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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계종 포교원의 '신도단체 재등록' 논란과 관련해 태고종 전 부원장 법현스님(열린선원 원장)이 우려의 글을 보내왔다. 포교원은 '신도단체 재등록'을 실시하며 직장직능 및 연합단체들의 단체명을 '대한불교조계종 000'으로 바꾸도록 하고, 회장 임명권을 당연직 총재인 포교원장이 갖도록 해 논란을 빚고 있다. 법현스님은 이번 일을 계기로 '불교=조계종'이라는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몇 차례 걸쳐 연재를 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
정말 답답한 일이다. 불교계에 불교는 없고 ‘대한불교조계종’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가 많다.(이하 조계종은 대한불교조계종을 말한다.)
100여개가 넘는 많은 종단이 있고 불교계 대표기구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한 종단만도 27개임에도 한국불교는 조계종만 있는 것인 양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불교 언론을 보아도 기사의 80%이상이 조계종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방송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행단체나 시민단체도 그렇다. 태고종의 한국불교청년회나 나누우리, 진각종의 사회복지재단과 문화복지연대, 천태종의 복지재단과 새터민ㆍ다문화 사업기구 등을 제외하면 거의 다 조계종 성향을 지닌 단체이다. 딱히 조계종 소속이 아니라도 신행활동을 조계종 사찰이나 단체에서 했고 연대나 지원활동도 조계종과 관련해 진행되니 다른 종단은 안중에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이다. 어쩌다 다른 종단을 조명해 줄 때는, 조계종 자체 내에서 해결이 안 되었을 경우나 마지못해 연대가 필요할 때가 대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조계종, 불교 아우르는 시각 부족하다
이렇게 된 큰 이유는 조계종이 1954~62년 이후 여러 조건들을 바탕으로 거대종단으로 자라났음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태고종을 비롯한 이웃종단들이 균형추 역할을 해 주어야 함에도 현실적으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에 근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문제와 원인과 해답과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조계종의 분규가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불교가 큰 일 났다”고. 왜 조계종에서 일어난 싸움인데 불교가 큰 일 났다고 하는가? 조계종과 정부가 마찰을 빚을 때도 언론 등은 “정부가 불교와 마찰을 빚고 있다”고 표현한다. 비록 조계종이 불교의 주류종단이기는 하지만, 조계종이 불교의 전부가 아닌데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어리석음(痴)의 죄일까? 속임(欺)이나 아부(綺)의 죄일까?
이번에 문제가 되고 있는 신행단체의 조계종 등록도 문제지만 또 하나의 초미의 관심사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도 그렇다.
불교인선언은 조계종화쟁위원회에서 초안을 마련해 교계 및 일반 언론을 통해 발표하여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내용과 과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법응ㆍ마성ㆍ원두스님이 했다. 주 내용은 창조(創造)와 주재(主宰)를 긍정하는 신(神.The God.Jehovah)을 인정하고 따르는 종교와 그것을 부정하는 종교인 불교가 어떻게 같은 진리관을 가졌느냐는 것이고, 따라서 삿된 견해를 가진 이들에게 바른 견해를 일러 주어야 함에도 어찌 그것을 포기하느냐는 것이었다.
‘불교인선언’ 발표 주최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그런데 최근 성안을 발표할 시점이 오자 조계종에서 묘한 방편을 썼다. 발표의 주관은 조계종화쟁위원회로 하고 주최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로 한다는 것이다. 정말 ‘급하면 불교이고 어려운 것도 불교이며 평화롭고 쉬운 열매는 조계종’이라는 말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지게 되었는지 조계종과 종단협의회는 밝혀야 한다. 과정과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주장이 옳더라도 문제이다. 하물며 주장도 문제가 있는데 과정과 절차에도 하자가 있다면 더더욱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종단협의회는 상임이사회의 결의와 총회의 결의를 거쳐야 하지만 그것은 행정적인 절차이고 각 종단에서 동일한 절차와 방법으로 의견발의와 수렴의 절차를 거쳐서 종단협의회에서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모으는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야 바람직하고 유효한 결의이다. 그런데 그런 과정과 결의를 거쳤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없는데 갑자기 주최가 종단협의회로 결정됐다니 이렇게 신속한 결정력을 가진 불교계의 구조가 놀라울 따름이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정과 절차가 평화롭고 밝지 않으면 그 효과 또한 평화롭고 밝은 것이 될 수 없다. 이해가 되는 주요구성원들이 모여서 과정과 절차를 평화롭고 정의롭게 진행해서 내용을 잘 마련하되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으며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추구하고 문장력과 호소력도 좋은 선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발표주체를 화쟁위로 할 것인지, 조계종으로 할 것인지,종단협의회로 할 것인지를 제대로 된 절차 속에서 결정하고 발표해야 한다. 이웃 종교와 사회에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쳐서 확산을 유도해야 한다.
계율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떤 학자가 쓴 글과 한 말 가운데 “비구승단이 아닌 경우는 승가라고 할 수 없다”는 표현이 있었다. “계율의 입장에서 살펴볼 때 조계종 이외의 소속 종단 분들은 스님이라고 볼 수 없다”고도 하였다.
과연 그런가? 붓다의 생활(戒)과 가르침(法)과 수행법(定)이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달라졌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정말 붓다의 사상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율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 한 번이라도 바라이죄에 해당하는 계율을 어긴 조계종 승려는 승려라고 할 수 없다”고 표현해야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비판하는 그 종단에서 자체적으로 정하고 지키는 계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계율 강조하면서 범계자엔 침묵
이번에 조계종 스님 중 유명한 어떤 이는 ‘어느 곳에 누구랑 간 것은 맞지만 계율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고 언론과 인터뷰했다. 얼마나 엄청난 표현인가? 그런데 왜 아무도 말이 없나? 그를 따르는 이들도 말이 없고, 그를 반대하는 이들도 말이 없다. 학자도, 시민단체도 말이 없고 언론도 말이 없다. 무슨 이유인가? 무슨 관계가 있어서 그런가? 정상적으로는 말이 없고 문제가 생긴 자만이 다툼에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혹자는 붓다의 계율과 다른 것을 따르면 그것을 따르는 종교를 새로 세우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붓다 시대부터 계율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된 이견이 있었으며 지금도 지키기 어려운 계율을 수수(授受)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율장을 재가자가 보면 안 된다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다. 보아서는 안 되는 이들이 보고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도 문제다. 정확한 용도로 이해를 구해서 보고 그 용도로만 사용해야 적절한 것이다. ‘견해가 달라서’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토대에 따른 이해가 달라서 생긴 것이 교파이고 종단’이라는 것을 애써 왜면하고 하는 표현이다.
율장의 정신을 제대로 따르자면 소소계(小小戒)는 버려도 좋다고 부처님께서 말했다는 아난의 말처럼 다른 조목은 바뀌어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무래도 포살(uposatha.布薩)과 자자(pravarana.自恣)일 것이다. 현재 조계종은 종단적으로 포살을 하고 있지만 내가 소속한 종단은 자자는 물론 포살도 하지 않고 있어서 스스로 반성할 여지가 많음을 부끄럽게 고백하고자 한다.
한편 “율장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포살과 자자를 하지 않는 종단은 전통종단이라고 할 수 없다”는 지적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인다. 물론, 종단 따라 수지하는 계율이 다를지라도 그 나름의 포살과 자자를 해야 온전하다는 말이다.
법현(저자거리 열린선원 원장, 태고종 전 부원장, KCRP종교간 대화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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