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고종 16)∼1948년.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자는 보경(輔卿), 호는 동암(東菴)재령(載寧)이며, 출신지는 경상남도 진주시(晉州市) 진성면(晉城面) 동산리(東山里)이다. 조부는 이시영(李時英), 부친은 월강(月岡) 이상규(李祥奎)이며, 모친은 영일정씨(迎日鄭氏) 정선기(鄭善基)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부친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그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우리 집안의 문학은 너에게 의탁해야 되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는 때를 당하자,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향리에 은거하며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성현들의 글을 익히면서, 쇠퇴해가는 도를 바로잡는 것을 일생의 책무로 삼았다. 그리고 영남지역 석학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을 찾아가 그 동안 배우지 못한 요결을 들었다. 그의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목표로 자기를 수양하고 도(道)를 세우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어 향내(鄕內)의 모범이 되었다. 부인은 진양정씨(晉陽鄭氏)로 3남 1녀를 낳았다. 아들 2명은 진주에서 한의원을 하였고, 딸은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조용기(趙鏞奇, 1907-1943)에게 시집가서 아들 조임제(趙壬濟, 1932-2005)와 딸 조희제(1929년생, 남편 남판우, 의령)와 조정자(1938년생, 남편 김갑석, 대구)을 낳았다.
조임제 슬하에는 아들 조성래(1959년생)와 조정래(1963년생), 조상래(1966년생)와 딸 조덕래(1955년생)와 조덕희(1961년생), 조선희(1969년생)가 있다. 조성래 슬하에는 조현주(1987년생), 조현경(1990년생), 조현준(1993년생)이 있다. 조정래 슬하에는 조현지(1992년생), 조현민(1993년생)이 있다. 조상래 슬하에는 조민광이 있다. 조덕래 자 김경윤, 김경학. 조덕희 자 조봉건. 조선희 자 김재한(1995년생), 김재민(1997년생).
조용기의 1녀 조희제(趙喜濟, 1929년생)는 의령 정곡 사람 남판우와 결혼하여, 슬하에 남기호(1953년생), 남기선, 남기둘(1958년생), 남기권(1960년생), 남기진, 남기웅, 남기조 등 5남2녀가 있다.
조용기의 2녀 조정자(1938년생)는 대구 사람 김령김씨 김갑석과 결혼하여, 슬하에 1녀 김옥경(1958년생), 2녀 김혜원(순희,1962년생), 3녀 김순자(1965년생), 4녀 김아영(1970년생), 아들 김대용(1978년생) 등 1남6녀가 있다.
동암 이현욱 선생은 그의 나이 70에 세상을 하직하니 묘소는 동산리 상곡(上谷) 술원(戌原)이다.
그의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학덕을 기리기 위해 1989년 '아남재(牙南齋)'를 세웠다.
문집으로 1961년에 간행된『동암선생문집(東菴先生文集)』이 있다. 이 문집은 한국역대문집총서에 수록돼 있다.
동암 선생의 증손자 이동렬(1958년생)은 진주시 남강로 690-1(장대2동)에서 인삼당한의원을 3대째 해오고 있다.
63. 東菴記(동암기)/東菴記
<해설>
◯東菴은 1879년(고종 16)∼1948년대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이현욱(李鉉郁)을 말한다.
출신지는 경상남도 진주시(晋州市) 진성면(晉城面) 동산리(東山里)이다.
나라가 망하는 때를 당하자,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향리에 은거하며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성현들의 글을 익히면서, 쇠퇴해가는 도를 바로잡는 것을 일생의 책무로 삼았다. 그리고 영남지역의 석학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을 찾아가 그 동안 배우지 못한 요결을 들었다. 그의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목표로서 자기를 수양하고 도(道)를 세우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어 향내(鄕內)의 모범이 되었다.
(참고) 곽종석(1846-1919) :
한말에 호남의 전우(田愚)와 쌍벽을 이룬 대표적 유학자이며, 파리장서의 민족대표.
곽종석의 출신 및 생애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 아버지는 원조(源兆)이다.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은 물론 도가와 불가의 경전을 섭렵한 뒤, 주자학 공부에 전념하여 20대 초반에 이미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25세 때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 되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각지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안동의 권세연(權世淵)이나 김도화(金道和) 등이 부장으로 추대했으나 응하지 않고, 각국 공관에 열국의 각축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
1903년(광무 7)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오르고, 이어서 참찬(參贊)으로 시독관을 겸했으나 곧 사퇴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며, 조약체결에 참여한 오적(五賊)을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1910년(융희 4) 일제에 합병이 되자 거창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뒤 영남과 호서 유생들의 연서를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호소문을 작성하여 김창숙(金昌淑)을 통해 상해를 경유하여 발송케 했다(파리장서사건)(→ 파리장서사건)
학풍
곽종석은 철저한 주리론자로서 주기론을 배격했으며,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받아 심즉리설을 확립시켰다. 사단칠정론의 문제에 있어서 사단뿐만 아니라 칠정도 오행의 상생·상극에 따라 십정(愛·喜·樂·優·哀·惡·怒·忿·欲·懼)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심의 본체를 명덕의 본체로 파악하여 심의 본질은 이성이라 하였다. 또한 이성의 도덕적 능력을 명덕이라 하여 명덕주기설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주자학에 머물지 않고 예학·경학·한문학·지리·농업·산학·병법에 관한 저술도 남겼다. 그리고 서양의 국제법 책인 〈공법회통 公法會通〉·〈고대희랍철학고변 古代希臘哲學攷辨〉의 후서를 쓰기도 했다. 하겸진(河謙鎭)·이인재(李寅梓)·이병헌(李炳憲) 등에게 학풍이 이어졌다.
저서로 〈면우집〉이 있으며, 죽은 뒤 단성 이동서당, 거창 다천서당, 곡성 산앙재 `등이 그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곽종석 끝)
장석영(1851-1926)
본관은 인동(仁同). 일명 석교(碩敎). 자는 순화(舜華), 호는 추관(秋觀)·회당(晦堂).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 영남 일대에 유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반일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이승희(李承熙)·곽종석과 함께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항일운동에 나섰다. 1907년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칠곡지방의 보상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12년 해외독립기지건설 운동과 이주개척지 교포들의 생활상태를 수록하여 이시기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요좌기행 遼左紀行〉을 저술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협의하여 청원문인 '파리장서'를 초안했으며, 유림대표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또 고향 성주에서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의 유림들과 접촉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면 경산동 관제묘 뒷산에 모인 기독교도들과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5년 제2차 유림단운동이 일어나자, 영남유림대표로 활약했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작성일 : 15-08-31 07:10
1922, 1926년, 이현욱 <지리산 유람기록>
이현욱(李鉉郁 1879-1948) : 자는 보경(輔卿), 호는 동암(東菴). 본관은 재령(載寧), 거주지는 진주 진성면 동산리였다. 나라가 망하자 향리에 은거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성현의 글을 익히면서, 쇠퇴해가는 도를 바로잡는 것을 일생의 책무로 삼았다. 면우 곽종석과 회당 장석영에게도 배웠고, 문집으로 《동암집(東菴集)》을 남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그의 글 『기유(記遊)』는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가 1922년의 지리산 유람, 두 번째가 1939년 금강산 유람, 세 번째가 1926년의 지리산 유람, 네 번째가 당시 안의삼동이라 일컫던 화림동·심진동·원학동을 답사한 1944년의 기록이다. 여기서는 지리산 유람 기록만 번역하였으며 전체 분량의 45% 가량 된다.
첫 번째 지리산 유람(등정)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진성 - 의령 - 진주 - 단성 원지 - 산청읍 - 지막 - 왕등재 - 유평·밤밭골 - 대원사 - 부령 - 신선탄 - 순평 - 중산리 - 덕천서원 - 남사·초포 - 문산 - 진성」 13일이 소요되었다.
두 번째 여정은 이러했다. 「진성 - 문산 - 진주 - 곤양 - 하동읍 - 악양 - 화개 - 쌍계사 - 불일암 - 신응사 - 칠불암 - 범왕 - 불일암 - 알바(불일암~상불재 구간) - 청암 학동 - 옥종 청룡 - 진주 - 진성」 12일간이었다.
지명이나 간단한 풀이는 본문 속에 (청색 작은 글씨로) 설명하였고, 긴 주석은 각주로 달았다. 알 수 없는 지명은 놔뒀다.
유람 기록(記遊)
● 나는 산수벽이 있어 방장산에서 한 번 노닐고자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다.
임술년(1922) 봄 3월25일. 한경장(字 태동)·심극오(명숙)와 동행하기로 약속한 것이 이날이었다. 바로 의령 비암의 한내율(응옥)에게로 갔다. 여러 사람들이 고깃배를 불러 고기를 사고 술을 사 다릿가에서 서로 간곡히 권하였다. 저녁이 되어 유곡(*의령 유곡)으로 가 강인언의 집에서 잤다.
26일. 봉평(*진주 대곡면 봉평)에 이르러 인언과 헤어지고 곧 떠나는데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려 사람을 재촉하였다. 비에 젖은 행색으로 경장이 나에게 요구하기를 “이런 때에 시를 읊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각자 한 구절을 읊었다. 진주에 이르러 차를 타고는 단성 원지에 도착하였다. 비가 심하지 않아 강을 따라 올라가 안봉(*지금의 산청 신안면 안봉)의 문원오를 방문하였다. 산은 깊고 마을은 조용한데 책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 기뻤다.
27일. 비. 권군(君) 덕희가 와서 더불어 이야기하였다.
28일. 덕희가 조찬과 바둑판, 술상을 준비하였다. 나그네의 회포를 잊기에 족하였다.
29일. 맑음. 감령을 넘어 송천(*둔철산 아래의 외송)에 이르렀다. 경장이 어릴 적 선친을 따라 여기에서 살았으므로 兩세대의 묘 3기가 아직 이곳에 있다고 말하였다. 여기까지 와서 덕희와 작별하였는데, 방장산 가는 길을 가리키며 설명하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강을 따라 개장교에 이르렀는데 산음과의 경계이다.
목이 말라 술을 사서 마시고는 취한 김에 환아정(*산청읍내 경호강가에 있었다)에 올랐더니 풍경이 지극히 아름다워 사람으로 하여금 날개 돋친 신선이 된 듯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경호(鏡湖)에 도착하여 매촌(*산청읍 매촌)의 李사과(司果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정6품의 군관직. 보통 음직(蔭職)이었다) 종순을 방문하여 머물러 잤다. 그의 큰아들 윤집과 나는 평소에 서로 어울렸었고 밤새도록 글을 논하였는데 깨달은 바가 자못 유익하였다.
30일. 금석곡 지촌(*현재의 금서면 지곡)으로 갔더니 대(臺)가 있는데 맑은 시냇가에 여러 길 높이로 솟아 있었다. 앞면에는 큰 글씨가 2개 층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아래는 춘래대(春來臺), 위에는 자연동천(紫煙洞天)이라 새겨져 있었다. 덕계 오선생이 일찍이 여기에 놀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서 사과와 헤어지고 길을 바꿔 왕덕령(*왕등재)을 넘고 유평을 지나 율전(*밤밭골)에 도착하였다.
산음의 민희중과 의령의 박치순 등이 모두 거재수를 마시기 위하여 여기에 와서 머문 지 이미 몇 일이 되었다. 조금 있으니 물(거재수)을 파는 사람이 병을 가지고 왔기에 우리 일행도 사서 실컷 마셨다. 맛은 약간 달고 색은 옅은 자색이었다. 내가 원래 각기병이 있지만 시원스레 마셨는데 열세 사발째에 이르자 뱃속이 편치 않더니 설사를 여러 차례 하였다. 주인이 와서 말하기를, “내가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배가 아픈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公의 속이 불편한 것은 틀림없이 두릅나물을 많이 먹어서일 것입니다.” 하였다.
4월 초하루. 을축일. 대원사로 내려가 누대와 전각을 구경하였는데 웅장하고 매우 아름다웠으며 수십 칸이나 되었다. 또 9층 탑이 있었다. 저 농사 짓지 않고 놀고 먹는 무리들은 주춧돌 하나에 천석의 곡식을 없애고 기둥 하나에 만관의 돈을 썼으니, 농민들을 곤궁하게 하지 않고자 해도 어찌 가능했겠는가? 아, 우리 구왕조의 숭유척불(崇儒斥佛) 아래에서도 그 폐단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어찌 오늘날처럼 그들의 道를 존중하고 그들을 스승으로 삼으랴?
절 좌우 물가에는 돌항아리가 있는데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절의 스님들이 그 속에 김치를 담그기도 하는데 봄과 여름이 지나도록 맛이 변하지 않는다 한다. 그 위로 수 궁(數弓 *활 쏘는 거리의 2배, 100보, 120m) 되는 곳에 용추가 있는데 사방이 모두 돌이고 오직 한 줄기 폭포수를 받아들이는 곳으로만 길이 통할 뿐이었다. 폭포의 웅덩이는 넓게 소용돌이치며 맑고 깊은데 깊이가 몇 척(尺)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절에서 다시 율전으로 올라가 부령(缶嶺)1)을 넘어가려 하니 그곳에 사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 길로 가면 30리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 물러나 내일까지 기다리는 것이 나을 거라고 하였다. 일행은 모두 듣지 않고 행장을 갖추어 부여잡고 올라갔다. 올라가서는 구름 위에 솟구친 산봉우리와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는 만 가지로 다른데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여기서 상봉까지는 20여 里 길인데, 이른바 삼성을 어루만지고 정성을 스쳐간다2)는 말이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잔도가 몇 번씩 꺾이고 혹은 벼랑가를 따라 나무를 붙잡고 나아갔다.
날이 이미 어두워 할 수 없이 순평(*지금의 순두류?)으로 가는 길을 물어 산을 내려가 신선탄(神仙灘 *신선너덜인 듯)에 이르러 다리를 쉬었다. (신선탄에는) 괴석이 수없이 많은데 사람이 서 있거나 짐승이 쭉 늘어선 모양, 그외 오이 계란 솥귀 칼머리 같이 생긴 바위들이 서너층이나 쌓이고 벌여 서서 엄숙하기가 행군하는 병사들이 함매를 물고 장수의 명령을 듣는 것 같았다. 나뭇꾼에게 물어보니, 신선들이 일찌기 여기에 놀면서 돌을 늘어 세워 팔진도(八陣圖)를 꾸몄다는 말이 세상에 전해온다고 하였다. 순평을 지나고 중산(*중산리)을 거쳐 연천점(*동당 위 연계마을?)에 도착하니 저녁이 이미 더 깊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숲에서 들리는 산도깨비의 휘파람 소리 때문에 사립문을 닫고 있었다.
초이틀. 거재수 생각이 다시 나 마을의 일꾼을 사서 중봉으로 물을 구하러 보냈다. 이어 시냇가에서 풍욕(風浴)을 하고는 작은 언덕에서 어제 다녀온 곳을 돌아보니 천상에 있었던 것 같았다. 조금 있으니 집안 동생 군중과 한세우가 와서 보았다.
조금 후 낚싯대를 던져 고기 수십 마리를 잡았는데, 가는 비늘과 큰 입이 농어 같았다. 다 함께 즐거워하였다. 군중이 다시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저물 때 일꾼이 (거재수)병을 가득 채워 돌아와 각자 몇 사발을 마셨다. 단성 사람 이여정이 마침 여기 교수로 와 있었기에 군중과 이군이 방옹3)의 시에서 운자를 뽑아 같이 수창(酬唱 *시를 서로 주고받음)하게 하였다.
초사흘. 당산(*덕산에서 남쪽 물 건너 마을)의 최원석과 족숙 치장을 방문하고 강을 건너 경의당과 세심정·산천재를 두루 구경하였다. 저물녘에 남사(*남사마을)의 족형(*먼 친척 형) 여진씨 집에 이르렀는데 정 깊은 이야기가 또한 매우 곡진하였다.
초나흘. 하성권·최사희와 함께 초포(*남사마을 옆)의 니동재(*니동서당. 면우 곽종석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를 방문하였다. 이날 바로 진읍(*진주)으로 갔는데 정오가 지난 때였다. 경장은 관방리(*진주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에 일이 있어 헤어져 마재(馬峙 *진주 옥봉동에서 안락공원 옆을 지나 장재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가고 나와 극오는 선학재(*진주 선학산 옆 고개, 옥봉동과 하대동을 잇는 고개)를 넘고 토진 나루를 건너 문산에서 잤다.
초닷새. 이천에 이르러 극오와 헤어지고 동산의 지동에 도착하여 일가친척과 옛친구들을 찾아보았다.
초엿새. 비에 막혀서 택동에 체류하였다.
초이레. 맑음. 천곡(*진성면 천곡)의 4종형 인택씨 집으로 갔다. 여기서 한형과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오래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곧 이어 백야촌으로 가 정참봉 종환을 방문하여 잠시 이야기하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봄에 씨 뿌리는 일을 끝낸 이웃들이 따비를 메고 남쪽 봉우리(南嶂) 아래 우하(牛下)로 돌아오고 있었다.
● 병인년(1926) 4월 4일. 청원(*진주 지수면 청원)의 먼 일가 맹규(종호), 함안의 벗 안형윤(상정), 이성유(수행), 그리고 나, 네사람이 화악(*지리산)에 놀러가기로 작정하고 같이 문산으로 가서 족숙(族叔 *집안의 먼 아저씨뻘) 기언(수용)의 우거(寓居 *임시 거처)에서 잤다.
5일. 죽방을 넘고 강주(*진주)를 지나 지난날 해창(海倉 *나라에서 운영하던 바닷가의 곡식 창고)이 있던 곳에서 점심을 먹고 곤산(*곤양)의 환덕리에서 투숙하였다. 거기는 조씨의 장원이었는데 주인은 가헌·자헌 형제였다. 모두 삼가고 조심하여 법도에 통달하였고 기백과 국량이 진실로 난형난제라 할 수 있었다.
6일. 자헌이 일행에게 바다를 구경하러 가자고 하여 중항포로 갔다. 술과 안주가 매우 풍성하였다. 각자 4운시 한 수를 지었다. 나는 취한 김에 장난삼아 시를 지었는데 제2연은 이러했다.
江淮河漢難爲水 장강과 회수 황하와 한수도 물이라 하긴 어렵고,
島嶼岡巒渺若霞 가깝고 먼 섬과 낮고 높은 산은 노을처럼 아득하네.
마지막 연은 이러했다.
懷窮宇宙題何地 회포는 우주까지 닿았으니 어느 곳에 시를 지으랴
萬里平鋪幅幅沙 만 리에 평평하게 모래만 펼쳐져 있네.
맹규가 빙그레 웃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였다. 후에 삼신동에 들면서 이야기가 우연히 그날의 일에 미쳐서는 모두들 내가 정현덕4)의 시를 베껴서 바꾸었다고 나를 조롱하였다. 그의 시가 인구에 회자되었는데 내가 견문이 좁아 혼자만 몰랐던 것이다. 서로 함께 크게 웃었다.
7일. 하동읍을 지나 화심동에 도착하여 여참봉 종엽의 집에서 묵었다.
8일. 비를 무릅쓰고 몇 里를 나아가 섬진강가에 있는 한선생 조은(韓夢參. 1589-1662. 釣隱은 그의 호. 묘는 호암과 흥룡 사이에 있다.)의 묘에 참배하였다. 선생은 경상우도 남인들의 사표(師表)였다. 나에게는 선조 참봉공의 외손이 된다. 층계 아래에 무덤 하나가 있는데 선생의 장손 절도사 휘 익세의 묘이다. 맹규가 말하기를, 절도사 역시 선조 행정공의 외손이며 그래서 그 묘를 돌본다고 하였다.
이 길을 따라 악양 땅을 지나가면서 고소성 봉황대 소상포 동정호 군산 낙안봉 등 여러 곳의 뛰어난 경치를 두루 구경하였다. 또 십여 리를 가니 악양정이 있었고, 몇 층으로 포개진 빼어난 봉우리들이 나열해 있었다. 그 뒤에는 한 줄기 길을 따라 긴 강이 띠를 두른 듯하였고, 그 앞에는 마치 이상한 기운이 그 사이로 엉기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성유가 말하기를, “여기가 일두 정선생의 유허지이다. 선생이 일찍이 읊은 시에 ‘부들 풀 바람을 맞아 가볍게 흔들리는데/사월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어가네/두류산 천만봉 두루 다 구경하고/외로운 배로 또 큰 강을 내려오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길과 이 언저리가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칠팔 리를 가서 화개장터의 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 쌍계석문까지는 십 리가 남았다고 하였다. 물을 따라 삼신동(*여기서는 화개동천 전체를 가리키는 듯)으로 들어가니 水石이 매우 아름다웠다. 서로 함께 잔물결을 희롱하고 옷자락을 적시니 멍한 것이 마치 진세(塵世)를 벗어나 빈 골짝으로 도망친 자가 사람 만나기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5)
형윤이 숙박의 편의를 위해 누각을 차지하고자 절에 먼저 가기를 청하였다. 석문에 이르니 ‘쌍계석문’이라 새겨져 있었는데 자획의 크기가 사슴 정강이 만하였고 기세가 심히 예스러워 천 백년이 지나도 이끼가 끼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길 최문창이 손수 쓴 글씨라고 옛일을 잘 알고 있는 노인들이 대대로 전한다고 하였다. 형윤이 절의 문밖에 나와 기다리다가 손을 맞잡고 들어갔다. 이날은 바로 절의 석가탄신일이었는데 난탕(蘭湯 *난초 삶은 물로 목욕하는 것)은 이미 폐해졌고 등불을 밝히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9일. 비
10일. 비가 개이지 않아 우산을 들고 청학루에 올랐다. 한 스님이 향기로운 차를 끓여 내어오기에 마시고서 팔상전과 육조탑을 두루 구경하고 돌아와 팔영루에 올라 시판(詩板)에 적힌 시의 운(韻)에 맞춰 시를 지었다. 오후에 날이 조금 개어 불일암 있는 곳을 물었더니 승려가 말하길 여기서 2里 거리에 국사암이 있고 국사암에서 5里를 오르면 환학대가 있으며 다시 5里를 가면 띠풀로 지붕을 덮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불일암이라고 하였다.
마침내 옷을 걷어올리고 명아주 지팡이에 의지하여 오르는데, 괴석과 푸른 등나무, 고목과 우거진 숲, 기이한 짐승과 새, 맑은 여울과 휘날리는 폭포 등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벼랑가의 미끄러운 길을 어렵게 나아가는데 열 걸음에 아홉 번을 쉬었고, 때마침 이슬비 또한 부슬부슬 내렸다. 형윤이 잠시 복통을 호소하였는데 나 역시 편치 않았다. 대체로 들에 사는 사람은 산중에서 생기는 냉기와 출몰하는 붉은 안개에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암자에서 몇 里 떨어진 곳까지 모두 석벽이라 깊은 골짜기에 잔교를 설치하여 옆걸음으로 어렵게 건너는데 서로 돌아보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암자에 도착하여 행장을 풀고 전후좌우를 둘러보니 모두 기묘한 봉우리와 깊은 골짝기였지만 청학 백학의 양봉우리와 향로봉이 가장 빼어났다. 남명의 유두류록과 미수(허목 1595-1682)의 청학동기, 금양(이현일 1627-1704)의 시가 진실로 나를 속이지 않았으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하겠다.
11일. 비가 아직 개이지 않았다. 암자로부터 앞의 비탈길로 나가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흩날리는 폭포를 올려다보니 와류(臥流)가 천 길이나 되어 천둥소리가 울린다든가 용이 싸운다든가 하는 말로도 그 형상을 비유하기가 부족하였다. 형윤 성유가 앞으로 나아갔다가 도로 물러나 말하였다. "벼랑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끊어지면 대강이라도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겠다." 내가 말하였다. "우리들이 능히 이욕(利慾)을 삼간다면 구덩이에 빠져도 끝내 소인의 등급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오."
암자로 돌아와 쉬었다. 오후에 잠깐 날이 개이기에 칠불암으로 가려고 하산하여 나뭇꾼에게 길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쌍계사 우측으로 가면 길은 좀 가까울지라도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으니 먼저 쌍계사로 가서 다리를 따라 건너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성유와 형윤은 시내 쪽으로 가자 하였고 나와 맹규는 다리로 가자고 하여 서로 버티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형윤이 문득 우측으로 진행하여 시냇가로 갔다. 시내는 과연 물이 넘쳐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간격이 몇 尺이나 되었다. 세 사람은 모두 걸어서 건넜으나 나 혼자 건널 수 없어 성유와 형윤 두 사람이 부축하여 겨우 건넜다.
신응동에 당도하니 골짜기에 높은 바위 하나가 어지러운 돌 사이에 우뚝 솟아 있어 물어보니 곧 고운선생의 세이대(洗耳臺)였다. 계곡이 깊어 멀리 바라보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위로 칠불암까지는 십 里로 숲과 골짝은 갈수록 깊어지고 운무가 짙어 어두웠다. 한 가닥 길을 따라 온갖 난관을 뚫고 들어가니 홀연히 숲 끝에 누각 하나가 날아갈 듯이 드러났다. 그것은 ‘동국제일선원’이라 적어 놓은 문루(門樓 *아래는 출입문, 위는 다락집)였다.
앞에는 맑은 연못 하나가 있었는데 넓이는 몇 무(畝) 정도가 되었지만 깊이는 일 장(丈)에도 못 미쳤다. 이것이 이른바 영지(影池)이다. 신라 때 가락왕의 일곱 아들이 이곳에서 불도를 배우고 있을 때 모후(母后)가 아들을 보려고 왔으나 일곱 아들은 어머니를 보지 않겠다고 서원하고는 이 연못을 파고 누대에 올라 그림자를 비추고, 모친으로 하여금 단지 연못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돌아가게 하였으므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뒤에는 깨끗한 언덕이 있고 돌을 다듬어 깔아 축대를 쌓고는 금잔디로 덮었으니 이곳이 바로 옥부대(玉浮臺)이다. 옛날 도사가 피리를 불었던 곳으로 지금도 그 피리는 남아 있는데 동도(東都 *경주)의 옥적(玉笛)이 바로 그것이다.
서쪽 별채는 전부 亞字로 온돌을 만들어 실처(實處 *불길이 지나가는 곳)는 높게 하고 허처(虛處 *불길이 지나가지 않는 곳)는 낮게 하여 그 바닥이 아주 고르지 않은데도 불을 때면 따듯하고 차가운 것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이 소위 아자방이다. 온돌을 만든 지 천팔백 년이나 지났으니 절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대체로 이 모든 것은 중들이 서로 전하는 얘기로 허황하여 다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 현상은 참말로 기이하고 괴이할 뿐이다.
구경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왔다. 또 복통으로 설사를 몇 차례나 하였고 아침이 되자 조금 차도가 있었다. 주지 용은이 와서 살펴보고는 밤 사이의 안부를 묻고 갔다.
12일. 하산하며 용은과는 절 문밖에서 서로 헤어졌다. 어제 왔던 길을 따라 돌아왔다. 숲 사이에는 지팡이에 견줄 만한 회초리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성유는 이것을 청려(靑藜 *명아주, 지팡이로 쓴다)라고 하였다. 형윤은 그 말을 아주 믿고는 4~5개를 지팡이로 잘랐고, 나와 맹규 또한 각자 하나씩 지팡이로 잘랐다. 범왕촌에 도착하자 마을사람들이 보고는 크게 웃으면서 그런 물푸레나무를 어디에 쓸 거냐고 하였다. 제군들이 지팡이로 쓸 것들을 전부 버리고 성유를 조롱하면서 청려선생이라고 불렀다. 내가 말하였다. “우리 모두가 방게에게 속고6) 성유에게 속았는데 어찌 성유 혼자만 비웃겠는가?”
불일암으로 도로 돌아와서는 일산처럼 생긴 봉우리에 올랐더니 꼭대기에는 진달래가 막 피어나고 나무의 싹이 비로소 움트기 시작하였다. 운무가 심해 날이 어둡고 지척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소로를 따라 몇 里를 가서 시내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 또 육칠 里를 가니 숲은 깊고 길은 끝나 더 나아갈 곳이 없었다. 부득이 물러나 아까의 산꼭대기로 돌아왔다. 형윤이 앞에서 말하기를, “길이 여기서 진퇴유곡이니 어찌 하겠는가? 이곳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으니 그대들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자리에서 잠시 쉬면서 기다리도록 하시오.”하면서 산을 내려가 상불(上佛)마을로 갔다.
조금 있으니 형윤이 한 초부를 데리고 왔다. 그에게 앞길을 인도하게 하여 차례로 그를 따라 좀전에 길을 잃었던 곳까지 왔는데 그 사람 역시 헷갈려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다. 갑자기 나무를 베어 쌓아 놓은 것을 만났는데 무소(兕) 우리나 돼지 울타리처럼 간간이 늘어서서 좁은 길을 가로지르며 끊어먹고 있었다. 초부가, 이것은 목이버섯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왼쪽으로 꺾고 오른쪽으로 돌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들어갔다가 왼쪽으로 나오기도 하면서 나무그늘을 뚫고 등나무를 등지고 어렵게 몇 里를 나아가니 마침내 숲 사이로 희미한 한 줄기 길이 나타났다.
초부가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길을 따라 내려가면 5里를 못 가서 인가가 있는데 바로 청암 학동이라고 하였다. 아! 우리들은 책에서 '길을 갈 때 지름길로 다니지 않는다[行不由徑]'7)는 말을 자주 읽었지만 잠시 산승(山僧)의 망령된 가리킴으로 이런 곤욕을 당하였구나.
저녁이 되어 시골 서당에 투숙하여 함께 화롯가에 모여 신발을 말리고 있으니 서동(書童)이 기장밥과 콩죽을 차려왔다. 골짜기는 궁벽하기가 짝이 없으니 두류산 남쪽 기슭에서는 하늘에서 가장 먼저 떨어진 마을이었다.
13일. 청룡동(*지금의 하동 옥종면 청룡)으로 가는 길을 바로 물어 길을 나서는데 짙은 안개가 길을 막고 가랑비가 산을 가로질러 길을 떠나기에는 마땅치 않았지만 일행 모두 집을 떠난 지 오래여서 걱정이 되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수십 里 길을 가니 날이 조금 개었다.
서로 함께 의관을 정리하고 저녁에 청룡동에 도착하여 족숙인 침랑(寢郞 *종묘ㆍ능(陵)ㆍ원(園)을 지키는 벼슬, 능참봉) 희수씨 집을 찾아갔다.
14일. 진읍에 도착하여 문경장의 여관에서 자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왔다.
【註】
1) 이름으로 봐서는 무재치기와 느진목재 사이의 장구목인 것 같은데, 묘사한 정황으로 봐서는 써리봉 쯤인 것 같기도 하다.
대체로 장구의 허리처럼 잘록한 곳을 장구목이라 부르는데 전국에 그런 지명은 제법 있다. 장구목>장군목>부령(缶嶺 *缶는 장군 부)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이백(李白)의 시 『촉도난(蜀道難)』에서, “삼성을 만지고 정성을 지나며 숨을 몰아쉬고,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저앉아 장탄식하네.[捫參歷井仰脅息 以手拊膺坐長歎]”하였다. 삼성(參星)은 오리온좌의 삼태성을 말하며, 정성(井星)은 쌍둥이자리에 있다. 둘 다 고대의 별자리 28수 중의 하나이다.
3) 육유(陸游 1125-1209) : 남송의 시인. 자 무관(務觀) 호 방옹(放翁). 북쪽 땅을 金나라에 빼앗기고 굴욕적인 화친을 맺어 남쪽에 안주한 데 대하여 고토 회복을 주장하며 비분강개한 시를 많이 썼다. 이후 지금까지도 중국에서는 우국충정의 시인으로 통한다.
또 의외로, 모친의 강압으로 헤어진 첫 아내 당완을 그리는 가슴 아픈 시도 많이 남겼다. 아마도 뜨거운 가슴을 지녔던 사나이였던가 보다. 그래서 담담한 시풍이 지배했던 송나라 시단에 당나라의 호방하고 강렬한 정서를 불어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고향으로 물러나 한적한 전원생활을 읊은 시도 많다. 9,200여 수의 시를 남겨 중국 최다작의 시인으로 불린다.
4) 정현덕(鄭顯德 1810-1883) :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雨田) 또 해소(海所)라고도 하였다.
41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오십 이전에는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였다. 대원군이 집권하자 승승장구하였고 그의 심복으로 1867년 동래부사가 되어 7년 동안이나 일선에서 일본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정권에 의하여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형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대원군이 물러나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한 마디로 개항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당시에 이미 그는 뛰어난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의 시는 호쾌하고 충정에 넘친다. 그가 지은 『몰운대(沒雲臺 *낙동정맥의 끝)』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 문제된 시가 이와 흡사하다.
一色平鋪萬里流 한 색으로 평평하게 만 리를 흐르는 물
朝鮮地盡此樓浮 조선 땅이 끝나는 자리에 이 누각이 떠 있구나
江淮河漢難爲水 장강과 회수 황하와 한수도 물이라 하기 어렵고
南北東西不見洲 남북과 동서의 물 끝이 보이지 않는구나.
‥<하략>‥
여기서 ‘물이라 하기 어렵고(難爲水)’란 말은 공자의 등태산(登泰山)에서 따온 말이다.
“공자께서 노나라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를 구경한 자에게는 웬만한 물은 물 같지가 않고, 성인의 문하에서 노닌 자에게 어지간한 말은 말 같지가 않다.” [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 출전:《맹자(孟子)》『진심장(盡心章) 상편』
5)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편에 “텅 빈 골짜기로 도망친 자는 …… 사람의 발소리만 들려도 기쁜 법이다[夫逃虛空者 …… 聞人足音跫然而喜矣]”라는 ‘공곡족음(空谷足音)’의 고사가 있다.
6) 중국 채모(蔡謨 *중국 동진(東晉)사람. 281-356)가 방게를 게로 착각, 먹었다가 거의 죽을 뻔했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비슷한 것에 속았다는 말.
7) 「자유(*공자의 제자)가 무성의 읍재가 되었다. 공자가 “너는 인재를 얻었느냐?”라고 묻자, 자유가 대답하였다. “담대멸명이라는 자가 있는데, 길을 갈 때에는 지름길로 다니지 않으며(行不由徑), 공사(公事)가 아니면 일찍이 제 집에 이른 적이 없습니다.”」 《논어》『옹야(雍也)』편
매천 황현(1855~1910)은 원래 광양 사람이었다. 1833년 별시 보거과에 일등으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가 한미한 시골 출신인 것을 알고 2등으로 낮추자 조정의 부패함을 절감하고는 나머지 시험을 포기, 귀향한다. 하지만 아버지ㅡ이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1888년 생원시에 응시 장원으로 합격하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정부는 수구파 저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하여 다시 귀향한다. 그러고는 식솔들은 데리고 백운산 서북쪽의 구례 만수동에 자리를 잡고는 시문 짓기와 역사 연구 및 경세학 공부에 힘쓴다. 다시 구례 광의면 월곡마을로 이사한 매천은 동학농민운동의 소용돌이가 잦아들자 '오하기문'을 지었고 그 뒤 '매천야록'을 저술한다. 1905년 11. 일제가 을사저약을 강제 체결하자 김택영이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구례에서 '호양학교'를 세우고는 신학문 교육에 참여하였으나 1910. 8. 한일합방이 되자 통분하고는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