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중 가장 비극적이고 추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군부의 12·12 하극상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정권찬탈음모는 결국 80년 5월, 광주시민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으로 광주민중항쟁은 외형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에 따른 권력의 진공상태를 메꾸려는 일부 정치군인들은 광주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작전(작전명령:충정작전)을 계기로 장차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것이 '제5공화국'이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주체들이 영원히 승리한 것은 아니며, 광주시민들이 영원히 패배한 것도 아니었다.
사망자 166(무연고자 12기 포함)명, 행불자 64명, 상이 및 연행, 구금자가 3,642명 등 총 3,872명('99. 5. 10현재)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것은 공식통계이며 수사기간중의 불법연행자만 하더라도 3천여명이었으며 시위기간의 무자비한 연행은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사실상 패배가 아닌 역사의 승리였으며, 당시 광주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닌 부활의 영웅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그 당시에는 패배한 항쟁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 패배를 통하여 1980년대 반독재 민주의식과 민주화운동을 성장시키는 견인차로 등장한 것이다.
5·18이 민중항쟁으로 성격규정이 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 당시 정부에 의해 '5·18'이 '광주사태' '폭동' '국가전복을 노린 불순한 배후세력의 조종에 의해 발생한 내란' 등으로 발표된 뒤 광주시민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87년 6월항쟁을 통해 '80년 5월의 실체가 전국민에게 조금씩 알려졌고 '88년 6공정권이 들어선 뒤 국민화합을 모색한다는 미명하에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치상황이 만들어 낸 광주청문회를 통해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찬탈음모가 TV로 전국에 방영됨으로서 광주시민의 처절했던 10일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5·13담화에서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을 명확히 규정했다.
또한 5·13 담화조치 이후 진행된 "역사 바로 세우기"는 5·18특별법의 제정과 함께 80년 5월 광주를 무참히 짓밟은 신군부세력에게 '역사와 법과 그리고 정의에 의한 심판'을 받게 함으로써 전국민과 광주시민에게 '과거사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내란이라는 당시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아직도 살아있으며 재심을 통해서 반복되기까지 광주항쟁은 사법상으로는 지금도 내란이고 당시 참여자들은 폭도인 셈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은 아직까지도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 이후 광주에 공수부대를 증파한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진두지휘한 자는 누구이고, 광주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이며, 80년 당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고, 광주에서 사망한 양민은 정확히 몇 명인지 아직도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신군부의 주역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역사와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있는 지금까지 미궁속에 빠져있는 진상은 앞으로 우리 세대가 안고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좌표를 설정하려면 확실한 진상규명을 바탕으로 그 역사적 의의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광주민중항쟁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평가 하겠지만, 그간의 논의는 대략 다음과 같이 거론되고 있다.
첫째,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역사에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민중항쟁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를 통하여 4·19민주혁명을 부정하고 등장한 억압체제를 구축한 군사정권에 저항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땅의 민중항쟁을 통해 표출되었던 자주·민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그것을 한층 발전시켰던 것이다.
둘째, 광주민중항쟁은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역동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민중이 민족사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 그것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노동자·농민·빈민·학생·종교인·문화예술인·지식인·재야 등 모든 부문에 걸쳐 민족민주운동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성장되었다. 즉 이와 같은 민족민주운동의 성장이 모든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반성과 계승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당면과제를 인식하게 되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셋째, 서양의 역사와는 달리 그동안 우리의 역사에서는 권력에 대한 무력저항이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인간의 자연권인 저항권의 정당성을, 나아가 저항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까지 처음으로 공인받았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 권력자에 의해서 '무장폭도의 난동'으로 비하되었던 광주민중항쟁은 국가 차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다. 갑오농민전쟁, 의병투쟁, 등도 아직 공식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민중이 갖고 있는 권리가 광주민중항쟁애서 인정하게 된것이다.
넷째, 광주민중항쟁은 억압적인 유신체제를 계승한 전두환 정권의 강압적인 통치하에서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하여 결국 그 체계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각종 정보기구를 동원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자행하였지만,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터져나오는 저항의 물결에 허덕이다가 결국 좌초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민족민주운동의 동력이었으며 역사적 근거이기도 했다. 나아가 '제5공화국' 청산하는데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근거로써 과거의 부도덕한 정권을 청산하는 최초의 선례를 남겼다.
광주민중항쟁은 한 시대의 고통스러운 역사의 좌절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전진을 기약하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자리 매김 해야 한다. 1980년 이후 전개된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5·18광주민중항쟁이 우리 민족사에 무엇을 남기고 우리 후손에게 어떤 역사의식을 심어주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유신체제의 최후, 그리고 12·12반란
유신독재의 붕괴 - 10·26사건
가. 10·26사건의 정치적 배경
10·26사건은 기본적으로 유신체제의 지배집단과 국민사이의 대립관계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안보라는 미명아래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학문·양심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상당부분 억압한 전형적인 군사독재체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 특히 지식인층의 불만이 날로 고조되어온 19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변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유신체제가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뚜렷한 징후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났다.
이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엄청난 규모의 금권과, 관권을 동원하고도 불과 유효표의 31.7%를 득표한 반면에 야당인 신민당은 그보다 1.1%가 많은 32.8%를 획득했으며 통일당이 7.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를 위해 만든 유신헌법과 국민의 기본 생존권을 희생시키던 불합리한 정치체제와 경제정책에 대해 국민은 엄중한 경고를 내린 것이다.
제10대 총선결과는 유신정권의 유화책을 이끌어내어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면제로 석방된다. 그리고 1979년 5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표방하는 김영삼 - 김대중의 연합세력이 신민당의 지도부로 나섬으로써 국민대중에게 큰 희망을 줌과 동시에 유신정권에게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같은 대중의 희망과 유신정권의 위기속에 1979년 하반기가 시작되었다.
나. YH여공농성사건과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
한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갸날픈 여성노동자'들의 소위 『YH사건』이 발단이었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 4층 강당에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회장 장용호) 여자종업원 200명이 몰려와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회사를 계속 경영하여 작업을 하게 해달라"는 폐업조치 철회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상식을 초월하는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는데 이는 사건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제1야당인 신민당을 탄압·와해시키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계산된 행위였다.
이날 경찰은 '101호 작전'이라 명명된 진압작전을 위해 정·사복 경찰 1,000여명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174명의 YH여공들을 순식간에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YH무역 노동조합 간부인 김경숙씨가 심한 부상을 입어 중태에 빠졌고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등 제1야당에 대한 과잉폭력행위를 저질렀다.
정국은 급속히 냉각되었고 박정권은 곧바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8월 13일 윤종완 등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고 유신정권은 이 같은 분열공작과 더불어 YH사건과 관련하여 계속적으로 신민당을 비난해댔다.
그리고 9월 8일 오전, 서울민사지법 합의 16부(부장판사 조언)은 앞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집행을 정지시키고 정운갑씨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는 전무후무한 결정을 내린다.
아울러 유신정권은 김대중씨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범국민적 항쟁을 벌이겠다"는 9월 10일의 기자회견과 미 카터 행정부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뉴욕타임즈』와의 김영삼 총재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 국회법상 징계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 159명이 여당 의원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결의안을 기습처리해 버렸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YH사건으로 시작되어 야당 의원의 의원직 사퇴로까지 치닫는 일련의 정치적 사태를 보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혐오감과 분노가 전례없이 고조되었다.
더욱이 2학기 개교와 동시에 학생운동은 YH사건으로 시작되어 유신철폐 요구농성으로 전화되고 있었다.
다. 유신체제 붕괴의 전주곡, 부·마민중항쟁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 "유신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는 일단의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1,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시위가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자 학생들은 교문앞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여 오후에는 남포동 등 부산일대를 누볐다. 부산시민들의 열렬한 환호성과 참여속에 부산대생 중심의 '유신반대 시위대열'은 17일 새벽 1시까지 부산시내 11개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듯 했다.
17일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리자 이번에는 동아대 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시위에 합류하였고 18일 0시부로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유신정권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남포동 일대의 시민·학생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와 함께 "계엄철폐"를 외치는 야간시위를 하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최세창 준장이 이끄는 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하여 무차별적인 진압을 자행함으로써 부산시위는 일단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18일 아침,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던 도시 마산에서 경남대생 1,000여명이 휴교령을 무릎쓰고 교내시위를 벌인 뒤 오후 5시경 마산시내로 진출했다. 날이 어두워지며서 수만명으로 불어난 시민·학생 시위대는 공화당 경남도지부 사무실을 부수고 이어서 북마산파출소,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인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의 집과 마산시청, 법원, 마산MBC 등 유신체제를 유지·옹호해 온 19개소의 각종 공공건물을 공격했다. 유신정권은 39사단 병력 250명과 장갑차를 시위진압에 투입하였지만 시위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다음날 19일 밤에도 시위가 이어지자 19일 저녁 1,500여명의 무장군인이 마산시내에 투입되고 20일부터는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됨으로써 4일간의 "부산·마산민중항쟁"은 막을 내린다.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의 "부산·마산민중항쟁"으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1,563명이었는데 이중 500여명은 학생이었고 나머지는 노동자, 노점상, 샐러리맨 등 일반시민이었다.
라. 유신독재의 최후, 1979년 10월 26일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궁정동 안가 만찬회장.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후 18년 동안이나 장기집권해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그것은 지배세력내의 권력갈등 결과로 유신체재의 정치적 폐쇄성의 반영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유신체제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7년에 걸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겨울공화국'-시인양성우의 시 제목에서 표현하듯- 이 일거에 무너졌으나 유신체제는 국민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저항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다가올 비극은 여기에서 잉태되었고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는 사라졌으나 유신체제를 지탱하고 보위하던 유신세력의 힘은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특히 지배집단의 한 축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정치군인집단, 바로 이들 집단이 유신체제를 탄생시키고 유지해온 정치권력의 핵심이었으며 그들은 당시의 정치체제속에 엄존하고 있었다.
민주화의 후퇴
신군부의 등장과 정권탈취 음모
가. 신군부의 최규하정부 내각장악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마침내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8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의 도정에 나섰다. 제일 먼저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의 내각장악을 위한 세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비상계엄령의 유지였고, 둘째 합수부의 권한강화와 활동영역의 확대였으며, 셋째는 헌법개정작업의 지연이었다.
또한 신군부는 계엄령을 지속시키는 가운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사회심리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국민여론을 호도하는 K-공작계획을 치밀하게 준비, 진행시켰다.
먼저 신군부는 유신관료집단인 신현확 내각 장악에 나섰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수부장으로는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가 어렵기 때문에 공석중인 중앙정보부장 겸직이 절실히 필요했다. 1980년 3월말경, 전두환은 신현확 총리의 사무실에서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주장했고, 이에 반대하는 신총리에게 "1980년 1월 29일 석유값 59.4%인상 배후 의혹이 있어 조사를 지시했다"는 협박을 가해 신총리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냈으며, 4월 14일 최대통령은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이는 당시 중앙정보부법 제7조에 명시된 "중앙정보부장의 타직 겸직 금지"조항에 위배되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전두환은 4월 14일 이전에도 국무회의에 참석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회의진행을 위한 실무자로서 보고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겸직 이후부터는 실무자가 아닌 '주요각료급'의 일원으로 최규하 정부의 신현확 내각이 결정하는 정책방향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나. K - 공작계획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여 신현확 내각을 무력화시킨 것이 유신관료집단의 주도권 완전박탈 조치였다면 언론장악은 국민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의 장악이었다.
신군부는 정권찬탈을 위해 1980년 2월 1일, 보안사령부내 정보처를 복원, 기구를 대폭 확대한 후 사회 각계각층에 대한 치밀한 정치공작을 전개했다. 특히 보안사의 이상재 준위가 팀장인 '언론조종반'에 의해 1980년 3월경 작성된 'K(King의 약자)-공작계획'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K-공작계획은 1980년 당시 보안사령부의 대외비 문서로서 1989년 12월 29일, '전두환 청문회'를 앞두고 이철의원이 국회 5공특위와 광주특위 위원장에게 제출, 국회에서 공개한 것이다.
'K-공작계획'의 목적은 신군부의 집권을 정당화하도록 여론을 조작하는데 있다. 신군부는 '언론공작반'을 통해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해 안정세로 전환한다"는 방침에 따라 ① 보도검열단을 통한 봉사활동 ② 언론계 중진들과 개별 접촉한 후 회유공작 실시방안을 마련하여 중앙 일간지 및 방송사 등 언론사 사장 및 간부 94명을 차례로 접촉, 회유공작을 실시했다. 이 공작은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만이 "혼란의 확대재생산"을 막을 강력한 세력임을 주입시키기 위함이었다.
'K-공작계획'의 내용중 특이사항은 "공작업무 수행과정에서 수정 및 보완을 요할 시는 사전에 사령관의 재가를 득한 후 실시"라고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 'K-공작계획서'를 작성한 곳은 보안사령부이고 당시 보안사령관은 다름아닌 전두환으로서 전두환 자신이 계획과 실행, 실행과정상의 문제점 발생에 따른 수정·보완까지 일일이 간여할 만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권력찬탈 음모를 치밀하게 진행시켰다.
다. 충정훈련
한편 신군부는 정권찬탈을 위해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소위 '충정훈련'은 공수부대라는 특전부대를 중심으로 대도시 부근 일반부대까지 실시하였는데 이들을 '충정부대'라 했다. 강력한 충정훈련을 실시케 한 신군부는 대학가의 개학을 앞둔 3월 4일부터 사흘간 충정작전의 실효성을 검토하고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CPX 및 FTX 훈련을 실시하고 이어서 3월 6일 1980년도 제1차 충정회의를 소집했다.
이날의 충정회의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1, 3, 5, 9공수여단장, 20, 30, 26사단장 및 해당부대의 작전참모들이 참가한 가운데 노태우 소장이 사령관으로 있던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열렸다.
충정부대의 주력은 공수부대로 4월경 진압봉(길이 45∼70㎝, 직경 5∼6㎝, 재질 물푸레나무 혹은 박달나무)을 제작, 폭동진압 충정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충정훈련은 시위진압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공세적 진압 훈련으로써 시위대를 향해 돌격하여 와해시킨 뒤 재집결 불허와 분쇄 및 주모자를 체포하되 기동에 유리한 경무장을 하며 반드시 진압봉을 휴대하는 것이 훈련 실시목적이었다.
신군부는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을 '맹목적 저항세력'으로 규정짓고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 즉 투옥해야 한다고 결론지은 뒤 그래도 안될 때는 '강경한 응징조치'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광주항쟁 초기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시위확산을 방지하고 자진해산을 유도하는데 중점을 둔 경찰의 진압방식과는 달리 병력을 돌격시켜 시위대를 무지막지하게 분산시킨 다음 재집결을 분쇄하고 주모자를 현장에서 색출·살상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전술을 채택하고 훈련한데서 나온 결과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시위대의 머리와 목 등 급소만을 겨냥하여 특수하게 제작한 진압봉을 휘두르고, 총에 꽂은 칼로 찌르기까지 했으며 그렇게하여 붙잡힌 시위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옷을 벗긴 다음 트럭에 짐짝처럼 던져 군부대에 수감했으며 수감상태에서도 온갖 만행을 다하여 보복을 했다.
5·18광주민중항쟁
광주민중항쟁의 발발 -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가. 비극의 시작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을 의결하자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대를 투입했다.
특히 서울과 광주가 신군부의 주요한 공격 목표였다. 서울에는 1, 3, 5, 9, 11, 13공수여단이 배치되었고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수개월동안 오직 '시위진압훈련'에만 몰두해온 신군부의 정예부대로서 전투장비를 잔뜩 가지고 내려왔다.
공수부대는 유사시 적 후방지역 깊숙히 침두하여 비정규전을 수행하고 적의 비정규전을 대비하는 특수한 부대다. 평시에는 대침투작전 및 충정작전에 대비하여 교육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공수부대는 강한 훈련과 체력단련을 통해 육군 최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부대이다.
이 공수부대는 낙하훈련 등과 정기적인 천리행군 등의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임무의 특수함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훈련의 어려움은 일반 보병부대와는 다르게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시켜 최고의 군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특수부대를 박정희 정권 이래 소요진압을 위한 충정작전의 중요 수행부대로 사용하여 왔으며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당시에는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되어 무력 진압하였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7공수여단 33, 35대대 광주투입경위와 병력 및 출동장비 현황 일 시 내 용 출 처
5. 14. 13:40 특전부대 이동을 위한 차량 245대 지원지시 육본,
정기작전보고 80-5
17:05 885수자대, 전남 광주에서 7공수(금마)로 차량 31대 이동
5. 17. 22:30 부대 투입 작전명령 하달
22:37 7공수여단 33, 35대대 금마 출발 육본, 작전상황일지
☞ 자료출처 : 정상용외, 광주민중항쟁, 1990, 돌베개, 156쪽에서 인용
대대
구분
33대대 35대대 본 부 계 비고
출동 병력 45/321 39/283 10/76 148/1,143 장교 /사병
M16 실탄 24,600발 24,600발 600발 85,880발 개인당
60발
권총 실탄 154발 154발 84발 700발
캐리바50
630발/1정
개스탄
(사과탄) 100발 100발
400발
M60 실탄 3,200발 3,200발
12,000발
분말 개스
(CS) 3통 3통
12통
차
량 ¼톤 1대 1대
4대
2½톤 19대 18대
66대
☞ 자료출처 : 정상용외, 광주민중항쟁, 1990, 돌베개, 139, 140쪽에서 인용
나. 7공수여단과의 첫 충돌
계엄확대로 인한 당국의 연행을 일단 피한 전남대 총학생회 지도부는 계속 상황을 점검하면서 상호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학생지도부의 상당수는 이미 검거되었으며, 검거되지 않은 지도부와의 연락은 두절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불과 몇시간 뒤에 일어날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일단 몸을 피하게 된다.
그 결과 광주민중항쟁의 최초의 도화선이 된 18일 아침의 전남대 교문 앞 시위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나왔다가 계엄군에 의하여 제지를 당하게 된 학생들이나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고 했던 당초의 약속을 기억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나왔던 학생들에 의해 완전히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는 완전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가 교문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휴교령이 내린 사실을 말하면서 학생들에게 귀가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고, 10시가 넘어서자 그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100여 명의 학생들이 정문 앞 다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수가 200∼300여 명으로 불어나자 자연스럽게 노래와 구호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 진압을 개시하였다. 특수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와 맨손인 학생들의 저항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진압봉으로 가차없이 머리를 갈기는 공수부대원들에게 학생들은 부상자 십여 명을 남긴 채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냥 도망치지 않았다. 뒤로 밀려나는 와중에서도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광주역 광장에 재집결하여 대오를 정비한 300∼400여 명의 학생들은 우선 금남로 도청 앞 광장을 목표로 시외버스 공용터미날을 지나서 카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이들이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씨 석방하라''휴교령을 철회하라''전두환은 물러가라''계엄군은 물러가라'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시위대는 아직 소수였으며, 진압경찰에 대항하지 못하고 쫓겨다니는 정도였다.
다. 광주를 무차별 진압하라.-작전명령 '화련한 휴가'
공수부대는 아직은 광주시민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18일 오후까지의 학생시위는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경찰력만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7공수여단은 주둔지였던 대학교내를 나와 오후 1시경 수창초등학교에 집결하였다. 이어 오후 2시경 수창초등학교 부근에는 학생 60여명이 "계엄해제"구호를 외치며 공수부대와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오를 정비한 공수부대는 순식간에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무자비한 강제해산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후 4시경 7공수는 도청방향으로 전진하면서 금남로 및 카톨릭센타,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강력한 시위진압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시위진압을 개시하자마자 시위가담여부와 상관없이 도로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때리고 구타하였다. 또한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여럿이 몰려들어 무차별로 때리고 짖밟았다. 그리고는 쓰러진 사람들을 질질 끌고가 트럭에 실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위진압이 아니었다.
오후 5시쯤에는 청산학원 근처에서 처참한 살상극이 벌어졌다. 공수부대가 진입한 곳은 단 30분도 못되어 거리가 조용해졌으며 길 바닥에는 군데군데 핏물이 흥건히 고였다.
이날 계엄군은 전국의 모든 주요도시에 진주하였다. 그러나 계엄확대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학생시위를 감행했던 곳은 오직 광주 뿐이었다. 사실 학생운동 지도부의 지도력이 마비된 상태에 있기는 광주나 다른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의 학생들의 행동지침도 전국적으로 공통적이었다.
이미 18일 오후부터 학생시위를 통해 '김대중의 체포와 전두환의 쿠데타' 소식에 접한 시민들은 충격 속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김대중이라는 동향 출신 정치인의 핍박과 수난을 자신들의 그것과 동일시 해 온 광주시민들은 그의 투옥을 민주화에 대한 그들의 열망과 기대가 무참하게 좌절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시민들은 시위학생들에 대해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도 이같은 유혈극에 너무도 겁에 질려 항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7공수부대원들의 행동반경은 금남로 등 시내중심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뒤쫓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대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포박하여 연행해 갔다.
단지 소수의 학생들만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서로 격려해가며 7공수병력의 추격을 피해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을 뿐이다. 오후 5시 15분경 전남도청 옆 노동청 앞에 약 500∼600명정도가 모여 시위를 벌였지만 공수부대가 강력히 돌진하자 곧바로 해산된다. 오후 7시경 계림동 광주고 부근에 수백명의 청년, 학생들이 나타나 공수부대에 맞섰지만 역부족이긴 마찬가지였다. 밤 8시 15분경 금남로 카톨릭센터 앞에 학생, 시민 약 600여명이 대오를 형성하고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였지만 단 10분만에 해산당하고 만다,
5월 18일의 시위는 이것이 전부였다. 상무대에 있는 전남·북 계엄분소는 오후 6시 '계엄공고 제4호'를 발표하여 자정부터 새벽4시까지였던 통금시간을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로 연장하는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밤 11시 20분경에는 계엄군 1개 지대와 경찰 1개 분대씩을 묶어 광주시내 36개 주요지점에 전투경찰과 합동으로 배치시킨 뒤 삼엄한 경계를 폈다.
5월 18일의 7여단 33대대와 35대대 시위진압 행위는 광주시민을 상대로 한 학살극이라 불러야 할 만큼 무자비하고 광폭했다. 그들은 진압봉을 주로 사용했고 부분적으로는 대검을 진압무기로 사용했다.
2군사령부의 「계엄상황일지」에 의하면 5월 18일 하루 연행자가 대학생 1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시민 184명 등 405명이나 되었는데 이중 68명이 두부외상, 타박상, 자상(대검사용에 의한 부상) 등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전해진다.
5월 19일의 상황
가. 11공수여단의 광주 추가 증파
신군부는 7공수여단이 광주시내 도청주변 시위진압 출동이전인 5월 18일 오후 2∼3시경 광주에 11공수여단을 광주에 증파하기로 결정한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5월 18일 점심직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소장이 "광주사태가 악화될 조짐이 있어 3특전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주자 이를 11공수여단으로 교체할 것을 전언, 11공수여단이 광주에 증파된 것이다. 정호용 사령관은 11공수여단의 광주증파 이유가 "7공수여단의 2개 대대가 소요진압작전을 못하고 고전을 치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7공수여단의 광주시위진압 출동시간은 그런 결정보다 2∼3시간 뒤인 오후 3시 50분에서 4시 사이였다. 따라서 이날의 11공수여단 병력증파 결정은 광주현지 상황의 실제상황이나 현지 지휘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려진 것이다.
5월 18일 오후 3시부로 광주 출동명령을 받은 11공수여단은 오후 4시30분경 K-57(성남비행장)에서 C-123 수송기 5대에 탑승, 광주로 이동하여 오후 6시 30분경 광주 조선대에 도착하였으며 잔여부대 병력은 다음날 5월 19일 밤1시50분경, 조선대에 도착하였다.
11공수여단 출동병력 및 장비 현황
계 61대대 62대대 63대대 본부
162/1,038
(장교/사병) 43/277 43/306 42/275 34/180
구 분 종 류 수 량 탄 약 비 고
화 기 M-16 1,139정 개인당 60발 대간첩작전
기준에 의거,
각종 탄약을
휴대하였음.
50MG 2정
M-60 3정
M-203 81정
화 학 C.S.탄 1,143정
사과탄(M25 A7) 303정
화염방사기 6개
통 신 P-77 130개
U-87 18개
메가폰 12개
기 동 2.5톤 차량 4대
¾톤 차량 2대
¼톤 차량
방송차 1대
☞ 자료출처 : 평화민주당 광주민중항쟁 백서, 72, 73쪽에서 인용
나. 공포의 금남로
공포와 불안으로 하루를 보낸 다음날인 19일 광주지역은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고, 관공서나 기업체, 공장 등은 대체로 정상근무를 하였지만 일손을 거의 놓고 18일의 공수부대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한 상태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들이 시내 전지역에 걸쳐서 삼엄한 경비를 서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시민들은 그냥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시내로 나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자며 몇 명씩 짝을 지어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군중은 2,000∼3,000명으로 불어났으며,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10시 40분부터 경찰과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인 해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던 시민들은 그냥 쫓겨가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서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군중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4시경 모든 이동을 마친 11공수여단 병력 1,140여명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이다.
11시 30분경 다시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이 시작되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기사, 무등고시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린 학원생들 그 모두가 그들의 진압대상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그 안에서 젊은 사람이 발견되면 무작정 두들겨팬 뒤 연행하였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채 군 트럭에 실려갔다. 당시 광주지역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전명칭이 그러했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은 시내 중심가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 시가지 전역에 걸쳐서 자행되고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만행이 백주대로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19일 오후로 접어들면서 시위의 양상은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의 중심세력이 대학생에서 시민대중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는데 바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행위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트럭에 실려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손길을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경상을 입은 많은 부상자와 죽어가는 사람 수에 비해 광주 시내 병원시설로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도 정부측에서는 광주에서의 사태와 관련하여 아무런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각종 보도매체들도 계엄당국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관련된 보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19일 밤, 시위를 마치고 해산한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저주와 분노의 일념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대대적인 민중항쟁의 조건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항쟁은 신군부 스스로 자초한 또는 의도적으로 야기한 것이다.
전투교육사령부가 항쟁이 끝난 직후 군의 시각에서 정리한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은 광주시민이 공수부대에 맞서 죽음을 불사한 항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해산보다는 체포 주안으로 협공, 소요진압간 지역주민이 보는 가운데 폭동군중과 격렬한 충돌 발생, 도피군중을 추적·체포하는 과정에서 기물파괴, 가족위협에 대하여 시민들의 야만적 감정 폭발"
"소요진압중 발생된 사상자 및 체포자의 처리 지연과 장기간 노상방치로 주민들의 감정을 촉발"
군의 자료는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7공수와 11공수여단의 초기진압작전은 정당한 진압이니 과잉진압이니 하는 논쟁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의 명백한 학살이었다.
한편 이날, 미국의 태평양지구 공군사령관인 휴즈 중장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전술 공군기들은 매우 빠른 시간내에 한국전선으로 출격할 것이며, 어떠한 북한의 공중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5월 20일의 상황
가. 31사단의 반발과 3여단 증파
7여단과 11공수여단은 형식상 광주의 31사단에 배속되었지만 실질적 통제는 신군부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 공수부대들은 31사단과 전교사에 작전상황조차 보고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웅 31사장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18일 저녁까지 시내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외부로부터 광주시내의 공수부대 만행을 전해들은 정웅 31사단장은 '31사단 작전명령 제3호'를 통해 유혈진압이 아닌 무혈진압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군 충정작전지침 추가지시'를 통해 광주에서 '바둑판식 분할 점령'과 '시위대를 조기에 분할 타격 체포할 것' 그리고 '소요군중의 도피방지책 강구'와 더불어 '과감한 타격'을 가하라고 더욱 강력한 시위진압명령을 내린다.
또한 신군부는 19일 오전 6시 30분경 3여단 5개대대를 다시 광주에 증파하기로 결정했다. 7여단이 시위진압에 투입되기 전에 11여단의 광주 증파 결정이 내려진 것처럼 11여단이 광주시내에 투입된 19일 오전 10시보다 훨씬 이전에 증파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5월 19일 밤 12시, 청량리역에 도착한 3공수여단은 5월 20일 새벽 1시와 1시 10분에 제1 제대 및 제2제대로 부대를 나누어 열차를 이용, 서울을 출발하여 5월 20일 아침 7시 3분과 7시 35분경 광주역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광주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총원은 3,400여명으로 불어났다.
3공수여단 출동병력 및 장비 현황
계 11대대 12대대 13대대 15대대 16대대 직할대
255/1,137
(장교/사병) 40/198 47/192 45/205 45/206 44/220 34/116
구 분 수 량 탄 약 비 고
화 기 M16소총 1,307정 개인당 60발 대간첩작전 기준, 각종 탄약휴대
권총 85정 개인당 14발
M60 기관총 5정 정당 2,000발
M203 104정 개스발사기 : 24정
장약 : 102발 자대 제작, 지역대당 1정씩 사용
화 학 화염방사기 9대
E-8 발사통 6대
콤프레샤 : 2대
개스탄 2,880발 C.S.탄 : 1,837발
사과탄 : 1,043발
진압봉 2,102개
추가 수령 : 700개
통 신 P-77 145대
U-87 7대
대대당 1대씩 사용
통신근무대대 2대 사용
기동 ¼톤 차량 12대
방송차 1대
레카차 1대
나. 항쟁의 징후와 첫 발포
지난밤부터 내리던 비는 20일 오전 9시경까지 내리다가 그쳤다.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비를 맞으며 변두리 지역에서부터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고 있었다. 시내에는 여전히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고, 어제의 공수부대 만행으로 보아 오늘은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집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시위대와 공수부대의 접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공수부대는 어제와 좀 다른 데가 있었다. 그들은 M16소총에다 대검을 착검하지도 않았고, 말씨도 공손했다. 술 냄새를 풍기거나 눈이 벌겄게 충혈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20일 오전은 이와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별다른 사건 없이 대체로 소강상태를 이루면서 지나갔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광주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어림잡아도 10만이 넘는 인파가 금남로를 뒤덮었다. 이제는 시장의 상인들까지 장사를 치우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내의 도처에는 [투사회보]라는 지하유인물이 수천매식 뿌려지고 있었다. [투사회보]는 윤상원이 중심이 된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 관제언론과 정부의 거짓된 선무방송을 이겨내기 위하여 발행한 것이었다.
오후 3시, 금남로의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드디어 경찰의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금남로의 시위군중과 경찰 사이에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시민들은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몰려드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또다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과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그중에서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결사적이었다. 도청 앞 광장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에는 시민들의 대열이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흥분한 택시운전사들까지 시민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할 것을 결의했다. 200여대의 자동차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무등경기장을 출발하여 저녁 7시쯤 금남로에 들이닥쳤다. 이 엄청난 자동차 시위행열은 일시적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다시 새로운 불을 질렀다. 차량행렬이 금남로에 이르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저지선 앞에서 대치중이던 군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이날 저녁 도청 앞 금남로는 시위대와 계엄군의 공방전으로 지옥이 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개머리판으로 차량의 헤트라이트를 부수며 전진하였고, 닥치는대로 운전기사들을 끌어내려 두들겨팼다. 그러나 잠시 물러나던 시위대는 공용터미날에서 버스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와 합류하여 계엄군을 압박하였고, 계엄군 저지선은 금남로 1가 전일빌딩 앞까지 후퇴하였다. 7시 30분이 되면서 금남로에는 전체적인 형세로 보아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고,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혈전이 계속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시위대들은 시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으며, 밤이 깊어갈수록 쌍방의 공방전은 고조되었다.
이윽고 MBC와 KBS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정부의 발표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태도에 극도로 흥분한 시민들이 더 참지 못하고 방송국에 불을 지른 것이다.
이제 시내 곳곳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다소 경험을 가진 몇몇 지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아직 무기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무기가 될만한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계엄군에 저항하고 있었다.
밤 11시경 광주 신역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신역을 지키고 있던 3공수여단과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고 시위대의 맨 앞의 시민들이 쓰러졌다. 또한 비슷한 시각에 광주세무서 앞과 조선대학교 부근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계엄군은 바로 주요 거점만을 장악하고 있을 뿐항쟁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시외로 통하는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면서 광주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5월 21일의 상황
가. 마침내 가자, 도청으로!
20일 자정이 지나 21일 새벽이 되어도 시민들의 항쟁은 그칠 줄 몰랐다. 새벽 1시에 시민들은 세무서로 몰려가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국민들의 삶과 복지를 위하여 쓰라는 세금이 자신들을 죽이고 두들겨팬 군대와 그들이 갖고 있던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시민들은 경찰서나 기타 공공건물을 오히려 보호하는 분위기였으므로 방송국과 세무서 방화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초기에 파출소를 공격했던 것과는 그 이유가 질적으로 달랐다.
항쟁 나흘째로 접어든 21일 아침 지난 새벽의 광주역에서 사망한 시민의 시체 2구가 시민들의 손에 들어왔다. 시민들은 손수레에 시체를 싣고 대형 태극기로 덮어 천천히 시내로 나아갔다.
시위대의 식사는 각 동네 아주머니들이 준비하였다. 시장 주변에서는 쌀과 반찬을 모아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제공하였으며, 그외에도 각종 음료수와 부식 등이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전달되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를 메운 10만여명의 인파 속에는 쇠파이프나 몽둥이로 원시적인 무장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무렵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의 담화문은 '광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방화·선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계엄군의 자위권을 강조함으로써 발포명령이 이미 내렸졌음을 암시한 셈이다. 그날 오전 10시 10분경에는 벌써 도청광장에 있던 공수부대에 실탄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나. 도청앞의 집단발포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애국가에 때맞춰 일제히 요란한 총성이 터져나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들이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는 시민들을 겨냥하여 사격을 실시했다.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을 내릴때까지 약 10분간 계속되었다. 이로써 광주시민들이 간절하게 품고 있던 소박한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의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금남로는 피바다를 이루었다. 시민들로 가득찼던 거리는 적막에 빠졌고 죽은 이들의 피와 부상자들의 신음만이 금남로를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앞에 시민들은 넋을 잃고 분노와 공포감으로 치를 떨었다.
이 집단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당했는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서 내용을 종합해볼 때 이곳에서 최소한 54명 이상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이날 도청앞 집단발포를 명령한 자는 누구인가? 광주특위 청문회에 불려나온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① 시위대가 먼저 발포했다 ② 실탄은 31사단 병력이 제공한 것이다 ③ 상부로부터 발포명령은 없었으며 대대장급 이상의 현장 지휘관들도 발포명령을 하지 않았다 ④ 정당방위 차원에서 누군가가 먼저 발포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항쟁 1년후 육군본부가 각 부대의 상황일지를 종합·검토하여 정리·편찬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는 총과 실탄이 동시에 피탈당한 최초의 사례를 5월 21일 오후 2시 30분경 나주경찰서 삼포지서, 영광파출소, 금성파출소, 수안파출소의 예비군 무기 피탈과 오후 3시 50분경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로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1988년 12월 21일 광주특위 제21차 청문회에서 80년 당시 광주로 투입된 11공수여단장 최웅은 "예하 대대장들이 그전 -도청앞 발포- 부터 벌써 실탄을 달라고 했지만 절대 발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21일 아침부터 우리는 윤흥정 사령관에게 강력하게 철수를 요구했다. ………… 상황이 너무 급히 돌아가고 보니까 부하들의 생존을 보장해주어야 하겠고, 불필요한 충돌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병력을 빼야 되겠다, 이런 강한 의지로 한단계 높혀서 결심권자에게 요청을 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윤흥정 사령관은 최웅 11공수여단장의 이런 건의를 받은 사실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21일 서울에 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을 받았다. 정호용은 "사태가 악화되자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아와 나는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불가 명령을 내렸다"고 1988년 5월의 월간「경향」이태원 기자와의 「정호용, 광주사태 책임자 밝히다」라는 인터뷰에서 그 내용을 말한 바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최정예부대인 공수부대의 지휘관들이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현지사령관에게는 발포건의를 하지 않고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을 보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도청앞 발포 명령 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명예로 아는 군인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부하들에게 발포책임을 전가하려는 이들의 행태는 4·19당시 발포명령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고 사형을 감수한 최인규를 떠올리게 한다. 발포명령 책임자를 밝히는 일은 광주항쟁 진상규명의 핵심적인 사항이지만 진실을 규명하기에는 그간 신군부가 구체적인 핵심증거를 5공화국 7년동안 모두 없애버려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다. 시민군 탄생과 공수부대 철수
시민들은 무장을 서둘렀다. 계엄군의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들도 총이 필요했다. 총을 확보하기 위하여 시위대중 일부는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로 달려갔다.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나마이트와 뇌관이 확보되었고, 그외 각지역의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는 카빈 소총 등이 획득되었다. 획득된 무기들은 즉시 광주시내로 반입되어 청년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들 무장시위대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고,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아군'으로 간주되었다. 무장한 시민군은 주로 광주공원에 있는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았다.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정식 발포가 시작된지 2시간 20분 정도가 지난 21일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를 시작하였다. 시가전은 도청을 중심으로 전남대 의대 근방, 노동청 근방, 공원 근방, 금남로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정예 공수부대와 비조직적인 시민군이 전투를 벌임에 따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시민군들사이에 자발적으로 전투지도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들 지도부들은 무기를 소지한 사람들을 10여 명씩 조를 나누어 편성하였다. 이들은 각각 조별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 시내 주요지점으로 배치되었다.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가자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 총퇴각이결정되었다. 시민군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계엄군은 길 양옆에다 M60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도청 뒷담을 넘어 철수했으므로 철수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시민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녁 8시경 시민군 일부가 총을 쏘면서 도청 안으로 뛰어들면서 드디어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의 전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이날의 총격전으로 광주 시내의 모든 병원들은 총상환자로 만원이었다. 버스나 소형차량들은 주로 부상자나 시체들을 병원으로 실어날랐다. 의약품이나 일손도 태부족이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글자 그대로 신명을 다했다. 또한 병원 앞에는 시위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한 가정주부, 아주머니, 아가씨들이 헌혈을 하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어린이까지도 팔을 걷고 달려왔다. 적십자병원 앞에는 인근 술집아가씨들이 '우리도 깨끗한 피를 가졌다'고 절규하며 헌혈을 간청하고 있었다.
이날부터 전개된 새로운 사태의 하나는 항쟁이 더 이상 광주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목포를 비롯한 전남지역 일원으로 광범위하고도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이날 광주 시내에 거주하던 미국인 약 200명은 미리 송정리로 빠져나가 군용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피신하였으며, 송정리 공군기지에 주둔해 있던 미공군은 그곳의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 퇴각은 한편으로는 광주시민들의 투쟁의 결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의 전술적인 작전이기도 했다. 계엄군은 이미 '광주지역의 봉쇄-내부교란-최종진압'이라는 단계적 작전개념을 수립하고 있었다.
한편, 시내의 모든 질서는 '시민군'에 의해 자체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5월 22일부터 25일까지의 상황
가. 시민공동체, 광주
항쟁 5일째 되는 날이 밝았다. 지난 저녁에 그토록 날뛰던 계엄군들이 물러나고 시민군들이 도청을 장악하자 시민들은 그러한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도청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광주시민의 계엄군에 대한 초기 저항은 수세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으며,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자기방어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항전이 담고 있는 역사적인 내용은 훨씬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모두 승리감을 만끽하며 높은 시민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혼란 속에서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잔해들을 치워내고 시내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광주공원에는 지난 밤의 지역방어전투에 참가했던 '시민군'들이 모여들어 시민군의 재편성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민군'이 해야 할 일은 자체조직과 병력을 통제하여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다시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우선 계엄군이 버리고 간 물건들로 어수선한 구내를 정돈한 다음,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했다.
상황실에서는 차량통행증과 시내 주유소의 유류를 보급받기 위한 유류보급증, 상황실 출입증 등을 발부하는 한편, 외곽지대에서 자체방위를 맡고 있던 시민군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편성, 출동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외부에서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 지점을 차단, 봉쇄하고 있었으며, 시 외곽의 야산을 중심으로 매복하여 시민군이 통과하려 하면 사격을 가하였다.
나. 수습대책위원회 구성과 역할
한편 금남로와 도청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은 도청앞에 모여 무엇인가 만족할만한 조치가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낮 12시 30분경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 20여명으로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오후 9시경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유지급 인사들의 [일반수습위]는 주로 계엄사 측과의 협상활동을 했으며 [학생수습위]는 실질적인 대민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학생수습위는 장례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으로 나누어 당일 계엄사에 요구한 7개항의 요구조건을 홍보하고 무질서하게 돌아 다니는 차량을 통제했으며 엉겁결에 총을 들었다가 버린 총이나 총을 놓고자 하는 사람들한테서 총을 받아 300여정을 수거했다.
두 수습위는 이날까지는 혼연일체가 되어 활동했으나 계엄사가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무장해제를 요구하는데서부터 두 수습위 모두 강온파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시민수습위의 온건파(사실상 투항파)는 축출되고 학생수습위는 24일 저녁부터 강경파(투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다. 5월 23일의 상황
시민들이 광주시 전역을 장악한지 이틀째인 23일, 시 외곽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지만, 아직 시내는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이날도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시장 주변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으며, 밤새워 경계근무를 하던 시민군들에게 앞다투어 식사를 제공했다.
이날부터는 상가들도 띄엄띄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모여든 시민들로 도청앞 광장은 거의 5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도청앞 광장 맞은편 상무관에는 시체를 담은 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관이 부족하여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체들도 무명 천에 덮여 있었다. 입구에는 분향대가 설치되어 향이 피워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분향하고 있었다.
한편 지난 밤에 구성된 학생 수습대책위원회는 일반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이 모두 귀가한 상태에서 밤을 새워 대민질서, 홍보, 장례, 무기회수 문제 등을 토의했다. 이들은 다른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무기반납 문제는 팽팽한 대립을 보였다. 무기를 일부 반납하여 그것을 조건으로 시민요구사항을 협상하자는 문제를 놓고 두 세력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라. 수습위의 내부갈등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에서의 갈등, 시민군과 수습대책위원회의 갈등, 이렇게 상이한 의견들이 끝내 화해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은 항쟁 6일째인 5월 24일이었다.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학생수습위'에서는 김종배, 허규정 등의 강경한 주장이 관철되어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이 결의되었다.
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일부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세째, 5·18 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네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이로써 학생수습위는 강경파(투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온건파(협상파)가 한걸음 물러섰으며 무기를 무조건 반납하자는 시민수습위의 온건파(투항파)는 이미 전날 축출을 당했다. 당시 시민수습위에는 시민들의 신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인사들이 끼여 있었고 그들의 태도는 종잡을 수 없었다. 이들의 행태를 바탕으로 학생수습위의 온건파까지 무조건 투항하자는 사람들로 취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분류라고 볼 수 있다. 학생수습위의 위원장이던 김창길(전남대 농대 4년)은 당시 전남·북계엄분소 김기석 부소장의 양식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협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었다. 김창길은 시민수습위원들과 동행하여 학생대표로서 김기석 부소장과 담판한 적이 있으며 김부소장의 고뇌에 찬 태도에 신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날도 각국 외신기자들의 취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사실보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내기자들의 취재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보도를 하는 외신기자들에게는 협조해주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국내기자의 도청 출입은 상당한 통제를 받았지만, 외신기자들의 취재영역은 훨씬 자유스럽게 개방되었다.
23일 이후 광주 시내는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의 의견대립으로 지도력이 흔들린데다가 정보요원들이 잠입하여 교란작전을 편 관계로 커다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25일 아침 8시에는 독침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도청 안에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후일 이 사건은 정보당국의 교란작전이었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마. 광주시민 자발적 질서회복, 공동체 실현
그러나 '수습위'내에서의 갈등이 커져가는 것과는 달리, 시민들은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시장과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복지단체에 대한 식량공급이나 전기, 수도 등은 관련공무원들의 지원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결되고 있었다. 병원들은 한때 항쟁기간 동안에 발생한 수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의 헌혈로 혈액원마다 피가 남아돌 지경이었다.
치안유지력이 매우 약화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서도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범죄율이 오히려 평상시보다 훨씬 낮았다. '수습위'나 시민군들이 필요한 돈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해결되었으며, 300∼400여명에 이르는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 준 밥으로 해결되었다. 그 수는 줄었지만 시민군도 지도부의 의견대립과는 관계없이 대부분이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도덕성과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에 이어 25일에 이르자 '수습위'의 온건파는 그날밤 모두 도청을 빠져나가고 저녁 10시 드디어 최후까지 투쟁하기를 결의한 항쟁지도부가 탄생하였다. 새로운 지도부는 학생수습위의 일부 투쟁파와 청년운동권, 그리고 그동안의 무장투쟁 국면에서 전면으로 부상한 기층민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지도부는 무기반납을 중단하고 투쟁의 조직적 지도를 위하여 역할을 분담했으며, 도청 내부의 행정체계를 잡고 민중생활의 정상화를 도모하려고 했다. 그들의 전략은 '일면투쟁, 일면협상'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자위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이 총공격해오면 도청 무기고에 있는 다이나마이트를 폭파하겠다는 위협적인 협상조건을 계획하였다(이들은 그때까지 그 다이나마이트의 뇌관이 제거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대치상황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하여 모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사항도 검토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실적인 전망이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그들에게 그만한 역량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신군부의 광주무력진압 '상무충정작전'
가. 죽음의 행진
5월 26일 새벽 5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시민군이 탈취했던 계엄군의 무전기를 통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었다. 전 시민군에 비상령이 하달되었으며, 일반 수습위원들중 이성학 장로, 김성룡 신부 등 일부는 농성동으로 달려가 도로 위에 드러눕기도 했다. 계엄군의 탱크는 시민군의 바리케이트를 깔아뭉개 버리고 1Km 쯤 밀고 들어와 한국전력 앞길에 진을 쳤다.
26일 밤 도청 안에서는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한 것을 예상하고 일부 사람들이 도청을 빠져 나갔다. 항쟁지도부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이미 궐기대회에서 사회자를 통해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만 남아달라는 말을 전한 바 있었다. 이렇게 해서 YMCA에 모여 도청 항쟁지도부에 합류한 사람들이 150여 명이 되었다. 이중 80여 명은 총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60여 명은 고등학생 및 군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었으며, 여학생도 10여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나. 상무충정작전
군의 자료에 의하면 충정작전은 5단계로 나누어지는데 1단계(5. 17 이전)는 경찰력에 의한 데모 진압작전, 2단계(5. 18∼5. 21)는 계엄군에 의한 데모 해산 및 진압작전, 3단계(5. 22∼5. 23)는 도로차단 및 광주 봉쇄작전, 4단계(5. 24∼5. 26)는 선무활동 및 상무충정작전 준비, 5단계(5. 27)는 상무충정작전의 실시로 진행되었다.
5월 21일 상오의 대책회의에서 공수부대를 외곽으로 재배치하고 "5월 23일 이후 폭도소탕작전 실시"를 결정한 신군부는 광주시민의 저항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기 위한 채비를 서둘렀고 충정작전 5단계인 '상무충정작전'을 통해 광주시민의 저항을 말살하기로 결정한다. 특히 '상무충정작전'에서 도청진압작전에 3공수여단 11대대의 1개 지역대를 특공대로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수류탄으로 중무장 시켰다.
3공수여단 특공조 휴대장비 M16 수류탄 방탄조끼 깨스탄 스 턴
수류탄 특 수
화학탄 오 성
신호탄
80정,
정당140발 중대당3발 개인당1착 중대당 2발
(방독면) 전체 10발 전체 10발 중대당 1발
☞ 자료출처 : 평화민주당 광주민중항쟁 백서, 156쪽에서 인용
5월 27일 도청, 새벽의 마지막 불꽃
가. 도청진압작전
공수부대의 특공조는 26일 오후 6시에 도청의 항쟁지도부를 '소탕'하기 위한 예행연습을 완료했다. 이들은 밤 11시경 이동을 시작,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하여 조선대 뒷산에 집결, 작전계획을 최종 점검한 후 3시와 3시 30분경에 각기 도청,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다.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부대 및 결과 부 대 병 력
(장교/사병) 목 표 행동개시 점령완료
특공부대 3공수여단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14/66
33/224
4/33 도 청
광주공원
전일빌딩
YWCA
관광호텔 01:00
01:10
01:00 05:00
05:06
04:40
계 53/323
공수부대의 특공조는 26일 오후 6시에 도청의 항쟁지도부를 '소탕'하기 위한 예행연습을 완료한 후 도청을 기습타격할 임무를 맡은 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 11대대(대대장 임수원 중령) 제1지역대(지역대장 편종식 대위)는 M16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을 하였다. 3공수는 물론 7, 11공수여단 병력까지 얼룩무늬 제복대신 일반보병 전투복을 입고 방탄조끼를 착용했다. 20사단 역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작전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도청진압 특공조는 27일 밤 1시 30분을 전후하여 조선대학교 뒷산에 집결하여 작전계획을 최종 점검한 뒤 각기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고 다른 공수대의 지역대들도 시내 주요지점을 향해 골목길을 타고 침투하기 시작했다. 또한 광주시 외곽에 봉쇄선을 펴고 있던 20사단은 새벽 3시 30분까지 사단의 전병력이 중심가를 포위한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하여 포위망을 압축하였다.
항쟁지도부는 26일 밤, 죽음을 불사하고 남아서 싸우기로 한 시민들과 기존의 시민군들을 모아 전투조를 편성하였고 궐기대회가 끝난 후 YMCA에 남은 150여명을 기존의 시민군들과 섞어 도청을 중심으로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전일빌딩 등의 주요지점에 배치했다.
계엄군은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광주시와 전남 일원 사이의 전화를 두절시켰고 곧이어 시내전화선도 모두 차단해버렸다. 전화가 끊어지기전 시민들의 제보로 계엄군의 진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항쟁지도부는 도청에 비상령을 내렸고 조용히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보부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했다.
박영순과 이경희가 홍보차량에 올라 새벽 3시까지 광주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목이 터져라 가두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요……." 그녀들의 애절한 부르짖음은 그후 오랫동안 광주시민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된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청의 시민군은 도청 전면과 측면에 2∼3명씩 1개조로 담장을 따라 배치되었고 도청안에는 1층부터 3층까지 유리창 옆에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가 맹렬히 총을 쏘아대자 곧이어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하여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 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그야말로 '폭도소탕작전', 바로 그것이었다.
동이 터오기 사작하는 오전 5시 10분경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전일빌딩, 관관호텔 등이 이미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당했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났다. 완전히 소탕했음을 확인한 3공수 특공조는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한후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 왔다.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폭도'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계엄군은 작전을 개시한지 약 1시간 30분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짓고 항쟁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80년 5월 광주민중의 무장투쟁도 열흘간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항쟁의 확산
5월 21일의 도청앞 집단 발포를 계기로 항쟁은 광주시내를 벗어나 전남 일원으로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항쟁의 불길이 광주 이외의 지역인 화순, 나주, 함평,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지로 번져간 것이다. 21일 오전, 아세아 자동차공장과 각종 차고에서 차량이 시위군중에게 대거 획득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는 광주 시내에만 국한되어 고립적으로 진행되었던 민중항쟁이 전남 도내 각 지방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간 것이다. 최초 시위대는 보다 전국적인 항쟁의 확산을 목적으로 전주·서울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우선 항쟁이 전남 이외 지역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 한 계엄군이 호남고속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한 결과 주로 전남 도내 서남부에 있는 각 시, 군으로 진출하였다.
광주항쟁이 확산되는 경로를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항쟁이 발발한 지역이 주로 광주 이남 서남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전남지역과 다른 여타 지역을 분리하여 전남을 고립시키려는 신군부와 계엄군의 전략·전술에도 원인이 있지만 전남에서 항쟁이 발발한 대부분의 지역이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간 시위대에 동조하여 항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또한 전남일원의 경찰력 대부분이 광주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근 도시의 경비가 취약했다. 각 지역의 민중들은 그 전에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하여 처참한 학살이 자행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감정적인 분노에 머무르다가 광주에서 온 시위대에 의하여 그 분노가 실천적인 저항으로 폭발한 것이다.
광주항쟁과 미국
가. 광주항쟁 당시 미국의 입장
5월 22일 미 국방성 대변인 토머스 로스는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며 "지금까지 북한군이 한국의 현 상황을 이용하려 한다는 움직임이나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80년 5월 22일 강인섭 워싱턴 특파원 보도)
또 이날 미 국무성 대변인 호딩 카터는 광주사태에 대한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한 광주의 소요사태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하며 이 사태와 관련된 모든 당사자에게 최대한 자제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인 사태수습방안을 모색하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불안상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 미국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이다"(동아일보, 1980년 5월22일 보도)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한다.
나.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이양
이같은 미국의 일련의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고 미국은 과연 신군부의 광주무력진압에 어떤 입장과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1980년 5월 16일의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과 관련해서 파악할 수 있다.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한·미연합사령관은 요청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군부가 20일에는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한·미연합사에 '부대이동에 관한 문의'를 하였다. 이에 위컴은 '워싱턴에 있는 상관들과 협의한 후 동의(agreed)'한 것이다.
또한 미 행정부는 한·미연합사가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33사단 1개 대대의 작전통제권을 해제해 준 사례가 있다.
5월 23일, 육군참모총장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확대에 대비, 광주지역 질서유지를 위해 5월 23일 12:00부로 33사단 1개 대대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는 부대사용 협조문"을 보냈다.(육군본부, 육군참고자료지-작전명령 및 지시의 육본 작상전 제0-232호 인용) 그러자 연합사령관은 즉각 "승인"한다는 전문을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냈다. 이에 따라 33사단 101연대 제2대대는 23일 12시25분에 성남비행장에서 광주투입작전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나 실제 광주에는 투입되지는 않았다.
미국행정부가 남침의 징후가 전혀 없었는데도 '광주사태가 더 격화될 경우 남침할 수도 있다'는 식의 경고를 계속한 것은 일반 국민이 광주항쟁을 불안하게 생각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광주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무력진압을 정당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미국은 12·12쿠데타이후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옹호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의 의의
광주민중항쟁의 부활
광주의 거리는 평정을 회복했으나 그것으로 항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최초로 보여준 것은 항쟁의 와중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 의해서 였다. 이들은 항쟁 이듬해에 [5·18의거 유가족회]를 발족시키면서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당국에 대한 유가족들의 건의 및 요구창구를 일원화하기로'결의했다. 이어서 1982년 6월 13일에는 항쟁때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1차 발기인 모임을 갖게 되었고, 결국 그해 8월 1일에는 광주 무진교회에서 18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5·18부상자 무등산 친목회](후에 '5·18광주의거 부상자회'로 개칭)를 발족시키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한 해가 지날 때마다 여러 개의 [5·18 유관단체]가 발족되었다. 이들은 '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그날의 항쟁을 되새기는 행사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사회운동 세력으로 떠올랐다.
한편 광주 5월항쟁을 계승하려는 시민·학생들의 몸부림도 그치지 않았다. 최초의 저항은 항쟁이 진압된 지 3일째인 5월 30일 서강대 학생 김의기가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발하는 글을 뿌리면서 서울기독교 회관에서 투신한 것이었다. 이후 광주사태의 진상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이 전국 도처에서 계속되었다. 또한 항쟁 당시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도와주었던 미국에 대한 저항은 '80년 12월에 일어난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그 첫 봉화가 올랐다. 이후 반미운동은 계속 확산되어 '82년 3월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85년 5월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폭압정치도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투쟁인 '87년 6월항쟁에 의해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결국 '6·29선언'을 통해 전국민의 민주화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88년 13대 여소야대의 정국상황속에서 '5공청산을 위한 5공비리 특위와 함께 광주청문회'가 개최되어 '80년 5월 광주항쟁의 실상이 전국민 앞에 낱낱이 공개되었다.
이후에도 사회 각계각층의 민주화투쟁과 노력에 의해 '80년 당시 국민이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를 후퇴시키고 현정을 유린한 신군부세력이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에 의한 사법적 심판을 받게 됨으로써 비로소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과 명예가 회복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의의
'80년 5월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타오르던 광주민중항쟁의 불꽃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함께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면서 그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로 지켜주고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이었으며, 오욕의 역사가 아니라 긍지의 역사였다. 광주시민들의 자랑과 긍지는 단순한 향토애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쟁기간을 가장 뜨겁게 살았던 시민들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따라서 권력의 탄압이나 각종 언론의 왜곡선전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광주시민들이 체험한 '광주의 진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우선 거의 모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폭력에 굴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싸웠다는 점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항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은 한 두 명의 영웅적인 항쟁이 아닌, 시민 전체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에 저항했으며, 결국은 승리하였다. 당국에 의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되면서도 광주시민들은 비인간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길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 길을 걸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항쟁의 전 기간 동안 광주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위기를 가장 인간다운 삶의 협동으로 대처했다는 점이다. 광주시가 계엄군에 포위된 채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대중매체와 군 정보요원을 통한 교란작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광주시민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살았다.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피가 부족한 부상자에게는 피를 나누어 주었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는 시민들 누구나가 달려들어 그 일을 해주었다. 항쟁지도부가 수습의 방법을 두고 고심할 때 일반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나갔던 것이다.
세번째로 광주시에서 계엄군이 퇴각하고 시민군이 시내를 장악한 이후 다시 게엄군이 진주할 때까지 6일 동안 광주의 시민들은, 특히 이 지역의 민중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기간 동안 광주시는 공식적인 치안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치안체계를 유지하였다. 그토록 많은 총기류가 시민들의 수중에 있었지만, 그로 인한 불상사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이나 금은방 등 평소 범죄자들이 노릴만한 곳에서도 이 기간중에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세계민중항쟁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광주시민들은 성숙한 민주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견지하였다는 점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이 오로지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시민봉기였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공격을 받은 곳은 그들을 억압하는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곳이거나 사실보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방송국과 같은 보도매체들이었다.
그러나 시민군과 계엄군의 싸움은 정당성과 도덕성이 아니라 물리력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구식 개인화기만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온갖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계엄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시민군은 항쟁기간 쌓아왔던 모든 기대가 무너지며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 계엄군도 광주시민들 마음 속에 이미 뿌리깊게 자리잡은 자랑스러움과 긍지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 다시 우리들 주변에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지방에서 일어난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엄청난 물리력을 앞세운 군부의 진압작전으로 일단은 좌절되었지만 그것은 실패한 역사로만 기억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거로서 오늘의 우리에게 그 교훈과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하고 있다.
먼저 광주항쟁은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80년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사회운동 진영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혈맹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인식은 급속하게 깨져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80년 광주항쟁 이후 반미운동의 고양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을 가져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80년 5월의 광주를, 나아가 '80년 봄의 민주화운동을 부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일관하였다. 그때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모아진 것은 이른바 '5월투쟁'이었다. '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억압적인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국민들의 단합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독재체재가 어느정도 불식되었으며, 정부도 체제유지를 위하여 어느 정도 양보를 하여 미진한 수준에서나마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각종 지배구조에 억눌려있던 일반 시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은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뒤바꾼 전대미문의 시민무장봉기였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80년 5월, 광주시민의 선혈을 발판으로 권좌를 차지했다. 그러나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5. 6공화국의 집권층이 보여준 광주양민학살만행과 천문학적인 부정부패가 온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은 '역사와 정의와 법'에 의한 단죄의 행로를 걸었다.
그간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신군부가 권력을 송두리째 흔들던 5공화국 7년동안, 광주항쟁의 실체를 밝혀 줄 각종 군 자료와 증거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6공화국의 여소야대라는 정국속에서 열렸던 광주특위 청문회를 통해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이 상당부분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정부·여당은 청문회를 거듭하면서 신군부 등 기득권자들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쟁점과 책임자 규명 문제에 있어서는 교묘한 호도책으로 일관하여 완전한 진상규명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문민정부의 초기에는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단죄보다는 역사에 의한 처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이 나라의 '헌정을 유린하고 국민을 살육한 부도덕한 신군부 집단'에 대한 전국민적 처벌 요구가 자칫 영원한 역사적 과제로 미루어질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거세지는 "광주민중항쟁 책임자 처벌"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검찰은 다시 전면 재수사에 나섰고 그들은 '역사에 의한 단죄'가 아닌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 저항권을 말살한 헌정 초유의 내란집단'으로 규정되어 전세계의 관심속에 "법과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반면에 전국민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기의 재판'에도 불구하고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과거의 역사적 잔재와 의식의 소유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광주항쟁의 진상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해도 반드시 국민과 정의의 힘에 의해 낱낱히 밝혀질 것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은 어제의 패배에서 벗어나 이땅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승리의 항쟁으로 거듭나고 있다. 현 정부가 광주항쟁을 세계사에 유래없는 초이성적 초도덕적 투쟁이라고 규정한 만큼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계승 방안을 위해 광주시민과 더불어 전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무한경쟁시대라고 말한다. 이 21세기를 준비하고 기약하기 위해서는 한 시대의 아픔과 절규에서 스스로 벗어나 우리 사회의 가능성과 역동성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실현, 바로 이것이다. 서로 돕고 신뢰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실현을 통해 광주민중항쟁 정신은 더욱 더 찬란한 역사속의 빛으로 승화될 것이다.
10월 유신
이 조치로 유신체제가 성립되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시해(弑害)될 때까지 7년간 지속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군부 내 반대세력을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인자였던 김종필(金鍾泌)을 무력화시킴으로써 1인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권력집중에 대한 야당과 국민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고, 1970년 11월 전태일분신자살사건 등 사회경제적 위기가 표출되었다.
한편, 국제정세는 동서평화공존(東西平和共存)시대로 접어들면서 1969년 미국의 아시아로부터의 후퇴를 암시하는 닉슨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국과 중국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등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박정희의 정권유지에 위협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의 김대중(金大中) 후보에게 근소한 표차로 추적을 당하자 박정희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일인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비상조치를 발표하였다.
1. 과정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하여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항의 비상조치를 포함한 특별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중지되었으며, 헌법의 일부 효력이 정지되고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비상국무회의는 27일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정부는 유신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지도계몽반을 편성하여 일대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91.9%의 투표율과 91.5%의 높은 찬성률을 얻었다. 이어 12월 15일 2,359명의 대의원들이 선출되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하고, 23일 대의원들의 투표를 통해서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7일 정식 취임하였다.
2. 특징
10월유신에 따른 유신헌법의 채택으로 ① 조국통일정책의 심의 ·결정과 대통령선거 및 일부 국회의원선거 등의 기능을 가지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헌법기관으로 설치되었고, ② 직선제이던 대통령선거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선제로 바뀌었으며, ③ 대통령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고, ④ 국회의원 정수(定數)의 1/3을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일괄 선출하고, ⑤ 국회의원의 임기를 6년과 3년의 이원제(二元制)로 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의원은 3년으로 하였으며, ⑥ 국회의 연간 개회일수를 150일 이내로 제한하고, ⑦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없앴으며, ⑧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않을 것을 못박았고, ⑨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되고, 국회의원의 발의로 된 헌법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의결함으로써 확정되도록 이원화하였다. 그 밖에도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조치와 그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선언을 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못박았다.
3. 평가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10월유신을 단행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들이 부정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이에 1973년 유신헌법개정 100만인 서명운동,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1976년 민주구국선언, 1979년 부마사태(釜馬事態) 등 유신독재체제에 항거하는 민주세력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이어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시월유신체제는 그 막을 내렸다.
닉슨 독트린
괌독트린(Guam Doctrine)이라고도 한다. 1970년 2월 닉슨은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그의 새로운 대아시아정책인 닉슨독트린을 세계에 선포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 ·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부마사태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金泳三)이 총재로 당선된 후 정국은 여야격돌로 더욱 경색되었다.
이어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명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비록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유신헌법
한국 헌정사상 7차로 개정된 제4공화국의 헌법이다.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72년 10월 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10일 이내에 헌법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투표로써 확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27일 평화적 통일지향,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2대특징으로 한 개헌안(改憲案)이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 ·공고되었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찬성(투표율 91.9 %, 찬성 91.5 %)으로 확정되었으며, 대통령 취임일인 12월 27일에 공포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형식적으로는 제7차 헌법 개정이나, 실질적으로는 구헌법을 폐지하고 새 헌법을 제정한 점에 특색이 있다.
개정 당시 유신헌법의 기본적 성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지향, 민주주의 토착화,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자유경제질서확립, 자유와 평화수호의 재확인’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유신헌법은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 권력구조상에 있어 대통령 권한의 비대로 독재를 가능하게 한 헌법이었다. 유신헌법은 전문(前文)과 12장 126조 및 11조의 부칙으로 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은 ① 전문에 민족의 평화통일이념을 규정하고, ② 법률유보조항을 두어 기본권 제한을 보다 쉽게 하였으며, ③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하였고, ④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영도적(領導的) 국가 원수(元首)로 하였으며, ⑤ 정당국가적 경향을 완화하고, ⑥ 정부가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연대성을 가지게 하였으며, ⑦ 국회의 회기를 단축하고 권한을 약화하였으며, ⑧ 사법적 헌법보장기관인 헌법재판소룰 정치적 헌법보장기관인 헌법위원회로 바꾸었고, ⑨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하였으며, ⑩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거하도록 하였고, ⑪ 국민투표제를 채택하였으며, ⑫ 헌법개정절차를 2원적으로 하였고, ⑬ 지방의회를 통일달성시까지 구성하지 않게 한 것 등이다.
4.3 항쟁
<시대배경>
제주도와 중앙, 그리고 외세
이재수의 난
식민지 시대 제주도민의 고통과 투쟁
잠녀(잠수) 항쟁과 좌절
대미 결사 항전의 최후 보루
해방
미군 진주와 친일파 복귀
악화되는 경제 사정
3.1 시위와 미군정의 경찰의 총격
제주도민의 항의 총파업과 미군정의 탄압
서북청년단
총파업의 종식과 분노하는 민심, 그리고 입산
'한국문제'의 UN 이관
제주도와 중앙, 그리고 외세
탐라, 탐모라, 영주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독자적 공동체를 유지하던 제주도가 중앙 정부의 지배체제에 편입된 것은 고려 태조 20년(938) 고려에 투항하고, 마침내 고려 의종 7년(1153)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이 파견되면서부터였다.
이로부터 제주 도민은 중앙 정부와 지방 지배세력으로부터 이중의 수탈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몽골의 제주 침입 후 거기에 끝까지 맞서 싸웠던 김통정의 삼별초 군이 고려 원종 11년(1271) 제주를 내침해 왔을 때 제주 도민의 반응은 그렇게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제주 도민에게 있어 그들 또한 항파두리 성의 축조 등을 강요한 수탈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제주를 내침한 여, 몽 연합군은 수탈자를 넘어선 학살자였다. 병선 160여 척에 수륙 1만여 명의 군을 동원한 김방경의 학살자들은 삼별초 군뿐만 아니라 제주 도민까지 공격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삼별초 군을 진압한 후 일본 원정을 떠나면서 제주의 청, 장년을 대규모로 끌고 감으로써 항쟁의 최후 근거지였던 제주도의 도민에게 철저한 보복을 가하였다. 일본 원정이 태풍 등의 이유로 실패하였을 때 제주의 청, 장년 역시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일본은 그 이후로 200여 년 이상 끊임없이 제주를 침략하여 제주 도민을 납치, 학살하면서 제주 도민과 악연을 맺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 명종 10년(1555) 6월에는 60여 척의 병선으로 제주를 침입하는 등 그 창궐이 극에 이른다. 이에 제주 도민은 도내 각처에 환해장성을 축조하고 봉수대와 연대(烟臺)를 설치하여 왜구의 침략 동향을 감시하면서 대비하였고, 침략 시에는 생존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럼에도 중앙 정부와 지방 지배세력의 가혹한 수탈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고, 이에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제주 도민이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한 민란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재수의 난
이러한 때 제주도에 상륙한 프랑스 천주교가 선교를 빙자하여 제주 도민의 수탈자로 등장하자 도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조선의 개항 후 조선을 둘러싸고 타 제국주의 세력과 경합하던 프랑스의 조선 침략 방식의 특징은 천주교를 앞세우고 감행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즉 이 당시 프랑스는 '(아시아 제국의) 식민지화 또는 해외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며 정치적 무기'로써 천주교의 선교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러한 성격의 천주교가 제주도에 전래된 것은 1899년으로, 1901년에 이르면 영세자가 242명, 예비신자가 약 700명에 이를 정도의 교세 확장을 달성하게 되었다. 천주교의 이와 같은 급격한 교세 확장의 배경에는 신부의 권위를 앞세운 정치적 특권과 봉세관과의 결탁에 의한 경제적 특권이 작용하고 있었다.
즉 신부의 치외법권에 따른 정치적 특권에 빌붙은 무리들과, 당시 새로이 시행된 수취제도에 따라 지방 지배 세력을 대신하여 수취권을 대행하여 경제적 특권을 누리려는 무리들이 대거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이 결과로 천주교도와 제주 도민간의 충돌이 빈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제주도에서 천주교는 농민에게는 봉건적 수탈자로서, 상인에게는 상권을 빼앗으려는 침략자로서, 지방 지배 세력에게는 수취권을 빼앗은 새로운 지방 지배 세력으로서, 또 토속적 신앙이 강한 부녀자에게는 종교적 침략자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주 도민은 1901년 이재수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감행하여 제주성을 점령한 다음 도민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천주교도를 타도하며 약 5, 6백여 명을 숙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프랑스 제국주의는 '알루에뜨' 와 '쉬프리즈' 라는 두 척의 군함을 보내 함포 사격을 가하면서 제주 도민을 협박하였고, 중앙 정부 또한 강화 수병을 파견하여 협박하기 시작하니, 제주성 점령 이후 투쟁의 지도 원리, 투쟁 대상, 노선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 있던 봉기군은 결국 그 해산을 조건으로 일체의 세폐 및 교폐를 혁파할 것, 봉기 가담자의 죄를 문책하지 않을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화해에 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프랑스 제국주의는 그 약속을 어기고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의 13인의 지도자를 서울로 압송하여 처형하였고 6,315원의 배상금을 제주 도민에게 부과하는 등 정치, 경제적인 보복을 단행하였다.
식민지 시대 제주도민의 고통과 투쟁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 침략의 초기 단계부터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 특유의 노골적인 폭력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36년 동안 자국 자본을 살찌우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산계획', '병참기지화 정책' 등으로 조선 민중의 농업과 산업 및 자원을 철저히 수탈하고, 무단정치와 기만적인 문화정치로 조선 도민을 철저히 억압했으며, 나아가 노예화교육, 황민화운동, 징병 ,징용, 정신대 ,종군위안부 강요 등을 통해 조선 민족 자체를 없애버리려 했다. 미증유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제주 도민들 또한 파탄 일보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맞서 제주도민들은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족해방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간다.
1908년 의병투쟁
1918년 보천교 투쟁
1919년 3.1독립투쟁
1921년 사회주의적 민족해방투쟁 단체인 '반역자 구락부' 조직
1927년 '신인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민족해방투쟁의 지도 이념으로 하다.
조선공산당 제주군 지부로 발전
1930년 적색혁우동맹 결성
1931년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결성
1932년 제주 도민들 마침내 조직적으로 일어서다.
잠녀(잠수) 항쟁과 좌절
일본 제국주의는 수산업에서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1920년 '제주도 해녀어업조합' 을 설립하여 잠수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일본 상인에게 강제로 판매케 하고 동시에 부당한 수수료, 교제비 등의 각종 경비를 징수함으로써 잠수들을 수탈해 왔다. 일제의 이러한 가혹한 수탈에 항의하여 잠수들은 수차에 걸쳐 그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수탈을 강화함으로써 잠수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갔고, 마침내 1931년 여름, 해산물의 판매를 둘러싼 부정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1932년 1월, 식민지 시대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족해방투쟁 중 가장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투쟁이 폭발하였다.
1932년 1월 7일의 위력 시위를 시발로 하여, 마침내 1월 12일 약 1천 명의 잠수들은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그 위에 물안경을 끼고 호미와 빗창으로 무장한 다음, 세화리 시장에 이르러, 도를 신년 순시하던 도사(島司)를 포위하여 '출가 증명서 발부 제한의 철폐', '어획물의 현품 판매 및 입찰 경매', '도사의 조합장 겸직 금지' 등을 요구함으로써 한때 도사를 굴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제 경찰 기구를 완전히 제압하면서 민족해방투쟁을 도 전체로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일제는 얼마 후 전라도 경찰부 소속의 무장경찰 80여 명을 동원하여 전력을 보강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제주도내의 민족해방투쟁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하여 이 사건 시의 피검자 78명 중 11명을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기소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재건 제주도위원회' 와 그 외곽 단체를 파괴함으로써 제주도내의 민족해방투쟁 세력은 다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지하로 잠입해야만 했다.
대미 결사 항전의 최후 보루
194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색이 짙어가자, 제주도를 대미 결사 항전의 최후 보루로 병참화하고 온갖 종류의 공출과 강제 노역, 징용을 강화했다.
일본은 강제 노역과 징용을 통해 제주도 내 모슬포의 대촌 항공대, 진뜨르 비행장, 정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탄약고 등을 건설했고, 북해도, 사할린의 탄광과 남양군도의 전쟁터로 도민을 내몰았다. 또한 공출은 "차라리 징용을 보내 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숨막히는 것이다.
대미 결사 항전의 최후 보루로 진지화된 제주도는 미군의 공습에 직면했고, 이에 따라 도민들의 삶도 벼랑에 서게 되었다.
1945년 2월 14일 마라도 근해, 일본 해방함 제9호 미군기에 피침.
1945년 4월 14일 한림항, 일본 해방함 제31호와 능미호, 미 잠수함에 피침.
1945년 5월 7일 여객선 미군기에 피폭, 도민 280여 명 피살.
1945년 5월 13일 비양도 근처, 일 군함 4척과 수송선 1척, 미 잠수함과 공군기에 피침.
1945년 7월 제주시 사라봉상공, 미, 일 공군기 공중전
1945년 7월 한림항 매립지 무기고 미 공군기에 피폭, 민가 파손 400호, 민간 사망 30여 명, 민간 부상 200여 명
기타, 산지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구축함과 주정공장, 군수창고, 송악산에 구축된 고사포 진지와 더하여 중산간 지대 연일 피폭되는 상황으로 도민들은 연일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해방
1945년의 '8.15'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해방의 기쁨과 변혁의 열기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민중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라는 중앙과 지방 수준에서의 정부를 조직해 나갔는데 이 정부는 극소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양심적 민족주의자들까지도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는 정부였다.
한편 노동자들은 일제 자본가가 도망함으로써 그 가동이 중단된 공장 및 생산설비를 접수하여 자주적으로 관리해 나갔으며, 농민들 또한 자신들의 피와 땀이 어린 소출을 무위도식하는 지주에게 강제로 빼앗겨야 하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등 민족이 해방되고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건설해 나가고 있었다.
제주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도의 도민은 1945년 9월 10일, 각 마을, 직장 단위에서 자주적으로 조직되고 있던 청년대, 보안대 및 관공서, 기업체, 학교 등의 000관리위원회', 000복구위원회' 등을 모태로 제주도 건준을 건설하였고 이와 함께 각 읍, 면, 리 단위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나갔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후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사실상의 정부'로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의 실시, 도민 생존권과 치안의 확보를 위한 일제 잔류군과의 투쟁 등으로 도민의 적극적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미군 진주와 친일파 복귀
그러나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한 미국은 즉각 민중이 그때까지 이룩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성취물을 빼앗아 가는 일에 돌입하였다
미국은 점령 초기에 일본인의 사유재산권까지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려다 민중의 반발에 직면하자, 미군정 법령 제2호 「패전국 소속의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을 공포하여 모든 일본인 재산에 대한 일체의 권리행사를 금지시키고, 이어 동 법령 제4호 「일본 육. 해군 재산에 관한 건」 및 동 제33호 「재한국 일본인 재산의 권리 귀속에 관한 건」을 통해 일본인 재산에 대한 일체의 소유, 지배권이 미군정청에 귀속된다고 일방적으로 공포하였다. 이후 귀속 재산의 접수, 관리, 처리 과정은 민중의 저항을 총·칼로써 분쇄하고, 식민지 시대에 기득권을 행사했던 민족반역자와 친미적 인사에게 반민주적인 특혜를 통하여 집중되었고 이는 결국 미국 자본의 이익과 직결되었다.
한편 미국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등의 민중 정부를 약화, 제거하기 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를 시급히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맥아더 포고 제1호 제2조를 통하여 식민통치 기구의 존속과 식민통치 관리의 계속적인 직무수행을 명령하였고, 이 결과 식민지 시대 때의 친일관료들이 통치기구로 재기용되기 시작하였다.
정통성 없는 이러한 권력을 물리력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미군은 민중의 자발적인 치안조직에게 해산을 명령하고 기존 친일 경찰조직의 이용을 공식적으로 표명함과 동시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국방경비대의 창설, 그리고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의 극우반공청년단체의 결성을 지원, 원조하였다.
이 조치 이후 해방 후 숨어 지내야 했던 식민지 경찰 8천 여명 중 5천 여명이 다시 미군정의 경찰조직에 참여하게 되고 이 중 80%이상은 경찰 간부직을 맡게되는데 이들이 자신의 처벌을 주장하는 민중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이는 것은 뻔한 것이었다.
악화되는 경제 사정
제주도의 경제 사정은 1946년이 들어서 심각해지고 있었다. 제주도의 경제 상황은 대일교역의 불법화 및 도 승격, 그리고 여기에 따른 통상형태의 붕괴와 북으로부터의 원료 공급의 두절에 의한 공업 및 농업 생산고의 감소 등의 문제에 의해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공업 분야는 패구 공장 이외는 거의 조업이 중지되어 있었으며, 농업생산고 역시 주식인 보리 농사가 대흉작으로 그 수확량은 8, 15전과 비교할 때 1/3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 결과 도민들은 칡뿌리와 해산물, 톳과 보릿겨를 섞어 만든 이른바 '톳밥', 돼지사료인 전분찌꺼기 등으로 연명해 나가야 했다. 이러한 때 미군정의 곡물 수집 강행은 도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얻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6년 중반에 이르러 호열자가 창궐하면서 제주의 경우 1946년 8월 30일 현재 집계된 바에 따르더라도 36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국은 도민들의 생활고가 이렇게 절박함에도 매판 자본가, 지주의 육성, 귀환자가 반입해 온 일본 상품 유통의 불법화, 자국 상품의 광범한 살포 등을 통해 남한경제를 자국 자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음모에 대항하여 제주도의 제주농중, 오현중, 제주중 교양과정 학생들 천 수백 명은 1947년 2월10일 읍내 관덕정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양과자로부터 막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양과자를 절대 배격하자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정 중대가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3, 4백 명의 학생들은 반미 구호를 외치면서 공항 활주로에 불을 붙이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결국 미군정 중대에 의해 시위는 통제되었지만, 이후에도 양과자 반대운동은 전도 학생들에게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3.1 시위와 미군정의 경찰의 총격
1947년 3월 1일, 제주도 내의 제주읍을 비롯한 각 면에서는 연 인원 약 10만 명이 참가하여 조국의 완전한 해방의 조속한 실현을 촉구하는 대규모의 3, 1독립운동 기념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제주읍의 경우 오전 9시를 전후해 오현중 교정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들어 온 약 2,000명의 학생과 군중이 3, I기념대회를 개최한 다음, 본 대회장인 북국민학교를 향하여 행진해 나갔고, 이를 미군정이 저지하자 "미군은 이 땅에서 당장 물러가라"는 등의 반미구호를 외치면서 이를 돌파했다.
오전 11시 경 북국민학교에 집결한 약 3만 명의 군중은 '3. I기념 투쟁 제주도위원회'의 주최로 "3,I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는" 것을 결의하는 대회를 열광적으로 진행하고, 이어 오후 2시 경 학교와 마을별로 나누어 가두 시위에 돌입하면서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2시 50분 경, 관덕정 앞의 도민들이 거의 해산했을 때, 한 기마 경관의 말굽에 어린 소년이 채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마 경관이 아무런 응급조치없이 유유히 경찰서 쪽으로 나아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투석을 시작했고 이어 총소리가 터졌다.
당시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총성 직전, 관덕정 광장에 시위대가 없었고 100∼150명의 관람 군중들만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때 한 소년이 기마 경관의 발굽에 치이는 소동에 이어진 발포는 위협사격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등뒤에 총탄을 맞았으며, 또한 관덕정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도 없었다. 미군정 경찰은 명백하게 살인을 감행한 것이다. 6명 피살, 8명 피상.
제주도민의 항의 총파업과 미군정의 탄압
미군정의 학살에 대응하여 제주 도민은 "싸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는 구호 아래 각 직장에
'31공동투쟁위원회' 및 시민 사이에 '3,1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3월 10일에는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제주도 전역에 걸쳐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총파업은 3월 18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총파업 인원 40,852명, 행정기관 23개, 중등학교 13개, 초등학교 92개, 통신기관 8개, 교통기관 7개, 금융기관 8개, 실업단체, 공장, 회사 15개 등 전도의 각 기관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애월, 모슬포, 중문지서 등의 경찰관까지 동조하여, 이 결과 전도의 질서가 완전히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대중적인 호소력과 참여도를 보여주는 전 도민적 차원의 반미항쟁이었다.
제주 도민의 저항에 직면한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14일 조병옥을 위시하여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하여 파업을 분쇄하였고, 곧이어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 간부와 직장별 주동자 검거에 나서 지속적으로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하고 고문한 다음 이 중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 등은 '제주도는 주민의 90% 이상이 빨갱이"라고 악의에 찬 선전을 계속하였고, 서북 청년단원에게는 "제주도는 작은 모스크바"라고 집중적으로 교육되었다. 더불어 미군정은 도 군정 수뇌부를 모두 강성 인물로 교체하여 탄압의 고삐를 바짝 죄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북청년단
특히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의 사회개혁 당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여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II월 30일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반공단체였다.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라면 생리적 거부감에 치를 떨었고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자에게는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성향을 이용, '사상이 불손한 지역' 에 이 세력을 파견하여 민중들을 공격하는 하수인으로 삼았다. 이들은 봉급 없는 경찰 보조 기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활을 위하여 갈취와 약탈, 폭행을 무수히 진행하였다. 이들은 제주 도민의 애국심을 심사한다면서 태극기와 이승만 초상화를 강매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가 하면, 죄 없는 남자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애인에게 접근하여 석방을 핑계로 강간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하였다. 이럼으로써 다른 식구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서청단원과의 정략 결혼에 응할 수밖에 없는 처녀들도 있었다.
총파업의 종식과 분노하는 민심, 그리고 입산
미국이 지휘하는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반공단체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전도에 걸친 총파업은 마침내 3월 18일 종식되었다. 그러나 총파업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제주 도민을 압살하기 위한 강경책이 날로 도를 더해가자 마침내 도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위의 수단을 강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어김없이 보복의 칼날을 휘둘렀다.
한편 미군정의 식민지 시대 못지 않은 곡물 공출 강요 또한 도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미군정은 제주도가 1946년과 1947년 연 2년째의 혹독한 흉년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역 사정을 무시하고 곡물의 공출을 강요함으로써 도민들로 하여금 "미군정이 일제 때만도 못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하였다
따라서 제주 도민은 중산간 부락을 중심으로 미군정의 이러한 공출 강요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였고 이 결과 제주도에서의 공출 실적률은 전국에서 가장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1947년 8월 8일 안덕면 동광리에서는 공출 강요 차 나온 도군정청 관리에게 공출량을 줄여 줄 것을 청원하던 마을 주민들이 이를 무시한 관리의 폭언과 폭행에 분노하여 3명의 면직원을 구타하였고, 이에 그 다음날 1백여 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보복하기 위한 무차별 수색을 자행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직접적인 행동과 함께 도민들은 극우파인 제주도지사 유해진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선전 공세도 동시에 진행해 나갔으며 이러한 선전 공세는 "미군 축출", "경찰 타도", 그리고 "우익 저주"를 요구하는 전단의 살포를 통하여 더욱 가열되어 갔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여 '3, 1시위사건' 이래 각지에서 발생하였던 사건의 관련자를 예비 검속하고 사상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하였다. 이 결과 재개된 검거 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수십 명의 도민 지도자들이 방어적인 자위수단으로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한 것을 시발로 하여 점차 많은 수의 도민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에 이르렀고, 동시에 경찰, 군에의 피난 입대와 해외 도피도 빈발하게 되었다.
'한국문제'의 UN 이관
한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한반도 내 시행이 불가능해지자 미국은 마침내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이를 호도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책략으로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했다.
이에 따라 내려진 UN에서의 UN감시하의 남, 북한 총선거의 실시' 라는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결국 미국이 한반도의 북쪽을 제외한 지역에 강력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여 현상유지를 모색하고, 이것에 근거하여 사회주의권의 동북아시아 지역으로의 확산을 적극 저지, 봉쇄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대한반도 전략을 수정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것은 동시에 이후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는 미국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어떠한 변혁세력도 사실상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대한반도 점령정책에 대한 남한 민중의 항의와 투쟁이 '2,7구국투쟁' 등을 통하여 점차 가열되어 가는데, 미국은 특히 반미투쟁의 열기가 높고, 그 투쟁경험과 역량이 풍부한 제주 도민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를 계속하였다. 이 결과 1948년 초가 되어서도 제주도에서는 도민들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그것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진행과정>
1948년 4월 3일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5.10선거 거부 투쟁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학살 -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
하산민들
지속되는 대학살과 항쟁의 종식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
1948년 4월 3일
1948년 4월 3일 자정, 마침내 무장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여 명과 그 동조자 1천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하였다.
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단 행하여 각 면에서 투철한 사상성 및 전투 경험을 소유한 자를 30명씩 선발하여 연대와 소대로 구 분 편성된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유격대의 기습 공격에 놀란 미군정은 이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 부를 설치한 후 통행증제를 실시하고, 4월 10일에는 부산 주둔의 국방경비대 제5연대 제2대대를 제9연대에 배속하여 경비대의 병력을 증강시켰으며, 또한 유격대와의 연고가 짙어서 진압작전을 효율적으로 치르기에 부적당한 제주 출신의 경찰 대신 타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국방 경비대가 폭동 발생의 초기부터 도민의 불만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추진하지 않는 것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는 한편,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사람을 보내 '초토화작전' 을 계속 요구하였다.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미국은 김익렬의 거부로 초토화 작전이 시행의 불가능해지자,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이리 하여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그 다음날 미 군정장관 딘(W. Dean)의 내도 후에 즉각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딘은 평화협상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5월 I일 오전 12시 경 제주읍 외곽 오라리가 서북청년단 및 대동청년단 소속 청년 30여 명에 의 해 기습되어 12채의 민가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마을에서 1.5km가량 떨어진 민오름 주변에 있던 유격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 청년들을 추적하자, 이 청년들의 보고를 받은 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유격대가 이미 사라진 마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진입하였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유격대와 경찰에 의해 경찰관 가족 I인과 마을 주민 1인이 각각 희생되었고, 경찰은 오후 4시 30분까지 마을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심문하다가 김익렬 등의 국방경비대 가 출현하자 황급히 마을에서 철수하였다.
이후의 사건 진상규명 과정에서 미군정과 경찰은 오라리방화사건이 우익청년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국방경비대의 진상보고를 묵살하고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몰아 붙이는 조작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을 통하여 조작된 보도를 하도록 하는 한편, 사건 당시 오라리 상공을 정찰하면서 찍은 필름을 편집하여 {제주도의 5월 1일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유격대의 만행을 증언하는 홍보물로 이용했다.
5월 3일에는 미 고문관 드루스 대위의 지휘 하에 귀순자를 호송해 오던 제9연대 7명과 미군 사병 2명에게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여 귀순자 중 일부가 죽고 나머지는 다시 산으로 도망하는 사건 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처음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발뺌하였지만, 미군에 의해 체포된 괴한 중 1인이 제주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다시 이것을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을 위해서 경찰과 미군정, 그리고 경비대와의 이간을 시킬 목적으로 자행된 유격대의 경찰 가장기습사건이라 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이에 4.28평화협상과 이후 조작된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뒤집어씌웠다. 미군정은 김익렬을 용공으로 몰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하여 대규모 초토화 작전을 준비해 나갔다.
5.10선거 거부 투쟁
이에 대응하여 '인민유격대'는 5.10선거가 다가오자 그것을 파탄시키기 위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 공세로 관련인사와 경찰, 우익청년단체 관련 인사들이 살해되었고 각종 시설이 습격당하여 파괴되었다.
이와 함께 도민들도 5. 10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선거 관련 공무원들이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선거 사무를 보지 않았다. 도민들은 경찰 및 극우청년단체의 회유 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향보단에 가입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선거날이 되자 더욱 강화 된 협박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입산해 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선거 거부를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화되고 남제주군 선거구만의 선거가 간신히 치러졌다. 도민들은 그들의 항쟁목표의 하나로서 5.10단선 을 완벽하게 파탄시킨 것이다.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이에 미국은 즉각 제주도의 해안선을 봉쇄하고 박진경에게 초토화작전을 명령한다. 초토화작전을 명령받은 박진경은 5월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2개 마을에서 218명의 도민들을 체포한데 이어 5월중에만 무려 3,126명의 '포로'를 붙잡는 전과를 올린다. 6월 중순이 되면 '포로' 의 숫자는 6천 명으로 불어난다. 한라산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소하는 박진경의 강력한 투망식·토끼몰이식 공격 은 도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광폭함은 국방경비대에 대한 이전의 도민의 호 의적인 반응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국방경비대는 " ,,,,미군 철모에 미군복, 미군화에 미군 총, 비가 오면 그 위에 미군 우장을 쓴다. 멀리서 보면 키가 작은 미군부대가 전진하고 있는" 모습으로 "동족의 섬멸에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박진경과 국방경비대의 이와 같은 강력한 토벌에 대응하여 유격대는 5월말 그 편제를 '인민해방 군'으로 바꾸었고, 도민들 또한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국방경비대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탐지,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6월 18일 토벌 방식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등이 박진경을 살해하자, 미군정은 최경록을 그 후임 에 임명하여 박진경 암살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한편, 도민들에 대한 수색작업을 계속하였다. 이 어 7월 15일에는 송요찬을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약 한달 동안 새로이 부대정 비를 하게 한 다음 유격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때 8월 초순, 김달삼, 강규찬 등 유격대 주요 지휘관 6명이 해주의 남조선인민 대표자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제주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등 의 정치일정 등으로 인하여 유격대는 장기항전 준비에 돌입함으로써, 경비대의 대유격대 진압작 전 또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학살 -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
그러나 부대를 정비한 송요찬이 9월초부터 대유격대 진압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송요찬과 그의 뒤를 이은 김상겸에 의해 강력한 토끼 몰이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이라는 전율할 대량학살작전이 전개되면서 유격대는 축소되어 갔고, 유격대 세력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의 '폭도사살' 전과가 기록되어 갔다.
특히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국군 14연대의 여·순 봉기를 진압한 10월 하순 이후에는 유격대와의 연결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작전과 소개민 심사, 이를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이 연일 이어졌다.
1949년이 되자 정부와 미국의 주한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함병선의 제2연대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대토벌을 더욱 강화하였다. 해군에서는 18척의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선을 완전 봉쇄하고 37밀리 포로 함포사격을 가하였고, 공군에서는 L-4, L-5형 연락기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폭탄 투하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동시에 육군은 대전차포, 박격포, 0.5인치 기관총, 로케트포, M1 소총 등의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여 집단 학살과 무차별 방화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의 결과로 해안에서 4km 이상 떨어진 한라산에 오르는 부락은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학살을 피한 도민들은 삶을 찾아 다시 산으로, 해안의 안전지대로 도피해야 하는 운명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산민들
그러나 이들의 삶 또한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입산한 도민들은 여전히 토벌대의 추적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다시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라는 새로운 적과 직면하였던 것이다. 해안부락의 안전지대로 피신한 도민들 또한 형편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산 사람과 협력한 마을 사람'으로, 또는 '공산당 물이 들었다'고 많은 의심과 감시의 눈초리를 겪어 야 했으며, 끝내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소개된 마을 을 유격대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대대적인 축성 작업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민보단원이 되어 이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의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지속되는 대학살과 항쟁의 종식
제2연대의 육·해·공군 연합작전에도 불구하고 유격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정부 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지휘관:유재흥 대령, 참모장:함병선 중령)를 설치하고, 김용주 대령의 독립 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한다.
유재흥은 한편으로 3월 25일 기한의 사면계획을 발표하는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는 강력한 무장진압의 2단계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 결과 사면기간 동안 강경한 토벌작전에 대한 공포와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죽음 같은 삶을 벗어나려는 하산민의 두려움과 의구심 에 찬 투항이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회유, 고문, 협박 등을 통하여 유격대의 규모와 주둔 위치, 무장력 등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여전히 강경한 무장진압을 전개하던 유재흥 부대는 사면기간이 끝나자 즉각 대대적인 최후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 동안 유재흥 부대는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였으며, 동시에 3,600여 명의 유격대 동조자를 생포하였다. 이러한 전과는 당시 미군 비밀 문서가 과장 집계 한 무장유격대의 숫자가 250여 명, 그리고 그 동조자의 숫자가 1,000∼1,500명에 불과하였다는 것 에 비추어 볼 때, 유격대 색출을 빙자하여 도민에게 가해진 철저한 대토벌, 대학살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즉 유재흥 부대는 '선무'라는 탈의 뒷면에 도민 대학살이라는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유격대 세력은 거의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폭 동이 종식되었음을 대내 외에 과시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대부분의 군경이 17일, 18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항쟁과 그것에 따른 피의 보복, 대살륙이 일단락 되었다.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
그러나 학살은 이에 멈춘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도내 도처에서 소위 '전향 자' 에 대한 대검거 및 처형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경찰은 대정, 한경, 한림, 애월, 안덕, 중문, 서귀 등지에서 이전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양민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목 하에 소집하여 모슬포 송악산 부근 섯알오름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탄약고로 끌고 간 다음, 이들을 학살했다. 사망자 192명, 도민들은 뒷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를 조성하여 이들의 억울한 죽 음을 기리고 있다.
5.16 군사정변
5·16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 ·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6 ·25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그 6개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행하였다. 1963년 말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하였다.
반공분단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정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 ·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첫댓글 정의는 멀리있는 것이 아니에요..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인정하는 것...그리고 그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는 것...그것이 정의라구요...
쌤은 다 읽으셨나여? 넘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