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强顔男子]
신데렐라 2
“아니, 제가 AS를 불러서.”
임아나가 말하자 사내는 허리를 펴더니 강한 시선으로 임아나를 보았다.
“스페어 타이어 있습니까?”
“네, 있어요.”
"그럼 됐어요. 10분이면 끝납니다. AS를 부르면 시간이 꽤 걸립겁니다.”
“미안해서.”
“미안한 감정보다 내 호의가 의심스러워서 주저하시는 것 아닙니까?”
거침없이 말한 사내가 씨익 웃었다.
“편하게 생각하세요. 이런 기회를 놓치는 놈이야말로 병신입니다.”
사내의 웃음에 끌려든 임아나가 따라 웃다가 다시 정색하고 말했다.
“그럼 부탁합니다.”
임아나가 트렁크를 열었을 때 사내는 양복저고리를 벗더니 내밀었다.
“옷좀 받아 주실랍니까?”
저고리를 받아쥔 임아나는 깃에 붙여진 올마니 상표를 보았다. 이태리 제품으로 한벌에 3백만 원 이상 가는 고가품이다. 와이셔츠까지 걷어붙인 사내의 굵은 팔에는 로메스 시계가 채워져 있었는데 수수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타이어를 꺼낸 사내는 곧 공구까지 집어내더니 익숙한 동작으로 갈아끼우기 시작했다.
“어떤 놈이 찢고 간 것 같습니다.”
타이어를 빼낸 사내가 찢긴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심술이 난거겠죠. 하지만 그놈은 그런 성품으로는 평생을 가도 외제차 주인이 되지 못할 겁니다.”
임아나는 사내가 30대 초반쯤이라고 생각했다. 행동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이었지만 웃는 모습에 호감이 간다. 사내의 손이 금방 기름으로 더러워졌으므로 임아나는 초조해졌다.
“정말 미안해서 어떡해요?”
임아나는 진심으로 말했고 사내는 다시 싱긋 웃었다.
“나는 인연을 놓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연을 인연으로 만든 거죠.”
타이어를 갈아끼우면서 사내가 말을 이었다.
“물론 선택은 그쪽에서 하시겠지만 말입니다.”
“전 아직 댁의 이름도 몰라요.”
“나는 조철봉이라고 합니다.”
너트를 힘주어 돌리면서 말하는 조철봉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브라질에서 귀국한지 일 년 되었습니다.”
“브라질에서요?”
“네, 한국에서는 카니발로만 알려진곳.”
“그곳에서 사셨어요?”
“아닙니다.”
정색한 조철봉이 잠시 숨을 돌리려는 듯 움직임을 멈추더니 임아나를 올려다 보았다.
“난 브라질 교민이면서 학교는 한국에서 다녔습니다. 군대도 갔다 왔구요. 그것은 아버님의 뜻이었고 제가 바라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럼 영구 귀국하신 것인가요?”
“부모님은 아직 브라질에 계십니다. 그곳에 사업체가 여러 곳이어서.”
몸을 돌린 조철봉이 다시 너트를 조이며 말을 이었다.
“한국의 사업 여건이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내 고국이니까요. 난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할 겁니다.”
임아나는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사내의 태도는 당당했으며 진실되게 보였지만 아직 믿을 수는 없었다. 그때 일을 마친 조철봉이 일어섰다.
“끝났습니다. 손을 씻어야겠는데.”
“저기 카페에서.”
임아나가 옆쪽의 카페를 가리키자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제 차에다 저고리를 넣어 주실랍니까? 키는 제 바지 호주머니에 있습니다.”
조철봉이 턱으로 가리킨 차는 검정색 크로나 최고급형 리무진이다.
크로나에 옷을 넣은 임아나는 조철봉이 손을 씻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후에 조철봉이 카페에서 나왔을때 임아나가 정색하고 말했다.
“저, 제가 나중에 차 한잔 사 드려도 돼요? 너무 미안해서.”
“이런 인연을 놓치지 않겠다고 했지않습니까? 당신같은 미인에다 BMW는 상승작용을 하거든요.”
조철봉도 정색하고 말했으므로 임아나는 저도 모르게 풀썩 웃었다. 이렇게 대놓고 BMW를 갖다 붙이는 사내는 처음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후련했던 것이다.
“좋아요. 그럼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7시에.”
“장소만 말씀해 주십시오.”
“논현동 버지니아 호텔 커피숍에서.”
“좋습니다.”
임아나가 BMW를 몰고 사라졌을때 조철봉의 옆으로 최갑중이 다가와 섰다. 타이어를 칼로 찢은 범인은 최갑중이다.
“형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잘됐다.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
크로나로 다가간 그들은 차에 올랐다.
“네가 오늘밤에 해야할 일이 있다.”
뒷좌석에 앉은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아주 쉬운 일이야.”
*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3시였는데 이은영이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조철봉의 책상 앞에 다가와 섰다. 제주도에서 같이 돌아왔지만 이은영은 하루 늦은 오늘 출근했고 아침부터 조철봉이 외출하는 바람에 처음 마주보는 셈이다.
“오늘 저녁에 저하고 이야기 좀 해요.”
이은영이 소리죽여 말했을때 조철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무실에는 맨 앞쪽에 여직원 둘만 앉아있을 뿐이다. 모두 영업을 나간 것이다.
“무슨일인데?”
“그냥요. 심란해서 그래요.”
“오늘 저녁에는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일찍 들어가 봐야돼.”
조철봉이 책상 위로 상반신을 늘이고는 이은영을 보았다.
“심란한 이유가 뭐야?”
“조 선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은영은 입술만을 달싹이고 말했지만 조철봉은 똑똑히 들었다.
“어, 그것참.”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그것이 심란한 이유라니. 이해가 안되는데. 나는.”
“난 농락당하고 있는 기분이예요.”
이번에는 이은영이 눈을 치켜뜨고 조철봉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조 선배한테 확인을 받고 싶어서 그런가봐요.”
“나도 이은영 씨를 사랑해.”
조철봉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발음하고는 정색했다.
“내가 이런 감정을 처음 느끼고 있다면 믿겠어?”
“조 선배는 그런 감정까지도 얼마든지 조작해낼수 있는 사람이죠.”
두손으로 책상을 짚은 이은영이 가늘고 긴 숨을 뱉았다.
“그걸 알면서도 빠져든 내가 미워요.”
“현실을 봐.”
조철봉이 엄지를 구부려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난 지금 이은영 씨 옆에 있어. 어디로 도망치지 않아.”
“그래서.”
주위를 한번 둘러본 이은영이 조철봉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말은 꼭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설령 당신이 이중삼중의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는 이은영이 몸을 돌렸으므로 조철봉은 다시 입맛을 다셨다.
*
버지니아 호텔은 무궁화 다섯개짜리 특급호텔로 분위기가 화려하기보다는 장중했다.
로비의 바닥이나 벽도 어두운 색깔이었고 커피숍도 마찬가지였다. 짙은 색 가죽 소파가 널찍하게 놓인 사이를 자주색 제복의 종업원들이 소리없이 지날 뿐 조용했다.
임아나는 안쪽 자리에 이미 와 있었는데 커피숍의 손님은 외국인 두 팀에다 임아나까지 셋이었다. 조철봉이 다가갔을 때 임아나는 눈웃음을 치며 맞았다.
“먼저 와 계셨네.”
앞자리에 앉은 조철봉이 눈을 좁혀뜨고 임아나를 보았다. 임아나는 진주색 투피스 정장 차림이었는데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던 것이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고맙습니다.”
머리를 조금 까닥여 보인 임아나가 이제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런 칭찬은 언제 들어도 싫지 않아요.”
임아나의 시선이 다시 조철봉의 모습을 재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조철봉도 연회색의 정장으로 바꿔 입었고 건장한 체격과 잘 어울렸다. 다가온 종업원에게 마실 것을 주문한 조철봉이 임아나를 보았다.
“내가 아직 그쪽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전 임아나예요.”
임아나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이는 스물여덟, 그동안 수도 없이 남자를 갈아치워 왔으며 한때는 TV 탤런트 강수민과도 사귀었다가 헤어졌다. 학교는 일류인 세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니 머리가 나쁜편은 아니다. 이미 임아나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해 놓았지만 조철봉이 정색하고 물었다.
“물론 미혼이시겠죠?”
“네. 거긴요?”
“서른셋에 아직 미혼입니다. 스쳐가는 여자는 있었지만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나이에 과거가 없다면 거짓말이죠.”
임아나의 표정을 본 조철봉은 그녀가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가 날라져 왔을 때 조철봉이 임아나를 보았다.
“내가 저녁하고 술을 사지요. 괜찮겠습니까?”
“좋아요.”
찻잔을 든 임아나가 다시 눈웃음을 쳤다.
“처음 만난 분하고 이러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이죠.”
“저도 마찬가지올시다.”
조철봉이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최고급형 크로나 리무진의 역할이 최소한 50%를 차지했다. 그리고 30%쯤은 올마니 저고리와 로메스 시계 때문일 것이다. 차를 마시고 호텔 현관으로 나왔을 때 조철봉이 임아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차 가져 오셨죠?”
“네. 철봉 씨는요?”
“전 술 마실 것 같아서 기사를 데려왔는데.”
주머니에서 만 원 권 지폐를 꺼낸 조철봉이 도어맨에게 임아나의 차 번호를 알려주고는 돈을 건네주었다. 곧 임아나의 BMW와 조철봉의 크로나가 동시에 현관 앞에 섰는데 크로나의 기사는 최갑중이었다.
“내 기사더러 아나 씨 차를 몰고 뒤를 따라오라고 하고 아나 씨는 제 차로 같이 가시지요.”
조철봉의 말에 임아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압구정동에 괜찮은 일식집이 있습니다. 일식 좋아하세요?”
“좋아요.”
임아나가 금방 대답한 것은 당연했다. 그것도 조철봉이 조사해 놓았기 때문이다.
*
일식집 하코네는 임아나가 처음 가본 곳이었지만 분위기가 우선 마음에 들었다. 깨끗하고 넓은 데다 가구는 고급이면서 요란하지 않았고 홀에 앉은 손님들의 수준도 높아 보였던 것이다.
조철봉을 본 주인이 반색을 하더니 안쪽 방으로 안내해 주는 것도 임아나를 흡족하게 했다. 다다미 방에 마주 앉았을 때 주인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기한의 백 회장님이 낮에 다녀가셨습니다. 제주도에 다녀 오셨다고 하더군요.”
50대 중반의 주인은 조철봉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최상의 예우를 갖추고 있다. 조철봉이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 제주도에서 백 회장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회 좋은걸로 부탁합니다.”
“예, 맡겨 주십시요.”
주인이 절을 하고 방을 나가자 조철봉이 임아나를 보았다.
“기한그룹의 백대운 회장님을 아시죠?”
“네, 알아요.”
임아나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신문 경제면은 읽지도 않는 임아나였지만 백대운은 사회나 정치면에도 가끔 이름이 나오는 경제계의 거물인 것이다. 아까부터 임아나는 조철봉과 주인의 대화를 들으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백 회장님하고 여길 두어 번 왔었지요.”
조철봉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 부친 친구가 되시는 터라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십니다.”
“아, 그러세요.”
임아나가 아직도 긴장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백대운에 비교하면 아버지 임기찬은 어른 앞의 아이 꼴이 될 것이다. 현금 동원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아버지의 경력과 사회적 위치로는 당해내지 못한다. 그런 백대운과 조철봉이 같이 어울리는 사이라니. 정신을 차린 임아나는 이제 조철봉에게 맹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몇 번 부딪치고 지났던 사내들 중 하나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백 회장님은 유통업을 권하시는데 나는 제조업을 하고 싶단 말입니다.”
조철봉이 말했을 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누군가가 가볍게 노크를 했다.
“저, 사장님.”
조철봉이 미닫이 문을 열어 젖히자 최갑중의 머리부터 숙였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저, 제가.”
머리를 든 최갑중이 울상을 짓고 조철봉과 임아나를 번갈아 보았다.
“제가 차를 몰고 오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사고를 냈어?”
눈을 치켜떴던 조철봉이 힐끗 임아나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차 앞부분이 부서졌는데요, 제가 실수로 벽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아, 조심해서 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임아나에게 말했다.
“같이 나가서 차를 보십시다.”
임아나가 따라 일어섰을 때 조철봉이 위로하듯 말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아나 씨.”
일식당 주차장으로 나간 그들은 한쪽에 세워진 BMW를 보았다. 차의 왼쪽 범퍼가 찌그러졌고 라이트도 깨져 있었다. 최갑중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변상하겠습니다.”
“이 사람아, 그만둬.”
정색하고 말한 조철봉이 몸을 돌려 임아나를 보았다.
“내가 새 차를 한대 뽑아 드리지요.”
“아뇨, 괜찮아요.”
놀란 임아나가 머리까지 젓자 조철봉이 싱긋 웃었다.
“내일 크로나를 뽑아 드리겠습니다. 어떤 색깔을 좋아하세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차를 맡겨야겠는데 AS센터 전화번호가 있습니까?”
“제가 연락 할게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방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 한동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AS센터에 전화연락을 한 임아나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을 때 마침 생선회가 날라져 왔다.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젓가락을 든 조철봉이 웃음 띤 얼굴로 임아나를 보았다.
“이것도 인연이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 사고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죠.”
조철봉과 시선이 마주치자 임아나의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거침없는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조철봉의 치켜뜬 눈에는 암컷을 향한 수컷의 짐승 같은 욕망이 그대로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기회도 놓치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하지만 너무 심하셨어요.”
겨우 평정을 찾은 임아나가 젓가락으로 회를 집으면서 말했다.
“차를 조금 깨뜨렸다고 크로나를 사주시겠다니요.”
“그럼 솔직히 말씀 드리지요.”
임아나의 앞에 놓인 술잔에 정종을 따르면서 조철봉이 정색했다.
“제가 크로나를 사 드린다는 이유를 말입니다.”
상체를 세운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제가 크로나를 생산하는 대성자동차하고 관계가 있습니다.”
“무슨 관계인데요?”
“브라질에 대성자동차의 현지법인 공장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건 들었어요.”
“브라질의 현지 사업파트너가 바로 제 부친이 투자한 회사입니다. 피에트로 회사의 지분 35%를 제 부친이 갖고 계십니다.”
조철봉이 눈만 깜박이는 임아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따라서 제가 대성의 자동차를 이곳에서 구입하면 브라질에서 결산처리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타고 다니는 크로나도 그런 방식으로 처리했지요.”
“저는 도무지. 그리고.”
임아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조철봉은 한 모금에 정종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원가로 계산이 됩니다. 전혀 부담이 되지 않으니까 신경쓰지 마시고.”
술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임아나가 결심하듯 술잔을 들었다.
“그럴 순 없어요.”
“당연한 보상이라니까요.”
“아녜요.”
“자, 오늘은 그 이야기 그만 하십시다.”
손바닥을 펴보인 조철봉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임아나를 보았다.
“다른 이야기를 하죠. 리우데자네이루에 가 보셨습니까?
“아뇨, 아직.”
굳어졌던 임아나의 표정도 풀렸다. 임아나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들었어요. 아름다운 곳이라지요?”
“그럼요.”
어젯밤에 관광안내서를 읽었을 뿐이지만 조철봉이 정색하고 끄덕였다.
*
다음날 오전, 대성그룹 비서실장 윤문영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맞았다.
그는 비서실 간부 회의를 주재하다가 조철봉과의 약속 때문에 도중에 나와 기다리던 중이었다. 비서실장실의 소파에 마주 앉았을때 윤문영이 은근한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제주도에서 한꺼번에 다섯 대나 팔았다면서? 그건 회장님도 알고 계시네.”
“국개연을 이용한 것입니다.”
정색한 조철봉이 윤문영을 보았다.
“호텔 카지노 사장한테 국개연의 비공식 파트너가 대성자동차라고 했습니다.”
“허어, 그래?”
윤문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이해득실을 계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곧 윤문영의 입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대성자동차가 국개연의 비공식 파트너로 소문이 나서 해가 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 사람아, 그렇게 해도 되겠나?”
“어쨌든 저는 대성자동차의 영업사원입니다. 본업을 위해서 국개연의 이름을 조금 이용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국개연이나 회사에 해가 되는 일도 없고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국개연측에서 알게 되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카지노 사장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테니까요.”
조철봉이 자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국제개혁연맹인 것이다. 문제가 있을리가 없다. 머리를 끄덕인 윤문영이 조철봉을 보았다.
“그런데 날 보자고 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내가 도와줘야 할 일이라도 있나?”
“예,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요.”
“말해보게, 내가 힘 닿는 데까지 도와줄테니가 말이야.”
“서초영업소에 파견된 기조실 직원 문제인데요.”
조철봉이 긴장한듯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비서실에 보고했던 이은영 과장이 저하고 한 팀이 되어 있습니다.”
그건 알고 있다는듯 윤문영은 머리만 끄덕였다.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국개연측에서는 이 과장을 통해 정보가 유출될까 상당히 경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주 저한테 이 과장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음, 그런가?”
눈을 좁혀뜬 윤문영이 조철봉을 빤히 보았다. 두뇌회전이 빠른 윤문영은 금방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난 조 과장하고 이 과장이 손발이 잘 맞는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저도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서초영업소에 파견시킨 기조실 직원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겠군.”
윤문영이 머리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순환근무 형식을 만들어서 말이야.”
“이 과장한테 많은 도움을 받은 터라 정말 서운합니다.”
“조 과장 일이 중요해.”
정색한 윤문영이 조철봉을 보았다.
“이 과장은 그만하면 역할을 충분히 해냈어. 내가 고과에 반영시키도록 하지.”
비서실장실을 나온 조철봉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이것으로 이은영은 정리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이은영을 통하여 국개연의 정보를 비서실로 흘렸지만 앞으로는 직접 할 것이고 실장은 그것을 오히려 더 반길 것이다.
이은영은 제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다. 그러나 이제 이은영은 짐이 될 뿐이다. 같이 있으면 자꾸 확인을 하려고 들테니까. 조철봉은 느긋한 표정으로 발을 떼었다.
*
“어머나.”
카페 앞 주차장으로 나온 임아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앞에는 은색 크로나 리무진이 세워져 있었다.
“번호판은 3자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3자가 세개 들어간 것으로 골랐습니다.”
최갑중이 부동자세로 서서 말했다.
“그리고 사장님께서는 급한 일이 있으셔서 오후에 연락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조철봉은 임아나와 카페에서 만나기로 해놓고는 대신 최갑중을 보냈다. 그리고 최갑중은 금방 뽑은 크로나에다 번호판까지 붙여 가져왔다.
“차 안에 등록증과 보험서류가 있습니다. 자, 여기.”
최갑중이 두 손으로 열쇠를 내밀었다.
“사장님께서 꼭 받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받지 않으시면 제가 큰일납니다.”
“그럴 순 없어요.”
정신을 차린 임아나가 머리를 젓자 최갑중이 정색했다.
“우선 받으시고 사장님 만나셔서 이야기를 하시지요.”
그리고는 바짝 다가와 열쇠를 내밀었으므로 임아나는 주춤대며 받았다. 살았다는 얼굴로 최갑중이 사라지자 임아나는 다시 눈 앞의 크로나를 바라보았다. 은색은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이었다. 지난번 대성자동차 영업사원과 계약 직전까지 갔을 때도 바로 이 색상을 골랐었다.
차로 다가간 임아나는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러자 옆좌석에 놓인 장미 한 송이가 보였다. 장미 밑에는 등록증과 보험서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모두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
이맛살을 찌푸린 임아나가 혼잣소리로 말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러나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차를 조금 부쉈다고 시가 8000만 원 가까이 되는 최고급형 크로나를 사주다니. 이런 이야기는 주간지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가슴이 아직도 뛰고 있는 것이다.
*
그 시간에 조철봉은 국제 차밍스쿨의 복도에 서 있었다. 대형유리창을 통해 안쪽이 다 보였다. 팔짱을 끼고선 조철봉은 윤성희의 모습이 보이자 슬며시 웃었다.
윤성희는 워킹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10여명의 학생들 중에서도 윤성희는 단연 두드러졌다. 윤성희는 열중하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 끼어 일렬로 걸어오면서 한눈도 팔지 않았다. 유명 브랜드의 감색 정장 투피스 차림에다 머리는 쇼트 커트를 해서 긴 목이 드러났고 두 다리는 그린 것처럼 미끈하다.
무용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걸음을 떼는 것이 춤을 추는 것처럼 유연하고 탄력적이어서 선생도 윤성희한테만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널 신데렐라로 만들어주마.”
조철봉이 입술만을 달싹이며 말했다. 두 눈에서 생기가 났고 눈 밑의 피부는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서 너는 널 무시하고 착취했던 모든 놈들한테 복수를 하는 거다.”
그때 벨이 울렸고 머리를 돌린 윤성희가 창가에 선 조철봉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맑은 웃음이어서 조철봉의 가슴은 뛰었다. 밖으로 나온 윤성희가 자연스럽게 조철봉의 팔을 끼었다. 윤성희에게서 옅은 재스민 향내가 났다. 조철봉이 좋아하는 향기였다.
“우리 근사한 식당으로 가보자구.”
향내를 들여마시면서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그런 식당에도 익숙해져야 돼.”
윤성희가 대답 대신 조철봉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그들이 차밍스쿨을 나왔을 때 조철봉은 휴대전화의 진동을 느끼고는 멈춰 섰다. 임아나일 것이다. 크로나에 놀란 임아나가 연락해올 시간이 되었다.
*
윤성희와 점심을 마친 조철봉이 영업소로 돌아왔을때는 오후 3시반이었다.
영업에 바쁜 시간이어서 평소처럼 사무실에는 서너명만 남아 있었지만 자리에 앉아있던 장정수가 기다렸다는듯 손짓으로 조철봉을 불렀다. 조철봉이 책상앞에 다가서자 장정수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너, 이번 인사이동 알어?”
“인사이동이라니요?”
눈썹을 좁힌 조철봉이 장정수를 내려다 보았다.
“소장님이 부장으로 승진 되신 겁니까?”
“이 자식아, 시끄러.”
혀를 찬 장정수가 말을 이었다.
“기조실에서 파견나온 사원들이 모두 이동한다. 그래서 우리 영업소에 있던 기조실 팀은 부산으로 발령이 났어.”
“그래요?”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과장하고 손발이 맞아가고 있었는데 이게 웬 지랄인지, 비서실놈들 하는 짓이 이렇다니까.”
“이 과장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야. 지금 전시장에 혼자 앉아있다.”
“이거 어떻게 위로를 하지? 왜 하필 부산이야? 서울에도 영업소가 많은데.”
“가봐.”
장정수가 턱으로 전시장쪽을 가리켰다.
“분위기가 안좋아서 나는 말도 못붙였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 조철봉은 구석의 상담용 소파에 혼자 앉아있는 이은영을 보았다. 이은영은 크로나의 팸플릿을 보고 있다가 머리를 들었다. 굳어진 표정이었다.
“소장한테서 이야기 들었어.”
털썩 앞쪽에 앉은 조철봉이 찌푸린 얼굴로 이은영을 보았다.
“부산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면서?”
이은영이 눈만 깜박였으나 조철봉의 목소리는 격해졌다.
“비서실 놈들의 탁상행정은 정말 신물이 난다니까, 어때? 내가 비서실로 찾아가 볼까?”
“그만둬요.”
겨우 입을 연 이은영이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비서실 강재찬 부장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난 1호봉 승급이 되었더군요.”
“허, 그래? 그거야 당연하지.”
조철봉이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1호봉 승급이면 1년 경력이 추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부장 진급이 1년 단축된다.
“그럼 나도 승급이 되었겠군, 안 그래?”
“난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다시 시선을 내린 이은영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본래 특판기간 동안은 한곳에 계속 있기로 되어 있었는데.”
“글쎄 본사놈들 하는 짓이 다 그렇다니까 그러네.”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내가 오늘 저녁 국개연 멤버하고 약속이 있어. 나한테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을 하려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만나기는 해야 될 것 같아.”
이은영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일 저녁 나한테 시간을 내줄수 있겠지?”
“업무 인계인수 할것도 없으니까 내일 아침에 부산으로 가겠어요.”
차분한 표정이 된 이은영이 조철봉을 보았다.
“나한테 억지로 시간 낼 필요는 없어요.”
“이것봐, 왜그래?”
조철봉이 정색하자 이은영은 입술끝을 올리면서 웃었다.
“설령 이번 인사가 당신의 농간이라고 하더라도 유감 갖지 않을게요. 그냥 있는 그대로 당신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어요.”
*
임아나가 버지니아호텔 커피숍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는 오후 7시5분이었다.
“기다리셨죠?”
다가선 임아나는 옅은 분홍색 투피스 차림으로 더 화사했다. 앞에 앉은 임아나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오전에 차 받았어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다행입니다.”
커피를 시킨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나 씨를 보면 언제나 목구멍이 꽉 막힌 느낌이 들어요.”
“어머, 왜요?”
조철봉이 눈을 동그랗게 뜬 임아나를 향해 정색하고 말했다.
“충동이 일어나는 거죠.”
그것이 무슨 충동이냐고 임아나는 촌스럽게 묻지 않았다. 대신 희미하게 웃는 것으로 과정을 한 계단 진전시켰다.
“참, 이것.”
잊고 있었다는듯 임아나가 핸드백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어 조철봉의 앞에 밀어놓았다.
“차값이에요, 번호판값에 세금, 보험료까지 계산해서 가져왔어요.”
“이런.”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봉투를 내려다 보았다.
“대성자동차 브라질 법인의 지분을 갖고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신 것 같은데.”
“아뇨, 믿어요.”
임아나가 정색하고 머리까지 저었다.
“브라질 법인의 파트너가 피에트로사라는 것도 알아 보았어요.”
임아나는 아버지 임기찬의 비서를 시켜 조철봉이 제주도에서 기한그룹의 회장 백기성과 만났다는 것까지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날더러 이 돈을 받으라는 겁니까?”
“대신 오늘밤 술이나 사세요.”
임아나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실은 저도 차를 크로나로 바꿀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잘된 거예요.”
“허어 참.”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쓴웃음을 짓더니 봉투를 주머니에 넣었다.
“좋습니다. 술한잔 하십시다.”
이렇게 돈을 받게 될 확률은 90% 이상으로 계산하고 있었지만 안전장치는 해놓았었다.
만일 임아나가 입을 싹 씻는다면 최갑중을 시켜 엔진을 망가뜨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전자장치 몇 개만 손보면 임아나는 어쩔 수 없이 차를 AS센터에 보내게 된다. 그때 다시 기회가 만들어지는데 임아나가 끝까지 돈을 내지 않는다면 도로 빼앗아 가면 된다.
제 돈은 한푼도 내지않은터라 조철봉이 가져갔다고 소송을 하지는 못할테니까. 그러나 그런 최악의 경우는 각박한 처지의 인생들에게나 적용될 일이다. 부동산 재벌의 딸과 대성자동차 브라질 법인의 파트너 아들간에 일어날 일은 아니다.
*
그날 밤,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마친 둘은 지하의 클럽으로 내려갔다. 이곳은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이다. 임아나가 단골손님이어서 종업원들의 대우가 극진했다.
“분위기가 좋군요.”
술과 안주를 시키고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홀은 200평쯤 되어 보였지만 좌석 사이가 넓었고 조명이 요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차려입은 남녀도 안보였다.
“한번 추실까요?”
마침 은근한 블루스 음악이 흘러나왔으므로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플로어 위에는 서너 쌍의 남녀가 있을 뿐이다. 임아나가 웃음 띤 얼굴로 조철봉이 내민 손을 잡았다. 이로써 임아나의 손을 처음 잡게 되었다. 만난 지 사흘만이다.
조철봉은 임아나의 허리를 조금 더 당겨 안았다. 그러자 몸이 부딛치는 부분이 더 많아졌으며 특히 임아나의 허벅지 안쪽으로 다리가 더 깊게 들어가게 되었다.
임아나는 키가 큰 편이어서 조철봉의 입술이 귀에 딱 닿았다. 머리만 조금 숙이면 키스하기에 아주 적당한 위치였다.
둘의 가슴은 벌써부터 붙어 있었고 임아나에게서 달고 쏘는 듯한 향내가 맡아졌다. 다시 몸을 틀어 임아나의 허벅지 안쪽에 다리를 넣었던 조철봉은 자신의 딱딱해진 심벌을 거침없이 댔다. 물론 금방 스치고 지났지만 임아나의 하체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잘 추시네요.”
마침내 임아나가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조금 말라있었다. 조철봉은 대답 대신 임아나에게서 몸을 조금 떼었다가 스텝을 옮기면서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순간 굳은 심벌이 임아나의 중심에 닿았다가 허벅지를 스치고 빠져나갔다. 그때 임아나가 가늘게 숨을 뱉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그만.”
음악이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몸을 떼며 말했다. 임아나는 꿈에서 깬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플로어에서 테이블로 돌아온 조철봉이 꼬냑잔을 들었다.
“패턴대로 추는 춤은 집단체조이지 춤이라고 볼수가 없지요.”
한모금 꼬냑을 삼킨 조철봉이 싱긋 웃었다.
“스텝이 엉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음악에 맞춰 자신도 모르게 흐느적거려야 제대로 춤이 나옵니다.”
“그건 고수의 경지에 닿아야 돼요.”
임아나가 따라 웃었다.
“철봉 씨는 그 경지까지 간 것 같아요.”
이제 호칭이 철봉 씨가 되었다.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은 앞에 앉은 임아나를 보았다. 춤은 댄스교습소에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일 년 반이나 다니면서 닦은 실력이니 아는 체를 할만도 했다.
하지만 여자가 달아 올랐을 때 몸을 떼어야 한다는 것은 실전으로 익혔다. 댄스는 섹스의 전희와도 같다. 조철봉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보통 여자들은 이렇게 세 번만 추고나면 몸이 달아올라서 안달을 한다.
겨우 한번 추었을 뿐이지만 임아나의 눈도 반짝이고 있었다. 플로어에는 빠른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미친 원숭이가 다친 것 같았다. 약을 먹었군. 조철봉이 쉴 새 없이 뛰어오르며 머리를 흔드는 노랑머리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앞의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임아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춰요.”
임아나는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탄력이 있는데다 리듬도 잘 탔다. 자연스런 몸놀림이 육감적이었고 번쩍이는 조명에 드러난 얼굴은 활기에 차 있었다.
음악과 분위기에 익숙한 것이다. 임아나의 앞에서 몸을 흔들던 조철봉은 솟구치는 성욕을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임아나가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클럽을 나왔을 때는 12시 반이었다.
호텔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조철봉은 임아나를 마주보며 섰다.
“섹스를 하고 싶은데, 아나 씨하고.”
조철봉이 눈만 깜박이는 임아나에게 바짝 다가가 정색했다.
“난 달아올랐어. 급해.”
그러자 임아나가 눈을 좁혀 뜨더니 곧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외박은 안 돼요. 한 시간만.”
“두 시간으로 하지.”
한숨 돌린 조철봉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떠올랐다. 물론 시간을 늘리자는 것은 오래 끌 수 있다고 호기를 부린 것인데 어떻게 이해를 하건 해가 되지는 않는다. 조철봉은 서둘러 프런트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