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16일 두둥실 달이 밝은 추석날 밤,
우리 집 마당에 온 동네 사람들 나와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 하는 중에
어머님은 나를 낳았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고향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빗기내 사람들의 얘기들을 모아
짧은 글 적어서 고향마을에 보냅니다.
진도중학교․진도농업고등학교 졸업
송계 김영춘 선생 한문 수학
의신면장 진도군 문화관광과장 농업경제과장 재무과장
옥조근정훈장 수상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110 , 전화 061)544-2839
머 릿 말1
우리들의 고향 빗기내 마을은 우리나라 서남단 보배섬 진도의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 아래 산골마을 입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마을은 어머님의 품처럼 포근하고 대대로 빗기내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우리를 낳아준 빗기내는 어머님의 안태가 묻힌 뿌리로써 깊디 깊은 정이 베어있는 고향 땅입니다.
빗기내 마을을 떠나 타향에 사는 사람도 내고향 빗기내와 고향의 이웃들을 생각하면 마음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짐은 마음 깊숙히 숨겨있는 고향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들 모두의 고향 「빗기내, 사천리」는 항상 가슴 한가운데 자리하면서 우리를 풍요롭게하고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향 산천은 변함없고 우리의 부모 형제들이 남아 고향을 지키면서 조상 전래의 풍속을 전승하며 오손 도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도군과 진도문화원의 마을 유래찾기 사업에 대한 일환으로 빗기내 사상마을의 유래를 마을청년회원들이 주축이 되고 어르신들의 의견을 널리 들어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우리마을 출신으로 진도군청에 근무하는 박 정석 님께서 공무에 바쁜 중에도 틈틈히 자료의 정리와 편집을 해주셨으며 서울에 살고 계시는 허 성환 재경 진도군 청년회장과 재경 사천리 향우회 회원들이 고향사랑의 마음으로 책자 간행비를 부담하여 발간하게되어 마을민들과 더불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작은 정성의 열매가 경향각지에서 살아가는 빗기내 사람들의 고향에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마을민의 단합과 발전의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2002년 12월 일
사 상 마을 리 장 전 말심
사 상 마을 새마을 지도자 이 희 춘
마을지 발간을 축하 합니다.
우리 모두의 고향 빗기내 마을지 발간을 재경 사천리 향우회원들과 더불어 진심으로 축하하며 함께 기뻐합니다.
마을지가 나오기까지 공무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가며 무심코 넘어 갈 수도 있는 많은 자료들을 찾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만들어주신 우리 마을 출신 박 정석 진도군청 과장님과 고향의 세시풍속 재현 등 마을 발전에 앞장서 일해오는 이 희춘 새마을 지도자를 비롯한 청년회원 부녀회원의 노고에 고향마을을 떠나 사는 향우들은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고향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많은 관심 속에 향우들의 친목과 마을 발전을 위해 성원해 주시는 향우들께도 존경과 감사를 드리면서 특히 재경진도청년회 허 성환 회장의 고향을 사랑하는 열정에도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철부지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볼 때 너무나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시는 부모님들의 생활에 우리는 하루라도 빗기내 마을을 빨리 떠나야만 할 것 같은 마음으로 훌쩍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막상 고향을 떠나 험난하고 차디찬 도회지의 세파에 떠밀려 다니며 살아오면서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고향이 생각되었고 고향은 언제나 변함없이 따뜻하게 안아 주는 안식처가 되었으며 고향의 소중함을 부끄럽게도 뒤늦어서야 알았습니다
앞산이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든 봄이 오면 친구들과 진달래 한 웅큼 따먹으며 뛰놀았고, 여름밤엔 마을앞 개울에서 멱(목욕)감고 모깃불 피워 가면서 노닥거리느라 밤이 깊어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한창 무더운 삼복더위에 동네사람들 해수욕 가는 날이 정해지면 모두가 향동재를 넘어 단숨에 모새미 해수욕장으로 달려갔지요.
오랜만에 접한 바닷물이 개울 물 보다는 몸도 잘 뜨고 수영하기도 쉽고 해서 수영 통제구역까지 넘나들며 뙤약볕에 온종일 들락거리다 저녁 늦어서야 지친 몸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물집이 터지고 벗겨지느라 고생도 많았습니다.
산과 들이 단풍으로 물들어 갈 때면 파아란 하늘아래 참깨 다발 얹어 놓은 담장 너머 마당엔 첫 물 따온 빨간 고추 멍석 가득 널리고 지붕위엔 하얀 박통들이 여물어 갔지요.
겨울이 오면 흰눈 쌓인 행길에서 미끄럼질 치다보면 길바닥은 빙판으로 변해버려 어르신들의 야단도 많이 맞았고, 밤에는 참새 잡는다고, 온 동네 처마밑 쑤시고 다니기도 했고 .....................
끝없이 이어져 나오는 잊지 못할 추억들 속에 잃어버렸던 순수한 사랑과 인정이 솟아나 마음속에 가득합니다.
그 당시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었지만 5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 때가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들이었는지 가슴속에 찡하게 느껴집니다.
빗기내 우리마을은 물이 맑고 산세가 좋아서 인지? 예로부터 똑똑하고 유명하신 분들이 많이 나오셨고 오늘날에도 마을 향우들이 사회 각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보면 정말 자랑스럽고 힘이 솟구침을 느낍니다.
요즈음 도회지 어린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들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렵고 가난했지만 거리낌없이 휘 젖고 다니며,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으며 객지에 나와서도 잊지 못할 아기자기한 고향의 추억이 있고 정이 넘치는 고향사람들과 아름다운 고향마을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축복으로 빗기내 고향에 대한 크나큰 자긍심을 가지고 더욱 힘차게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고향을 떠나 살고있는 우리들은 고향을 지키고 가꾸어 오시는 고향의 어르신들과 친구들 그리고 후배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존경하며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아무쪼록 고향마을 사람들과 경향각지에 흩어져 살고 계시는 향우 여러분들의 하시는 일들에 끝없는 발전과 모든 가정에 행운과 건강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2년 12월 일
재경 사천리 향우회장 주 정 무
차 례
□ 화보
□ 머릿말
제1편 위치 및 현황
제1장 위치 및 지세
제2장 마을 현황
제2편 마을 의 발전사
제1장 마을 의 유래
제2장 마을 조직
1. 마을 총회와 역대 리장
2. 새마을 지도자
3. 부녀회장․부녀지도자
4.4-H 활동 및 청년회장
5. 경로당과 노인회장
6. 새마을 봉사대
제3장 상부상조
1. 품앗이
2. 울력
3. 부역
4. 부조․부주
5. 계
가. 큰 상도계
나. 작은 상도계
제4장 마을민 교화
1. 서당
2. 야학
3. 학교
4. 태권도 도장
제5장 생활 문화의 변천
1. 진입도로
2. 지붕개량
3. 시장보기
4. 식수
5. 연료 및 난방
6. 전기 불
7. 전화
제6장 마을 공동재산조성 및 관리
1. 마을 회관
2. 부녀회관(구, 마을 구판장)
3. 마을 방앗간
4. 마을 창고
5. 버스 승강장
6. 마을 표지석
제7장 기 관
1. 운림산방관리 사무소
2. 진도 레이더 기상대
제 3 편 명승 및 유물 유적
제1장 세시 풍속
1. 설날
2. 뱀날
3. 정월 대보름
4. 당산제
5. 하구달
6. 초파일
7. 복날
8. 유두․유둣날
9. 백중
10. 추석
가. 벌초
나. 송편
다. 강강술래
라. 성묘
11. 시제
제2장 전 설
1. 사명대사 첨찰산에서 도(道)를 통하다.
2. 무안 박씨 빗기내 입촌 이야기
3. 당산제의 영험담
4. 진도 최후의 유배자 정만조 선생과 경주 이씨의 사랑
5. 소치선생 헌종대왕 용안에 먹물 떨어뜨린 이야기
6. 빗기내 나뭇꾼이 화가 「소미산(小米山)」된 이야기
7. 첨찰산 호랑이가 사람 잡아간 이야기
8. 멧돼지 잡으려다 멧돼지에 물린 이야기
9. 빗기내 처녀 박종숙이가 인간문화재 되다.
제 5 편 지 명
제 6 편 배출 인물
제1장 마을을 빛낸 사람들
제2장 오늘을 사는 사람들
1. 고향마을 사람들
2. 빗기내 향우들 방명록
□ 부록 ―고향을 생각하며
□ 편집 후기
제 1 편 위치 및 현황
제1장 위 치 및 지세
사천리는 진도군의 최고봉인 첨찰산 서남쪽으로 의신천 상류의 하천을 따라 마을을 이루며 군청소재지인 진도읍으로부터 7㎞거리에 위치한 동네이다, 동은 첨찰산․덕신산을 경계로 향동리와, 서는 의신 저수지와 침계리에 접하고 북은 진도읍 동외리 성죽굴, 군내면 월가리, 고군면 석현리 고성리와 접하며, 남은 의신면 옥대리 청룡리 초사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첨찰산은 485m로 진도군의 동반부의 중앙에 우뚝 서 일산(日傘)을 펼친 듯 위세 좋게 자리잡아 동남진하여 덕신산을 이루고 기생기 안 고랑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 회동 초상 뒷산을 거쳐 정수암․ 사고지 재와 마을앞 갈매봉을 지나 돈(평)지 창포들에 머문다. 북서쪽으로 향한 산맥은 마을 뒷산인 수리봉의 웅장한 자태를 이룬 후 한가지는 진도읍 남산과 영산의 광정산(廣庭山)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칠전리로 넘는 가단 재에서 여귀산맥을 만나고, 한가지는 정거재(峙)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우뚝 솟아 진도읍의 주산인 철마산과 북산(望敵山)을 이룬 후 산월 연대봉에서 다도해를 굽어본 후 쉬미 바다에 숨어든다.
하천은 진도군에서 가장 긴 지방2급 하천인 의신천(10.09㎞)의 발원지로써 첨찰산 양쪽 골짜기의 물이 쌍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절 앞에서 만나 우항천을 이뤄 의신저수지의 수원으로 의신면 면민의 젖줄 역할을 다한 후 의신포에 이른다.
사상마을로 통하는 도로는 옛날에는 면소재지인 돈지 마을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신작로와 진도읍에서 성죽굴로 가는 속칭 ‘절재’ 산길과 ‘왕 무덤 재’를 넘어 논수동을 거처 쌍계사로 진입하는 비포장 도로인 신작로가 주 도로였으나 의신 저수지가 1961년 준공함에 따라 의신면 소재지로 통하는 도로는 이용이 불능하게 되었고 생활권 또한 진도읍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은 왕무덤 재가 있는 진설~사천~향동사이 6.2㎞ 포장도로가 군도15호선으로 지정되었고 작골에서 진도읍 동외리 「가는골」 진도 공설 운동장으로 통하는 임도가 개설되었으며 첨찰산 남쪽 산 위에 「진도 레이더 기상대」가 2001년 준공되어 두목재(향동재)에서 첨찰산에 이르는 임도가 3.5m폭으로 개설 포장되어 있다.
제2장 마을 현황
사상마을의 가구와 인구는 산업화에 따라 60~70년대에 보다 살기 좋은 삶의 터전을 찾아 서울을 비롯한 다른 고장으로 이동하여 대폭 감소했으나 쌍계사 운림산방과 진도군민의 휴식처인 사천리 계곡을 찾아 많은 탐방객이 찾아옴에 따라 외지로 나갔던 고향 사람들과 외지 사람들이 생업을 찾아 들어와 살게 되어 다른 농촌 마을에 비해서는 덜 줄어든 편이다.
마을민은 59가구에 136명으로 가구당 평균2.3명이 살고 있으며 그 중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는 28농가로 밭 21.3㏊ 논 28.2㏊ 총49.5㏊의 농경지를 경작하고 있어 호당 경지면적이 1.77㏊(5,310평)로써 진도군의 호당 경지면적 1.55㏊(4,650평)에 비해 많은 편이다.
주곡인 쌀을 생산하는 논의 경작 규모는 1,000평 이하를 경작하는 농가가 10농가, 1,001~3,000평이 14농가, 3,000평 이상이 4농가로 영세한 영농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70년대까지는 모두가 농업에 종사해왔으나 지금에 와서는 28농가로 줄어들었고 상가12세대 기타 노인들만 살면서 전답을 임대해 주며 살고있는 세대가 17세대에 이르는 농촌이 되었다. 마을의 전체가구 중에 3인 가족이상이 9세대, 2인가족이 33세대 그리고 1인가족이 14세대이다.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28농가의 연령을 살펴보면 70세이상 8농가, 61~70세 8농가, 51~60세 11농가,
41~50세 1농가로 노인들이 농삿 일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을의 생산물은 논에는 벼를 심고 있으나 자갈 땅으로 미질이 떨어지는 편이며 밭에는 80년대 초까지 맥류 조 수수 콩 참깨 등을 심었으나 최근 겨울 대파와 월동배추 구기자 고추 등의 면적이 늘고 있다.
아울러 526㏊의 드넓은 산림은 예로부터 마을민의 생업의 터전이었다.
60년대초 까지 쌍계사 사찰림과 천연기념물제107호인 상록수림 보호구역을 제외하고 온 산림이 황폐할 정도로 도․남벌이 심하여 숯을 굽거나 장작 그리고 주민들의 신탄용으로 베어 벌거숭이 산이 되었다. 또한 첨찰산에는 더덕 창출 지초 우실 산모초 후박피 등 온갖 약초가 많아 겨울철 부녀자들은 약을 캐어 팔았고 골짜기마다 동백이 가득차 가을에는 동백을 따서 팔았다. 60년대 이후 산림이 좋은 자연적 조건을 이용해 박준길 최창근씨가 표고재배를 시작하였고 차츰 면적이 늘어 지금에 와서는 박원종 박만석 주대옥 박정일씨 등 대대적인 표고버섯 재배를 하여 마을의 명품이 되고 있다. 또한 꿀벌이 겨울을 나기에 좋은 온화한 기후 조건과 첨찰산 산록의 싸리꽃 등 수많은 산유화와 온갖 약초는 꿀벌의 자연 밀원이 되어 질이 좋은 ‘첨찰산 약꿀’이 생산되어 오성옥 주대옥 도훈 정한종 스님을 비롯한 양봉농가가 해마다 늘게 되었다.
마을의 관광 여건이 성숙되면서 80년대 이후 통닭집과 간이매점 등 상업에 종사하는 가구가 12세대가 되었고 주5일 근무와 국민 레저 시대를 맞아 수려한 경관과 문화 유적지를 갖인 사상 마을은 농어촌 관광의 최적지이다. 또한 마을민들이 건축 기술등을 배워 토건업을 함으로써 농업외 소득을 올리고 있다.
사천리에는 평산 申씨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하며 농토는 적은 편이지만 나무를 하고 숯을 구어 푼돈을 쉽게 벌어들이고 기와 옹기 굽는 일 등 어려운 사람들이 쉽게 터전을 잡을 수 있는 마을이어서 많은 성씨들이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도 15개 성씨가 살고있다. 무안 朴씨 8, 신안 朱씨 8, 김해 金씨 6. 진주 姜씨 5, 원주 李씨 4, 밀양 朴씨 3, 연안 車씨 2, 劉씨 3, 동복 吳씨 2, 기타 18세대가 살고 있다.
인 구(명)
가 구 수
면 적( ㏊ )
계
남
녀
계
농가
상가
기타
계
밭
논
임야
기타
136
66
70
59
28
12
17
575.5
21.3
28.2
526.0
산 업
성 씨 별( 호 )
주산물
특산물
주소득원
계
무안박씨
신안주씨
진주강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기타
미곡
표고․꿀
미곡.
상업,
건축업
15성씨
59호
8
8
5
3
6
29
되면서 80년대 이후 통닭집과 간이매점 등 상업에 종사하는 가구가 12세대가 되었고 주5일 근무와 국민 레저 시대를 맞아 수려한 경관과 문화 유적지를 갖인 사상 마을은 농어촌 관광의 최적지이다. 또한 마을민들이 건축 기술등을 배워 토건업을 함으로써 농업외 소득을 올리고 있다.
사천리에는 평산 申씨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하며 농토는 적은 편이지만 나무를 하고 숯을 구어 푼돈을 쉽게 벌어들이고 기와 옹기 굽는 일 등 어려운 사람들이 쉽게 터전을 잡을 수 있는 마을이어서 많은 성씨들이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도 15개 성씨가 살고있다. 무안 朴씨 8, 신안 朱씨 8, 김해 金씨 6. 진주 姜씨 5, 원주 李씨 4, 밀양 朴씨 3, 연안 車씨 2, 劉씨 3, 동복 吳씨 2, 기타 18세대가 살고 있다.
인 구(명)
가 구 수
면 적( ㏊ )
계
남
녀
계
농가
상가
기타
계
밭
논
임야
기타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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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5
21.3
28.2
526.0
산 업
성 씨 별( 호 )
주산물
특산물
주소득원
계
무안박씨
신안주씨
진주강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기타
미곡
표고․꿀
미곡.
상업,
건축업
15성씨
59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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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마을의 발전사
제1장 마을의 유래
사천 마을은 첨찰산 일맥(一脈)이 서․남진하여 산아래 쌍계사가 있고 그 남쪽에 남종 문인화의 본산인 운림산방이 위치하며 그 아래 냇가를 따라 들녘과 마을을 이루니 사천리 빗기내 마을이다. 첨찰산(485m)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냇가가 마을 앞을 비껴간다 하여 「빗기 내」 라 불리었고 「빗기 내」가 의역되어 사천리(斜川里)라 하였다. 사지천리(斜只川里)라 불리운 것 또한 비껴가는 냇마을이란 뜻으로 사천리와 같다. 옛 기록에는 쌍계사 절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쌍계암리(雙溪庵里)라 적힌 때가 있었고 1857년경 소치 허유 선생이 지은 ‘운림잡저’ 중에 사촌모연(沙村暮煙) 이라하여 사촌(沙村)이라 하고, 제주도에서 진도까지 찾아온 친구가 반가워 소치 선생이 지은 시(詩) 가운데 ‘군도차당유오일(君到且當遊五日) ‘촌명기득시사천(村名記得是斜川) 「그대 나를 찾아 왔으니 5일은 머물러야지, 그래 이 사천리 마을을 기억해 두지 않을 런가」라 하여 ’사천’이라고 적고 있다. 사천리는 쌍계사, 사상, 사하로 해 오다(※옥주지) 일제시대부터 50년대까지 사천1구와 사천2구로 나눠 리장을 두고 있었으나 60년대부터 사천1구를 사상, 아랫 동네인 삼밭과 논수동 즉, 사천2구를 사하로 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상 마을민의 선조들은 사상 저수지와 쌍계사 주변의「동계」 그리고「서당 골」「작골」「사구지 재」 아래 등에서 분산되어 살아왔으나 점차 양지바르고 물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현 위치로 모여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서당 골에 관란제(觀灡齌)라는 서당(書堂)터가 있고, 마을 앞 옥대마을로 넘는 산 아래에 집터 자리와 기와 파편이 나오고 쌍계사 뒷편과 그리고 쌍계사 앞 산 아래에 옹기 터가 옛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제2장 마을 조직
진도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첨찰산을 빗기내 마을에서 보면 뾰쪽하다는 느낌은 없고 장중하면서도 단정한 인상을 풍긴다. 산이 살이 많이 붙은 토체산에 운림산방 뒷산이나 둥그러운 앞산 동근뫼 갈매봉과 같이 약간의 금기(金氣)를느낄수 있게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빗기내 사람들은 타고난 천성이 중후하고 인정이 넘치는 원만한 품성을 지니고 마을민 서로간에 상부상조하면서 함께 즐거워하고 슬픔을 나누며 오손도손 살아왔다. 마을주민과 더불어 고향발전을 위해 앞장서 일해오신 마을 지도자의 노력은 마을 회관을 마련하고 마을진입로 포장과 하천정리 그리고 상수도 시설을 하였고 노인당 마련과 경로행사 등을 통해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미풍양속이 살아 숨쉬는 마을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마을 청년회와 부녀회원이 새마을 봉사대를 조직하여 관광지 마을인 마을 주변의 자연정화 활동과 대보름 세시풍속 재현 등은 빗기내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들이다.
1. 마을 총회(대동계)와 역대이장
매년 12월22일 동짓날 개최한다. 대동계는 마을의 최고 의결기관으로써 리장이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한다. 1년간의 마을의 수입금과 지출금을 보고 결산하고 새로운 리장을 선출한다. 리장의 임기는 1년으로 하다가 2001년부터는 2년으로 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이정세는 춘곡 추곡때 일정량의 보리와 벼를 금액으로 환산하여 내도록 하고 있으나 마을 기금에서 지급하기도 한다 .
주흑술(‘45) 박희선(’46-'47) 김덕준(‘48) 이상수(‘49) 박경석(’50)
박희선(‘51) 김덕준(’52) 이덕교-里書記(’52-‘54) 김덕준(‘53-’55)
박경석-里書記(‘55) 박경석(’59) 이명희(‘60-’62) 이동희(‘63-’64) 박만기(‘65)
주진옥(‘66) 양흥안(’67) 김장재(‘68) 박경석(’69-‘70) 이명희(’71-‘72)
허원형(’73) 이명희(‘74-’75) 김상호(‘76) 김장재(’77) 김상호(‘78-’79) 김장재(‘80-‘81) 김상호(’82) 김장재(’83) 주대옥(‘84-’85) 강동열(‘87-’89) 이석수(‘90-‘93) 오성옥(‘94) 주중옥(‘95) 김상호.(‘96-’98) 이석수(‘99) 주대옥(’2000) 전말심(‘2001-2002) 이석수(2003-현재)
2. 새마을 지도자
1970년대에서 80년대초에는 빗기내 마을도 새마을의 열기속에 조상대대로의 생활 모습에서 크나큰 변화를 맞이하는 시기였다. ′80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 특별지원사업을 2년 연속 지원받아 마을 회관을 건립하고 안길을 포장하고 홍수때마다 모양이 변해가는 하천을 수차 정비하였으나 하천 석축은홍수를 이기지 못했다. 당산나무 밑에 관란정 정자도 이때 건립하였는데 당시 김장재 리장이 많은 노력을 하였고 그곳의 현판은 주대옥 새마을지도자가 4반 대밭속에 있는 팽나무를 베어 현판목을 마련하고 관란정 이름은 마을 서당 이름 「관란제」에서 유래하고 당시 광주에 살고 있던 운곡 강장원이 글씨를 써 조각을 하여 걸었다. 새마을 사업은 정부의 새마을 사업비 지원금에 주민 부담금 마련과 마을민의 참여등 새마을 지도자의 노력이 큰 역할을 하였다.
박경석(‘72-?), 이명희, 주대옥, 김상호, 박만석, 주대옥(‘90-’94), 오성옥(‘95-’98), 주대옥(‘95-’96), 이희춘(‘98-현재),
3. 부녀회장․부녀지도자
경로 잔치등 마을 행사때마다 부녀회원들이 음식 마련등 솔선 참여하고 보름날 세시풍속놀이에 전국 생방송에 나올 정도로 적극적으로 마을일에 앞장서고 있다. 2001년도에 의신면민 체육대회에서 우승하는 데도 부녀회의 역할이 컷다.
이남심(‘72-?), 윤강덕(’75-‘77), 최소단, 허진심, 전말심(’88-‘01), 이춘자(’02-현재)
4. 4-H활동 및 청년회장
50년대말에서 60년대 초에는 마을 청년회가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60년대 사상 4-H회가 태동하고 강 장원에 이어 박 정석 등이 앞장서 저녁이면 회관에 모여 4-H과제활동과 4-H노래를 부르며 농촌 개발의 씨를 뿌렸다. 추석절에는 마을앞 샘축굴 넓은 풀밭 광장(지금은 하천 직선화로 냇가가 되었음)에 사상4-H회가 주관하는 사상․ 사하 주민이 참여하는 추석맞이 노래자랑을 하였다.
새마을의 열기가 식어가는 80년대말부터 다시 청년회가 앞장서 정초에는 농악놀이 보름에 세시풍속, 하루달에는 마을 체육대회 경노잔치 그리고 추석에 노래자랑등을 해서 마을민의 단합을 과시하고 있다. 2001년 의신면민 체육대회에서 축구 1위와 종합1위를 하여 박 만기(작고)씨 청년회장 때 1위를 한 후 45년여만에 얻은 쾌거로 마을 경사였다. 최근 청년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서당 훈장으로 지낸 김 영춘 선생님 사모님 댁에 상수도 시설을 해주고 수도세도 평생 무료로 하는 등 아름다운 일들을 하였다.
박만기, 주정옥, 주대옥, 강동열, 이석수, 이희춘(‘91-’95), 주지현(‘96-’98), 이석수(‘99), 김종필(’00-현재)
5. 경로당운영과 노인회장
옛 날 노인이 살고있는 사랑방이 노인당 역할을 하였으나 사랑방 문화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마을단위 노인당이 필요하게 되었고 사상 마을도 마을 회관 방에 온방 보일러 시설을 하여 노인들의 쉼터가 되다가 1999년1월19일자로 경로당 등록(25명)을 하여 연료비등 운영비 일부를 지원받아 운영하고 있다. 초대 박 종구 회장 때에는 달마다 생일 잔치를 열어 매월 그 달에 생일이 있는 노인들의 합동 생일 잔치를 해줌으로써 생일을 모르고 농삿일만 해오던 노인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경노당 개소할 때 협찬 해 주신 분은 조근환(TV/비데오) 이희춘(전화가설) 김영복(대형 선풍기) 이영자(밥상등) 가 기증하였다.
노인회를 중심으로 1981년도에 입촌한 박 종두(작고)를 중심으로 ‘효’되살리기 운동을 벌였으며 양흥안 노인회장이 이어오다 소멸 되었다.
․노인회장: 박 종두(99) 양흥안(2000) 허 원형(2001)
6. 사상마을 새마을 봉사대
2001년 5월17일 사상 마을 회관에서 발대식을 갖었다. 초대 회장은 이희춘이 맡았고 회원은 청년회원 부녀회원 그리고 희망회원으로 마을민 전체가 회원이 되었다.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운동이었다면 다시 일어난 새마을 운동은 외래 문화 속에 흔들리는 전래의 충효사상과 미풍양속을 전승하고 재창조해나가는 사업이었다. 마을일을 할 때는 새마을 봉사대 단복과 모자를 착용하였고 1차사업으로 당산제를 모시는 관란정을 보수하였다. 관란정 번와는 쌍계사 정한종 스님이 기술자까지 지원하여 해 주었고 노력은 봉사대원이 하였다. 이어서 농로확장 경로잔치 재일교포 주필연의 공적비 건립, 2002년 ‘정월 대보름 세시풍속놀이 재현’을 MBC화제집중 전국 생중계 방송을 하는 가운데 재현하였고 두 쌍의 전통혼례식을 운림산방에서 올리는 등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제3장 상부상조
1.품앗이: 모내기나 김매기 등짐 등 많은 인력이 소요되는 일을 할 때 같은 연배끼리 품앗이를 했었다. 품앗이는 품(노력)을 앗고 품을 갚는 주고 받는 관계로 함께 일함으로써 노동의 피로도 풀고 능률도 올리는 상부상조의 표본이었다.
품앗이할 때 소도 한몫을 했는데 소 하루에 성인 남자 하루의 품을 인정하였다.
특히 모내기와 김매기는 대표적인 품앗이로 모내기 날은 모내기에 참여하는 사람마다 어린애로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모밥을 먹으로 참여하여 그릇이 부족하면 감잎 등을 깔고 반찬을 놓고 밥을 먹었으며 이웃과 친척들은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행사였으나 트랙터 이앙기 등 농기계가 나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2.울력: 마을의 공동사나 이웃집 일을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서 하는 것으로 품앗이와 함께 우리의 전통적 협동 노동 방식이다. 품앗이가 품을 주고 받는 관계라면 울력은 받는다는 약속이 없이 마을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일을 하는 공동 작업이다. 집을 지울 때 지붕에 흙을 올리는 일 등을 마을민이 모두 나와 울력으로 하였다.
3.부역(賦役): 공익사업을 위하여 보수없이 의무적으로 참여토록 하는 일이다. 주로 치도사업이나 도로변 풀베기를 부역으로 하였다. 왕무덤재에서 진설리까지의 도로가 사상리 치도 구간이었으며 사하리에서 사상리간 도로가 비온 후면 자갈만 앙상하게 나와 치도 부역을 자주 하였다.
4. 부조․부주: 마을민들은 경․조사가 나면 자기집 일처럼 온 마을민들이 찾아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였다. 애환을 같이하는 가운데 서로의 정을 느끼고 푸근한 마음을 공유하였다.
부녀자들은 경․조사에 부주를 가는 데 능력과 친소관계에 따라 5되 3되 2되 짜리 대나무나 청둥덩쿨로 엮은 동구리에 쌀을 담아 부조를 하고 쌀 동구리 위에 소주병을 얹기도 하였다. 혼가나 상가집에서는 떡과 전 묵 그리고 고기 등 장만한 음식을 동구리에 담아 보낸다. 부주 동구리에 담긴 큰 떡과 찰 떡을 화로 불에 구어 먹는 맛이 일미였다. 부녀자들의 동구리 부주와는 별도로 남자들도 찾아가 부주돈을 내고 내외간에 안안팎 부주를 한다.
5. 계(契․稧): 우리나라 어느 지방에나 있는 것처럼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돕는 모임이다. 같은 나이끼리 동갑계, 가까운 사람끼리 형제계 등이 있으며 특히 상을 당했을 때 상여를 치루는 상도계는 대대로 이어지는 사상 마을의 대표적인 계로써 큰 상도계와 작은 상도계가 있다.
가.큰 상도계
일제시대인 소화 6년에 조직했으며 창립 당시 계원은 김준홍 이장암 김재홍 이덕교 최동윤 박봉근 김영춘 이병호 이덕설 박삼암 허윤대 이상술 이장중 강태성 진흥삼 박준길 허 진 김복만 주예성 주필연 代주필진 임문주 김준순 이었다.
상여집이 냇가 돔바지(2반)앞 수부장 논 가운데 돌담 위에 있었으나 논을 정리 하면서 무등 작은 상도계 상여집이 옆으로 이설 하였고 1988년 마을 청년회에서 상여를 쇠파이프로 맞추면서 나무상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청년회의 상여를 큰 상도계와 작은 상도계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 작은 상도계
1972년 12월에 조직했으며 창립당시 계원은 박두주 양흥안 주지율 차형원 유남열 이인춘 강기술 박정돈 박경석 이서운 이문교 박복석 한 개암 허원형 이남술 주필대 주대옥 강동열 강영규 강호준 유신기 이진희 박정일 강보금 이재갑 오동종 주정옥 차우진 등 28명이었다 1985년에 김영봉 박종두가 들어와 살게되어 가입 하였다.
제4장 마을민 교화
1.서당
첨찰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수없이 들 가운데를 이리저리 낮고 지질이 약한 부분을 헐거나 깊게 패이면서 변천하여 마을 전답의 토심은 대체로 자갈로 이루어져 빗기내 사람들은 이곳의 전답을 얼멍치 땅이라고 한다.
산골 분지형 들판에서 경지면적이 영세할 뿐 아니라 농작물의 소출까지 적어 생활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사상마을의 조상들은 서당을 열어 자녀들에게 삼강오륜과 한학을 가르쳐 농삿일을 하면서도 사람의 기본 도리를 하도록 하였다.
특히 조선조말 우리나라 3대 한학자이며 진도 고을의 최후 유배자인 무정 정 만조(鄭 萬朝 1858 ~ 1936)가 소치 선생의 아들인 미산 선생의 청에 의해 이 마을 서당 선생이 되어 주민들을 교화함으로서 향학열을 불태우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미산은 무정과 같은 당대의 대학자가 접도에 유배생활을 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당시 진도군수에게 청을 넣어 훌륭한 학자를 접섬에 두기가 아까우니 나와 가까이 지내며 후학들을 가르치게 해주기를 청하여 무정은 소치집이 있는 의신면 사천리 아랫동네에서 빗기내 마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당 선생이 되었다. 빗기내 서당 이름은 관란제(觀瀾齊)라 하여 흐르는 물의 순리를 깨우치는 뜻의 교훈적인 이름이었다. 무정은 사천리에서 살면서 향동 할머니(경주 이씨)를 현지처로 맞아 드리게되고 정 인용(鄭 寅庸)이라는 아들까지 낳게 된다. 빗기내 산골에서 서당을 하고 있던 무정은 다시 소전 손 재형의 조부이며 천 석이상의 추수를 하던 부호 옥전 손 병익의 청에 의하여 진도읍 사정리 소전 집 사랑채로 옮겨 「자유당(自由堂)」이라 이름한 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지도하였는데 이때부터 어린 소전 손 재형이 학습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무정은 「자유당10경」을 지어 눈 개인 철마산, 해창의 낙조, 성안의 아침저녁 연기, 바위 냇 고랑의 빨래하는 여인, 쌍계사 뒷산의 흰구름 등 진도읍 주변의 아름다운 모습을 은파유필에 적어 남기고 있다.
진진진진진아ㅓㅣ진진지니니니니니ㅣ니니니니니니니니니wlswlslslsllslslslkkkkk도읍 사정리 삼성사 뒤편 속칭 바우냇 고랑 옛 우물(岩泉) 옆 바위에 「茂亭」「恩泉」이라 새겨져 옛 자취를 생각하게 한다.
의제도 어렸을 때 사천리 미산집에 찾아와 그림과 글씨를 익혔다. 남농 허건 또한 아버지 미산을 통해 어렸을 적부터 무정의 영향을 받았다. 소치는 생전에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도회지에 나가 살아라”라고 했다. 이 때문이었던지 미산 선생은 빗기내 골짜기를 떠나 강진 병영에 살다가 목포 유달산 자락으로 이거 하였다. 무정과 남농은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왕래하였고 남농 이라는 호도 무정이 내려주었다. 남농이 운림산방에 할아버지인 소치 기적비를 세우기 위해 일찍이 비문을 동래 정씨로 무정과 인척인 위당 정 인보(1893~1905?) 로부터 받아 운림산방을 복원할 때 「소치 허공 기적비」를 새워 남긴 것으로 볼 때 소치 집안과 진도 유배 생활가운데 맺은 무정 집안의 교분이 아닐까?
우리나라 3대 한학자의 한 분인 무정과 같은 대 학자가 산골 빗기내 서당 훈장으로 마을민을 교화했기에 한학이 어느 마을 보다 뛰어났고 그 뒤를 이어 송계 김영춘 선생이 이 봉춘댁 행랑채등에서 서당을 열고 한학을 전수하며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송계 김영춘 선생의 공적비가 항냇가 입구에 세워져 있다.
관란제 출신인 지원 박 제현, 운곡 강 장원이 우리 나라 화단의 거목으로써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2. 야학과 연극
해방이후 진도중학교 1회인 주윤옥 박병주 이명희 등이 주축이되어 설날이나 추석절에는 연극을 꾸며 마을민 위안 공연을 했으며 60년대초까지 주정옥등의 연출아래 마을 청년들이 모두 공연에 참여하였다.
6.25동란이후 마을마다 「성인교육」이라 불렸던 문맹퇴치운동으로 야학이 전개되었다.
사상마을에서도 1951~1952년경 마을 부녀자와 청년들이 낮에는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밤이면 공회당에 모여 한글과 샘본을 배우는 야학이 실시되었다. 빗기내 야학 선생님은 목포 해양고등학교를 졸업한 박 병술 선생과 이 두교 선생이었다. 당시 분필등 학용품은 의신국민학교와 의신지서 등에서 얻어왔고 램프불 석유는 방앗간 기름을 이용하였다.
3. 학교
4㎞가 넘는 의신 국민학교를 다녔으나 50년대말에 거리가 먼 관계로 사상분교를 두어 1~3학년 학생들은 마을 회관에서 공부를 하였다. 사상분교때 선생님은 의신면 칠전리 출신인 박정조 선생님이었다. 1961년에 사상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진도 국민학교로 다니게 되어 사천리는 학구와 농협등 모두가 진도읍의 생활권으로 변하게 되었다.
※학생현황(2002년7월 현재)
계
대졸
대재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
영아
56
13
6
4
4
19
5
5
4. 태권도 도장
해방 후 마을에서 박병술이 목포 해양고등학교를 나와 해군에 입대하더니 이어서 이두교와 강영기가 해군에 입대하였다. 당시 해군 마도로스 복장을하고 휴가를 받아 빗기내 산골마을에 나타나면 마을민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중 강영기는 해군 생활중에 태권도를 익혀 2단을 따고 제대하여 63~65년경 밤마다 청년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태권도 소속은 무덕관 이었으며 저녁 8시~10시까지 마을 회관에 모여 태권도의 기본형과 호신술 대련 등을 하였다.
※도장 원생들- 박만석 최석 주대옥 김장재 박정돈 강진준 박정민 박점룡 박정관 유신기 이양교 허일환 진석춘 이진희 박정석 이석수 강호준 박윤기 차재철 강동열
박정욱 등 온 동네 청년들이 배웠다.
제5장 생활문화의 변천
빗기내 마을도 60년대까지는 마을사람들을 중심으로 자급자족하는 전통적인 생활이었다. 온마을 주민이 농삿일로 생업을 유지해오며 살아왔으나 기름짜는 일은 강월인, 솥을 때우는 일은 허문찬 허수찬 형제, 방아찧는 일은 박두주, 물건의 유일한 운반 수단인 구루마 끄는 일은 박 두주 진만수, 비석 등 석물(石物) 은 박 경석씨 아버님, 두부집은 김태중 어머님. 지게 제작은 유 복산 아버님 청둥덩쿨 동구리를 예쁘게 엮는 일은 박창길 오필만 상여나 상을 만드는 일은 여운암 그림은 박삼기(제현) 강장원 그리고 가정에 우환이 생기거나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정문 읽는 일은 이진철 할아버지가 도맡아 하는 등 온 마을민이 기능에 따라 분업을 하면서 마을 공동체 생활을 해왔다. 비가 오는 날이나 농한기에는 산에 자라는 청둥넝쿨이나 짚으로 동구리 산태미를 엮고 밤에는 사랑방에 모여 새끼를 꼬면서 오손도손 살아왔다.
.1.진입도로
진도읍에서 사천리로 들어오는 도로는 비만 오면 마을을 둘러 싸고있는 골짜기에서 많은 량의 물이 도로를 냇가로 변하게 하여 자갈밭이 되어 사람은 물론 자동차 자전거 통행이 불편하여 치도 부역을 자주 했었다. 1982년에 새마을 농로확장 사업으로 도로가 확장되고 1987년에 포장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 입구에 큰 다리가 50년대 초에 당시 면의원 이었던 박희선 등의 노력으로 무지개다리 즉 쌍홍교로 가설하였으나 50년대말 큰비가 와서 유실되고 이후 철근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지게 되었다. 쌍계사 계곡에서 내려오는 하천을 가로지르는 흙 다리가 벅수굴 위에 있었으나 비만 오면 떠내려가던 중 재일교포 주 필연씨께서 다리 가설비를 지원하여 1970년에 콘크리트 다리를 가설하여 이용해오다 새마을사업과 하천정비 사업으로 새롭게 다리를 놓았고 주필연씨의 고향사랑 마음을 적어 다리 옆에 2001년 5월16이 공적비를 세웠다. 냇가 돔바지 앞의 다리는 오랫동안 징검다리로 건너 다녔으나 90년대말에 하천정리사업과 함께 철근콘크리트 다리로 놓았다.
마을 입구 항(項)냇가는 비가 올때면 다리를 걷고 의신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상급생이 어린 동생들을 엎어 건너 주면서 건너 다니던 곳으로 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흄관을 이용한 세월교로 놓았으나 2001년 하천정리를 하고 철근 콘크리트 다리를 놓아 온 마을민의 숙원을 해결하였다.
2.지붕개량
1970년대 초반 새마을 지붕개량 사업으로 정부의 융자금을 지원 받아 지붕개량을 시작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스라브 건물이 하나 둘씩 건립하여 지금은 약 60%가 콘크리트 슬라브 주택으로 변했다.
3. 시장 보기
과거에는 절재를 넘어 진도읍 장날(2일,7일)은 온 마을민이 시장을 가고 어린애들은 어머니 장(場) 마중을 절재까지 가는 낭만도 있었으나 경운기가 들어오면서 왕무덤 재를 넘어 다니다 도로포장에 이어 버스가 다니면서 이제는 버스편을 거의 이용하고 있다. 지금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진도읍에 농협연쇄점 시장 대형마트 등 읍내에 나가 필요한 물건을 사오고 있다.
4.식수
빗기내 이름처럼 냇가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고 냇가에 옹달샘을 파서 식수로 이용해 왔다. 쌍계사는 절 옆 냇가에 절샘이 있는 데 첨찰산 정상으로부터 물이 나온다고 전해 왔으며 동계샘 냇가 돔바지 샘 3개소 샘축굴샘 당산나무밑 둠벙샘 항냇가 샘 등 하천을 따라 많은 샘들이 있어 물동이로 부녀자들이 물을 길러와 부엌에 큰 물동이에 가득 물을 채워 놓고 이용하였다. ‘70년대 이후 일부 가정에 우물을 파서 두레박 또는 도르레를 이용하였고 ’80년대 이후에 펌프 모타를 시설하였으나 1996년경 간이 상수도를 전 가구를 대상으로 시설하여 물의 사용량에 따라 물세를 내면서 이용하고 있다.
5. 연료 및 난방
진도에서 가장 산림이 좋은 마을이나 옛날에는 모든 가구가 온돌 난방으로 오직 나무를 이용함으로써 첨찰산은 빗기내 뿐 아니라 진도읍을 비롯한 주변마을의 시초 공급처로 헐벗은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일제시대에는 숯을 고랑고랑마다 굽고 장작을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갔다. 해방후로도 김 장수(김 인규 부친)씨가 쌍계사 윗쪽 500m지점에 집을 짓고 첨찰산 일대의 장작과 숯을 수집하여 목포등 도시민의 신탄재로 실어 갔으며 이후 삼선암에서 절고랑사이에 속칭 「겜마」를 이용해 나무를 운반하였고 또한 「딸딸이」가 절 뒷산과 정삼이 절터등에 설치되어 산 정상에서 산 아래까지 쉽게 나무를 운반하였다. 늦가을에는 겨울 월동을 위한 철나무를 집집마다 해서 높다란 베눌을 눌러 놓고 겨우내 사용하였다. 농한기에 용돈 마련을 위해 목대기와 장작나무를 해서 새벽녘에 진도읍 네거리에서 큰샘사이 ‘나무거리’에서 나무를 팔아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여 나무장사가 농업외 소득원이었다. 70~80년대에 석유곤로와 더불어 사용하였고 90년대들어 보일러 난방이 되고 개스를 이용한 취사를 하고있다.
6. 전기 불
사천리에서 표고 사업을 하였던 최창근씨가 밧데리를 전기불을 켠 것이 최초의 전기불이었다. 그후 100볼트 전압을 불을 켜다 220볼트로 승압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7. 전화
1970년대 중반에 새마을 전화라는 이름으로 마을에 1대씩 가설되어 당시 새마을 지도자였던 박만석씨댁이 취급소였다. 밧데리가 두 개 달리고 수동으로 돌려 교환원 아가씨를 통해 전화가 연결되어 통화했다. 이후 1985년부터 자동전화가 보급되었고 1988년부터는 모든 가구가 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수동식 다이얼에서 기계식으로 전자식에서 화성전화기 시대로 급변하였다.
※농기계와 문화기기의 유입(2002년7월 현재)
품목
수량
처음 사용
품목
수량
처음 사용
콤바인
4대
강동열
트랙터
4대
이석수
이앙기
9대
경운기
15대
차형천
자동차
20대
이희춘
오토바이
11대
강동열최석순
자전거
6대
이덕준
T V
75대
양흥안
라디오
40대
허원형(‘64)
유성기
-
박정현
제6장 마을 공동재산조성 및 관리
1.마을 회관: 사상마을 회관은 사천리 210번지(박 병창 주지현댁 사이)에 목조초가 20평규모로 야학과 의신분교 그리고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어 왔으나 동네 가운데 위치해 시끄럽고 민원이 많아 임회면 장구포 사람에게 매각하고 그 후1981년에 대통령 특별 지원 사업비 250만원을 지원받아 콘크리트 스라브조 단층 건물로 지었다.
이후 90년대말에 내부를 개조하여 노인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2.부녀회관(구, 마을 구판장)
마을 회관옆에 있는 구판장은 1998년 올가 태풍때 지붕이 파손되어 보상비를 받아 골조를 제외하고 전면 개수하여 마을 전체의 큰 일을 치를 때 음식을 준비하고 부녀회원들의 모임의 자리로 활용하고 있다.
60연대부터 마을 구판장운영을 부녀회원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집에서 가게를 하다가 구판장을 지어 임대하게 되었다. 구판장은 연말 동계때 입찰하여 1년 기간으로 임대하였으며 물건값은 읍내 가게와 동등한 가격으로 결의하여 지키도록 해왔다.
마을 구판장운영과정에서 물건값문제, 놀음판, 그리고 주정꾼이 많이 생겨 난동을 부리는 등 문제점도 많았지만 농삿일을 하고 주막에서 동네 사람들과 한 사발의 막걸리는 정을 나누는 자리이고 피로를 푸는 자리였다.
매년 12월 22일 마을 대동계에서 다음해 구판장 운영 입찰을 하였고 낙찰자는 동계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술과 음식을 한턱내어 잔치 판이 벌어졌다.
그동안 구판장을 운영했던 마을민은 박만기모친, 강남규 오필만, 김상호, 이인춘, 주달호, 주신순, 김진삼, 이남술, 전말심, 최석순, 유남열, 김귀복씨이다.
3.마을 방앗간
방앗간이 있기 전에는 집에서 절구통에 찧어 먹거나 진도읍내까지 이고지고 가서 찧어왔다. 보리타작은 원동기를 이동시켜가면서 작업을 해왔다. 박두주씨가 시작하여 강대홍 이상수씨가 이어 제비뽑기로 순번을 정해 보리타작을 했다.
1969년도에 현 마을 회관옆에 공장을 짖고 원동기보다 약간 큰 기계를 도입해 입찰을 하여 고군면 오일시 거주 허문창씨가 하다가 청룡리 이윤영 이남재 만길 김진삼 청룡리 이남술씨가 오래 동안 하다가 문을 닫았다. 입찰기간은 1년으로 하다가 2년으로 했으며 구판장과 함께 마을 수입금으로 마을 운영비로 썼다. 경운기가 들어오면서 방앗간운영이 어렵게 되었고 입찰에도 응하지 않아 마을의 흉물로 변하였고 그 옆에 마을 회관을 지은 후 1989년도에 철거를 하고 그 자리에 파고라 쉼터(효친회 박종두 기증)가 조성되었다.
4.마을 창고
박만석씨가 새마을 지도자 당시에 새마을 사업비 500만원으로 마을 회관 위에 지었다. 당시에는 벼와 보리 수매를 진도읍이나 돈지까지 가는 불편이 있었으나 마을 창고를 지어 마을에서 판매를 보았으며 보관료를 마을 수입으로 받게되었다. 그러나 최근 2000년부터 수매량이 줄어들어 창고가 비어있게 되고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
5.버스 승강장
항냇가 입구에 허원형씨의 논을 희사받아 1993년 3월10일 세웠다. 당시 마을 청년회에서 3년동안 매년 정월 초하룻날 걸궁 농악으로 250만원을 모아 자재를 구입하고 회원인 주지현 박순기 박정일 오동종 이봉춘등 회원들이 직접 시공하였다.
6.마을 표지석
항냇가 마을 입구에 1992년 12월 10일 자연석으로 세웠다. 날씨가 몹시 추운날 청년회원들은 손을 불어 가며 표지석을 세우고 기념 사진촬영을 하였다.
제7장 기 관
1.운림산방 관리 사무소
1986년 4월1일 남농미술문화재단에서 운림산방을 영구히 문화 자산으로 남기기 위해 토지와 건물 그리고 소장품 일체를 진도군에 기부체납 하였고 진도군에서는 1987년9월부터 운림산방관리 사무소를 두고 직원을 배치하여 관리하고 있다.
규모는 부지 12,978㎡(3,926평) 생가 19평 사랑채 14평 화실 24평 소치사당 16평 기념관 57평 관리실 16평이다.
그러나 소치 기념관이 시멘트 벽돌조 벽체와 목조기와 지붕형태로 지었으나 방습이 되지 않고 건물이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이를 2002년에 헐고 그 자리에 소치기념관(157평)을 다시 건립하였으며 그 동편 사상 저수지 아래에 진도 역사 유물관(517평)을 건립하여 명실공히 역사 문화의 요람으로 가꿔 나가고 있다.
소치기념관에는 입구동 영상실 수석․서화전시실 패키지룸이 있고 역사 유물 전시관에는 로비홀 수장고 영상실 기획․상설전시실이 있다. 특히 상설전시실은 선사 고대실, 삼별초 항쟁, 명량대첩, 유배문화, 무형문화재등 진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역사 교육장으로 2003년에 준공하게 된다.
2. 진도 기상대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산1-6번지인 첨찰산(485m)작은 봉우리에 전남 남서지방의 해상과 육상에 대한 기상현상을 조기에 탐지하고 기상재해 예방과 해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 최첨단의 진도 기상대가 1999년12월 착공하여 2001년12월14일 개청식을 갖고 업무를 개시하였다. 당초 진도 레이더 기상대라 명명했으나 2002년 6월 진도 기상대로 기관 명칭을 변경하였다. 청사 부지는 4600평이며 건축연면적 696㎡(210.9평)으로 지하1층 지상3층이다. 이곳에는 5급사무관인 기상대장(최 흥연)과 6급2명 7급3명 8급2명 9급1명 기능직1명 청원경찰2명등 12명이 기상 관측 업무를 하고 있다. 전화061)544-1310
제 3 편 명승 및 유물 유적
제1장 명 승
사천리 비끼내 고랑은 옥주(沃州) 고을 모든 산중의 조봉(祖峰)인 첨찰산과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심상이 보아 넘길 수 없어 예로부터 그 아름다움을 시로 읊고 그림으로 묘사하는 등「옥주 20경」중 1경, 2경을 차지하고 오늘날에는 수많은 탐방객과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군민의 휴식처이다.
1. 사천 록계 (斜川綠溪)
사시 사철 맑은 물이 빗기내 고랑따라 흐르고 여름철의 녹음과 가을 단풍이 온산에 가득하니 울창한 천연수림 속에 속삭이는 새 소리와 흐르는 물 소리는 고찰과 조화를 이루어 삼복 더위에도 늦은 가을인가 의심케 하고 세월 가는 줄을 모르게 한다.
절 고랑 냇가에 발 담그고 수석에 걸터앉아 기울이는 한 잔 술은 신선이 부럽지 않고 소치 허 옹도 이 맛으로 말년을 이 땅에서 보냈던가! 티끌에 지친 한 몸을 청류로 씻어내고 한잔의 취흥으로 이곳에서 하룻밤 쉬고 나면 새 힘이 불끈 솟으리라. (진도군지에서)
2.첨찰 양홍 (尖察兩紅)
첨찰산은 산도 웅장하려니와 수많은 고랑 고랑에 봄에는 철쭉이 온 산에 가득하여 혹시 산불이 타는가 놀라며 하얀 소복이 붉은 물감이 들었는지 의심할 지경이다. 신록과 더불어 키가 넘는 진홍색 철쭉꽃 속에서 님과 단 둘이서 정담을 나눔도 좋거니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웅봉을 정복하여 호연지기를 만끽하고 흐르는 땀을 식혀 계곡따라 참꽃(진달래) 따먹으며 내려오니 장부다운 소풍이라 할 것이다. 가을에는 단풍이 붉은 옷으로 단장하니 난숙한 아름다운 여인인가 의심한다. 봄가을 첨찰산을 홍색으로 물들여 군민으로 더불어 늙을 줄 모르는 경승이다.(진도군지에서)
3. 운림동 10경 (雲林十景)
유명한 허 소치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순리를 따라 화려하던 생활 다 접고 말년의 안식처를 고향땅에 구하였으니 쌍계사 남쪽에 산방을 짓고 그 땅을 운림동 그 집을 운림산방이라 하였다.
허 소치는 초당을 짓고 개천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정원을 다듬어 화초와 나무를 심어서 선경을 이루고 부근의 수려한 자연을 일일이 이름 짓고 운림동10경을 읊어 작명 수여식을 올렸으니 1856년 9월 나이 49세 때의 일이다.
비봉산(飛鳳山)―첨찰산의 일맥이 구불구불 서쪽으로 서려 내려가 一洞을 차지하여 봉이 날아가는 형세이다. (절 뒷산)
보당봉(寶幢峰)―비봉산의 최고 정상이다. 집 모양으로 사방에 장막을 두른듯하고 천연의 선장이 하늘을 가리키는 듯 하다.(첨찰산)
옥순봉(玉笋峰)―산세의 큰 줄기가 자연하면서도 수려하여 연꽃이 물에서 솟아난 것 같고 죽순이 새로 솟은 것 같으니 운림동 뒷산이다.
능소암(凌宵巖)―보당봉과 옥순봉 사이에 있어 형세가 기울어진 듯 옥궤가 평상에 비껴있는 듯하여 금관을 씌워 놓은 것 같다.(얹힌 바위)
벽동강(壁桐岡)―옥순봉 아래 사람이 만든 군영 같은 데 서로정(栖老亭)에서 한칸 떨어진 곳이다. (조산)
조양암(朝陽巖)―벽동강 남쪽에 있는 데 운림산방을 지키고 있느데 한쪽을 도끼로 떨어낸 것 같아 그 곳에 햇볕이 먼저 든다. (운림산방 입구)
명경담(明鏡潭)―조양암 아래에 있는 데 사방 산의 주인이 되어 별세계가 어린 듯 맑아 유람선을 띄워 놓은 것 같다. (연못)
매화천(梅花泉)―초당에 매화나무 한그루를 얻어다 심고 石井에 물을 끌어다 담아둔 곳 (운림산방 내 양치석)
도화간(桃花磵)―수옥계(漱玉溪)의 한 지류로 서쪽으로 돌아내려 매화천으로 들어가 다시 돌아 내려가는 데 시원한 물이 三里 쯤 된다.(봉화골의 물이 운림산방 연못으로 들어오는 도랑 ※사상 소류지 시설 후 없어졌음)
홍약포(紅藥圃) ―집 뒤를 개간했는 데 양지 바르고 비옥한 곳이다. 대략 약초 삼백본 쯤 심을 수 있는 넓이다. (운림산방 뒤)
녹귤원(綠橘園)―탱자나무와 유자나무를 좋은 종자를 많이 구해 심었는 데 천주가 넘는다. (운림산방주변 밭)
고사봉(高士峰)―운림산방과 마주 보는 데 날마다 보아도 싫증이 없다.(갈매봉)
천주봉(天柱峰)―兩峰이 뾰쪽한 데 북두칠성을 바치고 있는 듯 높으면서도 든든하여 기울어지지 않는 형국이다.(덕신산)
선인암(仙人巖)―보당봉의 서편에 있는데 암석이 초연히 우뚝 서 있어서 천공을 어루 만지듯 한다.(청석 골 산 정상)
학정봉(鶴頂峰)―남방을 보니 한 봉우리가 머리를 들고 돌아보는 것이 마치 나는 학이 上天하는 것 같아 푸른 기운이 항상 구름과 함께 한다.(정삼이절터 서편 산)
화개봉(華蓋峰)―학정봉의 윗 봉우리로 위위 정정하여 日傘처럼 멀리 떠 있는 듯 진애가 부동하여 깨끗하다. (정삼이 절터)
청하곡(靑霞谷)―학정․화개 양봉사이에 있는데 산뒤에 있으므로 임목이 울창하여 창연한 기운이 있다.(기생기 고랑)
자무동(紫霧洞)―쌍계사의 북쪽이요 선암봉아래 고랑이 깊어 옛 삼선암자가 있었던 곳인데 인적이 드문 곳이다. (삼선암)
수옥계(漱玉溪)―산뒤의 발원지인데 반타석(盤陀石)위에서 물이 빠른 곳에서 採金하고 수옥하는데 폭포수와 정렴담이 거기에 있다. (봉화골)
※雲林洞 10景
□계사효종(溪寺曉鍾)--새벽에 쌍계사 종소리 들리는 것이 좋다.
□사촌모연(沙村暮烟)--석양에 사천리 사람들 밥 짓는 연기가 일제히 오름이 가관이다.
□옥순명월(玉笋明月)--고요한 달밤에 운림산방 뒷산 옥순봉을 바라보는 정경이 좋다.
□학정백운(鶴頂白雲)--맑은 날 쌍계사 뒤 鶴頂峰에 백운이 서리는 것이 좋다.
□옥계탁영(玉溪濯纓)--쌍계사 계곡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 재미가 좋다.
□하곡청초(霞谷聽樵)--청하곡 먼 고랑에서 초동의 풀피리 소리 들리는 것이 좋다.
□도간춘류(桃磵春流)--봄에 계곡에서 복숭화 꽃이 떠내려오는 물 구경이 좋다.
□귤원추향(橘園秋香)--가을에 유자 향기 그윽함이 좋다.
□경담유어(鏡潭游魚)--맑은 물에 고기 노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네.
□오강서조(梧岡棲鳥)--뜰 앞 碧梧岡 나무에 산새가 오락가락 하는 풍치가 좋다.
제2장 유물․유적
1. 쌍계사
쌍계사는 진도군에 현존하고있는 유일한 고찰로 신라 문성왕대에 도선국사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77년 이후 비가 새는 대웅전․명부전 해체 보수와 해탈문 진설당 쌍계루 관음전 복원 그리고 대 범종주조와 종각 건립 등 도훈 정 한종 스님의 정성이 담장 돌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다.
옥주의 얼(진도군,1985년 刊) 등에 의한 건축 내역을 보면,
․고려 인종7년(1129) 계월선사 중수
․고려 신종 원년(1198) 정달선사 정수암 건립
․고려 강종 원년 (1212) 웅천선사 삼성암 건립
․고려 공민왕5년 (1356) 소운선사 중수
․조선명종 8년 (1553) 중수
․조선광해군10년(1618)의웅선사중수
․1925년 용허선사 중수
․1938년 명부전건립
․1978년 해탈문 건립
․1988년 진설당 건립
․1991년 요사체 이설
․1992년 종각 신축 대범종 주조
․1995년 시왕전 개축
․1999년 관음전 복원
․2000년 쌍계루 복원
〈쌍계사 경내 건조물〉
대웅전 79.06㎡, 시왕(명부)전51.3㎡, 해탈문, 요사, 진설당, 관음전20㎡,
쌍계루121㎡, 종각9㎡,
가. 쌍계사 대웅전
진도군의 최고 오래된 건축물인 쌍계사 대웅전은 전라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121호(1985년2월25일 지정)로 건립연대는 1982년 대웅전을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의 연대가 강희 36년 정축년 즉, 숙종 23년이란 기록이 나와 정확히 1697년에 건립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약 1m가량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기단에 덤벙 주춧돌을 배치하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2간인 맞배지붕의 다포양식이다.
문의 중앙칸은 4분합이며, 양칸은 모두 3분합문인데 양편의 문은 띠살문이고 중앙칸의 문은 빗살문이다. 공포는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리고 그 위로 포작하였으며 출목수는 내외가 공히 3출목이다. 여기에서 특징은 첨차형식이 마치 석탑이나 부도의 기단부 안상에서 보인 장식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도리는 내․외목도리와 중도리, 종도리를 설치하였는데 높은 기둥을 양편에 세워 중도리를 받게 하고 그 위로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게 했다. 내부천장은 대들보 위로 동자주를 세워 우물천장을 가구하였으며 대들보가 밖으로 노출되어 있다.
나.명부전․시왕전
정면3간 측면2간의 맞배 집으로 양 박공면에는 풍판(風板)을 달고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구조는 막돌 허튼쌓기의 낮은 기단 위에 가공한 원형초석을 놓고 이 위에 원통형의 두리 기둥을 세운 3량(樑)구조이며 ,공포(拱包)는 2 익공식(翼工式)으로 아래 쇠서 위에는 연(蓮)봉이 놓여져 있다. 창방(昌枋)은 기둥머리부분에서 걸었으며 이 위에는 주간(柱間)마다 같은 간격으로 소루(小累)를 배치 하였다. 창호(窓戶)는 전면에만 띠살문을 달았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있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다. 진도쌍계사목조삼존불좌상(珍島雙溪寺木造三尊佛坐像)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제221호, 목불 3구, 1999년8월5일 지정
진도 쌍계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상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 불상은 가운데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시불을 모시고 잇는 형태이다. 목조삼존불좌상은 조성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1697년(조선 숙종 23년) 건립된 대웅전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거의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불상이다. 대웅전의 삼존불 양식이 17세기 후반에 조성되고 있는 불상들과 같은 양상을 띄고 있어 전남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 불상의 편년을 조망하는데 하나의 기준작이 되고 있다.
라.진도쌍계사시왕전목조지장보살상(珍島雙溪寺十王殿木造地藏菩薩像)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제222호, 목불, 1999년8월5일 지정
쌍계사 시왕전에 있는 지장보살상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는 보살로 민머리를 하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왕전에는 주존인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해서 현재 33구의 목조각상이 있는데, 시왕은 의자에 앉아 있으며 나머지 상들은 모두 입상으로 금칠을 하였다. 보존상태는 양호하며33구 중 4구는 후대에 복원하였다. 1993년경 지장보살삼존상을 수리하고 개금하면서 도명존자상 속에서 이 조각상들의 조성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강희5년병오(康熙五年丙午)"가 확인되어 1666년(헌종 7)에 만들었음을 알수있다. 쌍계사 시왕전의 조각상들은 17세기의 시왕상들 편년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고 각 조각상들의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조각적 양식으로 볼 때 17세기 중엽의 상들을 대표할만하다.
마. 쌍계사 동종
이 동종(銅鐘)은 쌍계사 대웅전내에 안치되어 있다. 높이 48㎝, 하대직경 46㎝로 상대에는 뾰쪽한 앙련(仰蓮)과 그 아래에는 범(梵)자 15자가 양각되어 있다. 동신 중앙에는 4면에 유두가 돌출한 4좌의 유곽(乳廓)이 배치되었고 그 아래에는 사각구획을 하고 「康熙二十五丙寅四月日□宗門人木初鑄成記施主安代....」란 글이 새겨져 있으며 그 왼쪽으로 「康熙五十九年庚子八月日雙溪寺守中□□鑄成施主記」라 명기하여 이 동종은 쌍계사에서 주조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성 년대는 1720년임을 알 수 있다.
바. 쌍계사 석탑
쌍계사 대웅전 앞에 있으며 기단은 기존 건물의 초석을 이용 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에 조성하였고 높이 211㎝이다
2. 운림산방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 제51호, 의신면 사천리 64 일원 1981년 10월 20일
운림산방은 소치 허유선생께서 49세에 낙향하여 1856년 이곳에 집을 짓고 37년간 살다돌아 가신 집이다. 이 집은 소치가 죽은 뒤 넷째 아들인 미산이 관리 하다가 큰 아들 윤대(允大)가 살았으나 가세가 기울자 아랫동네 차병림 (차철웅의 조부) 에 팔았다. 이후 연못가에 있는 집은 헐려 아랫마을 삼밭으로 옮기고 연못은 논으로 변해 버렸다. 1942년 남농은 운림산방 땅을 되사 조카인 원만(元萬)이 살도록 했다. 그후 남농 허건은 연못을 다시 파고 함석지붕으로 개량되었던 생가를 이엉을 이고 주변을 조경하는 등 옛 모습데로 운림산방을 복원하여 1981년10월20일자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로 지정 받았으며 소치기념관을 지어 소치선생의 유작과 수석을 전시 하였다.
소치(小癡) 허유(許維)(1808~1893) 선생은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칭송되었는데, 20대에 대흥사(大興寺)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워 남화의 대가가 되었다. 특히 헌종(憲宗)의 총애를 받아 임금의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으며, 왕실 소장의 고서화(古書畵)를 평(評)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고부현감(古阜縣監)을 거쳐 무과에 합격하고 관직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대표작으로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등이 있고, 『몽연록(夢緣錄)』 등의 저서가 있다.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하여 수많은 봉우리가 어루러지고 울창한 산림과 더불어 아침 저녁으로 연무(烟霧)가 감돌아 중국의 예찬(倪瓚)의 호 雲林을 따서 이름지은 것이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중도오방지(中島五方池)로 한면이 35m가량 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둥근 섬이 있고 보통 꽃이 피었다 하면 지는 데 지조있게 100일이나 피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 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했으며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 화가 중의 한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을 대치(大癡)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 하다고 소치(小癡)라 했다고 한다.
소치의 장자 허은(許 溵)은 米山이라 호하고 대를 이은 화가요. 넷째 아들 형(瀅)은 일찍 돌아 가신 형(兄)을 이어 그 호를 그대로 이어 받아 대가가 되었다. 그의 아들 건(楗)은 남농(南農)이라 호하고 당대의 명 화가로써 국전심사위원을 수년 역임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 5대를 이어온 운림산방 화맥/우물을 파려거든 한 우물만 파라
"진도의 양천 허씨들은 빗자락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
이 대단한 소문의 근원지는 남도 예향의 본산인 진도고을 빗기내 마을에 있는
운림산방이다, 내리 5대째 유명 화가를 배출한 이 산방의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당대 발복(當代發福)으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발복의 가업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근세 100년 동안 전통과 민속이 총체적으로 단절되고 해체되는 경험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 나라에서 선대가 했던 일을 손자대에 계승하는 경우는 희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양천 허씨들은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5대째 계속 화가를 배출했다. 1대는 소치 허련(소치 허련:1808-1893),
2대는 미산 허형(米山 許瀅1861-1938), 3대는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8-1987)과 그 동생인 임인 허림(林人 許林 1917-1942), 4대는 임인의 아들인 임전 허문(林田 許文 1941-현재), 5대는 남농의 손자인 허진과 같은 항렬인 허재, 허청규 그리고 동원 허은(東園 許垠 1947-현재)등으로 5대째 예술가를 배출한 집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아도 흔치 않은 사례가 진도 「빗기내」 마을에서 일어났다.
소치의 가계도
3. 상록수림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107호, 1938년(소화13년)당초지정 의신면사천리 32번지에 표석 현존, 해방후 1962년 12월 3일 지정
첨찰산(尖察山) 485m 산록(山麓)에 자리 잡은 쌍계사(雙溪寺)윗 고랑에 위치하며 한 때 상록수가 거의 사라졌으나 점차 원상(原狀)으로 돌아 오고 있다.
상록수종(常綠樹種)으로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참가시나무, 감탕나무, 종가시나무, 생달나무, 모새나무, 참식나무, 차나무, 자금우, 광나무, 붉가시나무, 모밀잣밤나무, 마삭줄, 멀꿀 및 모람 등이 자라고 있다. 낙엽활엽수(落葉闊葉樹)로는 졸참나무, 자귀나무, 느릅나무, 말오줌때, 쥐똥나무, 실거리나무, 조록싸리, 삼색싸리, 소사나무, 갈매나무, 윤노리나무, 굴피나무 및 예덕나무가 있으며 삼색싸리는 본 지역이 특산식물이며 비교적 많은 개체가 자라고 있다.
숲 가장자리에는 싸리 비슷하지만 퍼진 털이 많은 진도싸리가 자라고 또 최근에 정체가 밝혀진 돌동부(Vigna)가 이리저리 엉키어 있다. 돌동부는 진도에서는 돌팥 이라고도 하며 열매가 동부같이 생겼다. 또한 뿌리가 굵어져서 6년근(年根) 인삼(人蔘)정도 자라며 먹을 수 있다. 건조에 강하지만 남쪽에서만 겨울을 지낼 수 있다.
뒷산과 주변에서 자라던 나무들을 모두 벌채하여 자라던 상록수가 거의 사라졌으나 최근에 와서 절고랑과 운림산방에서 향동으로 넘는 우측 산록을 중심으로 상록수림의 자생지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쌍계사 뒷산과 상록수림 숲속에는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로 알려진 천연기념물 제20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있는 팔색조(※마을 사람들은 파랑새라고 부른다.)가 서식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인 이곳 상록수림의 면적은 당초 12,231㎡이었으나 1999년12월31일 사천리 산1,산2-2,산22, 산32, 산33번지 (5필지) 621,351㎡로 문화재청에서 확대 지정하였다.
4. 관란제(觀灡齌) 터
마을의 유일한 교육 시설로 서당골 아래에 위치했으며 현재는 신우대밭이 되어 있어 집터였음을 알 수 있다. 물의 흐름의 이치대로 살아가도록 교훈적인 이름이며 조선조말 우리나라 3대 한학자인 무정(茂亭) 정 만조(鄭 萬朝) 선생이 접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미산(米山)선생이 원님에게 청하여 이곳 관란제 서당에서 훈장으로 있었다.
5. 첨찰산성 터
첨찰산성은 봉수대가 위치한 산정을 중심으로 동남방의 해발460m고지와 남방420m고지를 연결한 포곡식 산성이다. 첨찰산정과 남쪽 봉우리 사이에는 계곡이 형성되어 대략 석축의 길이는 1.5㎞에 달한다, 현재 완전 도괴된 성벽은 그 유구의 성격으로 보아 협축법에 의해 쌓은 석축성으로 판단된다. 석재는 30×50㎝크기의 판석형과 막돌을 사용하였고 갈대 숲을 이룬 성내에는 지금도 절터와 와편 등이 산재되어 있다.
6. 동천암․동암(東泉庵․東庵)
첨찰산 동편으로 60m를 내려가면 첨찰산을 모두 지고 있는 듯한 큰 바위가 푸른 기운을 감돌게 하고 그 아래 샘과 석축들이 옛 절터임을 보여주고 있다.
7. 서천암(西泉庵)
첨찰산에서 봉화골 길로 100m정도 내려오면 약1㏊이 넘는 대밭이 있으니 그 가운데에 석축과 와편(瓦片)이 있고 수양버들 나무와 그 밑에 샘이 있다. 60년대
초 까지 孔씨(외무부장관과 러시아 대사를 지낸 孔 魯明씨 동생)라는 분이 초막을 짓고 살았다.
8. 삼선암(三禪庵)
쌍계사에서 절고랑을 따라 오르면 등산객의 목을 축이는 샘이 있고 첨찰산의 기운이 모두 모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곳이 원효 의상 윤민 (元曉 義相 允敏) 세 분 신라 명승의 수행처로 삼선암이라 불리운다. (沃州誌). 의상대사는 인도유학을 마치고 해동화엄종을 창전(創傳)한 분이고 원효 윤민은 학승(學僧)으로 고명하신 스님이다. 50연대까지 이곳에 담배를 심어 담배밭이라고도 불린다.
9. 원천암(圓泉庵)․정수암(淨水庵)
첨찰산 남방으로 사상저수지위 산 정상에 와편과 대밭 그리고 양애 갓이 자라니 지금도 마을민들이 정삼(샘)이 절터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추정된다.
10. 청련암(靑蓮庵)
운림산방에서 건너다 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하며 석축과 샘터가 보인다.
이곳 산록과 산 밑에 전답을 일컬어 청기남이라 부른다.
소치 선생이 지은 운림잡저에 ‘청련암 옛터가 백운(白雲)속에 있으니 바람과 빗속에 오랜 세월 지냈네, 맛이 좋은 향천(香泉=샘물)은 변함이 없으니 바위사이 핀 꽃은 가지가지에 피었네.’라 적고 있다
11. 수약사(水藥寺) 터
첨찰산 서방이라 했으니 쌍계사 서북편 정견당(正見堂) 월하당(月下堂) 부도가있는 주변에 석축과 와편이 보이니 이곳인가 한다.
12. 월하당(月下堂) 부도
쌍계사 경내에서 오른쪽(向左) 뒷편으로 산언덕 숲 속에 2기의 부도가 있다. 2기 모두 같은 석종형(石鐘型) 부도로서 좌대와 구형(球形) 탑신(塔身) 그리고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는데 1石으로 되었다. 2기중 좌측(向右)의 부도는 탑신 중앙에 「月下堂」이란 당호를 음각 명문(글자 지름6㎝)하였다.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좌대직경 85㎝, 높이 135㎝)
13. 정견당(正見堂) 부도
월하당 부도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같은 형식인 석종형(石鐘型)의 부도로서 원형의 좌대와 둥그런탑신, 그리고 보주가 1石으로 연결 되었다. 측면에 「正見堂」이란 당호를 음각(글자 지름 5㎝)하였다. 시대는 조선후기로 보인다.(좌대 직경 88㎝,
높이 128㎝)
13. 기와 굴 터
작 골에서 사하리로 가는 오른 편 언덕 밑에 굴이 있으니 기와를 굽던 자리이다.
14.첨찰산 봉수지(熢燧址)
첨찰산은 진도군의 거의 전역이 조망되는 고지인데도 수량이 풍부하여 천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잇다. 일명 봉화산이라고 불리우는 첨찰산봉수는 자연적인 암산위에 원형의 연대를 쌓았는데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30×20㎝의 자연석으로 난층(亂層)쌓기 방식에 의해 구축한 연대(烟臺)는 남북직경 9m 도서직경 8.5m 둘레 30.3m규모이다. 가장 양호한 서벽의 경우 높이 2m정도이나 그 밖의 부분은 도괴 되어 있다. 국방상 통신 수단으로 밤에는 봉화불로 낮에는 연기로 변방의 위급을 알렸으며 진도군에는 여귀산과 첨찰산이 직봉(直熢)으로써 첨찰산 봉수는 동쪽으로 헤남군 화산면의관두산(館頭山), 남쪽으로 임회면 여귀산의 봉수를 받아 해남 화원 일성산(日星山)에 중계하는 봉수였다. 조선조 세종조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종1894년에 폐지되었다.
제3장 비 석
小癡 許公 奇蹟碑 1982년10월 운림산방 경내에 손자 남농 건립
―정 인보 선생이 글짓고 김 층현 선생 씀, 손 양동 조각
溪巖 先生 朱必珠 德行碑 1972년 3월 항(項)냇가 앞 도로변에 건립
松溪 金永春 先生 功績碑 1994년 5월 7일 항냇가 앞 도로변에 건립
진도 아리랑비 1995년 8월 15일 사상 저수지위 도로변에 건립
진도의 상징 진도 아리랑 노래비, 진도 문화원(원장 박 병훈) 주관,
진도아리랑보존회5백만원, 군비30백만원, 군민성금등 38백만원 소요
빗기내 작은다리 표석 2001년 5월 18일 마을 청년회(회장 이 희춘)세움
<비문> 빗기내 작은다리(斜川小橋)
이곳 작은 다리는 조그만 비에도 절 고랑 물이 불어나
마을 사람들이 앞들로 건너기가 어려웠다.
빗기내 산촌에서 태어나 일본에 건너가
이국 땅에서 자수성가를 이룬 朱 必然선생은
마을민의 어려움을 안타깝게 여기고
다리가설비 거금을 흔쾌히 내놓으니
1970년 마을민의 숙원의 다리가 놓이고
『애향의 다리』라 불리었다.
선생의 고향사랑의 마음은 의신면 사무소에 국기봉을 세웠고
진도 소방서에 소방차를 기증하는데도 앞장섰다.
이제 이곳 작은다리를 훌륭하게 다시 건설하면서
선생의 고국과 고향을 향한 한량없는 마음을
여기에 새겨 길이 남기고자 함이다
.
2001년 5월 18일 사천리 마을민 일동
제 4 편 세시 풍속 및 전설
제1장 세시 풍속
빗기내의 세시풍속은 진도의 다른 마을의 풍속과 별로 차이가 없다. 설날 대보름 백중 추석의 비중은 마찬가지로 중요한 명절이다. 다만 쌍계사 절이 있는 마을로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초파일은 온 마을이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1. 설 날
설날에는 타향에 나가살던 자손들이 귀향하고 온가족이 한데 모여 차례를 지낸다.
집안 어른들과 동네어른들을 찾아 다는며 세배를 올린다. 세배를 받은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덕담을 들려주고 아이들에게는 얼마만큼의 세뱃돈을 준다.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윷놀이를 한다. 아이들은 예낭에는 연날리기 자치기 썰매타기 등과 같은 겨울놀이를 했으나 지금은 논에 얼음이 얼지않아 썰매는 탈 수 없게 되었다. 예전에는 한 해의 운을 본다고 하여 토정비결을 많이 보았다.
2. 뱀 날
설을 새고 나서 처음 들어오는 ‘사’일이 뱀날이다. 뱀날에는 뱀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 조그마한 종이 쪽지에 ‘黑’ ‘巳’ ‘靑龍’ 白龍‘ 등을 써 장독대나 담벼락 벽 등 곳곳에 거꾸로 붙여 놓는 풍습이 있다. 이것을 뱀지라고 한다. 이날은 긴 짐승이라 하여 새끼줄 등도 함부로 다루지 아니 하였다.
3.정월 대보름
음력 1월15일을 정월 대보름, 또는 상원이라고도 한다. 대보름이라는 이름은 이날뜨는 달이 가장 밝고 크기 때문에 붙여지 이름이며 상원이란 이름은 도교에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 오곡밥을 지어 먹으면 그 해 운수가 좋다고 믿는다. 대보름날에는 연날리기 팽돌이돌리기 밥동냥하기 우지지대세우기 쥐불놀이 내독파는 행위 줄다리기 입춘대길이라 써서 대문에 붙이기그리고 마을제인 당산제
를 모셨다. 대보름 하루전이 1월14일 농가에서는 마당에 장대를 세우고 그 둘레에 섬(가마니)과 짚단을 둘러 묶어 깃대같이 만들고 그 둘레에 수수빗자락 벼빗자락을 묶어건다. 맨 장대 꼭대기에는 팽도리를 집 식구 숫자데로 만들어 단다. 팽도리는 식구들이 무병하여 만사형통 하라는 뜻이고 수수 빗자루나 회지기 빗자루는 오곡이 풍년들기를 바라는 것이며 섬은 곡식을 담는 그릇이고 볏 짚단은 노적을 뜻하는 것으로 ‘우지지’라고 한다. 또한 立春大吉 建陽多慶 農事壯元라 쓴 깃발을 창호지에 써서 장대에 같이 단다. 이밖에도 금토뿌리기 금줄치기등 갖가지 의식을 통해 우리 조상들은 1년의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가. 쥐불놀이
저녁을 먹고 동네 아이들이 깡통을 들고 마을회관 앞으로 모인다.
빈깡통 사방에는 구멍이 숭숭 뚫리고 철사로 양쪽 귀를 길게 매단다. 그 속에는 솔방울과 감솔을 넣어 불을 붙인 다음 빙빙 돌리면 이내 불이 붙는다. 아이들은 망월이야!외치면서 밭두렁과 논두렁 마른 잔디에 불을 놓는다. 이렇게하여 쥐구멍속에 든 쥐를 잡고 마른 풀에 붙은 해충을 죽이기 위한 것이다.
나. 밥 얻어먹기
대보름날은 보리 콩 찹쌀 팥 수수 조 등 오곡밥을 지어먹는 데 이때 갖가지 묵은 나물도 함께 먹으며 이웃과 나눠 먹는다. 어린애들은 초저녁부터 집집마다 돌면서 밥을 얻다가 자시(1월14일 11시~1월 15일 01시)에 제사를 지내면서 마루 장독대 등 밖에다 밥을 차려 놓으면 몰래 밥을 둘러 먹는다. 밤 늦게까지 친구들과 숨어 있다가 참기름 친 김에 쌀밥을 싸서 따뜻한 생선국에 살짝 담가 주인 몰래 먹는 맛이 왜 그리도 통쾌하고 좋았든지!
다. 더위팔기
보름날 아침은 대답을 못하는 벙어리가 된다. 이름을 불린 사람이 대답을 하면 “내독”하고 말한다. 이것이 더위팔기인데 남에게 더위를 팔면 한해동안 더위를 먹지 않게된다고 전한다. 그래서 대답대시 “내독”이라고 먼저 더위를 팔기도 한다.
4. 당산제
마을 앞에 당산목이 있는 당산터에서 조상 대대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
마을 총회에서 화주를 정하는데 마을에서 존경받고 깨끗한 분을 추천하여 정한다. 화주는 정월 대보름 6~7일전에 당샘을 청소하고 금줄을 친다. 당샘 물을 떠 온 날부터 화주댁에 금줄과 금토를 뿌리고 금기사항을 준수한다. 금기사항에는 집안에 유고가 있어서는 안되며 산고가 없어야하고 개고기를 먹어서도 안되며 어린이나 과년한 처녀가 있는 집 또한 안 된다. 특히 화주는 부부관계를 한달여 동안 피해야 하기에 요즘은 연세가 많으신 분으로 정한다. 낮에 미리 첼(천막)을 치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촛불을 미리 켜 놓고 밤12시가 넘어서야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축관 두집사 리장 지도자와 화주가 음식을 나른다. 모든 제물은 한상 차릴 정도로만 준비하고 떡은 집에서 정성으로 만들어 솥 채 상에 놓는다.
정성드려 젯상을 차리고 양집사는 술을 올리고 축관이 축문을 낭독한다. ‘단배에 무(無) 독축’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빗기내는 단배에 축문까지 제를 모신다. 제를 모시고 나서 “광보”라고 3번 큰소리로 외친 다음 헌식을 한다. 광보의 의미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오래 전부터 행해왔다. 제관이 음복을 하고 참여한 마을민들이 음복을 한 후 당산제를 마친다.
※당산제 축문
5 하구달
음력2월1일 산에 가서 칡을 캐다 먹는다. 이날은 콩을 볶아 먹는데 콩을 볶을 때 ‘손 꺼시럼 지지자, 손 꺼시럼 지지자’ 하며 콩을 볶는다. 여름에 아낙네들이 들에 나가 일할 때 손 꺼시러미가 일지 말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6 초파일
매년 4월 초파일은 석가탄신일로 이 날은 쌍계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쌍계사에는 법요식을 봉행하고 제를 올린다. 신도들은 낮에 절에 가서 제를 올리고 등(燈)공양을 하고 쌀(돈)을 올린다. 절 마당에 줄을 메고 연등을 달고 축원한다. 절 앞에는 밥집을 겸한 주막이 들어서고 윷판이 곳곳에 벌어져 난장이 펼쳐진다. 빗기내 마을 집집마다 고모 이모 사돈 친지들이 찾아와 며칠 전부터 술을 담그고 음식을 마련하여 접대한다.
7 복 날
하지에서 세 번째 경일(庚日)이 초복, 네 번째드는 경일이 중복,그리고 입추로부터 첫 번째 경일이 말복이다. 하지후 네 번째 경일과 입추후 첫 번째 경일이 20일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월복한다고 하여 더위가 길어 진다. 연중 더위가 가장 심할때가 삼복 더위이다 자식들이 음식을 장만하여 ‘복다름’을 한다.
이때 몸을 보신하는 개장국 또는 삼계탕을 이열치열로 먹는다. 이날 참외를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는다 전한다.
8 유두․유둣날
음력 6월15일은 유두라고 하는데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에서 나온 것이다. 이날 동쪽에서 흐르는 맑은 개울에 가서 머리 감고 목욕하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동이 청(靑)이고 양기가 가장 왕성하기 때문이다. 이날 유두국수를 먹고 햇감자도 먹는다.
9 백중
음력7월15일을 백종 또는 망혼일 이라고 하며 불가에서는 이날을 ‘우란분재일’이라고 한다. 이 날은 집안일을 돕는 일꾼들에게 하루를 쉬게 한다하여 머슴날이라 하였다. 백중날을 전후하여 농삿일이 거의 끝나 호미를 씻어 둔다고 하여 ‘호미씻이’한다고 한다. 60년대까지 보릿가루를 반죽해 소다와 당분을 친 보리빵을 하거나 생활이 어려운 집은 개 떡을 해서 먹기도 하였다.
10 추석
추석은 한가위 중추절 가배일등으로 불리어지는 대 명절이다. 추석에는 외지로 나갔던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햇곡식으로 음식을 장만하고 조상에게 성묘한다.
가.벌초
추석전에 벌초를 하는데 음력7월에 주로 행해졌다.
나.송편
추석 차례 상은 부녀자들은 모두 모여 앉아 햇곡으로 송편을 빚고 남자들은 배병을 걸고 전을 부치며 갖가지 햇과일 그리고 술을 담아 정성스럽게 차례를 지낸다. 저녁이 되면 친척들과 이웃이 모여 정담을 나눈다.
다.강강술래
강강술래놀이는 마을에 큰 마당이 있는 집 마당을 택하여 행하는데 마당 임자는 그날 음식을 대접한다. 어른들은 마루에 앉아 추석 술잔을 나누고 부녀자들은 2~3인의 매김소리에 맞춰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밤이 가는 줄 모르고 뛰논다. 남자들도 끼어들어 함깨 원무를 돌기도 하고 어린애들은 목고실 때쪽을 따서 강강술래판에 몰래 던지며 시샘을 한다.
라.성묘
고향을 찾은 친척들과 모두 모여 조상들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한다.
11.시제(時祭)
10월 상달아 되면 시제(時祭, 時亨)을 모신다.
여러 대의 조상들을 함께 대수별로 합사(合祀)로 모신다. 집안에 따라 대표되는 산소를 선정해서 일가친척 노소 없이 모여 제사를 모시거나, 산소에 가지 않고 이른 새벽에 집안에서 모시기도 한다. 시제를 모신 후 음식을 나눠 먹고 떡과 달걀 사과 포 등을 나눠서 본과를 만들어 어르신이 계시는 집에 보내고 나머지는 참여한 사람 수에 따라 고루 나누어준다. 어린애들이 모처럼 과일 맛을 보는 날이다.
제2장 마을에 얽힌 전설
1. 사명대사 첨찰산에서 도(道)를 통하다
조선조 유정(惟政)스님은 자(字)는 송운(松雲) 호는 사명당(四溟堂)이요 속성(俗姓)은 임(任)씨로서 풍천인(豊川人) 이었다. 금강산 묘향산등 명산을 찾아 고행과 수행에 바쁘더니 1587년경에 진도 첨찰산 상봉에 있는 동암에 이르러 머물렀다. 사명당이 첨찰산에 오셔서 수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도를 배우러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때마침 춘 삼월이었던지 정원에 활짝 핀 살구꽃이 하루 밤의 소낙비에 모두 떨어지고 어제의 화려 찬란했던 시절은 어느 때의 꿈이련가? 유정은 여기에서 인간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제자들에게 「어제의 피던 꽃이 오늘은 가지가지 허망할 뿐이로구나!」덧없는 인생이 하루살이와 같아서 아까운 세월만 헛되이 보내니 실로 가련하기 짝이 없다. 너희들도 각기 영성(靈性)을 갖추었으니 영성으로써 인간진리를 깨달아라. 하며 석가여래는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 사람의 배꼽 속에 있는 것인데 다른데서 구하려고 애를 써서 세월만 보낸단 말이냐? 하고 불교최고의 진리를 설명하였다. 이리하여 제자들도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모두 흩어지고 홀로 유정(惟政)만이 진도명산 첨찰산에서 좌선에 들어가 무아의 경지에 들었다 한다. (大東奇聞券之二 惟政敬之如佛條, 沃州誌)
2.무안박씨 빗기내 입촌 이야기
조선조 초에 진도를 설군(設郡)한 신곡(薪谷) 박 근손(朴 根孫) 공의 9대손인 태우(泰祐) 공은 아내 파평 윤씨(坡平 尹氏)와 지산면 인지리에서 살다 세상을 이별하였는데 슬하에 외아들이 있었으나 시름시름 몸이 약해져 자칫 대(代)가 끊길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윤씨 할머니는 아들의 건강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오던 중 어느 날 애타는 마음으로 문복(問卜)을 하였는데 큰 산에 공(功)을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윤씨 할머니는 족보와 이삿짐을 싸들고 아들과 함께 옥주 제1영봉(靈峰)인 첨찰산을 찾아 산약(山藥)으로 아들의 몸을 돌보면서 지성(至誠)으로 자손이 번창하기를 기원하였다.
이후 아들 지령(智齡) 공이 날로 몸이 회복되고 장성하여 상춘(尙春)을 낳고, 상춘(尙春) 공이 영윤(永允), 영달(永達), 남룡(南龍), 영명(永明) 4형제를 낳아 모두가 기골장대하여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가세를 일으키니 빗기내(斜川)마을 무안박씨(務安朴氏) 가문을 이루시었다.
훗날 윤(尹)씨 할머니는 『篤賢女』로 기록에 남아 빗기내 산록에 잠들어 계시다.
3.당산제의 영험담
빗기내 당산제를 모시던 당산목은 수백년이 된 팽나무로써 100여년전에 고목 밑 부분이 썩어 바람에 쓰러져 고사 되었다. 썩어 있던 팽나무에서 버섯이 나와서
최 석씨의 할아버지이신 최 광윤(당시 30세)씨가 그 버섯을 따먹고 정신이 이상해져 ‘버섯 버섯’하고 다니다 돌아 가셨다. 그 자리에 다시 팽나무가 자라나 그 당산목에 제를 모신다. 그후 관란정을 1981년 9월5일 이곳에 지어 당산제를 모시고 있는데 관란정을 보수하면서 여기에서 나온 판자며 나무를 가지고 간 사람들은 피해를 보아 당산제에 대한 영험담으로 전해진다.
4. 최후의 유배자 정 만조 선생과 경주 이씨의 사랑
한말 우리나라 3대한학자인 무정 정 만조가 접도에 유배오자 미산은 당시 진도군수에게 청을 넣어 빗기내 마을 서당인 관란제(觀瀾齌)에서 훈장으로 미산과 가까히 살게 되었다. 서울의 가족을 떠나 외로웁게 살고있는 무정은 과부인 경주 이씨를 만나 서로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작은 아들 정 인용(鄭 寅庸)을 낳았다. 1907년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곧 사면이 내려 12년간의 진도 유배가 풀려 상경하게 되었으나 경주 이씨는 빗기내에 남아 서울로 가신 서당 선생님을 그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진도의 최후 유배자의 현지처(現地妻)이기도한 경주 이씨의 무덤은 마을에서 ‘향동 할머니의 묘’라고 불리우며 진도 아리랑비‘에서 첨찰산을 오르는 길목에 잠들고 있다
(비문ː전면― 孺人 慶州李氏 之墓
옆면― ‘子 鄭 寅庸’ ‘管理人 李 長中‘
5.소치 선생 헌종대왕 용안(龍顔)에 먹물 떨어뜨린 이야기
소치는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하였고 그림도 산수를 비롯하여
화조(花鳥)․ 절지(折枝) 못할 것이 없는 데다 특히 목단(牧丹)은 일품이었다. 얼마나 훌륭했으면 헌종대왕께서 친히 손을 잡았다고 한다. 하루는 소치가 헌종 대왕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다 그려놓고 얼떨결에 먹물이 초상화의 임금님 얼굴에 떨어져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데 임금님께서 보시고 미소를 지으시면서 내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뒤로 알고 보니 임금님의 이마에 숨겨진 점이 있었던 것이다
6. 빗기내 나뭇꾼이 화가 소미산(小米山) 된 이야기
소치 선생은 큰아들 대미산(溵)을 지극히 사랑하여 화법을 가르쳤으나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어려서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얼굴이 얽은 넷째아들 형(灐)이는 날마다 지게를 지고 나뭇꾼이 되어 첨찰산을 오르내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루는 산에 나무를 한 짐 해 가지고 와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화실에 화선지가 넓게 펼쳐 있었다. 형(灐)이는 화실에 들어가 그동안 어깨너머로 본 솜씨를 내어 붓에 먹을 듬뿍 찍어 모란을 그려보았다. 소치가 외출을 하였다가 화실로 돌아와 보니 묵모란이 제법 그려져 있어서 제자인 남전이 그린 것으로 여겨 칭찬을 했더니 사실은 형(瀅)이 그린 것이라 듣고 크게 놀라 ‘내가 막내아들을 너무 소홀히 했구나.’ 크게 후회하고 이후부터 형(瀅)에게도 그림을 가르치게되고 호도 미산을 물려받게 하여 소미산(小米山)이 되어 소치대화맥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게 되었다.
7. 첨찰산 호랑이가 사람 잡아간 이야기
빗기내 마을은 진도 섬 중의 산골마을로 산림이 울창하여 많은 산짐승이 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1880년경) 8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날 밤, 아랫 동내에 사는 차 형천이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가족들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잠이 들었는데 호랑이가 집 마당에까지 들어와 자정이 지나 잠들어있는 할머니를 물어 비명을 지르자 온 식구가 질겁을 하고 일어나 소리를 지르자 호랑이는 물고있던 할머니를 담장 너머로 던지고 달아났다. 할머니는 담장에 얹혀 구사일생으로 생명은 구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엉덩이에는 호랑이 물린 흉터가 돌아가실 때까지 남아 있었다.(주정옥의 할아버지 주필주의 증언)
8. 멧돼지 잡으려다 멧돼지에 물린 이야기
1969년까지 첨찰산에는 멧돼지가 있어 산중 밭은 멧돼지 때문에 경작하기가 어려웠다. 산아래 전답 또한 멧돼지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산과 전답 사이를 담장을 쌓아 멧돼지가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고 곳곳에 담장을 트고 거기에는 2m깊이의 함정을 판 후 함정에 나무를 걸치고 풀을 덮어 멧돼지가 내려오다 함정에 빠지도록 하였으며 지금도 쌍계사 앞 논 위에는 함정과 담장이 남아있다.
지금부터 50년전인 1953년 마을에 살던 당시 25세였던 주필진(1928.9.16일생)은 마을 뒷산인 평평바위 옆 속칭 ‘부지둥’ 산골 논 위에 멧돼지 덫을 놓았는데 어느날 아침 덫을 보러 갔더니 새벽녘에 멧돼지가 덫에 걸렸는데 가까이 가니 멧돼지는 사람에게 달려 들어 몽둥이로 치고 또 쳤다. 그 때 멧돼지가 사력을 다해 힘을 쓰자 덫을 묶은 철사가 떨어지고 성난 멧돼지가 쫓아왔다. 놀라 엉겁결에 참나무로 올라가는데 멧돼지가 허벅지를 물어 버렸다. 멧돼지 잡으려다 큰 화를 입은 주필진씨는 상처를 치유하느라 큰 고생을 하였다.
9. 빗기내 처녀 박 종숙이가 인간문화재 되다.
빗기내 산골처녀 박 종숙은 아버지 박환길과 어머니 박산덕의 3남3녀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하여 새타령으로 유명하였다. 20여세에 진도군 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노래에 소질이 대단하였다. 이러한 천부적인 자질은 아버지 박환길씨와 외할아버지인 박인준씨의 국악에 대한 조예와 풍류를 아는 멋스런 끼에서 나왔다.
아버지 박환길은 어릴 적 남농 허건 선생과 소꼽친구로 남농선생 생존시 농사가끝나면 여정실 도산초로 빚은 「하풍단」과 산약초를 고와 약을 내어 친구인 남농선생의 화실에서 5~10여일을 보내는 풍류객이었다. 생존시 추석이나 설날에 동네사람들이 넓은 마당에 모여 얼큰하니 술한잔이 되고 잔치판이 벌어지면 가무가 펼쳐지는데 이상수(이 부희 아버지, 사망)씨는 마당 이쪽에서 저쪽 끝으로 달리며 두 어깨를 접었다 폈다하는 학춤을 추고 박 종숙의 아버지인 박환길 공은 마당을 돌며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엉덩이 춤으로 흥을 돋우었다.
아울러 박종숙의 외할아버지인 박인준(군내면 월가리)은 당대의 국악인 이병기로부터 장구와 북을 전수받아 마을민에게 국악을 가르쳤고 시조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지낸 국악인 이었다. 이와같이 박 종숙여사의 예기는 친가의 흥과 외갓집의 국악을 사랑하는 바탕에다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진도 군립민속예술단원으로 향토 국악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고 나아가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인 강강술래 예능보유자 인간문화재 박 종숙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인정서 제506호, 2000.7.22일 인정, 문화재청)
제 5 편 지 명
〈들판〉 동계 들―운림동 앞들.
못태―쌍계사 앞 병풍바위밑의 논으로 지금은 일부가 주택이 건립 되었다.
청기남―옛날 청련암이라는 암자가 운림산방 건너편 산록에 있어 산 밑의 전답을 청기남이라 부른다.
진모시- 청기남에서부터 이야등까지 산밑으로 길게 늘어진 논을 일컫는다.
큰들․구로시―마을 앞 들판의 중심부로 큰돌 주변으로 물대기가 가장 좋은 곳이다. 일년 열두 달 물이 구렁구렁하게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는 상(上) 옥답이었다.
수부장―쌍계사 입구 쌍계교 다리 밑에서 물을 대는 전답으로 물이 가장 부자라는 뜻이다.
이(외)야등―진모시 똘의 물과 윗 사구지재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큰돌 남쪽 들.
득부(得富)들―마을앞 당산앞들. 복수굴 보(洑)에서 물대는 들판
석질(등)들―항 냇가 건너에서 삼밭사이 하천변의 넓은 들.
화장 터들―사상 저수지 유지와 아리랑 비 앞들, 옛날 화장터 였다.
절앞 들―쌍계사 앞의 밭.
뒷 들―사다리 고랑 올라가는 주변
개올―사다리 고랑 올라가는 입구주변
가리시 돌―당산나무 앞에서 물 대는 들
새 돌․무래시들―항 냇가 보(洑)에서 물을 대기 위하여 새로 만들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항냇가 다리위에 보가 만들어져 물대기가 좋고 물이 풍부하다.
〈굴․골〉 절고랑―쌍계사위에서 삼선암에 이르는 계곡으로 주변에 상록수림이 가득하다.
삼성안골―절고랑의 윗쪽 고랑으로 삼선암터가 있던 주변을 말한다.
귀생기골―의신천의 발원지인 덕신산 남쪽 계곡으로부터 사상저수지에 이르는 계곡으로 수림이 좋아 낮에도 어둑어둑하다.
봉화(애)골―진도 아리랑비에서 계곡을 따라 첨찰산을 오르는 고랑
큰탁골―첨찰산을 봉화골로 오르면서 우측 건너편의 큰 고랑.
작은 탁골―첨찰산을 봉화골로 오르면서 우측 건너편의 작은 고랑,
사들이(드래)고랑―당산나무 건너편 동근 뫼 서편 고랑으로 고랑에 있는 전답이 사다리 모양이다. 옥대 중리사람들이 절에 오면서 들락날락하였다하여 사(寺)들이라 했다고도한다.
서당골― 옛날 마을의 서당인 관란제 터가있는 곳이다.
작 굴―작약동 작골이라 불리우며 현재 사천 관광 농원이 있는 고랑
복(벅)수굴―쌍계교 다리에서 200m아래 위치하며 벅수가 세워졌던 곳이라고도 하고(박병창씨 증언), 첨찰산 양쪽 골짜기의 물이 여기서 만나 겹 치는 곳이라 하여 복수굴이라 불리었다한다.(박경석씨 증언)
샘축굴―당산 위 하천주변으로 하천변에 마을 샘이 있었다. 이곳에 연좌 방앗간이 있었으며 연좌방아는 박경석씨 댁에 보관되어있다. 샘물이 마르지 않고 쯕쭉나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ㅣ
싹박골―마을 회관 뒷산 동편 고랑으로 싹이 많이 살았다.
새생기―서당골 건너 돈님재와 용철이 있는 작은 고랑 산밑, 돈짐(님)재골
큰 개양골―서당골에서 절재골사이
절재 골―옛날 유복산 집에서 절재로 넘는 고랑
작은 개양골―마을 회관뒤에서 돈님재 사이 고랑
먹바위 골―돈님재산위에 먹바위가 있는 고랑
도적골―기생기 전나무고랑 밑에 고랑, 옛날에는 도적들이 살았다하며 도적바위가 있다.
버틍골―사상 저수지위 옛날 새 절터 뒷편, 사상 저수지위 화장터 주변을 버틍들이라고 했다.
시금골―정삼이 절터 아랫고랑
멍골― 멍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상 저수지위 전답 주변 고랑
거친들고랑―봉화골 입구 산길 북측 주변
유박굴―마을앞 큰 돌 건너편 산록
큰 골―자근당으로 넘는 윗 사구지 재 왼편 큰 고랑
사고지골―사고지재 즉, 옥대로 넘는 고개 고랑
웃 사고지골―웃 사고지재 자근당으로 넘는 고랑
청석골―절고랑을 쌍계사에서 400여m오르면 우측 산의 큰 골짜기
개락굴―사하리에서 사상리로 가는 중간쯤의 우측 산 옛날에 어린이가 죽으면 이곳에 돌(독)담 장사를 지냈다.
굴 등―사구지재 올라가는 주변
나근태 골―작골에서 논수동 ‘땅골재’로 넘는 고랑
부지등_ 팽팽바위 아래 산록으로 부도(정견당․월하당)가 있는 산등이란 뜻으로 추정된다.
〈산〉 첨찰산(485m)―점찰산(覘察山․占察山), 첨철산(첨(尖凸山) 또는 봉화(애)산이라고도 한다.점찰산은 조선 중기 옛 지도에 표기되어 있고 첨철산은 산의 형태가 뾰쪽하여 불리어진 것으로 보이며 소치 선생이 쓴 운림잡저 운림동소서(雲林洞小序)에 ‘첨철산일맥위이서거반일동(尖凸山一脈逶迤西盤據一洞‘)이라 적혀 있고 의신초등학교 교가에서도 ’첨철산 줄기 받아......’로 불리어 지고 있다. 진도군 의 최고봉 으로 산 정상 둘레에 첨찰산성이 있고 동천암, 서천암이 있으며 8만여평의 상록수림이 총생하고 있다.
수리봉(450m)―첨찰산 북서방에 위치하며 진도읍 군내 고군 의신면의 경계를 이룬다.
덕신산(401m)―기생기 안고랑과 두목재 사이의 사천리에서 보면 문필봉으로 고군면 향동리 주산이다.
가래봉 갈매봉(250m)―사상 마을 앞산으로 의신면 옥대와 경계를 이루고
비가 오지 않으면 온 마을민 이 시초를 가지고 이 산에 올라 기우 제와 함께 불을 피웠다. 비끼내 사람들이 모두가 마음이 선량하고 인심이 좋은 것은 앞산이 金山型으로 노적을 쌓은 듯하고 둥그러운 모습을 보며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북묏등,동근뫼―갈매봉 아래 둥그스럼한 산을 북 묏등, 그 아래를 동근뫼라 한다.
절 뒷산―쌍계사 뒷산.
〈재〉
돈짐(님)재. 용철―마을 회관뒷편에서 절재로 가는 중간 지점을 돈님재,그 윗산을 용철이라고 하는데 지질에 철분이 많아 용철이라 했다는 설 이 전한다.
첫 절재. 공알재. 망중절재―진도읍으로 넘어가는 옛 길의 첫 번째 재를 첫 절재, 가운데 재를 공알재, 진도읍 성죽굴이 보이는 재를 망중 절재라 한다.
웃 사고(구)지재―마을 앞들에서 의신면 청룡리 자근당으로 넘는 재를 말한다.
사고(구)지재―마을앞들에서 옥대리로 넘는 재이다.
초상재―옛날 귀생기 고랑을 거쳐 의신면 초상마을로 통하는 산길이다. 비끼내와 초사리가 혼인을 많이 했기에 많이 이용하던 산길이다.
고성재―고군면 고성에서 절고랑으로 넘는 산길이다.
두목재․두무굴재―교통이 발달되기 전에는 고군면 향동, 가계, 모사마을 주민들이 이 재를 넘어 기생기 고랑과 사상마을을 거쳐 진도읍으로 통했다.
〈바위〉
얹힌 바위―절 뒷산 정상에 곧 굴러 내릴 것 같은 큰 바위를 말한다. 산 아래에서 보면 살짝 얹힌 듯하여 금방이라도 굴러 내려 올 것 같은 느낌과 흔들흔들거리는 아슬함을 느끼게 하지만 올라 가보면 거대한 암석이 얹혀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조이게 한다.
벼락바위, 비행기바위―쌍계사에서 200m 절고랑을 오르면 200여평의
넓은 공간이 있으니 땔감이 부족하던 50연대에 이곳에 삼판 일을하는데 밥을 해주는 집이 있었다. 하루는 비행기가 절고랑 위를
지나갔고 그와 때를 같이해 우측 산 위의 큰 바위가 오랜 풍화작용에 의해 온 마을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굴러 내렸다. 온 마을 사람들은 비행기가 떨어졌다고 놀라고 올라 가보니 거대한 바위가 내려와 있었다. 이후 이 바위를 벼락바위 또는 비행기 바위라 하게 되었다.
병풍바위, 팽팽바위―쌍계사 앞 오른편산 꼭대기에 있는 바위로 모양에 따라 불리어 진다. 윗면이 깍은 듯이 평평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옆에서나 아래에서 보면 병풍을 펼친 듯하다.
삼성(선)암―절고랑 중간쯤에 샘이 있는 주변을 말한다. 원효 의상 윤민 대사의 수행처이다.
먹바위 , 앞먹바위, 탕건바위―돈님재에서 수리봉으로 오르면 논이 있는데 이곳 을 앞먹바위 그 뒤를 먹바위라 부른다.
탕건바위-먹바위 윗쪽에 있는데 탕건모양을 하였다하여 탕건 바위라 한다.
싹바위-돈님재 위쪽 싹박굴에 있는데 바위밑에는 싹이 살던 굴이 있으며 바위위에서 싹이 놀았다하여 불린 이름이다.
〈집,동리〉웃동네―사상마을의 윗쪽에 위치한 마을, 회관 윗쪽 마을
아랫동네―사상마을의 아랫쪽에 위치한 마을, 회관 아랫쪽 마을
동계―운림산방 앞 마을
무등(동)―마을 입구 마을로 어린애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동이라 했다고 한다.
작골―작약골이라고도 하며 산에 작약이 많았다고 전한다. 사천 관광농원이 있는 곳이다.
서당골― 아랫마을 뒷산 아래 마을 서당이 관란제가 있었던 곳이다.
냇가 돔바지―회관이 있는 윗마을 하천변에 있는 촌락을 일컫는다.
〈시내․방죽〉항(項)냇가―마을 입구 다리가 있는 하천으로 의신천의 우항천에서 따온 이름이다.
큰 돌―사상 저수지 밑100m 지점의 보에서 물을 대는 마을앞 큰 들 수로.
, 절앞에 포강터―쌍계사 앞에 일제시대에 소류지가 있었으나 큰 물에 유실되었다.
사상 소류지―68년 한해이후 정부의 지원과 마을민의 성력으로 1972년 12월 31일 준공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당시 농지개량조합으로 넘겨주어 수세를 농업인이 부담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농업기반공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기생기 골짜기와 봉화골 고랑이 깊어 날만 흐려도 물이 고인다고 할 정도로 수원이 좋으며 맑은 물이 항시 가득 차 명경지수(明鏡之水)를 이룬다.
몽리면적 26.7㏊, 제방 137m
물레방아가 있던곳- 사상 저수지 밑 현,우리집산장앞 냇가 옆과 항냇가 물이 샛돌을 타고 내렸던 지금에 이석수씨논과 주필대시 논 사이에 도랑에 물레방아가 있어 지금도 물레방아 골이라부르며, 못태 논중간쯤인 박경석씨 댁 북쪽 산 밑에도 물레방아가 있었다.
제 6 편 배 출 인 물
제1장 마을을 빛낸 사람들
허유(許維)ː 소치(小癡) 허유(1808-1893)는 중국의 남종화풍이 우리 화단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처음 이름은 허유(許維)이었으나, 후에 허련이라고 개명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신묘한 재주를 지니어 해남 대흥사의 초의 대 선사를 찾아가 인격과 학문을 수양하고 고산 윤선도의 후손인 녹우당 윤공제의 화첩을 통하여 화법과 필력을 터득하였다. 초의 대선사의 천거로 추사 김정희 문하에 입문한 후 극치의 경지를 이루어 그 명성이 당대에 충만하였고 일생을 고고한 선비정신으로 일관하였다. 소치의 작품중에는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를 비롯하여 작대기산수라고 하는 대담한 필치의 갈필산수와 사군자 노송도 괴석도 등의 묵화는 가히 조선조 후기의 회화사에 길이 남을 문기있는 걸작이다.
※아호인 「小癡」 의 의미는 중국 원나라의 서화가이며 남종 문인화 4대가 중의 한사람인 黃公望의 호인 「大癡」에서 따온 것으로 ‘크게 어리석은 者라 하여 자신을 낮추고 부끄러워 하여 큰 사람이 되었다’ 한다. 才藝가 절묘 (才絶), 겸손함이 절묘(癡絶). 그림이 절묘(畵絶) 즉, 三絶에서 유래한 것이다.
허 은(許 溵)ː소치의 장남, 호는 미산(米山), ‘선(先)미산’. ‘대미산’ 이라고 한다.
※아호인 「米山」의 의미는 ‘산은 본시 큰 것을 뜻하나 쌀알처럼 작지만 필요한 산이 되어라’ 는 뜻과 ‘쌀알처럼 작지만 정성과 귀한 것들이 모여 산을 이루어야 한다’ 는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허 형(許 瀅)ː미산 허형(1861~1938)은 1861년 2월 14일 소치 선생의 4남으로 태어났 다. 형의 호를 이어받아 미산(米山)으로 하여 소미산이라 부르고 있다.
어려서 천연두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뒤늦게 천부적이 그림 재주가 아버지 소치에게 드러나 큰형 허 은(溵)의 미산이라는 아호를 물려받아 2대의 화업을 계승하였으나 어려운 시기에 고난스런 화업의 길을 걸어왔다. 제2회 선전에 63세의 나이로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미산의 작품들은 묵모란 묵송 묵죽 등 주로 묵화풍에서 두드러지며 그 중에서도 묵모란은 문기가 뛰어난 작품으로 대화맥의 가교역할을 하였다. 목포 최초의 화가이기도 하며 의제 허 백련은 어릴적에 미산의 지도를 받아 화업에 입문하였다. 두아들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을 통하여 자신의 예술혼을 꽃피우게 하였다.
허 건(許 楗)ː남종화의 대가 남농 허건(1908 ~1987)은 미산 허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우리고장의 문화 발전에 누구보다도 큰공을 남긴 사람이다. 할아버지 소치의 묵향이 살아 숨쉬는 운림동에서 태어나 강진 병영을 거쳐 목포에 이사와 1927년 목포 상업전수학원을 졸업하고 부친으로부터 익힌 그림이 제9회 선전(오늘날의 국전에 해당)에서부터 23회까지 연속 입선하고 1944년에는 선전특선 및 총독상을 수상하였으며 해방 후 1955년에는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예술적 활동이 인정을 받아 전남 문화상, 대한민국 문화 훈장등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의 영예를 누렸는가 하면 1984년에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 국제저명인사 전기편에 수록되는 등 국제적 예술가로도 인정을 받았다.
주 필주(朱 必珠)ː호는 계암(溪巖), 학문이 높고 덕행을 널리 베풀어 덕행비가 있다.
박 희선(朴 喜宣)ː학문이 높고 ‘제1대 의신면 면의원(1952)’을 지냈다
김 영춘(金 永春)ː호는 송계(松溪), 마을 서당 훈장으로 주민 교화에 힘써 공적비가 있다.
주 필연(朱 必然)ː일본에 건너가 자수성가하여 ‘작은 다리’ 가설비를 헌금하는 등 덕행을 많이 베풀었다.
제2장 오늘을 사는 사람들
‘고향은 나를 낳아주고 나는 고향을 빛낸다‘ 고했다.
빗기내 산골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을 헤치고 경향각지에서 빗기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어머님의 안태가 묻힌 내 고향 ‘빗기내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사람의 행동이 빗기내의 인상으로 이 사회에 비취어 진다. 자기의 생업에 성실하면서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오손도손 즐겁게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속박에서 해방된 이후 나는 小痴(소치) 고조부의 遺墟(유허)인 쌍계사 옆집의 초가에서 집안 장손으로 태어났다.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 농촌에서 부모님의 덕분에 끼니를 굶지 않을 만큼의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부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매우 철없는 시절을 거쳐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로 감회가 깊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난 사천리 마을과 雲林山房에서 어려서부터 살아온 지나간 추억들이 오래된 한편의 필림에 수놓아진 장면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우리고장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철산(485m) 동쪽과 북쪽의 산골짜기에서 시작된 두 줄기의 시냇물이 쌍계사와 운림산방을 가운데에 두고 한 곳으로 모여 마을 앞을 지나서 흘러내리다가 결국 의신면 남쪽 바다로 빠지게 되는데 그래서 雙溪寺라는 절 이름도 나왔고, 편편하지 않고 경사지게 급히 흐르는 시내라 하여 비끼내(斜川)라는 마을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마을 사천리는 진도의 가장 복판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라 들이 좁아 다른 동네에 비하여 논밭의 경지면적도 좁고 농작물의 생산량도 적었지만 산과 숲의 경관이 뛰어나서 봄에는 앞산 뒷산에 진달래와 동백꽃 그리고 산 벚꽃과 복숭아 꽃이 만발하여 그야말로 꽃피는 산골이었다.
봄 가을에는 사방에서 소풍 나오는 학생들이나 찾아오는 구경꾼들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고장의 초 중 고등학교의 지정된 소풍 장소였으며,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 탄신일에는 벚꽃이 활짝핀 쌍계사 대웅전 앞 뜰에서부터 마을 입구까지 많은 사람들로 가득 메워지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쌍계사 골짜기에서는 관광객들의 노래 소리와 북 장구를 울리는 풍악소리가 메아리쳐 그치질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즐겨 찾는 여러 사람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해 주는 물 좋고 산 좋은 이름난 관광지였다.
우리나라 남부 이북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후박나무와 생달나무 가시나무종류의 푸른 잎새는 대나무와 소나무 이상으로 푸른 기상을 자랑하는 상록활엽수로써 남부 해안지방에 서식하는 소중한 산림자원이었다. 그래서 이 일대의 상록수 군락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윤기나는 동백나무와 생달나무의 잎사귀에 내려앉는 햇빛을 받아 멀리까지 은빛으로 반사하는 풍광은 꿈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은은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후박나무의 속잎이 피어나올 때면 곱고도 연한 그 모습과 색조는 정말 아끼고 싶은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연녹색의 잎새가 짙어지고 녹음이 울창해 질 때 시원한 바람이 밀밭과 보리밭에 내려와 부드러운 파도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모습이라든지 새벽부터 해질녁까지 이곳 저곳의 산기슭이나 밭에서는 꿩의 울음소리가 들려나오고 푸른 숲에서는 감미로운 꾀꼬리 노래 소리가 꿈속처럼 은은하게 맑은 공기를 뚫고 다녔다. 낙엽이나 꽃잎이 떨어져 흐르는 투명하게 맑은 시냇가엔 휘리와 송사리떼 그리고 가재와 새우들이 사는 행복한 물 속 마을이었다. 가을이 되면 서리 맞아 단풍이 곱게 물들어 온 산을 울굿불굿 수놓아 버렸다. 늦가을이 되면 어디서 모였는지 모를 수많은 까마귀 떼들이 무리지어 하늘을 뒤덮고 이 산에서 저 산 봉우리로 옮겨다니며 질풍처럼 비상을 시도하는 군무의 모습은 아주 신기하기만 했다. 눈 내리는 동지 섣달에는 산골짜기와 숲은 하얀 은빛의 세계가 되어 깊어가는 겨울밤을 더욱 고요하게 장식하기도 하였다.
우리 집과 지척거리에 있는 쌍계사에서 아침 저녁으로 울리는 쇠북종 소리와 목탁소리 그리고 스님의 예불소리를 들으며,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경건하게 퍼지는 잉경 소리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기도 하였고, 밤중에 고요한 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염불 소리는 아득한 하늘나라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신비한 감흥을 가져다주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나는 날마다 소를 끌고 다니며 풀을 뜯어 먹이고 꼴을 베어 나르던 산기슭이나 숲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부르거나 퉁소(피리)를 즐겨 불기도 하고 책을 가지고 다니며 자주 읽었다. 전혀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연의 품안에 묻혀 철없이 뛰놀던 그 시절이 지금도 나의 가슴에 새겨져 세월이 흘러가도 아직까지 철없는 소년으로 그냥 남아 있다.
한가지 또 생각나는 것은 의신면 소재지까지 의신초등학교에 다니던 일이다.
사천리에서도 제일 윗쪽 산 밑에 있는 우리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이십리가 되는 먼 거리였지만 매일 걸어서 다녀야 했다. 같은 또래나 학년끼리 다니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나이 많은 형들을 따라 다녔다. 검은 책보자기에 교과서를 둘둘 말아 허리에 매거나 어깨에 가로 걸치고 비오는 날에는 비를 맞으며 그냥 달려다니기도 했다. 흠뻑 젖은 옷은 그대로 교실에 앉아서 공부하다 시간이 파하고 집에 돌아올 때 쯤이면 나도 모르게 다 말라 버리기도 했었다.
성인이 되어 직장 관계로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다보니 고향산천의 그리운 옛 정이 되살아나 잔잔한 추억속에 그리움이 젖어들면, 고향을 향하여 남쪽하늘을 쳐다보는 나그네가 되어 가을 길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날이 가면 그리움 번져가는
고향의 가을 하늘
돌아갈 기약 없는 고향이라서
오늘도 타향 길을 서성이는가
구름은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백마의 초원으로 가는 길은 멀어
코스모스 부용화 꽃길을 따라
은행잎 사이로 남도 팔백리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충청남도에서 전라남도 진도까지는 팔백리가 훨씬 넘는 거리에 있다. 십 년전 그 때도 차를 몰고 출발하여 가로수와 꽃길을 지나 서해안 지방도를 따라 가을 길을 달려 남쪽으로 내려 갈 때면 가슴속에 스며드는 애틋한 향수에 젖어, 즉흥적으로 이런 노래를 지어 운전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는 양 흥얼거리기도 하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농사짓던 집 부근의 논과 밭이 변하여 이제는 운림산방이 국가지정 문화유적지가 되어 문화재관리소에서 관장하게 됨에 따라 소치 고조부의 허씨 종가집으로 대대로 살아 내려오던 그 초가집을 비워주고 밖으로 물러 나온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문화공보부와 진도군청 문화재관리소에서 다시 새롭게 소치기념관과 문화관을 건립하였으므로 역사에 빛나는 남도 화맥의 근원지로써 예술의 찬란한 꽃을 피우는 뜻깊은 요람이 될 것이다.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雲林山房의 초입에 들면 나무와 숲이 무성한 성무골의 바위와 연못이 푸른 하늘 아래 오랜 세월동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조상의 빛난 얼을 이어 받아 그 지혜와 기능을 더욱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로 발전 시켜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후손으로 태어나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후손의 가슴속에 자연을 관조하는 풍부한 감성 하나만으로 그 뜻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다행으로 생각할 뿐이다. 해와 달이 가고 구름이 흘러가도 내가 태어나서 자란 운림산방 주위의 경관은 예술의 영혼이 숨쉬는 영원한 고향이 될 것이다.
고향은 어머님의 마음과 같은 곳이 아닐까!
서울 종로구 내수동 110-7
주진옥
어릴 때 꿈을 키웠고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위해 한없이 달리던 곳, 따뜻한 봄날 친구들과 잔디밭에 누어 많고 많은 이야기를 하던 곳, 끝없이 아껴주시고 걱정해주시던 어머님과 형제들의 추억이 주렁주렁 널려 있는 정답고 소중한 곳, 초여름 밤이면 푸르고 푸른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내 눈으로 쏫아질 것 같은 그 수많은 별들, 집앞 논에서는 밤새도록 개골개골 울어대는 개구리소리와 풀밭에서 나는 풋풋한 내음, 맑고 깨끗한 상큼한 공기, 너무도 소중하고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다.
절고랑과 귀생기골의 그 맑고 깨끗한 물은 손으로 그냥 떠서 마셔도 어떤 약수보다 맛있다. 초가을이면 까맣게 송오리 송오리 익어 있는 짝밤은 작지만 아주 담백한 맛이 있고 사천리에서만 볼수 있었던 멍은 사천리의 특산품으로 아주 특이한 맛이었다.
여름 비온 뒷날이면 복수골이나 항냇가에서 수영도하고 까만 고무신 벗어 깨알처럼 머금은 이슬을 헤치고 메뚜기며 진땅깨비를 잡던 추억들 우리세대에는 깊이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항시 뿌연 공기와 매캐한 냄새만 맡고 소음에 시달리다 고향에 오면 오래 오래 머물고 싶지만 마음뿐 조금만 가까웠으면 자주 올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쫓기듯 되돌아간다.
절재를 처다보면 한여름에도 뭉개 뭉개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사는 것이 무얼까? 내세는 있는 건가? 저 떠가는 구름처럼 멀리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길도 없어지고 상수리나무로 꽉 차있다.
세상도 변하는데 산도 변하겠지 오래 떠나 살다보니 옛날이 그리워서 옛날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상황이 다른 낯선 곳에 와서 처음 생각했던 것은 모든 것이 부족하니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하지,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
많은 것을 얻을려고 생각지 말고 하나 씩 하나씩 거두면 충분하다. 젊고 건강한데 무엇이 문젠가, 늙고 병든 사람도 열심히 사는데 지내고 보니 운이 좋아 큰 어려움 없이 건강하게 이날까지 살아온 것에 항시 저를 아껴주신 고향사람들과 모든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옛 어르신들의 하신 말씀이 나이 들어 이제와 마음에 와 닿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자라나는 애들에게 몇가지 말을 전하고자 한다.
어려움에 당면하면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생기고 두려움도 없어지더라. 어려움이 없는 삶은 얼마나 무의미하며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어떤 일을 자기 소신껏 할 수 있겠는가!
자기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나를 가꾸는 것이 곧 나를 아끼는 주위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다.
먼 훗날 나를 되돌아보면서 많은 후회를 않기 위해서 마음을 열고 남의 말을 많이 듣고 오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자, 보는 눈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 아끼고 보람있게 살아가자.
써보지 않은 글을 쓸려하니 내가 아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고 남다른 것이 없으니 무엇을 쓸 수 있겠는가!
빗기내 내고향 사람들, 부지런하고 건강한 가운데 서로서로 오손 도손 열심히 살아갑시다.
고향으로 향한 마음 가눌 길 없어 부족한 글 적어 고향으로 보냅니다.
진도 사천리 향우회를 돌아보며
서울에 사는 동내 사람
허 대 봉
고향은 정겹다. 그래서 그립다.
한반도 서남쪽 소백산맥 끝자락, 황해바다 남 다도해상에 떠있는 섬 내고향 진도.
23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섬이 면서도 첨찰산 덕신산 여귀산 금골산 같은 명산이 섬 안에 있다는 것도 자랑스럽다.
벽파진 울돌목의 명량대첩지와 용장 남도석성의 삼별초 항쟁지가 있는 곳이며 조도, 거차도, 관매도, 독거군도로 이어진 기암괴석과 백사청송이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을 이루고 회동의 2.8km바닷길이 열리는 모세의 기적도 하늘이 준 은혜이다.
조선시대 후기 남종문인화의 뿌리가 우리고장이며 오늘날 우리나라 화단을 주름잡는 화가와 서예가들이 진도 출신인 것도 천연기념물 진도개와 수유해안의 백조도래지도 자랑스럽기만하다.
춘분의 끝자락이면 겨울 추위를 이기고 자란 단맛이 깊은 봄동배추며 맛이 영근 가을마늘, 녹색의 보리밭은 향긋하기만 하다.
항상 들어도 흥겨운 우리의 진도아리랑이 있는 한 진도인은 영원하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우리마을 서울 향우회는 1989년 11월 사천리가 고향인 이병희, 박정원 그리고 나 세 사람은 그립던 고향이야기를 나누다 여러차례 돌아가며 집들이를 다녔고 다음해인 6월에 우리들 셋이는 사천리 향우회를 만들기로 하고 주변 인물들을 모았다.
모두들 사천리 고향을 떠난지 40년이 지난 시름을 함께 모여 덜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대 회장에 진만일님 총무에는 박정욱님으로 향우회는 발족을 보게 되었고 제2대 회장은 한의원 원장인 차형환님이 맡게 되고 총무에는 종로 5가 놀부보쌈점을 운영하는 주형진님이 맡게 되었다. 제3대 회장은 차형환님이 유임되었고 총무도 유임되었다.
제4대 회장은 이부희님이 맡았고 총무는 강계원님이 맡았다.
제5대 회장은 2001년부터 2003년 3월까지 임기인 주정무님과 허득환 총무님 맡아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특히 차형환님과 주형진님 강계원님의 남다른 노고에 대해서 항상 감사해 하고 있으며 사천리 고향분들의 협조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우리 사천리 향우회는 1년에 4차례의 모임이 있고 고향소식과 회원의 동향을 나누면서 후진양성과 상호간 친목 도모 그리고 애향심의 고취에 목적을 두고 고향사람들의 안녕을 타향에서 함께 염려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매년말에는 마을사람들 한 분이라도 더 모이게 하여 밴드까지 불러놓고 이날은 정말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따뜻한 정으로 서로를 보듬아 주며 즐기고 특히 지난해에는 나이트 클럽을 통 체로 빌려서 하루를 보내며 즐기기도 하였다.
그동안 향우회에서 한 일들을 살펴보면,
1991년 7월 21일 나의 아들 기식아 육군에 복무중 사망하여 법률적 절차를 끝내고, 8월 27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하던 날, 회원 전원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주었던 일을 두고 두고 잊지 못할 일이다.
1993년 10월 10일 도봉산 개나리 산장에서 야유회를 했었는데 비회원까지 40여명이 참석하였으며 1996년 4월 28일 진도 사천리에서 경로잔치를 열기도 하였는데 서울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내려가기도 하였다.
1998년 6월 9일 수덕산 야유회때는 50여명이 참석하여 고향사람들의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2000년 6월 10일 포천계곡의 야유회는 30여명이 참석하여 반가운 해후를 하였다.
현재 사천리 향우회 회원은 무순으로 적어보면 박제현(동양화가), 이부희, 주정무, 이병희, 허대봉, 차형환(한의원원장), 강계원, 강장원(동양화가), 박정욱, 주현정, 허득환, 주순덕, 이윤교, 주형진(놀부보쌈 경영), 이창희(식당업), 허성환(사업)님 등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고향을 떠난 사천리 출신은 약 200여세대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서로간의 연락과 결속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경인지역에 살고 있는 후진들의 향우회 가입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데 앞으로 모두 참여하여 향우간의 우의와 향우회 발전에 적극적인 동참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고향(故鄕)소고(小考)
인천에서 차 형 환
동개(東開)라 했던가
아마도 잘은 모르지만 동쪽으로부터 아침이 열린다는 뜻일게다
첨찰산 어느 능선 재 너머에서 살며시 솟아오른 그 찬란한 아침 햇살이 쌍계사 대웅전의 처마 끝을 스치고 절 뒤 상록수림의 괴목나무 은빛 잎에 반사되어 운림산방 백일홍 나무를 살포시 보듬어 안는다.
관란정, 당산제단 팽나무 숲에서 까치 한 마리가 까~~~~악 아침을 알릴 때쯤이면 사구지 재 밑, 비탈진 밭에 희끗희끗 보일 듯 말 듯 어느 아낙네의 손길이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인다.
언제부터일까 호미 끝에 뽑혀 나온 잡초더미가 밭이랑 여기저기에 수북이 쌓여 있다. 그래 누구 시길래 저리도 부지런할까
이내 언덕 아래서는 으흠, 어허하는 힘겨운 기침소리가 들린다. 그래 또 저분은 누구시지, 이슬 머금은 풀 짐을 지게 가득이 짊어진 아저씨 언덕에 비스듬이 지게에 작대기를 고인다.
그리고는 언덕 넘어 밭을 향하여, 어이! 어 야! 이제 그만 집에 가세, 예, 알았소, 오메 징한 것,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수건을 몸에 바지에다 툭툭 털며 하는 말씀이 이놈의 새끼들 학교 갈 시간이 다되었는데 일어나 났는지 모르겠네, 어서 갑시다.
아하 그렇다. 저분이 아니라, 그분이 바로 바로 우리네 부모님이 아니었던가
동서남북을 둘러보아도 산태미처럼 산으로만 둘러 쌓인 곳, 어디를 가더라도 고개를 넘어야 하는 오지 마을 빗기내가 왜 그리도 자꾸 생각이 나는지 이십여 성상을 그곳에서 자라고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가슴 한구석에 머물고 있는 한 어차피 빗기내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그리운 사람들.....
항상 옆에 있어 술 한잔 나누며 정담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
쌍계천이 아우러져 복수골이 되듯이 인생사 천리길이 무슨 탓이던가
여보게 자네 마음 한구석 비워 두게나 내가 들어갈 자리를 말일세, 나 역시 언제나 자네가 들어올 마음의 자리를 비워두겠네
어허 이 사람 그러면 되지 않은가......
동지 발행에 즈음하여 선배, 후배, 제위님께 그동안의 노고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동지 발행과 더불어 사천리(빗기내)가 더욱더 발전하고 마을 곳곳마다 항상 평화와 안녕이 있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 편집을 마치면서
나의 고향은 첨찰산 아랫마을 사천리이다.
남화의 본산 운림산방, 천년의 고찰 쌍계사
그리고 동백 후박 잣밤나무가 울울창창한 천연기념물 상록수림이 있는 사계절 휴양처,
나는 이곳의 산야 속에서 나고 자랐다.
쌍계사 계곡 바위 하나하나,
골골 마다에 추억이 서려있는 어머님의 안태가 묻힌 곳,
진달래 칡갱이 술동도 꺾어 먹고
사쿠라(벚) 산딸기 보리똑 멍 으름 다래
그리고 잦밤을 따먹으며 나는 산짐승이 된다.
춘란의 아름다운 자태에 취했다가
땀이 나면 맑은 계곡에 몸 담그며 동심에 젖는
나의 고향 빗기내가 있어 나는 행복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아내와 함께 산에 올라 도토리 주워다 묵을 빚고
이웃들과 작은 정(情) 나눈다.
고향 사람들과 산야는 너무나 많은 것을 주는데
나는 고향에 얼마나 되돌림 하는가?
절 고랑을 따라 첨찰산에 올라 사해를 둘러보고
봉애(화)골 따라 내려와
두릅 벙구 산나물에 고향 막걸리 나눈다.
내고향 진도군 그리고 우리 마을 빗기내는 자랑스런 우리의 고향입니다..
빗기내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이야기들을 이 희춘 새마을 지도자께서 많은 자료를 수집 해 주시고 지명은 마을 어르신들과 동생들이 조언해 주셨습니다.
마을 유래지 발간비는 진도 문화원의 지원과 더불어 재경 사천리 향우회원들이 협조해 주시고
우리 마을 출신인 허 성환 재경 진도군 청년회장께서 거반액을 흔쾌히 부담해 주셨습니다.
고향 마을을 떠나 살지만 항상 고향을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주 정무 재경 사천리 향우회장을 비롯한 향우님들께 마을민들과 함께 감사드립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의견들이 있었으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 또한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살고 계시는 주소와 전화번호가 바뀔 줄 알지만 그대로 적었고 깊은 관심으로 글을 써주신 몇몇 향우들의 글도 실었습니다.
마을민과 더불어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 드리며 경향각지의 빗기내 사람들 모두의 가정에 행복과 발전을 기원합니다.
빗기내 사람 박 정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