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은 신라 제30대 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휘는 법민(法敏)이다.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파진찬과 병부령직을 겸임, 곧 태자로 봉해졌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버지를 도와 국사의 중대한 책무를 다하였다. 무열왕 7년(660년) 나ㆍ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무열왕 8년(661년) 부왕이 승하하자 곧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당시의 나이는 36세였다.
(1)통일의 완성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려는 당나라군을 격퇴하여 676년 삼국을 최초로 통일한 군주이다.
백제 부흥군 진압 : 문무왕은 즉위하던 해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정복 전쟁을 수행했다. 먼저 백제 부흥군을 물리치고자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의 증원병과 연합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백제 부흥군은 사비산성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이 전쟁은 당 고종이 칙령을 들어 두 나라 사이의 맹약을 제의하여 665년 백제 왕자였으며 웅진도독이 된 부여융과 동맹을 맺으며 일단락된다.
고구려 공략 :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667년 이세적이 이끈 당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668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군이 신성·부여성 등 만주의 여러 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자 문무왕도 김유신·김인문·김흠순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파견하여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당나라와의 전쟁 : 당나라가 점령지의 지배를 위해 웅진도독부, 안동도독부,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고구려의 옛 땅은 물론 백제의 옛 땅까지도 자국 영토로 삼으려 하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게 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을 원조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나라에 대항하여, 마침내 676년(문무왕 16년) 당은 안동도독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기고 한반도에서 병사를 철수시켰다.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수한 군주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신라의 통일로 성립된 '삼한일통'의식은 삼국이 단일종족의식을 갖는데 기여했으며 이는 후일 고려, 조선으로 계승되어 삼국의 역사가 일국의 역사로 다뤄져 한국사의 토대를 만드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 나라의 안정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중앙과 지방 행정조직의 개편 또한 문무왕의 업적에 들어간다. 특히 진흥왕 때부터 설치한 소경을 확충한 것이 눈에 띈다. 북원소경(지금의 원주), 금관소경(지금의 김해)의 설치가 대표적이다. 수도인 경주가 한반도 전체로 보아 지나치게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기에 소경은 이 때문에 생기는 비효율성과 불편함을 극복하는 데 활용되었다.
(3) 대왕암의 전설
681년 7월 1일에 56세로 서거하였다. 유조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 동쪽 바다 대왕암 위에 장사하였다. [삼국유사]에 “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것이 화장을 하여 동해에 뿌렸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전설에는 자신의 사후 동해바다에 화장하여 뿌리면 자신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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