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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야강의 가장 하류 지역으로 서쪽은 서생, 남쪽은 대송, 그리고 동쪽은 온산, 북쪽은 온양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 있는 진하 해수욕장은 울산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으로 여름이면 울산은 물론이고 부산에서 많은 해수욕객들이 모인다. 진하는 이웃에 있는 간절곶과 함께 전국 명승지로 소문이 나 있다. 이 때문에 진하는 면적은 좁지만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편이고 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숙박업소가 많다. 아울러 여름철 해수욕객들을 상대로 하는 슈퍼마켓 등이 발달해 상가도 많은 편이다. 이 마을은 또 마을 곳곳에 해송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 경치 또한 좋은 곳인데 특히 마을 앞바다에 있는 명선도와 이덕도가 아름답다. 이 마을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하는 것은 진하 8경 중 '선도귀범(仙島歸帆)'과 '대암초가(臺岩樵歌)' 등 2개가 이 마을에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도귀범은 명선도 부근으로 고기잡이 배가 들어오는 것을 말하고 대암초가는 대바위에서 나무하는 초동들이 불렀던 노래소리를 말한다. 이 마을은 특히 1970년대 진하 해수욕장이 개장되면서부터 급격히 발달되었는데 마을 중심부에 있는 성동초등학교는 역사가 오래되고 운동장에 노송이 많이 심어져 있어 교내 전경 역시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이 마을은 진하 해수욕장이 개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멸치 어장으로 유명했고 또 진하 해변을 중심으로 갯방풍과 해당화가 많이 자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기가 힘들다. 이중 특히 갯방풍은 중풍의 예방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꺾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씨종자조차 구하기 힘들다. 대신 요즘은 자생은 없지만 이 풀을 재배하는 집이 이곳에 2∼3가구가 있다. 진하라는 이름은 서생포 동첨절제사가 있는 진지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실제로 임란 후 조정에서는 현 서생포 왜성에 우리군을 주둔시켰다. 임란 이전의 마을 역사는 자료가 없어 고증할 수 없고 주민의 선대를 추정하여 보면 김해 허씨(許氏)등이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어 200여년 전에 이 마을이 이미 현재의 마을 모습과 비슷하게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하는 현재는 모두 육지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부는 육지로, 일부는 강(하구)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서생리 도독(都督) 구미가 선착장이라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또 1970년 후반 지금의 금호장 횟집 주변에서 주민들이 술잔, 옹기 등 토기를 발견한 적이 있어 이곳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예상외로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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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마을 | |||
진하리 역시 진하 마을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인근으로 국도 31호가 지나가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만 해도 바다였다고 하는데 그동안 해안의 융기 현상으로 지면이 높아졌고 이후 마을이 생겨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보여주듯 요즘도 이 마을의 흙을 파 보면 흙속에서 모래가 많이 나온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는 이 마을 뒤편에 있는 서생왜성까지 배가 접안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 중앙에는 만석정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이 건물은 지금부터 60여년전 당대의 부자였던 이종수가 세운 한옥으로 지금도 우리 건축의 옛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에서는 각종 문화행사가 많이 열리는데 최근에는 음식물 한일교류전도 이 집에서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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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앞이 확 트여 서생면에서는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이 마을 앞에 있는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기도 했다. 이 마을은 동은 바다, 북은 진하 그리고 서남쪽으로 나사와 접하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어 왔는데 지금은 다시 새로운 등대를 세우고 있다. 이 지역의 경우 주민들 대부분은 바다에 생업을 두고 있고 일부 농사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지역 대부분의 논은 천수답이기 때문에 수확량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에 더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 이곳은 동북아에서 2000년 새해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지역이 되어 전국적인 명승지가 되었고 이에 따라 도로 역시 많이 신설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즘 들어서는 철도청에서 매주 관광 열차를 운행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지금부터 20여년 전만 해도 겨우 차 한 대가 다닐만한 도로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포장이 되지 않아 차가 다닐 때면 먼지를 많이 내었다. 그리고 이 길로 부산과 울산을 연결하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씩 다녔을 뿐이다. 이 지역은 대송, 평동, 송정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마을에는 횟집 등이 많아 주민들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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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마을 | |||
서생면소재지가 있는 신암과 진하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마을로 해돋이로 유명한 간절곶과는 남쪽으로 접하고 있다.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들판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서생, 용리, 나사, 대송 등 다른 마을로 나아가 농사를 짓는다. 이 마을이 송정으로 불린 것은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마을 중앙으로 31호 국도가 지나고 있는데 지금도 국도 위쪽으로는 아름드리 해송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 때문에 일제시대 말기에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소나무 송진을 일본에 공출하기 위해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 마을은 또 주변에 어항이 개설되기 전에는 간절곶을 항해하던 어선이나 상선들이 계절풍을 만나면 간절곶을 넘기 힘들어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여 식수나 식량을 공급받는 피항지 구실을 해왔다. 이 마을 앞 바다는 또 수심이 깊어 방파제나 어항시설이 개발되면 어업전진 기지항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이 마을에 사람이 들어왔던 것은 약 25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부엉듬(부엉이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는 뜻)에 성씨 불명의 학석이네와 잠박굼(현 진하리 1번지)에 역시 성씨 불명의 한 집이 살면서 불씨가 떨어지면 서로 불씨를 얻어다 쓰곤 했다는 얘기가 전해 오고 있다. 학석이네가 살았다는 곳에는 지금도 돌담이 남아 있으며 고동, 조개껍데기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 마을은 1914년 이전부터 송정이라는 행정명을 사용해 오고 있으나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는 '잿골'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다. 이 마을이 옛날부터 이렇게 불린 것은 기와를 구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잿골에서 구워진 기와는 서생첨사 관청을 건립할 때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당시 기와 가마터는 현 대송리 산 9-7번지 김주배(金珠培) 집터로 추정되고 있다. 약 250년 전 연안(延安) 송씨(宋氏) 할아버지와 지씨(池氏) 할머니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면서 지금도 연안 송씨 집성촌(14가구)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충주 임씨(5가구), 전주 김씨(4가구), 청주 한씨(5가구), 충주 지씨(3가구), 경주 이씨(3가구), 경주 최씨(5가구) 등의 성씨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조 말엽에 서생면의 행정구역에 속하게 되었고 1910년 대륙(大陸)·송정(松亭)·평동(平洞) 3개 마을이 합하여 대송리로 개편되었다. 이후 1961년 대송(大松)에서 분동되어 송정리가 되면서 초대 이장을 선출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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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송마을 | |||
이 마을은 최근 들어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바위는 간절곶에서도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고 있다. 요즘 들어 이 마을에는 전국의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아직 교통사정과 숙박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이 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이는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大)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다 대륙동의 대(大)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松)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사람은 공씨(孔氏) 할아버지와 구씨(具氏) 성을 가진 할머니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어느해 장질부사가 창궐해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지금의 대송리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이들 부부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던 곳은 간절곶 북쪽으로 현재 회를 파는 포장마차가 즐비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 연대는 500년 전이라고 한다. 또 마을 전설에 따르면 입향조인 공씨 할아버지와 구씨 할머니는 죽어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골매기 할배 할매'라고 부르면서 이들을 위해 제당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제당이 현재 간절곶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이들 입향조의 후손은 없는 상태이다. 대신 지금은 김해 김씨와 학성 이씨, 밀양 박씨 등이 사는데 정월 보름에는 반드시 골매기 할배와 할매에게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해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마을은 어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촌계가 구성되어 어민들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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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동마을 | |||
서생면 소재지에서 울산 방향 동쪽으로 3㎞ 지점에 있다. 마을이 해안가에 있기는 하나 뒷산이 동서로 가로막고 있고 마을이 남쪽으로 향해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바다와 면하고 있는 마을이라 여름에는 피서객이 많이 찾아오고 사계절 내내 관광객이 드나든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어업을 하거나 생선회를 팔아 살아가고 있다. 현재 마을 앞으로는 간절곶과 나사리를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공사 중인데 완공될 경우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뒤로는 국도 31호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또 주위에 해송이 많아 경치 또한 뛰어나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순조 때 충주(忠州) 지씨(池氏) 32세조 4형제가 안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당시 지명은 양산군 외남면에 속했는데 새터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1910년경 대송리에 편입되어 울산군 서생면 대송리 평동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평동이란 들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처음에는 충주(忠州) 지씨(池氏), 추계(秋溪) 추씨(秋氏), 밀양(密陽) 박씨(朴氏), 울산(蔚山) 박씨(朴氏), 달성(達城) 서씨(徐氏), 김해(金海) 김씨(金氏), 인동(仁同) 장씨(張氏), 월성(月城) 이씨(李氏) 등 16가구가 살다 2000년 현재 87가구로 늘어났다. 민간신앙으로 2백여 년의 나이를 가진 해송 당산나무에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를 모셔오고 있다. 또 이 마을은 1972년 마을 호안공사를 성공리에 마쳐 서생면에서 최초로 새마을 우수마을로 선정(1973)돼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여러 차례 견학할 정도였다. 1940년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터가 있었다고 하나 그동안 신자가 줄어들어 지금은 예배장소가 경작지로 바뀌었고 예전의 종교적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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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동쪽으로는 대송리 평동과 경계를 이루고 남과 서로는 신암리, 북으로는 진하리와 접하고 있다. 마을 모양은 동에서부터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마을 앞 모래사장은 약 800m이며 폭은 10∼20m로 여름이면 부산, 울산 등지에서 피서객이 몰려와 연중 관광객이 5천∼7천명에 이른다. 서생면민들이 대부분 배 과수원을 갖고 논농사를 하고 있는데 반해 나사리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일부는 논농사를 짓고 있지만 수입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나사리에서는 서생면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배 밭을 구경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신 다른 지역에 비해 어업이 발달한 나사리는 특히 멸치잡이가 유명하다. 나사리에서 이처럼 멸치잡이가 많이 되는 것은 이 지역 항만이 다른 지역에 비해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사리는 멸치를 잡는 방법으로 지인망이 유명하다. 지인망은 일명 후리라고 하는데 이 방법은 한쪽 그물 끝을 육지에 두고 다른 한쪽 끝은 어선에서 펼치면서 여러 사람이 양쪽을 끌어당겨 멸치를 잡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원시적인 방법이 되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방법으로 멸치를 많이 잡아 주민 소득이 높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어획고가 고갈이 되면서 이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나사리는 또 미역을 많이 생산하고 있어 마을 곳곳에서 요즘도 미역을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의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마을 뒤쪽의 봉대산이 북풍을 막아주어 따뜻하다. 또 동으로는 대구장끝이, 남으로는 신선암이 활처럼 마을 앞바다를 감싸안아 경치가 빼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현재 이 마을에는 마을 제당 밑에 석축 방파제가 있다. 이 방파제는 100m의 길이로 일제 때 처음 축조되었다. 이후 이 방파제는 각종 태풍으로 파손이 되었으나 1차 증축을 했고 1993년 마을 사람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다시 증축공사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방파제는 당시 많은 예산을 들여 증축을 하면서도 환경영향평가를 하지 않아 현재 마을 사람들이 여러가지 불편을 겪고 있다. 우선 불안 해변가 모래가 큰 동네(정미소 밑)로 밀려가고 있다. 이 마을은 증축 공사전 백사장 폭이 20∼30m에서 지금은 3∼10m로 좁아져 작은 태풍에도 호안이나 주택의 침수와 붕괴가 우려되고 있다. 반면 정미소 앞에는 없던 모래가 자꾸 쌓여 모래운동장을 방불케 하고 있으며 공사 전 선착장으로 이용하던 곳이 수심이 얕아 지금은 소형선박도 접안을 할 수 없는 형편이고 수심이 깊은 곳은 조류가 심하여 각종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방파제는 태풍이나 해일 등의 자연재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선박 등의 교통편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나사마을의 방파제는 위 두가지 기능을 모두 못하고 있어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는 형편이다. 이 마을에는 또 신고리 원전 건설로 이주를 해야 하는 비학 마을 사람들이 이주해올 것으로 보인다. 한전은 신고리 원전 건설을 하면서 비학마을 사람들을 개발제한구역인 나사리 215번지 주변으로 이주키로 하고 이 일대 2만8천6백㎡에 이주민 주택 단지를 조성키로 계획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문화재 시굴 조사가 곧 있을 예정이고 이 조사가 끝나면 이주 단지가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 나사(羅士)라는 명칭은 나사(羅沙)에서 바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어릴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이 낚시터였는데 그동안 모래가 계속 쌓여 뭍(육지)으로 변하였다고 말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처음에는 '모래가 뻗어나간다'하여 '나사(羅沙)'라고 사용하다가 그후 선비가 많이 배출되기를 원해 '나사(羅士)'로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마을 명칭의 변화는 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불안'이라는 자연마을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불'이란 모래나 자갈 등으로 이루어진 터를 말하는데 이 마을이 불안이 된 것은 모래나 자갈이 안쪽에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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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마을 | |||
긴 해변을 끼고 있는 나사리는 마을이 나사마을 한 곳 뿐이다. 이 때문에 여름에는 지역 사람들보다는 부산과 울산 등에서 온 외지인들이 더 많다. 마을은 크게 31호 국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북쪽으로는 산지가, 그리고 남쪽으로는 해안을 끼고 있는데 마을은 대부분 해안 가까이 자리잡고 있다. 해안 중에도 대송리와 경계를 하고 있는 떡방구 부근과 해변의 서쪽에 있는 대구장끝은 물이 맑고 또 경치가 아름다워 이곳을 찾는 외지인들이 많다. 이 마을에는 일제시대 봉대산을 중심으로 금맥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일본 사람들이 한때는 금을 채굴했던 곳이기도 하다. 봉대산 서쪽에는 지금도 구덩이가 많아 당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봉대산 금맥이 마을이 있는 해안까지 뻗었다고 해 한때는 마을 사람들도 금을 찾아 나섰으나 성공을 하지 못했다. 이 마을은 지금부터 약 360년 전 인조(1624∼1649) 후기에 달성(達城) 서씨(徐氏)가 먼저 들어왔다 하며 그후 광주(廣州) 이씨(李氏), 경주(慶州) 최씨(崔氏) 등이 들어와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이전에는 본관을 알 수 없는 박씨(朴氏)가 살았다 하나 후손이나 자료가 없어 고증을 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