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7 : 9 - 14 지금 해야 돼요?
한 남자가 공동묘지에 갔다가 무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왜 돌아가셨나요? 왜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나요?” 하며 대성통곡하며 울고 있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이 남자는 울고 있는 남자의 고통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로 걸어가 위로의 손길을 건네며 물었다. “부인의 무덤인가요?” 울고 있던 남자가 답했다. “아니오. 아내의 전 남편의 무덤이랍니다.” 그 남자가 일찍 죽지만 안았더라면 내가 지금 이 여자와 이런 고생을 하지는 않을텐데 전 남편이 일찍 죽은 것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하고 울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려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집에 아이가 없는 것은 전적으로 사라가 아이를 낳기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사라의 태의 문을 닫아 놓으신 것입니다.
자기의 문제가 아니라 사라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할례를 받으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그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같이 땅의 모래알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25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야 할례를 받으면 아들을 주시겠다니 이 무슨 말입니까? 할례와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할례는 남자들이 지금의 포경 수술을 받는 것처럼 남자의 양피를 베는 것을 할례라고 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태어나서 바로 포경수술들을 많이 하지만 아브라함은 나이 99살이 되었을 때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무엇인가 소원을 두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고 기다려도 이루어질듯 하면서도 되지 않고 있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1년2년 10년을 기다려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마음의 소원이 잘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는데도 이루어지지 않고 그 응답이 더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 존 워너메이커, 카터 대통령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응답을 받아 그렇게 큰 부자가 되었고 카터 대통령은 지금도 존경을 받으며 세계가운데 아름다운 그의 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3500년 이전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이 이제 나이99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어가자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은 그 아이는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지금에 다시 하나님은 나타나시어 너와 네 온 집의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으면 네가 너와 함께하고 너로 여러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여 너희 후손이 번성하게 되고 왕들이 네게서 나오게 될 것이며 이 땅을 너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입니다. 지금 이 나이에 할례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이들이 나은지 8일 만에 할례는 받는 이유는 의학적으로도 가장 고통을 적게 느끼는 때이며 지혈과 회복이 잘 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늙은 나이에 그것도 주인이 종들과 할례를 함께 행하고 엉거주춤 다니는 꼴이란 상상하기도 싫은 일입니다.
더욱이 그 집에는 남자들이 소돔 고모라 성의 롯이 잡혀갔을 때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갔던 집에 있던 남자들만 해도 318명이나 되는데 거기에다 아이들까지 하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합리적이 아닙니다.
또한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고 거동을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주변의 적들이 안다면 일시에 공격을 해오면 야곱의 아들 레위와 시므온 두 사람이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그들의 거동이 불편할 때 들어가서 남자들을 다 죽이던 것처럼 적들이 아는 순간에는 다 떼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남자들이 다 할례를 행하게 되면 양을 돌보는 일들과 가정의 그 많은 일들은 누가 다 합니까?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할례를 하란 말입니까? 하나님도 적당하게 연차적으로 기회를 보아서 아니면 좀 더 일찍이 더 나이먹지 전에 하셔야지 이제야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외부적인 문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자기 집에서 일하던 모든 하인들은 자기가 합리적이고 인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자기가 그런 명령을 내리면 자기 집의 모든 하인들이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보겠습니까?
계시를 잘못 받은 것 아니야? 혹시 치매에 걸리셨나? 할례를 받으려고 하면 자기만 하면 되지 왜 남의 문건에까지 자기가 간섭을 해서 자르라 말라 하는 것인지 거기다가 자기들의 자녀들까지 그렇게 하는 일들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 혹시라도 할례를 받았다가 상처가 잘 아물지 않고 잘못해서 덧이라도 나면 그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렇게 안 되라는 법도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과연 할례를 받고 싶어 할 것인가? 두려움은 없을까? 부인들은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지는 않을까 하는 복잡한 생각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단합니다. 하나님이 사래에게 복을 주어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믿고 온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돈으로 사온 노예들까지 모두 할례를 받도록 결단을 실행합니다. 이 결단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이후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최대의 고비이며 최대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치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합니다. 망하면 망하리라고 결단을 합니다. 미친 노인네 취급을 하면 당하리라 하고 결단을 합니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결단합니다. 그의 결단에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의 결단입니다. 자녀를 얻기 위한 마지막 결단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정의 모든 남자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단 한사람이라도 예외가 없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그 결단의 참여자가 되어 할례를 받게 됩니다. 그의 강한 결단을 본 모든 사람들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결단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결단을 거부할 때 무엇이 자신에게 돌아오는지 너무 잘 보이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결단을 하고 온 집안의 남자들을 다 할례를 받게 하게 하기 위해서 모이고 아브라함이 직접 할례의 선두에 나선 결단의 그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그 결단, 이후에 이삭을 드리려고 결단하던 일이나 지금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으려고 결단하는 일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순종의 마음이 너무 아름답고 귀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삭의 때에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멈추게 하셨지만 이 일은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멈추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이삭을 바칠 때의 아브라함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나 지금의 마음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도와주시기로 작정하셨을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국가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하시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온 집 식구들이 할례를 행하는 동안 그리고 그들이 앓아 거동을 잘 하지 못하는 동안 주변국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그들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온 집을 지켜 주셨습니다.
또한 가정 내의 누구도 이 일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못하게 하시고 이 일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평안의 마음을 주시고 신속한 치료가 일어나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은 이 일이 잘 진행되도록 직접 간섭하시고 개입하시고 도와주셔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로 나갈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 주시던 것처럼 그렇게 아브라함의 가정을 그의 모든 소유를 지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1년 후에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꽉 막혀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여인의 구실이 끝난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나이 90에 그토록 기다리던 사랑하는 아들을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열국의 어미가 된 것입니다.
또 놀라운 것은 이제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는 표가 자신의 몸에 있어 어디에 가든지 소변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일에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하루에 몇 번씩 소변을 보아야만 하는데 피할 수없는 일인데 아브라함은 그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게 되며 하나님과의 일체감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놀랄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결단 이후의 그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영적인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를 통해서 메시야가 오시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고 말씀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지금 수천 년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하며 모든 사람들이 그의 결단을 배우고 그의 결단을 본받고 싶어 합니다. 그는 분명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록펠러는 그의 어머니의 유언하기를 주일을 절대로 지켜라, 주일 예배에 지각하지 말아라, 예배에 제일 앞자리에 앉아라, 목사님을 아버지로 섬겨라, 십일조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라 하고 말한것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존 워너 메이커는 어떻습니까? 그를 대통령이 체신부 장관으로 불렀을 때 대답하기를 내가 주일에 주일을 지키고 내 교회에서 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의 자리를 허락하며 내가 장관직을 맡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는 맡지 않겠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의 결단을 아는 대통령은 그를 체신부 장관에 임명하면서 주일에는 절대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며 봉사의 일을 행했습니다.
지미 카터는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에 주일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하기 전에 결단했습니다. 그는 결단한 대로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한 결단대로 실행했습니다. 그는 선거 유세를 하는 동안에 계속 주일을 지키며 주일학교 교사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100여명의 기자들이 그렇게 해도 되는 여유가 있는가를 묻자 그때 그는 기자들을 향해 당신들도 각각 자기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 하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유세를 하면서 주일에 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는지 잘 아는 그는 그 손해를 감수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의 그런 노골적인 신앙의 성향이 다른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잘 알면서도 결단했고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다니엘이 왕의 식물을 먹지 않겠다고 결단하던 것처럼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그의 친구들이 결단하던 것처럼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리라 결단하던 것처럼 그들의 결단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만들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에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졌지만 그의 시대에는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세계에 전쟁으로 인하여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백성들도 조용한 가운데 안정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큰일을 벌이지 않았지만 평안의 시대였습니다. 그는 지금도 헤비타트 운동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의 집을 지어주고 그의 활동력은 세계 평화를 위하여 왕성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할례 받지 아니한 아브라함으로부터 얻는 씨를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게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할례받기 전에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으므로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고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였습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고도 십 삼년이 흘렀지만 사라는 여전히 잉태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사라가 낳을 아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왜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과는 언약을 세울 수 없고 사라에게서 낳을 아들과만 언약을 세워야 했던가?
우리는 지금도 자녀를 낳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마엘과 같은 자녀이며 하나는 이삭과 같은 자녀입니다. 어느 교회는 이스마엘을 낳으며 어느 교회는 이삭을 낳습니까? 교회마다 자기는 이삭을 낳는 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사라가 없으면 이삭을 수 낳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라가 잉태치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하갈이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난 후에 사라가 잉태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갈은 어떤 남자에게서라도 잉태할 수 있지만 사라는 할례 없는 남자에게서는 잉태할 없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륜적으로 사라가 잉태치 못하도록 태를 막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을 때까지 그의 태는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나자 그의 태는 살아나서 이삭을 잉태했고 그는 약속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사라는 90세가 되도록 잉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잉태를 갈망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태를 열지 않으셨습니다. 미리 그녀의 태를 열었더라면 사라도 별수 없이 이스마엘을 낳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목적을 위하여 사라의 태를 오랫동안 닫아두셨습니다. 약속의 자녀를 잉태치 못할 바에는 태를 닫아두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잉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이스마엘인가 아니면 이삭입니까? 이삭이라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쓸수록 우리는 여전히 이스마엘을 낳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차라리 이삭이 아니면 태를 닫아버리기를 원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하신 일들이 안 이루어지는가 하고 고민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믿음으로 말씀으로 거룩해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렇게나 자녀를 낳은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삭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교회의 태를 닫아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 교회는 오히려 복 있는 교회며 선택된 교회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은 후에 완전한 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하갈에게서 낳은 자는 후사가 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전에도 하갈에게서 자녀를 낳았고 할례 후에도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갈에게서 낳은 자녀는 그두라에게서 나은 자녀는 모두 소용없게 되고 말았다.
하갈을 주인의 율법아래 둠으로써 어쩔 수 없이 이스마엘을 낳게 하고 사라는 자유아래 둠으로 써 이삭을 낳게 하였습니까?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율법아래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할례 없는 주인의 종인 이상, 할례 없는 자식을 낳을 수밖에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은 하갈을 율법아래 종이 되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은 아무나 공연히 율법아래 가두지 않는 분이십니다. 달아나지 않고 사람을 해하지 않는 개를 밧줄로 묶어 놓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지만 한 마리는 묶어놓지 않습니다. 그 놈들은 달아나지도 않고 사람을 물지도 않기 때문이다. 달아날 가능성과 물어뜯을 힘이 있는 개는 묶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이런 사람, 이런 교회는 율법아래 묶어 두고 기르는 것이다. 이 속에서는 이스마엘 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런 여자는 할례받기 전에는 이스마엘을 낳고 할례 후에는 쓸모없는 후손을 낳습니다.
사라는 왜 이삭을 낳도록 은혜를 입었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삭을 잉태하기 전까지 그의 태를 닫아 두셨습니까? 왜 이런 자비를 베푸셨습니까? 연약한 아내는 할례 받은 남편을 기다립니다. 무 할례자의 아내 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무 할례자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또 어떤 교회는 할례자 예수를 기다립니다. 유대교는 무 할례자 그리스도를 기다리다가 할례자 예수에게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무할례 그리스도를 대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그렇습니다. 엄청난 능력, 못할 것이 없는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고 기다립니다. 이것은 그들의 욕망을 투사한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은 이런 그리스도를 날마다 그리고 있습니다. 사라는 할례자인 아브라함의 아들밖에는 낳을 수 없는 교회-여자였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가 남편인 교회는 사라와 같이 이삭을 낳을 것이고 하나님은 이 아들과 영원한 언약을 제정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두가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것은 전부 다 할례를 받으라고 하시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성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자의 후손인 이삭을 낳기 위하여 자신이 할례를 받아야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다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까?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따르면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소유가 됩니다. 이스마엘을 포함해서 그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아브라함의 소유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할례 받은 생명으로 이삭을 낳아야 했고 이 이삭의 출생을 위하여 그의 모든 소유도 할례 받아야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할례 받은 생명으로 아들을 낳는다 해도 그의 소유가 할례 받지 않는다면 이삭은 할례 없는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소유는 곧 아들의 소유가 되기 때문에 이삭이 비록 할례자라 해도 그는 할례 없는 소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이 할례 있는 사람이며 그의 소유도 할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할례 없는 백성을 소유할 수 없듯이 아브라함과 이삭도 할례 없는 식구들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분명 하나님의 것이라면 나의 모든 소유도 하나님의 것이어야 합니다.
비록 나의 소유라 하더라도 나와 함께 할례지 않은 것은 나와 함께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그때에 나는 하나님께 드리고 나의 소유는 세상에 바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가 세상을 위하여 있다면 결국은 우리도 세상을 위하여 있게 됩니다. 우리의 소유는 오직 우리를 위하여 있어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있어야 합니다. 나의 소유가 할례 없는 것이면 내게 소용이 없고 내가 할례 없는 자이면 하나님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그의 소유전체가 할례 받은 후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할례 받았다고 해서 그냥 이삭을 낳을 수는 없습니다. 내 집안의 모든 소유가 할례 받은 후에 우리의 이삭을 낳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드리되 소유는 드리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소유는 드리되 자신은 드리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 제물을 열납 하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 하셨다고 했습니다.
자신과 분리된 제물도 없고 제물과 분리된 자신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전 소유를 이끌고 함께 할례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했기 때문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과 사탄을 위한 것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영과 세상을 위한 몸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영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몸도 함께 있어야 하고 몸이 하나님께 있다면 영도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소유는 존재를 위해서 할례 받아야 합니다. 생명이나 정신이나 물질이나 그 어떤 것도 할례 없는 것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탄의 병기가 됩니다. 우리는 육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복 주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기 원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건강의 복을 주시고 자녀의 복을 주시고 물질의 복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복을 주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려면 우리는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무엇인가 단절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잘라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육체의 할례보다도 마음의 할례를 원하십니다. 사람마다 잘라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인침을 받기 위해서 사람마다 분명하게 자르기를 원하는 결단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배의 결단 어떤 사람은 음란물에 대한 단호한 결단이, 어떤 사람은 주초문제에 대한 결단이, 어떤 사람은 부적절한 성적인 문제의 결단이, 가정제사의 문제에 대한 결단이, 물질생활의 십일조의 결단이, 사람마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결단을 요구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운데 하나님이 무엇을 결단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이 일은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결단하십시오.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자르고 포기하는 결단을 하십시오. 찬양대, 교사, 섬김터, 남녀선교회 임원, 목자, 차량, 봉사 등 하나님이 내게 원하실 때 내가 지금 그 일을 할 형편이나 사정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처럼 결단하십시오. 죽으면 죽으리라. 한번 해 보리라 결단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하든지 아니면 내 체면이 구겨지든지 한번 해보리라고 결단하고 아브라함처럼 실행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이 임할 것입니다.
결단하고 그 일을 실행하려면 방법을 구체적으로 세우십시오. 찬양대를 봉사하려면 세상의 유행가들을 단절하고 복음성가나 성가들을 들으십시오. 왜냐하면 영의 흐름이 세상의 노래를 계속 일주일 내내 듣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와서 찬송을 부르는 일은 노래는 되겠지만 찬양이 되지는 않습니다. 늘 찬송가 복음성가에 익숙하려면 영의 흐름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영으로 온 마음으로 찬양하려고 일주일을 준비하십시오.
성수주일을 하려면 성수주일은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전날부터 가정에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아침에는 가급적 전화를 받지 마십시오. 그렇게 생사를 다투는 문제도 아닌데 전화를 받고나면 그리로 마음이 가든지 교회에 와서도 갈등이 생기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서 전화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하기로 결단을 했다면 예배에 지각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지각하는 일들은 자기 자리를 교회의 뒷자리로 몰아내어 결국에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세상으로 떨어지도록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25년 동안이나 기대하던 일이 이루어지던 것처럼 우리가 오랫동안 기대하며 안 되던 문제들 책임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부모 때문에 아내나 남편 때문에 안 되었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이제는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복을 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결단하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주시던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이 임해서 자녀들에게 복이 임할 것이고 하는 이에 복이 임할 것이고 기업에 복이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