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귀국 직후
2001년 9월 중순, 첫 '까미노'를 마쳤던 이 인야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당시의 심정을 기록한 글을 보면,
석 달 전, 떠나갈 때의 바람대로 나는 맑은 가을날 서울에 돌아왔다. 공항 리무진을 타고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공기가 맑아 서울 주변의 산들이 아주 깨끗하고 가깝게 보여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스페인에서의 석 달은 꽤 긴 것 같기도 했다. 달이 세 번 둥글어졌고, 그걸 볼 때마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아주 특별하면서도 뭔가 길고도 아름다운 꿈 하나를 꾼 듯도 하다. 오롯이 두 달 정도를 보냈던 ‘산티아고 가는 길(El Camino de Santiago)'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속에서 ‘자유’를 만끽했고, 오랜 세월 갈망했던 '방랑의 맛'도 맘껏 누려보았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그 길을 걸으면서 나는 주체 못 할 충동으로 드로잉을 해댔고, 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듯 날마다 글을 쓴 건 물론, 내 눈앞에 펼쳐지던 아름다운 풍광이거나 재미있는 일들을 사진으로도 담아, 마치 무슨 '전리품'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간직한 채 돌아온 것이다. 비록 겉모습은 시커멓게 그을린 건 물론 비쩍 곯아 추레했지만...... |
하듯,
이 인야 자신이 그 동안 다른 외국 생활을 하다가 돌아오던 '귀국길'에 비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그 귀국 직후의 상황을 다루고자 한다.
'그런데 양을 줄이기 위해 가급적 '일기' 기록은 덜 이용하려고 했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기록이 생각보다 많지가 않아서, 이 대목에서는 일기를 가져와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런 일기의 양 역시 너무 많아서 다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뭔가 그 상황을 잘 드러내는 것들을 조금 추려서 실어야겠다.'
*
'까미노'를 마쳐서 그런 것이었을까?
이번 귀국길은 운 좋게 스위스 '쮜리히'에서 일본 '오사카'까지의 열두 시간의 비행은 비즈니스 석을 배정 받아(원래 내 표는 이코노미석이었다.), 내가 여태까지 비행기를 탄 이래 가장 편한 여행을 했다.
확실히 비지니스 석으로의 여행은 이코노미석에 비해 편하고도 그 서비스의 질이 달라, 그 지루하던 항공여정이 짧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천 ‘영종도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찾다가,
나는 같이 도착한 사람들보다 한 시간 여를 더 지체한 채로 나와야만 했다.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배낭과 지팡이 두 개의 화물을 부쳤는데, 배낭만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화물 취급소에 가서,
“당신들이 볼 때는 그저 나무 막대기에 불과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겐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긴 '소중한 물건'이거든요?” 하면서 항의를 해야만 했는데,
결국 직원 하나가 어딘가로 가더니, 수화물 딱지가 붙은 내 지팡이를 찾아 돌아와서야,
나는 마치 잃어버린 사람을 찾은 심정으로 그 지팡이를 반갑게 받아 들고 세관을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그냥 통과가 되다 보니,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스페인 친구들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하몬(Jamon)'과 '초리소(Chorizo)', 그리고 '치즈' 등도 가져오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에서 돌아오기 직전에, 최근 일본에 ‘광우병’ 소동이 벌어져, ‘유재품’이 검역에 걸릴 걸로 우려해, 미리 겁먹고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마놀로(Manolo)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그 집에서 담근 술 ‘오루호(Orujo)’ 세 병은 무사통과된 상태여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는데,
사실 나는 그 술도 검역에서 걸릴 줄 알고, 속으로는(여차해서 걸리면),
“이 술은, 돈 주고 사 온 비싼 게 아니고, 내 스페인 친구 집에서 직접 담근 술이라 버릴 수 없다.”며, 세관 직원 앞에서 그 술을 마실 각오까지 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또 한 번의 난리가 났을 텐데......
그리고 가급적 시차 적응을 빨리 하기 위해 나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지던 잠을 꾹 참고, 밤 11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랬더니, 오늘은 아침 7시가 넘어서야 눈이 떠질 정도로 꽤 깊은 잠을 잔 것 같다.
그리고 석 달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청소 빨래 짐정리 등으로, 몸이 나른한 상태에서도 꽤 바쁜 하루를 보냈다.
그 와중에 핸드폰을 복원시켜, 제일 먼저 누님과 통화를 했는데,
“야! 내가 너 땜에 잠도 못 자고 얼마나 걱정 했는 줄 알어?” 하고 호통을 치면서,
“처음에 너한테 전화를 거니, 안 받아서, 저녁에 다시 거니, 또 안 받아서, 다음 날 아침 또 전화를 걸어도 안 받기에... 군산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물어보고, 결국에는 니 친구 00이(P)에게까지 전화를 걸어도, 모른다기에... 내가 밤잠을 못 자며 걱정한 것을 생각하면......” 하고 한숨까지를 쉬다가,
그러니까 내가 까마노에서 어느 날 누님의 아들(조카)의 메일을 발견한 뒤, 영어로 내 소식을 전해서야, 내가 스페인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그런 내가 얼마나 밉던지,
"나중에 돌아오기만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며, 웃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무튼 몸 건강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더구나 요즘, 미국 테러(9. 11) 사건으로 비행기 여행도 문제가 많아, 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는데......” 하며,
“이제야, 안심이네!” 하는 것이었다.
누님의 말을 다 듣고 있던 나는,
“누님도, 참! 나는, 그저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돌아오려 했을 뿐인데... 웬 호들갑이었어요?” 하고 짜증어린 변명을 했는데,
“시끄러!” 하고 누님이 다시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그래, 나는 떠날 때도 조용히 떠났고, 돌아올 때도 조용히 돌아오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다.
외출하듯 아파트의 문을 잠그고 떠났고, 돌아와 스스로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으니, 된 거 아닌가?
9 . 17
*
그 동안 정지되어 있던 인터넷 서비스를 전화로 복구시켜놓고, 여기저기에 내가 잘 도착했다는 이 메일(e-mail)을 보냈다.
그런데 보내자마자 나에게 답을 준 이는 미국인 영어선생 S였다.
그는 내가 떠나기 전부터 ‘산티아고 가는 길’에 많은 관심을 보여줬던 친군데,
내일 오전 중에 나를 보러 내 자리에 오겠다고 했다.
지난 3개월 동안 다니면서, 종이 무게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깨알같이 잔글씨로 종이 양쪽 면에 빽빽히 써 놓았던 편지 형식의 여행 글을 정리하며, 컴퓨터(한글 문서)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양이 적지 않아, 그 일도 꽤나 시간을 잡아먹힐 것 같다.
그런데, 이 한국의 가을을 놓치지 않으려고, 가능하면 빨리 돌아오고 싶어 안달을 내던, 며칠 전까지의 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이 이제 나에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9 . 18
*
오늘 나는, 내가 나에게 보냈던 엽서 하나를 받았다.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한국에 도착할 나에게 보낸 엽서였다.
한국에 돌아오기 1주일 전쯤, 나는 가지고 다니던 우표를 어떻게 써먹을까 하다가, 한국에 있는 누군가에게 엽서를 보내야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그냥 내 주소로 수취인도 나 자신으로 엽서를 하나 써서 보냈던 것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한국의 두어 지인에게는(그들에게만) 이미 몇 번씩의 엽서를 보냈었고, 끝을 내면서도 마지막으로 하나씩 산티아고 대성당 사진이 실린 엽서를 보냈었다. 그렇게 남아있던 한국으로 보낼 우편요금의 우표가 남아있어서, 그냥 나에게 보내봤던 것이다.
이 엽서가 나보다 빨리 내 자리에 도착할 것인가? 한 일 주일 남은 여기 바르셀로나에서의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이 엽서를 보내보는 것이다. 여기거나 거기거나 날씨는 비슷할 것 같은데, 느낌은 다를 것 같다. 한국의 요즘은, 바람 끝이 달라져 있을 것이라서...... 2001.9.7 인야 |
그 엽서는 어김없이 내 서울 주소로 배달이 되었고, 나는 오늘 우편함에서 그 엽서를 꺼내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게 ‘나’라는 사람이다.
9 . 19
*
오늘은 날이 흐리다.
한 차례 비가 내리다 오후 늦게 갤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나는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썼던 편지를 컴퓨터로 옮겨쓰는 작업을 하면서, 그 당시를 회상해보는 나만의 호젓한 시간을 가져보았다.
행복했다.
스페인에서 돌아와, 한 이틀 집안과 짐 정리를 했고, 이어서 나는 글 정리에 들어갔는데,
그 사이 1주일이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작년에도 여기 베란다의 나팔꽃이 한창 피어오를 때 떠났고, 올해도 그럴 즈음에 떠났었는데,
정작 돌아와 보니, 올해는 내 자리 베란다의 나팔꽃은 그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구나 올해는 나팔꽃이 타고 올라가도록 매준 끈까지 싹둑 가위로 잘려진 채였다는 것이다.
그랬던 건,
"이쁘게 잘 자라던 나팔꽃에 진디물이 너무 꼬여 흉물스러워서, 아예 그 흔적을 없애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하던,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여기에 들러 집안을 돌보아 주었던 제자의 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주일 쯤 전에 내가 돌아오니, 베란다 밖에 세워놓았던 ‘솟대’의 새 한 마리의 머리 부분이 태풍이나 비바람에 없어지고 몸통부분만 덜렁 매달려 있었는데,
그 날, 하늘은 맑디 맑았는데, 머리 잘린 솟대가 놓여있던 아파트 베란다가 얼마나 쓸쓸하고 황량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일주일이 지난 오늘, 혹시나 하고 아파트 아래에 내려가 보니,
화단 잔디밭 위에 솟대의 대가리가 고스란히 떨어져 있어서, 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새의 머리를 주워다 다시 끼워놓았더니,
그나마 뭔가 다소 안정된 분위기로 바뀌는 것이었다.
9 .22
*
스페인에서 돌아온 이후, 정상적인 내 삶으로 재빠르게 복귀한 것까지는 좋은데,
'내 자리'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는 생활이 되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는,
뭔가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불안의 요인은 여러 가지다.
내 그림 작업을 아직 정식으로 시작하지 못했다는 것, 뭔가 돈벌이를 해야 살아갈 텐데 그런 것은 아직 아무런 전망도 없다는 것, 그리고 두어 달 걸은 덕택에 내 몸이 좀 건강해 졌음을 실감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틀어박혀 지내다간 또 다시 도시인의 그 나른한 체질로 바뀔 것에 대한 새로운 걱정도 있다.
그런데도 ‘추석’은 하루하루 다가와,
1 주일 내로 나는 고향에도 내려가야 하는 걱정거리 하나도 생겨 있다.
결국은 돈 문제다.
아, 이런 저런 걱정거리 모두 잊어버리고 걸어다닐 땐 홀가분하고 자유로웠었다.
걸으면서도 뭔가 문제점은 있었지만, 이런 삶에 대한 직접적인 부딪힘은 없어서, 한 동안은 정말 많은 걸 잊은 상태로 아주 단순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아, 내 이럴 줄 알고 있었다.
비록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이럴 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산티아고 가는 길’이 못 견디게 그리워 질 줄을......
9 . 23
*
요즘 내가 뭘 하는 것인가.
나는 요즘 정신없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했던 일에 대한 작업을 정리하고 편집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처음엔 A4용지에 깨알같이 써두었던 글을 '한글문서'로 옮기는 작업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기왕에 하는 김에 보완(교정)도 조금 하게 되었고, 글과 이어지는 '그림'과 '사진'도 함께 첨부하다 보니, 마치 뭔가를 편집하는 식이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쁠 것까지는 없는데,
아무튼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걸 다 잊어버린 채 나는 그 일에 몰두하고 있다.
정작 내가 제일 중요시해야 할 그림 작업은 소홀히 하면서......
그래서 그 일을 하면서도, 한 편으론 불안하기만 하다.
9 . 25
#성인(聖人)#
일 주일간의 ‘추석 연휴’를 보내고 내 자리에 올라와 있다.
물론, 성묘를 했고, 다음 날 아버지 제사(10. 2)도 지냈고, 식구들과 그 놈의 고스톱을 치느라 며칠 밤을 지샜고,
잘 먹고 맘 편히 놀다가 올라왔다.
내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추석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오늘 서울로 올라오면서 있었던 일이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이제 군산에서 서울까지는 최소한 30여 분의 시간이 줄어든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서울에 도착해 고속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려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데,
한 아주머니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손에는 커다란 가방을 끌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하고 묻자,
‘먹골’역이라고 했다.
"잘 됐네요! 그러면 제가 가는 방향이고, 저 내리기 한 정거장 전이니까... 같이 가면 되겠네요." 하며 그 분의 커다란 가방을 내가 들어주었다.
물론 나도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있던 터라, 그 아주머니는 미안해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지하철까지 가방을 들어다 주었는데, 나중에 타고 났는데 다행히 자리가 있어서 같이 앉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가톨릭 신자인지 연거푸 성호를 긋더니,
"고마워요!" 하면서, "주님, 이렇게 ‘성인’을 만나게 해주셔서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하는 것 아닌가.
'뭐라고? 나 한테 '성인'이라고?' 하면서 나는 멋쩍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아주머니... 저는 ‘성인’은 아니구요, 아니 될 수도 없는 사람이고,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일 뿐입니다." 라고, 굳이 그렇게 말을 해 주었는데,
"그래도 어쨌든 저는, 이 무거운 짐을 들고 어떻게 지하철을 타나 걱정되어... 버스 안에서도 누군가 성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했었는데, 바로 아저씨를 만나... 이렇게 쉽게 지하철을 탈 수 있었으니, 주님은... 항상 제 기도를 들어주신 거라, 어떻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고 다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점점 그 분의 목적지인 '먹골 역'이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나는,
'이 분이 먹골역에 내려, 거기는 에스컬레이터도 없는데(나는 먹골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다.), 어떻게 이 무거운 짐들을 들고 개찰구까지 나간다지?' 하는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주머니, 일단 지하철에서 내리시면, 누군가 젊은이가 내리는지 보신 뒤, 들어다달라고 부탁해보세요." 라고 말은 했지만, 한 편, 속으로는,
'내가 개찰구까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다음 지하철을 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그 분의 그 ‘성인’이란 말에,
'내가 '성인'이 되려고 그런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하면서,
'차라리 '성인'이 안 되는 길을 택하자.' 하는, 뭔가 그 분이 말을 했던 '성인'이란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먹골 역에 닿았고, 그 분은 내리면서,
"이거, 고마워서 어쩐다지요?" 하는 말과 함께 굳이 내 손을 덥석 잡는(?) 해프닝까지 벌였는데,
나도 어떨결에,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까지를 했고,
그 분은 지하철에서 내렸고,
그렇지만 나는 속으로만,
'누군가 이 분의 짐을 들어다주면 좋겠는데......' 하고만 있었다. #
*
이른 가을 아침.
오늘은 맑게 갤 모양이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앉아 있으니 행복하기까지 하다.
물론 마음 한 쪽엔 뭔가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이렇게 탁 트인 정경을 바라보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앉아있을 수 있는 이 환경이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아, 가을 아침.
맑게 갠 이 아침에,
갑자기 나는 허무해져서... 너무 허무해서 저 깊은 하늘 어딘가로 날아가버렸으면... 싶다.
하루 종일 몇 번의 전화를 받고, 좀 뒹숭생숭해 있다.
그러면서도 글 작업을 조금 했다. 지난 번 컴퓨터로 옮겨놓은 한글 문서를 읽어가며, 약간의 교정을 본 것인데......
먹는 문제 때문에라도 밖에 나가야 했는데, 그리고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도 난 역시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 자리'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내가 스페인에 갔다온 사이, 한 친구는 자식들 교육 문제로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 버렸다 하고,
또 한 친구는 엄연히 가정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니며 심한 방황(?)을 하는 것 같고,
또 한 친구는 감감 무소식이고......
그나마 나와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삶에 뭔가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 같아, 나는 조금 당황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져야 살아갈 텐데......
아, 세월은 이렇게 가고 있는데,
나는 내 뜻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묻혀 살아야만 하는가?
답답해서 미치겠다.
1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