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으며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
시작하는 말
위에 기록한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고난의 종으로서 고난 당하시는 양상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의 삶을 사셨고, 연한 순 같이 사람들에게서는 얼마든지 고난을 받는 위치에서 멸시 당하시고 싫어버림을 당하시고 오해를 받으시고 얼굴을 가리우는 외면을 당하시며 모든 간고를 많이 겪으시고 버림을 당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서 과거일제 말기에 일본 제국주의 신도사상 체제가 한국 교회 말살 정책의 최 절정기에 하나님의 진리를 수진하려는 종들이 당한 고난과 그들의 신앙적 삶을 여기 이 말씀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모든 것 다 버리고 자기들의 한 목숨을 오직 예수께 드리려는 일편단심 충정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갔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자
안용준 씨의 [태양신과 싸운 이들]에 보면 책의 주 인물되는 박관준 장로가 어느 날 밤에 꿈에 한 두루마리를 들고 계시는 예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꿈속에서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그 두루마리는 무엇입니까"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제 한국교회는 큰 전쟁을 하게 되었으므로 십자가 군병들을 뽑는데 이것이 그 명부록이라고 하시면서 펼쳐 보여 주시는데 그 첫머리에 자기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서 조간 신문을 보니 조선 총독부에서 한국의 모든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할 것을 지시하였다는 기사를 읽고 한국교회에 큰 환난이 시작되는 시작임을 알고 죽기까지 싸우리라는 결심의 기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장로님이 보았던 그 십자가 정병의 명부록에는 분명히 교생이 전기를 쓰려고 하는 이광록 집사의 이름도 들어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광록 집사는 39세의 젊은 나이로 비록 교회직분은 집사에 지나지 아니하나 한국교회가 일본이 숭상하는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라는 태양신에게 경배하기로 결의할 때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분연히 일어서서 항거하고 쇠고랑을 차고 평양 형무소에서 6년 가까운 세월동안 옥고를 견딘 승리자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의 패망의 날에 출옥하여 범죄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승리한 종들의 반열에서 재건운동을 하시다가 6.25 동란이 일어나기 전년에 부산시 영주동 산 동네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셨다.
교생에게 이광록 집사의 전기 집필의 부탁을 받고 사양하다가 결국은 순종하여 펜을 들기로 결심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이광록 집사는 출신이 이북으로, 출옥한 다음 해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단신으로 월남하여 부산으로 와서 최덕지 전도사(후에 목사가 되심)를 만나 함께 재건운동을 하기로 마음을 합하였다. 그 후 남해에도 수진 성도들이 있음을 알고 당시 곽영삼 집사(남해 이동교회 곽동명 장로 부친)가 상업차 부산으로 왔다가 이광록 집사를 만나서 모시고 오므로 교생도 21세의 청년으로 그 수진 종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의 신앙투쟁의 간증설교를 듣는 중에 옥고를 참아 견디게 된 표어 또는 개인의 신앙좌우명이라 할 수 있는 말씀, 잘못되면 천당이라는 그 말에 큰 감명을 받았고 8.15 해방 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우며 매우 불안한 때에 그 잘못되면 천당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가난한 경제적 고통을 참으며 주님께 나의 생애를 드리리라고 결심하고 다짐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광록 집사는 참으로 불쌍한 주의 종이었다. 그에게는 자녀도 없고 뒤따라 월남하신 사모님과 함께 하시면서 지나셨다.
사모님이 그 부군 집사님을 신앙으로 충분한 보필을 하시지도 못했고, 다른 출옥하신 종들과 같이 성도들의 존경과 봉사의 위로도 받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젊어서 있었던 폐병이 재발하여 치료다운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것을 교생이 목회사역 이선에 은퇴하여 생각하여 보니 너무도 불쌍하게 느껴져서 짧은 글을 써서라도 그의 간단한 전기를 남김이 후배의 도리라고 생각되어짐이요
세 번째는 이광록 집사가 출옥한 동지 최덕지 목사와 신앙 실천문제 견해차이로 사역의 길을 달리하고 부산 수정동의 어느 부인 집사 댁의 셋방에서 생활하면서 부산 초량동에 성전을 건축하고 있을 때이다.
당시 신앙으로 살면서 주의 일에 뜻을 가진 김정태 청년과 김선희 청년 그리고 교생이 함께 이광록 집사를 도와드린다는 명분으로 함께 약 1개월 가량 있었는데 옥중에서 6년이라는 세월을 살고 나오신 집사님이 세상 물정이 너무 어두운 것 같아서 교생은 불평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을 집사님은 세상을 떠나시고 계시지 않으나 하나님께 참회하는 심정으로 붓을 들게 되었다.
제1장 그의 구속되기 전의 행적
이광록 집사는 구속되기 전의 행적은 집사님의 부인이 아직 생존하여 계시기는 하지만 너무 연만하여 옛날의 일을 물어볼 수가 없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구속된 수진 종들의 예심종결서에 있는 집사님의 항으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본적 :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동부동 172번지
주소 : 평양부 경창정 30번지
이름 : 이광록(李光綠)
직업 : 매약상
나이 : 당년 39세
기소 죄목 : 치안 유지법 위반, 일본 황제에 대한 불경죄, 국가보안법 위반, 육군형법 위반 등
당시 함께 기소된 신앙의 동지들은
김린희 전도사(당38세) : 평북 선천 출신, 이기선 목사(당67세) : 평북 의주 출신, 박신근 집사(당37세) : 평북 선천 출신, 김형락 영수(당43세) : 평북 정주 출신, 김화준 전도사(37세) : 평북 의주 출신, 고흥봉 목사(당51세) : 평북 강계 출신, 서정환 전도사(당40세) : 평북 강계 출신, 장두희 집사(당35세) : 평북 위원 출신, 양대록 집사(당32세) : 평북 초산 출신, 최정민 목사(당74세) : 평남 개천 출신, 안이숙 선생(당38세) : 평남 박천 출신, 한상동 목사(당45세) : 경남 거창 출신, 조수옥 전도사(당32세) : 경남 하동 출신, 이현숙 전도사(당46세) : 경남 함안 출신, 최덕지 전도사(당45세) : 경남 고성 출신, 손명복 전도사(당35세) : 경남 창원 출신, 이주원 전도사(당40세) : 경남 밀양 출신, 방계성 전도사(당58세) : 경남 부산 출신, 오윤선 장로(당75세) : 경남 함안 출신
또한 다른 그룹으로 기소된 분들이 있으니
최상림 목사 : 경남 동래 출신, 최봉석 목사 : 평북 출신 등이며
이광록 집사는 17세에 폐결핵으로 회생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전도를 받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앙하고 기도하는 중에 신유의 은혜를 체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며 신앙생활에 매진하던 중 다니는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았고 결혼도 하였으나 아이는 출생하지 않아 두 부부가 가정 삶의 방편을 위해 매약상을 하며 겸하여 노방전도와 방문전도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마두원 선교사를 만나서 그의 신앙이 확실하고 견고하게 뿌리를 박는 계기가 되었으니 곧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만왕의 왕으로 지상에 강림하셔서 천년 안식 세계를 세우실 것이요 주를 믿고 승리신앙으로 깨어있는 성도는 예수께서 재림시에 휴거 하리라는 것과 세상나라들은 심판을 받아 멸망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전도하고 성경을 상고하는 동시에 서로 돌아보고 권면하고 도와 주는 신앙 그룹을 형성하였으니 이 그룹에서 이광록 집사는 이곳 저곳의 소식을 전하여 주는 심부름꾼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앙을 연마하고 깨어 있을 때 일본 신도주의 마수인 신사참배 지령이 있었고 이 지령에 거부하는 이들에게 체포령이 발하였다. 그 때 수진 종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피하여 다녔다. 그들이 피한 것은 자기들의 생명에 대한 애착이나 일경의 박해가 무서워서가 아니었고 한 영혼이라도 더 신사참배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우쳐 주고 한 생명이라고 더 범죄하여 죽음의 집단에서 건져내려는 목적이었다.
이광록 집사는 그전부터 직업이 매약상인 점을 이용하여 이곳 저곳 다니면서 지하에 숨어있는 이들에게 신앙의 소식을 전하여 주고 격려함과 동시 성도들의 헌금을 수진하는 목사님과 전도사님들께 전달하고 이미 구속된 주의 종들의 사모님들과 그 자녀들에게 전달하여 도움이 되게 했다. 그 중에는 이러한 실화도 있다.
김지성 전도사는 예수 믿기 전에 평양에서 일류 국민학교 교사로서 넉넉한 삶을 살면서 두 자녀를 두고(후에 중앙교회 김취훈 장로, 동산교회 김경숙 권사) 단란하게 살고 있던 중 김린희 전도사를 통하여 전도를 받고 주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으니 주의 일을 하여야 되겠다고 학교의 교사직을 사표를 내고 전도사로서 교회를 섬기시던 중에 사모님이 별세하시고 슬하에 어린 두 자녀만 남겨 두시고 신사참배 거부로 구속이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이광록 집사는 자신도 일경의 마수를 피하여 쫓겨다니는 처지에 김지성 전도사의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어느 산골로 가서 기도하던 중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덮이고 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게 되자 그 어린 아이들이 비 맞을 것이 걱정하고 너무나 답답한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손을 들고 큰 소리로 구름아 이쪽으로 저쪽으로 물러가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다고 할 때 그만 비가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후일에 김취훈 장로가 어렸을 때의 일을 기도원에 5인의 장로들과 함께 기도하러 가서 간증하는 말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제 2 장 그의 6개 성상의 옥중 생활
일경의 마수를 피하여 다니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이유는 일본경찰의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수사실력이었고 두 번째는 이미 신사참배를 승인한 목사들의 밀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수진 종들은 한 분, 두 분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로 송치되었고 그 중에는 이광록 집사도 체포되어 무서운 형무소의 죄없는 죄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형무소에 수감된 신사불참배자들을 일경은 세 갈래로 분류하여 취급하였다.
첫째 부류는 구속은 되었으나 신사참배를 시인한 이들인데 이들이 신사참배를 시인하였어도 일본 경찰이 이들을 석방하지 않은 것은 미국의 스파이 또는 동조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에게 대한 감방에서 대우는 다소 후한 편으로서 식사도 일등 주먹밥을 제공하였고
두 번째 부류는 일본 신도사상이 주장하고 전 국민에게 강요하는 다섯 가지 행위 즉
(1) 신사참배 - 일본의 황실의 최초 조상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의 위패에 대한 배례
(2) 동방요배
(3) 일본 군인이 전쟁에서 무운이 장구하기를 비는 묵도
(4) 황국 신민의 충성 서약
(5) 국기 배례
이 다섯 가지 중에 첫째 것만 반대하고 다른 것은 반대하지 않은 이들로서 이들에게는 감방 안에서의 포박은 없고 식사는 이등식사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세 번째 부류는 일본 신도주의가 추진하고 강요하는 다섯 가지를 모두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였다. 이들의 식사는 삼등 식사로서 계란 한 알만한 주먹밥(일본말로 니기리메시)을 소금물에 적셔 가지고 주는 동시 감방 내에서도 줄로 양손을 뒷짐 지워 포승하였기 때문에 식사도 입으로 먹어야 하였고, 여러 가지 모진 고문이 가하여 박신근 집사는 겨드랑이에서 구더기가 나올 정도였고, 이광록 집사는 출옥한 후에도 한 쪽 어깨가 쳐져 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고문을 참고 견디며 승리한 분은 (1) 최덕지 전도사, (2) 박신근 집사, (3) 이광록 집사, (4) 김린희 전도사(병보석으로 광복일을 몇 개월 앞서 출옥함)이다.
위의 네 분은 원수에게 한치의 양보나 타협이 없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여야 될 말은 거침없이 말함과 동시에 성서적이고 지혜롭게 처신하며 순수하고 양심적인 차원에서 진리를 지켜 승리한 분들이다.
김린희 전도사는 병보석으로 먼저 출소하였기 때문에 나중까지 싸워서 승리하신 이는 세 분이요, 그 세 분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이광록 집사이다. 이광록 집사가 순진하고 양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분이 감방 안에서 몸이 포박되어 엎드려 입으로 식사를 하는 불편을 견디지 못하여 동방요배를 시인하겠노라고 말하면 간수가 포박한 줄을 풀어주어 식사도 손으로 할 수 있고 자유가 있어 다소나마 평안함이 있기는 했지만 양심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한 삼일간 자기의 양심과 싸우다가 간수에게 나 삼일 전에 한 말을 취소하노라고 하면 다시 감방 문을 열고 들어와서 양손을 뒤로 포승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을 두 번 가량 반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광록 집사는 월남하여 부흥회를 인도하는 강단에서 나는 패배한 사람 온전히 승리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증거할 때 온 청중이 크게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말이 적고 태도가 순진하게 보이는 분이며 자기 부인 외에는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는 육신적으로는 별로 의지할 사람도 도와 줄 분도 없는 외로운 종이었다.
그 때 김지성 전도사가 그를 많이 생각하여 주고 도와 주었고, 38세의 처녀요 지식인으로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동일 감옥에 수감된 안이숙 선생님과 그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고 가까이 하였다고 한다.
한 번은 김지성 전도사의 가족들이 전도사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엿을 고아가지고 면회하면서 가지고 가서 간수의 눈을 피해 몰래 드렸는데 전도사님이 그 엿을 가지고 자기 감방으로 들어가다가 주의 종이 수감된 감방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서 조금 떼어주고 가려고 하다가 간수에게 발각되어 엿을 간수에게 뺏기고 두 사람 모두 매를 실컷 맞았다는 것이다.
그 후 김지성 전도사의 아들 김취훈 장로는 그 일을 생각하여 엿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광록 집사는 그 잔혹한 박해를 견디고 광복의 날까지 기다릴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께서 반드시 속히 재림하시리라는 소망을 확실하게 굳게 잡은 사실이요, 또 한 가지는 시작의 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잘못되면 천당이라는 개인의 신앙좌우명 때문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육신의 매를 맞아 죽는 것은 분명히 육신이 잘못되는 일이며, 밥을 굶어 죽는 일은 잘못되는 일이지만, 영혼은 천당에 가게 된다는 뜻으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고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도 연약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마음에 시험이 일어나서 낙심이 될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더디 재림하시고 이 포악한 일본놈의 세력이 오래 계속되면 어찌할꼬 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자의지적 시험인데 그 때 그것을 물리치고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일이었고 또 한 가지는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일이요, 또 한 가지는 소리내어 부를 수는 없어도 찬송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제 3 장 출옥과 재건운동에 참가한 이광록 집사
능력의 하나님이 순교하신 이들의 순교의 제물과 수진하신 종들의 향기로운 기도의 제물을 흠향하시고 그 무서운 일제의 쇠사슬을 끊으시고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무거운 철창문이 맥없이 열리게 하심으로 오랫동안 고난을 견디고 이긴 주님의 종들이 승리의 출옥을 하셨다.
출옥한 성도들의 반열에 함께 이광록 집사도 신사참배와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순수하게 승리하신 분이기 때문에 범죄한 한국교회를 다시 개혁시키는 일에 재건운동가의 반열의 지도자가 된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1. 그의 월남
그러나 여기에 문제는 있었다. 구속되기 전부터 자신을 보살펴 주고 이해하여 주던 안이숙 선생 모녀에게 몇 번 찾아간 일이 빌미가 되어 김린희 전도사가 이광록 집사에게 다소 듣기에 거북한 말을 하였고 그 다음부터 집사님은 약간 밖으로 돌다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고 이남으로 단신으로 월남을 하게 되었으니 그 때가 1946년의 봄이었다.
북한에는 재건운동을 지도할 출옥하신 일꾼들과 또한 수진한 일꾼이 많음을 보고 이남으로 월남하여 평양에서 함께 옥고를 겪을 때 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투쟁하던 최덕지 전도사를 존경하고 있던 차 월남하여 그 분과 함께 한국교회 개혁운동을 전개함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믿고 별다른 준비도 없이 기도한 후에 조금의 여비만을 가지고 확실한 주소도 누구와의 의논도 없이 사모님도 대동하지 아니하고 단신으로 3.8선을 넘어 월남하는 동포들의 대열에 끼어서 월남하게 되었다.
당시의 통신수단은 전혀 없고 그저 소식을 듣는 것은 인편에 의하고 구전에 의할 뿐임으로 주소를 구할 수 없었으며 누구하고 의논할 수 도 없었다.
북한 재건교회의 중심교회가 평양시 신양동 8번지에 있는 평양교회로 이곳의 실질적 지도자는 김린희 전도사이었고, 찬송과 음악으로 유명한 이원철 전도사, 치리를 전담하시던 고흥봉 목사와 열심히 또한 신자와 교역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권면도 책망도 서슴없이 하시며 최일선에서 공산주의와 투쟁하시던 박신근 집사와 성서적 인물이요 조직적이며 영적인 청년 목회자 이창환 전도사가 계셨다(후에 순교 - 이 부분은 1.4후퇴시 후퇴하여 부산 영주동 연합교회서 한 학기 함께 신학을 공부한 교역자들을 통하여 듣게 된 사실이다).
당시에 월남한 교역자들의 이름을 참고로 여기에 기록하여 보면
홍신균 전도사 - 후에 장로가 되어 고신에 가서 목사
최 훈 전도사 - 김해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고신에 가서 목사
차문현 전도사 - 미국에 가서 세상 떠남.
차문제 전도사 - 차문현 전도사의 동생으로 고신을 졸업하고 목회하다가 미국에 감
조이럽 전도사 -
황성수 전도사 - 1.4 후퇴시 월남 오사교회 시무와 내산교회 대구 삼덕교회 서울중앙교회 시무 중 병사
문춘훈 전도사 -
정준겸 전도사 -
황지곤 전도사 - 1.4 후퇴시 월남
정준겸 전도사 - 1.4 후퇴시 월남
표지현 선생 - 여자
윤신보 선생 - 여자 등이요
전봉성 전도사 - 1.4 후퇴시 월남 재건교회서 목사
홍득표 전도사 - 1.4 후퇴시 월남 재건교회서 목사
김순복 전도사 - 여자로서 재건교회서 사역하시다 별세
6.25가 발발하기 전에 월남하여 서울을 중심해 목회하던 분들은
김린희 전도사 - 태평로 교회서 시무 중 공산군에 피납
고흥봉 목 사 - 태평로 교회서 시무 중 1.4 후퇴시 부산으로 피난
이원칠 전도사 - 태평로 교회서 시무 중 6.25 당시 병사
이기태 전도사 - 원효로 교회 시무 중 6.25 당시 납북
정찬준 목 사 - 오류동 교회 시무 중 1.4 후퇴시 부산으로 피난
박지영 전도사 - 인천교회 시무 중 1.4 후퇴시 부산으로 피난
김원희 장 로 - 영등포교회를 시무 중 1.4 후퇴시 제주도로 피난
이형록 전도사 - 6.25전에 월남하여 해방촌 교회를 시무하다가 부산으로 파견되어 부산시 영주동 58번지 창고 건물을 매입하여 예배드리다가 1.4 후퇴로 이북과 서울지역 교역자와 교인이 내려와서 300명 가량 교인이 주일에 회집하고 유년부도 300명 가량이었고 후에 이형록 전도사(후에 목사가 됨)는 문현동 교회로 전임되고 전봉성 장로와 박재준 전도사가 시무했다.
평양교회의 교역자 중 박신근 집사는 교역자와 교인이 남쪽으로 월남하는 것은 고난을 피하여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라고 말하고 세속주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임으로 신앙은 힘을 잃게 되고 세상과 타협하는 행위라고 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나 이광록 집사는 의논없이 월남하였던 것이다.
2. 부산에 도착하여
이광록 집사는 월남하는 목적이 이남에서의 최덕지 전도사와 재건운동을 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누구하고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월남한 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간 것과 비교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갈 1:16).
그는 월남하여 이미 재건교회가 세워져 있는 서울에 들리지 아니하고 바로 부산으로 가서 최덕지 전도사의 거처를 찾지 못하고 여관에서 머무는 동안 전대에 조금 가지고 왔던 돈은 바닥이 나서 여관비마저도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 바로 부산에서 출생하여 사업하며 신앙을 지키고 기도생활에 열중하던 김갑득 집사(본인도 8.15 해방후 마산 문창교회서 손양원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이 분을 만나본 일이 있음)이 주님의 음성 같은 것이 기도하는 중에 들리기를 모 여관에 나의 종이 머물고 있다는 환상적 소리를 듣고 그 곳으로 찾아가서 본 결과 이광록 집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집사님의 인도로 최덕지 전도사를 기쁨으로 만나게 될 때 이들은 이미 초면이 아니요 6년이라는 세월 같은 형무소에서 함께 진리의 투사로서 신앙의 싸움을 싸우셨고 해방 후 출옥한 후에는 얼굴도 서로 대하여 잘 알 뿐 아니라 박신근 집사와 함께 최일선의 투쟁자였고, 순수하게 투쟁한 종들임으로 반가움과 함께 서로 힘이 배가하였음은 불문가지다.
이광록 집사를 통하여 북한 지역의 재건운동의 목표와 방법 등과 교회의 급속한 발전의 소식을 들은 최덕지 전도사는 이북교회 재건운동의 목표와 실천적인 문제를 검토하여 좀 더 구체적이고 조직적이며 이론적인 정립을 하여 이광록 집사와 함께 먼저 잃은 양을 찾고 다음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말씀과 은혜로 무장시키려고 일어서게 되었다.
3. 경남지역에서 외치는 이광록 집사
당시 최덕지 전도사는 하루에 네 번 예배를 드리고 집회시작 할 때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교인들과 함께 삼일 금식기도를 하는 일을 원칙으로 하였고, 일반교회서 돌아온 사람이나 직분을 맡기려고 할 때는 7일 금식도 할 수 있도록 한 일이 특이하고, 또한 예배는 한 두시간 정도로 길게 드리는 것이 특이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경험한 일은 8.15 해방되던 해 11월쯤으로 생각된다. 교생이 동래 재송 시온원에 얼마쯤 가서 있을 때 역시 출옥하신 구조사님(구영찬 목사의 조부)이 와서 수영에 있는 어떤 성도의 집에 최덕지 전도사를 만나 보기 위해 찾아갔었다. 마침 11시 오전예배 도중에 들어가서 마루에 앉았는데 예배가 끝나고 나니 오후 3시가 거의 되어서 바로 3시 예배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야기도 해 보지 못하고 둘이서 돌아오고 말았다.
이북지역의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금식문제와 예배문제는 다소 자유로웠기 때문에 이광록 집사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산으로 와서 최덕지 전도사와 함께 일할 때는 여기에 맞추어서 자신도 금식하고 하루에 네 번 반드시 예배드리고 하였다.
또 한 가지 두 분의 특징은 최덕지 전도사는 거리에 다닐 때 길에 앉아 점하는 사람이나 사주보는 사람의 책은 반드시 찢어 버리고 상은 둘러엎을 뿐 아니라, 아이 낳은 집의 금줄도 걷어버리고 굿하는 집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쓸어버렸고, 이광록 집사는 거리에 나갈 때 머리에 쓴 중절모자의 앞쪽 챙은 올라가고 위쪽 부분은 내려와 있어도 그대로 쓰고 다녔으며, 형무소에서 오랫동안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오른쪽 어깨가 처져있고 그의 입은 그저 예수 천당 안 믿으면 지옥이라고 크게 외치며 길을 걸어 다녔는데 천당이라는 발음을 평양 사투리로 텬당이라고 하고 지옥을 디옥이라고 하니 알아듣는 사람이 많치 못하였다.
(1) 내산교회 방문
이광록 집사는 부산으로 와서 최덕지 전도사를 만나서 기도로 앞으로의 사역을 준비한 후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남해 내산교회이다. 남해지역 수진 성도들과 교회가 여러 곳 있다는 말씀과 일제시에 피하여 은둔하여 기도한 기도 처소가 있다는 소식을 이 곳에 있었던 김소갑숙 전도사를 통하여 들어서 흠모하고 있던 중 곽영삼 집사가 부산에 상업차 갔다가 만나서 함께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남해에는
① 최상림 목사가 시무하던 남해읍 교회를 위시하여,
② 이동교회는 무림파출소 뒤 산 비탈에 있었고, 곽영삼 집사가 신앙적 지도자로 계시면서 수진했고, 강춘조 권찰과 그의 부인 정달막 집사(박재준 목사의 장모), 정화연 집사(박재준 목사의 어머니) 난음리의 강집사 내외가 함께 하였고, 예배당은 신사 불참배로 8.15 해방 때까지 문이 닫혀 있었으나 해방 후에 곽영삼 집사 집 뒤에 있는 밭으로 옮겨 건축하였고, 그 후에 현재 위치에 그 아들 곽동명 장로가 옮겨 건축하고 이두옥 목사가 시무 중이다.
③ 문고개 처소는 서이섭 집사가 계셨고, 그 자녀들이 신앙생활하던 중 지금은 이동교회와 합치게 되었다.
④ 지족교회는 당시 한덕례 집사가 신앙적 지도자로 열심히 정화연 집사와 함께 기도산의 주의 종들을 위하여 봉사하였고, 지금도 교회가 부흥 중에 있으며 이성철 전도사가 시무 중이다.
⑤ 물건리교회는 이학섭 집사 부부의 주동으로 신앙을 보수하였고, 8.15 해방 후에 교회를 건축하여 교인도 많이 모였고, 현재는 그 분의 큰 아들 이찬종 집사와 성도들이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고 허남수 목사와 함께 교회를 지키고 있다.
⑥ 내산교회는 일제시대에 유일하게 남해지역에서 성전 안에 일본신사 위패가 들어오지 아니하고 해방의 날까지 주일날 성전문을 열어놓고 수진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곳이 이곳이다.
이곳에 교회를 지킨 지도자는 박재일 영수와 그의 누이동생 박권찰이 계셨고, 이 곳의 교인들은 함샘이골 전덕구 집사 가정(전몽용 목사의 부친) 돌고개 집사 가정, 제릿방의 김집사 가정을 중심하고 내산의 유기한 집사 어머니와 서충일 집사 가정 등을 중심했고, 남해지역 일원의 수진 성도들은 남해읍에서 김만두 장로 강덕순 집사(이해원 장로 외조모)와 위에 쓴 교회 성도들이 주로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날 12시까지 모여 예배드리고 신앙소식을 전하고 기도하고 각기 자기들의 처소로 돌아가곤 했다.
⑦ 내산의 기도산은 일반적으로 성산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을 내산 사람들은 작은 도장골이라고 부르며, 김소갑숙 전도사가 일제 신사참배 강요가 교회에 그 마수를 뻗칠 즈음에 피하여 시무하던 삼천포교회를 사면하고 내산으로 오심이 계기가 되어 이 곳이 기도하는 곳으로 되어지게 되었다.
김소갑숙 전도사가 교회 시무를 사면하고 종적을 감추게되니 경찰에서 그를 찾게 되었다. 이유는 그는 평양 여자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결혼을 하지 않고 주의 일을 하였으므로 그만큼 성도들에게 사상적 영향력이 크다고 경찰에서 보게된 것이다.
김소갑숙 전도사가 또 한 가지 경찰이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게 된 이유는 호주 선교회에서 부산 범일동에 시온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워 그의 언니에게 원장직을 맡겨 주었고 부산지역 수진교인들이 이 고아원을 중심으로 서로 연락을 취하였기 때문에 김소갑숙 전도사는 친미적인 인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김소갑숙 전도사는 내산으로 와서 처음에 지족교회 한덕례 집사를 통하여 제릿방 골짜기에서 기도하던 중 환상적 음성으로 작은 도장굴로 들어가라는 음성을 듣고 서집사에게 작은 도장굴의 위치를 문의하여 그 곳으로 들어가서 처음에는 둥글게 돌담을 치고 지붕을 덮고 비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흙으로 돌담을 치고 온돌을 놓아 사람이 거처하게끔 만들어 해방의 날까지 하루도 기도하는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고 기도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필자도 19세 때 일본의 예비 징집을 피하여 이곳에서 두 번 40일 기도를 한바 있다.
이와 같이 신앙의 역사가 있는 곳에 출옥하신 이광록 집사가 멀리 평양에서 오게 되었으니 그 감격과 기쁨은 말할 수 없었으며 온 교인들에게 은혜가 넘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은혜 중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산교회 예배당 안에는 벽지가 없어 신문지로 바람벽에 도배를 하였는데 그 신문지에는 사람의 사진이나 여러 가지 그림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광록 집사가 우상이라는 것이었고, 그는 집사들의 집에 있는 장롱의 장식도 사진틀에 넣어 방문 위에 걸어둔 사진도 모두 버리라는 것이었다.
예배당에 새의 그림, 사람의 그림을 그대로 발라놓은 것은 용인은 고사하고 교회의 책임자되는 박재일 영수(당시 65세 가량된 노인)에게 얼마간의 근신(시벌)을 명하게 되었으니 모두 섬뜩하여 졌다.
(2) 경남지역 부흥회 인도
경남지역은 한국 내에서도 가장 수진 성도가 많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도 거세고 활발하였던 곳이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교회에 강요할 때 수진 종들과 성도들이 주류를 이루어 반대한 곳은 첫째는 경남지역이요, 두 번째는 평안남북도 지역이며 그 다음은 한부선 목사의 선교지역인 만주지방 그리고 경북 의성 지역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경남에는 최상림 목사, 주기철 목사,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최덕지 전도사, 손명복 전도사, 이찬수 전도사, 김소갑숙 전도사, 이인제 전도사, 이현속 전도사, 조수옥 전도사, 염애나 전도사, 김영숙 전도사, 이름을 다 들 수 없을 만큼 다수의 신앙의 용장들이 있었고, 또한 수진 성도들이 있었기에 최덕지 전도사가 출옥하고 이광록 집사가 월남하여 함께 부흥회를 인도하시게 될 때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남은 성도들과 옥중 종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두 분은 하구교회 부흥회를 시작으로 하여 상남교회의 부흥회, 진영교회 부흥회, 강명교회 집회, 일동교회 집회, 본포교회 부흥회, 충무교회 부흥회, 창원교회, 마산교회 집회와 남해교회 부흥회를 끝으로 열 번의 부흥회를 하게 되었고, 큰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필자는 남해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여 3일 금식기도와 은혜를 받았다.
그 때 남해지역 부흥회는 남해읍 최일구 목사의 집 옆 빈터에 천막을 치고 한 것으로 기억되고 회중은 부흥사를 따라 여러 곳에서 모여온 성도들과 남해 지역의 성도들이었으며, 그 중에 남해읍 교회 신자들이 가장 많았다고 생각되며 최일구 목사도 그 때에 재건하기로 작정한 것은 필자의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 때 최덕지 전도사와 이광록 집사, 두 분의 지도자를 보고 지금에 목회자의 입장에서 평가하여 볼 때 최덕지 전도사는 설교가 웅변적이고 성서적이며 체험적인 것에 아무도 추종할 수 없는 실제적인 삶에 더하여 그의 여장부적 기질과 인격이 있었고, 이광록 집사는 그 설교가 성경 본문적인 것은 한 시간 설교에 성경 구절을 적어도 140절 가량 청중으로 찾아 읽게 하셨고, 표현에서는 평안도 사투리가 많았고, 인격이 겸손하고 성자적인 면이 엿보인 것은 그의 6년간의 주를 위하여 옥중에서 기도생활을 한 것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육체적 외모로는 최덕지 전도사와 비교하여 볼 때 달란트 차이가 있음을 인증할 수 있고, 또 최덕지 전도사가 가지고 있는 목회 기반이 이광록 집사와 전혀 없다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 앞에 서게 될 때 주님의 판단은 우리 사람이 알 수 없기에 주님의 상급은 두 분에게 반드시 일한대로 받으리라 생각된다(고전 3:13).
4. 교회 분열과 이광록 집사의 소천
최덕지 전도사와 이광록 집사가 함께 하여 사역한 결과는 단기간에 큰 역사를 일으키게 되어 여러 곳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말과 같이 사탄이 틈을 타게 되었다. 그것은 최덕지 전도사의 외동딸의 남편되는 이가 1947년 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의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이 장례식은 재건운동의 최선봉자 최덕지 전도사의 사위임으로 온 교회 뜻있는 성도들이 모두 모여 될 수 있는 대로 경건, 엄숙하게 잘 치루려고 하려다가 생긴 문제였다.
어떤 이는 시신에 수의를 입히고 얼굴 가리개로 면류관 같이 만들어 시신에 씌웠다고 하며, 어떤 이는 관에 면류관을 만들어 씌었다고 하는 이와(한국 재건교회사, p.135), 또 어떤 이는 상여 앞에 면류관을 만들어 얹어 가지고 출상하였다고 말하니 누구의 말이 맞는 말인지 모두 하는 말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일반에게 전하여진 공통된 말은 면류관 장례식이라는 말이 나 돌았고, 이것을 빌미로 하여 성전 벽에 사진이 들어있는 신문지 바른 것을 보고 그 교회 지도자를 근신케 한 이광록 집사는 이것을 우상장례로 규정하였고, 최덕지 전도사와 그 측근들은 강경하게 자기들의 입장을 고수한 관계로 이광록 집사와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광록 집사는 그 장례식장에 가보지도 아니하고, 그 관을 직접 보지도 아니하고, 죽은 이의 장모되는 최덕지 전도사를 직접 만나 보지도 않고, 당시 나이가 20세 정도되는 김모 청년의 전하는 소식만 듣고 절교 상태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또 최덕지 전도사의 측근 중에서 누구 한 사람 찾아가서 권면하거나 와서 실제로 눈으로 보라고 말하거나 무슨 면류관을 만들었는가 이러 이렇게 수의를 입히고 얼굴 가리개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없이 그저 면류관을 주님 앞에 가서 쓸 것인데 무슨 죄가 되는가 라고 말하여 버려 분열이 기정사실화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 부산 초량에 거주하는 최덕지 전도사의 조카사위 되시는 분이 이광록 집사의 교회에 나왔기에 필자는 그 분에게서 비교적 자세한 소식은 들을 수 있었으나 그 분도(후에 고신파에서 목사가 됨) 자신의 눈으로는 직접 보았는지 보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일회적인 일이요, 계속하는 것도 아닌 것을 문제삼은 것은 너무 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 이광록 집사를 따르는 교회
교회가 분열되었을 때 이광록 집사를 따라서 같이한 교회는 ① 소위 부산 수정교회라고 하는 본부 교회인데 당시 교인은 모두 30명 전후인 듯 하고 그 다음으로 ② 남해이동 ③ 물건리, 그리고 ④ 난음 ⑤ 지족 ⑥ 내산교회들이 있으며 이 교회들은 시골 교회들로서 별로 힘이 없으니 이광록 집사에게 큰 힘을 주지는 못했다.
그 당시에 재건운동이라는 신앙운동 대열에 참가한 지도급의 인물들과 신자들은 일제시대 타협없는 투쟁적인 신앙의 영향으로 한번 자기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기다려 보려고 하거나 좀더 생각하여 보려고 하거나 어떤 타협점을 모색하여 보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절교라고 하는 가혹한 방법으로 성도의 교제를 단절하였던 것이다.
이광록 집사도 이러한 신앙 실천을 누구보다 뒤떨어지지 않고 열심히 실천한 분이었고, 최덕지 전도사도 덜하지 않은 분인 것은 그의 주장을 행동에 옮기는 많은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인 줄 안다.
(2) 그의 성전 건축과 밀려 나오게된 일
최덕지 전도사가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남한 지방의 중심되는 성전을 세우려고 부산 초량동 산비탈에 성전부지를 매입하고 성전 건축의 기공도 하기 전에 분열이 되었다.
이광록 집사는 자기를 따르는 교인들과 함께 역시 초량동에 소재한 전이원이라는 부잣집의 2층의 방을 빌려 예배를 드리면서 그 성전대지를 상대방에 한 마디 말도 없이 선점하여 목조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건축이 거의 완성되었을 1948년 봄, 어느 수요일에 최덕지 전도사 측에서 다수의 교인들이 김소갑숙 전도사를 앞세우고 밀고 들어와서 성전을 접수하였고, 이광록 집사와 그 교인들은 힘과 수에 밀려 나와서 그 아래 철도수원지 안에 있는 젊은 새로 믿는 교인의 가정에서 얼마동안 예배드리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수진성도들의 진영에 큰 비극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었고 재건운동을 저해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 그 후에 되어진 일
이광록 집사는 성전에서 밀려나오게 된 다음에 교회 안에 또한 문제가 있었다. 그 첫째 문제는 많지 않은 교인들 중에 중혼문제에 걸린 가정이 두 집이 있었는데 하나는 임시로 집회하던 부잣집 호주가 본부인과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한 가정이요 또 한 가정은 열심쟁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인데 그들에게 이혼과 재혼의 경력이 있었고 이광록 집사는 이 문제를 죄악으로 여겨 다른 재건교회 지도자들과 같이 단절하고 교제를 꺼리게 되었는데 부잣집은 성전에서 밀려나온 후에 스스로 다른 교단으로 가게 되었고, 그 열심쟁이 부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자기 어머니를 죄인으로 생각한다고 불만을 품고 두 아들 중에 작은 아들이 이광록 집사가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데 손에 들고 흔드는 유기로 만든 종을 가지고 이광록 집사의 뒷머리를 후려쳤으나 바로 맞지 아니하여 상처는 크지 아니하였고, 그 후부터 그 가정도 교회에 출석하지 아니하고 세월이 지남과 동시에 교인들은 대부분이 고신파로 가버리고 김선희 청년과 문집사라는 분, 그리고 내산교회 유기한 집사의 누님의 가정만 남아 있게 되었다.
(4) 이광록 집사의 별세
그 후에 이광록 집사는 교인들이 모두 흩어지고 몇 가정만 남게 되고 예배드릴 처소도 없이, 사모님과 남의 집 단칸 셋방에서 기거하면서 서울 지역에서 재건 운동하시는 김린희 전도사가 있는 곳에 가지도 아니하고 고독하게 기도하면서 쓰러지는 날까지 혼자 거리에 나가서 예수 천당을 외치다가 17세 소년기에 걸렸던 폐병이 재발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흔하던 마이신 주사 한 대도 맞을 수 없는 경제적 사정으로 인하여 치료다운 치료도 받아 보지 못하고 1948년 5월 11일 49세의 고난의 생애를 마치고 질병이나 죽음 그리고 분열이나 싸움이 없는 하늘나라로 가서 영광의 주님의 영접을 받고 주님이 주신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그의 사모님과 김선희 청년과 한두 가정은 서울 지역 재건교회에서 파송받은 이형록 전도사가 부산 영주동 시장 앞에 있는 창고를 매입하여 교회를 시작한 그 곳과 연락하면서 부산 초량동에 처소를 세웠고 3개 교단이 통합시에 현재의 부산중앙교회로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에 따라 남해 지역의 이동, 난음, 지족, 물건, 내산교회 등도 자연히 이북계열의 재건교회에 소속되었고, 이 남해 지역에서 다음의 교역자들이 배출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최상림 목사를 시작으로 하여 김소갑숙 전도사와 그리고 이광록 집사와 최덕지 전도사와 수진 종들의 기도의 응답임을 확신한다.
(5) 배출된 교역자들
① 최상림 목사 :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 ② 최일구 목사 : 전임 재건교회 총회장 ③ 박재준 목사 : 전임 신학교 교장 재건교회 총회장 ④ 이두옥 목사 : 현 재건교회 총회장 신학교 교수 ⑤ 정문용 목사 : 부평지역에서 성공적인 목회 현역 ⑥ 최무림 목사 : 무임으로 부산에 거주 ⑦ 송민호 목사 : 전 재건교회 총회장 역임 ⑧ 전몽용 목사 : 재건교회 시무목사 ⑨ 이주용 목사 : 영남노회 노회장 역임 별세 ⑩ 하성존 목사 : 재건교회 시무목사
맺는 말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정치적 세력 혹은 집단적인 세력 앞에 생명을 초개같이 여기고 이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위하고,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선택하신 종들이 아니고는 가능치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그 때를 따라 그들에게 피할 길도 열어주시고, 피할 곳도 제공하시며, 대항하여 싸울 때는 필요한 힘을 주시고 대답할 말도 주심을 알 수 있다.
일본 군국주의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이들은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승리케 하신 것이니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이다.
출옥하신 종들을 볼 때 민족 앞에서, 교회 앞에서 과분한 영광과 상급을 받은 분들과 그렇지 못하고 고난에서 고독으로, 고독에서 외면으로, 외면에서 버림으로 생을 마감한 이들이 있으니 박신근 집사, 이광록 집사, 김신복 권사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분들에게 어떠한 잘못이나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그 분들이 주님을 위한 충성에 대하여 주님이 주실 칭찬과 상급을 손상케 하는 정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후세들은 오직 그들의 충성과 순수한 신앙만 본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반열에 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