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 패럴림픽 주경기장 ‘궈자티위창’에서 열린 남자 육상 4×400m 계주에 출전한 김규대가 질주를 마친 뒤 숨을 몰아쉬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권일운 기자) |
사전을 펴보자. 조국은 무슨 뜻인가. 지도를 펴보자. 조국은 어디에 있는가. 책을 펴보자. 조국은 어떤 의미인가. 조국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란 뜻으로 당신들의 조국,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은 동경 127° 30", 북위 37° 00"의 아시아대륙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조국은 어떤 존재인가. 책을 덮어라. 어차피 조국은 사전에도 없고 지도에도 표기돼 있지 않으며 책을 통해선 더더욱 알 수 없다. 휠체어 육상 김규대(24•서울북부장애인복지관)도 조국의 의미를 뜻밖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조국을 위해 두 번이나 자신의 영혼을 바쳐 뛴 장애인 육상 국가대표 선수 김규대에게 조국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9월 14일 패럴림픽 주경기장 ‘궈자티위창’에서 열리는 남자 육상 4×400m 계주에 한국 선수단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사흘 전 열린 남자 4×100m 계주에서 깜짝 동메달을 딴 까닭인지 언론이나 체육관계자들이 남자 계주팀에 쏟는 관심이 남달랐다. 계주팀 멤버 김규대에게 당시 기분을 물었다.
“패럴림픽에 처음 출전해 운 좋게 메달을 땄습니다. 마음을 비웠다곤 했지만 메달이 2개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이 펼쳐지니까 은근히.”
은근히 욕심이 났다. 어디 김규대만 그랬겠는가. 올림픽만큼이나 메달을 따기 힘든 대회가 패럴림픽이다. 세계 각국의 장애인 선수들이 모여 경쟁을 벌일뿐더러 올림픽처럼 패럴림픽도 체육 인프라가 뛰어난 나라들이 메달을 싹쓸이하기 때문에 몇 년 전까지 장애인 체육의 불모지였던 한국으로선 메달획득이 쉽지 않았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건지 모릅니다. 첫 패럴림픽 출전인데 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얼마나 행운이예요. 휠체어 육상을 시작한지 이제.”
이제 2년이 지났을 뿐이다. 김대규는 2006년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트랙을 달리기 시작했다. 장애인 육상계에선 신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신참치고는 그가 거둔 성과는 입이 쫙 벌어질 만큼 대단했다. 운동을 시작한 지 1년 2개월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고 지난해 5월 스위스 레이싱 시리즈에선 200m와 400m에서 각각 6, 10위에 오르며 ‘제주특급’ 홍석만(33,제주자치도장애인체육회)을 이을 차세대 육상스타로 떠올랐다.
“100m, 200m, 400m에 출전했지만 성적이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아직 개인 트랙경기는 부족한 게 많고요. 하지만.”
하지만 계주경기는 다르다는 게 김규대의 생각이었다. 이유가 있다. 4×100m 계주에서 증명한 것처럼 한국 남자육상선수들의 팀워크는 세계 최강이다. 홍석만, 유병훈(36,충남보령정심체육관), 정동호(33,서울북부장애인복지관), 홍덕호(42,경기도) 등으로 이뤄진 베테랑 계주팀은 대표팀에서 5년 이상 한솥밥을 먹어 호흡이 척척 맞는다. 바턴 터치를 비롯해 선수간 연결동작이 무엇보다 중요한 계주에선 그보다 더한 장점도 없다.
“땅!” 이윽고 주경기장 궈자티위창에 총소리가 울렸다. 홍석만의 스타트가 좋았다. 20m부터 중국의 첫 주자 구이옌펑과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였다. 휠체어 육상 계주에선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메달 색깔이 변한다. 홍석만의 빠른 스타트는 그래서 한국에겐 희망으로 작용했다.
구이옌펑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던 홍석만의 뒤로 태국과 프랑스 선수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 간격만 유지해도 은메달은 가능했다.
홍석만이 바턴을 정동호에게 넘기려는 즈음. 그때였다. 기분 좋게 껌을 씹다가 껌에 달라붙은 은박 포장지를 이로 깨물 때처럼 아드레날린이 한껏 고조돼 있던 3번째 주자 김규대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어…. 어….’ 김규대의 눈에 바턴 터치 구간 20m를 넘고 있는 정동호가 보였다. 자칫 실격으로 처리될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안 돼요. (정)동호형. 안 돼요. 너무 멀리 갔어요. 동호형!’
그러나 김규대는 가슴으로 외칠 뿐 성대를 울려 위기를 알리지 못했다. 정동호가 바턴 터치 구간을 조금씩 벗어날 때마다 김규대는 더 크게 가슴으로 소릴 질렀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겨울에도 김규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가슴으로 소릴 지른 적이 있다.
휠체어 육상에 입문한 지 2년 만에 김규대는 세계 육상계가 가장 주목하는 선수로 성장했다(사진=스포츠춘추 권일운 기자) |
영혼까지 UDT 정예요원이었던 남자
1984년 1월 17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난 김규대는 2003년 대구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여느 청년과 다를 게 없었다. 운동과 여행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즐기던 김규대에게 당시 인생이란 패스트푸드점에서 줄을 서는 일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차례가 오면 젊음이란 화폐를 지불하고 추억이란 밀크쉐이크를 받으면 그만이었다.
김규대의 지독하리만치 평범한 인생이 변하기 시작한 건 군 입대를 하고부터다. 김규대는 2004년 1월 해군 특수전여단에 자원입대했다. 일명 ‘UDT’로 불리는 곳이다. UDT는 ‘UDT/SEAL(Underwater Demolition Team / Sea Air Land, 수중폭파팀 / 육해공 전천후 작전팀)’의 약자로 유사시 해병대의 상륙작전에 앞서 적 해안에 침투, 수중 해안방어망을 정찰하고 기뢰, 선박, 암초 등 자연 및 인공 장애물을 제거하는 특수임무를 맡는다.
육군 특전사와 함께 한국군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특수부대로 미국 네이비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세계 최강의 정예부대다.
당연한 이치겠지만 최정예 부대인 만큼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엄격한 시전 검사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가혹한 훈련을 통과해야 비로소 ‘UDT/SEAL’을 상징하는 녹색 베레모를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평범한 청년 김규대는 ‘UDT/SEAL’을 지원한 것일까. 특별한 이유라도 있던 걸까. 김규대는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다만 “이왕 군대 가는 김에 빡센 곳으로 가자는 생각”과 “통영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키워온 해군에 대한 동경심”이 지원배경이었다. 다소 막연한 사유들이었지만 김규대의 결심을 부모도 존중했다.
그러나 ‘UDT/SEAL’는 역시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니었다. 김규대에겐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 시력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UDT/SEAL’을 지원하려면 ‘좌•우 나안 0.8 이상(색약•색맹 제외)’이 돼야 한다. 그러나 당시 김규대는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규대가 부모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저, ‘UDT’ 못 갈 거 같습니다. 시력이 나빠 지원할 수 없답니다.”
잠자코 아들의 말을 듣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규대야, 니 ‘UDT’ 가 그리 가고 싶나?” 김규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아버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니가 그리 가고 싶다는데 별 수 있나. 그 뭐꼬. 라식이라 하나. 그 수술 받으면 눈이 억수로 좋아진다카드라. 규대야, 정 UDT 가고 싶으면 퍼뜩 수술 받고 온나. 알았제?”
라식수술까지 받으며 ‘UDT/SEAL’를 고집한 김규대의 정성이 통한 걸까. 드디어 2004년 1월 그토록 바라던 ‘UDT/SEAL’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것도 부사관으로. 의무복무 기간이 4년6개월이나 되는 ‘UDT/SEAL’ 부사관에 지원한 이유를 물었다.
“진정한 ‘UDT/SEAL’의 일원이 될 거라면 일반병보다 부사관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김규대의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UDT/SEAL’요원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체 지원자 가운데 40%만이 통과한다는 24주(6개월)간의 특수전 교육훈련은 김규대의 말을 그대로 쓰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지옥훈련”이자 “하루를 버티는 것도 역부족일 만큼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특히나 132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구보와 체조, 고무보트 조정훈련 등 고강도 훈련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이른 바 ‘지옥주’ 기간은 순전히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김규대는 ‘하루만 버티자’며 이를 악문 덕분에 24주간의 특수전 교육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3주간의 공수훈련도 성실히 수행했다. 모 부대에 배치됐을 때 김규대의 머리에는 녹색 베레모가 씌우져 있었다.
해군 특수전여단 당시의 김규대 하사. 지금 이때나 지금이나 자랑스런 시민이다(사진=스포츠춘추 권일운 기자) |
조국을 위해 뛰다
‘UDT/SEAL’은 해상, 수중뿐만 아니라 육상과 공중에서도 임무가 주어진다. 따라서 공수훈련은 기본적인 훈련 가운데 하나다. 김규대도 자대 배치를 받기 전 이미 3번의 낙하산 강하를 경험했다.
“2004년 12월 낙하산 강하훈련을 받았다. 4번째 강하였기 때문에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자대배치를 받고 처음 하는 강하라 그저 잘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낙하산을 고를 때부터 그랬다. 대개 낙하산은 강하자들이 직접 고르게 마련인데 어쩐 일인지 이날따라 만지는 낙하산마다 기분이 영 찜찜했다. 때맞춰 공수 교관이 “컨디션이 좋지 않은 대원은 강하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게 귀에 들어왔다. ‘손을 들까’ 고민했다. 결국 손을 들지 않았다.
“다음날이 휴가였다. 동료들과 후임병들이 있는데 나 혼자 빠져나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우들과 함께 훈련을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휴가를 다녀오고 싶었다.”
김규대를 태운 C-130 허큘리스 수송기가 힘차게 발진했다. 난기류에 수송기가 좌우로 흔들릴수록 그의 마음은 휴가에서 만날 여자친구 생각으로 떨렸다. 여자친구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김규대는 모닥불 주위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헬기의 고도가 디지(착지지점)에 다다르자 후방도어가 열리며 강조조장의 강하 신호가 떨어졌다. 강하자들이 차례로 허공에 몸을 던졌다. 6번째 강하자인 김규대도 자신의 순서가 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을 향해 뛰었다.
순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파란 하늘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귀를 솜으로 틀어막은 것처럼 바람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한 장의 티슈가 된 듯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1만, 2만, 3만….’ 김규대가 속으로 셈을 했다. 이제 ‘4만’만 세면 낙하산이 펴질 일이었다. ‘4만.’ 낙하산이 펴지지 않았다. ‘5만’ 을 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6만, 7만….’ 아무리 셈을 해도 낙하산은 그대로였다. 이윽고 5번째 강하자보다 먼저 하강하는 자신을 발견한 김규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통 낙하산은 내부에 자동 산개(散開)기가 설치돼 있어 낙하산이 일정 고도 이하로 내려가도 펴지지 않으면 자동으로 작동하게 돼 있다. 그러나 김규대의 낙하산은 이마저 고장이 난듯 보였다. 김규대가 보조 낙하산을 펼치려고 할 때. 다행이 낙하산이 펴졌다. 하지만 이번엔 낙하산 줄이 꼬이고 말았다.
김규대가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꼬일 데로 꼬인 낙하산 줄을 풀려 애를 썼다. 역부족이었다.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김규대가 목청이 찢어져라 소릴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대기를 따라 음절이 나눠져 퍼질 뿐이었다. 낙하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쿵!”
한국 장애인 스포츠의 숨은 공로자, 상이군경
2008 베이징패럴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는 77명이다. 남자선수가 58명으로 여자선수보다 2배나 많다. 이 가운데 20살 이상의 나이로 중도 장애를 입은 남자선수는 24명이다. 여기서 주목할 게 있다. 24명 가운데 15명이 군에서 장애인이 된 이들이란 것이다.
한국 남자 대표선수 장애유형 및 사유
* 방위산업체 복무 당시 장애입은 2명은 제외 |
특히나 탁구와 양궁은 남자선수 10명 가운데 상이군인이 무려 7, 4명에 이른다. 어찌된 일일까. 대한장애인체육회 박승재 전문체육팀 차장의 말을 들어보자.
“1960년 제 1회 로마패럴림픽이 개최됐지만 정작 한국이 출전하기 시작한 건 1968년 텔아비브패럴림픽 때부터다. 당시 2종목에 6명의 선수가 참가했는데 이들이 모두 한국전쟁 때 다친 상이군경이었다. 1984년 뉴욕, 에일즈버리패럴림픽 때까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이군경들이 선수단의 중심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8년 서울패럴림픽 때부터 일반 장애인들이 점점 많아져 균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패럴림픽뿐만이 아니다. 상이군경들이야말로 한국 장애인 스포츠를 이끌어온 주역들이다. 물론 상이군경이라고 해서 특별히 운동신경이 뛰어날 리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장애인 스포츠를 이끌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장애인 스포츠가 상이군경의 재활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출발한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939년 영국의 루드비히 구트만 박사는 2차 대전 당시 척수손상을 입은 자국병사들의 재활을 위해 “수술보다 스포츠를”이란 구호를 외쳤다. 스포츠가 척수손상 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에 큰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았던 구트만 박사는 이를 증명하고자 장애인들에게 양궁을 권유했고 1946년 자비를 들여 휠체어 궁사들이 출전하는 정식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가 향후 패럴림픽의 모태가 된 ‘스토크 맨데빌 양궁대회’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을 겪으며 수많은 상이군경이 생겼고 이들을 위한 재활프로그램으로 스포츠가 장려됐다. 각 시도 보훈병원들이 앞장 서 수술 뒤 재활 중인 상이군경들에게 탁구와 양궁을 보급했다. 1967년 4월에는 국립 원호병원에서 제 1회 상이군경 체육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가 한국 장애인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치른 전국규모 대회다.
상이군경이 장애인 스포츠의 중심에 설 수 있던 건 환경 요인이 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 장애인은 스포츠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설령 어렵게 운동을 시작한다손 쳐도 생활체육으로 가볍게 하다가 일정 수준으로 실력이 오르면 자비를 들여 지도를 받고 이후 선수가 되는 게 기본코스였다. 대부분 선수 목전에서 운동을 그만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에 반해 상이군경은 보훈처에서 적극 지원을 하고 전용 체육관도 있어 운동을 시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전문 지도자로부터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86년까지만 해도 상이군경 주도의 장애인 스포츠는 조직화되지 못했다. 그저 재활프로그램이나 소소한 취미 정도로 취급받았다.
1988년 서울패럴림픽 당시 한국선수단 발족식. 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첫번째 이가 2008 베이징패럴림픽 탁구 대표선수인 이해곤이다. 그 역시 상이군인 출신 선수다 |
그러던 것이 1988년 서울패럴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극적인 반전을 이뤘다.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패럴림픽에서 망신당하면 안 된다. 주최국인 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잘해야 한다”는 게 당시 정부의 확고부동한 의지였다. 사실 정부는 1986년부터 패럴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해 정부 체육관계자들이 해외로 나가 보치아, 골볼, 론볼 등 국내에는 생소했던 장애인 스포츠종목을 배워왔다. 서울패럴림픽을 한해 앞둔 1987년에는 국가대표 선수를 모아 합숙훈련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합숙기간은 무려 1년이었다.
1984년 뉴욕·에일즈버리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1개도 따지 못했던 한국이 1988년 서울패럴림픽에서 무려 40개의 금메달로 종합 7위에 오른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메달수=국력’ 공식을 철석같이 믿었던 1988년 서울의 풍경은 20년이 지난 베이징에서 재현되고 있다.
중국은 패럴림픽을 앞두고 1년간 장애인 대표팀 합숙훈련을 했다. 그 덕분인지 9월 15일 현재 금메달 84개로 종합순위 1위를 달리고 있다. 20년을 사이에 두고 한,중 두 나라의 공통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중국 대표선수 가운데 상당수가 인민해방군 출신의 상이군인이다.
탁구 대표팀 양현철 감독은 “상이군인 출신의 선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밝혔다. “큰 전쟁이 없고 군 사고가 준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양 감독의 생각이다. 맞는 말이다.
월남전 이후 한국군이 대규모로 희생된 전쟁은 없었다. ‘전 군인의 보이스카우트화’란 지적이 있지만 어쨌든 안전 위주의 병영문화가 정착되면서 군 사고가 준 건 사실이다.생활수준과 의식수준의 향상도 상이군인 출신 선수의 감소를 불러온 이유 가운데 하나다.
양 감독은 “과거 같으면 장애인 탁구선수로 활동하며 연금이나 포상금을 받아 생활하는 게 괜찮은 직업으로 꼽혔지만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장애인이 취업할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며 “게다가 탁구 같은 스포츠를 제외하면 마땅히 소일할 게 없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다양한 취미생활이 가능해 굳이 기술 습득이 힘들고 어려운 스포츠에 관심을 덜 갖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면 트랙을 돌지 않았다
“김하사! 김하사! 정신 차려. 야, 의무병! 의무병 어디 갔어. 의무병!” 김규대의 뺨을 때리며 누군가 그렇게 절규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급차의 경음기 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어깨가 뻐근했지만 다행히 허리 아래는 아프지 않았다.
우발적인 위험상황에 대비해 지독하게 훈련받은 PLF(Parachute Landing Fall 공수지상훈련)이 빛을 발한 결과라 생각했다. 군의관이 보였다. “저, 군의관님 손 좀 주물러 주십시오.” 김규대가 군의관에게 뜬금없는 요청을 했다. 군의관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뭐? 손을 주물러 달라고?”
이유가 있었다. “당시 강하훈련을 해병 수색대원들과 함께 했다. 천하의 ‘UDT/SEAL’대원이 아프다고 인상을 쓸 순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UDT/SEAL’대원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구급차까지 가는 동안 김규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는 해병 수색대원들은 그가 내일이면 벌떡 일어나 다시 창공에서 ‘1만, 2만, 3만, 4만’을 세리라 생각했다. 왜냐? 낙하산 줄이 꼬여 하강사고를 당했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는 ‘UDT/SEAL’대원이라면 그 정도는 일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지만 그 만큼 차가운 법이다. 포항 군병원으로 이송된 김규대는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흘러도 좀체 일어나지 못했다. 군의관도 “더 큰 병원으로 이송해 정밀진단을 받아야 한다”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대구 군병원을 거쳐 성남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된 김규대에게 최종진단이 떨어졌다.
“김 하사! 미안하네.”
미안하다라, 김규대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휠체어 바퀴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바나나 껍질처럼 힘없이 내려졌다.
“그때부터 방황을 시작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여자친구? 더 이상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고 피해 다녔다. 하루하루가 악몽이었다.” 김규대의 회상이다.
자살까지 생각했던 김규대는 그러나 천상 ‘UDT/SEAL’대원이었다. ‘하루만 버티자’는 각오로 지옥훈련을 마쳤던 패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연히 TV에서 ‘서울국제휠체어마라톤대회’를 보고 난 뒤 스스로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홍석만과 유병훈 등 선배 장애인 육상선수와 만나며 결심은 더 공고해졌다.
9월 10일 남자육상 4x100 계주에서 동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이 관중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권일운 기자) |
김규대는 지금도 휠체어 바퀴를 잡으며 처음 트랙을 돌 때가 생각난다. “처음이라 익숙하지가 않았다. 팔의 모션이 커 힘을 충분히 휠체어 바퀴에 전달하지 못했고 코너링도 미숙했다. 하지만 ‘UDT/SEAL’대원일 때나 휠체어 육상을 시작할 때나 같은 마음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난 이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국을 위해 두 번 뛴 남자
남자 육상 4×400m 계주에서 한국은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결국 ‘바턴터치 라인 위반’으로 실격처리 됐다. 2번째 동메달을 노리던 김규대와 팀원들의 기대가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김규대의 표정에서 아쉬움을 찾을 수 없었다. 반대였다. 연신 미소를 머금으며 오늘보단 내일을 기약하고 있었다. “형들 모두 열심히 뛰었다. 모자른 게 있으면 다음 대회에서 보충하면 그만이다.”
육상 대표팀 유희상 감독은 김규대를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선수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일단 지켜보는 게 좋다며 다소 유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유가 뭘까. “지금이 가장 중요할 때다. 메달을 따 자신감이 충만했을 때 자칫 자만심이 생겨 선수생활에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자만심을 경계해야할 만큼 김규대의 성장속도는 눈부시게 빠르다. 유 감독은 “스스로 하려는 의지가 강한 선수이기에 자기관리만 잘 한다면 ‘제 2의 홍석만’을 기대해도 좋다”고 말한 뒤 “어느 선수보다 기대를 걸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속내를 밝혔다.
김규대는 베이징패럴림픽을 통해 앞으로 무엇에 집중해야할 지 깨달았다. “(홍)석만이 형처럼 세계적인 선수가 되려면 휠체어 시속이 평균 33, 34km 정도는 안정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전 아직까지 최고 시속이 33km에 불과해요. 스피디를 얼마나 올리느냐가 관건입니다.” 김규대의 솔직한 자기분석이다.
김규대는 지금까지 조국을 위해 2번 몸을 던졌다. 그는 말한다. "나라가 날 위해 뭔가를 해주길 바란 적이 없다"고. 되레 "최정예 요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이젠 나라를 위해 뛸 수 있어 기쁘다"고. 그것 뿐이라고(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연일 계속되는 경기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김규대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혹여 ‘UDT/SEAL’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우문(愚問)이었다. 김규대는 바싹 마른 선인장이 물을 빨아들이듯 갑자기 어디서 힘이 났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리곤 가슴에 새겨진 태극마크를 오래된 습관처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고로 다친 뒤 날마다 꿈을 꿨습니다. ‘UDT/SEAL’에 복귀하는 꿈을. 재활을 받으면서도 소원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열심히 재활해 ‘UDT/SEAL’에 반드시 복귀하자는. 후회하느냐고요? 아니요.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정말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전 수송기 밖으로 뛰었을 겁니다. 전…전 ‘UDT/SEAL’대원이니까요.”
김규대는 지금까지 조국을 위해 두 번 뛰었다. 한 번은 포항의 1천m 상공에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궈자이티창'의 트랙에서.
불행이 김규대를 조국과 멀어지게 할 순 있겠지만 그에게서 조국을 지워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 그는 ‘UDT/SEAL’대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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