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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열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출생 - 사망
1892. 6. 18. ~ 1944. 3. 13.
목차
일본유학과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 활동
일본 동경에서 2 · 8독립선언에 참여
2 · 8독립선언 열기를 국내 전파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활동
임시정부에 군자금 전달
황해도 대의원으로 임정에서 활약
미국 유학 중 근화회 조직
김마리아는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 사이의 세자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마리아는 개신교의 세례명인데 독실한 개신교신자였던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입니다.
김마리아의 집안은 서울의 명문양반가였으나 고조부 때 낙향하여 대지주가 되어 만석꾼 김참판댁으로 불려졌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한 뒤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종사하던 개화인사였습니다.
집안 내 개화문명에 남다른 관심과 적극적인 수용 덕분에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다수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셋째삼촌 김필순(金弼淳)은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은 신민회원으로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되어 만주 통화와 치치하얼에서 한인촌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셋째 고모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으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둘째 고모부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 외에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김필례도 넷째 고모였습니다.
이렇게 김마리아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개화 지식인이자 애국지사였던 부친과 삼촌, 그리고 고모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어 갔습니다.
1899년 김마리아는 부친이 세운 소래학교에 입학해 고모 · 언니들과 같이 다니면서 기독교의 박애주의와 평등사상에 입각한 신학문을 익혔고, 1903년 졸업하고 어머니를 도와 가사를 돌보았습니다. 1905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906년 서울로 이주하였고 상경한 김마리아는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였습니다.
1906년 6월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비로소 기독교사상에 입문하게 되었고 신앙심이 깊어져 1908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즈음 김마리아는 을사조약 이후 점증되던 국망의 위기의식 속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고, 또 삼촌의 집에 드나들던 안창호 · 김규식 ·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의 초조한 발걸음을 보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 갔습니다.
그리하여 김마리아는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6월 큰언니 김함라(金函羅)가 교사로 있던 전남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일본유학과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 활동
1910년 8월 조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마리아는 교육 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의 꿈을 접지 않고, 한 톨의 밀알이 밀밭을 이루듯이 민족문제 해결에 여성들이 앞장설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김마리아는 알찬 후진교육을 위해 1912년 가을 1년간 히로시마 고등여학교에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1913년 은사들의 추천으로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이듬해 김마리아의 재능과 조국에 대한 열정에 감동한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지원으로 일본의 동경여자학원(東京女子學院)으로 유학가게 되었습니다. 유학의 목적은 조국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1915년 5월 동경여자학원 본과(당시 고등여학교)에 들어가 1916년 3월에 졸업하고 이어 고등과(당시 전문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19년 3월에 졸업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생활 중 1915년 4월 막내 고모인 김필례와 나혜석 등이 중심이 되어 재경 (在京)조선여자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품성 함양을 목적으로 조직한 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에 가입하였습니다. 이후 1917년 10월 임시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되어 일본 전체 여자유학생회의 대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대표로써 이 단체를 확대시켜 갔으며, 『여자계(女子界)』를 기관지로 발행하였습니다. 이 기관지를 통해 여성의식의 자각은 물론 민족의식고취에도 앞장섰습니다.
일본 동경에서 2 · 8독립선언에 참여
이즈음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1918년 1월 8일 전후 처리 지침으로써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그 해 11월 11일 종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 · 8독립선언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김마리아와 황애덕(黃愛德)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김마리아와 황애덕 등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2 · 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2 · 8독립선언 당일에는 동경 ‘간다[神田]’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석하였습니다. 나아가 김마리아는 황애덕과 같이 등단하여 일제의 한국 식민지 정책을 신랄하게 성토 규탄하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일제와 투쟁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2 · 8독립선언 대표들은 물론 김마리아를 비롯한 수십 명의 학생들도 동경 경시청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석방된 김마리아는 2월 15일 황애덕과 상의하여 동경의 조선독립운동 상황을 전달하고 국내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2 · 8독립선언 열기를 국내 전파
이같은 인식 아래 김마리아는 2 · 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2월 17일 동경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김마리아는 3월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이를 개의치 않고 귀국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기 위해 밀사로 파견한 큰고모부 서병호와 셋째 고모 김순애를 만났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책임을 맡았던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李鍾一)은 다음과 같이 그의 비망록에 기록하였습니다.
“김마리아가 천도교 본부 및 보성사를 찾아 와 동경 한국인 남녀 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술회하고, 김마리아는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할 것을 힘써 권유하였다. 나는 김마리아에게 우리들도 이미 계획 중이며, 또 지난 갑인년(1914) 이래 민중이 함께 일어나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암암리에 모색하여 왔다고 하니 김마리아는 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을 격려하며 기뻐하였다.”
임시정부에 군자금 전달
김마리아와 주요 임원들은 조직 확대 작업에 들어가 서울 · 대구를 비롯하여 부산 · 전주 · 진주 · 평양 · 원산 등 남 · 북한 15개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였고,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 방략으로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 수합 활동을 벌여 그 해 11월까지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실적을 올렸습니다.
황해도 대의원으로 임정에서 활약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자 김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마리아는 3월 8일 회의에서 임시정부 법통성의 고수와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다만 각원 개선 등 개조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국내의 일반 인민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소수인의 조직이거나 인물의 좋고 나쁨을 불문하고 다 기뻐하여 금전도 아끼지 않고 적(敵)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설혹 외지에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자라도 국내에 들어와서 금전을 모집할 때에는 다 임시정부의 이름을 파는 것을 보아도 국내 동포가 임시정부를 믿는 증거이다.
임시정부를 안 팔면 밥도 못 얻어 먹는다. 적은 가끔 임시정부의 몰락을 선전하여도 인민은 안 믿는다. 소수로 됨은 혁명시에 피할 수 없는 일이요 인물은 변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만의 유혈로 성립되어 다수 인민이 복종하고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를 만일 말살하면 소수는 만족할 지 모르나 대다수는 슬퍼하고 외인(外人)은 의혹.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조하자.”
하지만 이같은 김마리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創造派)와 현재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어 논쟁을 거듭하였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 제(諸) 세력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미국 유학 중 근화회 조직
1928년 2월 12일 황애덕 · 박인덕 등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였습니다. 김마리아는 이 회의 회장으로서 회원들과 함께, “조국 광복의 대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재미 한인사회의 일반 운동을 적극 후원”을 목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30년에는 뉴욕의 비블리컬 세미너리(Biblical Seminary)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1932년 7월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으로 말미암아 서울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원산(元山)의 마르다 윌슨신학교에 부임하여 신학을 강의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김마리아는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김마리아는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김마리아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마리아는 좋은 집안 배경으로 고생하지 않고 충분히 공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마음속의 애국심이 남달라 일본에 있을 때 나라걱정, 미국에 있을 때도 나라걱정과 국민과 동지들에게 독립심을(애국심) 심기 위해서 교육시켜 깨우치게 했습니다. 일본의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독립운동을 한 살아있는 독립정신과 애국심을 우리 후손들은 배워야 합니다.
자료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김마리아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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