 과거에는 당집 대신에 2~3미터 높이의 거대한 터주가리가 있었으며, 이를 허물고 당집을 지은 이후에도 주신인 군웅님 화분 밑에 작은 터주가리를 함께 모시고 있는 사실에서 농사와의 상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치성 일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주로 치성일이 10월과 7월에 집중되어 있다. 7월에 치성을 올리는 것은
농사가 거의 끝난 시기로서 일 년 계획을 짰던 자리(대동회의)를 마련하기 위해서
라는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대치동에서 나온 이야기로서 대치동은 배추, 무, 참외, 오이 등 한양성중에서 필요로 하는 근교농업을 주로 하던 마을이었다. 7월 초하루에 돼지 2~3마리를 잡고 떡도 한 다음에 마을 우물을 청소하고 마을 제당인 영산단에 치성을 올린 다음에 마을 대동회의를 열었다. 이 7월 치성의례는 한양을 위한 근교농업을 주로 하는 농사권이라 하더라도 한강이북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한강이남 지역에서 발견되며 주로 한강변에 위치하면서도 강변문화와 농사가 겸비된 마을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특성을 보인다.
7월 1일이라는 치성일은 7월7석과의 상관성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남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7월7석에 마을 우물을 청소하고 진서턱을 먹던 풍습이 전라남도 여수반도 일원에서 행해진다. 이 시기는 그 지역의 농사작업으로 볼 때, 세벌매기도 끝난 상태로서 실질적으로는 그 해 농사가 끝나게 됨으로 7월7석에 맞춰 하루 쉬면서 한 숨 돌리게 한 날이기도 하다. 이날 노는데 필요한 음식은 동네의 소동패에 가입할 나이가 된 7~8세 남자 아이들에게서 받는 진서턱이다. 그 나이에 접어든 아이들을 둔 집에서는 직접 빚은 술 한 동이와 그 지역 바닷가에서 나는 우무가사리로 만든 묵을 썰어 시원한 콩물에 넣은 우무채콩물을 한 동이씩 내온다. 이 콩물과 술을 먹고 풍물을 치면서 하루 쉬는 날이 7월7석의 진서턱이다.
진서턱과 88올림픽대로변의 7월1일 마을굿과의 공통점은 바닷가 문화와 농사가 겸비된 마을로서 힘든 농사일이 실질적으로 끝난 시기에 맞춰 놀이판과 대동회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점, 먼저 마을의 공동우물을 치우고 난 다음 대동치성이나 놀이판을 벌인다는 점이다. 7월7일에 연원을 둘 수 있는 잔영이 신기리에서 발견된다. 원래 마을 도당에 대한 치성이 1월3일과 7월7일에 치러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기리는 원래 안양천과 연결된 십자강변에 위치한 포구로서 서해안의 소금·해물·새우젓 등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포구의 흔적을 찾기 힘든 대신 농사와 과수 재배가 주를 이루는 농촌으로 바뀌었다가 서울 외곽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곳으로 변화하였다.
농사권이라 하더라도 주된 향유계층이 뱃사람들이거나 바다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계층이라는 점에서는 역시 강 건너편의 부군당문화권과 일치하고 있다. 선유도나 흑석동의 부군당은 뱃사람들이 주된 향유계층이었다. 특히, 한양으로 향하는 주요 나루터에 위치하는 마을과 당(堂)인 경우이거나 한양과 밀접한 영향관계에 있었던 마을일 경우 부군당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노량진부군당, 흑석동 부군당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방아곳지부군당, 상산부군당, 그리고 당산동부군당은 영등포 3대부군당으로 일컬어지던 곳이다.
이 지역은 농업에 기반을 둔 도당 · 부군당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으나, 성세를 이뤘을 때에는 무당굿을 통한 마을 대동굿이 행해졌다는 점, 한강의 바다문화와 물류유통을 공유하고 있어 향유계급과 계층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 한양과의 직접적인 상관성을 갖고 있는 마을에서는 부군당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는 점에 입각하여 현재 강변북로 변에 위치한 한강변의 부군당굿과 같은 문화권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양쪽 한강변의 마을굿을 종합해 보면, 금성당의 생성배경을 살펴보면서 확인한 바와 같이 부군당과 그 문화가 한강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그 향유주체는 바다와 한강의 물류유통에 관여하는 뱃사람이나 상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 부군당굿을 처음 정착시킨 실체는 나주금성을 중심으로 하여 활약하던 고려시대의 해양세력으로 보이며, 그 문화의 전통은 경강상인들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는 조선 후기까지도 지속된 것으로 보았다. 이들의 실체와 문화가 한강유역의 한양문화를 형성시킨 한 축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이 가능하도록 중심을 잡아준 문화적 장치가 부군당과 부군당굿으로 판단된다.
부군당은 그 치성방식과 놀이방식이 무굿을 기저로 하고 있다는 특성을 확인하였는데, 그 무굿의 내용과 형식은 개성 덕물산에 본향을 둔 한양무당들의 것이었다. 한남동을 기준으로 하여 하류 쪽은 구파발본의 영향권으로 보여 지며, 그 상류 쪽으로는 왕십리·행당동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각심절본 영향권으로 보여 진다. 한강의 남쪽 강변의 대동굿은 노들본의 영향권으로 볼 수 있다.
한강남부에 해당하는 당인리부군당굿의 경우 구한말에 서대문구 구파발에서 큰 무당으로 활약하던 김복만이라는 만신을 불러 굿을 했었다. 서강 대흥동 출신의 만신으로서 구파발 당주집으로 시집와 나라굿을 하며 명성을 얻어 큰 부자가 된 무당이었다. 이 무당은 당인리 발전소를 지을 때도 굿을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구파발 복만이 뒤만 따라다니면 산다”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으며 구파발 사람치고 그녀의 장리쌀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한강북부에 해당하는 금호동 무쇠막부군당의 경우 당주가 왕십리에서 활약하는 김유감만신이었다. 현재 큰한강부군당의 당주무당은 광나루평양집이다.
이처럼 한강변의 부군당굿은 나주금성을 중심으로 한 해양문화의 바탕에다 고려 개성의 덕물산에 근원을 둔 한양굿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결과물로서 한강변만의 문화가 아니라 조선시대가 만들어낸 한양만의 독특한 민중문화라고 할 수 있다.
(2)근교농업이 활발했던 평야지대의 도당굿
한강변의 부군당문화권과 더불어 한양 마을굿의 주요한 한 축을 이루는 것이 농사를 기반으로 한 평야지대의 도당굿 문화권이다. 그러나 이 문화권은 크게 3개의 문화권으로 다시 나눠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전반을 통하여 한양 성중에서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직접 생산하여 공급하였던 공급처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던 한강이북 평야지대의 ①성저십리권, 한강 이남에 분포하는 농사권으로서 나루를 통한 뱃길로 생산물을 한양 성내로 공급하였던 ②강남권,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직접적인 상관성이 깊지 않았으나 해방이후 서울로 편입되면서 서울의 마을굿 지역이 된 ③영등포권이 그러하다. 그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성저십리권(한강이북)
번 호 |
동네 |
마을굿 명칭 |
당 종류 및 이름 |
신격 |
치성형태 |
치성일 |
향유주체들의 생업 |
1 |
보문동 |
동망산신제 |
동망봉 산신각 |
산신 |
祭(유교식) |
2월1일 10월초 |
보문시장상인 채소장수 등 |
2 |
수유리 |
부군당굿 |
부군당 |
부군님 |
굿(3년) 고사 |
굿(3월초) 고사(10월초) |
농사 |
3 |
전농동 |
대동치성 |
·부강전(부군당) ·서낭당3 |
조반선생내외(부군님내외), 삼불제석,서낭(할머니,군웅,터주) 등 12神 |
굿 고사(祭) |
3월초 10월초 |
농사 |
4 |
답십리 |
도당굿 |
·도당 ·개비대감 <터주> |
용마·백마장군 고구려초기장군 군웅, 깨비대감 |
굿, 고사(비손) |
10월1일 |
농사 |
5 |
상봉동 중화동 신내동 |
·도당굿 (굿치성) ·소치성 (牛치성) |
·도당 ·서낭당 |
산할머니 (미륵할머니) 도당할머니 도당할아버지 |
굿 |
3월3일(굿) 6월초(牛치성) |
농사 |
6 |
행당동 |
대동치성 |
·살군당 (아기씨당) |
아기씨, 산신, 삼불제석,부군님내외 등 7神 |
굿, 고사치성 |
4월15일 10월초 |
근교농업(미나리, 배추 등) |
7 |
사근동 |
대동치성 |
·남이장군사당 ·산제당 |
남이장군, 산신, 좌·우장 등 |
고사(비손) |
10월1일 |
농사 |
8 |
방산동 |
성제묘 |
관운장내외분 등 10神 |
祭(유교식) |
10월19일 |
||
9 |
능동 |
도당고사 잡수신다. |
·도당 ·서낭당 |
도당할머니 도당할아버지 |
고사(祭) |
2월1일 10월1일 |
논농사 근교농업(채소, 조) |
10 |
공릉1동 |
도당굿 대동치성 |
·산신당 ·군웅나무 (도당) ·서낭당 |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군웅, 산신, 서낭 |
굿 고사(굿식) |
논농사 근교농업 (파, 배추) 과수(배)농 | |
11 |
중계동 (군웅당) |
도당굿 산제 |
·도당 ·산제당 <터주가리> |
군웅할아버지, 군웅할머니 |
9월14일(도당굿) 10월1일 (산제) |
논농사 | |
12 |
회기동 |
산치성 |
산제당 |
산신 |
고사(祭) |
10월1일 |
농사 |
13 |
휘경동 |
산치성 |
제당 |
산신 |
제(유교식) |
10월3일 (舊, 택일) |
농사 |
14 |
응봉동 |
·참외치성 |
부군당 |
부군할아버지 부군할머니 |
굿, 고사(祭) |
10월1일(굿) 참외날때 |
참외농사 |
15 |
묵동 |
·도당굿 (산치성) |
도당 서낭당 |
봉화산할머니 |
굿, 고사(비손) |
1월1~3사이에 택일 7월15일 |
과수(배) |
16 |
종암동 |
산치성잡순다 (산치성제) |
산제당 |
산신 |
고사(祭) |
10월1일 |
논농사 |
17 |
석관동 |
도당제 |
도당 |
도당할머니 |
굿 고사(祭) |
10월1일 |
농사 |
우선 이 지역 마을의 당을 살펴보면, 도당, 부군당, 산신당(산제당)이 골고루 보인다. 이 지역에서 현존하는 마을굿 전승 마을 17개 중에서 각 당들의 분포수와 비율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당의 형태 |
도당 |
터주(산제당) + 도당 |
군웅(도당) + 산신 |
산신 |
부군당 |
기타 |
합계 |
개수 |
4 |
2 |
1 |
5 |
3 |
2 |
17 |
비율 |
24% |
12% |
6% |
28% |
18% |
12% |
100% |
이 통계를 통해 도당과 산신당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도당과 산신당이 함께 구성되어 있는 마을도 3개나 된다. 이 경우일 지라도 그 중심이 도당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릉동의 경우나 중계동의 경우, 그리고 답십리의 경우에도 주신이 도당할아버지거와 도당할머니이며, 도당님으로 인식되는 군웅임이 드러나고 있어 확인되는 사실이다. 결국 산제당까지 결합된 마을까지 포함하면 도당은 총 7개가 됨으로서 41%의 구성 비율을 보이게 되어 이 지역 마을굿의 대표적인 유형임이 드러난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부군당 계열이 4개 마을(24%)로서 무시할 수 없는 구성 비율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군당이 있는 응봉동, 전농동, 수유리, 그리고 행당동의 경우, 모시는 신격은 한강변의 부군당과 공통점을 보이고 있으나 그 생산토대는 바다나 물과는 상관없이 농사권에 분포한다는 차별성을 보인다. 행당동 아기씨당의 경우 터주가리를 모신다. 치성일도 3월과 10월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10월은 한강변에서도 주요한 치성일이지만 3월은 한강변의 치성일과는 무관한 시기임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오히려 산신제를 지내는 북한산 권역의 치성일과 일치하고 있다. 10월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농사권의 대표적인 치성일로 볼 때, 이 역시 바다나 강과는 무관한 치성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부군당은 그 향유층이나 생산물이 농사권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도당굿 문화권으로 동화되거나 변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산신제만을 지내는 마을이라 하더라도 그 생산기반은 주로 농업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문동, 휘경동, 회기동, 종암동 등 이 지역의 산제당을 모시는 마을들은 농사를 짓는 마을들이다. 종암동의 경우 ‘북바위 전답’으로 이름난 농토가 있던 마을이었다. 전답은 고려대학교 뒷산 아래에 있는 주택가와 부근을 말하였는데 이곳은 논과 밭의 소출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 북바위 전답은 농부의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으로도 쓰일 정도였다. “북바위 전답을 아느냐?”고 물어서 대답을 못하면 “농군으로서 그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가짜 농군임에 틀림없다”하여 동리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다. 종암동 사람들은 또 ‘설농탕’이란 음식이름이 이 북바위 전답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지역 산제당들은 평야지대를 기반으로 한 지역에 낮게 솟아난 산을 중심으로 당이 분포하고 산신제를 지낸다는 공통점들이 발견된다. 결국 광의적으로는 도당굿 문화권으로 봐도 무리가 없는 산제당과 그 치성의례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주로 채소(배추, 참외, 무, 오이, 파 등), 과일, 미나리 등의 근교농업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들이 이 지역의 특징적인 생산기반이며, 이를 기반으로 한 문화의 생성과 향유지역이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참외치성으로 드려지는 치성의례를 통해서다. 대동치성은 참외가 나는 시기에 거행하며, 주요한 치성 헌물은 참외가 된다. 이는 벼농사 권에서 주된 치성 헌물이 쌀이거나, 쌀로 밥을 한 ‘메’임과 동시에 쌀로 찐 떡이 되는 것과 같은 성격이자 맥락이다.
한양 성중에서는 매달 절기마다 치성과 고사가 가정별로 치러졌다. 정월달에는 세배살이·문안살이로서 홍수맥이 · 수맥이를 하여 그 해의 재액을 물리치는 의식을 행했으며, 직성을 짚어 직성에 맞는 예방의식인 ‘열나흘날예방’을 열 나흩 날에 거행하였다. 보름에는 보름방생굿을 하러 한강변으로 나갔는데, 14일 밤이 되면 마포 용머리당이나 영등포 가칠목 용궁당을 찾거나, 배를 대절하여 강 속으로 깊이 들어가 방생하기도 하였다. 이월에는 개춘맞이를 하였으며, 삼월에는 꽃맞이(삼질맞이), 사월에는 철쭉맞이, 오월에는 단오맞이가 이뤄졌다.
유월이 되면 보름이나 유월 유두에 ‘유두맞이’로서 채미천신과 햇밀천신이라는 것을 가정마다 행했다. 먼저 밀가루 전병을 부치는데(50~100개), 호박 안 넣고 만든 전병(천신 지내는 용도)과 호박 넣고 부치는 전병(나눠 먹기 위한 용도)을 2가지로 준비한다. 밀가루 전병이 준비되면 먼저 채미 천신을 한다. ‘채미’는 참외의 다른 이름이다. “천신하고 먹어야지 천신 안하고 먹는 법이 어딨수”라는 말을 부인네들이 곧잘 했다고 한다. 장독간-안당(다락)-제석-성주-터-대문-방방-도당-조상(대청)의 순서로 천신을 하는데 술 석 잔도 함께 올린다. 각 가정별로 단골로 다니는 전래댁이 와서 했는데 집집마다 다 했다.
칠월에는 칠석맞이로 사과진상(과일만 했다. 채소는 안했다)을 거행했으며, 팔월에는 추석맞이(신을 모시는 집에서는 먼저 신에게 치성을 올린 다음 차례를 지낸다), 구월에는 구일맞이, 시월에는 햇곡맞이 신곡자랑, 동지/섣달에는 서경놀이로 각각의 절기를 풍요롭게 보냈다.
한양 성중의 세시풍속으로서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보이는 특징은 정월에 열나흩날예방과 한강을 찾아 방생을 하였다는 점과 삼월·사월의 꽃맞이와 철쭉맞이, 그리고 유월에 유월맞이로 거행한 채미천신과 햇밀천신을 들 수 있다. 칠석맞이로 사과천신을 올리고 동지/섣달에 서경놀이를 하였다는 것도 한양만의 독특한 문화로 볼 수 있다.
한양 성중의 일반 가정의 세시풍속에 필요한 그 시절의 생산물은 모두 성저십리권에 분포한 근교농업지대나 북한산·도봉산지역이었으며, 한강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채미와 과일, 그리고 햇밀은 도당굿문화권으로 볼 수 있는 이 지역에서 생산·공급되었다는 사실을 응봉동의 참외치성을 통해 확인함과 동시에 그 긴밀함과 친연성을 아울러 짐작하게 된다. 응봉동의 주산물인 참외에 대한 고마움이 경배의 마음으로 대동치성을 통해 표출되고 있기도 하다.
이 지역의 치성의례는 굿이나 굿식으로 지내는 고사와 유교식 치성의례가 공존하고 있다. 고사의 경우도 유례식으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 굿은 주로 한양굿으로 치러졌으며, 무당과 전악들도 한양굿 영향권에서 주로 공급되었다.
②강남권(한강이남)
번 호 |
동네 |
마을굿 명칭 |
당 종류 및 이름 |
신격 |
치성형태 |
치성일 |
향유주체들의 생업 |
1 |
대치동 (한티마을) |
치성드린다 (은행나무 고사) |
·靈産壇 (도당) ·우물5 |
은행나무대감님 |
祭(유교식) 우물고사 |
7월1일 |
근교농업 (배추,무우 참외, 오이) |
2 |
하일동 |
갈산산신제 (산치성드린다) |
산제당 |
산신령님 |
제(유교식) |
7월1일 |
농사 (논농사, 밭농사) |
3 |
도곡동 |
산제 |
산제당 |
산신령님 |
제(유교식) |
10월 초 택일 |
농사 |
4 |
시흥5동 (탑골) |
대동제 |
도당 |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
제(유교식) 풍물 굿(집돌이) |
7월1일 |
농사 개인택시 |
이 지역 역시 한양 성중에 공급하는 근교농업권이다. 나루를 통해 생산물을 강북으로 공급하였다. 그러나 당의 형태를 보면 도당과 산제당이 같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산제당이라 하더라도 농사권에 위치하거나 배후에 두고 있으며, 치성일도 10월과 7월에 분포돼 있다. 특히, 7월1일이 주된 치성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 지역이 서울로 편입된 것은 1960년대 이지만 실제로 생활문화권의 내용은 조선시대부터 한양과 깊은 상관성을 갖고 있었으며, 그 특성이 도당굿 문화라는 점에서는 한강이북의 성저십리내의 도당굿문화권과 일치한다. 이 지역에서는 풍물굿이 발견되기도 한다. 능동의 경우 풍물악기가 마을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③영등포권(한강이남)
번 호 |
동네 |
마을굿 명칭 |
당 종류 및 이름 |
신격 |
치성형태 |
치성일 |
향유주체들의 생업 |
1 |
방화2동 (내촌마을) |
산신제 |
산신당 3 |
산신 |
제(유교식) |
10월1일 |
농사. |
2 |
도림1동 |
도당고사 |
도당 |
도당 |
제(유교식) 풍물굿 |
10월3일 |
밭농사, 과수원, 주막 |
3 |
등촌2동 (등마루) |
도당굿 |
산당 (도당) |
도당 |
굿, 고사(굿식) |
10월1일 |
논농사, 땔감채취 |
4 |
내발산동 (검덕산) |
산신제 |
산신제단 |
산신 |
제(유교식) |
10월1일 |
농사, 땔감 |
5 |
내발산동 (우장산) |
산신제 |
산신당 |
산신 |
제(유교식) |
10월1일 |
농사 |
이 지역은 평야지대로서 농사권에 해당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영등포를 중심으로 강서구, 구로구, 관악구, 양천구, 동작구 등을 포괄하는 지역이다. 모두 영등포구에서 분구되어 나간 곳들이다.
이 지역은 한양과도 직·간접으로 상관성을 갖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위에서 열거한 마을굿 전승 마을이 주로 분포하는 강서구와 양천구의 경우, 궁에서 필요로 하는 말을 방목하던 목장이 묵동과 등촌동 일원에 대단위로 있었다. 발산동을 벗어나 내촌부터는 바로 김포평야로 연결되며, 김포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그 품질로 인해 성중 안에서 선호되던 생산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경기도 문화권으로서의 특성을 많이 함유한다.
당의 형태를 보면 도당과 산신당이 주를 이룬다. 위에서 제시한 마을굿 전승지대는 산신제가 더 많지만 전승이 끊어진 마을까지 포괄하면 도당과 도당굿이 주류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현재는 등촌3동에 해당하는 파릉의 도당굿(7월1일과 10월 1일 치성. 7월1일이 소잡고 대동굿) 우장산 자락(화곡6동)의 도당, 원지동 도당, 신투리(신정동) 도당, 묵동 도당, 방화1동의 도당, 김포공항 활주로가 있는 오곡동의 도당, 오류동 도당, 개봉동 도당, 천왕골 도당, 고척동 도당, 수궁골(온수동) 도당, 구로1동 도당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60~1970년대의 공업화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공장지대와 대단위주거지로 바뀌면서 대부분의 도당과 마을굿들이 파괴된 지역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 지역은 농경을 기반으로 한 도당굿 문화권으로서 7월1일과 10월1일이 치성일이라는 특성을 보인다. 특히, 10월1일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산신제를 지내는 곳은 유교식 치성의례 중심으로 치러지고 있으며, 도당이 있는 마을에서는 굿을 통한 대동굿이 치러졌었다.
이 지역은 전형적인 도당굿문화권으로서 경기도 도당굿문화권과 맞닿아 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이 경기도 관할이었으며, 1960이후에 서울시로 편입한 궤적에서도 드러난다. 굿의 경우 노들본에 기저를 둔 방식과 무당·재비들의 수급이었다. 그러나 화성에 기반을 둔 경기도 세습무권과도 시대에 따라 교차하고 있으며, 한양을 중심으로 해서 남쪽과 서쪽으로 멀어져 갈수록 경기도 세습무권의 굿이 점점 짙어진다. 그러나 생산토대, 향유계층, 치성일, 그리고 한양과의 상관성 등을 종합해 볼 때, 도당굿문화권에 포함시켜도 무리가 없다.
종합하면, 도당굿은 주로 성외와 성저십리 안에 분포한 근교농업지대에서 보이는 형태이다. 이 도당굿을 만들어내고 향유한 실체는 조선이 건국하기 이전부터 뿌리박고 살아왔던 토박이들이 중심이 되어 살던 마을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도당굿을 전승시켜왔던 주민들의 연원이 그 시절까지 직접 연결되는 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도당을 섬기던 신심의 발현이나 마을굿의 일반적인 양식은 있었으리라 보이기 때문에 그 전통이 한양의 마을굿을 형성하는 또 한축으로 정착하였으리라 본다. 그 중심에 수풀당, 살군당, 양지당이 있다.
도당굿은 무굿이 기저를 이루고 있되 유교식 제례의식이 습합된 형태가 기저를 이루고 있다는 특성을 보인다. 또한 이 도당굿은 경기 일원의 도당굿과 그 기저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으나 굿의 양식과 형식이 한양굿 형식과 세습무가 이끌어 가는 경기도당굿 · 고창굿과는 차이를 보인다. 후대에 이르면 만신들이나 재비들의 교류가 서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접경지대는 경기굿과 한양굿이 서로 습합된 형태로 발견되기도 한다. 근세에는 재비들이 양 경계를 서로 넘나들면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3)인왕산·삼각산·도봉산 자락에 자리한 서울 북부지역의 산신제
번 호 |
동네 |
마을굿 명칭 |
당 종류 및 이름 |
신격 |
치성형태 |
치성일 |
향유주체들의 생업 |
1 |
우이동 |
도당굿 |
도당 |
산할아버지, 산할머니. |
굿(굿+祭) |
3월3일 |
사냥, 땔감채취및장사 산나물채취 음식업 등 |
2 |
신영동 |
산제 |
·산제당 ·부군당 |
산신할아버지 부군할머니 백마장군,칠성 삼불제석 |
祭(유교식) |
8월말일 |
|
3 |
평창동 |
대동제 |
보현산신각 여산신각 부군당 |
산신할아버지 산신할머니 부군님 |
祭(유교식) |
3월1일 |
과수(밤) 메주 유원지 |
4 |
부암동 |
산신제 |
·천제단(상당) ·산신단(하당) |
산신할머니 |
祭(유교식) |
8월1일 |
땔감·장사, 과수농사, 꽃나무장사 메주, |
5 |
부암동 (뒷골) |
산제 |
산신당 |
산신할아버지 |
祭(유교식) |
9월1일 |
축산, 과수 |
6 |
홍지동 (삼지동) |
산제 |
·산신할머니 제당 ·산신할아버지 제당 |
산신할머니, 산신할아버지 |
祭(유교식) |
8월1일 |
염초 굽기 |
7 |
홍지동 (물문안) |
산제 |
산신당 |
산신할아버지 산신할머니 |
祭(유교식) |
8월1일 |
숯 |
8 |
신영동 (백사실) |
산제 |
산신당 |
산신 |
祭(유교식) |
8월2일 |
메주, 과수 종이제조 유원지 |
9 |
구기동 |
산제 |
산제당 부군당 |
산신 부군님 |
祭(유교식) |
9월말일 |
|
10 |
돈암1동 |
산제 |
산제당 |
산신 |
祭(유교식) |
10월1일 |
|
11 |
돈암2동 |
산제 |
산신당 |
산신 |
祭(유교식) |
10월1일 |
|
12 |
정릉1동 |
산신제 |
산제당 |
산신 |
祭(유교식) |
10월1일 |
|
13 |
정릉2동 |
산신제 |
산제당 |
산신 |
祭(유교식) |
10월2일 |
배추농사 |
14 |
정릉3동 |
산신제 |
산제당 |
산신 |
祭(유교식) |
10월1일 |
|
15 |
정릉4동 |
산신제 |
산제당 |
산신 |
祭(유교식) |
10월3일 |
이 지역에는 산제당이 압도적으로 많다. 받들어 모시는 신령님도 산신이다. 마을굿을 지칭하는 이름도 대부분 산신제이거나 산제이다. 당이 도당이고 도당굿을 매년 어김없이 하는 우이동의 경우 신격은 산신에 해당할 산할아버지, 산할머니이다.
특이한 사항은 산제당과 부군당이 함께 있는 마을이 3개나 된다는 점이다. 이 경우 산신신앙과 부군신앙이 결합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신영동의 경우, 산신은 남신(할아버지)으로, 부군님은 여신으로 결합한 형태를 보여준다. 평창동의 경우 산신할아버지·할머니 내외분과 더불어 부군님이 따로 결합한 형태이다.
신영동 부군당에 모셔지는 신령님 구성이 한강변의 부군당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신격들의 구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 부군당의 성격은 한강변 부군당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산신신앙과 부부관계를 형성하면서 결합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치성 의례를 살펴보면, 산신에게 술을 2잔, 부군할머니에게는 2개, 백마장군 3잔, 토지신에게 3잔을 각각 올리는 것으로 보아, 독자적인 모습의 공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평창동에서도 동일하다.
평창동의 부군당 자리는 산자락을 벗어나 평지에 가까운 총융청 창고터 근처이다. 당 자체의 구성을 보면, 산신할아버지(남신)와 산신할머니(여신)를 모시는 당이 각각 있어 완결된 구성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부군당이 추가된 구성 체계를 보이고 있다. 독자성을 갖는 두 문화권이 만나 공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산신신앙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신영동의 축문(山祭祝)을 보면 산신과 토지신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지 부군님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있다. 치성의례 또한 경건한 유교식 제례방식으로 치러진다.
이 지역의 치성의례는 유교식 제례방식으로만 치러진다는 특성을 보인다. 그 분위기도 상당히 경건하다. 부암동은 아직도 여자의 출입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도당굿으로 대동굿을 하는 우이동의 경우도 먼저 자시에 맞춰 유교식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난 다음에야 굿이 시작된다. 동트는 시간에 맞춰 단골 만신을 맞이하여 황토물림을 하는 것이 도당굿의 시작인 것이다. 굿놀이인 도당굿 중심으로 치러지는 대동굿임에도 불구하고 유교식의 제례를 거부하지 못하고 습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이기도 하다.
도봉산줄기를 제외한 삼각산 줄기에 분포하는 산신제의 경우엔, 굿이나 굿식으로 치러지는 고사치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들 지역 산신제에서 특기할 사안은, 치성음식으로 중요하게 여겨 가장 먼저 올리는 노구메를 짓는 놋쇠로 된 노구메 밥솥을 귀중하게 간직하면서 지금도 이를 대동치성에서만 사용하는 마을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치성일도 전형적인 산신제 문화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치성일은 3월(삼짓날), 8월1일, 9월1일, 10월1일이 발견된다. 3월의 이 지역 산천엔 진달래가 만발한다. 우이동 도당굿의 경우 진달래로 화전을 붙인 삼색 웃기떡이 중요한 굿 음식으로 받쳐지고 있다. 삼월·사월의 꽃맞이와 철쭉맞이가 한양성중의 각 가정에서 세시풍속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산 속에 위치한 이들 마을굿의 3월 치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3월은 도봉산 일원에 진달래가 흐드러지는 시기이다. 3월 치성의례는 경기북부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치러졌다. 파주의 경우 도당굿이 주로 음력정월에서 3월 사시에 분포하고 있다. 10월에는 산신제형으로 지내고 전자의 경우에는 봄굿으로서 대규모였으며, 격년제였다.
8월의 치성도 산신제 문화권의 특징으로 보인다. 경기북부지역의 산신제 치성일을 보면 8월 의례가 많이 발견된다. 8월 초에 하는 경우는, 연천군 포천시 등지에 분포한다. 연천군의 경우에는 전곡읍 대전1리(산치성), 백학면 노곡1리, 노곡2리(산단제사)가 그러하며, 포천시의 경우, 신북면 신평2리, 운천4리(산제), 포천읍 동교1리(산신제)이다. 포천시 신북면 기지2리의 경우 8월말이 치성일이다.
9월 치성의례도 그러하다. 경기북부지역 산악지역엔 9월 치성일이 두드러진다. 북한강과 임진강의 흐름에 인접한 산악지역에 특히 많이 분포한다. 한 마을에서 3월3일과 9월9일에 년2회 치성을 드리는 마을도 발견된다. 포천군 신북면 심곡2리의 경우, 산신장(山神將)을 모시는 산제사가 육산치성과 소산치성으로 올려진다. 육산치성은 할아버지를 대접하는 것이고 소산치성은 할머니를 대접하는 것인데 육산치성은 9월9일이고 소산치성은 3월3일이다.
이처럼 경기북부 지방은 산신제 유형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포천군 연천군 파주시 임진강과 한탄강유역을 보면 산신제, 산치성 등의 산신제 유형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유교식으로 치러진다는 특성도 보이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두드러진다.
삼각산 일원 산신제 권의 또 다른 특성은 전승주체들의 성향이다. 이 지역에서 산신제를 주도하는 세력은 5~6대 이상의 토박이들이라는 점이다. 부암동의 경우 제주가 되려면 6대 이상이어야 한다는 내부 원칙이 설정되어 있다. 신영동부군당 당주인 김희명은 8대째 살고 있다. 우이동 도당굿을 주도하고 있는 차승현의 경우 8대째 도봉산을 지키고 있는 토박이이다. 이는 한강변 부군당 문화권이나, 평야지대의 도당굿 문화권에 비해 상당히 폐쇄적인 성향으로 나타난다.
이 지역의 생산토대를 보면 산과 밀접하다. 땔감을 해서 성안으로 내다 팔았으며, 숯을 굽기도 하였다. 사냥도 주요한 생업이었다. 과수 재배가 주요한 수입원이기도 했으며, 꽃나무를 재배하여 내다 팔기도 하였으며, 축산도 하였다. 경관이 빼어나 상춘객들을 맞는 유원지로서의 역할도 컸다. 대표적인 곳이 정릉골짜기였으며, 부암동 신영동 일원도 시인묵객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살펴본 바대로 삼각산·도봉산 일원의 마을굿은 분명한 산신제 문화권이다. 이는 경기북부지역의 산신신앙이나 치성방식과 친연성을 강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같은 문화권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서울 지역도 같은 양주군 영역에 속해 있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삼각산 · 도봉산 일원이 경기도 고양군, 양주군에 속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4)기타
이 이외에도 중국에서 건너온 관성제군을 마을에서 자생적으로 모시며 대동치성을 드리는 경우도 발견되는데 방산동성제묘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 경우는 유교식 제례방식으로 치러진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또 특이한 사례로 종묘 안에 있는 공민왕사당에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세운상가 상인들과 공민왕후손들이 함께 대동치성을 드리다 중단된 경우도 발견된다.
마을대동치성과는 성격을 달리하지만 남묘에서 치러지는 제사의식도 전승되고 있다. 유교식 제례와 굿(한양굿)이 동시에 행해진다. 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남묘를 신봉하는 신자들 중심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마을굿에 포함될 수는 없으나 무당굿이 습합된 형태로 치러진다는 점에서 관심을 갖게 한다.
Ⅳ 마무리를 하며,
전통문화의 전승토대인 농어촌의 실존이 어려워져 보이는 현 시점에서, 도시 마을굿의 성격을 어쩔 수 없이 띠면서 질긴 전승력을 이어가고 있는 서울의 마을굿은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한양의 마을굿 형성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생산토대와의 상관관계를 중시하여 유형화를 시도하며, 그 상관성과 특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강유역을 토대로 한 서울 지역은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사람살이가 풍성하였으리라 보고 있으나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마을굿과의 직접적인 연계성은 단정할 수 없었다. 반면 한양의 마을굿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기존의 마을굿들은 크게 3가지 생산토대와 계급에 의해 형성되는데 한강변을 중심으로 문화를 정착시켜나간 바닷가문화이다. 나주금성의 해양세력이 기반을 잡고 경강상인들이 굳건하게 자리 잡은 조선 말기까지 뱃사람들과 해상물류유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었다. 이들은 부군당굿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구현해 나갔다. 다음은 조선 개국 이전부터 한강의 평야지대에 살고 있던 기존의 토착문화와의 자연스런 결합인데 도당굿이란 마을굿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금성당과 수풀당이라는 상징적인 당을 구심적으로 해 자신들의 생업과 문화를 갈무리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마을굿의 발현 양식이나 놀이방식은 굿놀이형을 기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으나 부군당굿은 굿놀이 형식으로만 치러내려는 의지가 강한 반면, 도당굿은 유교식제례방식과 적절하게 결합된 형태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군당굿과 도당굿의 기저를 이루는 굿놀이 양식은 한양굿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 한양굿은 고려 개성에 뿌리를 둔 한양굿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결국 고려시대의 문화와 토양이 한양의 마을굿을 형성시켜내는 근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로는 거기에 유교문화의 전형인 유교식 제례방식으로 치러지는 산신제형의 마을굿 또한 공존하고 있는데 주로 한양의 북쪽을 보호하고 있는 인왕산·삼각산·도봉산 줄기에 분포하고 있다. 이 세 축이 현재까지 전승력을 보이고 있는 서울 마을굿의 실체라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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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ttern and origin of Seoul Maeul-kut
Park, Heung-Ju
Maeul-kut, or village-based shamanic ritual, in Seoul has greater significance than rural Maeul-kut because farming and fishing communities have been fading out today. Seoul Maeul-kut has been formed mainly from three distinct bases and classes. One is sea-power from Naju, or Keumseung, who settled in around Han-river. They set up their identity and culture by means of Pukundang-kut. The other is the natives who lived on the plain area of Han-river since the predate of the foundation of Choseun dynasty. They set up their identity by means of Todang-kut such as Keumseung-dang and Soopool-dang.
Both of these two patterns have the same play form. Even though Pugundang-kut has been somewhat combined with Confucian ritual form, both of these ritual forms, Pugundang-kut and Todang-kut, are equally rooted in Hanyang-kut, whose origin is the culture of Koryo.
As an exception of above forms, purely confucian ritual form was found only in the range of Samgak-mountain and Tobong-mountain and this form was taken for the ritual for mountain god.
key word : Seoul Maeul-kut, Pukundang-kut, Todang-kut, Hanyang-kut,
Keumseung-dang, Soopool-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