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 함안 지역에 은거한 학자.
[개설] 이오(李午)는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킬 뜻을 드러낸 후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가계] 본관은 재령(載寧). 호는 모은(茅隱). 할아버지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소봉(李小鳳)이고, 아버지은 종부령(宗簿令)을 지낸 이일선(李日善)이다. 부인은 전적을 지낸 남의(南毅)의 딸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슬하에 아들 이개지(李介智)를 두었다. 형은 지평을 지낸 이신(李申)이다.
[활동 사항] 이오는 고려 후기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에게 수학하였고, 공민왕(恭愍王) 때 성균 진사가 되었다. 고려 왕조가 망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해 함안의 모곡(茅谷)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은거하였다. 이오는 자신이 고려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은거지 주위에 담을 쌓았는데, 담 밖은 새 왕조의 땅일지라도 담 안만큼은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명시하는 ‘고려 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이후 이곳에서 고려 유민들이 우물을 파고 논밭을 만드는 등 터전을 일궈 자급자족했기에 고려동(高麗洞)·고려촌(高麗村) 또는 장내동(牆內洞)이라 불렀다. 고려동 유적지의 면적은 8,842㎡ 규모로, 1983년 8월 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이오는 태종(太宗)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후손에게도 신왕조에 나아가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모은 실기(茅隱實記)』가 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혈곡리 인곡(仁谷)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96년(정조 20)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운구 서원(雲衢書院)에 홍재(洪載), 조열(趙悅)과 함께 봉안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