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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제작기술의 발달과 그 영향 <음악과 민족>, 2003년 겨울호, 365-392쪽 1. 머리말 주지하다시피 피아노는 1770년부터 대략 1830년 사이의 약 60년 동안 그 어떤 악기도 이루지 못 할 정도로 본격적이고 집중적으로 기술혁신이 이루어진 악기이다. 이 과정에 음악가들은 피아노 제작자와의 활달한 의견 교환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 즉 당시의 작곡가가 대부분의 경우 연주가(=비르투오소)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또는 화려한 기교를 청중들에게 선보이기 위하여 보다 많은 가능성을 가진 피아노를 제작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흥미롭게도 연주자, 작곡가, 악기 (피아노)제작자라는 1인 3역을 행하면서 피아노의 기술혁신에 직접 뛰어든 몇몇 인물들도 있었다. 무찌오 클레멘티(Muzio Clementi: 1752-1832), 앙리 헤르츠(Henri Herz: 1806-1888), 프리드리히 칼크브레너(Friedrich Kalkbrenner: 1785-1849), 카미유 프레엘(Camille Pleyel: 1788-1855)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당대의 유명 피아니스트, 작곡가였으며 음악가로서의 상당한 명성을 얻은 후에 악기제작업자로 활동을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이 시기의 피아노의 발달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으며, 그 영향이 당시의 작곡기법 및 음악문화에 전반에 걸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조망보고자 한다. 그 결과는 당시에 작곡된 피아노 음악, 나아가서는 음악문화 전반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피아노 제작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기술혁신의 첫 번째 과정은 타현기술의 정확성과 신속도에 그 초점이 모아졌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피아노 제작기술이 경쟁을 벌이게 된다. 그 하나는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개발되는 프렐메카닉(Prellmechanik=튀어 오르는 방식)이며, 햄머 자루의 뒤끝이 선반에 튕겨져서 햄머가 현을 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발전된 슈토스메카닉(Stoßmechanik=밀어 올리는 방식)으로서 햄머 자루의 밑둥이 건반을 쳐올리는 방식이다. 그러는 와중에 19세기초에 들어서서 영국의 기술을 근간으로 발전한 불란서 제작자들이 이 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피아노 제작 기술이 구분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각기 사용하고 있던 타현 방식의 차이점과 햄머가 현을 친 후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원위치 기능 (Rückfallfunktion)'이었다. 이 기능은 두 나라의 여러 피아노 제작자들의 노력과 기술개량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불란서의 세바스티앵 에라르(Sébastien Erard: 1752-1831)가 1821년에 소위 “이중이탈장치(doppelte Auslösung, doule échappement)”를 개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날 ‘빈의 프렐메카닉'이라고 알려진 타현 기술은 “독일 메카닉(deutsche Mechanik)”이라는 명칭하에 1773년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Johann Andreas Stein: 1728-1792) 2) 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처음에 오르간 제작자로 출발했던 슈타인은 1750년에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에 정착한 이후 18세기 전반기부터 잘 알려진 프렐메카닉을 더욱 섬세하게 발전시키면서 그것을 “독일 메카닉(Deutsche Mechanik)”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이전의 프렐메카닉으로 구축된 피아노에서는 햄머가 너무나 먼 거리를 거쳐 현에 타격을 가하기 때문에 섬세한 손가락의 자극에 민감한 반응을 할 수 없었다. 또 햄머가 다시 튀어 오르며 위아래로 요동치는 현상(blocking)에 대한 대비도 없었다. 슈타인의 공적은 이러한 유형의 액션에 ‘이탈장치(escapement)'를 발명하여 부착시켰다는 점에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햄머가 타현된 후에 요동치는 블로킹을 방지하기 위하여 ‘차단조각(check piece)'을 액션에 첨가시켰다. 슈타인 액션은 손놀림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는 만하임을 가던 길에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에 들러 슈타인이 새롭게 발전시킨 피아노를 접하면서 그 감동을 잘츠부르크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곧 바로 슈타인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저는 슈타인의 피아노를 보기 전에는 슈패트(Späth) 3) 의 피아노를 가장 좋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슈타인 피아노에 우선권을 주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피아노들은 레겐스부르크의 악기들 [=슈패트 피아노]보다 소리를 훨씬 잘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건반을 강하게 치고 건반을 계속 누르고 있다가 손가락을 들어올리면, 피아노 소리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건반을 누를 수 있는데, 언제나 소리가 고릅니다. [...] 그의 악기에는 다른 악기와 다른 특별한 것, 즉 이탈장치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100명중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탈장치가 없다면 피아노는 덜거덕거리지 않거나 여음을 남기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슈타인 피아노에서는 건반을 치면 그후 그 건반을 계속 누른 채로 있건 들어올리건 상관없이 해머는 튀어 올라 현을 치자마자 바로 그 순간에 다시 제자리로 떨어집니다. 이런 건반악기를 완성하면 (그가 저에게 직접 말한 바에 의하면) 그는 먼저 그 앞에 앉아 온갖 종류의 패시지, [빠른] 음형 및 [음의] 도약을 시도해 본답니다. 그리고 이 악기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씩 깍고 다듬으며 오랫동안 꾸준히 작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위해 일할 뿐으로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곧장 끝내버리고 말았겠지요. 그는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만약 음악을 이처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또 내 자신이 건반악기를 좀 연주할 줄 몰랐다면, 오래 전에 내 작업에 대한 인내심을 잃고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연주자를 속이지 않는, 그리고 튼튼하며 수명이 긴 악기를 사랑한다'라고[...] 4) 이러한 슈타인의 피아노 제작기술은 그의 딸 나네테(Nanette)와 그녀의 남편인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혀(Andreas Streicher: 1761-1833)에 의해 계승된다. 그리하여 1794년에는 프렐메카닉에 의한 피아노 액션이 완성되며, 이것은 “독일 액션” 혹은 “빈 액션”으로 불려진다. 그의 아들 밥티스트 슈트라이혀(Baptist Streicher), 나아가서는 콘라트 그랍(Conrad Graf), 벤쩰 샨쯔(Wenzel Schantz) 등도 이러한 전통을 계승했음은 물론이다. 비엔너식 타현기술은 예민하면서도 가벼운 터치와 건반의 깊이가 얕은 것이 그 특징이다. 때문에 예를 들어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화려운 기교가 특히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악기의 소리는 밝고 투명했기 때문에 당시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모차르트. 하이든. 훔멜, 체르니 등의 이상과 음악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5)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는 원래 크리스토포리(B. Christofori: 1650-1731)에 의해 개발되고 독일의 질버만(Gottfried Silbermann)에 의해 전수된 ‘슈토스메카닉'이 계속 발전되었다. 그러다가 질버만의 제자들이 당시 독일에서 발발한 ‘7년전쟁'의 혼란을 피해 영국으로 피신하게 되면서 영국에서의 피아노 제작 발달에 도움을 주게 된다. 즉 영국의 피아노 제작은 스위스인, 부르카트 슈디(Burkat Schudi; 원래는 Burkhardt Tschudi)가 이미 1728년경에 세운 공장에서 시작되었는데, 1760년에 요하네스 춤페(J. Chr. Zumpe: 1735-1800)를 비롯한 몇몇 질버만의 제자들이 영국으로 건너와 슈디의 공장에 합류하면서 피아노의 기술혁신에 보다 박차가 가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 기술은 슈디의 사위, 존 브로드우드 (John Broadwood: 1732-1812) 6) 에 의해 계승․발전되면서 훗날 “영국식 메카닉”이라는 일컬어지는 기술의 완성이 이루어진다. ‘영국식 메카닉'의 기원은 요하네스 춤페가 고안한 모델에 있다. 춤페는 우선, 간단한 액션을 가진 작은 소형의 스퀘어 피아노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그가 사용한 타현 방식은 건반에 단단하게 고정되고 그 끝에 둥근 작은 물체가 달린 잭(=햄머를 쳐 올리는데 작용하는 레버)이 위로 올라온 순간 ‘언더 햄머(Underhammer)'를 치며, 언더 햄머는 다시 진짜 햄머를 현으로 쳐올리는 것이었다. 7) 네덜란드 피아노 제작자, 아메리커스 배커스(Americus Backers)는 -그는 춤페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슈디의 공장에서 일 한 바 있다- 이러한 기술을 토대로 건반에 직접 잭을 장치하고, 잭은 타격 후 이탈(escapement)될 수 있도록 햄머 맨 아래의 작은 틈에 들어맞게끔 하였다. 그리고 첵크 피스(check piece)를 통해서 되튀어 요동치려는 햄머를 붙잡아 흔들리지 않게끔 특수한 나사로 이탈지점을 조절하였다. 8) 이 때가 1767년이었다. 이로써 보다 빠른 음의 반복이 가능해지고 햄머의 되튀김이 방지되었으며 현에 보다 강한 타격을 가할 수 있게되었다. 이 기술은 브로드우드 공장에서 같이 작업하던 로베르트 스토다르트(Robert Stodart)에 의해 개량되었고, 1777년에 “English Mechanik”이라는 특허권이 획득된다. 이 기술은 그랜드 9) 피아노에 장착된 것이었다. 존 브로드우드는 이러한 스토다르트의 기술을 바탕으로 -그리고 클레멘티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 이전의 하프시코드 제작에서 벗어나 그랜드 피아노의 개량에 눈을 돌린다. 그리하여 장력, 타현점, 페달 등에서 특허를 취득하고 1795년에는 영국식 메카닉에 의한 표준적인 피아노를 완성시키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람들은 비엔너식 악기와 영국식 악기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당대 최고 피아니스트의 한사람이며 모차르트에게서 작곡을 배운바 있던 요한 네포묵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의 기록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는 1828년에 발표한 ꡔ첫번째 초보수업부터 완벽한 경지의 피아노연주를 위한 상세한 이론적․실제적 지침ꡕ(Ausfühlich theiretisch-praktische Anweisung zum Pianofortespiel vom ersten Elementarunterrichte an bis zu vollkommensten Ausbildung)이라는 긴 제목의 책에서 빈 스타일 피아노와 영국 스타일 피아노가 지니는 장점과 단점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다. “피아노포르테는 두 가지 종류의 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하나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독일식 (혹은 일명 빈식)이다. 다른 하나는 영국식인데 이것은 약간 덜 가볍게 다룰 수 있다. 그 밖의 것들은 이 두 가지 종류의 것을 혼합한 것이거나 또는 부분적으로 변형시킨 것들이다. 각 피아니스트들이 이 둘 중의 한가지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비엔너식은 아주 섬세한 손으로도 가볍게 다루어진다. 이 피아노는 연주자로 하여금 모든 뉘앙스의 연주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 피아노의 음은 뚜렷하게 울리며, 둥글고 플루트 음과 같은 소리를 낸다. 이 피아노의 음은 특히 큰 연주회장에서 오케스트라 반주의 소리와 구별이 잘되고 많이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 숙련됨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다. [중략] 이 악기들은 수명도 길고 영국식 피아노의 거의 절반 가격이다. 따라서 이 악기들은 그 속성에 맞게끔 다루어져야 한다. 연주자들은 이 악기들에서 격렬한 터취나 팔의 전 중량을 실어 무겁게 두들기는 것을 삼가야 한다. 소리의 힘은 손가락의 탄력만으로 부각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화현 연주는 대부분의 경우 아주 빠르게 분산시켜 연주된다. 이 경우 음들을 한꺼번에 동시에 세계 친 것 이상으로 더 효과를 낸다. 이 피아노의 건반 깊이는 남자 손에는 아주 얕거나 평탄하지는 않다, 사람들은 영국식 기술에 대하여 긴 수명과 소리의 풍부함 때문에 물론 정당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하지만 이 악기들은 완성도에 있어서 비엔너식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건반의 터치가 상당히 무겁게 느껴지고 그 만큼 더 깊이 눌러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음이 반복되어 연주될 때 햄머의 이탈이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피아노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연주자라 할지라도 건반을 깊이 누르거나 세계 누르거나 할 때 그다지 방해를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빠른] 템포를 유지할 수 없으며 빠른 악장이나 경과구를 보통의 가벼운 터치로 연주할 수 없다. 그리고 힘있게 연주해야 하는 곳이나 패시지 역시 독일식 악기에서처럼 손가락 힘으로만 연주해야 한다. 팔의 힘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건반을 강하게 치더라도 강한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국식 시스템은 독일식만큼이나 많은 음의 명암에 적절하지 않다. 이 악기에서 우선 느낄 수 있는 것은 뭔가 고집스럽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피상적으로 다뤄야하는 곳에서도 -특히 경과구의 포르테에서- 건반을 바닥끝까지 눌러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우 힘이 들고 기교의 완벽성에 이중으로 부담이 된다. 반면, 이 악기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악기가 지니고 있는] 소리의 풍만함으로 인하여 독특한 매력의 조화가 잘 되는 협음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이 악기가 방에서는 강하게 울리고 큰 연주회장에서는 소리의 질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복잡한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동반될 때는 이 악기의 소리가 우리의 빈 악기만큼 뚫고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는 너무 두터운 소리가 나기도 한다.” 10) 이상과 같은 두 나라의 피아노 타건기술에 관한 훔멜의 서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당시의 비엔너식 피아노는 햄머가 견고하고 건반의 깊이가 얕기 때문에 특히 “화려한” 연주에 적절하며 음을 빠르게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터치가 상대적으로 무거운 영국식 피아노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영국식 피아노는 중후하고 강력한 소리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점에서는 비엔너식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11) 당시의 피아노에 대한 서술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피아노의 여러 가지 점에 관한 사람들의 취향이 오늘날과 극히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는 소리를 빨리 중단시킬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슈타인 피아노의 댐퍼(=소음장치)를 선호하였었다. 이에 반해 오늘날에는 어떻게 하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음을 길게 연장할 수 있을까?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훔멜이 평평한 듯한 건반의 깊이를 선호하였다면, 오늘날의 피아니스트들은 오히려 건반의 저항을 느끼고자 한다. 건반의 깊은 곳까지 그처럼 빨리 도달하지 못할 정도까지 말이다. 하지만 비엔너식 피아노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점차 사람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게 된다. 낭만파시대의 작곡가․연주자들은 점점 더 커다란 소리의 풍만함을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이나믹에 있어서의 커다란 차이, 보다 까다로워진 기교적 요구, 격렬한 타건, 오케스트라와 같은 음향적 효과. 이러한 점에서 영국식 피아노는 비엔너식 피아노의 우위에 섰던 것이다.
18세기에는 피아노 제작기술의 발달이 주로 독일과 영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경쟁의 와중에 프랑스가 뛰어들게 된다. 여기에는 세바스티앙 에라르(Sébqstian Erard: 1752-1831)가 주도적 역할을 한다. 에라르는 1777년에 당시 프랑스로 수입된 독일과 영국의 피아노를 모델 삼아 최초의 불란서식 피아노를 제작한 바 있었다. 이 피아노에 대한 세인의 평가가 높아짐에 따라 그는 1780년경에 자신의 공장을 세우고 슈트라스부루크에 있던 동생, 쟝 밥티스트를 불러들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라르는 궁정 12) 의 권유에 따라 프랑스를 떠나야했다.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으며 그는 궁정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라르는 1786년에 영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아노 제작의 선진 기술을 익힌다. 1792년에 런던에 피아노 제작공장 지부를 세운 그는 1794년에 햄머를 이동시킴으로써 1현 혹은 2현을 때리도록 하는 장치를 개발하여 특허권을 획득한다. 1796년에는 보다 개량된 영국식 타현기술을 도입한 ‘에라르 피아노'를 만들고, 이 해에 불란서로 돌아와 피아노 제작에 정진하게 된다. 물론 영국식 기술을 토대로 하면서 말이다. 이때 만들어진 ‘에라르 피아노'는 당대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뒤섹(Dussek)과 슈타이벨트(Steibelt)에 의해 연주회에서 시험되었으며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당시 슈트라이혀(Streicher) 피아노를 연주하던 베토벤도 1803년에서 1816년까지 ‘에라르 피아노' 13) 를 소유하였다. 보다 힘있고 음향이 풍부한 피아노를 필요로 했던 베토벤에게 이 악기는 비엔너식 악기보다 그 욕구를 더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1821년에 에라르는 피아노 타현기술에 있어서의 획기적 발명이라 할 수 있는 ‘이중이탈장치(double escapement)'를 완성하고, 그 이듬해에 이에 대한 특허권을 획득한다. 이 ‘이중이탈장치'는 타건 후 건반이 반쯤 되돌아왔을 때 다음의 타현준비가 완료되는 구조로서, 잭(=햄머를 쳐 올리는데 작용하는 레버)와 레피티션 레버(=잭이 쳐 올린 위치에 되돌아올 때까지 햄머를 떠받치는 레버)가 장치되어 있어 안정되고 빠른 속도의 연주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빠른 템포에서의 동일음이 정교하게 반복될 수 있었다. 이 기술의 그의 조카인 피에르 에라르(Pierre Erard: 1796-1855)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당대 정상급 피아니스트였던 이그나츠 모쉐레스(Ignaz Moscheles: 1794-1870)는 아마도 이 피아노를 최초로 시험해본 음악인이었다. “피에르 에라르는 자신와 그의 삼촌, 세바스티앙이 합작하여 거의 완성된 발명품을 나에게 선보였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건반을 누른 후 햄머가 중간 지점에 되돌아오게 되면 햄머는 다시 다음 타현의 준비 상태로 되며, 이로써 음을 반복하여 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발명을 시험해본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 기술은 음의 반복되어 연주될 수 있도록 하는 무한한 가치를 지녔음을 확신하는 바이다” 14) 이러한 “거의 완성된 발명”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피아니스트이자 피아노제작자였던 앙리 헤르쯔(Henri Herz: 1803-1888)에 의해 1840년에 그리고 1850년에 몇 가지가 보완되어 최종적인 완성을 보게된다. 때문에 이 기술은 관련 문헌에서 “에라르-헤르쯔 메카닉(Erald-Herz Mechnik)”이라고 일컬어진다. 바야흐로 이 이중이탈장치 덕분에 화려한 연주기술과 힘의 결합이 가능하게 되었다. 터치는 더욱 정교해지고 손가락의 감각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되었다. 트릴과 트레몰로의 연주도 건반의 가장 직접적인 접촉하에 가능해졌다. 동일음의 반복 역시 손가락이 최소한도로 들려지는 한 거의 레가토처럼 연주할 수 있었다.
음향 볼륨의 확대 및 다이나믹에 있어서 미세한 뉘앙스가 구별되도록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조치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햄머 해드의 확대, 펠트 15) 햄머 해드의 사용, 한 음에 여러 현을 사용하는 것, 인장력(引張力)을 더욱 크게 하는 교차현의 사용, 금속 프레임의 도입 등이다. 햄머 해드에 펠트를 이용한 최초의 인물은 프랑스 악기제작자, 쟝 앙리 파페(Jean Henri Pape: 1789-1875) 16) 이다. 펠트 햄머가 사용되기 이전에는 나무, 양피 또는 사슴가죽의 무두질 가죽으로 나무를 싼 것, 나무를 펠트나 천으로 싸고 그 위에다가 가죽을 씌운 것 등이 사용되었다. 파페는 이러한 방식 대신에 1826년에 펠트로 햄머 해드를 감싼 것이다. 펠트햄머는 1840년 이후 일반적으로 상용되면서 그랜드 피아노와 업라이트 피아노의 음색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햄머의 펠트는 저음부에서는 30mm정도 두껍고 상성부로 올라가면서 3mm까지 얇아지며, 너무 강한 소리나 너무 둔탁한 소리를 낼 경우 펠트를 꺼칠꺼칠하게 만들거나 벗겨내어 조절하였다. 17) 한편, 악기의 음향은 햄머 해드의 무게에 의해서도 변화되었다. 크리스토포리(1726년)와 슈타인(1773년)때의 햄머 해드의 무게는 최저음용과 최고음용이 각각 1g에서 0.5g 그리고 1g에서 0.45g 사이였던 것이 에라르 피아노(1850년)때는 4g에서 2g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8.4g에서 4.1g까지 무거워졌다. 이렇듯 햄머 해드의 중량이 무거워짐에 따라 음향은 더욱 어둡고 중후하면서도 여음이 길어지고 더욱 힘찬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햄머 클라비어의 음역 역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넓어졌다. 크리스토포리 시절에 4옥타브에 달했던 것이 모차르트 시대에는 F에서 f 3 에 이르는 5옥타브로 확대되고, 1794년에 6옥타브(C 1 - c 4 ), 약 1804년부터는 6½옥타브(C 1 - f 4 ) 그리고 1823년에는 7옥타브(A 2 - a 4 )로 확대된 것이다. 18) 이 폭은 최종적으로 다시 오늘날의 7¼(A 2 - c 5 )로 넓혀진다. 피아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장치로서 페달을 들 수 있다. 페달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의 양상이 나타난다. 1830년 이전까지 햄머 클라비어에 장착된 페달 수가 고정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수는 -판탈레온축(Pataleonzug) 19) 에서 볼 수 있듯이- 8개까지 된 적도 있었다. 반면에 모차르트 시대에는 아예 페달이 전혀 없는 피아노도 있었다. 그러다가 1800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된 햄머 클라비어는 일반적으로 4개의 페달(Verschiebung, zweiter Pianozug, aufgehobene Daempfung, Lautenzug)을 장착하게 된다. 이러한 피아노는 특히 (1803년부터 1816년까지)베토벤, 케루비니, 칼 마리아 폰 베버 그리고 (1840년부터) 클라라 슈만 등이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부터 피아노 페달은 2개로 제한된다. 그 중에서 오른쪽 페달은 “포르테 페달” 또는 “댐퍼 페달”이라고 한다. 이 페달을 누르면 댐퍼 전체가 현에서 떼어지면서 연주된 음이 지속적으로 울릴 뿐만 아니라 배음이 더욱 강화된다. 이 페달은 특히 음향을 풍부하게 하고 음과 음을 연결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핑거 레가토'가 불가능한 곳에서 적절하게 사용된다. 낭만시대의 피아노 작품은 오른쪽 페달의 사용으로 댐퍼가 떼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1번, op. 11의 제1악장이 이에 대한 대표적 예이다. 왼쪽 페달은 “피아노 페달”이라고도 하며 음의 볼륨을 감소시키고 소리에 명함을 주는 기능을 한다. 그랜드 피아노에서 왼쪽 페달을 누르면 건반이 이동하면서 그 건반이 때리는 현군(鉉群)의 수가 3현은 2현으로, 2현은 1현으로 감소한다. 이 페달의 가장 대표적인 매력은 음색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반면,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왼쪽 페달을 누르면 햄머가 현군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햄머 해드의 타현거리가 보다 짧아지면서 타현력이 약화된다. 왼쪽 페달의 사용이 작곡가에 의해 지시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오른쪽 페달의 상용은 이미 19세기초부터 타건의 차이를 위한 기초적인 연주기법의 수단으로 빈번하게 작곡가에 의해 요구되곤 하였다. 이 두 가지 페달에 추가적으로 고안된 것이 세 번째 페달이다. 이 페달을 누르고 있는 동안에는 타현하고 있는 건반만의 댐퍼가 현에서 떨어진 상태가 된다. 기타 다른 음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이 때문에 이 페달은 “소스테누토 페달(Sostenuto-Pedal)” 혹은 “지속음 페달(Tonhaltungspedal)”이라고 일컬어진다. 프랑스 피아노 제작자, Jean-Louis Boisselot(1785-1847)가 1844년에 20) , Claude Montal이 1862년에 그리고 Steinway가 1874년에 이 페달에 관한 장치를 각각 고안하였다. 이 페달은 오늘날에도 여러 회사에서 제작된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에서 장착되어 있으며, 오른쪽 페달과 왼쪽 페달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반해 업라이트 피아노에서의 세 번째 페달인 중간페달은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에서와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한다. 즉 이 페달을 누르면 햄머와 현 사이에 엷은 펠트가 드리워지면서 소리가 현저하게 약화된다. 때문에 주위에 방해를 주지 않으면서 연습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음향의 질이 향상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현의 두께가 강화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쳄발로의 경우 c 1 의 두께는 0.235mm였던 것에 반해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피아노의 동일현의 두께는 1mm로 4배 이상 두꺼워진 것이다. 게다가 에라르(S. Erard)는 1777년에 2중 현군(鉉群) 21) 을 1790년에는 3중 현군을 도입하게 된다. 여기에 저음과 중음부가 교차하도록 현을 치는 교차현(Kreuzseitiger Bezug) 방식이 선보인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고안해 낸 듯 하다. 즉 “앙리 파페(Henri Pape)가 1828년에 그의 ‘콘솔 피아노(piano console)'에서 이 방식을 도입하였고, 1830년에 미국 보스톤에서는 알페우스 뱁콕(Alpheus Babcock)이 이에 대한 특허권을 획득하였다. 22) 이 새로운 교차현 방식은 곧 모든 피아노에 도입된다. 이 교차현의 장점은 동일한 악기의 높이에서 현의 길이가 한층 길어지고 그럼으로써 현의 진동이 보다 풍부해진 것을 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의 공명이 향상되고 베이스 음역과 디스칸트 음역이 보다 가까워지면서 공명판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있다. 물론 교차현 방식으로 제작된 피아노에서는 배음영역이 보다 강화되기 때문에 교차현 방식이 아닌 옛날 피아노보다 투명한 소리를 낼 수는 없다. 때문에 이러한 방식의 피아노는 -고전시기의 작품에서 종종 나타나는- 폴리포니 음악이나 저음부의 화현이 출현하는 작품에는 적당치 않게 된다.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낭만시대의 작곡가들이 가능한 한 이러한 화현의 사용을 절제했음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다 무거워지고 펠트로 감싸여진 햄머 해드, 강화된 현의 두께 그리고 음 폭의 확대는 현의 인장력(引張力)을 현저하게 증대시켰다. 즉 1800년경의 현의 인장력은 4,500kg에 달했는데, 19세기 동안에 이것은 10,000kg이상으로 증대된 것이다. 이에 반해 오늘날의 피아노 현이 20,000kg의 인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다. 23) 증대된 인장력으로 인하여 목재로 된 뼈대는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게되며 따라서 목재 대신에 점차 철골을 사용하게 된다. 파리의 피아노 제작자, 프레엘(Pleyel)는 우선 현을 거는 핀(=피치 핀)을 장치하는 부분에 금속 플레이트를 사용하게 된다. 이 금속 플레이트는 음의 조율을 보다 잘 지탱하는 효과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브로드우드社의 Hervé는 1821년에 ‘피치 핀'을 금속으로 싸버린다. 이 두 가지 새로운 방식은 1827년에 브로드우드에 의해 바와 플레이트를 짜맞춘 프레임 특허에 상호 보완되게 된다. 한편, 미국에서는 단일의 주물(鑄物)로 프레임을 만드는 연구가 진행되어 보스톤 24) 의 뱁콕(Alphaeus Babcock)은 1825년에 피아노제작사상 최초로 업라이트 피아노의 스퀘어 프레임을 기존의 목제 프레임이 아닌 완전한 주물 프레임으로 만들었다. 이 기술은 1831년에 영국에 도입되어 활용되기 시작한다. 피아노 제작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 주물(금속) 프레임은 특히 1843년 보스톤의 치커링(Chickering)과 뉴욕의 슈타인웨이(Steinway) 25) 에 의해 더욱 개량된다.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 박람회에서 선보인 피아노들은 전부가 금속 프레임으로 구축된 피아노뿐일 정도였다. 이와 같이 변화된 피아노 음향. 즉 저음부가 강화되고 더욱 중후해지고 더욱 길게 지속적인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음향 때문에 오늘날에 18세기 후반 및 19세기 전반기에 쓰여진 작품을 연주할 때 몇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된다. 즉 멜로디 진행의 선명한 윤곽이 어려워졌으며 특히 저음부 영역에서 각 음들은 쉽게 구별될 수 없는 소리로 합쳐져 버리게 된 것이다. 저음부에서 화성을 누를 때의 소리는 종종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들리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페달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의 연주자는 작곡가가 지시한 페달 표시를 지금의 피아노 소리특성에 맞게끔 변경시켜 사용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피아노 음향이 깨끗하지 않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까지 울리기 때문이다. 물론 옛날의 피아노에서는 아름답게 울리던 소리지만 말이다. 피아노 제작 기술의 발전은 그 본질적이고 주요한 부문들이 19세기 중엽 경에 일단락지어진다. 여기에 주도적 역할을 한 나라는 영국의 타현기술(Stoßmechanik)을 토대로 한 프랑스, 미국 그리고 영국이다. 물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역시 벡슈타인(Beckstein), 브뤼트너(Blüthner) 그리고 뵈젠도르퍼(Bösendroffer) 등의 전문가가 계속하여 피아노 제작기술 향상에 매진하였었다. 하지만 이 나라들은 질버만, 슈타인 그리고 슈트라이혀 시절에 가졌던 주도적인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세기 중엽 이후에도 몇몇 가지 새로운 시도가 있었지만 특별히 실행하기에는 제약이 많은 것들이었다. 단지 건반의 폭 만이 19세기 후반기에 오늘날의 건반 폭으로 조정되었다. 그 이전에는 물론 더 좁게 되어 있었다. 이 맥락에서 오늘날에는 커다란 손을 가진 연주자만이 실행할 수 있는 10도 화음, -예를 들어 베버(C. M. von Weber)의 피아노 소나타 2번 1악장에서 나오는 ‘라b-미 0 b-라 0 b-도'과 같은 10도 화음의 연속적인 연주가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보통의 연주자도 가능했다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악보 1> 베버의 피아노소나타 2번 1악장 중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할 점은 피아노 제작자와 긴밀한 의견교환을 하며 제작 기술의 발전에 공헌해왔던 피아노 음악 작곡가들의 요구에 따라 음정조율의 피치가 높여졌다는 것이다. 이미 모차르트 시절에 가온음 ‘a'는 412 헤르츠에서 435 헤르츠로 높여졌으며,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440헤르츠 혹은 442헤르츠로 맞추고 있다. 4. 피아노의 발달이 작곡기법에 끼친 영향 피아노 제작기술의 발달을 통해서 작곡양식 내지는 작곡기법에 어떠한 영향이 끼쳐졌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관련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언급된 바 있다. 그 중의 몇몇 대표적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1777년에 아우그스부르그의 슈타인(J. A. Stein) 피아노를 구입했던 모차르트는 1781년에 빈의 피아노 제작자 안톤 발터(Anton Walther)가 만든 햄머 클라비어를 구입하게 된다. 26) 모차르트는 이 악기 앞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대부분을 작곡하였다. 27) 뿐만 아니라 그는 가극장이나 기타 공공장소에서 행한 자신의 연주회(=Akademie)에 이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하곤 하였다. 28) 이 악기는 깨끗한 종소리 같은 음, 힘있고 풍부한 베이스, 매우 맑은 디스칸트의 음향적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29) 뿐만 아니라 이 피아노의 “저음부, 중간성부 그리고 상성부는 마치 상이한 레지스터처럼 작용을 해가면서도 저음부부터 최상성부까지 그 맑음의 연속성이 전혀 중단되지 않았다. 30) 이 피아노는 요즈음에 제작된 피아노와는 다르게 경쾌한 소리를 내고 음향적으로 둥글고 풍부한 소리의 특징을 지녔다. 때문에 모차르트는 이러한 피아노의 특성을 고려하여 자신의 피아노 작품에서 단숨에 두 옥타브 혹은 그 이상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빠른 템포에서의 온음계 및 반음계 스케일, 분산화음, 화현의 장식, 특히 양손으로 이루어지는 3도와 6도의 병행 스케일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연주자로서의 모차르트는 이 악기를 통해서 동시대인들이 “섬세하고 델리케이트(Feinheit und Delicatesse)하며, 가장 아름답고 웅변적인 표현과 감정이 가슴에 파고드는”이라고 칭송했던 연주를 완벽하게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 베토벤 32) 은 피아노의 보다 폭넓은 음역과 음향의 볼륨을 갈망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제작 기술을 기대하며 피아노 제작자와 활발한 의견교환을 나누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베토벤은 이 기대를 만족시키는 새로운 피아노가 만들어졌을 때 그 악기의 모든 장점을 곧 바로 그의 새로운 작품에 반영시켜 나갔다. 33) 예를 들어, 발터 피아노의 음역이 F에서 f 3 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토벤의 초기 피아노 작품에서는 자신의 작곡적 이상이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면, 1803년에 기증받은 에라르 피아노의 상성부가 c 4 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에 이 음은 <열정 소나타>의 3악장에서 하나의 “외침”처럼 12번 반복(마디 173-175)되며 표현될 수 있었다. 또한 1818년에 기증받은 브로드우드 피아노는 에라르 피아노보다 저음역이 5도, 고음역이 4도 확대되어 총 6옥타브 4도의 음역을 지녔는데, 이것은 그의 <햄머클라비어 소나타> op. 106에서 6옥타브를 오르내리는 연속적 음계를 통해서 곧 바로 반영되고 있다. 34) 쇼팽의 경우는 이그나츠 프레엘(Ignaz Pleyel) 피아노를 선호했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35) 하지만 쇼팽은 때때로 에라르 피아노도 연주하였다. 36) 그리고 이 피아노의 음향적 특성은 그의 작품에 적절하게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은 독일의 음악학자, 에들러(A. Edler)이다. 에들러는 쇼팽의 피아노곡 마주르카(Mazurka) op. 67의 제3번의 제30마디부터 40번째까지를 예로 들면서, 이 부문은 에라르 피아노가 음색의 뉘앙스 차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두 마디를 지속하는 ‘레'가 스포르짜토(Sforzato)와 함께 두 마디를 지속하고 나머지 성부가 피아니씨모(pianissimo)로 연주해 가는 음영의 차이가 에라르 피아노에서 가능하다고 보고있는 것이다. 37)
한편, 1821년에 에라르에 의해 완성된 “이중이탈장치”는 음악계에 주목할만한 영향을 끼쳤다. 즉 19세기의 저명 피아니스트였던 헤르츠, 훔멜, 멘델스존, 모쉐레스, 픽시스, 타우찌히, 탈베르크, 리스트 그리고 뷔로우 등이 이중이탈장치가 부착된 피아노를 앞다투어가며 연주한 것이다. 이 피아노는 순식간에 보급되었으며 ‘에라르 회사'에 세계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작곡가들은 빠른 템포에서의 반복적 연타를 가능하게 만든 이 새로운 발명에 힘입은 기법을 바탕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단적인 예는 리스트가 1834년에 작곡한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에 의한 환타지이다.
<악보 3> 리스트의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에 의한 환타지 38) 중에서
슈만의 경우는 19세기 작곡가들 중에서 당시의 피아노에 관하여 비교적 많은 진술을 남긴 편이다. 본인 자신이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애초의 꿈이었고, 이에 따라 당대의 비르투오소들을 존경하고 흠모했으며, 그들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39)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던 슈만은 이후 작곡가 (및 음악비평가)로 활동하며 작품번호 23번까지 오로지 피아노 음악만을 발표했다. 슈만은 1834년 “이상적인 음악적 표현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슈타인 피아노가 가장 최상의 전제조건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당시에 생산되는 여러 회사의 피아노 중에서 유독 “비엔너 피아노”만을 고집한 것이다. “[...] 지난 세기에는 질버만(Silbermann)의 피아노가 최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 비엔너 피아노가 명성을 얻었으며 현재에도 그러하다.” 40) 그렇다면 영국식 기술로 제작된 피아노에 대한 슈만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슈만은 1835년에 모쉐레스의 연주회를 듣고 비평을 통해서 “터치의 탄력성, 건강하고 힘있는 소리, 보다 차원높은 표현의 확실함과 숙고를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41) 고 영국식 기술로 제작된 에라르 피아노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보인 바 있다. 그리고 1840년에는 결혼 선물로 클라라에게 영국식 기술로 제작된 해르텔(Härtel) 42) 피아노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슈만은 이후 영국식 피아노에 대하여 별 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1845년에 클라라는 자신들의 피아노 새로운 슈트라이혀(Streicher) 피아노, 즉 비엔너식 악기를 다시 구입한다. 또한 1853년의 클라라 생일 때에도 비엔너식 악기인 클렘스(Klems) 피아노를 선물하였다. 43) 즉 우리는 슈만이 전체적으로 보자면 비엔너식 피아노를 선호했다는 단정을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1840년 이후부터 나타나는 슈만의 피아노 자체에 대한 입장변화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1840년에 리트에 대한 새로운 자각 그리고 그 이후에 보다 큰 규모의 기악작품, 즉 교향곡, 협주곡 또는 오라토리오 등에 관심을 가진 것 등이 추론되고 있다. 아무튼 간에 이제 피아노의 음향은 슈만에게 너무 “제한적(verengt)”이라고 여겨진다. 그가 꿈꾸는 음향은 오케스트라적 음향인 것이다. 슈만은 이제 더 이상 피아노 앞에 앉아 작곡을 하지 않았다. 후기에 작곡된 슈만의 피아노작품들은 초기 피아노 작품에 비해 각 악기가 가지는 특정한 음향과의 연관성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18세기의 4사분기 그리고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작곡양식과 기법은 작곡가가 선호하는 각 피아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특성을 반영하게 되었다. 작곡가들은 “악기에 反하는(gegen das Instrument)” 작품을 만들었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 했으며 “악기를 위한(für das Instrument)” 작품을 쓰고자 하였다. 또한 작곡가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음향과 표현하고자하는 바를 악기제작자에게 요구하였으며, 이를 충족시키는 피아노가 출현하였을 때 그들 자신의 작품에 곧 바로 반영시켜 나가곤 하였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의 양식과 연주기법은 이러한 괄목할만한 피아노의 기술혁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5. 대량생산체계의 확립과 이에 따른 음악문화의 변화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1921년에 발간된 자신의 저서에서 피아노 제작의 기술적․경제적 발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바 있다. “18세기의 피아노제작자들까지만 하더라도 특히 독일에서는 우선은 (질버만이 그러했듯이) 자기 스스로가 몸소 같이 작업하고 또 실험을 해나가는 수공업자였다. [그러다가] 우선 영국(브로드우드)에서 그리고 나서 미국(슈타인웨이)에서 이 악기가 기계적으로 대량생산을 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좋은 철을 가지고 금속프레임을 만드는 데 유리했으며 또한 피아노를 그 사회에 정착시키는데 있어서 기후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이미 이 악기는 정규 거래품목이 되었고 재고를 두며 생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악기의 기술적 완성에는 또한 신문, 전시회, 심지어는 맥주회사의 판매기술을 모방하여 지은 (독일에서는 주로 베를린) 악기공장들의 음악당 등, 근대 특유의 수단들을 총동원한 악기제작사 및 연주가 사이의 격렬한 경쟁이 한 몫을 했다. 그리고 이것만이 끊임없이 늘어가기만 하는 기술적 문제에 대한 작곡가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이었다.” 44) 그렇다면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에서 대량양산체제로 돌입한 피아노의 생산량은 어떠했을까? 18세기에 슈타인(J. A. Stein) 혹은 슈디(B. Schudi)와 같은 유명 피아노 제작자들 경우 5명 내지 6명의 조수들과의 작업으로 연간 20여대 정도의 피아노를 만들 수 있었던 반면, 1794년에 설립된 빈의 슈트라이혀(Streicher) 피아노제작사는 1815년경에 년간 약 50대의 피아노를 생산하였다. 그리고 1795년에 설립된 영국의 브로드우드사는 그 해에 800여대를 생산하다가 1825년에는 두 배에 육박하는 1500여대를, 1855년에는 2300대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에라르사는 1500대를 제작하였다. 한편, 독일인 기술자, 요한 베렌트(Johann Behrent)가 미국으로 건너가 1775년에 처음으로 그랜드피아노를 생산했던 미국에서는 1860년경에 4개의 피아노 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보스턴의 치커링(Chickering), 뉴욕의 슈타인웨이(Steinway), 볼티모어의 크나베(Knabe), 필라델피아의 쇼메이커(Showmaker)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회사에서 생산된 총 피아노 수는 1860년을 기준으로 하여 년간 15,000-20,000대에 이르렀으며, 1870년에는 약 24,000대 그리고 1890년에는 약 72,000대로 급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독일어권에서도 1860년대에 전통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피아노 회사 외에 새로운 회사가 설립되고 또한 단기간에 급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1889년의 통계를 보면, 당시 독일에만 380여개의 회사가 난립하여 있었고, 이들 회사에서 생산된 피아노는 총 70,000대에 이르게 된다. 물론 미국과 독일이외의 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알프레드 돌게(A. Dolge: 1848-1922) 45) 에 의해 제시된 각 나라별 피아노 생산 수는 이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기준년도는 1905년이다. 46)
․미국 350,000 ․독일 170,000 ․영국 75,000 ․프랑스 25,000 ․오스트리아 & 스위스 12,000 ․러시아 10,000 ․네덜란드 & 스칸디나비아 4,000 ․스페인 2,500 ․이태리 1,500
이들 국가에서 생산된 피아노의 총 수는 약 650,000대에 이른다. 이처럼 엄청난 양의 피아노가 나라별로 그리고 나라 내에서 경쟁적으로 생산되다보니까, 각 회사들은 악기의 질, 즉 소리의 아름다움, 진동, 고른 터치, 음색 등의 음악적 질보다는 어떤 조건하에서 피아노가 생산되는가의 여부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바야흐로 피아노 제조업은 이전의 수공업적 작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사업으로 변모되었는데, 이들 피아노 제작사들의 거대한 매출을 가능하게 한 것은 대략 세 가지 이유로 정리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생산설비의 기계화이다. 즉 증기력을 이용한 기계의 고안과 발전을 통해서 그 이전의 수공업적 작업보다 훨씬 신속하면서도 오히려 비용이 절감되는 생산체계가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피아노의 수많은 부품들은 이제 더 이상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기계작업을 통해서 양산되었다. 펠트햄머 혹은 피아노 동선(銅線)과 같은 특별한 부품 역시 그러했다. 이와 함께 특정 부품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체계도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악기몽통, 울림판 혹은 액션만을 만드는 회사는 피아노제조공정 전체를 일괄 담당하는 공장에 비해 확실히 경제적이었고 이에 따라 완제품 피아노를 훨씬 저렴하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근거는 19세기의 음악문화의 변화에서 비롯된 엄청난 피아노의 수요에서 찾아진다. 즉 19세기 들어서서 ‘순회하는 비르투오소'가 급증하였고, 19세기 중엽이후부터는 이들 연주자들이 당시 개발된 기차를 통해서 순발력 있게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를 이동하면서 자신들의 예술을 과시하고, 이름을 드넓게 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선전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목표는 이 비르투오소들과 그들의 연주를 아주 값지고 진기한 것으로 대중들에게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시민계급을 겨냥한 대규모 연주회장을 찾는 음악 애호가들의 수는 나날이 증가하였고, 수많은 명 피아니스트들이 또한 음악학도와 아마추어 음악가 혹은 음악애호가들의 우상이 되어갔다. 이와 함께 수많은 음악 애호가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피아노 테크닉을 연마하고 완성하여 자신들의 우상에 버금가는 예술적 역량을 함양하는 것에 모아졌다. 1843년에 발간된 칼 체르니(Carl Czerny) <40 연습곡집>, op. 337은 이러한 사회적 수요를 겨냥하여 발간된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작곡가는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연주자가 동일한 부문을 지시된 것처럼 반복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잘 연습한 후에는) 또한 지시된 멜첼의 메트로놈 템포에 맞추어 매일매일 연습을 한다면, 그의 손가락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확실하게 부각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47) 수많은 아마추어 음악가들은 대가들의 천재성과 그들이 지닌 탁월한 재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피아노를 연습하며 자신들의 꿈을 키워나갔다. 세 번째로는 지금까지는 생소했던 피아노 판매에서의 새로운 마케팅 전략의 도입을 들 수 있다. 1856년에 하나의 틀로 된 철제골격을 만들어 급속한 매출실적으로 기록한 윌리엄 슈타인웨이(William Steinway: 1835-1896)는 귀족과 대부호를 겨냥한 새로운 판매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행해갔다. 또한 슈타인웨이사는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이그나츠 파드렙스키(Ignaz Paderewski)와 같은 당대의 저명 비르투오소들과 계약을 체결하여, 이들이 연주할 때마다 소정의 사례금을 지불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물론 슈타인웨이 피아노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에서였다. 그리하여 예를 들자면 루빈슈타인은 1872년 6월에 계약을 체결한 이후 9월에 미국 데뷔연주를 하였으며, 이듬해 5월까지 미국에 239일 체류하는 동안 총 215회, 즉 매주 6회 이상의 콘서트 연주를 한 것이다. 48) 그밖에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또는 생상스와 같은 저명 작곡가들의 추천을 적극 활용하는 전략도 병행하였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피아노를 구입하였다. 물론 그 이전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이다. 피아노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피아노음악의 레퍼토리를 음악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의 전제일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음악도 연주할 수 있는 가능성도 의미하였다. 이들을 겨냥하여 19세기에는 수많은 곡들이 피아노용으로 편곡되어 출판되었다. 편곡 작품은 오히려 오리지널 곡보다 더 유포되고 각광을 받았다. 또한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이미 필수불가결한 교육이 되었다. ‘피아노연주'는 여염집 규수들만이 필수적으로 겸비해야만 하는 덕목이 아니라, 남녀를 불문하였다. 재능이 있건 없건, 흥미가 있건 없건 간에, 이들로 하여금 ‘피아노를 연주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집안에 번영을 가져다주고 교양을 상징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1800년 10월 22일자로 빈의 통신원이 AMZ(음악일반신문)에 기고한 글은 당시의 사회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집에 피아노를 보유하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어버렸다. 중산층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피아노를 소유하여,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교양 있고 솜씨 있게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행위가 풍요로운 삶을 향하고 인간의 보다 훌륭한 가능성을 충족하는 제스처였던 것이다. 50) 그러다 보니 에두아르트 한스릭(Eduard Hanslick) 혹은 루드비히 메이나르두스(Ludwig Meinardus)와 같은 동시대 비평가는 이러한 현상을 “피아노중독증(Klavierseuche)”이라고 명명하고, “음악적 프로레타리아(Musikalische Proletariat)” 교육에 대한 아주 심각한 경고를 할 정도였다. 51) 미국에서의 사정은 이보다 더했다. 당시 저명한 문인였던 제임스 파튼(James Parton)은 1867년 7월자 <월간 애틀래틱>(Atlantic Monthly)에서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추어 새로 살림을 차리는 거의 모든 부부들은 피아노를 취사용 레인지에 버금가는 필수적인 물건으로 생각한다”고 하였고, 패런 스티븐스 역시 피아노가 “미국가정에서 난로와 비슷한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거의 필수적인 가구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던 것이다. 52) 한마디로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되어 비롯된 “한 가정에 한 대의 피아노 구비”는 바로 19세기에 피아노 양산이 급성장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와 함께 피아노라는 악기는 인구가 급증하게 되는 19세기에 훗날 라디오, 텔레비전, 오디오기기 등이 넘겨받게 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참고문헌 F. Augustini, Die Klavieretüde des 19. Jahrhunderts. Studien zu ihrer Entwicklung und Bedeutung , Diss., Duisburg 1986. A. Dolge, Pianos and their Maker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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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Klavierkomponisten, die in den meisten Fällen zugleich ausübende Virtuosen waren, haben dabei durch den Gedankenaustausch mit dem Instrumentenhersteller einen regen Anteil an den Fortschritten in der Klavierkonstruktionen genommen. Das erste Ziel war die Beschleunigung und Präzierung der Mechanik. Hier konkurrierten zwei Systeme: die englische Stoßzungen- und die deutsche (Wiener) Prellmechanik. Die größere Wucht des Anschlags, die einen volleren, grundtönigeren Klang bewirkte, trug dazu bei, daß um 1820 die englischen Klaviere bevorzugt wurden. Auf ihrer Basis entwicklete 1821 Sébastien Erard in Paris die sogenannte Repetitionsmechanik, die sich im Prinzip bis heute erhalten hat und Voraussetzung der Entfaltung der Virtuosität im 19. Jahrhundert wurde. Das zweite Ziel war die Erweiterung des Klangvolumens und der dynamischen Nuacierung. Ihm dienten Maßnahmen wie die Verwendung kompakterer und umsponnener Saiten, die unter erheblich höherer Spannung standen, der Mehrfach-Beuzug, die Vergrößerung und Befilzung der Hämmer und die Verstärkung des Gehäuses, wobei mehr und mehr Metallteile verarbeitet wurden. Aufgrund der Erfindung und Entwicklung der durch Dampfkraft mit Elektrizität betriebenen Maschine, der Einführung bis dahin Man kaufte Klavier, das man viel billiger haben konnte als jemals zuvor. Das Klavier war eine Modeinstrument, das Klavierspiel war ein unentbehrliches Bildungsgut, so daß viele Kritiker spöttisch solch eine Erscheing als eine “Klavierseuche” bezeichneten und mit voller Ernst vor der Bildung eines “musikalischen Proletariats” warten. So ist der private Bedarf -ein Klavier in jedem Haus- der eigentliche Grund für das Aufsteigen der Produktionsziffern. Das Klavier nahm im 19. Jahrhubdert, indem die Bevölkerung enorm anwachsen war, etwa die Rolle ein, die später vom Radie, Fernsehen und Plattenspieler übernommemn wu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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