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들
지코X유권
박경X유권
01.
"넌 생긴건 안 그렇게 생겨먹어가지고 애가 좀 쑥맥이야."
"쑥맥이 아니고 보수파인 거거덩."
"그놈의 보수타령은. 쨌든 오늘 클럽 갈 거야, 안 갈 거야?"
"가면 뭐하냐? 술마시고 노는 거 말고 뭐가 더 있어."
"몰라 새끼야. 싫음 말고."
"한 번 가보지 뭐."
"애늙은이 같은 새끼."
나이 열아홉, 이름 우지호. 적당히 놀고 적당히 공부도 하고. 사실 할 건 다 하면서 딱히 적극적이진 않은 인생의 방관자 '대한민국 고3' 되시겠다. 같이 놀던 무리들이 언제부터 클럽에 물이 들었는지 들락날락거리는 통에 우연찮게 우지호도 클럽을 찾았다. 입 버릇처럼 '나는 보수파'를 달고 다니지만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미국 유학 5년, 한창 정체성과 사고방식이 확립될 나이에 급작스런 미국행으로 접하게 된 그곳의 방대한 문화는 우지호에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앞서 말한 것처럼 할 건 다 해봤다. 작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우지호는 인생에 회의를 느꼈다. 대한민국 고딩들은 순수했고 활기찼으며 생각보다 모범적이었다. 고작 술 마시는 걸로 허세를 부리고 죄책감을 토로했으며 학교에서 어떻게 하면 담배를 몰래 잘 피울 수 있나에 대해 심도있게 대화했다. 귀여웠다. 우지호는 미국에서의 과거가 짜증나졌다. 이곳이 좋다고 판단했고, 우지호는 일탈의 동행을 원하는 친구들에게 본인을 '보수파'라고 말하며 방어했다.
몇몇은 우지호가 미국에서 평범하지 않게 보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중 재효란 놈은 우지호 전학 초반에 불만스런 표정과 차가운 말투에 시비를 걸다가 명치를 한 번 맞고는 조용히 우지호의 본성을 인정하기로했다. 특별히 민첩하다거나 싸움을 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펀치맛이 굉장했다. 그래도 그 일을 계기로 반에서는 우지호와 가장 친한 놈이 되었다.
"야, 쟤네 고딩아냐?"
"어? 어~ 맞네. 쟤네도 자주 와."
방과후 찾아온 클럽 앞에 입장하려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또 다른 무리가 시끄럽게 들이닥쳤다. 그 중에 딱봐도 미성년자 같은 놈이 눈에 띠었다. 그래도 저네 무리들은 노안틱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소년이 웃어서 고딩 티를 낼 때마다 우지호는 마음이 좀 불편했다. '보수, 보수' 입에 달고다녔더니 진짜 보수꼴통이 됐나, 우지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야! 나가서 춤 추자."
"아, 난 별로. 가서 놀아라. 난 여기 있을란다."
"그럴 거면 왜 왔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뒤돌아서는 재효에게 우지호는 어깨를 들썩여보였다. 바에 기대어 북적이는 스테이지를 훑었다. 미국에서 난잡하게 놀던 파티장들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이쪽이 미성년자들이 놀기에 좀 더 안전해보였다. 이곳 저곳 둘러보던 우지호의 눈이 아까 봤던 소년이 춤을 추는 모습에서 멈추었다. 꽤 추네, 사실 우지호는 조금 넋을 놓고 그 소년의 춤을 감상하였다. 어딜보나 똑같이 저질스런 춤을 추면서 스테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반 벗은 여자들과 끈적한 눈빛의 남정네들을 보느니 그 소년을 보는 것이 나았다. 안재효가 춤을 추다 말고 다가와서 괜히 '너 진짜 안 놀거야?' 물어보곤 다시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우지호는 여전히 관심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그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소년은 그 자리에 없었다. 에이, 괜히 김빠졌다.
"야!"
옆에서 갑자기 누가 소리를 지르는 통에 우지호는 미간을 찌푸리고 짧게 영어욕을 내뱉었다. 상대는 당황한듯 미안해하며 연신 웃어댔다. 미안한 놈 꼬라지가 이게 뭐야, 우지호는 띠껍게 상대를 바라보려 했지만 눈이 풀렸다. 아까 그 소년이었다. 웃으면 고딩 티나는데, 존나 웃어대네.
"뭐야. 좆고딩."
"왜 남 춤 추는 걸 그렇게 봐?"
"그래서 불만이냐?"
"아니, 좋아서 그러지. 나, 잘 추지?"
"너 몇 살이냐? 딱 봐도 미성년자같은 게 어디서 반 말이야."
"왜? 넌 몇 살인데?"
"난 적어도 미성년자는 아니니까 너보단 많네."
소년은 한참을 우지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손을 덥썩 잡았다. '야, 단속 떳다. 내가 몰래 나가는 길 알아.' 아니나다를까 클럽 안에 단속반이 춤추는 무리를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다른 애들의 행방을 미처 둘러보기도 전에 소년의 손에 이끌려 우지호는 클럽 밖으로 나왔다. 주방을 통해서 어찌어찌 나왔는데, '와, 나왔다!'하고 또 헤실실 웃어버리는 소년의 얼굴에서 우지호는 '클럽 죽돌이'라는 글자가 둥둥 떠다니는 걸 보았다.
"너, 나땜에 살았네?"
"어짜피 죽을 일도 없었거든?"
"에이, 왜 그래. 너랑 같이 온 애들 고등학생인 거 만인이 다 아는데."
"그러니까 나는 걸려봤자 상관없..."
우지호가 말을 하는 동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소년이 무언가를 찾은 듯 다시 환하게 웃었다.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여전히 놓지 않은 손을 우악스럽게 끌고가는 소년때문에 우지호는 한 패스트푸드점 앞에 놓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소년은 패스트푸드점 유리창에 걸린 팥빙수 포스터를 가리켰다. 뭐 어쩌라고.
"생명의 은인, 팥빙수 좀 사줘라. 춤 춰서 너무 덥다~ 야, 빨리."
소년은 이미 패스트푸드점의 문을 반쯤 열고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우지호는 속으로 온갖 욕을 되뇌이면서도 소년이 내민 문을 받아 잡고 패스트푸드점 안으로 입성했다.
"뭐야, 거 봐. 고딩 맞네~ 사실 따지고 보면 난 고딩이 아니지~"
"뭐가."
뭔가 대단히 친해진 것도 아닌데 팥빙수를 먹으면서 나이니 이름이니 주고받은 우지호와 소년 김유권의 대화는 김유권의 미칠듯한 붙임성으로 겨우 이어지고 있었다. 우지호도 나름대로 짧막하게나마 대꾸를 해주고 있다는 점이 대화 진전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포인트였지만 어쨌거나 한 달 후의 이들에게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것들이었다. 하지만 우지호도 김유권도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달 뒤의 일을 떠올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지 우지호는 팥빙수만 다 먹으면 집에 가야지, 생각했고, 김유권은 팥빙수 다 먹고 뭐하지, 생각했다.
"난 학교 안 다니니까."
"뭐야, 가출 청소년이야?"
"어."
무심하게 던진 말에 김유권은 얼음을 입에 물고 웃으며 대답했다. 우지호는 저도모르게 정색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 이 새끼 뭐지. 머리를 긁적였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출 청소년이 아니라 가출당한 청소년이지."
"뭔 소리야."
"내가 너한테 더 자세하게 말할 이유는 없는 거 같은데, 그치?"
마지막 한 수저를 입에 털어넣고 우물거리며 대꾸하는데 표정이 여전히 헤헤실실이다. 우지호, 한 방 먹었다. 핸드폰이 아까부터 득득-거리며 진동하는 게 왜인가 했더니 박경이랑 약속이 있었더랬지. 우지호는 부리나케 답장을 써내려갔다.
'곰방 가마 ㅇㅇ 쏘리'
박경은 우지호가 유학시절 알고 지낸 유일한 한국인으로 우지호보다 1년 먼저 귀국했다. 꽤 잘 나가는 집안 도련님이었는데 굳이 말하자면 복잡한 집안의 문제로 가출했다. 아니, 가출 청소년은 딱히 아닌데, 김유권의 표현을 빌려 '가출당한 청소년'이라고 갖다 붙이니 제법 어울렸다. 우지호는 두툼하게 맞물린 입술을 터트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박경은 잘 사는 집에서 '가출 당했'기 때문에 비록 달동네긴 했지만 작은 자취방도 있고 저 하고싶은 거 하면서 잘 살고 있었다. 빵빵하게 부른 배를 슬슬 비비며 의자에 기대앉은 김유권이 비교적 그래보이지 않아서 인지 우지호는 동정심이 일었다.
"어디서 지내?"
"...어? 뭐라고?"
"집 있냐고."
"미쳤냐? 너, 가출 청소년 몰라?"
가출 청소년이야 잘 알지. 김유권의 마지막 문장을 듣는 순간 우지호는 이게 동정심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뭘까 이건.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뺀 우지호는 잠깐 생각하는 가 싶더니 박경과의 약속장소로 김유권을 끌고갔다. 김유권은 여전히 헤헤실실이었고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뭐라뭐라 내뱉는 우지호는 눈썹이 처져있었다. 그 앞에서 조금 화가 난 듯 큰 눈을 부라리는 건 박경이다.
"야, 이게 너네 집이냐? 아무나 니 맘대로 들이게."
"아니, 그러니까 며칠만 냅둬라."
우지호는 김유권을 박경의 집에 머물게 하고나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산도 없으면서 박경을 설득했다. 본인도 찾지 못한 '뭘까 이건'에 대한 답은 박경에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박경은 대화 도중 그 감정선에 대해 '자선사업가', '꼰대', '미친놈'등으로 표현했지만 그 중 알맞은 것은 없었다. 그래도 박경은 우지호보다 착했다. 가출당하기 이전까진 좋은 집에서 좋은 것만 보고 자라서 그런지 심성이 착했다. 조금 싸이코같은 면도 있고 자세히보면 변태끼도 있지만 심성은 착했다. 그러니까 '쟤를 너네 집에 머물게 해줘.'라는 부탁을 할 때만해도 우지호는 그것만 생각했다. 박경은 착하니까. 그 생각에 좀 착오가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역시나 한 달 뒤였다.
02.
김유권은 가볍게 '고마워~' 한 마디만을 날리고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박경의 집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박경은 어찌보면 우지호보다도 더 꼴통보수인 치라 처음에는 녀석을 그저 그런 날라리로 여겼더랬다. 완전 맛 간놈은 아닌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늦은 밤 들락날락하는 김유권에 대한 불평은 모조리 우지호에게 쏟아냈다.
"싯팔, 내가 작업 좀 하려고만 하면 그 쥐콩만한게 문지방을 왔다갔다 거려서 집중을 할 수가 있어야지."
"응."
우지호는 뭐라고 대꾸해줄 말이 없었다. 신기한 건 둘 중 어느 누구도 '박경네서 이제 김유권을 내쫓아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경은 불평만 할뿐이었고, 이미 우지호가 말한 며칠은 지난지 오래였다.
"걔 맨날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는 거냐?"
"클럽가는 거겠지, 뭐. 네가 물어 봐. 왜 나한테 물어 봐. 같이 지내는 건 너면서."
"그게 니가 할 말이냐? 식솔을 하나 붙였으면, 양심상 쌀이라도 좀 갖다줘야 되는 거 아니냐?"
우지호는 그 말을 들은 날 저녁, 뭐에 홀린 것처럼 집에서 정말 쌀을 퍼왔다. 박경은 저가 말해놓고도 좀 어이없다는 듯이 비닐봉지를 받으며 마치 거지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
"야! 우지호오오오! 안녕!"
김유권은 방 안에서 만화책을 읽다 말고 일주일만에 찾아온 우지호를 화색을 하고 반겼다. 불알친구를 30년 만에 만난 것처럼 달려나와 우지호를 껴안았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상황파악이 좀 안 되는 것 같았다. 박경은 문지방에서 어정쩡하게 껴안고 있는 우지호와 김유권을 그대로 방으로 밀어넣었다. '문지방에서 이러지 말라고, 복 나가.' 박경은 가끔 늙은이 같은 소리를 했다.
별 이유도 없이 삼총사같은 게 되어버렸다. 워낙에 우지호는 학교 녀석들보다 박경과 어울리며 예술가들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방과후엔 온종일을 붙어있어왔고, 다만 지난 일주일 동안은 박경네 맡긴 김유권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몰라서 박경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무시했던 것 뿐이었다. 박경이 학교도 안 다니고 요즘엔 일도 없어서 집 안에만 있을텐데도 일주일동안 나름 김유권과 함께있는 집에 적응한 것같아서 우지호는 이 상황을 슬쩍 넘어갔다.
"너네랑 놀면 재미있어!"
김유권은 종종 갑자기 저렇게 소리질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우지호도 박경도 딱히 김유권을 웃겨주진 않았다. 그냥 김유권이 별 것도 아닌 것에 혼자 웃고 재밌어했다. 나중엔 대화중에 김유권이 웃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가 되었다. 박경은 제가 뭐라고 말만하면 웃어주는 사람이 생기자 왕자병 비슷한 게 생겼고, 우지호는 김유권의 웃는 낯을 보면서 잊고있던 고민이 고개를 들었다.
'뭘까 이건', 여전히 답은 알 수 없었다. 박경네 방구석에서 김유권과 만화책을 볼 때 구석에 처박혀서 종이 나부랭이에 작곡을 하던 박경이 큰 눈을 굴려 종이 너머로 슬쩍 김유권을 보면, 우지호는 그게 그렇게 짜증이 났다. 박경이 작곡한 곡을 조악하게 녹음한 걸 틀어놓고 저가 랩을 하는데 때마침 김유권이 들어와서 '우와, 우와!' 감탄사 연발하며 좋아하면 박경이 으쓱대는 게 짜증났다. 왜 짜증날까, 질문이 늘었다.
난 데없이 밤중에 박경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지호는 썩 내키지 않지만 월담하여 집을 나왔다. 술을 마셨는지 박경은 횡설수설했다. 대문이 열려 있었기때문에 들어왔다. 낮아서 고개를 숙여야만하는 부엌을 지나는데 방의 미닫이가 조금 열려 있었기때문에 봤다. 마주보고 가만히 앉아있던 박경과 김유권이 키스했다. 우지호는 그 날 새벽 집에 돌아왔을 때 술에 취한 멍청한 기운으로 '그 순간 마음에 피아노따위의 것이 있었다면 매우 낮은 음의 하모니를 냈을 것'이라고 찌질하게 싸이월드 비공개 일기를 썼다. 우지호는 일단 박경의 집을 나왔지만 무시하고 집에 가고자 하는 맘은 추호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고르며 오르막이 심한 박경네 동네를 두어바퀴 돌았다. 박경에게서 문자가 왔다.
'왜안오냐.라면사와'
아까 지나친 슈퍼로 다시 내려갔는데 아저씨가 문을 닫으려기에 우지호는 간절하게 문을 두들겨 라면을 구했다. 충분히 편의점까지 내려갔다 올 수는 있었지만 멀리까지 가서 라면을 사서라도 박경네에 꼭 가야겠다는 마음은 가까운 슈퍼에서 뚝딱 라면을 사서 가볍게 박경네로 향하는 것보다 덜 쿨해보이고 더 비참해보였다. 사실 이미 우지호는 조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야, 라면."
봉지를 거의 박경의 얼굴에 던지다시피 해놓고 우지호는 구석에 이불까지 덮고 잠에 든 김유권에게로 슬쩍 눈길을 주었다. 얼굴에 라면 봉지를 맞은 박경은 술김에 투덜거리면서도 뒤뚱거리며 일어나 라면을 끓이러 나갔다. 박경은 곧 죽어도 제 라면은 저가 끓여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김유권이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걷어찼다. 우지호는 평소의 저답지 않게 김유권의 이불을 도로 덮어주었다.
며칠 후, 세숫가에서 세수중이던 박경은 옆에서 바보같이 웃고있는 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에 놀라 뒤로 자빠질 뻔하였다. 뭐라뭐라 크게 소리치는 박경을 보면서도 김유권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깜짝 놀랐잖아!! 뭐야?"
"그냥. 너 구경."
김유권은 목에 걸고 있던 살구색 수건으로 박경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박경은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 얼굴의 물기가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김유권이 더 이상 닦는 걸 멈추었다.
"다 했냐?"
"어."
"뭐야. 물기 그대로 다 남아있잖아."
"그게 더 멋있어, 너."
박경은 멋있다는 말에 굳게 닫힌 입술을 흔들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내가 좀 멋있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유권이 '어!' 하며 당장 대답을 집어뱉었다. 대야에 받아놓은 물에 제 얼굴을 비춰보던 박경이 고개를 돌려 김유권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지난 번 술자리 같아졌다. 적어도 둘 중 한 명은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 키스했다. 하지만 스스로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며칠이 지나자 이 바보같은 것들은 저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지 못했다. 그 이후로 비슷한 일들이 드문드문 반복되었다. 한 번은 라면을 먹다가 그랬고, 한 번은 컴퓨터로 노래를 듣다가 그랬고, 또, 또, 또, '드문드문'은 '종종'이 되었고 이내 '자주'가 되었다.
"너네 사귀냐?"
간밤에 놀이터에서도 둘이 분명히 키스하는 걸 보았기 때문에 우지호는 심기가 무척 거슬렸다. 셋이 자주 만나는 패스트푸드점 2층에서 햄버거따위를 먹다가 우지호가 울컥하여 내뱉은 말에 김유권, 박경, 당사자들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오렌지 주스를 들이키던 김유권은 사레가 걸렸는지 켁켁거렸다.
박경네로 올라가는 길에 김유권은 여느때처럼 또 앞서가기 시작했다. 우지호가 가늘어진 눈을 하고 김유권의 앞서가는 등을 슬쩍 살피고는 곁에 있는 박경에게 물었다.
"너네 사귀지?"
"진짜 아니거든."
"그래? 넌 몰라도 김유권 저건 진짠 거 같던데, 너 애같고 놀지 말고 작작해라."
박경은 원래 좀 그랬다. 미국에서도 분명히 범생인데, 남자여자 안 가리고 소문이 많았다. 우지호도 지금으로부터 한참 나중에야 알게된 거지만 그건 박경이 변태라거나 바람둥이라서가 아니라 바보이고 멍청해서였다. 조금만 마음을 줘도 계산없이 덥썩 물어버리는 건 여전했다. 김유권이 그렇게 하루종일 옆에 붙어서 웃어주는데 어련할까. 허나 지금은 박경이 어떤 놈이 건 간에 우지호에겐 '나쁜 놈' 한 가지로만 보였다.
"쟤가 날 좋아한다고? 김유권이?"
어이없다는 투다. 박경도 제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비슷한 일을 자주 벌였기때문에 알고 있다. 김유권이 저를 좋아하든 말든 그건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그냥 자기 멋있다고 웃어주니까, 또 어째 분위기가 그렇게 되서 키스 몇 번했다. 근데 남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거기서부턴 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저것이가 날 좋아한다고?' 박경은 터벅터벅 걸어가서 김유권을 따라잡았다. 설마 직접 물어볼까 싶던 우지호는 뒤에서 박경의 행동을 보고 넋이 나갔다. 저 병신.
"야, 김유권 너 나 좋아하냐?"
"안 좋아할 것도 없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김유권이 대답도 아니고 질문도 아닌 것을 내놓았다. 박경은 고개를 돌려 멀리에 멍하게 서있는 우지호를 바라보다가 다시 김유권에게 물었다. 김유권도 등을 돌려 우지호를 잠깐 쳐다보았다.
"쟤가 너보고 나 좋아하는 것 같다던데?"
"치, 뭐가 또. 박경, 너는 나 좋아하잖아. 아니야?"
"아유, 쥐콩만한 게."
박경은 주먹을 쥐고 김유권의 머리위로 헛손질을 했다. 김유권은 얼굴을 밉살스럽게 찌푸리고는 몸을 홱 돌리고 다시 앞서나갔다.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는 곳에 서있던 우지호는 궁금하지 않은 체하고 천천히 걸어와 큰 눈을 굴리며 생각중이던 박경의 곁에 섰다.
"아니래는데?"
"좋아하는 놈이 그럼 순순히 좋다고 대답하겠냐? 당연히 아니라고 하지."
결국 두 사람의 대화에서 좋아하냐고 묻는 질문에 아무도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지만 박경은 오히려 그게 더 의심스러웠다. 김유권과 저는 왜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는지, 혹시 저가 김유권을 좋아하는 게 아닐런지. 생각에 잠겨 발길을 옮기던 박경은 집으로 오르는 마지막 돌계단에서 넘어졌다. 상처 난 박경의 무릎에 그 날 우지호는 혀를 끌끌 차며 마데카솔과 밴드를 붙여줬고, 우지호가 가고나서 김유권은 그곳에 뽀뽀를 해주었다. 몇 년지기 친구인 우지호의 마데카솔보다 김유권의 뽀뽀가 좋은 건 사실이고, 박경은 처음으로 김유권이 저한테 왜 저럴까하는 생각을 했다.
03.
또 어느 날인가 셋은 박경네서 술을 마시고 뻗었다. 아침인지 해가 들어오는 방 안에 우지호는 벽을 보고 누워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눈을 뜨고 몸을 방쪽으로 돌리자 박경, 김유권 이것들이 아침부터 붙어서 쪽쪽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우지호는 몸을 움직이던 모양새 그대로 멈춰서 그 둘을 바라보았다. 어째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뭐하냐, 너네-"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우스꽝스러웠지만 우지호의 눈은 날카로웠다. 박경과 김유권이 화들짝 놀라서 떨어졌다. 박경이 어쭙잖게 '어, 야...'하며 말을 더듬었다. 우지호가 주섬주섬 일어나서 미닫이 문을 붙잡고 신발을 신었다. 목이 긴 스니커즈는 그날따라 쉽게 신어지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발을 쑤셔넣는 우지호의 뒤로 박경과 김유권이 멍청하게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잘도 안 사귄다, 야."
"야, 우리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왜? 차라리 고추로 고추장을 담근다고 거짓말을 하지 그러냐. 그건, 내가 믿어줄테니까."
여느 표현을 빌리지 않고 좀 어렵게 말했지만 어쨌거나 '닥치고 너네 사귀잖아'란 뜻이었다. 우지호는 겨우겨우 신발을 우겨넣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박경이 눈이 왕방울만해져서 뒤를 돌아보자 김유권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해?"
"몰라, 병신아. 거기서까지 아니라고 그러면 어떡하냐? 쟤가 바보냐?"
"근데 아니잖아."
김유권은 처음으로 '박경은 바보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귀자.'해서 사귀는 사이가 되는 거라면 김유권은 졸지에 연애 한 번도 못해본 놈이 되었다. 늘 이런식이었는데 박경은 그게 아닌가보다. 김유권은 박경의 뒷통수를 딱 소리나게 때렸다. 얄밉네.
한 번은 김유권이 우지호네 학교 앞으로 찾아왔다. 우지호는 보통 때처럼 친구들과 별로 재미없는 뒷담이나 하며 하교하다가 멀뚱히 저를 쳐다보고 교문 앞에 서있는 노란 머리통에 기겁을 했다. 머리는 또 언제 저렇게 물들였대. 친구들에게 급하게 인사하고 김유권을 낚아채듯 데리고 최대한 학교 멀리로 뛰었다. 숨이 찬 김유권이 혀를 내빼고 저질스럽게 헉헉거렸다. 우지호는 그것도 맘에 안 들었다. 저 혀로 박경이랑 키스했잖아.
"뭐야, 너. 왜 왔어?"
"경이한테 연락 못 받았어?"
"뭔 연락?"
"몰라, 너한테 가라고 그래서 왔는데."
말을 마치고 김유권은 또 헤실실 웃었다. 하여간 저 불리하면 웃지, 우지호는 입술을 비죽이고 핸드폰을 뒤졌다. 박경에게 문자가 와있다. '오늘 김유권을부탁해, 간마네곡작업하로옴걔심심할꺄바' 박경은 바보가 틀림없다. 분명히 그 날 그렇게 저 둘이 키스하는 걸 본 날로부터 우지호는 연락도 한 번 안 하고 철저히 무시하고 지냈건만 박경은 둔하디 둔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한 건 우지호로서는 박경도 김유권도 마찬가지였지만, 굳이 따지자면 김유권쪽이 더 했다. 사실 김유권은 저가 왜 그렇게 씩씩거리며 그 방을 나갔는지 아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야, 너네 진짜 안 사귀냐?"
"어."
"그럼 서로 좋아해?"
"몰라."
"뭐야. 그럼 왜 그러는데, 너네."
또 자주가는 그 패스트푸드점 창가에 앉아서 후렌치 후라이 하나 시켜놓고 우지호와 김유권은 토론을 벌였다. 아니, 좀 일방적이니까 청문회라고 하는 게 좋겠다. 김유권이 할 말이 끊기면 창 밖을 응시하다가 뭔가를 말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우지호는 그 모습에 조금 애가 탔다. 그러다 김유권이 한 마디하면 우지호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말을 붙잡고 늘어졌다. 도라도 통달한 듯 무덤덤하게 말을 내뱉던 김유권도 자꾸 우지호가 보채니까 급기야 성질이 났다.
"사귀지도 않는대, 좋은지도 모르겠대, 그럼 왜 그러냐고."
"아, 몰라! 모른다고."
"뭐가 그래!!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이유가!!"
"그래!! 그러니까. 아니, 나도 너 좋아했었어."
"왜 과거형이야. 언제까지였는데!"
"잘 몰라서 헷갈린지는 2주 좀 안 됐고, 박경이랑 왜 그러는지는 진짜 나도 모르겠어. 됐냐?"
우지호는 저도모르게 입술을 들어올려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김유권은 다시 무덤덤해졌다. 우지호 앞에 놓인 콜라가 단숨에 빨대를 통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김유권, 순진하다고 생각했는데 착오가 있었다. 우지호는 제 감정이 어떻다 고백할 틈도 없이 파악당했다. 기분이 구렸다. 알면서, 저도 나 좋아했다면서 박경이랑은 진짜 왜 그랬대, 시발.
"그냥 박경이 좋은진 모르겠는데 가끔 너무 좋아."
"아니, 뭐래? 뭐가 그렇게 좋은데?"
"세수를 하고 물기가 덜 말랐을 때라던지, 라면을 끓이는 데 심취했을 때라던지. 문득 눈이 마주치게 될 때라던지, 자기가 만든 노래를 들려줄 때라던지, 그것도 처음으로! 또...."
"그만! 뭐가 그렇게 많어!"
"뭐, 그냥 그럴 때 문득 좋은 기분이 들어."
허공을 바라보며 좋은 점을 나열하는 김유권을 바라보는 우지호의 눈에서 레이저가 튀어나올듯 했다. 우지호는 김유권이 박경네집이 아니고 제 집에 거주했으면 저랑 그랬겠지, 착각했다. 가방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mp3를 꺼내어 이어폰 한 쪽을 김유권에게 내밀었다. 김유권이 뭐냐는 듯 어리둥절했다.
"이거 들어볼래?"
"..어?"
"들어 봐, 이거 내가 랩 한 거. 너한테 처음으로 들려주는 거야."
김유권 빵터졌다. 우지호, 속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여서.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김유권의 정수리 색이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랑 비슷했다. 엄청 밝은 색으로 했네. 쩝, 우지호가 괜스레 입맛을 다셨다. 김유권이 겨우 고개를 들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음악을 듣는 김유권의 표정이 어쩐지 난감하다 싶더니 기어코 실망스러운 말을 내뱉는다.
"아, 이거. 어제 경이가 들려준 건데. 저가 작곡한 거라고."
아, 개새끼. 제대로 녹음 뜨기 전까지 아무도 들려주지 말자고 해놓고서. 우지호는 배신감에 휩싸여 김유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주친 두 눈은 기묘한 감정을 만들어내기 보단 눈싸움에 가까웠다. 우지호의 눈썹은 점점 쳐지고 김유권은 짧게 한 숨을 내쉬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확 느낀 건데, 나는 박경을 좋아하나보다."
"나는?"
"몰라."
"Flirt."
"뭐?"
김유권은 방금 우지호가 지껄인 영어단어가 뭔지 엄청 신경이 쓰이는지 대충 들리는 대로 비슷하게 발음해보지만 우지호가 듣기엔 다 틀렸다.
"그냥, 아니라고 딱 잘라서 말하면 되잖아."
"아니야. 너 안 좋아해. 됐냐?"
그렇게 말을 듣고나니 우지호는 기분이 더 거북했다. 김유권은 그걸 아는 눈치였다. '거 봐.'하는 표정으로 우지호를 보는데 우지호는 마치 6년전 미국에서 받은 문화쇼크만큼이나 커다란 인생의 쇼크를 받았다. '이거 정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우주에 혼자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5년동안 펑펑 놀면서 연애는 왜 안 했을까 우지호는 후회했다. 그냥 쭉빵한 것들이랑 어울리며 말장난이나 주고받고 키스도 해봤지만 다 쭉정이같은 짓거리였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좋아서 미치겠는데 저 치도 날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 지를 모르다니. 우지호는 근 10년 중에 가장 절망적인 상태였다.
-처음 올려요, 우악, 부끄럽네요!
소설의 완결은 못 지었습니다만, 이 아이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지호유권 / 박경유권 지지자 님들 안 계신가요? :D
첫댓글 잉잉 한참 재밌었는데ㅠㅠ 읽는내내 유권미소가 머릿속에서 둥둥떠다녔어요^▽^
왜 여기서 끝이예여 ㅠㅠ 으엉 저도 계속 유권의 그 웃는모습이 계속 생각났어요 ㅋㅋ 되게 잘쓰셨는데 미완이라니 너무 아쉬워요, 시간나면 다음편도 올려줘요^ㅇ^ 직권, 경권 아 너무 좋죠!
잘 읽고가요^^
직권 경권 다 조으다~ ^^ 유권오빠 웃는 모습 계속 상상이가네요ㅎㅎㅎㅎㅎ
ㅋㅋㅋㅋ 지호가 유권에게 영어로 ㅋㅋㅋ
아여기서 끝내면 아니아니 아니되오 ㅋㅋㅋ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2.09 16:24
잘 읽고 갑니다
역시 미소유권 다 조으닼ㅋㅋㅋㅋ
으아 ㅜㅜ 더 길었으면 좋게써요.. 지권/경권 지지자 여기 있슴다 ㅋㅋㅋ
크핳ㅎ... 왤케 심장을 저격하십니까ㅠㅠㅠㅠ 감사합니다
헉 귀엽습니다 잘보고갑니다
븍긍 ㅋㅋㅋㅋ 조으당
우리의 해피유궈니..조아옄ㅋㅋㄱㅋ
조아용ㅋㅋㅋㅋ
권이 한테 꽉 잡혀사는 두 남자들 너무 좋아요ㅠㅠㅠㅠ 처음에는 권이가 지호한테 말을 걸었다면 후반에는 지호가 말을 못 이어나가서 안달인게 너무 좋아요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