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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강
내가 미국 유학 초청을 사양한 까닭
송현(시인. 한글문화원장)
1983년 어느 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민정비서실로 갔더니 김 비서관이 난데없이 복사한 종이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송현 선생님, 이 기사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것은 미국 교포 사회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의 기사를 복사한 것이었다. 2단 기사였는데 “공병우 박사가 독립신문사에 이미 공병우 타자기를 서른 대 기증하였고, 8월말에 개발되는 공병우 사진식자기를 기증하기로 약속했다”는 요지였다. 김 비서관이 말했다.
“송현 선생님,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금시초문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뇨?”
“이 신문은 반정부신문일 뿐 아니라 친북한쪽 신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를 가만히 둘 수가 없습니다.”
“.......”
“그런데 송 선생님 보시기에 공박사가 타자기 기증했다는 것이 사실일 것 같습니까?”
“공 박사님의 평소 소신이나 하시는 일로 봐서 사실이지 싶습니다. 제 나라에서는 과학적인 공병우식타자기를 탄압하는데, 그 신문사 사람들이 과학적인 공병우식을 인정하였다면, 반가운 마음으로 기증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회수해야 합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기증한 것을 어찌 회수합니까?”
“그렇다면 이미 기증한 것은 회수할 수 없다 해도 앞으로 할 기증은 막아야 합니다. 송현 선생님께서 좀 협조해 주십시오. 이 신문은 친북한계 신문입니다. 이런 신문사에 공 박사님께서 타자기를 기증하고 또 사진식자기까지 기증하기로 약속한 것은 도저히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 쪽에서 손을 쓸 수 있지만, 그랬다가 잘못하면 시끄러워지면 서로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송현 선생님께서 조용히 소리 없이 잘 마무리해 주십시오. 우리가 알아보니 공 박사님께서 송현 선생님 말씀이라면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좀 협조해 주십시오.”
“하하. 김 비서관님께서는 공 박사의 고집을 모르시군요. 박사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청와대에서도 우리를 협조해 주면 저도 협조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엉터리 현행표준자판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협조하겠습니다.”
“현행 표준자판은 문제가 많아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줄 잘 알고 있습니다. 협조하겠습니다.”
나는 하늘을 날듯이 신이 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청와대를 나왔다
그날 밤 공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이미 독립신문에 기증한 것은 할 수 없고 앞으로 기증할 것을 취소하면 좋겠다는 선에서 공 박사와 합의하였다. 다음 날 이 사실을 청와대에 알려주었다.
나는 그동안에 나의 젊음을 다 바쳐서 투쟁해 온 글자판 통일이 이제 눈앞에 다가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없이 기뻤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공 박사에게도 「살아 생전에 글자판 통일이 되는 것을 보실 수 있게 되었다」고 편지를 하였다. 공 박사도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해 8월 26일에 국무총리 지시 21호가 발표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말썽 많았던 4벌식 표준 자판을 폐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폐지한 4벌식보다도 더 엉터리인 2벌식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을 보고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동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청와대로 곧장 달려가 민정 비서실로 가서 항의하였다.
“김 비서관님, 아니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이것이야말로 개악입니다, 개악. 엉터리 4벌식을 폐지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그 대안이란 것이 더 엉터리인데 어쩌자고 이렇게 하십니까!”
나는 흥분하여 내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이 있다면 한대 칠 듯한 인상을 줄 정도였다.
“저희들도 올바로 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관계 부처에서 그렇게 한 것인데, 지 선생님 주장과는 다르지만, 좌우간 비과학적이라던 4벌식을 폐지한 것은 틀림없으니까, 지 선생님의 목적이 절반은 달성된 것이 아닙니까!”
“절반이 아닙니다! 더 엉터리로 했으니까, 이제 한글 기계화는 영영 망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지시하여 바로잡도록 할 수 없습니까?”
“저로서도 그 동안에 최선을 다하여 윗분에게 보고 드려서 일이 이렇게 결정되었는데, 제 개인적인 힘으로는 더는 이 문제를 거론하기가 좀 난처합니다.”
“저는 도저히 이 엄청난 잘못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우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한심한 작태들을 글로 써서 유인물을 만들어서 국민에게 알리고 언론에다 호소할 생각입니다.”
나는 씁쓸한 기분이 되어서 청와대를 나왔다. 관계 부처라는 데에서 이 나라의 과학 정책을 이 모양 이 꼴로 다루는 것을 보니, 나라의 장래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동안 청와대에서는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최선을 다한 것이 틀림없었기에, 나는 그 비서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서관님, 저는 비서관님을 아군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돌아가서 국무총리나 과학기술처를 공격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청와대는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청와대에서 돌아와서 몇 밤을 새워서〈선진 조국 창조에 역행하는 한글 기계화 정책〉이란 40쪽짜리 유인물을 만들었다. 나는 이 유인물을 「종이폭탄」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 무시무시한 관권과 싸우는 데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유인물을 내보냈고, 또 앞으로도 내보낼 생각이었다.
이 무렵 사정을 공병우 박사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83년 8월 어느 날 한국에서 송현 선생한테서 국제 전화가 왔다. ‘박사님! 기쁜 소식입니다. 1969년 7월 28일에 국무총리 훈령 제 81호로 공포되었던 정부표준자판은 1983년 8월 26일자 국무종리 훈령 제 21호로 폐지되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송현 선생이 한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우리나라 정부가 이제 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라 생각했다. 그 동안 꿈속에서도 기다리던 일이었다. 진리는 반드시 이긴다고 믿어온 터였지만, 이국땅에서 이 같은 기쁜 소식을 들을 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제 앞으로 과학적인 검토를 하여 바람직한 표준자판이 나올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한동안 들떠 있었다......그런데 그 뒤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비관적었다.... 송현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박사님, 큰일 났습니다! 국무종리 훈령 81호 폐지로 엉터리 네벌식 표준자판을 폐지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인데,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 대안이 뭔데요?’ ‘두벌식입니다.’ ‘그건 네벌식보다 더 엉터리지 않소!’ 네벌식을 폐지하고 두벌식으로 하다니!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정말 억장이 무너졌다.”
그날 밤 공병우 박사는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 되어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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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 선생에게
......
당신은 그 동안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누구보다 용기 있고 또 훌륭하게 싸워왔습니다. 당신이 자판 통일을 위해서 한 일들은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관계 당국에서 하는 것으로 보아 글자판 통일은 요원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이제 자판통일을 위해서 더 노력해도 자판 통일이 될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무지한 관리들과 싸움은 그만하고 앞으로 당신이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 미국에 와서 컴퓨터에 대한 공부를 하기 바랍니다. 당신을 내가 미국에 초청하겠습니다. ....
나는 이제 고목과 같은 몸입니다. 바람이 불면 언제 쓰러질지도 모르는 고목입니다. 설령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자고 나면 쓰러질지도 모르는 고목입니다.
나의 건강은 날로 쇠퇴해지고 나의 경제적인 형편도 언제까지나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도와 줄 수 있는 여건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하루 빨리 미국에 오셔서 컴퓨터를 공부하기를 부탁드립니다. ...
미국에서 공병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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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숙연하게 이 편지를 천천히 한 줄 한 줄 읽어 가는데 금세 편지지 위에 뜨거운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공박사의 사랑에 넘치는 간곡한 초청을 받아들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느냐 한국에서 남아서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느냐를 놓고 고심한 끝에 그날 밤 공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 개인만 생각하면 박사님의 호의를 받아들여 미국에 가서 컴퓨터 등을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에 가고나면 한국에서 누가 자판 통일을 위해서 싸우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미국에 가고 싶지만, 차마 갈 수가 없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공 박사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한 줄 한 줄 또박또박 읽어가는데 내 볼에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며칠 뒤에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청와대로 갔다. 김 비서관에게 공 박사의 위의 편지를 보여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 비서관님, 제 개인으로는 지금 미국으로 가서 컴퓨터 공부하고 오는 것이 백번 이익이 클 줄 압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 글자판 정책이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 우리나라에서 글자판 정책이 틀렸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나만 입 닫고 가만히 있으면 이 나라 한글 글자판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궁지에 빠지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청와대가 이제라도 이 잘못을 다시 바로 잡도록 지시한다면 나는 마음 놓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오겠습니다....,”
청와대 김비서관은 내 말을 듣고 난색을 표했다. 한번 결정한 일을 이제 다시 자기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다는 투였다. 지극히 고마운 이의 말도 그럴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청와대를 나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 비서관님, 제가 현재는 미국에 갈 생각이 없지만 만약에 제 마음이 변해서 미국에 가더라도 그때까지 이 나라의 글자판 정책이 갈팡질팡하고 있으면, 나는 아마 미국에서 컴퓨터 공부를 집어치우고 딴 일에 앞장설지 모릅니다. 그 일은 과학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비과학적인 것을 강행하는 전두환 정권이 무너져라고 싸우는 민주화 운동일 것입니다...”
김 비서관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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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 11.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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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껍데기가 다썩어가는 고목나무 가지 끝에 봄이되면 새싹이
돋아나기 까지는 눈보라 몰아치는 긴겨울밤을 소적새는 얼마나 울엇을까?
하나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용기가 필요 했을까?
선생님과 만남의 인연의 깊이는 가늠하기 힘들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