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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모양의 공중전화기
상 파울로에 머물던 어느날, 하루는 오후 1시쯤 집에서 나와 숙소 근처의 브라데스코(Bradesco) 은행으로 갔다. 우선 현금지급기에서 600헤알(약20만원)을 인출하고 나서(여기서는 한국의 통장구좌에서 직접 현금인출이 안되고, 꼭 수수료를 따로 물어야 하는 현금서비스 밖엔 안되게 돼있어 현금을 인출할 때마다 화가 난다) 미화 1,000달러짜리 여행자 수표를 바꾸기 위해 은행창구로 갔다.
창구 담당자는 아이들 표현대로 꽃미남이다. 스무대여섯살이나 됐을까. 핸섬하게 생긴 백인이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은행에서 근무하는 은행원이라 긴 팔 흰 와이셔츠에다 넥타이까지 멋들어지게 매고, 오후지만 갓 면도를 한 것처럼 파랗게 면도자국이 있는, 영화 ‘데스페라도’에 나오는 스페인 영화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 같은 얼굴이다.
내가 여행자 수표를 꺼내 보여주며 영어로 환전을 하고 싶다고 하자, 이 반데라스 청년은 한참동안 포르투갈어로 설명을 한다. 내가 말을 중단시키고 “I can’t speak Portuguese.”라고 하자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다. 그리곤 주위의 다른 동료들한테 영어를 할 줄 아냐고 물어보는 모양이다. 아무도 영어를 잘 할 수 없다고 대답을 하자, 이 반데라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면지를 끄집어낸다. 그리곤 영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친구도 영어를 써본 게 오래됐는지 갑자기 영작문을 하려니 잘 안되는 모양이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겨우 한 문장을 만들고나서는 다시 다른 종이를 꺼내 좋은 글씨체로 정성스레 옮겨적은 뒤 나한테 내어놓는데 (언뜻 보니) 문법이 엉망이다. 하지만 금세 그 내용을 이해하겠다. 내용인즉 자기네 은행에선 여행자수표를 바꿔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서 일어나 갈려고 하는데 반데라스가 나를 다시 붙잡는다. 아마 미안했던 모양이다.
콩글리쉬와 퐁글리쉬가 만날 때
그리곤 자기가 전화로 다른 은행을 알아봐 주겠다는 말을 포르투갈어로 유창하게(?) 하며 전화를 거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볼펜을 잡고 영작문에 돌입했다. 한참만에 다시 깨끗한 종이에 반듯하게 정서를 해서 내놓는데, 새로운 은행의 주소를 알아내서 너한테 알려주겠다는 내용이다(이때부터 반데라스나 나나 서로 ‘퐁글리쉬’와 ‘콩글리쉬’를 하기 때문에 뜻이 서로 더 잘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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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울로 시가지-일방통행이 대부분이다
반데라스는 이제 자기 일은 접어둔 채(사실 손님에게 최대한의 친절을 베푸는 일보다 더 급한 용무는 없으리라) 전화기를 붙들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까페를 묻는다. 웬 카페? 하고 뜨악해하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커피를 먹겠느냐는 것 같다. 내가 OK라고 하자 얼른 가더니 아주 진한 커피를 조그마한 잔에 타가지고 온다(이곳 브라질 사람들도 유럽의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진하게 마신다).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며 기다리라는 것이다.
반데라스는 여기저기로 전화를 하기 바쁘다. 나는 할 일 없이 반데라스 책상 앞에 앉아 커피잔을 들고 입술을 적시듯 조금씩 커피를 마시며 반데라스가 하고 있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반데라스는 이면지를 꺼내 뭐라 받아적기도 하고, 전화를 받고 있는 중에 적은 글씨 아래로 밑줄을 긋기도 하고, 네모칸을 둘러치기도 하고, 네모칸에 그림자처럼 배경무늬를 넣기도 하는데 가만히 보니 일련의 습관이 있는 듯하다.
16절지 이면지 한장을 가지고 이리저리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글을 받아 적은 뒤, 일단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밑줄 끝에는 꼭 삼각형 화살표를 붙이고, 그래도 미심쩍으면 네모로 둘러싼다. 그 다음에는 네모칸 뒤로 음영을 입히고 까맣게 칠해야 끝이 난다. 30여분간 반데라스는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한다. 그러면서도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문제없다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영어가 유창한 로드리게스 등장
거의 40여분이 지나도 반데라스의 전화는 끝날 줄 모른다. 그 때 반데라스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아마 반데라스 친구인 듯도 싶고, 이 은행과는 안면이 많은 듯한 또다른 반데라스다(이 반데라스는 이름을 모르니 임시로 ‘로드리게스’라고 이름을 붙이자). 은행원들과 익숙하게 인사를 하더니 반데라스가 뭐라고 포르투갈어로 하자, 로드리게스는 나한테 영어로 불쑥 “하우 두 유 두?” 하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잠시만 기다리란다. 반데라스가 전화를 하고 있는데 15분간을 기다려도 답이 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유창한 영어다.
그런데 이 친구,로드리게스는 갑자기 영어 통역을 부탁받으니 당황했는지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반데라스더러 물을 좀 달라고 한다. 그리곤 나한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다. 반데라스가 뛰다시피 가서 물 한 병과 물컵을 갖다주자 벌컥벌컥 마시더니 다시 이야기를 잇는다. 그런데 내가 살펴보고 가만히 속으로 생각해본 결과, 이 로드리게스는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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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울로 뒷골목에 있는 포장마차.
이 은행에서 포르투갈말을 못하는 동양사람이 와서 영어로 말해야 하는데 영어 통역할 사람이 없던 차에 자기가 은행에 왔다가 (오랜만에) 영어를 유창하게 하려니 약간 목이 메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로드리게스는 여유만만이다. 반데라스 옆좌석의 여직원 세군도스(Segundos,이 여직원의 이름은 팻말에 씌어있다)와도 잘 아는 사이인 듯 서로 어깨를 툭툭치며 농담을 건넨다.
내가 로드리게스한테 한국을 아느냐고 묻자, 자기 친구가 있어서 한번 가본 적이 있단다. 서울이 상 파울로처럼 큰 도시라며 오른쪽 엄지 손가락을 곧추세워 내민다. 여기서는 모든 제스쳐가 엄지 손가락을 세워 내미는 것으로 다 통한다. 나도 엄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여행 이야기를 하고 리오축제와 이과수 폭포를 구경할 예정이라고 했더니 로드리게스는 또 엄지손가락을 세워내민다.
반데라스의 깔끔한 마무리 솜씨
이 친구는 가만 보니 브라질의 부자인 듯하다. 브라질은 빈부차가 많아 부자는 엄청 부자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엄청 가난하다고 한다. 특히 이곳 부자동네의 아파트나 집마다 까만 양복을 빼입고 무전기를 하나씩 들고 근무하는 경비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들이라고 한다.
가난하니까 못 배우고 못 배우니까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어 이런 은행에서 근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로드리게스는 흰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지만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은행원보다 여유가 넘쳐 흐르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살면서 지구 반대쪽의 한국땅에 가보았다는 것은 부자가 아니면 브라질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더구나 영어를 이렇게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두루 넓게 다니며 경험을 했거나 영어가 필요해서 따로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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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 정문을 지키는 경비원
약 1시간 가까이 걸려 반데라스의 일이 끝났다. 주소와 내가 가서 만날 사람의 이름까지 적은 뒤, 내일 여행자수표를 바꿀 수 있도록 컨펌(confirm)까지 해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안되고 내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3시밖에 안됐지만, 여기는 4시만 되면 은행 문을 닫는다고 한다. 택시를 타고 가면 될 듯 싶지만 내일 찾아갈 시간까지 반데라스가 예약을 해둔 터라 다음날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로드리게스는 자기가 할 일이 모두 끝나자 인사를 하고 일어난다. 나더러는 리오축제와 이과수폭포 관광,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여행 일정을 잘 마칠 수 있기를 빈다며 악수를 청한다. 나도 고맙다고 하자 한번 어깨를 으쓱한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이다. 하긴 그게 로드리게스답다.
반데라스도 나한테 한번 더 주소를 보여주고 간단한 영어로 설명을 한다. 주소와 은행이름, 은행 여직원 이름, 그리고 오후 2시 이후에 가면 된다고 쓰고선 자기 명함을 꺼내 스테이플러로 찍어준다. 명함을 보니 반데라스의 진짜 이름이 아드리아노(Adriano Martins Godoy)다. 아드리아노는 아마 오늘 속으로 진땀깨나 흘렸을 듯하다.
자신의 일상업무와는 다른 여행자 수표를 바꾸는 일을 여기저기 물어본 데다가 잘 안되는 영어 대신 영작문을 하느라 진땀을 뺐으니 그 어려움을 능히 짐작하겠다. 그런데 내가 아드리아노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뿐이다.
"오브리가도!”(Obrigado,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