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4군 6진이 설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② 정봉수와 이립이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③ 외적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 천도가 단행되었다.
④ 군신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강화가 이루어졌다.
정답: ④
* 병자호란(1636)
인조반정(1623)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 관계를 맺자며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12).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본래 강화도로 대피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다. 주화파(최명길)와 주전파(김상헌) 간의 농성 끝에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三顧九饋: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이마를 조아리는 절).
① 조선 세종 때에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서 4군(1443, 최윤덕)과 동북 6진(1449, 김종서)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③ 고려 고종 대에 최우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 천도를 단행하였다(1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