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응의 생애 구분(1기-4기)>
예술창작 활동을 기준으로 하여 이하응의 화풍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그의 생애는 청(淸) 보정부(保定府)로 연행되기 전과 돌아온 이후로 크게 2단계로 나눌 수 있고, 정치적 부침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집권 전 안동 김씨 세도 하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며 추사 김정희의 서화에 경도된 시기(1820-1862)로 그의 나이 43세까지 해당된다. 이 시기는 그가 불우한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김정희의 영향 아래 예술적 기반을 굳건히 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는 김정희로부터 “예자(隸字)는 가호(佳好)하여 난(蘭)과 더불어 쌍미(雙美)할 만합니다. 옥두(屋頭)에 무지개빛이 관통하겠습니다.” “(석파의 묵란은) 압록강 이동(以東)에 그와 견줄 만한 작품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된 것은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넘은 44살 때의 일이다. 따라서 김정희가 사망한 것이 그가 대원군이 되기 전인 1856년(37세)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도가들로부터 무시당하던 30대 전반에 이미 금강안(金剛眼)을 자부하는 김정희로부터 높은 평을 받은 셈이다.
제2기는 대원군이 되어 과감한 정치를 수행한 1차 집권기(1864-1873)와 명성왕후와의 갈등으로 하야하여 은거하던 시기(1874-1882.5)로 그의 나이 44세부터 62세까지 해당한다. 뛰어난 정략가로서 국정을 요리할 식견을 갖추고 있었던 그는 정권을 잡게 되자 안으로는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며, 밖으로는 침략적 접근을 꾀하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명성황후와 완화군문제로 사이가 멀어진 후, 개화정책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되었고, 마침내 하야하여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그는 묵란화 제작에 심취한 듯, 그의 난 그림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인다. 무엇보다 김정희의 필법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 구도법과 특징적 묘사 방식을 모색해 나간 점이 주목된다.
특히 1차 집권에서 실각한 후, 직곡산방(直谷山房)과 운현궁(蕓峴宮)에서 은거한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1874-1881: 55-62세). 직곡산방에서는‘군란화(群蘭畵)’‘석란화(石蘭畵)’‘총란화(叢蘭畵)’형식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묵란화를 제작했는데, 이 세 가지 형식의 묵란화 구도법은 운현궁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는 스승 추사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하응 자신의 개성적 화풍을 수립한 것으로, 이후 석파란의 전형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제3기는 임오군란 때 잠시 재집권(2차 집권)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천진(天津) 보정부(保定府)로 연행되어 3년간 유폐생활을 하던 시기(1882.7-1885.8.27)로 그의 나이 63세부터 66세까지 해당된다. 《매천야록》의 기록에 의하면 대원군이 머물렀던 보정(保定)은 수질이 좋지 않았으며, 의식(衣食) 또한 마땅치 않아 청나라 고관에게 뇌물을 주고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우물을 파고 고국으로부터 상선을 통해 식료품을 조달받는 등 대원군은 보정에 머무는 기간 동안 10년간의 세도정치를 하면서 끌어모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정부(保定府)에서의 유폐기간동안 그는 안으로 한을 삭이며 난을 치면서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폐 초기에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지 전해지는 작품이 없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안정을 되찾은 듯 유폐기 중후반에 제작된 일련의 작품이 전해진다. 특히, 귀국직전에 제작된 석란화에서 난엽이 힘차게 위로 향하는 등 운필에 힘이 넘쳐 당시 그의 정치적 재기의 의지를 보는 듯하여 흥미롭다. 이 시기는 그의 생애의 다른 시기에 비해 기간은 비록 짧지만, 이후부터 그의 묵란화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창작 활동 면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제4기는 청으로부터 귀국한 후 정권에 더욱 집착하여 명성왕후와 대립하게 된 말년(1885.9-1898.2)으로 그의 나이 66세부터 79세까지에 해당된다. 이하응은 청에서 귀국한 뒤에도 끊임없이 재기의 기회를 꿈꾸었지만 거듭 실패하고 만다. 따라서 은거하는 기간이 길어져서인지 이시기에 제작된 그림이 가장 많이 전해진다.
그의 작품들은 화풍의 변화를 기준으로 하여 크게 두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30대 초반부터 청(淸) 보정부(保定府)로 유폐되기 전까지는 전반부(1851-1882: 32-63세)로, 이후의 시기는 후반부(1883-1897: 64-78세)로 구분된다.
조사된 작품 가운데 전반부에 제작된 작품은 54점이고, 후반부에 제작된 작품은 47점이다. 전반부의 작품은 후반부에 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1차 집권에서 실각한 후, 직곡산방에 머물렀던 1874-1875(55-56세)에는 단기간에 여러 가지 형식의 작품이 제작되어 주목되는데, 현재 약 23점이 이 시기의 것으로 조사되었다. 후반부에는 석란화 형식이 위주가 되었으나, 1887-1891년(68-72세)사이에 제작된 작품에서는 기명괴석란도(器皿怪石蘭圖)가 제작되기도 하여 특이한 면모를 보이다. 또한 후반부에 제작된 석란화 가운데 특히 1887-1891년(68-72세) 사이에 제작된 작품에서는 괴석의 형태 묘사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직곡산방 이후 가장 많은 작품이 제작된 해는 1891년(72세)으로 현재 약 8점이 조사되었다. 1891년은 그가 결혼한 지 60년이 되는 해로서 자신의 회혼(回婚)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작품을 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 국역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下, 오세창(편저자),
한국미술연구소(기획), 동양고전학회(국역), 시공사, 1998, pp 971-974
(1)
석파의 《난권(蘭卷)》에 쓰기를,
“난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산수와 매죽과 화훼와 새와 물고기는 옛날부터 잘 그리는 자가 많았으나 오직 난 그림만은 특별히 잘 그린다는 사람을 들은 적이 없다. 산수 같은 것은 송, 원으로부터 지금까지 남화(南畵)와 북화(北畵)의 명적이 하나 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왕숙명(王叔明: 王蒙)과 황공망(黃公望)이 난까지 잘 그린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대 그림의 문호주(文湖州: 文同)와 매화그림의 양보지(揚補之: 揚無咎) 역시 난까지 잘 그리지는 못했다. 대개 난은 정소남(鄭所南: 鄭思肖)으로부터 비로소 이름이 나기 시작했고 조이재(趙彛齋: 趙孟堅)가 가장 잘 그렸으나, 이는 인품이 고고하고 특별히 뛰어나지 않으면 쉽게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다.
문형산(文衡山: 文徵明) 이후로 강절(江浙: 江蘇省, 浙江省) 사이에서 드디어 크게 유행되었다. 그러나 문형산의 서화는 대단히 많으나 그의 난 그림은 또 열에 한 둘도 못되었으니 난을 매우 적게 그렸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가히 함부로 붓을 대서 마구잡이로 그리고 어지럽게 칠하기를 요즘 사람들처럼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여 저마다 잘 그릴 수 있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근대의 진원소(陳元素)와 승(僧) 백정(白丁)과 석도(石濤)로부터 정판교(鄭板橋: 鄭燮), 전택석(錢?石: 錢載)이 모두 난 그림을 전공한 자이다. 그 인품이 역시 모두 고고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화품 또한 그 인품에 따라 높낮이가 나타났으니, 다만 화품만 가지고 의논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중략) ...
지금 우리나라 사람의 그림은 이 뜻을 알지 못하고 모두가 망령되이 그린 것일 뿐이다. 그런데 석파는 난 그림의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니, 이는 대개 그 타고난 자질이 맑고 오묘하여 난의 성질과 가까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경지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일분(一分)의 공부일 뿐이다.
나(추사 김정희)는 본래 노둔하고 어리석은데다가 지금은 또 늙어서 정신도 없으며 풍파에 이리저리 시달려서 난을 그리지 않은 지가 벌써 20여 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이 혹 와서 그려 달라고 하면 일체 그릴 수 없다고 사절하고 마치 마른 나무와 싸늘한 재처럼 다시는 살아 갈 재미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석파가 그린 것을 보니 마치 하남(河南)선생이 사냥꾼을 본 생각이 나서, 비록 내가 스스로 그리지는 못하나 예전에 알던 것을 가지고 경솔하게 이와 같이 써서 석파에게 부쳐 보내니 부디 마음을 다가먹고 힘을 단단히 써야 할 것이고, 이 퇴원노추(退院老錐: 書院에서 망가져 내버린 붓)로 하여금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지 말라. 당신의 난이 내가 그린 것보다 더 나으니 사람들이 나에게 난을 그려 달라고 하면 모두 석파에게 가서 그려달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2)
석파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보내주신 난 그림은 이 늙은이(추사 김정희)가 역시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손히 보고 있다. 압록강 동쪽에 이와 같은 그림은 없으니, 이것은 당신 앞에서 아첨하여 꾸며 대는 말이 아니다. 옛날에 이장형(李長衡: 李流芳)이 이런 법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에야 다시 보게 되니 어찌 이렇게도 기이한가. 합하(閤下) 역시 스스로도 이 법에서 나온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합철(合轍: 수레바퀴와 수레의 궤적이 서로 부합함. 이것과 저것의 사상과 언행 등이 서로 일치함을 비유함)의 묘라는 것이다.”
(3)
또 이르기를,
“매우 아름답게 된 예서 글자는 난 그림과 함께 쌍미(雙美)가 되어 그 지붕 머리에 무지개가 뻗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완당집)
◆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솔, pp 179-182
난(蘭)은 예부터 고고한 인격자를 뜻했다. 특히 왕조시대에는 임금을 향한 충신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일찍이 《예기(禮記)》에 “5월 여름에 난초를 모아 우려낸 향기로운 물로 몸을 씻어 깨끗이 한다(五月蓄蘭 爲沐浴也)”고 하였다. 또 《주역(周易》「계사전」에는 “마음을 함께하는 착한 사람의 말은 그 향내가 마치 난초와 같다(同心之言 其臭與蘭)”는 글이 있으니, “그런 까닭에 착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갖가지 난초가 놓인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 있으면 저절로 그 향내가 몸에 배게 된다(是以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自芳也)”는 말이 나왔다. 이로부터 훌륭한 벗끼리의 사귐을 일러 지란지교(芝蘭之交)라 불러왔다. 난꽃은 이른 봄에 피지만 추운 겨울에도 그 고결한 모습은 한결같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충신 굴원(屈原, BC 343?-277?)은 걸작시집「이소경(離騷經)」에서 자신의 충정을 난초에 빗대었다. 젊은 나이에 재상의 지위에 올랐던 굴원은 유배 중 더욱 더 기울어만 가는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지은 장시에서 굴원은 “내가 이미 아홉 뙈기 너른 밭에 난초를 심었고 또 백 이랑 드넓은 밭에 혜초도 심었다(余旣滋蘭之九 兮 又樹蕙之百畝)”하는 말로써 자신의 결백함을 드러내고, 그러나 “저 허리에 더북쑥을 두른 무리들은 도리어 그윽한 난을 두를 수 없다고 한다(戶服艾以盈要兮 謂幽蘭其不可佩)”는 말로써 간신배의 모함을 받고 있는 그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였다.
초나라는 제(齊)나라냐 진(秦)나라냐 하는 동맹국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굴원은 합종(合縱)을 지지하는 친제파(親齊派)였으나 점차 연형(連衡)을 주장하는 친진파(親秦派)에 밀렸다. 진나라의 주도면밀한 공작에 의해 초나라는 갈수록 분열되었고 굴원이 아무리 간하여도 왕은 도무지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초희왕은 진나라에 억류되고 태자는 제나라의 인질이 되니, 이러한 비참한 과정을 운명처럼 밟아나가다 끝내 수도 영(?)은 함락되었다. 굴원은 조국의 비극에 절망한 나머지 멱라수 푸른 물에 몸을 던져 한스런 삶을 마감하였다.
미인을 그리워하여 눈물 닦으며 우두커니 바라보네 (思美人兮 擥涕而)
길 막히고 중매 끊겼으니, 말을 맺어 전할 수도 없네 (媒絶路阻兮 言不可結而)
◆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솔, pp 184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야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송(南宋)의 조맹견(趙孟堅, 1199-1267경)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원초(元初) 정사초(鄭思肖, 1239-1316)부터였다. 그는 이민족에게 국토를 잃은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심회를 땅에 뿌리를 박지 않고도 살아가는 노근란(露根蘭)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국화는 사군자 중 가장 뒤늦게 발달하였다. 송대나 원대부터 그 전조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단일 소재로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청대(淸代) 이후이다.
이렇듯 사군자(四君子)는 꽃 피는 시기에 따라서 매란국죽(梅蘭菊竹)으로 칭하는데 그림 배우는 순서는 맨 처음 난화(蘭畵)를 배우고 다음에 국화, 매화, 대나무의 순서로 배운다고 한다. 이는 난(蘭)의 생김새가 한자(漢字)의 서체(書體)와 닮은 점이 많아서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는 점에도 그 까닭이 있다고 한다.
지난날 뛰어난 문인들이 묵란과 묵죽을 즐겨 그렸던 까닭은 우선 난초와 대나무에 깃들어 있는 상징의 아름다움, 즉 고결한 인격이며 충성된 마음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정도전(鄭道傳)은 말하기를 “난초는 그 됨됨이가 양기를 많이 타고났으므로 향기로운 덕이 군자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 묵란과 묵죽이 크게 유행했던 속내를 살펴보면 그 기법적 특징과도 적지 않은 연관이 있다. 그림의 조형 내용이 비교적 간략하고, 더욱이 선비들이 익숙하게 구사하는 서예의 필법으로 손쉽게 그려낼 수 있는 소재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문인들이 일상에서 글씨를 쓰던 붓과 먹을 이용하여 약간의 형상성을 가미하면 곧바로 그림이 될 만큼 형사(形似)와 운필(運筆)에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산수화나 인물화, 특히 동물화 같은 것은 화법(畵法)이 몹시 까다로운 까닭에 따로 오랫동안 전문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잘 그려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화원(畵員)들의 시험을 볼 때 산수나 동물, 인물, 화조를 그린 사람보다 묵죽을 그려낸 사람에게 기본 점수를 더 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모양은 간략해도 뜻을 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난 그리기는 추사 김정희가 말했듯이 뭇 화법 중에서 오히려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였다. 난의 형상이 단순해서 쉬운 것이 아니라,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어렵다. 바꿔 말하면 난 그림은 대충 배우기는 가장 쉬워도, 진정 잘 그리기는 지난하다고 한다. 덧붙여 추사는 애써 노력한다고 해서 난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구천구백구십구 분(分)까지는 노력으로 다다르겠지만 그 나머지 만분의 일을 원만하게 이루기가 어려우니, 그 일 분(分)이란 사람 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또 사람의 힘 바깥에서 오는 것도 아니라 한다. 그렇다면 그 일 분(分)이 무엇인가?
아마도 작품의 성패란 그리는 이의 솜씨라는 외면, 형식의 측면을 넘어서서, 그 인물이 쌓은 학문과 닦은 수양과 이 세상에서 행한 처신과 관계됨을 말한 것일 게다. 그리하여 추사는 난 그림을 보고 화법을 논하는 일 또한 저속하다 하여 낮추어 보았다.
추사 김정희에게 서법과 묵란(墨蘭)을 배운 대원군은 그로부터 "압록강 동쪽에는 흥선대원군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극찬을 받을 정도로 묵란을 잘 그렸다.
◆ 박영대, 우리그림 백가지, 현암사, pp 350- , 364-
석파 이하응의 난 그림에 화제를 단 글을 보면 난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난초 그림의 품격을 말한다면, 생긴 모양대로 비슷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남이 하는 법식을 따르는 데도 있지 않다. 다만 많이 그린 연후에 좋은 작품이 나온다. 선 자리에서 부처가 될 수 없고, 맨 손으로 용을 잡을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비록 만 가운데 구천구백구십구까지 이른다 해도 나머지 일이 쉽지 않으니,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부분이며, 또한 사람의 힘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추사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난초그림(1892년, 국립중앙박물관소장)에 비교적 높은 점수를 주었는데, 그 이유는 “타고난 기틀이 맑고 신묘하여 그 오묘한 경지에 가까이 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 괴석(怪石)
종이에 수묵, 21× 11.8㎝,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향수 정학교(香壽 丁學敎, 1832-1914)1) 는 조선말기의 서화가로서 종4품으로 벼슬은 군수를 지냈다고 하나 정확한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괴석도로 명성을 얻은 화가이다. 그는 안중식(安中植)과 함께 장승업(張承業)의 작품에 대리낙관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정학교의 「돌 그림(怪石)」에는 화제에‘석수만년(石壽萬年)’이라 하여 오래도록 변함없이 견고한 돌의 자태를 통해 절개 있고 진실한 인간을 희구하고 있다.
(2) 정학교필 괴석난죽도(丁學敎筆 怪石蘭竹圖)
각 129.1×29.6㎝ / 종이에 수묵담채/ 국립중앙박물관(동원 이홍근 기증) 소장
정학교는 각 서체에 능했으며 특히 여러 가지 모양의 괴석 그림에 뛰어났다. 괴석과 사군자를 곁들인 그림에서 정학교는 돌의 추상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구멍이 숭숭 난 이상야릇하고 길쭉한 돌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곁에 대나무와 난초가 심겨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런 괴석을 정원에 두고 완상하기를 즐겼다. 오래되어 이끼가 끼고 늙은 돌은 풀과 나무 가운데 변함없이 우뚝 서서 정원의 정취를 더해주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괴석과 난초, 대나무가 각각 배치되었는데, 길고 좁은 화면과 종으로 긴 서체와 괴석이 잘 어울린다. 담백하면서도 개성적인 필치로 괴석의 기이한 형상과 질감이 효과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난초와 대나무의 묘사를 보면 필획의 개별성과 서예성은 배제되고 전체적으로 포물선을 그리듯 둥글게 방향을 잡아주고 있어서 각지고 예리한 괴석이 더욱 부각되어 보인다.
괴석과 난초 그림에 곁들인 제시에 이르길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데, 그 바다는 한없이 넓다. 철망 아래로 내려가 산호 가지를 꺾는다. 도사가 술에 취해 누워 푸른 옥을 부르니, 금가루가 소나무 꽃으로 이루어진 단에 떨어져 내린다. 가을바람에 선 나무는 옥과 같고, 봄비에 젖은 대나무는 더 크게 자라난다. 내가 바람 속에 서서 그리움과 상념에 젖어 있으니, 그윽한 난초와 싱싱한 벼가 함께 또 바람에 흔들린다.”고 했다.
대나무가 있는 왼쪽 그림에는 “마침 벼루가 깨끗하여 조용히 붓을 들었다. 그리는 법이야 어디 화가만 하랴. 천 년 전의 풍류를 어찌 견주겠는가만, 돌을 좋아해 형님이라 불렀다는 宋대의 화가 미불(米?, 1051-1107)을 그리워하노라. 물 위의 뭇 봉우리는 아홉용인 듯하고, 샘가의 돌 곁에는 두 그루 소나무가 서 있다.....”라고 썼다.
돌의 추상적인 형태를 빌어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 것이다.
◆ 난초 그림의 쌍벽, 대원군과 민영익
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난초그림(묵란·墨蘭)은 가짜가 많기로 유명하다. “대원군 난초의 절반 이상은 가짜”라는 것이 정설. 대원군 난초는 그의 생전부터 가짜가 많았다. 당시 그의 난초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대원군은 사랑방에 사람을 앉혀놓고 대신 그리게 한 다음 자신은 거기에 이름을 쓰고 도장만 찍었기 때문.
가짜가 많다는 것은 대원군의 난초가 그만큼 뛰어남을 뜻한다. 추사 김정희의 극찬이 이를 입증한다.
난초그림은 19세기에 성행했고 그중에도 대원군과 운미(云楣)2)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쌍벽을 이뤘다. 이들의 난초는 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지만 그 화풍은 사뭇 대조적이다.
대원군의 난초가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다면 민영익의 난초는 부드럽고 원만하다. 이 대조적인 화풍은 그들의 판이한 인생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대원군은 여백을 살리고 화면 한쪽에 한 떨기 춘란(春蘭)을 즐겨 그렸다. 난은 섬세하고 동적이며 칼날처럼 예리하다. 특히 줄기가 가늘고 날카롭다. 뿌리에서 굵고 힘차게 시작하지만 갑자기 가늘어지고 끝부분에 이르면 길고 예리하게 쭉 뻗어나간다. 또 중간중간 섬세한 각을 이루며 반전을 거듭한다. 그래서 난의 줄기는 입체적이고 극적이다.
반면 민영익의 난초는 여백이 없다. 줄기는 고르고 일정하며 끝은 뭉툭하다. 대원군이 붓끝으로 섬세하게 그렸다면 민영익은 붓 중간으로 굵기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대원군 난은 휙휙 휘늘어지지만 민영익 난은 줄기가 뻣뻣하다.
이는 두 사람의 삶에서 비롯된다.
대원군의 힘차고 날카로운 화풍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밀접하다. 처절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야망과 숱한 좌절이 날카로움으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해동거사(海東居士)」란 낙관이 있는 난초는 그가 실각한 이후 운현궁에 눌러앉았던 1881년 작품. 줄기 하나하나에 그의 울분이 살아 꿈틀거린다.
민영익은 다르다. 그는 왕실 외척으로 태어나 20대 초반 미국 유럽을 돌며 서양문물에 눈을 뜨고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야심보다는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던 인물. 망명중인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에 자객을 보내고 중국에 유폐된 대원군의 귀국을 반대했던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1894년 중국으로 망명, 그곳의 문인화가들과 함께 사군자를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대원군과는 전혀 다른 그의 성향이 부드럽고 안정된 난초를 만들어낸 것이다. 민영익의 난초는 부드럽지만 화면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어떤 우직함이 있다. 그것은 가볍지 않은 힘이다.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 운미 민영익, 종이에 수묵, 128.5× 58.4㎝, 호암미술관 소장)
"민영익의 중국생활은 국제조류에 뒤지지 않는 독특한 경지의 난초를 탄생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대원군의 묵란과는 또다른 매력이다. 상반된 경향을 보여주는 두 사람의 난초 그밖에 추사 김정희의 묵란 등도 빼어난 작품이지만, 대원군과 민영익의 묵란을 잘 들여다보면 난초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감식안을 배우게 된다. 구한말 격변기, 두 사람의 삶의 방식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그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의 묵란을 감상하는 것은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다.
- 1997,12, 24 동아일보
- 《보는 즐거움, 아는 즐거움》, 이광표, 효형출판사, 2000년, pp,182-186
◆ 간송문화 69 (회화 44, 蘭竹)
추사 문하의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추사 묵란화의 예술적 지향을 가장 근사하게 계승하여 구현해낸 인물은 석파 이하응이다. 추사는 안동 김문의 세도 아래 신산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석파의 인품과 재능을 일견에 꿰뚫어보고 문하에 받아들여 성심을 다해 지도와 격려를 베풀었다. 핍박받는 왕족으로 젊은 시절을 허송하며 보내기 쉬웠을 이하응에게 추사의 존재는 홀연히 나타난 구원의 손길이었을 것이다.
이후 석파가 온힘을 다하여 추사를 보필하는 한편 추사의 학예에 깊이 경도되어 추사의 묵란화풍을 계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의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네(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의 구절을 인용한 화제는 어쩌면 묵란을 통해 스승인 추사를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추사는 이하응의 묵란에 대해 “보내주신 난 그림을 보니 이 늙은이라도 역시 마땅히 손을 들어야 하겠거늘 압록강 이동에서는 이와 같은 작품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면전에서 아첨 떠는 한 마디의 꾸밈말이 아닙니다.”(김정희 <완당선생전집> 권2 ‘與石坡’)라고 극찬을 하곤 했다.
서화 감평에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를 자처했을 만큼 엄격했던 추사에게 이렇듯 크게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림은 곧 인품의 반영이라는 추사의 회화관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
이하응은 추사로부터 난치는 것을 배운지 불과 5-6년만에 추사의 묵란화풍을 이어갈 제자로 인가를 받은 것이다. 더구나 이때는 추사가 길러놓은 중인출신 제자들이 화단을 압도하고 있었을 때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하응에게 거는 추사의 기대가 얼마나 남다른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자신을 따라 배워 구천구백구십구분을 이루고도 마지막 일분의 경지를 뛰어넘지 못했던 중인출신 제자들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 터인지라 그 기쁨은 더욱 배가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추사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기초를 탄탄히 닦은 이하응은 추사 사후 다사다난했던 정치적인 부침 속에서도 서화수련을 지속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휘한 묵란을 그려낸다. 이 시기의 이하응 묵란의 특징은 초년에 주로 그렸던 화첩이나 편화 형식에서 벗어나 바위와 어우러진 혜란(蕙蘭)을 병풍그림과 같은 대폭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형식상의 두드러진 변화로 우선 꼽을 수 있다. 이는 대나무나 매화와는 달리 대폭 그림에서는 거의 그려지지 않거나, 간혹 죽석(竹石)의 보조적 소재로 쓰였던 난을 대폭 그림의 독자적 소재로 운용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묵란화 전개에 획을 긋는 변화라 할 수 있다.3)
또한 이런 형식의 변화는 자연 경관의 한 부분을 옮겨놓은 듯한 풍경적인 요소가 가미된 조형성을 수반할 수밖에 없어 이전의 교본적(敎本的) 구성 위주의 단순한 묵란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하응이 73세에 그린 <묵란>은 그가 말년에 이룩한 독자적인 화경(畵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공중에 걸려있는 듯 도현(倒懸)된 바위 절벽에 뿌리내린 두 포기의 난을 속도감있는 필치로 자신있게 그려내고 있는데 유려한 가운데 예리함과 강직함이 녹아든 외유내강의 절묘한 조화가 일품이다. 또한 바위의 표면과 윤곽선의 강한 농담의 대비와 두 포기 난의 미묘한 농담의 차이도 빼놓을 수 없는 이하응 묵란의 특징이다. 이와 더불어 하향(下向)하고 있는 상단의 난의 기세를 받아주는 하단의 장엽(長葉)4)은 전체 공간을 정돈시키며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추사 문하에서 착실히 갈고 닦은 탁월한 조형감각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다.
다만 복잡할 정도로 분방하게 펼쳐낸 난엽의 묘사는 판교(板橋) 정섭(鄭燮, 1693-1765)이나 이방응(李方膺, 1695-1754)과 같은 청대 묵란화풍의 영향이 묻어나는 한편 조희룡의 난죽에서 보았던 감각과 상통하는 바가 있어 당대의 표현주의적 경향이 일정부분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왕실 특유의 엄격함과 단정함이 과도한 감성의 분출을 적절히 억제하여 사군자 그림의 고전적인 장처인 절제와 함축의 미감을 견지하고 있다. 추사는 이하응의 이러한 점을 선견(先見)했던 것이고, 자신의 묵란 계승자로 이하응을 지목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하응의 묵란은 ‘석파란’으로 불리면서 그의 정치적 명성과 더불어 일세를 풍미하게 되니, 노천(老泉) 방윤명(方允明, 1827-1880)과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85-1921) 등으로 화맥이 계승되면서 근대 묵란화풍을 주도하게 된다. 따라서 추사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감각과 조형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묵란화풍은 이하응에 이르러 시대미감과 조응하면서 또 하나의 양식적인 완성을 이루었고 다음 대에까지 추사 묵란화풍의 일맥(一脈)을 전수해주게 되니, 이는 마치 신위가 진경시대와 추사시대 묵죽양식의 가교역할을 했던 것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석파의 묵란이 예원을 풍미하면서 묵죽화는 상대적으로 위축된 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몇몇 문인들에 의해 둔세자오(遁世自誤)의 수단으로 묵죽화가 그려지고 있었으나, 뚜렷한 성취를 이룬 묵죽화의 명가(名家)가 배출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송수면(宋修勉, 1847-1916)과 김영(金瑛, 1837-?)은 그 예술적 성취를 떠나 조선말기 후반 묵죽화풍의 경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들의 묵죽화는 조선말기 후반 묵죽화의 다기성(多岐性)과 퇴영화(退?化)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 이하응《석파묵란첩(石坡墨蘭帖)》
연대미상(30대 중반), 지본수묵, 각 37.8× 27.3㎝, 간송미술관 소장
석파 이하응의 9장으로 된 그림이 함께 장첩(粧帖)된 《석파묵란첩》으로 화첩의 마지막에 난초를 그리는 일에 대해 이하응이 쓴 짧은 글이 있다. 이것은 이하응에게 그림을 가르친 추사 김정희가 아들 상우(商佑)에게 그려 보낸 <불기심란(不欺心蘭)>의 화제(畵題)를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묵란을 그리는 목적과 마음가짐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난을 그리는 것은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삐치는 잎 하나와 꽃 속의 점 하나도 마음을 살펴 거리낌이 없어야만 남에게 보일 수 있다. 수많은 눈이 보는 바이고, 수많은 손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만큼 엄격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게 된다. 비록 이것이 작은 기예(技藝)이지만 반드시 성의정심(誠意正心)에 합당해야만 비로소 그 종지(宗旨)에 손댈 수 있다.
옛 사람 또한 그림을 그만두지 않았고, 모두 거기에 경계하고 존경하는 뜻을 부쳤으니, 선이(蟬彛) 도정(?鼎)이 그렇지 않음이 없다. 군자(君子)는 조차(造次)간에도 이것을 유념해야 하고, 전패(顚沛)간에도 이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자의 필단(筆端)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속사(俗師)의 장기(匠氣)만 있을 뿐이다. 이미 횡폭(橫幅)에 제(題)한 것을 여기에 거듭 제하여 다시 밝힌다.”
보통 난초를 그리는 이유를 난의 생태에서 비롯한 수양(修養)의 덕목(德目)을 본받는 것과 단순한 감상을 위한 것으로 분류할 때 석파는 전자의 경우인 교화나 맹세의 수단으로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석파가 철저한 성리학적 예술론에 입각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 주는 것인 동시에 꼿꼿한 선비의 개결한 정신세계를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관을 본받으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특이 이 화첩의 그림들은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며 추사의 서화를 배우던 석파의 청년기인 30대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석파의 그러한 모습이 더욱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화첩의 그림들이 취하고 있는 구도나 형식이 추사의 《난맹첩》과 유사한 점을 다수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난초는 그 줄기가 비록 가늘고 여리지만 곧게 벋어나가기 때문에 군자의 품성을 지녔다고 하여 사랑받기도 하지만 꽃에서 퍼지는 은은한 향기는 속인들로 하여금 선계(仙界)를 경험케 해 줄 만큼 뛰어나다.
짙은 농묵으로 표현된 난엽이 왼편으로 그 유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동시에 기세등등하게 올라온 꽃대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 진동하는 향기를 짐작할 만하다.
曾端伯取友於十花, 蘭爲芳友 : 증단백은 여러 가지 꽃들 가운데서 벗을 취했는데, 난으로 芳友(향기로운 벗)를 삼았다. |
蘭以秋芳 : 蘭이 가을을 맞아 (더욱) 향기롭다. <陸機(西晉, 261-303)「短歌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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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皮小?碧?紗, 堪嘆盆載幾箭花, 楚雨湘雲万千里, 晋山是我外婆家 : 작은 오피궤와 벽창문이 있는 방에서 분에 올려진 몇 줄기 전란화에 한숨을 짓는다. 楚雨湘雲은 만 천리이나 晋山은 우리 외할머니댁이다.) |
十步之內之有訪蘭 : 열 걸음 정도의 좁은 땅에도 반드시 향기로운 蘭이 있다. <한나라 유향(劉向)이 쓴《說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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貴遊公子不能招 小?相對讀離騷 : 귀하게 노니는 공자는 부를 수 없어, 작은 창을 마주하고 離騷를 읽는다. |
羅含, 致仕還家, 庭中忽蘭(桂)叢生, 人以謂德行之感 : 나함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니, 마당 가운데 문득 난이 무리지어 피었다. 사람들은 이를 德行에 감응하여 핀 것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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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尙書郞, 每進朝, 懷香握蘭, 口含鷄舌香 : 한 상서랑은 조정에 나아갈 때는 매번 향을 품고 난을 쥐고 鷄舌香을 입에 머금었다. |
言採其蘭以爲佩也 : 이르기를 ‘蘭을 채취하여 허리에 찬다’ 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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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과 괴석의 묘사법
이하응은 일생동안 오직 난만을 소재로 그렸다는 점에서 독특한 작화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삶의 변화와 함께 묵란의 묘사를 다양하게 시도했으며,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괴석 표현을 첨가하여 화풍의 변화를 도모한 것을 볼 수 있다.
(1)난의 묘사
① 난의 종류
난초는 꽃의 수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한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춘란(春蘭)5)과 한줄기에 많은 꽃이 파는 혜란(蕙蘭)6)으로 구분된다. 이하응 작품은 김정희의 영향에서 그려진 초기의 몇 작품을 제외하고 그의 묵란화는 혜란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그가 춘란에 비해 꽃의 숫자가 많고 흔하여 품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혜란을 주로 그린 이유에 대해 현재로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꽃이 많이 달린 풍성한 혜란의 이미지는 정치적 도약을 희구했던 그의 재기의 야심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7)
<춘란>
<혜란>
② 어두(魚頭: 포기 구성)
어두란 난엽들이 뿌리 부분에 모이면서 생기는 형상이 마치 물고기의 머리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용어로서 난초 포기의 구성을 말한다. 이하응 묵란화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두가 매우 조밀하다는 것이다. 난초의 일엽(一葉)과 이엽(二葉)이 교차하면서 생기는 공간인 봉안을 삼엽(三葉)이 지나가면서 파봉안을 만든다는 것이 『개자원화전』의 기본오필법이다. 그런데 이하응 묵란화에서는 봉안 자체도 길고 가늘게 생성되고, 여기에 삼엽이 가해지면서 만들어지는 교차 공간은 더욱 좁아져 서로 겹치고나 약간의 빈틈이 생기는 정도로 표현된다. 이러한 경향은 말년으로 갈수록 강조되는데, 난엽이 길고 시원스럽게 처리되면서 결과적으로 어두가 더욱 조밀해지게 된 것이다.
- 서미(鼠尾) : 쥐꼬리 모양
- 당랑두(螳螂두) : 사마귀 배 모양
- 제(提) : 가는 부분
- 돈(頓) : 굵은 부분
- 역입(逆入) : 붓끝을 세워 화지에 댐과 동시에 뒤로 가는 듯 하다가 바른 방향을 잡아 긋는 기필을 말한다.
- 정두(釘頭) : 역입한 것
- 첨두(尖頭) : 공중역입한 것
- 이엽을 그릴 때, 일엽의 기점(起點)에서 붓을 일으켜 적당한 지점에 가서 일엽과 교차하여 반달모양의 공백을 이루는데 이것이 봉의 눈과 같다 하여 봉안(鳳眼)이라 한다.
- 삼엽은 일엽과 이엽의 사이를 지나 이엽과 교차시켜 비스듬히 적당한 방향을 찾아 그어 올라간다. 삼엽은 파봉안(破鳳眼)이라 하여 봉안을 깨뜨리면서 그어주어 소밀(疎密)의 묘(妙)를 더 한다.
- 사엽과 오엽은 일, 이, 삼엽을 보호하듯 적당히 배치하여 구성에 변화를 주고, 삼엽보다 길어서는 안 된다. 또한 사엽과 오엽의 길이가 같아서도 안된다.
난 한 포기의 밑부분은 어두(漁頭)처럼 밑부분이 가지런한 모양이 되어야 한다.
③ 난엽 표현의 시기별 특징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이하응의 초기 묵란화는 힘차고 강한 필묵으로 대담하게 운필해 나간 것이 특징이다. 난엽은 짧고 굵게 시작하여 삼전법(三轉法: 붓을 세 번 꺾어 잎이 휘어지게 만드는 방법)과 당두가 강조되어 있으며, 끝은 뾰족하여 서미법(鼠尾法)에 충실했다.
이러한 초기의 묵란화풍은 1872년(53세)에 노근란을 중심으로 한 <군란도> 대련이 제작되면서 중대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1872년(53세) 작 <군란도> 대련의 노근란의 표현에서 바로 이 장별법이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철사를 구부려 놓은 듯이 표현된 난엽은 가늘고 탄력있는 선에 몇 번의 변화를 주어 강한 인상을 남긴다.
난엽의 표현은 1차 집권이후 하야하여 은거하는 기간 동안 더욱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1874년(55세) 12월,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선문대박물관 소장<군란도>10폭 병풍에서는 붓을 눌렀다가 날카롭게 빼면서 생긴 서미(鼠尾)의 표현으로 인해 비수(脾?)의 대비가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같은 해 겨울에 제작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군란도> 6폭 병풍에서는 비수의 변화가 더욱 심화되고, 전체적으로 거칠고 빠른 필치로 처리되었다. 특히 담묵의 난엽이 채 마르기 전에 거칠고 진한 난엽이 겹치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파묵 현상으로 인해 당시의 격정적 심경이 전해지는 듯하다.
그러나 1875년(56세) 6월 22일, 운현궁으로 돌아온 후에는 운필이 안정되면서 비수의 변화가 큰 추사풍의 운필법으로 그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도 나타난다.
중국에서 귀국한 후에 제작된 묵란화에서는 난엽의 표현에 다시 한 번 변화가 보인다. 1887년(68세) 경에는 명대 묵란화에서 볼 수 있는 너울거리는 듯한 유연한 선의 난엽묘사가 나타나다가, 말년의 그림에서는 속도감 있고 길고 예리한 곡선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1891년(72세)에 제작된 <석란도> 12폭 병풍에서는 더는 삼전을 의식하지 않은 채, 길게 뻗어나간 서미(鼠尾)로 인해 난엽이 시원스럽게 처리되었다.
아울러 1892년(73세)에 제작된 일련의 <석란도>에서는 난엽이 긴 곡선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속도감과 힘이 느껴진다. 조사된 이하응의 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할 때, 1891년과 1892년 무렵에 제작된 작품에서 난엽의 표현이 최고 기량에 도달한 듯하다.8)
④ 특징적인 혜란(蕙蘭)의 묘사
묵란화만을 그린 이하응은 전반부에는 춘란과 혜란을 함께 그렸으나, 후반부에는 혜란을 주된 소재로 했다.
1875년(56세)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석란도> 10폭 병풍에서는 탄력 있게 휜 꽃대로부터 다양한 모습의 혜란이 생기발랄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1878년(59세)작 <총란도> 대련에서부터 혜란의 표현에 하나의 특징적인 묘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긴 꽃대에 꽃봉오리와 꽃이 촘촘히 달린 혜란의 표현이 그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꽃대에 많은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혜란의 표현은 중국 보정부(保定府)에서 귀국할 무렵에 제작된 석란화에서 정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면, 1885년(66세) 이하응이 보정부(保定府)에서 귀국하던 해에 제작한 <석란도>에서 직선에 가까운 긴 꽃대에 담묵의 꽃봉오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적으로 달려있는 혜란의 묘사를 볼 수 있다. 직선적인 꽃대에 많은 꽃봉오리와 꽃이 달려 있는 이와 같은 혜란의 표현은, 이후 1892년(73세)무렵에 제작된 작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그림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이러한 혜란의 묘사는 이하응 묵란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9)
⑤ 화예(花?: 꽃술)의 표현
30대 중반에 제작된 간송미술관 소장《석파묵란첩》에서는 난의 묘사가 전반적으로 윤묵(潤墨)을 사용하여 빠른 운필과 농담의 변화가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화예의 표현은 담묵의 꽃과 겹치면서 생기는 번짐으로 인해 정확한 점획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870년(51세) 작《운계시첩》의 <총란도>에서, 꽃술의 표현은 꽃잎과 꽃잎 사이에 두개의 동그란 점으로 찍되 점 사이에 흘림이 없어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이렇듯 꽃술을 두세 개의 동그란 점으로 표현한 것은 이후 1874년(55세)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군란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1875년(56세)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석란도> 10폭 병풍에서부터 점과 점 사이에 약간의 흘림이 보이기 시작하다가, 60대 후반에 제작된 작품에 이르면 점 사이의 흘림이 분명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1886년(67세)에 제작된 <석란도>축의 경우, 만개한 꽃은 화예를 세 개의 점으로 표현했으며, 세 점 가운데 두 점은 흘림으로 이어져 있다.
이하응의 묵란화 가운데 꽃술이 가장 성의 있게 처리된 작품은 1891년(72세)에 제작된 <석란도> 12폭 병풍이다. 이 그림에서는 대부분의 꽃술이 세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형태는 ‘심(心)’ 혹은 ‘산(山)’자의 방식으로 분명하고도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⑥ 노근란(露根蘭)의 표현
노근란은 1872년(53세) 작 <군란도> 대련을 시작으로 해서 1874년과 1875년에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일련의 군란화 병풍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1872년과 1874년에 제작된 노근란에 보이는 뿌리의 표현은 담묵의 갈필로 마치 철시를 구부려 놓은 듯한 긴장된 필치로 되어 있으며, 힘있고 빠르게 운필하고 군데군데 농묵의 태점(胎占)을 찍었다. 그러나 직곡산방에서 운현궁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875년 음력 3월경에 그린 <군란도> 8폭 병풍에서는 뿌리의 표현에 태점이 생략되는 등 단순화되어 가는 변화를 보인다.
그 후 1878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대박물관 소장 <군란도> 6폭 병풍에서는 더는 노근란의 표현을 볼 수 없다. 이하응은 이 그림 이후 군란도 대련 형식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것 같다.10)
⑦ 먹의 농담(濃淡)에 의한 원근(遠近)의 표현
이하응은 1872년에 제작한 노근란을 중심으로 한 <군란도> 대련에서, 화면 하단의 난은 농묵으로 표현했으나 상단으로 갈수록 담묵으로 처리했다. 이와 같이 위치에 따라 농담을 구분하여 난을 표현한 것은 1874년과 1875년에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일련의 <군란도> 병풍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1875년에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석란도> 병풍에서는 화면 가운데 위치한 바위를 중심으로 아래위의 난에 농담 차이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근경의 난은 농묵으로, 원경의 난은 담묵으로 처리하여 먹의 농담변화에 의해 거리감을 표현하려고 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보정부(保定府)에서 제작된 그림에서부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여 말년에 이르는 후반부의 그림에서는 이와 같은 묵법에 의한 원근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892년 작 <석란도>에서는 이 시기에 제작된 다른 그림과 달리, 먹의 농담으로 거리감을 꾀하고 있어 과거의 방식에 대한 잔영을 보인다.11)
(2) 괴석(怪石)의 묘사
- 운현궁시절의 석란화(1886-1897: 67-78세)
이하응은 1885년 청에서 귀환한 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재집권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정치적 실패가 반복되었고, 그런 심리상태를 묵란화로 표출했던 것 같다.
조사된 작품 101점 가운데 1886년(67세)부터 1897년(78세)까지 약 12년간 제작된 작품 수는 41점 정도이며 그 가운데 기년작(紀年作)은 32점이다.
이 시기는 생애구분 중 제4기로 분류되며, 주로 괴석의 표현이 두드러지는 석란화가 제작되었다.
∇1750년 ∇1800년 ∇1850년 ∇1900년
←─ 김정희(1786-1856) →
←─ 이하응(1820-1898) ───→
←── 정학교(1832-1914) ────→
← 장승업(1843-1897) →
괴석(怪石)이란 평범하지 않고 괴이하게 생긴 돌을 말하는 것으로 기석(奇石), 수석(壽石), 수석(水石), 이석(異石), 노석(老石) 등 다양하게 일컬어진다. 괴석은 천지창조와 함께 그 존재가 시작되어 태고의 신비성과 자연의 조화를 간직한 채 세월의 풍우에도 변하지 않는 속성 때문에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돌의 불변성과 부동성(不動性)은 다른 한편으로 지조와 절개를 지닌 동양의 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선비들은 괴석 가운데 큰 것은 정원에 두고, 작은 것은 책상머리에 놓아 정신적 소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괴석으로부터 지조와 절개를 닮으려했으며, 자연의 축소와도 같은 괴석을 통해 자신의 기상을 다스리려는 구도적 자세를 지니고자 했다. 이러한 애석사상(愛石思想)이 문인이나 화가들에 의해 시와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중국에서 애석(愛石) 풍조는 한(漢)대에 왕후 귀족이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한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석가산이란 정원 내부에 여러 가지 형태의 괴석을 모아 대자연을 연상할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산을 말한다. 이후 중국에서는 각종 정원이 발달했으며, 정원의 구성 요소 가운데서도 바위는 험산 준령의 상징 내지 축소품으로서 애호되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바위 가운데서도 문사들로부터 특별히 사랑을 받았던 것은 태호석(太湖石)이다. 태호석은 중당(中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처음으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시로 예찬했는데 이후 개인의 정원 속에 태호석을 두고 감상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시대 문인들 역시 자연의 축소와도 같은 괴석의 다양한 면목을 감상하며 그것을 시나 문장으로 표현했다.1) 또한 괴석을 통해 태고의 신비성을 추구하기도 했으며 그 불변적 속성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선비정신을 배우려고도 했다.
이러한 애석(愛石) 풍조는 조선시대 궁중에서도 만연했던 듯하다. 우리나라 궁궐의 정원에서는 정교하게 조각된 대석(臺石) 위에 괴석을 올려놓은 전래석(傳來石)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석도(怪石圖)와 관련해볼 때, 조선 말기에 이르러 괴석도가 본격적으로 성행한 것은 무엇보다 김정희를 비롯하여 당시 문인들의 애석사상(愛石思想)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이 애석가였던 김정희는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의 지극한 애석(愛石)태도를 희롱조의 시로 읊기도 했다.
자하 신위가 상산(象山, 황해도 谷山의 옛이름)에서 돌아오는데 가득 싣고 온 것이 모두 다 돌이었다. 희롱조로 시 한 수 바친다.(紫霞自象山歸 ?載而來 皆石也 戱呈一詩)
先生爲在日 선생이 이 세상에 나오실 때부터
愛石戱愛錢 돌을 돈보다 더 좋아하셨지.
...(중략)...
及其歸去來 벼슬을 내놓고 돌아오게되자
惟石載之前 돌만 한 무더기 싣고서 앞에 보냈지.
家人不知石 집사람들은 돌인 줄 알지 못하고
迎門喜色溢 문에서 즐겁게 맞아들이네.
...(중략)...
自憐?石交 아! 나는 굳게 맺은 우정에 누가 미칠까 걱정되어
對石屢發歎 돌을 대하면 항상 겁부터 난다.2)
이러한 애석(愛石) 풍조로 인해 문인화의 주요 소재로 자리매김하게 된 괴석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표현이 더욱 발전하에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강조하는 중요한 표현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그림에서 보이는 괴석표현은 대체로 화훼화, 초충화의 부분으로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사군자와 함께 그려지거나 풍속화, 고사인물도의 점경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돌의 ‘불변부동(不變不動)’하는 물성(物性)이 선비의 굳은 지조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되면서 괴이한 형태의 돌에 적절한 농감과 준(?)법을 사용하여 ‘괴석도(怪石圖)’라는 새로운 화목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화가들 가운데 괴석도로 가장 유명한 화가는 정학교(1832-1914)이다. 예리한 필치로 바위의 구조적 견고함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괴석과 함께 간결한 대나무와 가시나무가 곁들여져 있다. 또한 제화시(題畵詩)가 쓰여있는 것이 많아 시서화 삼절의 문인화정신이 잘 구현되어 있다.
정학교 이전의 문인화가로서 괴석으로 유명한 사람은 황산(黃山) 김유근(金?根, 1785-1840)을 들 수 있다. 김유근의 괴석도는 풀도 나무도 없는 진공상태의 화면에 돌만을 그리고 여백에 제시(所貴神勝何求形似)를 써넣어 정신성이 강조된 문인화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황산 김유근 <怪石圖> 종이에 수묵/ 24.5×16.5cm/ 간송미술관 소장)
전해지는 이야기에 이하응은 진귀한 기암괴석을 구하기 위해 몇 백 리 밖에까지 하인을 보냈고, 천리 길을 멀다않고 소달구지에 실어 날랐으며 각처에서 좋은 돌이 있으면 그에게 갖다 바쳤다고 한다. 게다가 스스로 호를 ‘석파(石坡)’ 또는 ‘노석(老石)’이라 하여 돌에 대간 호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괴석은 ‘곧은 절개 혹은 변치 않는 마음’과 ‘장수(長壽)’라는 전통적인 두 가지 의미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이하응의 석란화에서 괴석의 표현은 초기에는 단순화된 형상과 반복적인 붓질로 초보적인 단계의 입체묘사를 시도하다가 점차 변화있는 운필로 된 특유의 묘사 방식으로 정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1875년 작 <석란도> 병풍을 시작으로 1886년까지 제작된 대부분의 <석란도>에서는 단순한 형태의 바위가 간단한 필묵법으로 표현되었다.
1875년 봄에 제작된 개인 소장 <석란도> 10폭 병풍에서 바위는 담묵의 변화 있는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담묵의 붓질을 반복하여 입체감을 나타내고자 했으며, 그 위를 타원형의 태점으로 마무리했다. 이어서 죽화랑 소장의 <석란도> 10폭 병풍은 1875년 봄에 제작된 <석란도> 10폭 병풍이 그려진 직후의 단계를 보여준다. 이 그림의 바위 묘사는 수많은 붓질을 통해 입체 묘사를 시도하기는 했으나 미숙한 표현으로 부자연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79년에 회갑을 맞아 제작된 <채색석란도> 에서는 풍부한 색채와 윤묵의 사용 및 변화있는 운필로 인해 바위의 입체묘사가 괄목할 정도로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제작된 일련의 <석란도>축과 귀국 직후에 제작된 <석란도>축에서는 괴석의 묘사가 생략적인 운필로 점차 단순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괴석이 독특한 형상과 필묵법으로 강한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다녀온 이후부터이다. 68세부터 72세 사이에 제작된 그의 석란화에서는 괴석의 형태 묘사에 비중을 두면서 변화 있는 필선과 윤묵을 사용하여 형태감과 입체감 표현이 두드러진다. 특히 1891년 작 <석란도> 12폭 병풍은 전체 구도와 필묵법 등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다. 같은해 양력 9월 8일경에 제작된 개인 소장 <석란도> 축 역시 괴석의 구성과 묘사에서 앞의 그림과 공통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의 괴석에서는 능숙하면서 속도감 있는 필치로 먹의 농담과 건습이 조화를 이루며 자신감에 찬 필묵법을 보여 주목된다.
한편 이하응 석란화의 괴석 표현은 1892년에 그린 몇 점의 <석란도>를 기점으로 형태와 필묵법이 더욱 단순해지고 평면적으로 변한다. 이는 중국에서 귀국하던 시기에 제작된 그림의 괴석 표현과 유사하여 그가 다시금 과거의 화풍으로 회귀한 듯한 인상을 준다. 말년의 석란화에서 빠른 필치로 된 비백체(飛白體)의 괴석은 대체로 간결하게 표현되어 전체 분위기에 격조를 부여하고 있으며, 이 시기 이하응의 석란화를 특징짓는 중요한 구성요소로 된다. 무엇보다도 거칠고 비수의 변화가 심한 진한 윤곽선은 부분적으로 담묵의 석면과 겹치기도 하면서 전반적으로 담백하고 평면적인 경향을 심화시킨다. 이같이 간일한 형태의 괴석 표현은 1897년에 제작된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말년의 석란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12)
◆ 대원군 이하응, <墨蘭圖> 12幅 屛風13)
1891년(72세) / 견본수묵 / 각 135.8× 22.0㎝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이하응의 석란도(石欄圖) 가운데 전체 구도와 난의 묘사 및 필묵법 등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것은, 72세에 회혼을 기념하여 그린 이 12폭 병풍이다.
이 석란화 병풍에서는 괴석의 모습이 더욱 변화무쌍해지며 동시에 상호 대비와 균형 속에서 통일감을 이루어내었다. 그 가운데 동시대 화가들 중 괴석도(怪石圖)로 유명한 정학교의 영향이 나타나 주목된다.
이 시기 석란도 병풍들14)은 괴석뿐 아니라, 난의 묘사에서도 형태와 운필의 기량이 최고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이 시기의 난엽은 속도감 있는 길고 예리한 곡선이 주류를 이루며, 초기 화풍에서 볼 수 있었던 특징적인 난엽 표현방식인 삼전법(三轉法)은 더 이상 의식되지 않은 채 시원스럽게 처리되어 특유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하응의 난 그림은 두 폭씩 짝을 이루는 대련(對聯)형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1887-1891년(68-72세) 이 시기의 석란화 병풍에서 볼 수 있는 더욱 특징적인 면모는 대련 형식의 화면에서 괴석이 기세(氣勢)나 형상의 대조를 통해 합일을 이루는 조형 원리에 입각하여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쪽이 나오면 다른 쪽은 들어가거나, 한쪽이 솟구치면 다른 쪽은 아래로 향하는 등 돌의 기세가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높고 낮음, 직선과 곡선, 요(凹)와 철(凸), 견고함과 부드러움, 농(濃)과 담(淡) 등 돌의 형태와 기세, 묵법 등에서 상대적인 요소로 화합하게 하는 것은 음양(陰陽)의 원리로 해석된다. 이같은 음양관계는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것으로서, 두 가지의 대비적인 조형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균형과 조화라는 조형 효과를 유발하게 된다.
이하응의 석란화에는 다양한 괴석의 표현이 보이는데, 그것은 대개 심산유곡에 위치한 자연경관의 일부이거나, 선비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정원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괴석들은 기괴스러운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성을 보이며, 수석(壽石)의 분류 기준으로 보면 추상석(抽象石)에 가깝다. 따라서 이하응의 석란화에는 특별한 형상을 연상하게 하는 형상석(形象石)은 볼 수 없다. 기본적으로 특정한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추상적인 형태의 괴석들이 대부분이다.
이하응의 석란화 가운데 정학교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석란도> 12폭 병풍이다. 이중 상부가 크고 불안정한 입석(제3, 4폭)은 대조적인 형상과 필묵법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음양괴석도(陰陽怪石圖)15)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제3폭은 담묵으로 각진 형상의 입석을, 제4폭은 농묵으로 둥근 질감의 입석을 표현했다. 이는 정학교가 그린 <음양괴석도, 각 120.0× 35.5㎝, 동방화랑 소장> 대련의 구성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절벽의 한쪽 단면을 묘사한 현애석(懸崖石, 제10폭), 마지막 12폭의 괴석은 수평의 직선이 반복적으로 표현되어 바위의 결이 강조되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학교의 <괴석도>와 유사성이 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입석형의 괴석이다. 밑에서 위로 치솟은 입석은 보는 이로 하여금 힘과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데 이는 선비의 굳은 지조와 숭고한 뜻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이하응의 석란화 병풍에 보이는 괴석 표현 가운데 입석형의 괴석은 정학교의 <음양괴석도> 대련과 상당한 친연성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그림에 보이는 입석은 상부는 기괴스러우면서도 크고, 하부로 내려가면서 가늘어지고 단순해지며 묵색도 희미해지는 등 묘사에 있어서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이하응의 석란화 병풍에 보이는 괴석의 묘사는 난과 조화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정학교의 괴석보다 단순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느낄 수 있다.
음양괴석도의 작품에서는 좌측의 괴석이 각지고 직선적이면, 우측은 부드럽게 표현된다. 좌측의 괴석이 각지고 직선적이면 우측은 부드럽고 곡선적인 형상으로, 한쪽이 상승세의 방향성을 취하면 다른 쪽은 하향세를 취하도록 했다. 또한 괴석 표현에 나타나는 음양의 원리는 묵법(墨法)에도 적용되어 한쪽이 농묵이면, 다른 쪽은 담묵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괴석의 표현은 이하응 외에도 정학교를 비롯, 혜산 유숙(劉淑, 1827-1873), 오원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운미 민영익(閔泳翊, 1860-1914) 등 조선 말기 다른 화가들의 괴석도에서도 볼 수 있다. 음양괴석도가 명, 청대에 주로 그려진 중국의 괴석그림인 기석도(奇石圖)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으로서 조선 말기 우리나라 화가에 의해 창안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1폭 - 제3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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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폭>
現我??, ?病無力, 他求蘭政, 一切謝之, 此次劉姓小史, 內囑數叢蘭, 稱以湖南韻人金員外之要以□之. 盖劉人本
<지금 나는 늙어 병들고 무력하여 다른 사람들이 난 그림을 구하여도 모두 사양하였는데, 이번에 劉小史가 와서 총란도(叢蘭圖) 몇 폭을 구하며, 호남의 운인(韻人) 김원외(金員外)의 요구로 □하는 것이라 하였다.
생각건대, 유소사는 본시 >
<제2폭>
家庭, 聞見深於書畵者也. 且稱韻士已求數朶, 勢難却之, 應以索紙. 此非珠聯, 乃是大屛也. 意難違約, 雖以染墨, 然而屛者
<가정에서 서화에 견문이 깊은 사람일 것이다. 또 운사(韻士)가 이미 몇 가지(數朶)를 구하였다고 하여, 일의 형세가 물리치기 어려워 응하여 종이를 찾았다. 이것은 주련(珠聯)이 아니라 바로 큰 병풍이다. 약속을 어기기 어려워서 비록 그림을 그리기는 하나, 屛이라는 것은 >
<제3폭>
盖謂珠聯二對曰屛也. 此爲古所稱之者也. 邇來東習悖戾, 六摺曰小屛, 八摺曰大屛, 近又惡習, 尤甚以十二摺爲屛, 分作六摺
<대개 주련(珠聯) 두 쌍을 일러 屛이라 하는데, 이것은 옛날에 일컫던 것이다. 근래에 와서 우리나라의 풍습이 어그러져 6첩을 小屛이라 하고 8첩을 大屛이라 하는데, 요사이 또 악습이 더욱 심해져 12첩을 屛이라 하고 그것을 나누어 6첩 >
제4폭 - 제6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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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폭>
二屛, 自以謂奇幻竗計, 過於我者誰也. 云云者面目可憎. 凡屛者多以山水翎毛折枝爲繪, 蕙蘭爲屛者罕矣. 現今
<二屛을 만들고는 스스로 ‘기이하고 환상적인 묘계가 나보다 나은 자 누구인가’라고 한다 하니 그렇게 말하는 자는 面目이 가증스럽다. 무릇 屛이라고 하는 것은 산수, 영모, 절지로 그린 것은 많지만 혜란(蕙蘭)으로 병풍을 만든 것은 드물다. 지금 >
<제5폭>
十二摺何以廉少. 以求畵者之慾, 金剛萬二千峰, 猶不得充其心也. 摠論屛者, 古以二對掛壁, 眞蹟書畵常目
<12첩을 무엇 때문에 적다고 하는가? 그림을 구하는 자의 욕심 때문이니 금강산 만이천봉도 오히려 그 마음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總論하건대, 屛이란 것은 옛날에는 두 쌍을 벽에 걸어 진적 서화를 늘 눈앞에 두었지만, >
<제6폭>
在之, 近俗 以屛爲生涯物件, 養病之所爲要緊物, 祭祀之堂爲□一件, 文房之中爲主張之品, ?禮之時爲無雙之媒.
<요즘 풍속은 생애의 물건으로 삼으니 병 조리 하는 곳에 요긴한 것이요, 제사지내는 곳에 □하기 위한 것이요, 서재 안의 주요 물품이요, 혼례 할 때 둘도 없는 매개체이다. >
제7폭 - 제9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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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폭>
初不以爲傳家之物, 便作借用件貰用件者, 心所痛恨久矣. 然今作此屛, 想不借貰, 以是爲慰者存也. 此繪
<처음에는 대대로 전하는 물건으로 삼지 않고 빌려 쓰고 세내어 쓰는 물건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이것을 애통해하고 한스럽게 여긴 지 오래이다. 그러나 지금 이 병풍을 만듦에 빌려주거나 세내어 주지 않고 이것을[감상하며] 위안을 삼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그림은 >
<제8폭>
不以形似, 只以長?爲貴, 若以俗眼看之, 長幀之內, 排布無多, 應可笑之, 必以韻意評之, 自可貴之也. 今日
<형사에 뜻을 두지 않고 장별(長?, 길게 삐치는 서법)로써 귀함을 삼았는데, 만일 속된 눈으로 본다면 긴 화폭 안에 배포가 많지 않아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운의(韻意)로써 평한다면 절로 귀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오늘 >
<제9폭>
寫蘭, 決非無難下筆, 實是有意染墨, 末審金君如何可否. 但老脘筆力猶不能, 千釣爲重, 是愧是嘆.
<蘭을 그린 것은 결코 어렵지 않게 붓을 댄 것이 아니라 실로 뜻을 가지고 그렸는데, 金군이 괜찮게 여길는지 모르겠다. 다만 늙은 팔의 필력이 천균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으니 이것이 부끄럽고 한스럽다. >
제10폭 - 제12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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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폭>
盖劉人淸明有心者也. 金君勤恭有意者也. 今求我蘭, 豈可謝却. 聞走墨海拿取水, 穎豪放應之人, 雖
<생각건대, 劉人은 청명하고 有心한 사람이고, 金군은 근공(勤恭)하여 물리칠 수 있겠는가. 듣건대, 묵해(墨海)를 달려 물을 움켜쥐는 영호 방응(穎豪 放應)한 사람은 [육신은] 비록 >
<제11폭>
老矣, 畵尙少矣. 傍看者叩其何人求繪, 我以韻人應之. 其人再言, 求畵者眞是大稿力云耳.
<늙었다 하더라도 그림은 오히려 젊다. 곁에서 보던 사람이 “그 어떤 사람이 그림을 구합니까?”라고 묻기에“韻人이다”라고 대답했더니, 그가 다시 말하기를 “그림을 구하는 자는 진실로 대고력(大稿力)입니다”하였다. >
<제12폭>
晩悟方家囑正. 辛卯夏小滿節 石坡七十二歲 回?老人作.
<만오방가(晩悟方家)에게 질정(叱正)을 부탁하노라.
신묘년(1891년) 여름 소만절(양력 5월20일경), 회혼을 맞이한 노인 72세의 석파 그리다. >
<사구인(詞句印), 군호인(君號印), 아호인(雅號印) >
제1폭 - 頭印: 第一公名只賞詩(白文): 제일의 공명은 오직 시를 감상하는 것.
- 家徑□□江□□□□□□□□□深處(朱文)
제2폭 - 德音不瑕(白文): 아름다운 명성에 하자가 없다.16)
제3폭 - 好華看到半開時(朱文)
:좋은 꽃 반쯤 피었을 때 보러 가노라.17)
제4폭 - 一室之內有以自娛(朱文): 하나의 방안에 스스로 즐길만한 것이 있다.
제5폭 - ?烏號不如藏此書(朱文)
:오호를 품는 것보다 이 책을 소장하는 것이 낫다.18)
제6폭 - 爲對讀書人谿亭自聞香(朱文)
:독서인을 마주하니 계정에서 절로 향기가 난다.
제7폭 - 蓄良硯墨筆紙(白文): 좋은 벼루와 먹과 붓과 종이를 비축하다.
제8폭 - 澹澹流水意(朱文): 담담하게 물 흐르는 듯한 마음19)
제9폭 - ?福之源(白文): 복을 여는 근원
제10폭 - 一室秋燈 一庭秋雨 更一聲秋雁(朱文)
:방에는 가을등불, 뜰에는 가을 비, 그리고 외마디 가을 기러기소리
제11폭 - 修成淑德 施及子孫(白文): 맑은 덕을 닦고 이루어서 자손에게 미치게 하리라.20)
제12폭 - 頭印: □□□一三年(白文)
- 松月爲談柄 片石爲廳徒(朱文)
:소나무와 달을 이야기 거리로 삼고 조각돌을 청중으로 삼는다.
- 大院君章(白文), 石坡(朱文)
제1폭 : 家徑□□江□□□□□□□□□深處 |
제2폭 : 德音不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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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폭 : 好華看到半開時 |
제4폭 : 一室之內有以自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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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폭 : ?烏號不如藏此書 |
제6폭 : 爲對讀書人谿亭自聞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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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폭 : 蓄良硯墨筆紙 |
제8폭 : 澹澹流水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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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폭 : ?福之源 |
제10폭: 一室秋燈一庭秋雨更一聲秋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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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폭 : 修成淑德施及子孫 |
제12폭 : 松月爲談柄片石爲廳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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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院君章 / 石坡 (묵란도병) |
大院君章 / 石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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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昰應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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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와 석파 이하응의 묵란화론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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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석파 이하응 |
비고 | |
제작목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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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세나 교화의 수단 (난그림을 통해 훈계나 가르침의 뜻을 전하고자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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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락청빈한 사람에게>정신적 위안이 되게 하고자 함 |
= 鄭燮「?秋田索?」 | |||
제작 및 감상태도 (인격의 중시) |
= <난 그림은> 인품이 고고하여 특별히 뛰어나지 않으면 쉽게 손댈 수 없다. 「題石坡蘭卷」 |
= 화가의 인품 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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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격에 따른 감상자의 구분 : 韻人과 俗人=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자격=韻意 갖춘 韻士 | |||
창작과 비평의 기준 |
= 奇 |
= 韻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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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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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에서 일어나는 창작 충동에 의한 작품 제작(자연의 변화에 동화되어 창작 충동을 느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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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興을 끌어와서 그린다. 興은 喜와 같은 것이다. |
= 元代 (僧), 覺隱曰 “喜蘭怒竹”,『芥子園畵傳』 | |||
기법론 |
畵法 중시 |
= 한 획이라도 書法이 아니면 안된다. = 草隸奇字之法으로 그렸다. (不二禪蘭圖) = 隸書 쓰는 법과 가까우니.... = 三轉法 |
= 절대화법으로써 화법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 草書의 장별법(長?法) |
= 鄭燮「補遺」要知畵法通書法, 蘭竹如同草隸然 |
左筆 중시 |
= 蘭을 치는 데는 마땅히 왼쪽으로 치는 한 법식을 익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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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芥子園畵傳』: 右筆 | |
鳳眼 강조 |
= 鳳眼이니 象眼이니 하여 통행하는 규칙은 이것이 아니면 蘭을 칠 수 없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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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芥子園畵傳』 : 基本五筆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