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전 예산
1854 : 제목 : 형평사원(衡平社員)의 피천말
부제목 :
지금 충일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원래 백장(百丈)들이 집단하여 살던 “피천말”이었다. 피천이란 비천(卑賤)이란 말을 되게 발음하다 보니 그렇게 변하지 않었나 생각되는데 “피천”이란 신분이 낮고 천하다는 뜻이다. 조선 500년간의 신분사회에서 가장 천한 계급에 속하는 것이 백정(白丁)이었다. 그러나 백정들 이라고 해서 모두 백정이 아니고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백정이던 예가 많았다. 고려가 망할때의 충신들인 고려삼은이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의 세 분인데 이씨와 정씨는 조선에 와서 다시 관계에 출사하여 오늘날까지 명문거족으로 행세하고 있으나 오직 길씨만은 경북 구미시의 금오산속에 묻혀 사는 바람에 후손들이 오늘날 백정이 된 사람이 많다. 백정 중에는 소, 돼지, 개 따위를 잡는 도한(屠漢)이 대부분이고, 버들가지를 겯어 고리짝이나 동고리를 만드는 고리백정 가죽신을 만드는 갓바치가 있는데 중종때의 병조판서 이장곤은 연산군때 함경로도 피신하여 고리백정의 사위가 되었고 요즘 SBS의 인기 드라마 여인천하에 나오는 동대문밖 갓바치는 정치가인 조광조가 선생으로 모시는 정도의 학식의 소유자로 백의정승이라고 까지 불리었다. 조선 철종 13년(1847)에 진주민란이 일어 났는데 그후 진주 백장의 사위(백정 출신이 아님)가 주동이 되어 백정들의 대동단결과 각성운동을 일으켜 이것이 후일의 형평사(衡平社)운동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형평이란 신분에 귀천이 없고 저울대가 평평해야 되듯이 만민이 평등 해야 된다는 뜻으로 백장들의 결사(結社) 명칭이 ‘형평사’로 그 조직원인 백장들은 ‘형평사원(衡平社員)’이라 불렀다. 요즘에 와서는 광우병이라는 새로운 가축 질환이 생겼지만 1930년대에는 미친개를 말하는 광견병이 창궐했었다. 그때도 광견병 예방주사는 놔주었는데 개 목사리에는 개 임자의 이름패를 달게 마련이었다. 이것을 흔히 개패라고 불렀는데 해방직전에는 입고 다니는 사람은 의무적으로 명찰을 가슴에 달게 했는데 이 명패를 비하해서 개패라고 불렀고 명패를 달고 다니게 한 까닭은 폭격으로 죽었을 때 시체를 구별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였다. 개패를 달지않은 개는 임자가 없는 개로 야견(野犬)이라 부렀는데 광견병 예방을 목적으로 형평사원을 동원하여 길바닥을 방황하는 개패 안 달린 개는 무조건 3m 가까운 긴 쇠꼬챙이로 찔러 잡게 했고 이것을 야견박살(野犬撲殺)이라 했는데 잡은 개고기는 형평사원 몫으로 점포에서 팔게 했다. 그때는 백장의 아낙들이 방문판매를 주로 했는데 호칭이 안주인 에게는 으레 아씨 마님이고 바깥 주인에게는 나리 서방님이고 백장의 아낙들에게는 하대조의 ‘해라’를 하는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백장의 아낙이 고기를 팔려고 예산초등학교 강당 근처의 어느 양반행세 하는 집에 갔을 때 바깥주인이 전처럼 ‘해라’를 했더니 고기를 팔지 않고 그냥 되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얼마후 남자 형평사원들이 개 잡는 쇠꼬챙이를 들고 떼를 지어 몰려와서 항의 데모를 한 일이 벌어진 후 부터는 예산에서 형평사원에게 ‘해라’로 하대하는 버릇이 쑥들어 갔다. 오늘날에 와서는 신분사회가 없어지고 평등사회가 되어 돈만 벌수 있다면 꺼리낌 없이 아무나 고기장사를 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선진국인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백정 거주지역을 부락이라 부르고 백정을 부락민이라 불러 멸시 천대하고 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촌 동네를 부락이라 부르 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지냈으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락이란 우리나라에서는 촌락(村落)이란 뜻이고, 일본인은 백정을 ‘에타’ 라 부르는데 직역하면 많이 더럽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54 호 / 2001-09-17
727 : 제목 : 그때 그시절1
부제목 :
이조 제 21대 임금 영조 (재위 1725-76)때의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 선생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리책으로 꼽히는 (일본에서 일본어로 번역 출간됨) 택리지(擇里誌)에 쓰기를 “충청도는 산과 강이 평탄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의 남쪽 가까이에있어서 사대부가 모여 사는곳이 되었다. 서울의 세가(世家) 들이 이 도에다가 전답과 집을 두어 이곳을 생활의 근거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다. 또 그 풍습이 서울과 가까와서 별로 큰 차이가 없으므로 살 곳을 택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다”라 하였고 특히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를 최상의 지역으로 삼는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백리가 되는곳에 가야산이 있고 서쪽은 큰 바다이며 북쪽은 경기도와 바닷가 마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곧 서해에 불쑥 들어가 있는 곳이다. 동쪽은 큰 들이며 들 가운데는 큰 개(津) 하나가 있는데 그 이름이 유궁진(由宮津) 이다. 밀물이 들어와 가득 차지 않으므로 배를 뛰울수가 없다. 남쪽은 오서산(烏捿山)이 간격을 두고 있는데 가야산으로부터 따라온 줄기다. 다만 오서산 동남쪽을 따라와 공주와 통한다. 가야산 앞과 뒤쪽에는 열 개의 고을이 있고 이것을 함께 내포(內浦)라 한다.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단절 되었고, 또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壬辰)병자(丙子)년의 남 북 두 개의 난리에도 적병이 들어오지 못했다. 토지가 기름지고 평평하여 생선과 소금이 후함으로 부유한 사람이 많으며 또한 사대부로서 대대로 사는사람이 많다고 하였는데 가야산 앞 뒤의 열 고을이란 예산현 대흥군, 덕산현은 오늘날의 예산군이고 면천군 당진현은 현 당진군며 서산군, 태안군,해미현 중 서산시, 태안군은 현 태안군이고 홍주목 결성현은 홍성군으로 오늘날의 1시 4개 군을 말하는데 이 중에서 70년전 까지는 상업 경제 금융 문화 교육 교통등 분야에서 예산이 단연 명실상부한 수부(首府)였다. 충청남도가 우리나라에서 천재지변이 적어 가장 살기 좋은 곳이고 그 중에서도 내포(內浦)열 고을을 최상의 지역으로 친다고 택리지(擇里誌)에 적혀있는 바 그 내포(內浦)지방 에서는 예산이 으뜸의 고장으로 안성, 강경, 김천은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 였고 그 다음으로 예산은 5대 시장의 하나 였는데 그 당시 충청남도 14개군(금산제외)중 그 절반인 7개군(예산, 아산, 당진, 서산, 홍성, 청양, 공주군, 유구지방)이 예산 상권에 속해 있었다. 지금부터 필자는 70여년 전인 예산의 전성시대부터 쇠퇴기에 접어 드는 1945년 8.15해방 당시 까지의 예산을 중심으로한 세상의 이모 저모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졸고를 쓰고져 하는데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 얘기 겠지만 빛나는 내일의 영광을 소망하며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삼아서 읽어 준다면 다행으로 여기겠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26 호 / 2001-02-12
783 : 제목 : 그때 그 시절2
부제목 :
처음 타본 자동차 내가 자동차를 처음 타 본 것은 만 다섯살 4개월 때인 1932년 3월 이었다. 그 때는 8인승 이라하여 지금의 현대 자동차의 「갤로퍼」만한 것으로 앞칸의 운전석에 둘 가운데칸과 뒤칸에 셋씩 앉게 되어있었는데 지붕은 지금의 군용차처럼 천막으로 덮었다 벗겼다 하게 되어 있었다. 그 때는 도로를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렀는데 자갈을 깔아 차가 어찌나 뛰던지 맨 뒤칸에 탔던 나는 이마를 앞 좌석 시트 위에 붙은 쇠파이프에 수 없이 짓찧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 때의 차는 일본제는 못 보았고(일본의 미쓰비시가 승용차를 만들고 있었다는데 시장진출이 안되고 있었다) 모두가 미국제로 「포드」와 「시보레」였다. 「포드」차는 미국의 유명한 자동차로 「헨리 포드」가 만든 차인 것을 알았지만 「시보레」는 해방후에 미군 「G.M.C」 트럭을 본후 비로소 「시보레」가 「제네럴 모터스」 회사제 인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공주-대전 자동차 운수사업을 하던 충남갑부 김갑순(金甲淳)씨에 관한 우스운 얘기를 하나 소개하겠다. 어떤사람이 김깁순씨에게 “운수사업으로 돈 많이 벌겠다”고 한 즉 그가 서투른 일본말로 대답하기를 “운뗀슈(운전수(運轉手)) 도쭈(도중(途中)) 자바리(떼먹다) 운전수는 정류소가 아닌 노상에서 받는 차삯을 떼먹고 “도로(道路)다이야 자바리” 길바닥은 타이어를 잡아먹고 “조슈 깡 자바리” 조수는 18ℓ들이 휘발유 빈 통 팔어먹고 “지무인(事務員) 소로반(珠盤) 자비리” 사무원은 주판알을 튕겨 떼먹고 저렇게 떼먹고 모두다 떼먹으니 내가 무슨 돈벌이가 되겠오” 했다는 것이다. 예산의 「자동차부」와 「여관」 그때는 자동차 정거장을 「자동차부」라 불렀는데 그 당시 당양(唐陽) 자동차 회사라 하여 전 예산여관 건너편 현 하나은행 마당 뒤쪽에 있었다. 회사이름인 당양(唐陽)은 당진(唐津)의 머리 글자인 唐자와 청양(靑陽)의 밑글자인 陽에서 한자씩 떼어다 붙인 것으로 노선은 예산에서 당진, 서산, 청양, 공주였다. 자동차 삯은 예산-공주간 140리(56㎞)에 1원40전 이 었다는데 그 때 말단봉급 생활자의 월급이 25원 정도 였다 하니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비싼편이었다. 읍-역간 버스가 처음 개통된것은 1935년경으로 생각되는데 차의 크기는 현재와 같은 대형 45인승이아니고 중형버스 였다. 그 당시 화물자동차의 적재정량이 2.5톤 짜리 였으니까 중형버스도 그런 정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천안-수동(水東:지금의 장항인듯함) 간노선은 경남(京南)철도 주식회사가 운영하였는데 현재의 농협 군지부 자리에 있었으며 당양 자동차부 보다는 규모가 제법 커서 버스 4~5대가 정차할 수 있는 주차장을 갖고있었지만 한대 이상 정차한 것을 보지 못했다. 직원은 소장과 매표원의 단 두명으로 일본인 소장은 구내 사택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매우 한가한 자리 였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차가 장거리 운행을 못하고 주로 군과 군사이를 운행하고 있어 서산이나 당진, 홍성군청의 직원이 공주 도청까지 출장을 가자면 공주까지 직접가지 못하고 예산의 여관에서 묵어가는 일이 많았다. 그 당시 조선 여관은 남일, 예일, 예청, 덕창, 대창, 유구, 삼선여관 등이 있었고 일본여관은 예산관, 아사히(朝日), 에비스야여관 등 세집이 있었는데 에비스란 일곱가지 복을 가져다 준다는 신(七福神)의 하나를 뜻하는데 함석으로 만든 얼음 냉장고를 갖추고 일본인을 상대로 우리나라 사람을 고용하여 생선 방문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조선 여관은 모두 단층집이었는데 에비스야 여관은 현재 영산신씨 종중회관 빌딩이 들어섰고 아사히 여관은 감리교회가 해방후 여관터에 화강암으로 교회를 지었다. 예산관은 1991년 9월10일 까지 해방후 46년간 옛날 건물에서 예산여관 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영업을 해 왔으나 1991년 9월 11일 2시 30분 화재로 전소하여 그후 그자리에 빌딩을 새로 지었다. 예산여관 화재 화재 당시의 중부매일 신문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관에 불 전소 방송 분장사 사망」 [예산] 11일 새벽2시30분쯤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545 예산여관(주 엄윤경52)에 촛불에 의한 화재가 발생 투숙중이던 SBS분장담당 이재정씨(여47 서울시 성북구 길음2동1171)가 불에 타 숨지고 여관건물이 전소돼 2천만원 상당의 재산피해를 내고 진화 됐다. 이날 화재는 SBS 드라마 촬영차 투숙 중 이날 0시부터 정전돼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던 중 잠옷에 발화된 것이다. 그날 여관에는 필자의 소학교 6학년때의 담임이었던 일본인 교사 사토요시오씨 부부가 51년만에 제자들의 초청을 받아 묵던 중 화재를 당했으나 다행하게도 피해는 없었다. 경남철도 주식회사는 천안에 본사를 두고 천안-장안(충남선), 천안-장호원(경기선)을 운행 히였는데 예산역이 개통된것은 1922년 6월이고 객차 2칸을 달고 하루에 몇번인가 다녔는데 서울을 가자면 바로 가지 못하고 천안에서 경부선으로 갈아 타야 했고 4시간이 걸렸다. 기름을 연료로 하는 한칸짜리 기동차도 있었는데 보통학교 4학년때 도고온천까지 소풍갈때 한번 타 본 후로는 기동차를 볼 수 없었다 그 당시는 모두 유연탄을 연료로 쓰는 증기기관차 였으므로 예산역에는 급수용 펌프장치가 있었다. 기관차 머리는 예를 들어 하행시는 제대로 앞을 향해 운행하지만 상행시는 거꾸로 뒤 부분을 앞세워 뒤걸음질 치듯이 운행했는데 하행종점인 장항역에 기관차를 돌릴수있는 레일시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 이후는 기차가 제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연착하는 일이 잦았고 특히 신창고개를 넘어갈 때에는 속력을 내지 못하여 징용으로 끌려가던 사람들이 뛰어내려 도주하는 일이 빈번했다. 경남철도주식회사는 역전에 화물자동차 영업소를 두고 있었고 온양온천 신정관, 현 온양 관광호텔도 경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 트럭의 적재정량은 2.5톤 이었다. 충남여객 이라는 도 단위 통합 버스 회사가 1936년경 발족됨에 따라 현 충일상호신용금고 자리에 대규모 건물을 짓고 유류 지하 저장 탱크와 주유기를 설치하고 자동차 수리공장도 신설하였는데 건설현장에서 시멘트로 벽돌을 찍어서 쓰고 있었다. 필자는 그 때 시멘트 벽돌을 처음 보았다. 충남여객은 건물을 신축한 후 각 노선에 버스를 많이 배차하는 외에 택시도 두대를 두고 활발하게 영업활동을 하고 있던 중 1940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휘발류 대신 아세틸렌 가스차와 목탄가스차가 등장했고 차량부족으로 각 노선을 하루 두번정도 운행하는 등 파행운행으로 겨우 명목만 유지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836 : 제목 : 보통학교 입학할 무렵(1)
부제목 :
1933년 (7세)경 내가 할머니를 따라 나드리할 적에는 바지저고리에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분홍 두루마기를 겹쳐 입고 다녔다. 옷감은 인조견(人造絹) (흔히 인조라 하였다.) 이었는데 비단같이 번쩍번쩍 윤이 났다. 바닥은 민판이 아니고 무늬가 있었다. 내 형들때 까지는 나들이 할 때 면 두루마기 뒤 등판에 빨간 마른고추를 돗바늘로 꿰매여 달고 다녔다는데 그것은 사귀(邪鬼)를 물리쳐 내쫓기 위한 방편이었다 한다. 인조견사는 영어로 ‘스프’라고도 불렸다는데 ‘스테이플 파이버’(Staple fiber)의 약칭으로 ‘레용’(rayon)이라고 통칭되였다. 인조견직은 지금까지 대표적인 용도가 양복 안감으로 쓰이는데, 서울 종로 네거리에 있던 해방전 유일한 조선사람 경영의 백화점인 화신(和信)백화점의 사장이던 박흥식(朴興植)씨가 1960년대에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 역전에 ‘흥한방직’이라는 ‘비스코스’(viscose)인견사 공장을 세웠는데 경영부진으로 ‘월진레용’회사로 넘어간후 심각한 공해문제로(종업원의 코뼈에 구멍이 뚤릴정도)폐업하고 현재는 그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두루마기 옷고름은 남색이었는데 매는 방법이 어른과는 달리 가슴에 둘러 매였다. 모자는 그때 대학생들이 쓰던 ‘사방모자’로 멋을 부렸는데 특이한 것은 학사모에만 있는 ‘술’이 하나 더 붙었다는 것이다. 모표는 둥근 월계수 가지로 둘러 쌓인 가운데에 어릴 유(幼)자가 쓰여 있었는데 유치원 원아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모표를 모두 이화(李化)라고 했는데 이화란 조선이씨왕조(朝鮮李氏王朝)의 문장이 오얏(자도) 꽃 이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조선이씨 왕조의 문장을 모표의 대명사로 삼었을까 하는 것인데 1800년대 말에 서양에서 양복이 들어오고 신식 군대인 한국무관학교 학생들이 군복으로 양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군모 모표에 이화(李花)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우리나라에는 문장이 발달하지 않었던 까닭에 따로 문장을 이용할래야 이화외는 이용할 문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문장(紋章)이 발달하여 일본의 경우 각 가문마다 가문(家紋)이 따로 있어 예복의 양 팔과 등뒤에 가문을 붙이고 옛 무사들의 깃발에도 반드시 가문을 표시하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문장원’(紋章院)이라는 기구가 따로 있다고 들었다. 발에는 버선이 아닌 목양말을 신었고 신은 검정 고무신을 신었는데 고무신은 3·1운동후인 1920년대 초에 처음 나왔다고 들었는데 ‘별표’ ‘활표’‘대륙표’ ‘삼천리표’등 이 있었다. 운동화는 고무신 보다는 비싼 신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만들지 못하고 일본 큐슈(九州) 후쿠오카(福罔)현의 쿠루메(久留米)시에서 만든 아사히(朝日) 표는 표를 이입(移入)해서 팔었다. 이입이란 용어는 그 당시 국제란 무역 거래는 수출입(輸出入)이라고한 반면에 국내간(일본 본토와 식민지 였던 조선) 무역은 이출입(移出入)이라 했고 국내외무역 전체를 통털어 수이출입(輸移出入)이라 했다. 그 당시 예산에는 ‘성한영’ ‘박태만 ’ 등 고무신 가게가 세집쯤 되었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29 호 / 2001-03-05
867 : 제목 : 보통학교 입학할 무렵(2)
부제목 :
1934년(8세)에 예산 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보결로 들어 갔다. 그 당시는 학령이 만 7세 였고 그때 내 생일이 1927년 11월로 만6세 4개월이었으니까 8개월이 미달이었다. 그 때 보통학교에 입학 하자면 면접시험을 치렀고 열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해 보였는데 그때도 분홍인조견 두루마기를 입고 갔다. 합격자 발표는 학교 운동장 끝의 판자 울타리에 붙여 놓았다. 그 때는 입학생들은 8세 짜리는 드물었고 9세~10세 짜리가 대부분 이었는데 나이많은 아이들부터 뽑은 것 같다. 그 이유는 나이 많은 아이들은 그 해에 못들어가면 영영 공부할 기회를 잃지만 나이가 적은 아이들은 다음해에 라도 들어갈 수 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보통학교도 못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월사금이 50전 정도로 기억되는데 그것을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학교도 한 동리에서 몇명만 다녔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산성리에 있던 강습소인 ‘성광학원’엘 다녔다. 나는 월사금 내기가 어려워 입학을 포기한 아이가 있어 그대신 보결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같다. 담임선생은 조동주 선생인데 청양군 화성면 출신으로 코 밑에 수염을 기르고 근엄하게 생긴 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일본 명치왕(明治王) 의 옆모습과 많이 닮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교과서가 국어(일본어)조선어의 두가지뿐 산술(산수)책도 없었다. 창가(음악)시간에 조선말로 “‘피었네 피었네 하얀꽃이 피었네…’를 배웠다. 교실은 본관의 서쪽 맨 끝방이었는데 교실 밖에는 신발장이 있었고 교실안에는 나무로 만든 쓰레기통이 있었으며 교실밖 복도에는 가래침을 받는 타구(唾具)가 있었다. 타구에는 물이 반쯤 담겨 있었다. 그 당시에는 폐결핵 환자가 많았던 시절 이었으므로 가래를 함부로 아무데나 뱉지 못하게 하기위한 설비였다. 그런데 기왕 타구를 마련하였으면 석탄산 같은 소독약을 타구에 타넣었어야 마땅한데 맹물만 담았으니 그야말로 형식만 갖춘 무용지물이라 할 것이다. 그때 우리학교는 1학년이 3학급(남자 두학급 여자 한학급 이었고 2학년부터 6학년까지 5개 학년은 2학급중 1학급은 남녀 공학으로 10학급였으며 총 13학급으로 교사가 교장까지 13명이었다. 그 당시 기억나는 것은 이꺼베 교장과 우리 담임인 조동주 선생, 여자 1학년 담임인 김옥동 선생과 우리 이웃에 살던 일본인 여선생 세도구지 선생의 네분 뿐이다. 김옥동 선생은 수솜씨가 뛰어나 빨간 비단에 수를 놓아 우승기를 만들 정도였다. 그분은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길게 입고 굽이 굵은 검정 구두를 신었으며 머리는 목 뒤 쪽을 찌는 자리에 정구공만하게 머리를 뭉쳐 매 달았는데 그 모양을 까미라고 하였다. 그런 스타일은 그 당시의 신여성 스타일로 기독교회의 전도부인들 역시 그 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전도부인 스타일이라고 불렀다. 세도구지 선생은 일본 고유의 여자의상인 와후구(和服)를 입고 다녔다. 요새 흔히 일본 여자옷을 기모노(着物) 라고들 하는데 기모노란 일본말로 옷이란 뜻으로 남녀 의복 구별없이 옷의 총칭이다. 그 당시는 여성 양장이나 파마가 없었다. 남자선생들의 복장은 주로 모직의 세루나 사아지(serge)로 된 검정이나 감색의 단추가 다섯개 달린 일본말로 쓰메에리를 입었는데 쓰메에리는 복장 자유회관의 중·고등학생들이 입던 깃을 세운 옷이다. 교사들이 넥타이를 매는 일은 드물었고 예식때 입는 예복으로는 모닝코트를 입었다. 1995년에 발간된 예산국민학교 83년사를 펼쳐보니 나의 1학년때의 교사수는 총 13명 중 조선인 교사수는 남자 6명에 여자 1명 이었고 일본인교사는 교장을 비롯하여 남자 5명에 여자 1명 이었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30 호 / 2001-03-12
926 : 제목 : 예산보통학교(1)
부제목 :
예산 보통학교는 1912년 5월 10일 개교했다. 1910년 8월 29일치욕의 한일합방후 일본사람들이 1면1교(1面1校)를 목표로 삼아 우선 각 군 현 소재지에 보통학교 하나씩을 세우도록 했는데 현재의 예산군 관내에서는 대흥 보통학교의 개교일이 예산보다 1년빠른 1911년 9월 1일 이었고 덕산 보통학교는 예산과 같은 해인 1912년 11월 8일 이었다고 한다. 『예산83년사』의 제1회 졸업사진을 보면 학교 교사는 보이지 않고 빈터에 회전탑만 보이는데 향교밑에서 학교 교실로 쓸만한 큰 집이라면 아마 성낙규(成樂奎씨:성원경씨의 선고장)집 밖에 없었다. 그 집은 해방후 한때 예산 침례교회 건물로도 쓰였다. 제1회 졸업생은 28명 이었는데 독자들이 알만한 분들로는 이태규박사(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仲父) 최세진씨(세무사 최원백씨의 선고장으로 1950년 전후 조흥은행 예산 지점장) 김세환씨(최세진씨의 매부)가 보이고 일본인 교장은 검정 일본 해군장교 제복에 지휘도를 차고 있는 것이 이색적 이라고 하겠다. 그 당시는 공직자나 교원들이 모두 이런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씨도 경성법전(京城法專)교수시절 이와같은 제복을 입고있는 것을 사진에서 보았다. 개교 초기의 수업 연한은 4개년 이고 교과복은 수신 국어(일본어) 조선어 산술(산수) 이과(理科) 도화(미술) 체조(체육) 농업 이었다고 한다. 통학 구역중 예산읍,대술면,신암면,오가면은 예산현 관할구역 이었고 신양면의 4개리는 대흥군 관할구역 이었다. 금오산밑 현 교사로 신축하여 이전한 것은 1923년 1월 이므로 12년간을 구교사에서 보냈다. 새 학교터는 예산현의 동헌(東軒) 자리로 예산에서는 으뜸가는 명당 자리 였다 한다. 운동장 가운데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그 옆에 가지가 늘어지지 않는 버들(楊)한 그루가 있었는데 오래 묵어서 대단히 굵었다. 그 버들로 빗자루를 만들어 운동장의 눈을 치울때 요긴하게 쓰는 것을 보았다. 교문밖에는 느릅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때 휘장은 긴 타원형의 까마귀 날개속에 한자로 예보(禮普)라고 쓰여 있었다. 초창기 제16회 까지는 남학교수(敎授)라 했다. 조선사람은 남학생 뿐이었고, 여학생은 제17회(1926년 입학,1932년졸업)에 10명이 처음으로 졸업했다. 그 당시 초등학교 교사는 훈도(訓導) 중등학교 교사는 교유(敎諭) 전문학교와 대학의 교사는 교수(敎授)라 했다. 조선사람 초등학교는 보통(普通)학교라 했다. 일본사람 초등학교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라 했는데 심상이란 비상(非常)의 반대말로 보통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심상 소학교 에는 대개 2년과정의 고등과가 같이 있어서 이런학교를 심상 고등소학교라 했다. 인접군인 홍성 보통학교엔 특별히 고등과가 있었지만 고등보통학교라고 부르지 못한 까닭은 그 당시 조선사람 중등학교 이름이 고등 보통학교 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의 3학년 담임선생은 김문환 선생 이였는데 음악을 잘 가르쳤고 오르간을 잘 쳤다. 그 때 『종달이』 라는 노래를 일본말로 배웠는데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껄 껄 꺼럭보리 패였네/비 내리면 썬득 썬득/ 바람 불면 흔들 흔들/ 종다리 어미새는 애가 타요 애가타/ 새끼들은 벌거숭이/ 콜록 콜록 감기 들었다/ 짱짱해라 보리야 꼿꼿해라 보리야” 그 때 성원경씨가 후원회장 이었는데 전축과 마이크 장치 싸이렌과 의식때 덮는 두꺼운 초록색 고급 책상보를 기증했는데 책상보 전면하단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금실 미싱수로 새겨져 있었다. 그 때 전축이나 마이크 장치를 처음 보았고 싸이렌은 경찰서가 낮 12시와 화재 발생시 울리는 것으로, 우리학교 싸이렌은 경찰서 것보다는 소리가 적었지만 자랑거리 였다. 싸이렌은 본관 지붕 용마루의 중앙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새로 옮긴 본관은 목조 단층 10개 교실이었는데 교실 하나는 직원실로 썼다. 본관 뒷쪽에 별관으로 조선 기와를얹인 목조 건물이 있었는데 벽은 백회를 발라서 쌓고 교실이 넷 이었다. 본관은 두꺼운 회색 서양식의 단단한 시멘트 기와지붕 이었고 골격은 목조인데 외벽은 얇은 나무조각을 짧게잘러 목재와 목재 시이에 잔 못으로 고정 시키고 그 위에 두꺼운 검은 종이를 붙이고 다시 철사망을 붙인 다음 그 표면에 세멘트를 비벼 뿜어서 붙이는 공법으로 마감 했는데 언뜻 보기에는 콘크리이트 건물로 보였다. 그런데 1936년경 본관 동쪽 다섯 교실중 중간부의 세 교실이 기울어 지붕과 벽을 헐고 보수 세멘트 뿜어 붙이지 않고 판자를 물고기 비늘 겹치기 식으로 가로로 길게 붙인후 콜탈을 발러 본관의 동부와 서부가 서로다른 모양을 하여 보기에 좋지 않었다. 우리 학교에는 원래 강당이 없기 때문에 각종 실내행사시는 위에 말한 본관 동반부의 세 교실의 중간 칸막이를 들어 내고. 책 걸상은 복도에 내다 쌓았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31 호 / 2001-03-19
975 : 제목 : 예산보통학교(2)
부제목 :
1937년 7월 일본과 중국간에 전쟁이 터져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세상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조선어 교육은 그 전에 이미 없어졌고 국어상용이라 하여 조선말을 못하게 했고 지원병제도가 생겨 조선청연들을 싸움터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1938년 4월 조선 교육령 개정에 따라 학교 이름이 예산 본정(本町)공립 심상 소학교로 바뀌고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로 여자 고등보통학교는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다. 일본사람 소학교는 이름을 예산 와카마쓰 공립 심상 고등 소학교로 바꿨다. 이 무렵 학생들의 복장은 대부분 양복(바지는 반바지)을 입었으나 25회 비진학반에는 조선옷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은 사람이 셋이 있었다. 우리 선배와 1년 후배의 복장에 대해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22회 진학반 양복6명 비진학반 전원 조선옷. 23회 진학반 양복 19명 비진학반 양복 28명 26회 비진학반 조선옷 1명. 그때 남학생은 제복이 따로 없었으나 양복 소매에 흰줄을 달았다. 여자들은 제복이 있었다. 여자 제복은 양복이 아니고 치마 저고리인데 치마는 검정치마에 흰 줄을 둘렀고 저고리는 짙은 수박색 이었는데 그 때 나돌기 시작한 화학섬유로 기억된다. 그 때 조선 학생들은 책가방을 들고다니는 학생이 별로 없었고 대부분 책보를 들고 다녔는데 일본 학생들은 모두 가죽란도셀(가방.ransel)을 메고 다녔고 여자는 모두 모직의 감색 세이러복을 입었다. 우리나라 여학생은 고등 여학생이나 돼야 비로소 세이러복을 입게 되는것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생활격차는 봉급 생활자의 경우 일본인들은 가봉(加俸)이 라하여 우리보다 50%을 더 받았다. 가봉이란 일종의 식민지 근무수당 같은 것이었다. 1939년 6학년때 담임선생은 “사토오 요시오”라는 일본인 이었는데 경성사범을 나온 1종 교사로 총각이었다. 이 선생은 일본인 특유의 발끈하는 성질이 없고 학생을 때리거나 욕 지거리를 하는 일이 없는 점잖고 성실한 교사였다. 그 조상은 백제시대 일본정부에서 내대신(內大臣)등 고관을 지낸 일본 역사상 유명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인데 여러해전 KBS TV 제1방송에서 방영된 역사 드라마 ‘삼국기(三國記)에서 신지백(神祗伯)으로 불리던 사람이다. 신지백이란 옛날 일본에서 신(神)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보던 관청의 장관이란 뜻인데 그런 연유로 ‘사토오’선생의 선조는 대대로 신사의 신관 노릇을 했다 한다. 필자가 ‘사토오’선생에게 “선생이 우리 피를 받었다면 그 증거로 필시 아들이나 손자들의 엉덩이에 몽고반(蒙古斑)이 있어야 마땅한데 과연 있더냐”고 물었더니 “있더라”는 대답을 들었다. 선생은 아사히(朝日)여관의 2층 서쪽다다미방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만년필은 항상 두자루를 꽂고 다녔다. 한자루는 답안지 첨삭(添削)용의 빨간잉크가 들은 ‘파일롯트’표 만년필 이었다. 선생은 우리보다 2년 선배인 23회 졸업생을 5학년 2학기부터 6학년까지 계속 담임하여 당시 서울의 일류학교를 비롯하여 여러학교에 많은 합격생을 배출하는 공을 세웠다. 우리보다 1년 선배인 24회 담임의 경우 그 역시 일본인 이었는데 부부교사로 부인은 공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관계로 토요일만 되면 공주가가에 바뻐 수험생 지도를 소홀히 해서 서울의 일류학교 합격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적으로도 성적이 불량했다. 그래서 ‘사토오’선생이 6학년 담임을 1년간 쉬고 다시 우리 6학년 진학반을 맡았는데 열심히 가르친 결과 또 다시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자 진학반 69명중 상급학교 합격자는 경기중학 1명 경복중학 1명 양정중학 2명 성남중학 1명 중동학교 1명 경성전기 1명 대신상업전수 1명 동신상업전수 1명 인천직업 1명 대전직업 1명 공주중학 2명 강경상업 1명 예산농업 7명(55명모집)으로 총 21명 이었다. 여자반 합격자는 공주 여자사범 1명, 숙명고녀 2명, 대동고녀 1명, 정신여학교 1명, 향상여자실업 1명, 경성여자상업 1명으로 총 7명 이었다. ‘사토오’선생은 우리를 졸업 시킨후 계속하여 우리 1년 후배들의 6학년을 담임하다가 1940년 12월 26일 예산에 온지 4년만에 조치원으로 전근했다. ‘사토오’선생은 예산학교 근속 4년중 3년이나 6학년 진학반을 담임했던 공로자였다. 그때의 ‘스로우건’은 국체명징 내선(일본내지와 조선)일체 임고단련(忍苦緞鍊)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이었으며 각 학교에는 신사(神祠)일본의 국조여신(國租女神)을 모시는사당을 짓고 각 가정에 까지 가미다나(신주를 모시어 두는 장)을 모시라고 강요했다. 가미다나는 대개 벽에 붙은 선반위에 놓기 마련인데 천주교회의 간부신자 한분이 방의 도배를 하느라고 가미다나를 방바닥에 내려놓은 것이 경찰서의 고등계(高等係:사상범 담당)형사의 눈에 띄어 문제가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기독교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사상을 의심받기가 일쑤였다. 그때 일본과 전쟁하던 중국의 ‘스로우건’은 ‘유력출력(有力出力) 유전출전(有錢出錢)’이었는데 그 뜻은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나라에 바치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나라에 바쳐 승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우리학교는 그때 1.2학년은 4학급씩 8학급, 3,4,5,6학년은 3학급씩 12학급으로 총 20학급이었고 학생수는 1,200명 이었는데 충청남도에서는 천안, 강경 학교와 함께 큰 학교에 속했다. 그 때 우리학교 휘장은 까마귀의 둥근 날개안에 일본 신화에 나오는 삼종의신기(三種神器)인 거울과 칼과 구부러진 구슬(장신구)을 그려 넣었는데 거울 표면에 한자로 예본소(禮本小)의 석자가 들어 있었다. 그때 교가는 없었고 운동회때 부르던 응원가가 있었는데 가사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고 곡은 일본 군가에서 본뜬 것이었다. 무한천 넓은 들에 가을은 깊어/짙푸른 쪽빛하늘 맑게 개였네/ 드높은 금오의 산봉우리는/ 우리들의 기상을 나타냄 일세/ 보아라 예산 건아들의/ 꾸준히 갈고 닦은 날랜 솜씨를/ 뽐낼때는 이때다 눈 부시도록/ 정정 당당하게 어서 겨뤄라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32 호 / 2001-03-26
1022 : 제목 : 예산농업학교(공주시절)1
부제목 :
예산 농업학교는 충청남도 최초의 근대적 학교였다. 고종22년(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사학이었고 관학으로는 1895년에 설립된 한성 사범학교가 있었으며 서울종로구 경운동에는 교동 소학교가 있었지만 보통학교는 1910년 한일합방 다음해인 1911년부터 생겨 났으며 중등교육기관의 설치근거인 칙령제 53호 “실업학교령”은 융희4년(1910년)에 학부(學府)가 이를 공포함에 따라 “예산농업학교”의 전신인 “도립 공주농림학교”는 수업연한을 2년으로 하여 1910년 7월 26일 현 공주시 산성동에서 개교하였다. 그 당시의 학부대신은 필자의 삼종숙(三從叔)이 되는 강암(剛庵) 이용직씨 였는데 그 분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때 장인 되시는 양주조씨인 좌의정 조병세씨와 같이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장인만 돌아가고 이대신은 살아 남었다. 1910년 한일합방에 강경하게 반대한 각료로써 1919년 삼일운동때 그당시의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께시(原敬)에게 청풍김씨인 운양(蕓養) 김윤식씨와 조선독립 청원서를 낸 일로 1년 6개월 징역에 집행유예 3년에 처하졌다. 김윤식 선생은 그후 조선은행권 지폐에 긴 수염과 정자관을 쓴 모습으로 초상이 새겨졌다. 도립 공주농림학교는 1911년 11월 1일 조선 교육청 실시로 공주공립농업학교라 개칭되고 1919년 학칙개정으로 수업연한이 2년에서 3년으로 연장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은 4년제 보통학교가 1911년부터 비로소 개교했는데 도립 공주농림학교는 그보다 1년전인 1910년 7월 26일에 이미 개교했으니 어떠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입학했느냐 하는 것이다. 입학자격에는 16세 이상으로 보통학교 4년 졸업자로 규정되어 있는 바 그 당시 보통학교 4년 졸업자가 있을 수 없었던 만큼 편법으로 보통학교 4년 졸업자와 동등한 자격자로 학문지식이 상당한 사람들을 뽑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때 각 농업학교의 입학자격을 보면 나이는 12세이상 13세이상 14세이상 15세이상 16세~25세 이하로 되어있고 그 외의 조건은 상당한 재산이 있어 졸업후 실지 경영 할 수 있는자, 농업에 종사할 의지가 견고한 자, 상당한 자산이 있는자, 재학중 가사에 방해가 안되고 학자금 공급이 확실한자 상당한 토지자산이 있는자 등으로 되어 있다. 1910년에 공포된 실업학교령을 보면 실업학교의 종류는 농업 상업 공업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농업국가인 관계로 농업학교 만이 주로 각 도청 소재지에 세워졌는데 그 당시 설립된 농업학교는 공주, 청주, 전주, 광주, 진주, 대구, 해주, 춘천, 평양, 의주 함흥 등지 였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33 호 / 2001-04-09
1106 : 제목 : 예산농업학교(공주시절)2
부제목 :
도립공주농림학교는 초대 교장이 충청남도 농무과 기사(技師)인 이브스키 다께기치(指宿武吉)선생이 겸임했고 교사는 조선인 1명 일본인 5명으로 교장을 포함 총 7명 이었다. 교과 과목은 교장이 수신(도덕)을 맡고 조선인 교사는 조선어, 한문, 양잠을 맡았으며 일본인 교사는 임업, 작물, 일어, 물리화학, 원예와 비료를 5명이 분담했다. 학교 교사는 금성학교를 빌어 썼으며 시설은 논 2,000평, 밭 3000평 임야 50정보, 과수원 1500평, 버들밭 500평, 우사 잠실 20평 정도, 기숙사 1동 24실에 불과했다. 교사들은 검정 제복 제모에 지휘도를 패용했고 학생들의 복장은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는 길게 땋고 다녔으며 신발은 짚신을 신었다고 한다. 그당시 입학시험은 없었고 각 학교에서 추천된 우등생으로 입학했는데 정원은 50평 모집인데 50명 내지 70명 정도를 뽑았고 1학년은 수업료가 면제되고 2학년 에서는 월 1원 미만이었으며 학교 경비가 연 5000원 내외에 불과했다 한다. 제1회 졸업사진을 보면 전원이 양복을 입고 있는데 그 양복은 학생들 옷이 아니고 학교에 비치했다가 졸업식때만 빌려주는 양복으로 오늘날 대학졸업식때 빌려입는 가운과 같았다. 1919년 5월 1일 학칙개정으로 수업연한이 3개년으로 연장되고 그후 1922년 4월 1일 학교를 예산으로 이전하게 되였다. 이전할때 학교의 모든 짐은 10여대의 우마차에 싣고 학생과 교직원들은 책, 걸상을 질머진채 40km의 길을 걸어 왔는데 예산역까지 기차가 개통되기 두달전 이었으니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교가는 다음과 같다(1910~1933) 교가 1.황금빛 벼이삭에 농의글자는/ 우리들의 그리운 모표이며/ 옷깃에 빛나는 A의 글자는/ 애그러 칼춰의 머릿자 일세 2.시세는 날로 달로 줄달음쳐/ 부국 평화의 주춧돌되고/ 농촌 개량의 중한 소임은/ 모두 우리 건아들의/ 두어깨에 걸렸도다 3.우리 맡은 책임이 자못 무거워/ 넓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며/ 아침 저녁 스승의 가르침 따라/ 몸과 마음힘써 갈고 닦세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35 호 / 2001-04-23
1145 : 제목 : 예산농업학교-예산시절1
부제목 :
공주농업학교가 예산으로 이전하게된 연유는 이러하다. 1920년까지만 해도 보통학교 학생을 모집하러 다니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신식교육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였다 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말만 할 수 있다면 어디고 취업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1921년부터는 형편이 달라져서 입학경쟁율이 서울의 경우 보통학교가 11:1 고등보통학교가 25:1이라는 엄청난 경쟁율을 보였다 한다. 이와같이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의 입학경쟁율이 높아지게 되자 일제는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의 신설이 불가피하게 됐다. 그러자면 초등교원의 양성이 당면한 과제가 됐다. 당시 총독부는 각도에 사범학교 설립을 명령하게 되었으나 충청남도 재정형편으로는 공주농업학교 이외 사범학교 설립이 어려웠다. 그 무렵에 홍성에서는 고등보통학교 설립기성회가 활발히 움직이고 홍성지방에 고등보통학교 설립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므로 충청남도에서는 공주농업학교를 홍성에 이전하고 그 자리에 사범학교를 설립코자 하였다. 그러나 홍성지방 유지들은 실업학교인 농업학교는 필요없고 인문계인 고등보통학교 설립만을 고집하고 원래의 약속인 학교대지의 제공과 교사 신축비의 부담을 거절하였다 한다. 이에 당황한 도 당국자들은 충남서북부지방의 경제권을 잡고있던 호서은행(지금의 하나은행 예산지점건물)의 경영층인 김용우(金容禹:일명 김진섭)성원경에게 사정을 하면서 예산지방이 받아줄 것을 간청하므로 이 분들이 학교대지를 제공하고 교사 신축비의 대부분을 희사함으로써 예산에 이전하게 되었다 한다. 학교가 공주에서 이전된 후 학교이름이 충청남도 공립 농업학교로 바뀐 것은 당시 교장인 指宿武吉선생의 청원에 의한 것 이었다고 한다.(이상 참고도서 예산농학 80년사) 농업학교의 이전을 거절한 지금의 홍성은 원래의 지명이 홍주(洪州)였다. 주(州)는 큰고을로 정3품인 목사(牧使)를 두었는데 전국의 모든 주가 한일합방후 지금까지 옛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데 반해 유독 홍주만이 홍성으로 바뀐 이유를 추측해 본다면 경기도 광주(廣州) 전라남도 광주(光州)황해도 황주(黃州)가 모두 일본발음으로 “고우슈”이고 충청남도에서는 도청소재지인 공주(公州)와 같은 도내의 홍주(洪州)가 모두 일본발음으로 같은 “고우슈”가 된다면 한 도안에서 혼동을 일으킬 염려가 다분히 있어 이를 막기 위해 홍주목의 머리글자인 홍자와 같은 관내인 결성현(結城縣)의 밑글자인 성에서 한자씩 떼어다가 붙인 합성지명 이었을 가능성이 짙다고 하겠다. 우리나라는 원래 조선8도라 하였는데 그 이름의 근원을 상고해 보면 각도마다 큰고을인 두개 주의 머리글자 하나씩을 떼다 붙인 합성도명으로 충청도는 충주(忠州)와 청주(淸州)(한때 공주와 청주를 합해 공청도(公淸道)라고 부른때도 있었다.) 전라도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 경상도는 경주(慶州)와 상주, 강원도는 강릉(江陵)과 원주(原州), 황해도는 황주(黃州)와 해주(海州), 평안도는 평양(平壤)과 안주(安住), 함경도는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인데 경기도라는 이름은 기내(畿內)와 같은 뜻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가까이 뻗어있는 행정구역 이라는 뜻이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36 호 / 2001-04-30
1167 : 제목 : 예산농업학교-예산시절2
부제목 :
1922년 4월 1일 학교를 예산으로 옮긴 후 학교이름을 거창하게도 충청남도 공립 농업학교로 바꾸었다. 그 당시의 교사 사진을 보면 교실이 네칸인데 한칸은 교무실로 보이며 동쪽방향으로 현재도 남아있는 교장관사가 멀리 보이는데 그 옆에 있어야할 교원관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건물은 추후로 지은듯 하다. 본관과 교문의 중간에 있는 건물은 꽃을 기르는 온실인 듯하다. 필자가 재학시절 교장관사에 간일이 있었는데 응접실은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본관건물은 1926년 2월 11일 밤 화재로 지은지 4년 만에 전소 했다. 화재원인은 그 날이 일본 국경일인 기원절(記元節)로 행사에 참석했던 시내 유지 접대관계로 교사 본관에 붙어있는 숙직실 아궁이에 불을 많이 때어 과열로 줌방에 불이 붙어 연소된 것으로 결론지은 모양이다. 그러나 야간이고 또 문이 모두 잠겨서 아무것도 꺼내지 못하고 완전히 타 버렸으나 오직 당시 제4대 교장이던 사메지마 선생이 주먹으로 유리창을 부수고 들어가 교육칙어(敎育勅語)만 꺼내 교장관사에 옮겼다 한다. 교육칙어란 일본 제122대 명치(明治)왕(현 평성(平成)왕의 증조부)이 1890년 10월 30일에 내린 칙어로 국민교육의 대본을 설명하고 국민도덕의 요지를 나타낸 것으로 일본국민이 가슴깊이 간직해야 하는 불멸의 신성한 문헌이라 한다. 그 내용은 “짐이 생각하건대 나의 선조 임금께서 나라를 건국하심이 고원(高遠)하였고 덕을 수립(樹立)하심이 심후(深厚)하였도다…” 로 시작되는 장문의 한일혼용체(漢日混用?)문장인데 지금 생각해도 명문(名文)이다. 이것을 국경일 등 의식때면 반드시 교장이 읽는 것 인데 이것을 식장까지 받들고 오는 선생은 교장 다음 자리인 교무주임인데 모닝코트에 흰 장갑을 끼고 흰 마스크로 입을 가리기 마련이었고 옮기는 도중이나 읽는 동안에는 전원이 머리를 숙일만치 경건하게 행동하기를 강요 당했는데 화재 때도 이것만은 반드시 꺼내야 했고 만일 이것을 태우는 날에는 목이 달아난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1910년 한일 합방 후 이것을 조선총독에 하부(下付)했다고 되어 있고 끝에 어명 어새로 끝을 맺는데 어명 어새란 임금의 이름과 임금의 도장이 찍혔다는 뜻이다. 필자가 입학한 1940년대는 교육칙어를 보관하는 이른바 봉안고(奉安庫)를 본관 서쪽 앞뜰에 화강암으로 따로 지었는데 철책을 둘러 아예 통행 할 수 없게 성역화 했고 필자의 3년 선배인 마쓰모토(松本)라는 일본인 학생이 봉안고 전담인데 실습시간에는 다른 실습은 일체 시키지 않고 봉안고 경내의 잔듸밭의 잡초 뽑는 일만 시켰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37 호 / 2001-05-07
1187 : 제목 : 예산농업학교-예산시절3
부제목 : 향천리 개울에 취수조 묻고 상수도 사용
설상가상(雪上加霜)에 화불단행 禍不單行)이라고 할까 1926년 2월11일의 화재로 전소된 본관을 새로 건축중이던 목조 2층 건물이 1927면 2월 공사중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후 완전히 쓰러진 건축자재를 다시 맞추어 일으켜 세워서 준공 시켰는데 1층에는 특별교실과 실험기구등의 교구실과 교무실과 서무과와 교장실로 나뉘인 방이 있었고 2층에는 교실이 다섯이 있었는데 2층 동쪽의 첫째교실이 1학년 교실이고 그 다음이 2학년 교실이며 현관 윗층인 가운데 교실이 3학년 교실이고 서쪽맨 끝 교실이 5학년 교실이다. 필자가 졸업하던 5학년때는 본관뒤 기숙사 옆에 있는 1923년 3월에 준공된 양잠실을 교실로 썼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필자의 2학년 후배인 33회 졸업반이 입학하던 1942년부터 수의 축산과가 증설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강당을 새로 지었는데 명목은 우천 실습장 이었으나 각종 의식행사와 유도 검도 등 일본 무도장 등 다용도로 쓰였다. 해방후인 1957년에 동쪽벽을 헐고 길게 증축 하였는데 1987년에 이것을 헐었고 1988년 10월13일 운동장 아래쪽 옛 관사 자리에 강당겸 체육관(695평)을 준공했다. 특별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학교전용 상수도 시설이다. 수원은 향천리에서 발원하는 에산천의 상류인 향천리 최참봉(규석씨:선능 참봉)집 앞 개울에 둥근 취수조를 묻고 철판 뚜껑을 덮은 후 자물쇠를 채웠다. 수도 파이프 배관경로는 개울 북쪽 뚝을 따라 예산초등학교 강당옆 도로를 거쳐 예산초등학교의 운동장을 동서로 횡단한 후 군청뒤 현 법무사인 이기봉씨 집앞 밭에다 중간 시설물을 만들었다. 그 규모는 가로 세로 약2㎡에 깊이 2m정도의 수도파이프 연결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이 곳에서 수도파이프는 군청뒤에서 광안말로 해서 교장관사 옆에있는 교원관사담과 붙은 정수장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거리는 약 2㎞에 이를 것으로 짐작된다. 기숙사 밖의 저수조는 모양이 둥근 욕조처럼 생겼는데 둘레에는 십여개의 쇠파이프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 위 저수지로 흘러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 필자가 곰곰히 생각을 더듬어 보니 음료수로 쓰기 위해서는 샘을 몇개 파면 될것을 그렇게 하지 않고 거창하게 전용 상수도 시설을 한것을 운동장 밑의 실습용의 논을 위한 수리시설로 쓰기위해서 한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무튼 그 발상자체는 놀라운 일이었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38 호 / 2001-05-14
1220 : 제목 : 예산농업학교-예산시절4
부제목 : 일본인이었지만 훌륭한 교육자였던 초대 교장
공주농업학교는 예산으로 이전한 1922년 4월 1일 부터 1932년 3월 31일까지 10년간 충청남도 공립농업학교라 불렀는데 초대교장인 이브스키 다케기치(指宿武吉))선생은 창립당시인 1910년 8월 10일부터 1915년 3월 31일까지 5년간과 1920년 4월 1일부터 1924년 3월 31일까지 5년간 제 3대 교장으로 두번에걸쳐 10년간을 근무했는데 그에 대한 일화(逸話)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을 자칭 내지(內地)라 하고 자신들을 내지인 이라고 불렀으며 조선을 조선, 조선인을 반도인 이라고 하여 은연중 차별이 심한때 였으나 선생은 정신면에서나 행동면에서 차별의식이 조금도 없는 진실하고도 경륜이 탁월한 교육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한 예로 강태석(본교 7회)씨가 공주신사에서의 제례당일 제단에 계약한 일장기봉을 부러뜨렸기 때문에 현장에서 체포되어 1년간 투옥끝에 가석방 됐다. 그후 종종 학교에 들러 후배학생을 모아놓고 항일사상을 역설해도 指宿교장은 아랑곳 하지않고 재학당시 보다 더욱 친절을 더해 졸업생 으로서의 예우를 다해 주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12회 졸업생이 3학년때 (1923)일본 왕세자 즉 소화왕(昭和王)의 약혼식에 대한 특집으로 잡지에 실린 왕비가 될 여자의 사진을 어느 학생이 오려다가 교실벽에 붙였는데 그만 한 학생이 여자의 사진 두 눈을 긁어 버렸다. 우연히 이를 발견한 指宿교장, 아무말없이 사진을 떼어 주머니에 넣으면서 학생들에게 하는말 “이 사건은 영원히 함구령이다”라는 한마디로 묵살해 버렸다고 한다. 또 指宿선생은 1916년 당시 본도장관(현 도지사) 박중양(朴重陽)과의 사이가 좋지못해 황해도 농무과 기사로 전임 되었다. 그후 박장관(朴長官)이 황해도로 전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자 1920년 4월 1일자로 다시 본교에 부임. 1,3,대 즉 두차례 교장을 역임했다. 이와같이 전후 10년간 재임하면서 학생교육에 큰 차별없이 임해 조선학생 들로 하여금 “멋쟁이”교장으로 통했다. 이와같은 선생의 교육자적 양식과 고상한 인격의 품성을 기리기 위해 졸업생들이 1930년대에 모교 본관앞에 선생의 흉상을 동으로 건립했다. 그로부터 수년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유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포탄 제조용으로 강제 헌납케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길이 없게 되었으나 기단(基壇)과 좌대(座臺)에는 1966년 1월 10일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이 수여한 향토개발 최우수상 수상기념으로 앉힌 “근면”이라고 새긴 교훈탑이 남어 있다.(참고도서, 예산농학 80년사) 그런데 사진을 보면 指宿선생은 얼굴이 좁고 길은데 필자가 본 그 당시의 동상은 사진과는 달리 얼굴이 길지않고 왜소하게 생겨 사진과는 조금도 닮은데가 없어 보였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39 호 / 2001-05-20
1308 : 제목 : 예산농업학교-예산시절5
부제목 : 1940년 입학경쟁률 6대1
1937년 7월 7일 중국과 일본간에 북부중국의 노구교(蘆溝橋)에서 일어난 충돌사건은 중일전쟁으로 확대되고 그 3년후인 1940년 12월 8일에 이르러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 전세계가 전쟁에 휩쓸리게 됨에 따라 자연 학교도 전시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중일전쟁 이전부터 이미 각 학교에 교련과목이 생기기 시작했고 교복도 종전의 검정색이 1934년 입학생(1939년 3월 졸업, 제25회생)부터 국방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교련전담교사가 따로 없고 원예담당 다가바 선생이 교련교사를 겸임했는데 그는 치중병과 예비역 육군소위였다. 치중병(輜重兵)이란 오늘날의 병참(兵站)과 수송을 겸한 것이다. 그 후에 교련 점담교사로 카토오 선생이 촉탁교원으로 부임했는데 그는 기병(騎兵)출신의 예비역 육군준위 였다. 그외에 1943년부터 현역인 육군소위가 배속장교로 왔는데 그들은 천안에 살면서 우리학교와 경기도 안성농업학교의 두 학교를 맡었는데 필자가 졸업할 때 까지 2년간에 걸쳐 세사람이 배속장교로 있었다. 1,2,3학년은 맨손 군사훈련이고 4,5학년은 집총 군사훈련을 했는데 소총은 100여 자루쯤 되었고 사격을 할 수 있는 정식소총은 몇자루 안되고 대부분이 훈련용 소총이었다. 소총외에 경 기관총과 척탄통이 있었다. 소총의 모델넘버는 38식이라 불렀는데 38식이란 일본의 명치왕 38년(서기 1905년) 노,일 전쟁당시 나왔음을 뜻하는 것으로 그 10년전인 청일전쟁대는 무라타라는 사람이 만든 무라타총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99식 소총으로 바뀌었는데 99식이란 일본기원 2599년(서기 1939)을 뜻하는 것으로 이 총의 특징은 총의 길이가 짧아 남방의 열대정글지대에서 백병전을 하기에 알맞게 만들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일본은 이때부터 이미 착착 동남 아시아를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1940년 필자가 입학할 때는 입학경쟁률이 50명 모집에 지원자가 300명 이상으로 6대1이 넘었고 시험과목은 국어(일본어), 작문, 듣기(그 해에 한하여 산수대신 듣고 물음에 답하여 쓰기가 있었다)등 학과시험 외에 면접시험과 체력검사도 치렀다. 입학자는 55명인데 유급자 2명을 합하여 총 57명이고 출신 군별 분포는 예산군 23명 아산군 6명 천안군 3명 연기군 1명 당진군 2명(유급 1명) 공주군 1명 서산군 4명 청양군 7명 부여군 1명 논산군 1명 전북 무주군 1명이었고 특히 예산군내의 출신학교별 분포는 예산본정 9명(재서 1명 유급 1명 예산와까마쓰 2명(조선인 1명)오가 4명(재수 1명) 신양 3명, 대흥 3명, 고덕 1명 신암 1명이고 일본인은 3명인데 예산 1명, 홍성 1명, 청양 1명이었다. 충청남도내에서 입학생을 하나도 내지못한 군은 서천군과 대전부 대덕군이고 예산군내 6년제 소학교 중 입학생을 하나도 내지못한 학교는 광시, 삽교, 덕산 이었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41 호 / 2001-06-11
1441 : 제목 : 예산농업학교-전시체제시절2
부제목 : 물자 귀해 쇠가죽 구두가 돼지가죽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난후 물자의 품귀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생활에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필자의 2년선배가 입학한 1938년 까지는 쇠가죽 구두를 학교에서 사 주어서 신었는데 1년선배가 입학한 1939년에는 돼지가죽 구두를 신었고 필자가 입학한 1940년에 이르러서는 짐승가죽은 자취를 감추고 물고기인 상어가죽 구두를 신게 되었다. 쇠가죽 구두는 창도 가죽창 인데 청창과 홍창의 두가지가 있었다. 질기기는 청창이 질긴데 물에 젖으면 누굴 누굴해 지는 것이 흠이었다. 돼지가죽은 쇠가죽보다 약해서 아예 가죽으로 쓰는 일이 없었는데 워낙 쇠가죽을 구할 수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돼지가죽은 가죽 표면에 털구멍이 세개씩 숭숭 뚫여 있었다. 상어가죽 구두는 매낀하지 않고 악어가죽처럼 두둘 두둘 했는데 한달만 신으면 종이처럼 피어서 찢어 졌다. 창은 가죽창이 아니라 그 때 처음 등장한 고무창 이었는데 지금의 고무창 처럼 질기지 않고 뚝뚝 부러졌다. 그 이유는 생고무를 섞지 못하고 순전히 재생고무 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탄력성이 없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제복은 그런대로 양복감이 있어서 사정이 좀 나은편 이었다. 우리 학교에 제복이나 구두를 납품하는 지정업자는 서울의 ‘죠지야’라는 일본 백화점인데 지금의 미도파 백화점이 전신이었다. 필자가 2학년때인 1942년 초겨울 필자의 동급생 세명이 퇴학당하는 사건으로 오가사하라 교장이 함경남도의 북청 농업학교 교장으로 좌천 되었다. ‘오가사 하라’교장은 1935년 4월 1일부터 1943년 3월 31일까지 8년간 경성(京城)농업학교 교무주임을 거쳐 본교 교장으로 근속하였는데 성품이 과묵하고 중후한 신사였다. 그 후임으로 제6대 교장에 전라남도 순천 농업학교 교장인 ‘이타’선생이 부임하였는데 그는 전임 ‘오가사하라’선생과는 딴 판으로 다변가로 성질이 활달한 것이 다분히 일본 무사기질을 갖고 있었다. ‘이타’교장은 꽤 멋을 부리는 선생으로 예비역 육군 소위 였는데 재향군인회 예산 분회장도 맡고 있었다. 그때 평교사들은 흔히 예복으로 모닝 코오트를 입고 교장쯤되면 프록 코우트(frock coat)에 중산모(dowler hat)를 쓰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특별히 음악가 등 연예인이나 입는 연미복(燕尾服 swallow tailet coat)에 흰 조끼를 받쳐 입고 모자는 실크햇(silk hat)을 쓰고 가슴에는 훈장을 달고 쩔렁 거리며 걷는것을 보면 퍽 멋있게 보여 장관이었다. ‘이타’교장은 부임하자 마자 교정에 나무가 울창하여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어 사고가 발생한다고 본관 바로 앞의 플라타너스 나무 두 그루와 온실 뒷쪽에 있는 희귀한 나무들을 솎아서 베어 버렸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44 호 / 2001-07-02
1542 : 제목 : 예산, 전국 5대 시장중 한 곳
부제목 : 예산상권의 역사1
예산은 우리나라 5대시장 이었다. 안성(安城)시장은 경기도와 충청남북도의 3개도에 걸친 시장이었고 강경(江景)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2개도를 상대하는 시장 이었으며(1914년 전라북도 관할에서 충청남도로 편입) 경상북도 김천(金泉)은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는데 이 시장들을 우리나라 3대시장 이라 불렀다. 그 다음가는 시장으로 경상북도의 대구(大邱)시장이 있었고 5대시장으로 꼽히는 예산시장은 충청남도 14개군 중(금산 제외) 그절반인 7개군(예산, 아산, 당진, 서산, 홍성, 청양, 공주군 유구지방)을 상권으로 하는 시장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후 예산은 이르자면 국제시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예산지방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미곡을 사들여 예산에서 12km거리인 “선장”포구(아산군 선장면 군덕리):지금은 삽교호 방조제 구축으로 수몰됨)에서 똑딱선에 싣고 인천항까지 옮긴후 일본으로 수출했다. 청국인들은 유럽이나 청국상품을 인천항으로 수입하여 선장포구를 거쳐 예산시장으로 들여다 팔었다. 그리고 인천항을 통해서는 일본상품도 예산시장으로 들어 왔다. 예산에서 대표적인 상점은 “김흥국”상점 이었는데 그 상점은 “주단포목이라 하여 비단 인조견 교직물 광목 등 옷감이 주종 상품이고 털실 겨울 내의, 런닝셔츠, 팬티, 학생복 외에 식료품 중에서는 유일하게 설탕을 팔았다. 광목 상표로는 “태극성(太極星)”표가 있었는데 “경성방직”제품 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태극표”라고 하면 구 대한제국의 국기중의 태극이 연상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태극에 별을 더하여 “태극성”으로 위장한 것 같다. 김흥국 상점은 점원이 십여명이나 되는 큰 상점 이었는데 점원의 대우는 초임봉이 관공리와 비등했다. 주인인 김흥국씨는 노령으로 상점 경영은 순전히 점원들에게 위임하고 가끔 지팡이를 짚고 상점을 둘러보는 것이 일과였다. 큰 아들은 보성전문학교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그 역시 상점경영에 간여하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알수가 없다. 그 상점은 충청남도에서 세금을 두번째로 많이 내는 상점으로 첫번째는 대전의 일본인 남부 교헤이(南部東平)였다고 한다. 다리 건너에는 개성상인인 황학주(黃鶴柱)상점이 있었는데 상품은 김흥국 상점과 같고 규모는 김흥국 상점에 버금 갔는데 경영은 큰 아들이 맡고 있었다. 그 외에 주단 포목점으로는 “이주현” “최경효” “유팽열” “양태복” 상점들이 있었는데 “이주현”상점은 김흥국 상점에서 “최경효” 상점은 “황학주” 상점에서 수석 점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퇴직한 후 각각 독립한 상점들 이었다. 황학주 상점 이웃에는 청국사람 상점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해천문(解天文)” 상점이고 하나는 엽서방 상점이었다. 그들 역시 주단 포목상들 이었고 규모는 제법 컸다. 지금의 삼선약국 건너편에는 공화동(公和東) 이라는 청국인 잡화상이 있었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46 호 / 2001-07-16
1622 : 제목 : 1930년대에는 읍내 전체가 시장
부제목 : 예산상권의 역사2
청국인 상점들은 상품 진열 방식과 상점 구조가 모두 은행의 영업대 처럼 영업대로 담을 쌓았는데 상점 안쪽벽에 유리달린 진열장에 상품을 진열해 놓아 손님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손님과 거래할 때는 상품을 영업대 위에 꺼내놓고 사고 팔았다. 청국인들은 주로 산동성(山東省)출신자 들로 그 곳에서 조선을 향해 배를 타면 직선으로 닿는 항구가 인천이고 인천에서 다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큰 시장이 예산이었기 때문에 그 들이 예산에 많이 몰리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상점외에 음식점에도 많이 진출했고 무한대교 넘어 밭에서 채소 농사도 지었는데 농산물 운반은 회창거리는 긴 목재 천평(天枰)대의 양끝에 채소를 담은 광주리를 달아맨 후 이것을 어깨에 맨채 예산읍까지 걸어나와 채소를 팔았는데 움막 비슷한 가 건물에서 살었고 모두 홀아비였다. 엽서방은 “엽고약”이라는 약효가 좋은 고약을 만들었는데 차동고개 넘어 공주군 유구까지 장사를 나갔다고 종기로 고생하는 과부를 고쳐준 인연으로 그 과부와 혼인하여 “남일여관”을 운영하였다. 예산 시장이 집단화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은 1936년경으로 기억되는데 그 전까지는 상품별로 여러곳으로 분산된 상태로 읍내 전체가 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곡물을 파는 싸전은 현 삼진상호신용금고 동쪽에 있었고 싸전 앞쪽에는 육간이 십여개의 연립점포를 구성하고 한줄로 서있었다. 동쪽의 제1호점부터 제7호점 까지는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팔고 제8호점 부터 제10호점까지의 세 점포는 개고기만 팔았다. 그 당시는 고기를 점포에서만 파는것이 아니고 부인들을 시켜 각 가정과 단골을 맺고 방문판매를 주로 하고 있었다. 고기를 이고 다니는 나무로 짠 함지박의 모양은 뚜껑이 덮힌 4각형이었는데 내면에는 함석을 붙여 수분의 누수를 막도록 구조가 돼 있었고 밑바닥은 좁고 위는 넓게 벌어졌는데 뚜껑의 한 귀퉁이에는 저을때 끝이 밖으로 나오도록 패여 있었다. 이 함집도 제멋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공동 제작한 규격품으로 경찰에서는 낙인(烙印)까지 찍어 주었다. 전 달나라 이발관앞 마당은 대추전이라 불렀는데 밤, 대추, 감, 은행, 사과, 배 등을 파는 과일전 이었다. 다리건너 대흥약방 앞은 나무전과 숯전 역시 다리건너 황학주 상점옆은 생선전이었는데 개울가로는 관혼상제 때 쓰는 과줄 등 과자류와 사탕, 건어물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창성상회 뒷편 마당은 옹기전이었고 성결교회 앞 마당은 쇠전이었고 대추전 앞 개울가로는 재봉틀을 놓고 조끼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조끼전이 10여호 집단해 있었다. 조끼는 18세기말 개화초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양복의 일부분인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모양을 길게 변형시켜 저고리를 덮게 만들었고 주머니가 셋이나 달려 펀리성을 인정받어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복식제도로 양반계급은 저고리 위에 도포를 입고 도포자락에 물건을 넣을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나 일반 서민층은 동저고리 바람으로 주머니를 차고 나녔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었다. 그때 재봉틀은 모두 미국제인 “싱거”미싱으로 “인장”표와 “매표”의 두 가지가 있었고 “인장”표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로는 재산목록 제1호에 들 만큼 비싼 물건이었다. 그때 일본제 미싱으로 “자노메”(뱀눈)표가 있었지만 알어주지 않았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48 호 / 2001-08-06
1810 : 제목 : 매년 5월엔 예산 상민운동회 열려
부제목 : 예산상권의 역사3
조선사람 상점으로 업종별로 대표적인 상점은 도량형기(度量衡器)와 석유를 도매하는 윤창규상림이 있었고 맥주 대리점으로는 임도영상점이었는데 그때 맥주는 영등포에 공장이 있는 기린맥주와 삽뽀로 맥주의 두 가지 외에 일본산인 아사히 맥주와 사쿠라 맥주가 있었고 위 두 상점은 모두 개성상인 이었다. 한약 건재상은 삼산당(三山堂)약방이고, 건축 재료상으로는 오리동 전기회사 맞은편에 삼공상회가 있었는데 주종상품은 목재로 멀리 압록강변의 신의주에서 구입해다 팔았다. 겨울철 난방난로의 연료인 유연탄(有煙炭)은 일본구주(九州)지방에서 구입해서 팔았으며 동남아 원산목재인 라왕은 수입항구 인천에서 사다 팔었다. 지방에서 생산되는 조선목재를 파는 목재상은 조선인이 둘 일본인이 하나 있었다. 과일류와 경양식을 파는 집은 정만복(鄭萬福)씨가 경영하던 만복상회와 만복식당이 있었는데 1939년 양력 5월에 일본 시코쿠산 수박을 팔때 값이 4원(그 때 쌀 한가마니 값이 10원)이었으며 길죽하게 생긴 것이 상당히 컸다. 양품 전문점으로는 오원선(吳元善)상점과 백양(白羊)의 두 곳이 있었다. 곡물상으로는 극장 앞에 김준환 상점이 있었고 각종 물자의 위탁상 으로는 상신상회 김흥모(金興模)씨가 있었는데 김흥국상점(金興國商店)주인인 김흥국씨의 동생이었다. 일본인들의 기업활동을 보면 과자 제조업 3명, 석유 도매업 1명, 식품 잡화점 3명, 양약방 1명, 사진관 1명, 이발관 1명, 정미소 경영 1명, 의사 1명, 치과의사 1명, 담배 소매상 겸 탁주소매상 1명, 건축업 2명, 빵 과자 사탕 등 소매상 5명, 일본요리점(공창(公娼)겸업)2명, 여관업 3명, 아이스케이크 제조 및 밀집모자 제조 1명, 사기점 1명, 법무사 1명, 문방구점 1명, 조선목재상 1명, 미곡상 1명 철물 건축재료상 1명, 양잠업 1명, 종묘생산업 1명, 신사의 신관 1명, 절의 승려 1명, 지주 수명 이었다. 매년봄 5월에는 예산 상민(商民)운동회가 농업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예산 상민(商民)운동회’라고 표시된 전용 텐트가 두채나 있었다. 선수들의 복장은 운동복차림이 아니고 바지 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고 주판을 들고 출제된 계산 문제를 빨리 풀고 달리는 운동 등 다채로웠다. 그 때 농업학교 운동장은 예산의 공설 운동장 구실을 톡톡히 했는데 그럴때 마다 운동장 가의 은행나무 옆에 솥을 걸고 국밥을 끓여 팔았는데 구경꾼이 가을에 치르는 각급 학교의 운동회 만큼이나 많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1937년경 예산의 전화대수는 그무렵 창업한 건축 재료상인 삼공상회의 전화번호가 130번 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130여대 정도로 여겨진다. 이 원 규 예산초 25회 졸업/예농 31회 졸업/ 경기도 고양시 거주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53 호 / 2001-09-10
1854 : 제목 : 형평사원(衡平社員)의 피천말
부제목 :
지금 충일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원래 백장(百丈)들이 집단하여 살던 “피천말”이었다. 피천이란 비천(卑賤)이란 말을 되게 발음하다 보니 그렇게 변하지 않었나 생각되는데 “피천”이란 신분이 낮고 천하다는 뜻이다. 조선 500년간의 신분사회에서 가장 천한 계급에 속하는 것이 백정(白丁)이었다. 그러나 백정들 이라고 해서 모두 백정이 아니고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백정이던 예가 많았다. 고려가 망할때의 충신들인 고려삼은이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의 세 분인데 이씨와 정씨는 조선에 와서 다시 관계에 출사하여 오늘날까지 명문거족으로 행세하고 있으나 오직 길씨만은 경북 구미시의 금오산속에 묻혀 사는 바람에 후손들이 오늘날 백정이 된 사람이 많다. 백정 중에는 소, 돼지, 개 따위를 잡는 도한(屠漢)이 대부분이고, 버들가지를 겯어 고리짝이나 동고리를 만드는 고리백정 가죽신을 만드는 갓바치가 있는데 중종때의 병조판서 이장곤은 연산군때 함경로도 피신하여 고리백정의 사위가 되었고 요즘 SBS의 인기 드라마 여인천하에 나오는 동대문밖 갓바치는 정치가인 조광조가 선생으로 모시는 정도의 학식의 소유자로 백의정승이라고 까지 불리었다. 조선 철종 13년(1847)에 진주민란이 일어 났는데 그후 진주 백장의 사위(백정 출신이 아님)가 주동이 되어 백정들의 대동단결과 각성운동을 일으켜 이것이 후일의 형평사(衡平社)운동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형평이란 신분에 귀천이 없고 저울대가 평평해야 되듯이 만민이 평등 해야 된다는 뜻으로 백장들의 결사(結社) 명칭이 ‘형평사’로 그 조직원인 백장들은 ‘형평사원(衡平社員)’이라 불렀다. 요즘에 와서는 광우병이라는 새로운 가축 질환이 생겼지만 1930년대에는 미친개를 말하는 광견병이 창궐했었다. 그때도 광견병 예방주사는 놔주었는데 개 목사리에는 개 임자의 이름패를 달게 마련이었다. 이것을 흔히 개패라고 불렀는데 해방직전에는 입고 다니는 사람은 의무적으로 명찰을 가슴에 달게 했는데 이 명패를 비하해서 개패라고 불렀고 명패를 달고 다니게 한 까닭은 폭격으로 죽었을 때 시체를 구별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였다. 개패를 달지않은 개는 임자가 없는 개로 야견(野犬)이라 부렀는데 광견병 예방을 목적으로 형평사원을 동원하여 길바닥을 방황하는 개패 안 달린 개는 무조건 3m 가까운 긴 쇠꼬챙이로 찔러 잡게 했고 이것을 야견박살(野犬撲殺)이라 했는데 잡은 개고기는 형평사원 몫으로 점포에서 팔게 했다. 그때는 백장의 아낙들이 방문판매를 주로 했는데 호칭이 안주인 에게는 으레 아씨 마님이고 바깥 주인에게는 나리 서방님이고 백장의 아낙들에게는 하대조의 ‘해라’를 하는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백장의 아낙이 고기를 팔려고 예산초등학교 강당 근처의 어느 양반행세 하는 집에 갔을 때 바깥주인이 전처럼 ‘해라’를 했더니 고기를 팔지 않고 그냥 되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얼마후 남자 형평사원들이 개 잡는 쇠꼬챙이를 들고 떼를 지어 몰려와서 항의 데모를 한 일이 벌어진 후 부터는 예산에서 형평사원에게 ‘해라’로 하대하는 버릇이 쑥들어 갔다. 오늘날에 와서는 신분사회가 없어지고 평등사회가 되어 돈만 벌수 있다면 꺼리낌 없이 아무나 고기장사를 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선진국인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백정 거주지역을 부락이라 부르고 백정을 부락민이라 불러 멸시 천대하고 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촌 동네를 부락이라 부르 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지냈으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락이란 우리나라에서는 촌락(村落)이란 뜻이고, 일본인은 백정을 ‘에타’ 라 부르는데 직역하면 많이 더럽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54 호 / 2001-09-17
1948 : 제목 : 이미 시작된 종교 르네상스
부제목 : 예산의 종교단체1
1930년대 예산에는 여러 종교단체가 있었는데 창건 연조순으로 친다면 백제의 의자왕 16년(656) 의각대사에 의하여 창건된 향천사가 130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고찰로 가장 오래 되었다. 그러나 읍에서 2km나 떨어진 산속에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다음이 유교의 문묘(文廟)인데 유교는 조선조의 국교로 600년의 역사를 갖고 공자(孔子)를 모시는 문묘와 거기에 딸린 관립학교인 향교(鄕校)가 있었으나 일반 서민이 자주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 다음이 천주교(天主敎)인데 천주교는 정조(正祖) 18년(1794)에 청나라 신부(神父) 주문모가 처음으로 서울에 들어온지가 200년이 되었으나 예산에는 언제 들어 왔는지 확실치 않고 1933년 현재의 오리동교회를 벽돌집으로 신축하여 이전하기까지는 오리동에 있던 윤창규집에 있었기 때문에 이 역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가 창건한 천도교(天道敎)가 네번째인데 예산의 천도교회는 전 예일여관에서 서쪽으로 세번째 쯤 되는 골목에 있는 목조의 초가집으로 규모는 4칸 정도로 김두환(金斗渙) 화실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 집은 담을 치지 않은 길갓집으로 대청 뒷문을 열어 놓으면 길에서 안이 들여다 보였는데 모이는 사람들 중에는 양복 입은 사람은 볼 수 없고 주로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 뿐이었고 모임에 참석하는 인원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이 입고 다니는 조선옷의 특징을 들자면 동정은 흰 동정이 아닌 검정 동정을 달았고 두루마기에는 옷고름 대신 큰 단추 하나를 왼쪽 젖가슴 언저리에 달았는데, 이런것 들은 일종의 생활개선 운동이었다. 이 교회의 간판에는 천도교 예산교구라 쓰여 있었고 해방전에 교회건물을 맞은편길의 모퉁이집(전에 농업학교 이성구 선생이 살던집)으로 옮겼는데 그 집은 울타리와 마당이 있는 제법 큰 집이었다. 그런데 현재는 그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예산에 가서 돌아다녀 보아도 통 눈에 띄지를 안는다. 다섯번째가 기독교의 개신교파(改新敎派)인데 1885년 6월 미국 감리교회의 아펜셀러 선교사 부부와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같은날 같은 배로 인천항에 상륙하여 조선 선교를 시작했는데 선교구역을 가를때 감리교회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청도를 맡고 장로교회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맡았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교회행정과 신학학설이 다른데 장로교회란 1522년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 이며 신학자인 칼빈(calvin)이 주장한 장로주의에 의한 모든 교회를 일컫는다. 장로주의는 카톨릭 교회의 교황권을 부정하고 교도(敎導) 경영을 장로들의 합의에 따라 경영하도록 조직되었다. 신학학설(神學學設)은 예비예정설을 주장하고 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로 당회를 구성하고 상급기관으로는 각 지방에 노회를 두고 노회위에 중앙에는 총회를 두는 상향식 운영을 하고있다. 감리교회는 18세기 초 “죤 웨슬리(John weseley)가 영국에서 일으킨 교회로 당시 영국의 교회는 부패하여 형식에 차 있었다. 이에 느낀 바 있는 웨슬리는 성결(聖潔)과 구원(救援)을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켰다. 교회의 이름인 감리(監理)란 감독이란 뜻이다. 감리교가 다른 교파와 특이한 점은 웨슬리가 말한 성결문제와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이 장로교에서 말하는 예비예정설과 대조되는 예지예정설이 교리상의 특징이 있는 반면에 조직행정에 있어서는 중앙집권적 감독제도로서 선교의 철저화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장로교회에서 취하고 있는 장로협의제와 서로 대조되는 점인데 근년에 와서 약간의 구조개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산감리교회는 1916년 4월 첫 일요일에 창립 되었고 최초의 교회자리는 다리건너 시장옆 이었다는데 교회당 가운데는 포장을 쳐서 남녀교인을 구분 하였다고한다. 그 때 예산의 유지인 성모씨는 연보로 1원을 냈고 아이들은 1전을 냈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현 석조건물의 맞은편으로 교회를 옮겼는데 목조건물에 지붕은 함석으로 이엇고 출입문은 남녀를 구별하여 둘이었고 겨울에는 난로에 장작을 땠다. 목사의 복장은 양복이 아닌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가운 입은 것은 보지못했다. 연보 주머니는 털실로 짠 자루가 달린 잠자리채 비슷한 것이었다. 지금의 예산여상 교문 동쪽 도로변 산자락에는 기독청년회가 세운 함석으로 만든 광고판이 있었는데 금주를 권하는 그림에는 옆으로 쓰러진 술독에서 술이 강물같이 흐르는 속에 빠진 청년이 허우적 거리는 그림과 금연 광고는 담배연기가 뇌에 자욱하게 차서 정신을 마비 시키는 그림이 그려 있었다. 현재의 석조건물이 선자리는 해방전에 일본인의 아사히여관 자리로 석재인 화강암은 전북 익산의 황등(黃登)산돌이었다. 이 원 규 예산초 25회 졸업/예농 31회 졸업/ 경기도 고양시 거주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57 호 / 2001-10-15
2380 : 제목 : 1930년대의 세상살이1
부제목 :
1930년대는 비교적 평온한 시대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근 20년간 큰 사건이나 전쟁은 없었다. 1931년 중국 만주의 현 심양(당시의 봉천) 근처의 유조구에서 일본이 만주사변을 조작하여 터트렸지만 조선으로서는 강건너 불구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는 지금보다도 빈부 격차가 심했고 직업의 종류도 다양하지 못한 관계로 무직자가 많아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가는지 의심 스러울 때가 많았다. 특히 예산 읍내 가까이에는 논 밭이 별로 없어 전업 농가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한 관계로 직업별 분포를 보자면 점포를 갖고 장사하는 사람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닷새 열흘마다 서는 장에 나가 장사하는 사람, 인근 각 시장을 따라 다니며 장사하는 장돌배기가 많았고 길거리에서 엿, 찐빵, 옥수수 튀김, 과일 따위를 파는 노점상이 많았고, 행상으로는 새우젓. 어리굴젓, 생선, 야채, 고기장사, 살조개, 떡장사등이 있었는데 떡은 봄철에는 쑥 , 계피떡, 여름철에는 콩고물을 무친 인절미가 대표적이었다. 전 부인병원은 원래 연초 판매소(현 전매서) 자리였는데, 그 앞의 하수도 뚜껑 위에다 엿을 늘어 놓고 팔았으며 밀가루 찐빵장사는 부인이 나병환자였는데, 나병환자를 그 때는 문둥이 또는 요천배기라고 불렀는데 보기에도 흉직하여 혐오의 대상 이었다. 그런데 문둥이 부인이 남편 장사하는데 자주 나와서 앉아 있는 것을 필자가 많이 보았는데 관청에서 단속하지 않는데 대해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가 없다. 그 당시는 거지가 많았다. 아침이면 바가지를 들고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밥을 얻으러 오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 때는 대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 놓고 살았으니까 거지들이 밥 얻어 먹기에 편리했다. 필자의 보통학교 동창의 어머니도 밥을 얻어다 먹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무직 이었으나 집은 제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아낙은 구걸해서 먹고 사는 처지인데도 얼굴에 분을 뽀얗게 바르고 다녀 별명이 ‘분단지’였다. 필자의 농업학교 10여년 선배되는 학생 하나도 그 할머니가 밥을 얻으러 다녔고 손자가 얻어온 반찬 투정을 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 그 아버지는 목욕탕 인부로 있었고 집은 목욕탕 주인집의 문간방에서 살았는데 월급을 얼마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박봉으로 다섯 식구 입에 풀칠을 하고 아들 학비 대기가 벅찼던 모양이다. 그 당시 똑똑한 월급장이의 월급은 25원 내지 30원이었고 쌀은 한 가마니에 8원이었다고 한다. 1926년에 개업한 충남 제사회사의 여직공 월급은 20원이었고 쌀값은 한 가마니에 6원 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장로교회와 등기소 앞길에서 예산천 둑으로 빠지는 길끝의 개울가에는 움막이 서너채 있었는데 그때 움막에 살던 사람들은 주로 거지들이었다. 그 때 가난한 사람들은 흔히 부모를 먹여 살리고 동기간을 공부 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화류계에 투신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유행가로 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 김영춘 노래에 『홍도야 울지 마라』 와『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가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화류계 기생들의 애환을 노래한 것이다. 작년 12월 10일자 제165호 『무한신문』에 실린 일본 요리집 기생이 된 『마메짠』도 위에 적은 경우와 같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손 쉬운 수단으로 그 길을 택한것 같은데 그만한 미모로 최소한 보통학교 라도 나오고 서울로 진출하여 연예계에서 잘만 풀렸다면 크게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아깝기 짝이 없다. 필자가 그 아낙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필자가 견문이 없어 그렇겠지만 영화나 T·V 미스 코리아 출신중에서 그 아낙이상가는 미모의 여인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태여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아낙과 용모가 비슷한 탤런트 하나를 찾아 내어 소개 한다면 KBS 제2방송에서 방영하는 역사극 명성황후역의 E양이 될것인데 마침 1월7일자 동아일보 A19면 『위니어』냉방기 광고에 실렸기로 알려 드리니 관심이 있는 독자는 신문을 찾아 보시기를 권하며 『마메짠』의 『몽타주』사진을 실어 보내는데 실제 인물 보다는 많이 못하다는것을 아시기 바란다. 이원규/출향인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69 호 / 2002-01-14
2230 : 제목 : 예산극장과 유흥·음식점 업계
부제목 :
예산극장이 문을 연 것은 1935년경으로 생각된다. 예산극장은 원래 박팔래씨가 풍산관광 (대술면 이티리 소재) 이라는 금광에서 돈을 벌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예산극장을 목조 2층으로 지었다. 예산극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예일여관 마당에 가설무대를 지어놓고 연극공연을 했는데 예일여관의 사방 둘레에는 돌담이 쳐있고 북쪽 길가에는 큰 대문이 있고 남쪽에는 작은문이 있어 무료입장이 불가능 했다. 그 때는 땅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연극구경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도 예일여관 마당에서 상영했는지는 기억이 나지않는데 무료영화는 “동일은행” (현 충청·하나은행) 마당에서 상영했다 . 그 때본 영화는 왕중왕 (王中王) 이라는 기독교 영화였다. 예산극장이 개관되면서 본격적으로 상시 영화를 상영하였고, 연극과 악극공연은 수시로 있었는데 그 때 극단에는 고협 호화선 (豪華船) 등이 있었고 연극 배우로는 황철(黃撤) 심영 (沈影) 등이 왔으며 유명한 무용수 최승희(催承喜) 도 왔었는데 그 아낙은 양장차림에 모자는 검정망사가 달린 모자를 섰다. 그 때 예산극장에 연극 공연이 있는 날엔 당진군 합덕 (合德) 청년들은 저녁에 16Km 길을 자전거를 타고와서 구경을 하고는 돌아가곤 했다. 필자가 예산초등학교 4학년때인 1937년에는 개교이래 처음으로 학습발표회를 예산극장에서 했다. 그 전까지는 학교에 강당이 따로 없어 본관 동쪽교실의 칸막이를 떼어내면 세 교실이 하나가 되므로 그 곳에서 각종 의식이나 학습발표회를 했었다. 예산극장에서 학습발표회를 할때 극장벽에 붙은 영화광고에는 서양영화인 “폼페이 최후의 날” 등이 있었다. 그 때 예산에는 지금의 소복식당과 같은 규모가 큰 식당이 없었고 선술집이 많이 있었다. 선술집이란 의자없이 서서 술을 마신다는 뜻이다. 선술집에서는 약주와 막걸리를 팔었는데 막걸리 주발은 지금의 밥공기 보다는 큰 그릇으로 직경이 13Cm내쯤으로 위는 넓고 밑은 좁은 그릇이다. 어른손 둘을 오무려 합친 만큼의 크기인데 주발 안쪽의 정에서 아래로 1Cm 쯤 되는 곳엔 남색의 금이 그어져 있었다. 그 금은 술이 찰랑찰랑 넘치지 않도록 하기위한 한계선을 그어 놓은 것이었다. 술 안주로는 “정어리” 한마리를 구어서 주었는데 막거리 한잔 값은 5전 이었다고 한다. “정어리”는 ‘꽁치’ 처럼 생긴 생선으로 그 당시 동해안에서 많이 잡혔는데 식용보다는 기름을 짜는데 주로 쓰였다. 그 당시 예산 경찰서 고등계(高等係 : 사상범 전담부서) 형사를 지내다 은급(恩給 : 10년 근속을 하면 지금의 연금과 같이 주는 급여) 을 받고 퇴직한 사람이 강원도에 가서 정어리 기름 짜는 공장을 차렸는데, 그로 인하여 과거에 사상범으로 징역살이를 한 피해자가 강원도까지 쫓아가서 보복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 대중 음식점인 식당으로는 만복식당과 중국 음식점이 몇집 있었고 조선 요리집은 다섯집이 있었으며 일본 요리집은 두집이 있었고 카페 (Cafe)가 두집 있었다. 만복식당은 경 양식집으로 홀에서 오무라이스, 런치, 오야코돔무리(고기 알 덮밥) 등을 팔었다. 조선음식점으로 대표적인 곳은 지금의 삼선식당 자리로 개성출신의 공씨가 경영하던 개성옥이 있었는데 공씨의 별명은 “공대포” 였다. 그 집에서는 국밥, 설농탕, 냉면을 팔았다. 냉면을 배달할 때는 냉면 대접에 함석으로 만든 꼬깔 모양의 덮개를 씌워 긴 나무 목판에 냉면그릇을 실은 후 이것을 한쪽 어깨에 메고 한 손으로는 자전거의 핸들을 잡고 배달했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봄 회사 동료들과 그 집에 술을 먹으러 간 일이 있었는데 술 안주로 말고기가 나왔다. 그 때는 쇠고기가 귀해서 말고기를 먹어 봤는데 쇠고기 보다 빛이 붉고 좀 질긴듯 했지만 감지덕지 해서 맛있게 먹었다. 그 때 카페 (Cafe) 는 오늘날의 다방이 아니고 접대부가 딸린 서양식 술집으로 “에덴” 카페는 현 소복식당 남쪽에 있는 옛날 기와집 맞은편의 단층 함석지붕을 얹인 집 이었는데 1940년 미·일 전쟁때 상호를 “낙원” 으로 바꾸었다. 그 건물은 지금도 그 자리에 옛날 그대로 남아 있다. “백마” (白馬) 카페는 “에덴” 카페 건너편 의 옛날 기와집에 있었는데 그 나무대문이 카페의 출입문으로 그 건물도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백마 카페는 일본인 하라·기이치 가 주인 이었다. 조선 요리집은 일명 요정(料亭) 이라 부르는 기생집으로 봉춘관 (逢春館) 이 역사가 가장 오랜 집인데 위치는 중앙로 끝에서 우회전 하여 세번째 집 이었고 태평관 (太平館) 은 전 부인병원 뒤 현 대형 슈퍼마켓이 들어선 자리에 있었고 등선각 (登仙閣) 은 백마 카페의 안채인 오래된 기와집에 있었다. 봉춘관지점으로 시작한 영흥관은 예산여고 교문밖 대로변에 있었고 그 집에서 세번째집이 태서관 (太西館) 이었다. 일본 요리집 둘중의 하나인 “히사고” 는 현 영산신씨 종중회관의 맞은편에 있었고, 다이코쿠야 자리에는 현재 예산 성결교회가 들어 섰다. 일본 요리집의 특성은 요식업외에 창녀 (娼女) 를 두고 공창(公娼) 업을 겸하고 있었다. 창녀중에 다리건너 당채산 밑에 살던 조선사랑으로 “마메짠” 이라는 색시가 있었다. 필자가 학생시절 노사아에서 “마메짠” 을 한 번 본 일이 있는데 듣던바 대로 자색(姿色) 이 빼어난 미녀였다. “마메” 는 콩이란 뜻이고 “짠”은 애칭이다. 이원규/출향인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65 호 / 2001-12-10
2168 : 제목 : 예산의 자린고비 1
부제목 : 우리지역 검약가 이야기
11월 19일자 조선일보 이규태코너에 “자린고비”가 실렸는데, 예산에도 그에 못지않은 세 분의 검약가(儉約家)가 있었다. 그 분들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조선일보를 보지않는 무한신문 독자들을 위하여 요약해서 알려드리면 다음과 같다. 1.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숟가락 떠먹고 굴비 한번 올려다 보곤 했다는 주인공은 음성사람 조륵인데 인색하다 하여 남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재산을 모아 기근때 굶는 백성을 구제하여 당상 벼슬에 올랐다 한다. 그 근검절약을 현대에 접목 하고자 제정한 올 “자린고비상”이 친척이 버린 구두를 17년간 신고, 20년된 TV, 15년된 경운기를 몰며 수천평 전답과 수천만원 저축을 한 조성윤씨에게 돌아갔다는 보도가 있었다는데 공교롭게도 이 주인공이 조륵의 10대손이라서 화제가 되고 있다한다. 2. 부채를 들고 머리를 흔들어 20년 썼다는 이야기 3. 선조때 스님더러 계장이라 소리쳐 달라면서 밥을 먹었다는 선조때의 정승 이항복이야기 4. 한 인색한 부호가 부모 제사때 쓰는 지방을 때마다 불 살라 버리는 것이 아깝다 하여 기름으로 절여두고 해마가 꺼내 썼다는 이야기 5. 인색하기로 유명한 충주 사람 ‘고비’는 먼 나들이를 할 때면 그 동안 처첩들이 먹을 양식만 내놓고 곳간문을 잠그고 떠나곤 했다는데 어느날 곳간을 잠그고 나가는데 못 들여놓은 밀가루를 보자 그 표면에 얼굴도장을 찍어놓고 떠났다는 이야기. 6. 많은 사람들이 ‘고비’를 찾아와 돈버는 비법을 묻곤하자 바지를 벗겨 반나신으로 나무에 오르게 한 다음 가지 끝으로 옮겨가 두 손으로 매달리게 한다음 한 손마저 놓으라 시킨 것이다. 놓으면 떨어져 죽을지 모르는데 돈 벌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고비’가 말하기를 재산 아끼기를 드러나는 창피를 무릅써야 돈이 들어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예산의 ‘자린고비’이야기다. 먼저 소개한 자린고비와 비교해 보기 바라는데 자손들이 지금 살고 있어 일부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1. 지금으로 부터 약 백여년전 예산군내의 농촌에 사는 어느 신혼부부가 혼인 초야에 약속을 단단히 했다한다. 앞으로 잘 살자면 돈을 모아야 하고 돈을 모으자면 근검절약 하는 수 밖에 없으니 앞으로 3년동안 밥을 먹지말고 콩나물 죽을 쑤어 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3년을 사흘 남겨놓고 장인이 찾아 왔다. 모처럼 친정 아버지가 찾아왔는데 딸의 처지로서는 부부간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차마 친정 아버지에게 콩나물 죽을 쑤어 들일 수는 없는 일이라 밥을 해 드렸다. 때마침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들켜, 약속위반을 이유로 큰 사건이 벌어 졌다. 이와같이 지독하게 근검절약한 결과 부자가 됐는데 아들 4형제 앞으로 토지를 모두 신탁회사에 신탁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5백석 내지 1천석의 소작료 수입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토지를 신탁회사에 신탁한 이유는 어렵게 모은 재산을 영원무궁토록 보존하므로서 가난하게 살던 한(恨)을 풀어 보자는데 그 뜻이 있었을 것이다. <다음호에 이어짐> 이원규/출향인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63 호 / 2001-11-26
2194 : 제목 : 예산의 자린고비2
부제목 : 도시락 반찬은 1년내내 장아찌
<지난주에 이어서> 2. 또 한분은 우리나라 초기의 보통학교 교원출신인데 그 분도 대단한 근검절약가 였다. 군청에서 농촌계몽을 담당했는데 머리는 삭발이었고 양복 저고리는 넥타이를 맬 수 없는 것이 선학생복 스타일이고 바지는 승마복을 닮은 간편복이었으며 신은 가죽구두가 아닌 끈 달린 검정 운동화 였고 양말은 흰 목양말인데 양말이 뚫어지면 자기가 손수 흰 목실로 구멍난 곳을 떠서 신었다. 도시락 반찬은 일년내내 고추장에 박은 도라지 장아찌였고 도시락은 자전거에 매달고 다녔다. 자전거를 타지않을 때는 타이어가 땅에 닿으면 타이어가 삭는다고 자전거를 높이 꿰어달어 매었다. 어느해 였던가 정초에 소방대원이 기부금을 받으러 그 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방으로 들어 오라고 하여 방에 들어가 윗목에 앉은즉 방이 냉골로 궁둥이가 시려 도저히 앉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양복 주머니에서 금전출납부를 꺼내 놓고는 내 수입이 얼마인데 지출이 얼마로 여유가 없어 기부금을 낼 처지가 못된다며 지갑을 열어 보이는데 금전출납부의 잔액과 일치 하더라는 것이다. 그분도 지독한 검약가로 백석지기의 지주였는데 해방후 군수가 되었고 말년에는 자기 고향의 초등학교 교장을 자원해서 생을 마쳤다. 3. 예산농업학교 이성구 선생은 공주시절부터 중등교원 이었는데 그의 복장은 군복과 같은 국방색 양복 저고리에 바지는 승마복을 닮은 간편복 이었다. 머리는 삭발에 중절모를 썼다. 신은 가죽구두가 아닌 검정 고무신 이었다. 기숙사 학생들이 이를 닦을 때 소금대신 비싼 치분을 사서 쓰는 것을 보고 책망하면서 소금으로 이를 닦은 후 물을 머금은 양치질한 물로는 맨 먼저 눈을 닦으면 안질을 예방하고 양치질 물을 손바닥에 받어서 오른쪽 코로 들이 마신 뒤 왼쪽 코로 빼내고 다시 왼쪽코로 들이마셔서 오른쪽 코로 빼내면 코병을 예방할 수있다고 가르쳤다. 그 분은 1940년대 초에 고등관(高等官)으로 승진한 후 촉탁교원이 되었는데 촉탁교원이 된 이유는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교장을 시킬 수 없는 사정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었다. 당시의 고등관은 지금의 사무관 이상을 말하는데 그 분도 지독한 검약가로 백석지기의 지주가 되었는데 말년에는 자원해서 자기 고향의 초등학교장으로 생을 마쳤다. 이원규/자유기고가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64 호 / 2001-12-03
2064 : 제목 : 예산의 스포츠
부제목 :
1930년대에 잇어 시골에서는 “스포츠”란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예산에는 충남 서북부 9개군중 유일하게 5년제 중등교육 기관인 예산농업학교가 있었기에 그 학교의 운동장이 공설운동장구실을 했고 그 곳에 가야 비로소 여러가지 근대 스포츠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운동장은 직선거리가 100m로 축구 골대가 동서로 1쌍이 서있었고 축구부가 있었다. 축구부의 유니폼은 세로줄의 흑백으로된 긴 소매인 Y셔츠형 이었는데 옷감은 요즘같은 신축성이 좋은 메리야스천이 아니고 재봉틀로 박아서 입는 뻣뻣한 옷감 이었다. 가슴에 단 마크는 충남농업학교 이래의 타원형의 검정색 모표였다. 축구팀은 예농팀 외에 예산청년팀이 하나 있었는데 경기도 안성 청년팀이 예산까지 원정을 와서 시합을 하는 것을 보았다. 예농팀은 학교팀 끼리만 원정시합을 했는데 상대는 주로 공주나 대전팀이었다. 요즘은 축구를 할 때 모자를 쓰지 않지만 그 당시는 교모를 쓰고 축구를 했다. 그 때 축구 코치는 양약국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출신이었다. 농구 골대는 하나 있었지만 농구부는 없었다. 정구 코트는 기숙사 옆에 있었고 정구부가 있었으나 학교밖으로 나가 시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읍내의 정구 코트는 동일은행(현 조흥은행 전신)과 전기회사에 있었는데 특히 현 극장 자리는 1920년대의 호서은행(동일은행의 전신)의 정구코트 였다고 한다. 야구부도 있었다. 유니폼 색깔은 흰색 이었는데 가슴에는 검정색의 영자로 ‘REINO(예농)’라 표시 하였다. 일반팀으로는 전매국(專賣局)팀이 있었는데 선수는 주로 일본인 이었고 유니폼 색깔은 ‘베이지색’ 이었다. 예산군청팀이 있었고 예산지역팀에는 서울 중앙고보 출신으로 ‘백양상회’주인인 구자정(具滋貞)씨가 있었는데 유니폼 색깔은 감색(紺色)이었다. 예농에는 구기(球技)종목 외에 육상경기부가 있어서 단거리·마라톤 스웨덴 릴레이 등이 있었고 창 던지기·포환던지기·원반던지기·장대 높이 뛰기 등의 경기종목이 있었다. 그런데 예농에는 체육전담 지도교사가 따로 없었는데도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여러종목의 스포츠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들 외에 권투 체육관이 있었다. 그곳은 남일여관과 예일여관 골목을 서쪽으로 향해 빠져 나오면 맞닥뜨리는 집인데 그 집의 바깥채 대청을 권투 구락부로 썼다. 면적이야 얼마 안되지만 그 당시 시골로서는 화제거리였다. 그 집은 1970년대 양말공장 이었고, 지금의 할인매장 옆집인데 청양사람으로 박인철(朴仁喆)씨의 큰 손자가 일본 동경의 중앙대학 출신인데 그가 동경유학 시절 권투를 배워 예산에다 권투 구락부를 개설했던 것이다. 그 당시 동일은행 마당에 임시로 가설된 특설 링에서 야간 권투시합이 있었는데 그 때 우리나라 제일의 권투선수인 서정권이 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신문지국을 하던 이만섭이라는 분이 농업학교 운동장에서 우리나라 으뜸의 자전거 선수인 엄복동을 초청해 입장료를 받고 자전거 경기를 한 일이 있었는데 운동장에 말뚝을 박고 광목으로 어른 키 보다 높게 운동장을 뺑 둘러쳤다. 광목폭을 90㎝로 계산하면 광목을 2단으로 쳤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뱃장은 요새 사람이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 1940년 12월 8일 미·일 전쟁이 터져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스포츠는 일체 자취를 감추고 이에 대체하는 국방경기가 생겼는데 국방경기의 종목에는 수류탄 멀리 던지기·흙푸대 나르기, 담벼락 뛰어넘기, 무거운 짐 끌기 등 이었다. 국방경기는 운동복 차림이 아니라 교복을 입고 다리에는 각반을 친 후 허리에는 대검(帶劒)을 찬 채 하는 경기였다. 그런데 한가지 특기한 것은 당구가 단순한 오락이지 스포츠가 아니라고 할지는 모르겠으나 ‘동일은행’별관에 당구대가 1920년대 부터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이 당구대는 당초에는 행원 전용 이었으나 1930년대에 이르러 문호가 개방되었다. 이 원 규/출향인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60 호 / 2001-11-05
1986 : 제목 : 종교단체의 뿌리
부제목 : 예산의 종교단체2
성공회 예산교회는 1917년 1월 16일 창립된 교회로 군수관사 뒤 신명유치원 옆에 있었다. 교회 건물은 목조와가의 고옥인데 1800년대에 지은 살림집으로 예산현감 대흥군수 돈영(敦寧)을 지낸 장윤식의 사저(私邸)였다. 조신부(趙神父)는 항상 검정 가운에 검정 중산모자(中山帽子:bowler hat)차림이었다.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로 앙그리칸처치(Anglican chuch)라고도 한다. 영국 국교회가 1534년 로마 카톨릭 교회로 부터 갈라 선 것은 헨리8세때 인데 이교회는 제례의식, 복장, 성직자 직명등 모든 격식은 카톨릭 교회와 같으나 성경해석만은 개신교와 같기때문에 개신교에 속한다. 따라서 성직자가 혼인하는 것도 개신교와 같으며 미국 성공회는 여자 신부까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성공회는 우리나라에서는 교세가 미약하고 희소한 교회지만 미국에서는 성공회 교인이 1등 양반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미국에 W.AS.P라는 말이 있는데 W는 white즉 백인을 AS는 Anglo-saxon 즉 영국인종을 P는 Protestant 즉 개신교를 뜻한다. 미국사회에서 행세 하자면 첫째로 백인이어야 하고 백인중에서도 영국인이어야 하며, 종교는 개신교 교인이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성공회 교인이 1등급에 속하고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등 개신교는 2등급, 남유럽의 카톨릭교는 3등급, 동유럽의 정교회는 4등급, 동양계 황색인종이 5등급, 허스패닉(스페인과 중 남미계 혼혈인종)이 6등급 , 흑인이 7등급에 속한다고 한다. 성결교회는 1932년 9월 4일 군청옆 광안말의 좁은 골목안에서 창립되었다. 목조 함석지붕의 조그만한 교회였는데 간판에는 조선 야소교 성결교회 예산교회라고 쓰여 있었다. 야소교란 예수교의 한자 표기였다. 성결교회는 중심교리가 성결이므로 주어진 이름인데 감리교회의 창설자 웨슬레(J. wesley)가 주장하던 ‘기독자의 완전’즉 성결의 은혜를 강조하며 오순절적(五旬節的) 성신(聖神)의 불세례(火洗禮) 체험을 역설한다. 특히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가 그 기원을 구미(歐美)각국에 두고 있으나 이 교파만은 그 기원을 한국에 두고있다. 미국 감리교회소속의 신자이던 ‘카우만’과 그의 친구 ‘길보룬’이 1901년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도쿄에 걸고 동양각지에 성서학원을 설립하고 교역자를 양성하면서 중생(重生), 성결(聖潔), 신유(神癒), 재림(再臨)의 4중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처음에는 특별히 교파를 창설할 의도는 없었으나 차차로 교회와 신도수가 늘어가게 되므로 1교파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 교파가 한국에 건너온 것이 1907년으로 일본에 주재하던 두 목사가 직접 서울에 들어와 시청뒤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개설하고 노방(路傍)전도와 호별(戶別)전도를 하면서 교회를 설립한것이 그 시초인데 1922년 교회의 명칭을 성결교회라 개칭하게 되었다. 성결교회는 교회행정은 장로교식이고 신학이론은 감리교회 ‘죤 웨스례’의 예지예정설(豫知豫定說)을 따르고 있다. 구세군교회는 대흥면에 있었다. 구세군은 민중전도와 사회사업을 주로하는 교파로 1829년 영국사람 ‘부스’(Booth)에 의해 창립됐다. 처음 그는 감리교회의 전도자였으나 종래의 전도방법으로는 서민계급 구제가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1865년 런던 동부에 있는 빈민굴에 들어가 구제운동을 일으킨 것이 구세군의 기원으로 1877년에 창립되었다. 처음에는 동런던 복음회라 불렀으나 그후 기독교 전도회로 개칭하고 1878년 다시 조직과 제도를 종교적 군대식으로 개편 하면서 구세군이라 불렀다. 교리는 중생(重生) 성결(聖潔) 봉사(奉仕)를 중히 여기며 특색으로는 종교적 군대조직들로 사관(士官) 및 군인의 제복착용, 군기, 군악 등의 채용과 국제적인 점이다. 입군(入軍)의 조건으로는 엄정한 금주, 단체주의에 대한 충성이다. 사업에는 전도사업과 사회사업으로 2분된다. 복음을 전하는 군영(軍營) 및 지영(支營)이 세계적으로 각국에 있고 사회사업으로는 고아원, 양로원, 숙박소,병원, 부녀구제소, 학교등이 있다. 세계에서 대장은 최고장관 회의에서 선발되며 만국본영은 런던에 있다. 계급은 남녀 동등이고 모든 칭호는 우리 구 한국시대의 군대 계급과 같이 참위(參尉) 부의(副尉) 정위(正尉) 정령(正領) 참장(參將) 부장(副將)으로 되어 있다. 구세군의 제복과 제모의 색깔은 모두 감색(紺色)인데 모표에는 영어로 BLOOD AND FIRE 와 SALVATION ARMY라고 적혀 있는데 ‘예수’의 보혈과 ‘성령의 불’이라는 뜻과 ‘세상을 구하는 군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원규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58 호 / 2001-10-22
1948 : 제목 : 이미 시작된 종교 르네상스
부제목 : 예산의 종교단체1
1930년대 예산에는 여러 종교단체가 있었는데 창건 연조순으로 친다면 백제의 의자왕 16년(656) 의각대사에 의하여 창건된 향천사가 130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고찰로 가장 오래 되었다. 그러나 읍에서 2km나 떨어진 산속에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다음이 유교의 문묘(文廟)인데 유교는 조선조의 국교로 600년의 역사를 갖고 공자(孔子)를 모시는 문묘와 거기에 딸린 관립학교인 향교(鄕校)가 있었으나 일반 서민이 자주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 다음이 천주교(天主敎)인데 천주교는 정조(正祖) 18년(1794)에 청나라 신부(神父) 주문모가 처음으로 서울에 들어온지가 200년이 되었으나 예산에는 언제 들어 왔는지 확실치 않고 1933년 현재의 오리동교회를 벽돌집으로 신축하여 이전하기까지는 오리동에 있던 윤창규집에 있었기 때문에 이 역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가 창건한 천도교(天道敎)가 네번째인데 예산의 천도교회는 전 예일여관에서 서쪽으로 세번째 쯤 되는 골목에 있는 목조의 초가집으로 규모는 4칸 정도로 김두환(金斗渙) 화실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 집은 담을 치지 않은 길갓집으로 대청 뒷문을 열어 놓으면 길에서 안이 들여다 보였는데 모이는 사람들 중에는 양복 입은 사람은 볼 수 없고 주로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 뿐이었고 모임에 참석하는 인원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이 입고 다니는 조선옷의 특징을 들자면 동정은 흰 동정이 아닌 검정 동정을 달았고 두루마기에는 옷고름 대신 큰 단추 하나를 왼쪽 젖가슴 언저리에 달았는데, 이런것 들은 일종의 생활개선 운동이었다. 이 교회의 간판에는 천도교 예산교구라 쓰여 있었고 해방전에 교회건물을 맞은편길의 모퉁이집(전에 농업학교 이성구 선생이 살던집)으로 옮겼는데 그 집은 울타리와 마당이 있는 제법 큰 집이었다. 그런데 현재는 그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예산에 가서 돌아다녀 보아도 통 눈에 띄지를 안는다. 다섯번째가 기독교의 개신교파(改新敎派)인데 1885년 6월 미국 감리교회의 아펜셀러 선교사 부부와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같은날 같은 배로 인천항에 상륙하여 조선 선교를 시작했는데 선교구역을 가를때 감리교회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청도를 맡고 장로교회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맡았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교회행정과 신학학설이 다른데 장로교회란 1522년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 이며 신학자인 칼빈(calvin)이 주장한 장로주의에 의한 모든 교회를 일컫는다. 장로주의는 카톨릭 교회의 교황권을 부정하고 교도(敎導) 경영을 장로들의 합의에 따라 경영하도록 조직되었다. 신학학설(神學學設)은 예비예정설을 주장하고 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로 당회를 구성하고 상급기관으로는 각 지방에 노회를 두고 노회위에 중앙에는 총회를 두는 상향식 운영을 하고있다. 감리교회는 18세기 초 “죤 웨슬리(John weseley)가 영국에서 일으킨 교회로 당시 영국의 교회는 부패하여 형식에 차 있었다. 이에 느낀 바 있는 웨슬리는 성결(聖潔)과 구원(救援)을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켰다. 교회의 이름인 감리(監理)란 감독이란 뜻이다. 감리교가 다른 교파와 특이한 점은 웨슬리가 말한 성결문제와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이 장로교에서 말하는 예비예정설과 대조되는 예지예정설이 교리상의 특징이 있는 반면에 조직행정에 있어서는 중앙집권적 감독제도로서 선교의 철저화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장로교회에서 취하고 있는 장로협의제와 서로 대조되는 점인데 근년에 와서 약간의 구조개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산감리교회는 1916년 4월 첫 일요일에 창립 되었고 최초의 교회자리는 다리건너 시장옆 이었다는데 교회당 가운데는 포장을 쳐서 남녀교인을 구분 하였다고한다. 그 때 예산의 유지인 성모씨는 연보로 1원을 냈고 아이들은 1전을 냈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현 석조건물의 맞은편으로 교회를 옮겼는데 목조건물에 지붕은 함석으로 이엇고 출입문은 남녀를 구별하여 둘이었고 겨울에는 난로에 장작을 땠다. 목사의 복장은 양복이 아닌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가운 입은 것은 보지못했다. 연보 주머니는 털실로 짠 자루가 달린 잠자리채 비슷한 것이었다. 지금의 예산여상 교문 동쪽 도로변 산자락에는 기독청년회가 세운 함석으로 만든 광고판이 있었는데 금주를 권하는 그림에는 옆으로 쓰러진 술독에서 술이 강물같이 흐르는 속에 빠진 청년이 허우적 거리는 그림과 금연 광고는 담배연기가 뇌에 자욱하게 차서 정신을 마비 시키는 그림이 그려 있었다. 현재의 석조건물이 선자리는 해방전에 일본인의 아사히여관 자리로 석재인 화강암은 전북 익산의 황등(黃登)산돌이었다. 이 원 규 예산초 25회 졸업/예농 31회 졸업/ 경기도 고양시 거주 <70년전 예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57 호 / 2001-10-15
예산 인물지
1207 : 제목 : 정뢰경
부제목 : 소현세자를 수행하다가 의롭게 죽어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인 1639년 4월. 머나먼 중국 땅 심양에서 적의 앞잡이를 처단하려다 오히려 무고죄로 어이없이 죽어간 의로운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예산 광시 출신의 정뢰경(鄭雷卿, 1608-1639)이다. 정뢰경은 1636년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이 볼모로 청나라로 잡혀갈 때 자청하여 수행했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정뢰경은 온양 정씨 가문으로 자(字)가 진백(震伯)이다. 대흥군 광시면이 고향인 그는 성균관 진사 정지겸의 손자로 2살 때 부친상을 당해 이모부의 손에 길러졌다. 정뢰경은 어릴 적부터 옳지 못한 일에 비분강개하는 강직하고 곧은 성품을 보였다. 23살 되던 해 과거에 장원으로 등과해 사간원의 정언, 사헌부의 지평, 시강원(侍講院)의 사서, 병조좌랑 등을 거쳐 홍문관의 수찬(修撰), 교리 등의 관직에 있었다. 정뢰경은 1637년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으로 갈 때 스스로 북행을 자원하였다. 심양에 와 보니 평안도 은산 땅 관노 출신의 정명수(鄭命壽)란 자가 청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세자 일행을 핍박하였다. 이에 분개하던 정뢰경은 정명수가 뇌물을 받아먹은 사실을 알게 되어 이를 청나라 관리에게 고발한다. 그러나 정명수가 이를 미리 알아 손을 써 놓는 바람에 정뢰경이 오히려 무고죄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마침내 함께 일을 추진했던 강효원과 함께 극형에 처해지게 되자 정뢰경은 고국을 향해 절을 올리고 32살의 젊은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뢰경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 충정공(忠貞公)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그의 고향에 정문(旌門)도 세워졌다. 그의 아들 유악에게는 후한 봉록이 주어졌다. 효종임금이 손수 제문을 지어 그의 영전에 올렸고 송시열 또한 그의 묘에 비문을 썼다. 다음은 효종이 쓴 제문의 일부이다. “아, 비통한 일이다. 나를 보고 직접 말을 하는 것 같이 너의 울음소리를 느낄 수 있다. 시작은 호전(胡銓)이고 마지막은 왕륜(王倫)과 비교할 만하다. <중략> 나는 그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그렇지만 산에 구름이 크게 이니 어찌 전에 공적을 쌓은 것에 비할 수 있으리오. 그대 충심의 유별함을 생각하니 어둠 속에 비치는 횃불과 같구나….” 예산 광시와 신양, 봉산에 정뢰경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9대손인 정동영이 광시면 하장대리에 살고 있다. 지금은 홍성군 장곡면 천태리로 지명이 바뀐 옛 대흥 땅에 있던 그의 정문과 사당은 10여년 전에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38 호 / 2001-05-14
1290 : 제목 : 윤희두 장로
부제목 : 양막리에 한글강습소 세워
예산은 3.1 만세운동의 기세가 어느 지역 못지 않게 드높았던 곳이다. 오가면 양막리 이장이었던 약관 29세의 윤희두도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는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같이 참여했던 사람들을 대라는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 정책으로 우리말과 글을 잃어가고 있던 때 한글강습소를 세워 문맹퇴치와 아울러 민족의 독립의식을 일깨우기도 한 인물이다. 윤희두(尹熙斗, 1890-1968)는 당진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집안이 예산으로 이주하였다. 집근처 서당을 다녀 글을 배웠으나 총명함과 기개가 남달랐다. 3.1운동을 겪은 후 독립운동의 방편을 찾던 중 좌방리 등대교회 임명호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예배 및 주일학교 교사 생활을 통해 독립의식의 각성에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양막리 주변에도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뜻을 세웠다. 그를 포함한 심태섭,오간선, 박월금 등의 헌신적 노력으로 ‘양막교회’가 1928년 초가 8칸짜리 작은 예배당에서 첫 봉헌예배를 올리게 되었다. 첫 담임목사로는 조종렬 목사를 모셨는데 그 또한 3.1운동에 관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감옥살이를 한 사람이었다. 윤희두는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논 여섯마지기를 조목사에게 생계에 보태라고 주었다. 윤희두는 2년 후인 1930년에 예배당 내에 한글강습소를 설치하여 초대 교장을 맡았다. 학교가 멀거나 집안 형편 때문에 글을 깨우치지 못한 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강습소에 모여들었다. 학생 수가 늘어나자 기존의 예배당 건물은 좁아서 새 건물 신축이 필요했다. 윤희두는 강습소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동네 주민들의 한푼 두푼이 모아져 1934년 기와를 얹은 새 강습소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해방 후에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해 고등공민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1948년 4월에 윤희두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양막교회 안에 임성중학교의 전신인 ‘양막고등공민학교’가 세워져 학생 17명으로 정식 개교하였다. 그는 성품이 어질면서도 엄격했다. 누군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넌지시 깨우쳐주었고 혹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으면 당사자를 불러 밀대방석 같은 것을 만들면서 이런저런 얘기로 한참 뜸들였다가 “이런 얘기가 들리는데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어 그의 해명을 들은 다음에는 “그러면 다행이여”라고 하였다. 윤희두는 지(支)교회 설립에도 큰 힘을 기울여 오촌, 오가, 정착, 원포 교회 등이 모두 그의 노력과 지원으로 세워졌다. 윤희두 장로가 이룩한 많은 업적들은 서정국 장로를 비롯한 양막교회의 노력으로 ‘양마교회사’와 석판 등에 남겨져 전해지고 있다.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40 호 / 2001-06-04
1435 : 제목 : 김지남
부제목 : 인목대비 폐위 의도 꺾은 김지남
광해군 시절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의 모후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때 ‘폐모(廢母)라니 당치도 않다’며 반발하여 이이첨의 의도를 꺾었던 사람이 바로 광산 김씨 집안의 김지남(金止男,1559-1631)이다. 김지남은 호가 용계(龍溪)이며 아버지 표(彪)는 영동현감을 지냈다. 재종부되는 김양(金讓)이 아들이 없어 그의 뒤를 이었다. 김지남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7살 되던 해 벌써 시문에 능하다고 인근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33살 되던 해인 159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동방진사과에 등과하였다. 예조좌랑, 경기도사, 홍문관 교리, 경차관(敬差官: 이조 때 지방에 내려가 전곡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일을 담당)을 거쳐 관서지방의 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경상도 관찰사, 병조참판, 좌승지 벼슬을 지냈다. 김지남은 명리(名利)를 가볍게 여기고 절의(節義)앞에서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 재위 시에 사직의 장원을 헐고 정전(正殿)을 세우려 했으나 강력히 반대하여 공사가 중지되기도 했으며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에는 견책을 당하면서까지도 끝내 왕명에 순응하지 않은 일도 있었다. 또한 동래부사 윤홍이 자신의 세력을 믿고 탐학을 저지르자 그를 즉시 쫓아내었다. 그의 이러한 강직함과 기개로 인해 인조반정 후 외직을 맡은 자들이 대부분 파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지남은 경상감사에 그대로 있을 수 있었다. 말년에는 예산에 내려와 다섯 형제들과 함께 살면서 우애를 나누었다. 김지남의 시재는 매우 뛰어났다. 13살 때 한창여의 남산시(南山詩)에 차운(次韻)하여 ‘안수나 양억에 견줄 만한 재목’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숙종 때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서파 오도일(吳道一)은 김지남의 ‘용계시집(龍溪詩集)’서문에서 “문장과 기절(氣節)이 함께 아름답고 온전하기는 수백 세를 거쳐도 그리 흔하지 않다”고 했다. 1697년(숙종 23년)에 김지남의 외증손 이선부에 의해 간행된 ‘용계시집’은 352수, 4권의 책으로 엮어졌는데 김지남이 죽고 난 뒤 큰딸의 노력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김지남은 두 딸만 두었는데 해주 오씨 소생의 큰딸이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녀는 목사(牧使) 이침과 결혼했는데 아들 이관하와 손자 이선부로 하여금 아버지 김지남의 업적을 묘비에 새기고 남긴 유고를 문집으로 엮도록 했다. ‘용계시집’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3질이 보존되어 있다.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43 호 / 2001-06-25
1506 : 제목 : 강완숙
부제목 :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
충청 지방, 특히 내포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로 꼽힌다. 이벽, 정약용 등과 더불어 천주교의 전파에 힘쓴 이존창을 비롯하여 인언민, 이보현, 정산필, 강완숙 등이 내포지역 순교자들이다. 그 가운데 양반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을 지낸 이가 바로 강완숙(세례명:골롬바)이다. 강완숙(1761-1801)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통찰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으며 당차고 용감한 면모를 보였다. 그녀는 덕산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로 시집을 왔으나 남편이 용렬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내포지역 최초의 천주교회를 세운 이존창의 영향으로 천주교가 전파되자 강완숙은 ‘천주실의’ 등의 책을 구해 읽고 입교를 결심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녀는 감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등 옥바라지를 하다가 자신도 체포되었다. 며칠 후 석방되자 남편 홍지영은 자신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그녀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하였다. 강완숙은 시어머니, 전처 소생 홍필주, 자신의 딸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하였다. 1794년 입국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위험에 처하자 강완숙은 자신의 집 나무광에 주 신부를 숨겨주었다. 그 뒤 6년 간 신유박해로 체포되기 전까지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강완숙은 1795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이 되었다. 회장직은 주로 선교와 봉사를 담당하는데 황사영의 <백서>에 의하면 그녀는 남다른 재능으로 대소사를 처리하여 남자들 못지 않는 역할을 해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풍부한 상식과 뛰어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입교시켰는데 특히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까지 그녀의 영향으로 신자가 되었다. 그 중에는 정광수의 누이동생 정순매, 참판 이중복의 아내 신씨를 비롯해 왕족 양제궁의 아내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있었다. 강완숙의 집은 첨례(천주교에서 드리는 미사)를 보는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매월 열리는 첨례 때는 각처에서 많은 남녀 교우들이 모여들었다. 강완숙의 활약으로 5년여만에 4천명에 불과하던 신도 수가 1만 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1800년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 쪽의 벽파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이른바 신유박해이다. 1801년 정월 총회장 최창현을 체포하고 사학(천주교)를 금지하는 교서를 내렸으며 동시에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천주교의 전파를 막았다. 강완숙도 가족들과 함께 잡혀 3개월만에 처형당했다. 순조실록에 “스스로 사학의 괴수로서 여러 곳의 남녀 교우들을 불러들여 밤낮으로 강습, 곳곳마다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일세를 미혹케 했다”는 기록을 볼 때 강완숙이 한국 천주교회에 기여한 바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45 호 / 2001-07-09
1580 : 제목 : 김구
부제목 : 기묘사화로 유배당했던 뛰어난 문장가
올해 달은 학 다리 되도록애 거믄 가마기 해오라비 되도록애 享福 無彊 하샤 億萬歲를 누리쇼셔 (오리의 짧은 다리가 학의 다리만큼 길어질 때까지/검은 까마귀가 흰 해오라비처럼 변할 때까지/복을 받아서 억만년을 누리소서) 널리 알려진 이 국문시가를 지은이가 바로 예산 사람 김구(金絿,1488-1533)이다. 그는 기묘사화(1519,중종 14년) 때 훈구파 홍경주,남곤, 심정에 의해 사림파(士林派)인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제거되어 개령,남해 땅에서 14년 간 유배 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김구는 광주 김씨 집안으로 호가 자암(自庵)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계문(金季文)이 대흥현감을 지냈다.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많고 문재(文才)가 대단히 뛰어났다. 여섯 살 때 석류를 주제로 지은 한시는 그 나이에 지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 양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 때 시험관이 그의 글을 보고는 “退之作之羲之書之(문장은 韓退之요 글씨는 王羲之라)”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다. 27세에 승정원 副正字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한 뒤 5년 후에는 홍문관 부제학 벼슬까지 이르렀다.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삼암(三庵, 세 사람의 호에 庵자가 공통으로 들어감)으로 불리면서 개혁정치의 깃발을 높이 들었으나 중종반정의 공신들로부터 반감을 사 결국 조광조와 김정은 죽고 김구는 14년 간의 귀양살이에 처해진다. 그는 귀양살이가 끝나자 고향인 예산으로 내려왔다. 부모님 묘소에서 시묘막살이를 하면서 김구가 흘린 눈물 때문에 묘 근처의 풀이 다 마를 정도였다. 바로 병을 얻어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구는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러나 대부분 유실되어 ‘자암집’을 통해 전하는 것은 국문시조 5 수와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뿐이다. 신암면 종경리에 그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정해경 객원기자 jhk@moohan21.com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47 호 / 2001-07-23
1618 : 제목 : 공신옹주
부제목 : 절의(節義) 지킨 성종 임금의 딸
대술면 마전리 중삼마을 길옆에는 자그마한 정려각 하나가 있다. 이 정문은 성종 임금의 딸인 공신옹주(恭愼翁主)의 절개와 의리를 기리기 위해 중종 2년(1507)에 세워진 것이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 10년이 되던 해(1504년)에 궁궐에는 피어린 참화가 있었다.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수를 위해 연산군은 폐사에 관련된 윤필상, 이극균 등을 죽이고 한명회, 정창손 등에게는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자의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베는 일)를 명한다. 또한 부친 성종의 후궁이었던 엄씨, 정씨 두 숙의를 죽이고 그들의 소생인 왕자들도 죽였다. 한명회의 손자 경침(景琛: 1482∼?)과 혼인한 후궁 엄씨의 딸 공신옹주에게도 옹주 신분이 박탈되고 아산(牙山)으로 귀양가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그녀는 일찍 사별한 남편의 신주를 가슴에 품고 한양에서 쫓겨 내려왔다. 처음에는 아산으로 갔다가 나중에 시댁 식구들이 있는 예산으로 옮겨왔다. 공신옹주는 남편의 신주를 가시나무 울타리에 숨겨두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죽이나 새로 나온 열매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천신(薦新: 새로 나온 음식을 神에게 올리는 것)을 한 후에야 먹었다. 중종반정이 있은 뒤 공신옹주의 이러한 절행(節行)이 알려져 중종은 절부정려(節婦旌閭)를 세우게 했다. 8년 뒤에 정려각을 다시 손보게 하고서는 “옹주는 지친의 귀한 몸으로 절행이 뛰어났다. 그런데 ‘삼강행실록’에 참여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매몰되어 지상에 알려지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찬집청(撰集廳)에 문의하도록 하라”고 명한다. 또한 생계가 곤궁함을 알고 쌀과 콩 각 50가마씩을 내렸다. 임금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청상과부의 몸으로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던 공신옹주는 슬하에 소생이 없어 양자 찬(瓚)을 들였다. 묘는 주을동(注乙洞)에 있다. 정해경 객원기자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48 호 / 2001-08-06
1777 : 제목 : 이종성
부제목 : 충남방적 설립한 ‘면방왕’
1970-1980년대 국내 최대의 면방업체였던 충남방적을 설립, 경영하여 ‘면방왕’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 바로 덕산(德山) 출신 이종성(李鍾聲, 1924-1995)이다. 청백리로 이름난 이기세(李琦世)의 외아들이기도 한 이종성은 부도난 회사를 인수하여 6년여만에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청운(靑雲) 이종성은 전의 이씨 가문으로 잠와(潛窩) 이명준의 12대손이다. 그는 덕산면 복당리에서 태어났으나 공무원이었던 부친을 따라 조치원에서 보통학교 입학을 하였다. 대전에서 중고교를 졸업하고 경성법전에 들어갔다가 해방 전해인 1944년에 졸업했다. 해방 후에는 23세의 나이에 검찰청 입회서기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14년 동안 법무부를 비롯해 해무청, 내무부 등에서 총무과장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 좌우 이념 대립, 6.25전쟁, 4.19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기를 거친 그는 결국 4.19 때 내무부장관이었던 홍진기가 구속되는 바람에 공직을 사퇴하였다. 이종성이 47세의 나이에 사업가로 변신한 데는 고모부인 민덕기를 도와 조선맥주, 국안방적의 경영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70년 그는 민덕기가 사업의욕을 상실하자 국안방적을 단독으로 인수하였다. 인수 당시 생산성이 한참 떨어지는 낡은 기계 3만대를 가지고 시작한 방적 사업은 이종성의 ‘불도우저’식 뚝심과 사업 감각으로 3년 만에 석탑 산업훈장을 탈 정도로 궤도에 올랐다. 그는 나이 어린 여공들이 배움에 목말라 하는 것을 보고 국내 최초로 산업체 학교인 ‘충남 방적 부설 전수학교’를 설립하였다. 산업체 학교는 공장 직원이면 누구나 다닐 수 있으며 학비는 무료였다. 산업체 학교는 1977년 교육법 개정으로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종성은 1976년 공장 증설을 위해 여러 곳을 물색하던 중 고향인 예산 신례원에 4만평의 땅을 매입하였다. 예산공장은 천안공장보다 더 커 방적기 13만대에 직기 1100대를 갖추었다. 또 몇 년 후에는 불황기임에도 불구하고 대전에 매우 큰 규모의 공장을 설립하여 충남방적은 모름지기 국내 최대의 면방업체로 떠오르게 되었다. 대전공장이 문을 열 때쯤 면방경기가 되살아나 회사는 몇 배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육영사업에 대한 이종성의 관심은 산업체 특별학교 설립에 그치지 않았다. 1982년 충남 홍성에 혜전전문대학을 설립하여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 등 타지로 나갔던 예산,홍성의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 1981년 이종성은 또 다시 정치가로 변신하였다. 한국국민당 예산,홍성,청양 지구당 위원장으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4년 여 동안 국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건강문제 등 안팎의 어려움에 부딪치자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가 72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부인 오숙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52 호 / 2001-09-03
1852 : 제목 : 정현룡
부제목 : 병마절도사, 호랑이 꼬리 잡은 장사 일화 유명
고덕에서 봉산으로 넘어가는 길을 예전에는 현득득거리라고 불렀다. 이 현득득거리 옆에는 고삭쟁이 모롱이(모퉁이)라고 하는 곳이 있었는데 행패를 부리며 양민을 괴롭히는 큰 도적이 있어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기를 매우 두려워했다. 이 도적의 이름이 ‘고삭진’이라서 ‘고삭쟁이 모롱이’로 부르던 이곳에 어느 날 한 힘센 장사가 나타나 이 도적을 몰아냈다. 이 장사가 바로 나중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된 정현룡이다. 봉산면 봉림리에서 태어난 정현룡(鄭見龍,1547-1600)은 동래 정씨 가문으로 시조 정회문(鄭繪文)의 21세손이며 우봉 이씨 부인의 남편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한 기상을 보였던 정현룡은 도망치는 범의 꼬리를 잡아챌 정도로 힘이 세 장사(壯士) 소리를 들었다. 31세가 되던 선조 10년(1577)에 무과인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한 뒤 두만강변의 국경지역으로 파견되어 강계 판관, 경흥과 경성 부사 등을 맡아 북방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파죽지세로 침략해온 일본은 9월에는 함경도까지 올라와 경성부의 모든 성을 점령했다. 산 속으로 피신해 있던 정현룡은 정문부 등과 협의하여 의병인 창의군(倡義軍)을 편성하여 숨어있는 관군과 선비들을 규합하였다. 처음에는 일본군에 투항하여 앞잡이 노릇을 하던 국세필 등을 처단한 뒤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길주(吉州), 장평, 백탑교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함경북도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유일하게 우리 의병의 힘으로 싸워 승리한 곳이다. 선조 26년(1593)에 일본군을 토벌한 공로로 가선대부(從二品)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 때 정현룡의 나이 51세이었으니 갓 시집온 새댁을 두고 북방으로 온 지 어언 17년이었다. 부인 우봉 이씨는 임금에게 대를 이을 자식을 낳기 위해 남편 정현룡을 만나러 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상소를 내었다. 마침내 천리길을 달려 남편과 해후한 우봉 이씨는 돌아가라고 호통치는 남편을 치마폭에 지은 시 한수로 감동시켜 절손을 면한다. 이듬해인 선조 27년(1594) 호족들이 대거 침입하여 도둑질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특히 종성 경계에는 더욱 극심하였다. 정현룡은 육진 병마를 발동하여 호족의 소굴을 습격하여 섬멸시켰다. 호족을 물리친 공로로 그는 정헌대부 벼슬까지 올랐으나 선조 33년(1600) 적들의 급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함경도 경성에 그의 사당이 있고 길주군 남쪽에 정현룡의 사적을 상세히 기록한 북관 대첩비가 세워졌으나 300년 뒤인 1905년 노일전쟁 시에 함경도에 거주했던 일본군이 비문을 못마땅하게 여겨 일본 야스쿠니 신사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봉림리 집터에 지어진 고택에서 후손이 살고 있으며 고택 바로 옆에는 우봉 이씨 부인의 정려각이 있다.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54 호 / 2001-09-17
1953 : 제목 : 이의배
부제목 : 충청지역 병마절도사 지내고 병자호란때 순국
봉산면 봉림리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86호로 지정된 신도비가 하나 있다. 이무기가 새겨져 있는 웅장한 조각의 머릿돌(이수)과 몸체(비신)가 하나의 거대한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국에 몇 개 안되는 매우 특이한 신도비이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 때 나라를 지키려 싸우다 순국한 충장공 이의배(李義培, 1576-1637)의 신도비이다. 이의배는 한산 이씨 가문으로 목은 이색의 후손이며 조부인 이흥준 대부터 예산에 살기 시작하였다. 사헌부 장령(정4품 벼슬)을 지낸 이흡(李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의배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도량과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무예 솜씨가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서(史書),논어 등 경전 읽기도 즐겨하여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24살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부터 시작,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명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이의배가 전라도 수군 절도사, 공청(公淸, 현 충청도) 병마절도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다시 공청절도사가 되었을 때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을 보고는 ‘기병(騎兵) 양성’의 필요성을 느껴 무예 솜씨가 뛰어난 병사를 뽑아 훈련을 시켰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에 이르자 이의배는 바로 출격을 하려고 했으나 다른 지역 지휘관에게 자신의 훈련된 기병을 빼앗기는 바람에 급히 지역에서 속오군(束伍軍, 지금의 예비군과 비슷함) 수천명을 편성하여 남한산성쪽으로 달려갔다. 이의배가 이끄는 군대가 쌍령에 이르렀을 때 적군이 기습해 왔다. 싸움이 불리해지자 부하들이 이의배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으나 “어찌 나혼자 도망갈 수 있겠는가? 싸움터에서 죽겠다”며 끝까지 진두에서 지휘하였다. 마침내 이의배는 부하 이억(李檍)과 노복인 축생과 함께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 때가 인조 15년(1637년) 정월이었다. 아들 이목(李穆)은 이괄의 난(1624) 때 이를 진압하려고 파견되었다가 이괄에게 붙잡혀 항복을 요구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아버지 이의배보다 앞서서 순국한 것이다. 이의배 신도비는 영조 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왕세자의 스승이었던 최석정(崔錫鼎,1646-1715)의 건의로 세워졌다. 최석정이 쓴 비명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남겨져 있다. “신하된 자 관록을 먹으면서 누군들 충성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으리오만 변란을 만나 죽고 사는 일 앞에 서면 목숨을 바치는 자가 드물다. 공(公)이 국난에 항거하여 흰 칼날 무릅쓰기를 주저하지 않은 일과 한원군(아들 이목)이 적에게 굴복하지 않아서 부자가 사절한 것은 청사를 빛낸 것이다…”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57 호 / 2001-10-15
2108 : 제목 : 정만석
부제목 :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정만석
1812년(순조 12) 평안도에서 홍경래가 정주성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한 사람이 바로 우의정 벼슬까지 한 정만석(鄭晩錫, 1758-1834)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를 호위하여 중국까지 따라가 의연한 죽음을 맞은 정뢰경(鄭雷卿,1608-1639:본지 5.14.일자 참조)의 후손이기도 하다. 정만석은 온양 정씨 가문으로 부친 정기안(鄭基安)과 모친 안산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출중하여 10세 때 이미 시경, 서경을 비롯하여 역대 사서(史書)에 이르기까지 안 읽은 책이 없을 정도였다. 23세에 사마시 합격, 3년 뒤인 26세 때는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과거 급제후 정만석은 피폐한 민정을 살피기 위한 암행어사로 전라도 일대를 돌았다. 거듭된 흉작에다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농민들의 대부분이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본 정만석은 조정에 상소하여 긴급 구호양식을 받게 하였다. 또한 그는 나중에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여러 고을을 돌아보던 정만석은 ‘김진사’라 하는 괴이한 인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과연 소문대로 풍채는 호걸스럽고 부리는 종들이 많았는데도 무엇으로 부자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어디론가 떠나는 김진사를 미행하였다. 알고 보니 김진사는 주역에 매우 밝고 사람들의 일을 훤히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길에서 만난 사람의 목숨을 구해준다든지 잘못 쓴 묘자리 터를 일러주어 그들로부터 사례를 받는 것을 보았다. 김진사에 대한 오해를 푼 정만석은 그와 더불어 토론을 해보고는 벼슬길로 나가길 권하였다. 그러나 김진사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소. 어사가 나라 일에 열심인 것에 감격했나이다”하자 정만석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고 하니까 “20년 후에 평안도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 뒤 정만석은 병조참의, 형조참판, 좌우 승지 등 관직을 고루 거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있을 때 홍경래가 서북지방에서 난을 일으켰다. 정조 임금은 정만석을 위무사로 임명했다. 정만석은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킨 평안도로 갔으나 그가 성문을 굳게 닫고 버텨 여러달이 지났다. 그 때 바로 김진사가 돌연히 나타났다. 김진사는‘화공(火攻)’을 써서 적을 물리칠 계책을 일러주었다. 정만석은 그가 얘기해 준 대로 땅을 파내어 성 밑으로 통하게 한다음 화약을 가득 쌓아 놓고 폭발시켜 성안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외직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정만석은 5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우의정 벼슬까지 올랐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청빈하였다. 누추한 집에서 평생을 살면서 나라에서 주는 녹(祿)은 형제와 일가 친척들과 고르게 나누었다. 평안도 백성들은 정만석의 업적을 기리는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다. 전남 해남군에도 그를 위한 ‘영세불망(永世不忘)’비각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전한다. 봉산면 궁평리에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정해경 객원기자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61 호 / 2001-11-12
2582 : 제목 : 평주 이승복
부제목 : 신간회 결성의 주역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은 민족해방운동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었다. 지부가 139개, 회원이 2만 2천여명에 이를 정도로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29년 민중대회 사건으로 위원장이 검거되고 내부 노선의 차이로 해소되기는 했어도 신간회가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던 조직운동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 신간회의 30인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의 손자 평주(平洲) 이승복(李昇馥)이다. 이승복(1895-1978)은 한산 이씨 가문으로 고려조 목은 이색의 후손이며 아계 이산해의 14대손이다. 의병운동을 도모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일제의 총칼에 참변을 당했을 때 이승복은 겨우 13살의 소년이었다. 비록 어렸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분명했다. 16살 때 집안에서 혼인을 시켰으나 그는 큰 뜻을 세우고 서울로 올라갔다. 장통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보에 편입하여 학교에 다니며 밤에는 남궁억이 교장으로 있던 청년학교에 다녔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대동법률전문학원에 진학한 이승복은 조소앙,유치형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확고한 뜻을 세웠다. 마침내 19세 되던 1913년에 그는 러시아 연해주의 니꼴리스끄로 망명길을 떠난다. 그곳에서 이승복은 이동녕, 이상설 등과 같이 지내며 박은식과 청구신문 발행하는 일을 도왔다. 1921년에 이동녕 등과 같이 상해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이승복은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홍명희가 주축이 된 ‘신사상연구회’(나중에 화요회로 개칭) 조직간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1923년 귀국했다가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김상옥사건’에 연루 혐의를 받고 10여일 간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24년 동아일보에 조사부장으로 입사한 이승복은 민족 언론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에서 시대일보,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며 그는 영업과 자금동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갑부로 소문난 민영휘의 재산관리인 남상순을 설득하여 거금을 내놓게 하는 등 장안의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돈을 끌어들여 신문이 정상적으로 발행되는데 막대한 공을 세웠다. 그는 이름을 내세워 활동하기를 꺼려했다. 오히려 막후에서 참모역할에 만족하던 그를 주변 동료들은 ‘제갈량’이라고 불렀다. 신간회 결성과 운영에도 그는 드러나지 않게 큰 역할을 했다. 선전부 총무간사의 직책을 맡아 강령,규약 제정 뿐만 아니라 저명인사들을 신간회에 참여하게 하며 자금동원까지 담당했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고 1932년 조선일보에 대한 탄압이 들어왔다. ‘재만동포 구호금’ 유용의 죄목으로 민세 안재홍과 이승복에게 실형이 선고되어 8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예비검속으로 헌병사령부에 구속되어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정국에서 이승복은 국민당, 한독당 등의 정당활동을 하였으나 남북통일 정부 수립이 좌절되자 예산으로 낙향하였다. 1973년 평주 이승복은 평생을 지니고 다니던 조부의 문집인 <수당집>을 발간하였다. 백일홍을 좋아하던 그는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아들 문원(文遠)이 현재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있다. 정해경 객원기자 <인물이야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0 호 / 2002-02-25
64 : 제목 : 바로 보는 석진형
부제목 :
무한신문이 기획 연재하고 있는 『이상재 선생과 함께 찾는 숨은 인물이야기』는 우리들이 역사 주체임을 일깨워준다.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우리들의 역사는 자주적 해방론을 거론하면서 치열한 민족운동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다 보니 학생들은 “독립 운동을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해방이라니?”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살아온 이야기는 우리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자신과 이웃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애향과 애국을 실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감동과 교훈은 더욱 값진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난 제107호(2000. 9. 4)에서 연재한 「예산 발전의 견인차 석진형」은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용어 사용(보호가 아닌 늑약이므로 ‘을사조약’으로 표기하는 것이 적절함)이나 하나의 도시 시설(금융기관)로 말미암아 예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점, 친일 조선총독부 관료를 높이 평가했다는 점(사실 석진형은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제7대 충청남도 도지사를 역임하였는데 어떤 명분으로도, 업적(?)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친일 관료임)은 차치하더라도, 석진형의 활동과 관련한 의미 부여는 다소 과대 포장된 내용임을 발견할 수 있다. 1922년 4월 충남공립농업학교(1932년 4월 예산공립농업학교로 변경)예산 이전은 홍성 지역 유지집단의 충남고등보통학교 유치운동과 관련성을 갖고 있으며 오히려 성원경의 후원이 있었다. 충남제사(주)의 설립에도 막후 노력과 힘을 보태었다는 점은 사실 내용이 좀더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차라리 호서은행과 관련하여 인물을 소개하면 어떠했을지. 호서은행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제 자본에 잠식당하지 않았으며 단 한사람의 일본인도 중역으로 초빙하지 않았다. 1930년 2월 신은행령으로 한일은행(동일은행으로 상호 변경)과 합병할 때에도 대등한 관계에서 합병하였다. 이처럼 호서은행이 일제 금융자본에 예속되지 않고 18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사실과 초빙되어 호서은행 취제역을 맡은 대한제국 정부 관료 출신인 석진형이 근대적 경영마인드의 관련성을 규명하는 것이 오히려 좋았을 듯 싶다. 인물 탐구는 과학적 근거를 가진 객관적 사실로의 접근이 중요하다는 점을 밝혀두면서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 갖기를 기대해 본다. “한말 일제하 예산의 발전은 경제적 여건 못지 않게 인문 지리적 조건도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인물의 역할에 의해 지역이 외형적으로 변하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인물의 역할이 공중에 이익을 주는 사업을 했는가? 그 사람에 대한 민중의 입담은? 당시 조선 총독부 고위 관료 취임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이른바 빽과 뒷거래 정치와 지역 발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이 예 선(공주고 교사, 예산문화연구소) <인물이야기>
무한신문 (webmaster@moohan21.com) - 109 호 / 2000-09-25
101 : 제목 : 이존창
부제목 : 충청도 지방에 최초로 천주교회를 세워
천주교가 ‘천주학’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400여년 전인 1603년이다. 실학파들에 의해 서양의 기술,세계 지리 등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학문’이 아닌 ‘신앙’으로서의 천주교가 대중에게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200 여년 뒤인 18세기 말엽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는 천주교 교리는 신분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조선 민중에게 진보적인 이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서울과 경기 지역을 제외한 지방에서 천주교가 가장 먼저,그리고 가장 광범위하게 대중에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이존창 (1759-1801) 사도이다. 세례명이 ‘루도비코 곤자가’인 이존창은 경주 이씨 집안의 부유한 양반 계급출신이다. 예산 여사울(지금의 신암면 신종리 )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같은 마을의 참판 벼슬을 지낸 홍유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했다. 홍유한은 대학자로 스스로 ‘천주실의’를 보고 도를 닦았던 사람이었다. 이존창은 홍유한을 통해 천주학을 비롯해 다양한 학문 세계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스승이 자신의 공부를 위해 경상도 지방으로 떠나자 이존창은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에서 권철신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이존창은 천주교 교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신앙’으로서의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존창은 26살이 되던 1784년에 이벽, 김범우, 권일신,정약용 등과 함께 천주교 세례를 받게 된다. 천주교 교회 구성에 대해 잘 몰랐던 이들 초기 신자들은 신부나 주교를 나름대로 칭하였다. 권일신이 주교가 되고 이존창을 비롯해 이승훈,이벽 등은 신부가 되어 지방으로 전교활동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이존창은 바로 고향인 예산으로 내려와 천주교를 대중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양반이 지나가면 천민들은 고개를 들고 마주 쳐다보지도 못했던 당시에 이존창은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다. 양반-상놈의 차별은 없어져야 한다’는 놀라운 ‘말씀’을 거침없이 하였다. 평소부터 남다른 품성으로 존경을 받고 있던 그가 ‘인간의 평등함’대해 설파하자 얼마 되지 않아 그로부터 교리를 전해듣고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들이 내포 지방만 해도 무려 300 여명이나 됐다고 한다. 신자들은 이존창의 집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고 교리를 배웠다. 충청도 최초의 천주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1791년 전라도 지방에서 ‘진산 사건’이 일어난다. 천주교 교리에는 ‘죽은 사람의 제사를 모시지 말라’라는 내용이 있어 신자 가운데 신주를 태우고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을 빌미로 확산 일로에 있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존창도 공주감영에 갇혀 고문과 취조를 받게 되었다. 모진 고문에 못 이긴 그가 형식적으로 천주교를 안 믿겠다고 하는 ‘배교서(排敎書)’를 쓰자 석방이 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이존창은 근거지를 홍산,금산 지방으로 옮겨 다시 전교 활동을 시작했다. 1795년 주변의 밀고로 이존창은 다시 천안 땅에서 6년 간 유배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유배 중에도 계속 기회만 있으면 교리를 전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서울로 압송되었다. 재판정에서 그는 ‘나는 호중(湖中,지금의 충청도 지방을 말함)의 천주교 지도자이다’라고 하며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였다. 마침내 그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함께 사형언도를 받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서울에서 치명을 당했다. 그러나 이존창에게는 충청도 지방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1801년 4월 10일 이존창은 공주 백사장 ‘황새바위’에서 43세를 일기로 사형되었다. 김대건 신부가 이존창 조카딸의 손자가 된다. 결혼을 했었는 지, 자식이 있었는 지는 알려지지 않으며 무덤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지 신암면 신종리에 그의 생가터가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인물이야기>
139 : 제목 : 임명호
부제목 : 예산 최초 감리교회 세워
우리나라에 기독교(개신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0년 대에 아펜셀러와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서이다. 구교인 천주교에 비해 약 200여년 늦게 전파되었지만 천주교처럼 심한 박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서울 인근을 제외한 각 지방으로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충청 지역으로는 감리교단의 선교사들이 많이 파견되어 왔다. 인근에서는 홍성제일교회,갈산교회가 먼저 세워졌다. 예산 최초의 기독교(개신교) 감리교회인 ‘등대교회’는 1912년에 갈산교회의 도움으로 설립되었다. 삽교읍 방아리에 있는 등대교회를 세운 사람이 바로 임명호(任命鎬, 1870- ?)이다. 풍천 임씨 가문의 대지주 임참봉댁 둘째 아들로 태어난 임명호는 매우 진취적이고 활달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고향인 삽교읍 방아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서울로 유학해 중교의숙(中橋義塾) 신학문 보통과와 육군 무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했다. 임명호는 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6품 승훈랑, 육군연성학교 교관 등을 역임한 뒤 부위(副尉, 지금의 육군 중위계급에 준함)로 승진하였다. 그는 군인답게 단정한 몸매와 절도를 가지고 있었고 사리에 밝고 인자하였다. 임명호의 군인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8월의 구 대한제국의 군대해산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군복을 벗은 임명호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경성 다동보통학교 등에서 교사 생활을 잠시 하다 고향으로 내려왔다. 서울에 있을 때 기독교 세례를 받았던 그는 나라를 잃은 아픔을 신앙심으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또한 성경 공부나 집회 활동을 통해 지역 주민들을 계몽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마침내 1912년 2월 6일 임명호가 주축이 되어 예산 최초의 감리교회인 등대교회가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별로 신자가 많지 않았지만 차츰 주변 마을에서까지 예배를 드리러 왔다. 신자가 많아지자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 불안을 느낀 일제 당국은 교회 문을 닫게 하려고 열성 신자들을 주재소로 불러 협박과 회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수산 장로를 비롯한 신자들은 꿋꿋이 버텨 교회를 지켜냈다. 오가면장이 된 임명호는 예산 지역개발을 위해서도 나름대로 애쓰기 시작했다. 정미소를 마을 내에 세우도록 하는 것이나 잠업, 축산업, 면화 재배 등 주민들의 소득 확대를 위해 많은 시책을 폈다. 또한 잠시 교직에 머물렀던 경험으로 육영 사업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오가보통학교 부지를 선뜻 내놓기도 했다. 오가면 역탑리와 삽교읍 방아리에 그의 공을 기리는 송덕비가 있을 정도로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식민지 관료인 그는 뼈아픈 경험도 한다. 토지조사사업 시행 과정에서 자신의 땅을 등기하지 않은 사람이 일제에 의해 국유지로 땅을 뺏기자 면장인 임명호에게 똥물을 뿌린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다. 방아리의 ‘태극무늬 사저’는임명호의 남다른 기상을 엿보게 한다. 1935년 30칸 짜리 집을 지으면서 추녀 밑 모서리마다 태극무늬를 그려 넣은 것이다. 또한 집 구조 자체를 일반 민가주택 양식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던 새 을자 형으로 지었다. 이 집에서 그의 외동딸 숙재는 야학을 열어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한 임명호는 양자를 들였으나 여의치 않아 파양을 한다. 숙대 총장을 지낸 딸 임숙재조차 결혼한 지 1년도 못되어 남편을 잃어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인물이야기>
206 : 제목 : 신현균
부제목 : 민감힘으로 형제고개 넓혀
대흥면 탄방리에서 예산으로 오자면 넘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가 바로 형제고개이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에는 마차나 자전거를 타고 넘던 소로였다. 4㎞에 이르는 이 길을 차가 다닐 수 있는 큰 도로로 만드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예산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신현균이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수천만원이 들 대공사를 7개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해냈다. 신현균(申鉉均,1922-1997)은 평산 신씨 집안으로 고려개국 공신 신숭겸의 후손이다. 대흥면 갈신리가 고향인 그는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늦게 예산보통학교에 입학했다. 6학년이 되던 15살에는 두 살 연상인 이을준과 결혼하였다. 1949년 홍익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진로를 모색하던 중 당시 대률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유재풍의 권유로 고향에 내려와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9년 공주 월가초등학교에 교장으로 승진하여 부임하였으나 예산 대률초등학교 졸업생을 비롯한 주민들이 한사코 “다시 예산으로 오셔야 한다”고 요청해 1년 3개월만에 다시 예산으로 돌아와 대률초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지역 발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신현균은 대률초등학교가 있던 대률리에서 예산으로 넘어가는 길이 매우 좁아 차가 다니기 힘든 점을 안타까워 했다. 고향인 갈신리의 일가와 친지들, 인근 마을 대률초등학교의 졸업생들과 더불어 길을 넓히자는 의논을 하자 다들 찬성하고 나섰다. 마침내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난관은 곳곳에 있었다. 도로로 수용되는 땅의 주인들 일부가 땅을 내놓으려 하지 않아 이를 설득하는 데 한참을 애써야 했다. 또한 길 중간쯤 해서 오래된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를 베어내지 않고는 공사가 물거품이 될 형편이었다. 할 수 없이 신 교장은 손수 톱으로 이 나무를 베었다. 며칠 뒤 마을나무로 모시는 것을 베어낸데 항의하는 주민들 일부가 낫, 도끼 따위를 들고 신 교장의 집으로 쳐들어 왔다. 신 교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길을 내자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라며 이들을 설득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의 당당한 기세에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신 교장은 그 뒤 여러 해 동안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한참 뒤에야 “선상님, 그 때 참 큰 일 하셨슈”하는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1975년에는 새마을 운동의 공로로 인정되어 훈장(협동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87년 모교인 예산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충남도 교육위원회 부의장, 예산군 문화원 연구위원 등으로 활동을 펼쳤다. 슬하에 6남매를 둔 신현균은 ‘화(和)’를 가훈으로 삼고 강조했다. “있거나 없거나 즐거이 살자. 웃지 않고 사는 이는 바보이니라”라고 입버릇처럼 자식들에게 이야기했다. 둘째 아들 무웅(武雄)이 현재 예산읍내에서 문구사를 경영하고 있다. <인물이야기>
240 : 제목 : 조성행
부제목 : 참 의료인의 길을 걸은 예산 신의학의 선구자
예산에 서양의학이 처음 들어온 것은 일제시대 때이다. 농촌 지역에서 신의학을 배워 의사가 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예산에서 신의학 도입기에 선구적 역할을 한 몇 명의 의사 중 한 사람이 바로 조성행이다. 조성행(趙聖行, 1902-1988)은 한양 조씨 가문으로 태어난 곳은 홍성군의 구항이다. 그는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부친의 권유로 21세 되던 해인 1922년 경성 유학길에 올랐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조성행은 학업 성적이 매우 뛰어났다. 한번은 교내 수학시험이 있었는데 전교생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완벽한 답안을 써내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보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를 거쳐 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경성에서 병원을 개업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고향을 택했다. 의전을 졸업한 뒤 예산으로 이주하여 1935년 ‘중앙의원’을 열었다. 조성행은 ‘정직, 정성, 사랑’을 좌우명으로 삼아 환자를 대했다. 또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집에서 민간요법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서양의학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곧 인근 지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그는 병원에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왕진도 다녔다. 한번은 6.25 전쟁이 나고 얼마 후 유구로 왕진을 갔는데 산모가 있었다. 아기는 사산되었으나 환자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 왕진료 대신 꽁보리밥 한 그릇을 대접받고 온 일도 있었다. 의료계의 존경을 받던 그는 주변의 추천으로 6.25전쟁 이후 예산군 보건과장을 맡아 의료 행정에 수 년간 종사하였다. 또한 양의(洋醫)지만 한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전통 사회의 장점을 계승하고자 한 그의 노력이 인정되어 예산유도회의 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조성행은 병원에서나 가정에서 늘 근검 절약을 강조했다. 달력 종이조차 그냥 버리는 일이 없어 뒷면을 메모지로 쓰고 병원 마당의 잡초도 손수 뽑는 등 집 안팎의 식구들에게 행동으로 모범을 보였다. 상업적 이익을 마다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강직함 덕에 살림은 그리 넉넉하질 못했다. 서울에서 의대를 다니던 막내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빌려다 줄 정도였다. 조성행은 아들 셋, 딸 셋을 두었는데 그의 영향으로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의사가 되었다. 큰 아들 성근이 예산중앙병원 이사장으로 있고 둘째 아들 성진은 충북대 총장이다. 셋째 아들 성경은 예산읍내에서 조외과를 경영하고 있다. <인물이야기>
295 : 제목 : 여성교육계의 큰 별 임숙재
부제목 :
사재털어 숙명여전 인수 숙명여대 초대총장 지내 방아리 출신… 군지에도 없어 임숙재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자 선각자로서 숙명여대 총장을 지낸 교육계의 큰 별이다. 그녀는 얼마전에 타계한 고황경 서울여대 명예총장,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 중앙대 임영신 총장 등과 더불어 여성 교육계에 큰 자취를 남겼다. 그녀가 예산출신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예산군지’에조차 언급이 없다. 임숙재(任淑宰 , 1891-1961)는 예산 삽교읍 방아리(전 오가면 좌방리)에서 대지주이자 오가면장을 지낸 임명호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학구열이 강했던 그녀는 신학문을 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여러 방면의 책을 접하였다. 17세 때 신창의 명문가 윤참판댁 자제인 윤돈(尹墩)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갑작스런 병으로 남편이 결혼한 지 1년도 못 되어 별세하여 임숙재는 18세의 나이로 과부가 되었다. 임숙재는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자살 기도를 하기도 했으나 기독교 신앙으로 이를 극복했다. 그녀는 친정인 삽교로 돌아와 있으면서 시댁쪽 일가되는 윤남의를 양자로 들였으나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의 권유로 양자를 부모님께 맡기고 바로 경성으로 유학을 떠났다. 명신보통학교, 숙명여고보(지금의 숙명여고)를 졸업한 그녀는 3년간 공주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경성에서 공부하면서 늘 해외로 유학하기를 소망해 왔던 임숙재는 李왕가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침내 동경 유학길에 올랐다. 동경 여자고등사범학교 가사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귀국한 그녀는 모교인 숙명여고보를 거쳐 대구고보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방학 등 잠시라도 틈이 날 때면 예산으로 내려와 이수산 장로 등 등대감리교회의 여성인사들과 더불어 삽교,예산읍 등지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계몽활동을 하기도 했다. 또한 임숙재의 아버지 임명호는 태극무늬 새을자형 30칸짜리 저택에서 야학을 열어 우리말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는데 임숙재도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도왔다.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설립되자 임숙재는 조교수로 임명된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 하에서 그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국대강연회 등 친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부분의 여성 인사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로 인해 해방 후 반민특위에 고발당하게 된다. 해방 후 임숙재는 재단을 상실한 숙명여전을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의 재산 가운데 200석 지기의 논을 처분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대지 20만평을 확보하여 숙명여전을 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뒤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 임숙재는 캠퍼스 확장, 본관 증축, 대강당 신축 사업 등을 무리없이 마무리지었다. 임숙재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엄격하였다. 또한 차분한 가운데서도 좌중을 압도하는 힘이 있어 여성이지만 많은 남자 부하 직원들을 잘 이끌어갔다. 그녀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광시 출신의 윤병구 국회의원이 서울에서 그녀를 한번 보고자 하여 만난 일이 있다. 그녀와 면담을 하고 난 뒤 윤병구는 “범같은 기상을 가진 대단한 분이다. 그 기세에 눌려 할 말도 제대로 못했다”라고 했다고 한다. 자유당 정권 말엽에 권력 핵심부에 있던 몇몇 인사들에 의해 임숙재를 총장에서 밀어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재단 관계자들과 일부 교수, 직원들이 이들 세력과 결합되어 임숙재는 매우 곤란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총장 자리를 물러나게 된다. 숙명여대를 오늘날과 같은 명문 여자대학으로 키워낸 공적을 남기고도 총장을 탐하는 이들에 의해 쫓겨나다시피 한 임숙재는 교육계나 여성계, 심지어 숙대에서조차 아직까지 그녀의 생애와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양자로 들인 윤남의씨마저 요절하는 바람에 양손자와 나중에 두 번째 양자로 들인 임학순과의 재산 갈등 등 가정적 불행까지 겪어야 했다. 예산이 낳은 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예산에서조차 묻혀버린 것에 안타까워하는 몇몇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임숙재 기념사업회’ 설립문제가 논의되고 있기는 하지만 결실을 맺고 있지는 못하다.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15 호 / 2000-11-13
389 : 제목 : 임숙재 바로보기
부제목 :
그는 분명 친일파로 이왕가의 장학생에 선발 동경으로 유학 … 일제 말기에 시국대강연회에 참여, 대동아공영권의 나팔수가 되었다. 한국여성계의 김활란, 임영신, 모윤숙 등 우리 귀에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친일파였다는 사실… 지난 11월 13일치 본지에 게재된 “여성 교육계의 큰별 임숙재”에 대하여 한마디 하고자 한다. 임숙재에 대한 연구는 이미 전 삽교고등학교 교사였던 신상구씨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그 연구논문은 ‘전국향토사연구논문총서’(1992. 전국 문화원연합회간행)에 실려있다. 인물사의 함정은 미사여구을 동원하여 그들을 추앙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행동과 반민족적 행위들이 숨겨져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점이다. 임숙재에 대하여 교육계의 큰 별이면서도 예산군지에 조차 실려있지 않다고 지적하였지만, 오래전부터 여성교육계의 거목으로 조명해야 하느냐, 아니면 친일파의 군상으로 분류하여 반민족적 행위자로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놓아야 하느냐로 말이 많았던 인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분명 친일파로 반민족행위자였다. 그의 부친 또한 기득권을 가진 친일 지주였을 뿐이다. 본말에서 벗어났지만 일제 강점기 지주계층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제에 충성했다. 따라서 일제의 농민수탈방식은 농민에 대한 직접수탈방식 보다는 지주에 의한 간접수탈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착취구조를 이해하면 일제시 만족자본이니 민족대학이니 민족은행이니 하는 말이 얼마나 허구적인 말이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족해방투쟁사를 전공한 공주대 한교수에 의하면 예산지방에서 일제강점기 애국애족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한 사람이 무려 160여명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그에 비하여 독립운동의 상징처럼 생각한는 천안지역은 5~6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일제에 철저한 충성서약을 하지 않으면 시혜를 누릴수 없는 이왕가의 장학생에 선발되어 동경 유학생이 되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연관되었으나 그는 철저히 외면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자발적으로 시국대강연회에 참여하여 대동아공영권의 나팔수가 되었다. 수많은 여성이 희생된 정신대 문제에 대하여도 시대적 고민이나 참회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여성계의 기라성 같은 김활란, 임영신, 모윤숙 등 우리 귀에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잊고 우리는 그들을 추앙하고 있다. 수많은 여인들이 남자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민족해방투쟁전선에서 산화해 갔고, 애국애족운동을 하다 고초를 겪었건만 이름없는 별이 되어 사라져갔다. 그러나 소위 여성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친일 부역이라는 반민족행위를 묻어둔채 신교육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광복된 조국에서 다시 한국 여성계에 군림하였고, 여성교육계의 큰 별이 되어 새로운 계급사회를 형성하였다. 무지몽매한 여성을 계몽한다는 이름으로, 교육계의 원로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굴절시켰던 그들이지만 과거에 대한 진정한 참회의 글은 발견하지 못 했다. 왜 과거의 행적을 들춰내냐고 사람들은 말한다. 오늘의 번영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고 과거와 단절된 현재는 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무리 친일파가 다시 장악했던 해방정국이고, 대통령까지 했던 나라지만 이제는 역사의 심판대에 그들을 올려놓아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야 할 때다. 밝은 내일을 위해서 말이다. 성 부 제(신양면 연리) <인물이야기>
431 : 제목 : 이태규
부제목 : 노벨상 후보에 오른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
‘리-아이링’ 이론 발표 유타대 재직중 후보 올라 1973년 과학원 교수로 귀국 연구논문만도 158편 남겨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 예산보통학교의 한 교실에서는 화학 실험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산-알칼리 반응을 알아보는 실험에 유난히 흥미를 느끼며 몰입하던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노벨 화학상 후보에 오른 이태규였다. 이태규( 李泰圭,1902-1992) 는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태어났다. 전주 이씨 가문으로 단종때 사헌부 벼슬을 지낸 이맹화의 14대손이다. 한학자인 부친 이용균과 어머니 박씨(절충 장군의 후손)의 차남인 이태규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고 두뇌가 명석했다. 형을 따라 서당에 다닌 지 며칠도 안되어 천자문을 떼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이태규는 예산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해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경성고보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교오토 대학을 거쳐 대학원에 관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곳에서 이태규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1937년 교오토 대학 교수로 정식 채용된 이태규는 1938년 연구차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의 미국행을 거부하던 일본 정부는 연구비를 지급하지 않았지만 김성수씨 동생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미국에 갈 수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아인슈타인, 테일러, 아이링 등의 대학자들과 만나 교유했다. 마침내 이태규는 아이링 박사와 함께 분자점성학의 기초가 되는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연구와 후학 지도가 어렵자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 유타대 교수가 된 그는 물리화학계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69년 노벨화학상 후보에 올랐다. 직접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노벨상 추천위원에 임명됐다. 1973년 이태규는 미국에서의 편안한 여생을 물리치고 한국과학원 교수가 되어 영구 귀국한다. 그는 과학원에서 강의도 하고 한국물리학회 회장도 맡아 우리나라 기초과학 분야의 발전을 위해 생애의 마지막까지 분투 노력했다. 그가 남긴 연구논문만 해도 158편이나 된다. 정지용의 중매로 가톨릭 순교자의 딸인 박인근과 31세에 결혼한 이태규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회인(會仁)이 미국 유타대학에서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세 딸들도 모두 서울대, 유타대를 거쳐 학계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검 검사를 지낸 이홍규가 그의 동생이다.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 Keen Observation and Everlasting Effort)’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과학자로서 빛나는 인생을 살았던 이태규는 사후에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치됐다. <인물이야기>
885 : 제목 : ‘요로원야화기’를 쓴 박두세
부제목 :
양반의 허세를 통렬히 비판한 연암 박지원의 ‘호질(虎叱)’에 견줄 만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이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이다. ‘요로원야화기’는 과거에 실패한 시골 선비가 소사(현재의 부천)에서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가면서 요로원(현재의 아산)의 어느 주막에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서울양반은 시골선비에게 호되게 당한다. 시 짓기 내기에서 시골 선비는 ‘我觀京之表 果然擧動戎(아관경지표 과연거동계 : 내가 서울 것들을 보니 과연 거동이 오랑캐들이 하는 짓 같구나)라며 일갈한다. 양반의 위선과 허세뿐만 아니라 붕당에 휩싸인 현실정치를 흥미롭게 풍자한 이 작품을 쓴 사람이 바로 예산 사람 박두세(朴斗世, 1650-1733)다. 박두세는 예산에서 일찍이 뿌리내린 가문의 하나인 울산 박씨 집안 사람으로 호가 동암(東巖)이다. 고려 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고위 관직을 마다하고 예산으로 내려온 한림공 박유(朴愈)의 후손이다. 박두세는 33세 되던 해인 숙종 8년(1682)에 둘째 형 태세(泰世), 셋째 형 규세(奎世)와 함께 과거시험(증광시)에 응시하여 문과 급제를 한다. 두 형들도 진사 급제를 하여 ‘삼형제 동시 과거합격’이라는 보기 드문 기록을 올렸고 그 덕에 돌아가신 아버지, 할아버지에게까지 벼슬이 내려졌다. 5년 뒤 셋째 형 규세는 다시 문과에 도전해합격한 뒤 전주와 영천 목사를 지냈다. 박두세는 홍문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1686년 의금부 도사로 권대운을 압송할 때 편리를 봐주었다고 해서 파직됐다. 그는 남인에 소속돼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했다. 천안, 순천, 진주 등의 목사(牧使)를 거쳐 지충추부사를 지냈다. 박두세는 문장에 능했는데 운학(韻學)에 특히 밝아 ‘삼운보유(三韻補遺)’라는 저술을 남겼다. ‘요로원야화기’는 그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전인 1678년(숙종 4년)에 쓴 것이다. 양반이야기, 경향풍속, 육담, 풍월, 작시 경기, 사색편론, 학문, 수양 등을 문답하는 식으로 엮었다. 원본이 따로 없고 필사본 두 종류만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한글본이고 하나는 한문본이다. 가람 이병기가 한글 주해본을 펴낸 것이 있다. ‘요로원야화기’ 중의 수양(修養)에 대해 언급한 내용 가운데 새겨볼 만한 부분을 일부 소개한다. “…내 소싯적에 성질이 급하여 고치려 해도 쉽게 고치지 못하였으나 어느날 아침에 갑자기 깨달으니 어렵지 않았소이다......그릇된 생각이 나면 문득 바를 정(正)자를 생각하면 사벽(邪僻)하지 않고 거만한 마음이 나면 공경할 경(敬)자를 생각하고 나태한 마음이 나면 부지런할 근(勤)자를, 사치스런 마음이 들 때는 검소할 검(儉)자를 생각하고 속이고 싶은 마음이 나면 정성 성(誠)자를 생각하면 속이기에 이르지 않고..... 말할 때는 잠잠할 묵(默)자를, 분노하는 마음이 들 때는 참을 인(忍)자를 생각하면 급하게 죄를 짓지 않게 되오...... <인물이야기>
937 : 제목 : 이기세
부제목 : 4개 도지사를 역임한 예산의 청백리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자유당 말기의 전라남도 지사실. 도지사 이기세는 내무부장관 최인규로부터 부당한 인사청탁을 받았다. 당시 K시 부시장이었던 모 인사를 군수로 발령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기세는 “그건 안돼유. 면장 자격밖에 없는 사람을 어떻게 군수로 발령해유”라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이 일로 그는 도지사에서 해임되었다. 이기세(李琦世, 1903-1990)는 전의(全義) 이씨로 호가 우와(又窩)이며 덕산면 복당리가 고향이다. 그는 이조시대 대표적 청백리이며 덕산현감과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잠와(潛窩) 이명준의 후손이다. ‘우와’라는 호는 사학자 이병도가 이기세에게 ‘잠와’와 같은 청백리가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것이다. 이기세는 5살에 서당에 입학하여 10여년 간 한학을 공부했다. 신식학교인 보통학교는 15세가 넘어서 입학(홍성군 갈산보통학교)했다. 그가 17세 되던 해(1919)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홍성읍내에 나가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그는 일본인 경찰에게 붙잡혀 홍성경찰서로 넘겨졌으나 조사만 받고 풀려나왔다. 이기세는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의 전신)에 합격하였다. 졸업 후에는 전문학교 진학의 꿈을 접고 공주군청 서무과에서 말단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충남도 산업과장, 내무국장을 거쳐 경기도 내무국장을 지냈다. 52세 되던 해(1954)에 경기도지사와 내무부장관의 적극 추천으로 충남도 지사에 오른다. 그가 도지사에 오르게 된 계기가 있다. 경기도 내무국장 시절 자유당 의원들과 자동차 때문에 마찰을 빚었다. 도의 예산으로 국회의원들의 자동차를 고쳐주고 유지비를 대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는데 그는 “옳지 못한 일”이라며 당장 중지시켰다. 자유당 의원들이 대통령에게 항의하였으나 대통령에게 불려간 이기세는 오히려 칭찬을 받았다. 이기세는 충남 도지사를 비롯 전남북 도지사, 4.19이후 민선 도지사를 해 4대 도지사를 지냈다. 5.16 쿠데타로 140일만에 민선 도지사를 물러났다. 그가 부하 직원들에게 늘 강조한 말이 있다. “豈得每人悅之 但求無愧我心(개득매인열지 단구무괴아심)”즉 ‘어찌 만 백성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으리오, 단지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된다’는 뜻이다. “행정가는 양심가”여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30여년의 공직생활 중 한 푼의 뇌물도 받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부당한 청탁은 통하지 않았다. 민선지사 시절 “내가 지지해 지사가 되었는데 이런 부탁 하나 못 들어주나”면서 원성마저 들어야 했다. 이기세는 안동 김씨 가문의 김재규와 10세 때 결혼하여 외아들 종성(鍾聲)을 두었다. 그는 도지사 퇴임 후 아들 회사(충남방적)의 회장직을 지냈다. 덕산면 복당리 그의 생가 옆에 공적비가 있다.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31 호 / 2001-03-19
1018 : 제목 : 신현상
부제목 : 반민족특위의 검찰관 지낸 독립운동가
1929년 호서은행에서 지금돈 11억원을 빼내 독립자금으로 쓰려던 사건 발생 그 주역이 일연선생 1929년 겨울 호서은행에서 5만 8000원이란 거액을 빼내 해외의 독립자금으로 쓰려던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쌀 한 가마가 8원이었으니 5만 8000원이면 지금 돈으로 약 쌀 7000가마, 즉 11억이 넘는 큰 돈이다. 그 사건의 주역이 바로 일연(一鳶) 신현상(申鉉商, 1905-1950)으로 해방 후에는 반민족특별위원회의 검찰관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다. 신현상은 신례원 용곡산 아래 용곡마을에서 태어났다. 평산 신씨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이다. 유학자인 부친 신학균과 모친 청주 곽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신현상은 어려서부터 행동이 민첩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또 전간재, 권덕규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여 한학과 역사를 깊이 공부하였다. 그의 나이 21세 되던 해,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고자 결심하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중국에서 정화암, 이정규 등을 만나 상해노동대학을 졸업한 그는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투쟁 자금은 커녕 생계가 곤란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다. 아이스크림 장사도 하고 글씨를 써서 팔기도 했지만 자금난은 여전했다. 중국에 건너간 지 8년 만인 1928년에 신현상은 고국 땅을 밟았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예산에서 정미업을 하고 있는 동지 최석영을 만나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위조증권을 만들어 호서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빼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작전에 성공한 신현상은 5만 8000원이란 큰 돈을 몸에 지니고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한다. 신현상의 쾌거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고무되었다. 북경으로 간 신현상은 청진의 일본영사관 폭파를 위해 자금의 일부를 전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등 중국 각지에서 헌신하고 있는 동지들에게도 자금을 분배하려고 노력하던 중 일본의 대대적인 체포 작전에 걸려 잡히고 말았다. 신현상을 비롯해 10여명이 잡히고,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자금도 빼앗겼다. 1930년 국내로 압송된 신현상과 최석영은 모진 고문을 받고 공주법원에서 4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감옥에서 출소한 뒤에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으나 심산 김창숙, 계초 방응모 등을 만나 후일을 기약하곤 하였다.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의 판공실장에 취임한 신현상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 송환도 무사히 치루어내는 등 해방 후 정국에서 많은 일을 한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뒤 신현상은 반민족특위의 검찰관을 맡아 친일파 숙청의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압력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이 중도 하차하게 되자 그는 다시 공주로 내려갔다. 1950년 6.25로 신현상은 46세의 나이에 동족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1974년 김신(백범의 아들), 윤종(윤봉길의 아들) 등이 모여 추모비 건립추진위를 만들어 그의 고향인 신례원 용곡마을에 추모비와 일연각(一鳶閣)을 세웠다. <인물이야기>
정해경 (jhk@moohan21.com) - 133 호 / 2001-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