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왕이 후사(後嗣)없이 죽어종친 간운데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경우, 새로운 왕의 생부(生父)를 일컫는
조선시대의 4분의 칭호이다.
조선시대 4분의 대원군
1,선조의 아버지 덕흥군(德興君)
2,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
3,철종의 아버지 전계군(全溪君)
4,고종의 아버지 흥선군(興宣君)
*위 4분중
세분은 죽어 후 대원군으로 봉해 졌고
홍선군은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 져
살아 있는 대원군이라 부르기도 했답니다.
흥선대원군은누구?
1863년(철종 14)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하응(흥선)은 자기 둘째아들인 고종(26대)제임44년간고종의 아버지이다.
대왕대비 조씨(大王大妃趙氏:익종비, 헌종의 생모)의 명에 따라 흥선군 하응(興宣
君昰應)의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왕위에 올라 고종(12살)이 되었고, 자식을 왕위
에 올려놓고 10년여간 권력을 좌우지한 왕의아버지이다.
흥선(이하응)대원군은
영조의 후손남연군(이구)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3세에 민씨와 결혼한다 .17세에 아버지까지 여의셨다 그는 왕손의 자손으로
안동김씨의 세도에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거지행세와 구걸로 거지패와 어울러
단니면서 불우의 생활을 한다 그리고 천하장안(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이라 불리는 시장의 건달들과 어울리며 놀았다. 당시의 철종(哲宗)에게 후사(後嗣)가
없었던 점을 잊지 않고, 조대비(趙大妃..대왕대비)와는
가깝게 지내며, 후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풍수지리를 굳게 믿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충청도 예산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지관(地官)에 알아보아 두 군데를 추천 받는다. 한 곳은 이대천자지지
(二代天子之地..즉 왕이 두명 나온다는 명당)인 충청도 예산과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
라는 충청도 광천 지역중..이하응은 당연히 예산땅을 선택하고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것이다.묘지 이장은 순탄 하지만 않았으며 그 명당자리에 가야사는 사찰이 있었다 결국은
사람을 시켜 가야사주의를 불바다로 만든다. 그리하여 부친의 묘소를 이장하게 된다
이후 7년만에 아들 명복(命福)을 낳고.....그리고 고종과 순종(조선의 마지막 王)...
두명의 왕이 탄생하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나라의 인제인용은
당파를 초월 해 고루 인용하였고 세도정치을 타파 하였으나
서원 철폐와 묘지벌목 과 무리한 경복궁 중건등으로 인해 여론(특히 양반들)이 악화
되어 1873년 고종이 22세 되던 해, 경복궁 중건 반대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은
고종이 친정할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고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친정을 선포한다.
*친정=임금이나 최고 권력자가 직접 정사를 맡아 다스림
이후 권력은 명성황후 민씨를 필두로한 민씨 세력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후 삼정을 예전대로 돌리고 훼철(毁撤)했던 사(祠)와 서원(書院)을 복원하는
등 흥선 대원군의 사업을 정면 부정한다.
나산사 (서원)사진찰영2014년3월
수덕문(修德門)덕을 닦는문(외삼문)
강당/인교당
2010년10월27일 나산서원 현판식
병충재
강의재
본체 (인교당)
천지당뫼 (동북향)
숭절사 백촌할아버지 위패를 모시는곳
전사청
내삼문
수덕문을 안에서 시 (視)
위에서 본 서원
입구의 측면
경주시 양남면 나산리555번지
경주시 양남면 나산1길 27
*아래글은 백과사전에 의해 옴겨 정리 된글입니다.
조선왕조에
최고의 성군을 꼽는다면
초기에는 세종대왕(재위32년)으로 꼽으며
백촌선생은 세종8년에 문과에
급제로발탁된다.
조선말기의 성군은
영조21대왕( 83세 재위 52년)으로
조선왕조말기에 최고의 성군으로 꼽는다.
조선왕조에 최고의
악녀로는 장희빈(장옥정)
이라고 말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으로
권력자의 피해자로 볼수있다.
숙종의 인현왕후가 갑자기죽자
서인들의기록으로 게장을먹고 죽었다
게장에 꿀을 넣었다는 것이다.
민간요법에 게와 버꿀은 절대 금기음식
경북궁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그리고 경희궁(경덕궁)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나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인 경복궁을 세웠다(1394년). 그리고 3대 태종 때(1405년)에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이로써 정궁 경복궁에 이어 이궁 창덕궁인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리하여 많은 임금들이 창덕궁에서 거처하면서 함께 거처하는 식구들도 늘게 되었다. 따라서 성종때 이르러서는 세분의 대비를 위해서 창경궁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세종대왕이 상왕 아버지 태종을 위해서 지은 곳)이라는 곳에 몇 개의 건물을 더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많이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된다. 일년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선조는 창덕궁을 재건하게 된다. 이는 경복궁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리하여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다시 지어져서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년간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의 역할을 하고 창경궁은 1616년에 복원되었다.
고종과 순종은
아버지와 민비의 세력다툼사이에 고난의 왕권이요.
고종의 또한 둘째 아들이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27대제임3)이다.
한제국기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했다. 고종은 보수세력과 일부 개화파들을 끌어들여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하에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이것은 각종 제도개혁,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 등을 실시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자주적 개혁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의 식민지화를 승인받았다. 또한 일본은 이해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박탈과 내정간섭을 본격화했다.
이에 고종은 1907년(광무 1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에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1910년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죽었다. 독살설 속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저서에 〈주연집 珠淵集〉이 있다. 능은 홍릉(洪陵)이다.
순종
조선 제27대 왕(1907~10 재위3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기간 동안 통치권을 통감부에 빼앗기고, 일제의 강요로 한일신협약·기유각서·한일합병조약 등을 체결했다.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1874년 2월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7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882년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았고, 1904년에는 윤씨를 황태자비로 새로 맞이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동생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했다. 즉위 후 일본의 강요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 차관이 국정 전반을 간섭하는 차관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어 일제는 재정부족의 이유를 들어 군대를 강제 해산했으며,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마저 빼앗았다. 정치·외교·군사·경제·사법권 등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이용구·송병준 등이 중심이 된 일진회를 앞세워 합병을 추진하여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은 무너지게 되었다. 대한제국 붕괴 후 순종은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서 거처하다 1926년 죽었다. 순종의 장례 때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유릉(裕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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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日帝强占期]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36년간에 걸쳐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시기.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기는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와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로 불리는 민족분열통치기, 그리고 1930년대 이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의 파쇼 통치기 등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식민통치정책의 시기적 변화에 따라 이에 대응하는 전체 민족해방운동의 추진방법도 달라져갔다.
무단통치기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전국토가 완전 식민지로 된 상태에서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민족해방운동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전체 민족적 저항운동으로서의 3·1운동을 준비했다. 민족분열통치기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에 대응하기 위해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이며, 파쇼 통치기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이 시기의 세계사가 파쇼 체제의 등장에 대항하고자 형성된 인민전선에 영향을 받아 민족통일전선의 구축에 주력하던 시기였다. (→ 한국사)
물론 1905년부터 실시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통치'도 사실상 식민지배와 다름없다고 보고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기간을 4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905~10년에는 비록 보호국체제 아래에서나마 대한제국의 주권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일제 식민지배기는 1910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첫댓글 백촌 김문기 1409년은 오타 입니다,1399년생 이십니다,
예 감사합니다
바로 잡겠습니다
9세손 문기1399년생
13세손 영시 계사년생
14세손 제학 병자 1576년생 나산 입향임진 3월 1592년
18세손 인상 1676년생 지석(地石) 입향조 나산 사실기록 15세손 선일 갑오생 산소에 묻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