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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쓰는가? 이런 우둔한 질문은 시인들 스스로가 품을 때도 있지만, 일반 사람들로부터 흔히 질문을 받게 됩니다. 분명히 시는 모든 예술의 중심되는 꽃입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때로는 무용지물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는 서글픈 시대에 시인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적정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러한 염녀를 조금이라도 해소시키고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결실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 갈망하는데서 제작된다면 그 시인의 한 분신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되었거나 이땅에는 시인이 시를 쓰고 시를 읽는 독자가 있습니다. 이런 말이 시를 쓰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마는 그림은 무엇 때문에 그리느냐, 노래는 왜 부르느냐라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임니다.
2-1. 시인과 독자
눈을 뜨면 나에겐 풍경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나에겐 사랑하는 당신의 얼굴이 보인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필립 샤보네의 시입니다. 당신의 사랑스런 얼굴로 변하는 풍경이 눈을 감고 뜨는 순간의 차이가 바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느끼는 시인과 독자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황폐되고 삭막한 세상일수록 그 무엇인가가 내 가슴을 데워주고 위무해주는 따스함이 그립습니다. 그림도 있어야 하고 노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문학, 특히 시가 차지하는 그리움의 비중은 상당합니다.
[말테의 수기]를 쓴 릴케는 아무것도 더 쓸 것이 없는 허탈에 사로잡혀 이 상태를 벗어나 보려고 두이노 성(城)을 찾아 갔습니다. 추운 겨울날 이 성에서 방파제를 왔다갔다 하던 중 그의 머리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그는 수첩을 꺼내어 "누군가가, 설령 내가 외친다고 해도 천사들들의 서열 속에서 그것을 들어줄 것인가?"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그날 밤 완성한저 유명한 <두이노의 비가(제 1의 비가)>라는 작품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릴케도 절망과 허탈의 극한 상황에서 천사를 통해서 정신의 폭풍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하듯이 시를 쓰는 이유라고 할까, 시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이야기로 풀어 보고자 합니다.
①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말하고 싶습니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감상함으로써 마음 속에 솟아 오른 슬픔이나 공포의 기분을 토해내고 마음을 정화(淨化)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가 지은 <시학>에서 '비극은 어떤 행위를 모방한 것으로서 애련(哀憐)과 공포에 의하여 이것들의 정서 특유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말한데서 유래되었지만, 시를 쓰고 때로는 시를 읽음으로써 자신의 정서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② 나르시스(또는 나르시시즘-narcissism)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르시소스라고 하는 미청년이 산의 요정 에코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샘물에 비춰지는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영원히 뜻을 이룰 수 없는 운명이 주어졌고 마침내 샘물에 빠져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다는 신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자신의 용모나 능력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황홀해 있는 마음의 경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도취(陶醉)입니다.
이렇게 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가 시를 통하여 정화하거나 도취에서 어떤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시가 이 시대에 필요하거나 또 시를 써야 한다는 어눌한 생각에서 시쓰기의 출발은 시작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탈리아에서는 사분오열(四分五列)된 땅덩어리가 통일을 갈망하는 그 나라 국민에게 '이탈리아 자신'이라고 외친 단테(유명한 <신곡>의 저자) 뿐만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때 러시아가 독일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되었을 때 스탈린은 반동 시인으로 낙인을 찍었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푸쉬킨의 애국 시집을 황급히 인쇄하여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읽게 하여 병영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인들도 일제 강점기때 장한 모습들을 살필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바와같이 '황홀한 천재' 이상(李箱)과 뮤우즈의 사도(使徒) 운동주는 이름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왜경에게 피검되어 옥중에서 조국의 제물이 되었으며 이상화의 피끓는 애국시는 당시 나라를 잃은 국민들에게 꿈을 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돈도 되지 않고 명예도 되지 못하는 시쓰기는 여러 가지 악조건에서도 여전히 시를 버리지 못하고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큰 보람과 희열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2-2. 시의 목적
시는 아름다움이나 진실, 나아가서는 구원을 찾는 인간의 순수하고 진솔한 표현입니다. 시는 그만큼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시를 쓰는 사람은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사회의 병폐를 '뿌리 뽑기 위해서'라든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라든지 하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고 시를 쓰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몰라도 만약 있다면 이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이 되었어야지 굳이 시인이 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는 어디까지나 시적인 감동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서 쓰게 되는데 이 감동은 바로 표현의 의욕을 자아내게 되며 한 편의 시가 씌어졌을 때 비로소 이 표현 의욕은 충족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쯤에서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 한 편을 읽어 보면서 다음 이야기를 계속 합시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함밤 소리 없이 흩날리뇨
처마끝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졸로 가슴이 메어
마음 공허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라
밤 사이 흰 눈이 내리는 것을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과 '서글픈 옛자췬 양' 감동하기도 하고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눈'이라는 통속적인 소재가 시인의 감동과 만나면 무한대의 신비한 표현의 의욕과 그 표현을 통한 우리의 정신적인 충족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함께 이야기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안녕히.
어떻습니까? 지난 주까지의 강의는. 꾸준하게 경청해 봅시다. 무엇인가 새로운 마음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시작합시다.
인간은 누구나 감수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때가 있다. 막연하나마 어떤 정신적인 동경이나 갈망이 솟구쳐서 이를 표현해 보려는 의욕이 일어나서 종이에 낙서를 하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데 이러한 표현 욕구는 시를 쓰는 목적이나 그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습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씌어진 시란 다분히 자기 본위의 일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앞날의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청춘의 감성은 대체로 자기자신의 내부적인 세계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인 세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불안감의 표시로 봐야하며 이러한 표현의 욕구는 언젠가는 새롭게 발견되어질 미(美)의 세계에 대한 예술적 탐구정신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시인으로서 살아간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시적인 표현 욕구는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 속에 깊이 잠재한 내외적 세계의 조화로서 표현의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은 사회적 불안이나 내 자신의 불안 등 여러 형태의 모순들이 보다 안정되고 보다 차원 높은 세계의 강망이나 희구, 또는 향수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시를 쓰는 즐거움의 뒤안에는 이러한 욕구나 동경에 대한 충족감이 깃들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적어도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로 창조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참된 보람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요즘 시인들의 시창작 경향을 살펴보면 대체로 현실의 비합리성에 따른 위기의식의 극복과 절박한 갈증의 해소가 시적인 동기로 나타나는 예가 많은데 이는 시창작을 통해서 화해나 조화를 모색하고 정신세계의 안온을 위한 기원의 의지를 추구하려는 시의 목적의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방지원 시인의 작품 [해뜰 무렵]도 이러한 인식이 깊게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밤새 불을 밝히던 고깃배가
놀란 물살을 바쁘게 가르고
느린 듯 빠르게
그 찬란한 불덩이를 들어올릴 때
바다 한가운데 검게 앉은 그 사람도
바닷가의 사람들도 모두 한마음이었을까
연한 살점 태워 하늘에 올리는 소지(燒紙)
오존층까지 오르고
그 불덩이가 세상을 돌아
노을이 될 때
우리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남기를 바란다.
과연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시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리하여 자기의 정갈한 세계를 구축하고 시를 쓰는데서 지적인 만족을 획득하는 또다른 희열을 느낄 수 가 있를 것입니다.
매슈 아놀드의 말대로 ‘시는 인생 비평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3. 시인과 현대 사회
현대 사회는 대단히 복잡다단한 사회입니다. 살아가는 일마저 다양한 형태이지만 물질문명의 팽창으로 어쩌면 정신의 활폐화가 극도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아가는 시인들은 남다른 능력을 가졌거나 탁월한 그 무엇을 소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시인을 예언자나 초자연적인 느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행각한 적 있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C. D 루이스는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의 많은 예언자들은 시인이었으며 그리스의 사람들은 시인들이 시를 쓸 때에는 어떤 신(神)에게 홀렸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접신(接神)의 경지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고도로 발달된 과하문명이나 자본주의의 자유경쟁이라는 생활방식에서 시는 그 가치가 축소되고 그 기능이 감소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척박한 사회일수록 시의 가치성과 기능을 더욱 공고히 해야한다는 역설적인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문덕수 시인의 시론을 들어 봅시다.
그것은 마치 일반적으로 종교와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그만큼 우주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영역이 넓어져 가고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이 더욱 증대되어 가고 있는 현상과 같다고 하겠다. 현대는 산문의 시대, 곧 소설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시의 기능이 점점 중요시되어 가고 있고 시인의 존재 이유가 더욱 절실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시인은 복합적이면서 다원화된 현대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보면서 어떻게 그 기능을 살릴 수 있을까하는 문제들을 심각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마치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인격이 전락하여 인간관계는 바로 물질적 관계로 변형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고 사회의 분열현상마저 초래되고 있는 서글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들의 혹독한 아픔이며 비극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격의 파괴나 인간의 소외, 도덕의 소멸 등으로 현대인들은 불안하고 또한 고뇌의 원인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현대 사회가 고뇌의 늪으로 빠질수록 우리는 일찍이 예감할 구 없던 새로운 인류의 공동운명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자연의 파괴나 전쟁의 위험, 빈부의 차이,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 더욱 큰 고뇌를 인류 전체의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먹구름 홀연히 천지를 덮는다
지구 저쪽에서 날아온 조전(弔電)
펼친다, 펼치면서 꿈꾼다
먹구름 속 유영하던 꿈
깨진 꿈 껍질이 풀풀한 지상에는
오오, 누군가 온몸으로 오열하는
거기, 그곳에는 찌그러진 언어 몇 개만
막숨을 몰아 쉬고
이제 피와 눈물과 마지막으로 섞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먹구름은 저승쪽으로만 몰려가고
무방비의 이 지상에서
가녀린 기원마저
시름시름 무너지고 있다
--그래, 우리 살아남을 수 있겠나.
이 시는 졸시 [不在中 . 12]의 전문입니다. 참으로 암담한 지구상의 존재들을 나름대로 고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현대 문명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이를 조화와 예지로서 화해의 가교 역할과 함께 비판적이면서도 통합하는 기능을 보유하지 않으면 언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시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안녕히...
ㅁ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 성탄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제 2002년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잡다한 일상사를 정리하고 내년에는 반드시 무엇인가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시도 많이 쓰시고 이곳 ‘시창작교실’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럼 전번에 이어서 운율에 대해서 좀더 알아 봅시다.
③ 음수율(syllabig system)
이 음수율은 각 시행의 음절수(音節數)를 일정하게 맞추는 운율입니다. 영시(英詩)에서는 음보(音步-metre)가 있고 한시(漢詩)에서는 다섯 글자로 맞추는 오언(五言)과 일곱 글자로 맞추는 칠언(七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형시인 시조나 가사, 기타의 신문학 초기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3 . 4조나 4 . 4조, 또는 7 . 5조 등으로 구성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조선조 중기의 문인이었던 양사언의 시조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렇게 시조처럼 일정한 글자수를 맞추는 형식인데 지금 현대시에서는 별로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소월의 [먼 후일]이라는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글자수의 배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시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시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그리고 한시에서는 전형적으로 이러한 오언이나 칠언절구를 갖추고 있습니다. 참고로 만해 한용운의 [차영호화상(次映湖和尙)]이란 작품을 봅시다. 내용은 “시와 술로 시름하는 나입니다만 / 당신도 문장으로 늙으시네요 / 눈보라와 더불어 부쳐온 글월 / 속절없이 설레이네 오가는 두 정”이지만 우리는 오언절구라는 운율에 유념하여야 하겠습니다.
詩酒人多病 文章客亦老(시주인다병 문장역객로)
風雪來書字 兩情亂不少(풍설래서자 양정난불소)
역시 칠언절구도 마찬가지 입니다. 김삿갓의 시 [무제(無題)]를 보면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사각송반죽일기 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주인막도무안색 오애청산도수래)
라고 하여 일곱 글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김삿갓이 방랑을 하다가 어느 집에서 쉬어가게 되는데 주인이 너무 가난하여 죽 한 그릇으로 대접을 하면서 어쩔줄 몰라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합니다. “네 다리 소반에 놓인 죽 한 그릇 속에 하늘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떠 있구나. 주인은 도리가 아니라고 쩔쩔 매지 마시오. 나 본래 청산과 물이 비치는 것을 무척 사랑한다오” 쯤으로 알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3-1-2. 내재율(內在律)
지금까지 외형율, 그러니까 외적으로 나타나는 운율을 살폈지만 지금부터는 안으로 내재되어 확인되는 않지만 현대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재율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내재율은 한 마디로 시의 호흡이나 템포(tempo-속도, 박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형시에서의 외형율처럼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있기는 있으나 분명히 지적할 수 없는 속으로만 생명처럼 존재하는 시인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의 저변을 흐르는 언어의 억양과 색조가 빚어내는 어떤 리듬입니다. 바로 현대시에서 언어가 갖는 속성이나 기능을 종합한 무형의 리듬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 내재율은 일정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시를 쓰거나 읽으면서 스스로 체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가령 윤동주의 [서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처럼 시의 외형상의 리듬은 보이지 않지만 속살로 흐르는 시인 특유의 맥박과 호흡니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시에서 필요로 하는 내재율입니다. 다시 산문시의 형태를 갖춘 나의 졸시 [사랑법 . 9-시인의 사랑]이란 작품을 읽어 봅시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솔바람곁에 뿌리는 라일락 향기로 그대는
내게 다가 왔다. 어느 후미진 언덕배기에서 안개 속 잡풀의 흔들림을
보거나 마알간 냇물이 흰구름을 안고 치억들을 어루만지거나 아니 서
해 바닷가 갈매기 울음을 듣거나 그대 눈빛은 항상 내 가슴 깊이 안
기어 촉촉하다. 더러는 연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무지개였다가 별안간
이슬 한 모금 삼킨 주홍빛 꽃잎이었다가 스스로 앵두 입술 지그시 깨
물고 사유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순한 바람이었다가 아아 그대여, 이
제 진실로 그대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한 마디 ‘사랑해’ 그 화음이 해뜰
녘이거나 저물녘이거나 늘 함께 푸른 강물로 젖어 있다. 멀고 가까움
이 이제 지워진 그 시인의 사랑 그리고 사랑법.
이런 작품을 언뜻 보면 산문처럼 생각되지만 산문시의 형태로 표현되어서 명심해서 읽어보면 시의 맥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는 외형율보다 내재율을 중시한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비록 자유시(현대시)라 할지라도 김소월과 김영랑 등 자연파 시인들은 음악성을 강조하는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는 점도 어찌보면 시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시와 그림(繪畫-이미지)과의 관계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4. 시 쓰기 준비를 위한 몇 가지 단계
한 편의 시를 쓰는데도 사람은 여러 도시와 주민들과 건물을 바라보아야 하고 짐승들과 날아가는 새와 아침을 향해서 피어날 때의 작은 꽃의 몸가짐을 알아야 한다. 모르는 시골의 길, 뜻하지 않은 상봉(相逢), 오래 전부터 생각하던 이별 등등이나 지금도 분명치 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여러 밤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신음하는 여자의 부르짖음, 아이를 낳고 잠든 해쓱한 여자를 기억해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 봐야 하고 때때로 죽은 시체도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억을 가짐으로써도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다. 기억이 많아 졌을 때 그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엄청난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기억만으로 오로지 시가 될 수 없다. 그것들이 우리 속에서 피가 되고 눈짓과 몸가짐이 되고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된 다음에야--그때라야 우연히 가장 귀한 시간에 시의 첫 구절이 그 가운데서 생겨나고 그로부터 시를 써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인용이 좀 길었지만 이것은 릴케의 말입니다. 한 편의 시를 잉태하기까지 한 시인이 겪고 인내해야 할 과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를 쓰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준비 단계가 있습니다.
시적인 발상(發想)이나 영감(靈感), 동기(動機), 언어(言語) 등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4-1. 발상에 대하여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주제나 표현 방법에 대해서 고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는 본 것을 그냥 본대로, 느낀 것을 그저 느낀 그대로 쓴다면 굳이 고심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시는 본 것이나 느낀 것들을 어떻게 정서와 언어로, 나아가서는 사물의 그림(이미지)으로 나타내느냐, 그래서 어떻게 감동을 함께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산고(産苦)와 같은 진통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시가 보이는 것이나 느끼는 것의 기록이 아니라 감추어진 것, 숨어 있는 뜻까지 나타내야 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이지 않는 것, 감추어진 뜻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 한 아름 꽃이 피어 있습니다. 아! 아름답다. 아! 이렇게 고울 수가....하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정서의 환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인 느낌으로는 시적인 정서의 환기가 되지 못합니다. 시적인 느낌, 시적인 감동은 이러한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느낌을 특수한 감동으로 환기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체험하지 못한 감동으로 환기시켜야 비로소 시적인 창조의 발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형상화했을 때 시가 된다는 평범한 발상은 기초적인 한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 단계에서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으로 발상차원을 한 차원 높게 이끌어 올려야 하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것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지 못해서 안 될 것으로 그 차원을 끌어 올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이 실제로 발상 연습에 들어가 보기로 합시다.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있다고 합시다. 그 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을 때라면 우리는 꽃나무로 보면서 꽃의 아름다움에 감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꽃이 지고 있다면 무엇인가 공허감 같은 허무를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한 그루의 나무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개화(開花) 또는 낙화(落花)로 그 모습이나 생태를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기분이나 분위기에 따라서도 그 나무의 모습은 각기 다른 감정과 다른 생각, 다른 생태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서 즐거움을 맛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며(개화) 인생의 무상함이나 쓸쓸함까지도 느끼면서(낙화) 계절의 순리에 따른 자연이나 우주의 의미를 생각하는 등 여러 가지의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한 그루의 나무가 바로 인간의 존재와 연결될 수 있으며 생성과 소멸의 자연 원리이며 우주적인 산물로서 시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글이글 타는 눈알을 굴리며
하늘 위, 땅 밑을 굽어보고 쳐다보아
상상력이 알지 못하는 사물들의 모양을 드러내면
시인의 붓은 그에 따라
공허한 것에 육체를 주고
장소와 이름을 정해 준다.
위의 글은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지 못하는 사물들의 모양을 드러내’는 상상력의 기능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물들이 모양을 드러낸다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그루 나무는 보이는 것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시인이 찾아내어 새로운 사실이나 진실, 그리고 진리로 이끌어 내어야 하는 것이 시적인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사물을 어떤 단계로 보아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모두 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나무를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일본의 어떤 시인은 그 차이를 단계적으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은 유형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① 나무를 그냥 나무로만 본다.
② 나무의 종류와 모양을 본다.
③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④ 나무의 잎사귀들이 움직이는 모양을 자세히 본다.
⑤ 나무속에 승화되어 잇는 생명력을 본다.
⑥ 나무의 모양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사상(의미)을 읽어 본다.
⑦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잇는 세계를 본다.
이러한 여덟 단계의 발상차원 중에서 나는 어느 단계에 해당하고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국내의 많은 문예창작과 교수들이나 시 강론자들이 초기 시 발상법이나 사물을 보는 법으로 흔히 인용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①에서 ④까지의 단계는 나무의 외형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지만 일상적이거나 상식적인 차원으로서 눈에 보이는 부분 그대로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③과 ④는 그래도 약간 한 걸음 앞선 태도이기는 하지만, 역시 나무의 외형적 관찰에 불과해서 깊이 있는 관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⑤에서 ⑥까지는 나무의 외형이 아니라 그 내면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때 일상적, 상식적 차원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나무의 모습이 조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무의 생명력이라든지, 그 생명력의 이미지나 사상 같은 것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이 단계에서는 그것들이 나무의 모습으로 형상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명력이나 사상으로 바뀌어 진 나무의 그 변용은 나무에 대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나무는 그 의미의 측면에 있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⑦⑧의 단계에 이르면 나무는 다시금 비약적 변용을 이루게 됩니다. ⑤⑥의 단계에서 아직 서있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나무가 이 단계에서 보이지 않는 저쪽의 세계를 관망하고 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서 이처럼 광대한 다른 세계를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을 낳는 원동력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 상상력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계속해서 영감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전주에 이어서 영감(靈感)을 말하기 전에 발상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그러면 실제로 '나무'가 시인에 의하여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다음 시를 통해서 알아봐야겠군요.
나무같이 예쁜 시를
나는 다시 못 보리
대지의 단 젖줄에
주린 입을 꼭 댄 나무
종일토록 하느님을 보며
무성한 팔을 들어 비는 나무
여름이 되면 머리털 속에
지경새 보금자리를 이는 나무
가슴에는 눈 쌓이고
비와 정답게 사는 나무
시는 나같은 바보가 써도
나무는 하느님만이 만드시나니.
미국의 어떤 시인이 쓴 [나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1연에서는 '시'. 2연에서는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빨고 있는 아이'. 3연에서는 '팔을 들어 기도하는 사람' 등으로 비뀌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에 나타난 '나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나무'가 나무라는 현상만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변용에 따른 어떤 의미가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시는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이런 의미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 쓰기에서는 이러한 사물이나 관념에 대해서 상상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구나 훈련하면 키울 수 있는 상상력입니다. 이것이 시적인 발상이며 곧 시상(詩想)입니다. 모든 사물을 외형적으로만 보지말고 ⑤에서 ⑧까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4-2. 영감(靈感)에 대하여
시를 쓸 때 시인들은 마치 하늘에서 어떤 게시(揭示)를 받은 것처럼 뜻밖의 감응(感應)을 받은 심리상태를 영감(inspiration)이라고 합니다. 시는 이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데 이 영감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영감이 있어야만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감과 지성의 융화가 있어야하고 시정신과 일치되었을 때 시 쓰기로 연결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감에 대해서는 예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고백함으로써 여러 가지의 예를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가끔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영감의 일반적인 특성은
① 아무런 예고 없이 불현듯 나타나며
② 개인의 힘을 초월하여 작용하고
③ 일상적인 체험과는 동떨어진 특수하고 신기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와 비슷한 어떤 게시 같은 것을 느낀 경우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감이 시를 창작하는 내면적인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영감의 정체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이미 시인의 뜨거운 예술정신이 그 모체로서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시인은 일종의 정신적 방랑객입니다. 언제나 마음의 고향을 찾아 나서는 바쁜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존재하고 있다는 그리움의 빛을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향수 같은 것을 마음 가득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인의 눈은 사물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 X-Ray처럼 투명하고, 시인의 귀는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먼 기이한 목소리를 엿듣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무선 전화기를 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때 그리움의 빛이 시인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기도 하는데 이것이 인스피레이션입니다. 이는 벌써 지성이라는 심리가 작용하여 깊은 창조 정신을 발동케 하는 계기가 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음의 졸시 [백지를 위하여]에 대한 영감이라고 할까. 문득 솟아 나온 어떤 감응의 심리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는 졸저 <시보다 어눌한 영혼은 없다>에 수록된 전문을 옮긴 것입니다.
긴 겨울밤
불 끄지 못하는
그대 뜨거운 마음 한 쪽은
하얗게 비워두리라
가장 쓸쓸한 것들만 한 장씩 찢어내는
그대 곁으로
사랑의 낡은 노래
한 소절만 띄워 보내리라
물망초 설움 같은
내 차가운 뜨락에는
마지막 기도 소리도 끝났는가
흔들리는 창 밖
이 밤을 밀어내는 빗소리
은밀한 기억을 태우고
젖을 대로 젖어버린 하얀 마음 한 쪽은
그냥 비워두리라
하얗게 비워두리라.
* 모두 잠든 새벽, 혼자 일어나 촛대에 불을 밝히고 향나무 연필을 깎고 그 껍질을 하얀 유리 재떨이에 소복히 쌓아서 진한 향내를 맡는다. 향내와 더불어 새벽 내음이 상큼하면 어제밤 찌든 일상들이 한 올씩 분출되는 쾌감을 맛본다.
항상 머리맡에서 대기중인 하얀 메모지는 무엇인가 나의 갈증을 받아담을 준비를 하고 있어서 한 줄의 낙서라도 담아 주어야 할 막중한 소임같은 것이 배어 있음을 어쩌랴. 그러나 하얀 종이에로 쏠리는 나의 연상작용은 정갈함이다.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다. 그러기에 정신적으로만 승화된 어떤 사랑의 이미지가 담뿍 어려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밤마다 '뜨거운 마음 한 쪽'도 담을 수 없는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에 관한 의문은 낡아빠진 육체의 허망스런 욕구만 번뜩이는 가증스런 밤을 장식한다. 이런 허황된 욕망과 증오가 가득한 나의 심연에서 백지를 대하는 나약한 언어는 '그냥 비워두'는 일밖에 없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열정과 향나무 연필의 의지는 제몸을 스스로 소진하고 마모하면서 '은밀한 기억'은 젖은 내 마음에게 비웃음을 던져주고 있다.
백지에 채워져야 할 순수 사랑을 위하여.*
다음 시간에 또.....
시창작 강의-
이번 주는 개인 사정에 의해서 좀 늦었네요.
항변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군요. 자, 오늘은 언어에 대해서 알아 봅시다.
4. 언어에 대하여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시는 아무리 좋은 발상과 동기와 주제가 명징하다 할지라도 표현할 수 잇는 언어가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이는 시에서 언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기보다는 시의 모든 문제가 언어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언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일도 시인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책무이기도 합니다.
시는 일반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감동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무도 맛보지 못한 체험이나 일상적인 의식 그 밑에 깔려 있는감정 세계를 표현하자면 우리가 쓰고 있는 일상적인 언어 몇 마디로는 아무래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시인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능을 총동원하여 깊이 이해하고 발휘시키면서 비로소 훌륭한 한 편의 시로 표현할 수 잇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의 내용이 알차고 여러 형태로 승화되엇다 하더라도 언어의 기능이 모자란다면 시로서의 형상화는 부족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인들 중에서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쓴 최초의 시인은 정지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사실을 되풀이하여 강조한 시인은 김기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상어가 시의 언어도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시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 때 그 시대의 일상어가 시의 언어로 등장하는 경향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워즈워드(w. wordworth)는 일상어로 시쓰기를 주장했고 1930년대 김기림도 일상어로 시쓰기를 주장한 바 잇습니다.
그러나 일상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로 될 수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책상을 만드는데 그 재료(소재)는 목재이지만 그 목재가 그대로 책상이 될 수 없다는 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재를 자르고 대패로 밀고 다듬어서 서로 짜 맞추어야 설계대로의 형태 구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같이 일상어가 시의 언어로 되기까지는 깎고 다듬어야 비로소 시의 언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읽어 봅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렇습니다. 언어는 우리에게 존재를 보여주는 등불입니다. 존재의 영역은 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범위에 국한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성냔을 켯을 때 성냥불이 비춰주는 그 범위만 환하게 눈에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암흑(또는 無) 속에 나타난 존재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도'는 것처럼 언어가 적재적소에 놓여져야 시의 언어로서 빛을 내뿜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는 또한 일상생활에서 단순히 의사를 전달하는 논리적 기능보다는 정서적 기능을 중시하는데 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함과의 知的으로 판별하는 이외의 언어가 갖는 음향(음질, 음량, 템포. 강약, 고저, 억양 등), 즉 음악적인 미묘한 요소가 결합되어 있어서 신비하고도 오묘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의 언어는 시에다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언어를 에워싸고 있는 일상생활의 구어(口語), 그것이 시에 사용되는 언어인데 그것들을 한 단어씩 떼어내면 아무 색채도 없는 평범한 단어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가 어떻게 하면 시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언어의 조합에 의한다.
둘째, 그 조합 자체가 시인의 사물에 대한 인식, 시정신 그 발상에 의해서 정해진다.
시인은 단순한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말하며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창조상의 세계를 작품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낮설게 하기'라고....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 이미지를 나타내는 언어, 그것들을 구사하고 서로 섞여져서 엉컬어지고 조합하면서 시인의 감동과 사유를 표현시키기 마련인데 이것들을 더욱 깊이 형용하거나 비유, 알레고리(풍유) 등의 방법으로 복잡한 내용을 단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잘 알다싶이 일상어는 여러 가지 개념과 통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꽃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형용은 아름답다는 말 그대로 한 번의 개념을 줄뿐이지만 시인은 이 때묻은 표현을 깨뜨리고 자기가 느낀 아름다움의 본질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의 언어는 다양해서 부드러운 언어의 연결로 복잡한 내용을 나타낼 수도 있으며 또는 난해하게 생각되는 언어의 조합이 아니고는 시인의 이미지를 나타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결국 시의 언어는 시인이 마주한 진실에 대하여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엄격한 시정신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쓰기에 사용되는 특별한 단어나 語句를 詩語(poetic diction)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바다'를 가리켜서 '고래의 길'이라고 하는 식의 표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뛰어난 시어는 그것이 명쾌한 것인 동시에 천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발레리도 아주 아름다운 문장에서는 구절이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심정을 자동적으로 알 수 있으며 물체도 정신화되어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어는 어떤 틀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말이 변화하듯이 시어도 역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이 사용하여 낡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말을 死語(obsolete word)라고도 합니다.
현대 시인들은 대부분이 일상어를 간추려서 사용하고 있어서 엄격하게 말하면 시어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학에서는 시어라는 개념보다는 비유를 시적인 표현의 본질로 생각하고 언어의 조탁(彫琢)에 보다 힘써야 할 것입니다. 시어는 없고 시의 언어만 있을 뿐입니다.
다음 중견 여성시인 구순희의 <봄밤>을 읽어보면 언어의 정제를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밤에는 무논의 개구리
지천으로 깔려 울고
달빛 아래 물안개
전설같이 피어올라
자정에도 오히려 대낮인
열 여섯 풋가슴
혼자 뜰을 거닐던 달도
개구리들의 합창에 잠길 때
몇 번을 닦아도 닳지 않을
이름 하나 몰래 키우네.
이렇게 절제되고 함축된 언어(일상적인 언어)로 간결하게 '봄밤'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