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찬공(정재공) [六代 修撰公(貞齋公)]
1) 행 장 (행장)
公의 자(字)는 간중(幹仲)이시고 휘(諱)는 수정(守貞)이시며, 호(號)는 정재(貞齋) 또는 소한재(素寒齋)이시니, 성종 정유(丁酉 1477)년 5월 6일 광양군(廣陽君 諱 世左)의 넷째아들로 탄생하시었다.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선생에게서 배우시어 재기(才器)와 학술(學術)로 사우(師友)간에 추앙하여 존경함을 받으셨으며,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선생과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선생과는 가장 젊은 벗으로서 제일 가깝게 의리로 사귀었다. 연산 신유(燕山 辛酉 1501)년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장원하시고, 같은 해 23인 중 장원(壯元)으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승정원 주서(承政院主書), 봉상시 주부(奉嘗寺主簿)를 거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뽑혀 동학교수(東學敎授)와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지제교(知製敎)를 겸(兼)하셨다.
연산 무오(戊午 1489)년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온 집안이 귀양 가는 화(禍)를 당하였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에 종조부(從祖父)이신 좌의정공(左議政公 諱 克均)과 부친이신 광양군(廣陽君 諱 世佐) 형제(兄弟)가 참형을 당하시고, 5월 13일 公의 4형제가 다 함께 참형(斬刑)을 당하시니 향년 28세이셨다. 이때 公의 큰 아들 윤경(潤慶 崇德齋公)은 7세이셨고, 둘째 아들 준경(浚慶 東皐相公)은 6세로 충북 괴산 청안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설원(雪冤)되어, 도승지 겸 홍문관 부제학(都承旨兼弘文館副提學)에 증직(贈職)되셨고, 명종조(明宗朝)에 이르러 둘째 아드님 동고상공 휘 준경(東皐相公 諱 浚慶)의 현달(顯達)로, 영의정 겸 세자사((領議政兼世子師)의 증직(贈職)을 더 하셨다. 묘는 양근 용진면 목율동 차항 경좌(楊根龍津面木栗洞車項庚坐 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78 - 2)이다.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상서원 판관(常瑞院判官) 승연(諱 承演)의 따님이시며, 좌의정 자수(左議政自守)의 증손녀이신데, 아름답고 뛰어난 덕(德)이 있어,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킴으로써, 국가에 크게 공헌한 인재를 배출시킨 모범적인 어머니로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항상 이르기를 ⌜과부의 자식은 남이 더불어 사귀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으니, 반드시 학문에 열 갑절을 더 부지런히 하여서 너의 집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라⌟ 하였다. 성종 경자(更子 1480)년에 탄생하시어, 중종 갑신(甲申 1524)년 1월 25일 서거(逝去)하시니, 향년 45세로 公과 합장(合葬)하였으며 슬하에 2남을 두시었다.
장자(長子)는 자(字)가 중길(重吉)이요. 휘(諱)는 윤경(潤慶)이시며, 호(號)가 숭덕재(崇德齋)이신데, 연산 무오(戊午 1498)년 11월 12일 한성 연화방(漢城蓮化坊)에서 탄생하시어, 재주와 덕망이 어린나이에 비하여 일찍 성숙하시고,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에 있어, 하늘이 내신 분으로 도탑고 절실한 마음을 지니시어, 정성스러우셨다. 7세이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아버님이 피화(被禍)를 당하신 후, 괴산(槐山)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시어, 중종 신묘(辛卯 1531)년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시고, 그 후 3년만인 갑오(甲午 1534)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시어, 한림설서(翰林設書)와 남상(南牀)․전랑銓郞)․삼사옥당(三司玉堂)․지제교(知製敎)를 두루 역임하시고, 대사간(大司諫)과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호남(湖南)․경기(京畿)․관북(關北)․관서(關西) 네 지방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내시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셨다. 명종 임술(壬戌 1562)년 8월 10일 관서지방(關西地方)의 각 진영(陣營)을 순행(巡行)하시다가, 임소(任所 公館)에서 향년 65세로 서거(逝去)하시니, 조정(朝廷)에서 관리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고, 시호(諡號)를 정헌(正獻)이라 내렸다. 公이 을묘(乙卯 1555)년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어, 호남의 왜변(倭變)을 당할 때, 영암성(靈巖城)을 지켜 전승(戰勝)을 올렸으니, 이름이 나타나 역사에 밝혀져 있다. 유고(遺稿)가 있고, 묘는 양평군 양서면 고요동이며, 아우 되시는 시충정공(諡忠正公) 동고상공 휘 준경(東皐相公 諱 浚慶)께서 행장(行狀)을 지으시고, 문간공(文簡公) 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이 지으신 신도비문(神道碑文)이 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 고령신씨(貞敬夫人 高靈申氏)이고 4자 4녀를 두셨는데, 장(長)은 중열(中悅), 차(次)는 숙열(淑悅), 다음은 계열(繼悅), 다음은 서열(庶悅)이고, 여(女)는 유기(柳沂), 윤해(尹海), 송응기(宋應期), 송응서(宋應瑞)에게 각각 출가(出嫁)하였다
차자(次子)의 자(字)는 원길(原吉)이시고 호(號)가 동고(東皐)이시며 휘(諱)는 준경(浚慶)이시다.
2) 묘갈명(墓碣銘)
부수찬증영의정공묘갈음기 국역 (副修撰贈領議政公墓碣陰記 國譯)
李公의 자(字)는 간중(幹仲)이요. 휘(諱)는 수정(守貞)이요. 호(號)는 정재(貞齋) 또는 소한재(素寒齋)인데, 광주인(廣州人)으로서 고려말(高麗末) 집(集)의 후손(後孫)이다. 증조(曾祖)는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시충희공(諡忠僖公) 인손(仁孫)이요. 조(祖)는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광성군(廣城君) 시문경공(諡文景公) 극감(克堪)이요. 고(考)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광양군(廣陽君) 세좌(世佐)이며,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양주조씨(楊州趙氏)인데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근(瑾)의 따님이시다. 공은 성종 8년 정유(丁酉 1477)년 5월 6일에 탄생(誕生)하시어, 사마양시(司馬兩試)에 장원(壯元)하셨고, 연산 7년 신유(辛酉 1501)에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직되어, 승문원 주서(承文院注書)와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를 거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이르렀다가,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와 동학교수(東學敎授)에 보직되셨다. 연산 10년 갑자(甲子 1504) 연산주(燕山主)의 광란(狂亂)으로 광양군(廣陽君)께서 폐비(廢妃)에게 사약(賜藥)을 전한 것이 화근이 되어 내벽(內壁 임금의 총애를 받는 여자)의 재구(讒口 남을 헐뜯어 꾸며서 말함)에 걸려들었고, 임사홍(任士洪)이 제 마음대로 다스려 집안 전체가 큰 화(禍)를 입게 되었다. 그때 공의 나의 겨우 28세였다. 중종(中宗)께서 반정(反正)으로 원유(寃幽)를 밝혀 씻어 주시고, 도승지 겸 부제학(都承旨兼副提學)으로 증작(贈爵)하였다. 그리고 후일(後日) 자귀(子貴)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찬성(贊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배 정경부인(配貞敬夫人) 평산신씨(平山申氏)는 판관 신승연(判官申承演)의 따님으로, 현덕(賢德)이 있어 두 아들을 명현(明賢)으로 가르치시니, 숭덕재(崇德齋)와 동고(東皐) 두 선생이시다. 갑자(甲子 1504)년 5월 13일 사화(士禍)에 公의 부자형제(父子兄弟)․숙질(叔姪)이 동시(同時)에 피화(被禍)되고, 가옥(家屋)이 파괴(破壞)되고 사람이 죽었으나,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참폭(慘暴)한 현장(現場)을 판관공(判官公)께서 구서지의리(舅婿之義理 장인과 사위간의 의리)로 수찬공(修撰公) 시신(屍身)을 수급(收給)하여 자기집안 세장산(世葬山)에 안장(安葬)했으니, 그 은혜(恩惠) 가 하해(河海)보다 깊도다. 불초(不肖) 명익(命益)이 수찬공묘(修撰公墓)에 성묘(省墓)했을 때, 평산신씨(平山申氏)들 선영(先塋)이 좌우(左右)에 보이고, 가운데 수찬공묘(修撰公墓)가 있어 살펴보니, 청용백호(靑龍白虎)가 둘러쌓여 혈(穴)이 분명(分明)하게 맺혀있고, 앞에 일자문성(一字文星)으로 안산(案山)이 받혀있어 명당(明堂)이 분명했다. 그러나 판관공(判官公)께서 그 당시 사태를 볼 때 구서지간(舅婿之間)의 정(情)을 특별히 표현(表現)할 수도 없었을 텐데, 그 옥쇄란분(玉碎蘭焚 충절을 위하여 깨끗하게 죽는 다는 뜻)을 몹시 사랑한 나머지 묘(墓)자리를 선정(選定) 수장(收葬)하기로 결심(決心)했으니, 그 의기(義氣)를 매우 높이 평가(評價)할 것이다. 삼가 살피건데, 충정공(忠正公)께서 정헌공(正獻公 형님이신 숭덕재공) 제사(祭祀)때 글을 보면, 「외가(外家)에서 양육(養育)한지 3주년(三周年)이 되었고, 천일(天日)을 보고 돌아와서, 외왕부(外王父)곁에서 함께 자라면서 함께 배우고 함께 은조(恩照)를 입었다. 머리를 어루만지며 부지런히 학업(學業) 이루기를 기약했으며, 외왕부(外王父)를 모시고 상주(尙州)에 수임(隨任)했다」고 했으니, 복소(覆巢 새집을 엎어 알을 깨트린다는 뜻인데 여기에선 아버지의 불행 때문에 아들까지 상한다는 뜻)를 당한 끝에 신근(辛勤)히 길러주시어, 성립(成立)하여 국가주석(國家柱石)이 되었고, 자손(子孫)이 번창(繁昌)하여 과갑(科甲)이 상연(相連)하니, 용진(龍진)국내에 이가(李家)의 세장지(世葬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관공(判官公) 큰 아들 직장공(直長公)의 성손(姓孫)이 없어, 충정공(忠正公)께서 입후(立後)하셨다는데, 지금은 그 대(代)를 이을 사람이 없어 잡초(雜草)에 묻혀 있다. 갑자(甲子)년 봄에 정헌공묘(正獻公墓) 가토(加土)할 때 불초 명익(不肖命益), 제 명택(弟命宅), 종제 명일(從弟命一), 족종제 문연(族從弟文淵), 신연(梓淵)등과 판관공(判官公) 묘소(墓所)에 먼저 손질한 것이 영구히 잊지 못할 의리(義理) 때문이다. 우리 수찬공(修撰公) 자손(子孫)들은 모두 판관공(判官公) 묘산(墓山)을 수호(守護)하는 절조(節操)를 힘써 주기 바라노라.
계미(癸未 영조 39년 1763) 추석일
8대 현손 명익(八代玄孫 命益) 근기
외 선조(外先祖) 판관 부군묘(判官府君墓)를 평산신씨(平山申氏) 대표(代表)들과 우리 숭․동 양종회(崇⋅東兩宗會) 합의하(合議下)에 2002년 6월 15일 양서면 목왕리 78의 2번지 우리 세종산(世宗山) 경내(境內)로 이장(移葬)하였으며, 매년 정재공(貞齋公) 시제일(時祭日)에 참사(參祀)한 제관(祭官) 전원(全員)이 성묘(省墓)하기로 하였다. 본문은 광리 대동보(廣李大同譜)에 의거 기록하였다.
갑신(甲申) 2004년 4월 12일
숭․동양종회(崇⋅東兩宗會) 추기 근견
2) 일화(逸話)
○ 사실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켜 국가에 크게 공헌한 인재를 배출시킨 모범적인 어머니들을 우리는 수많이 찾아볼 수 가 있는 것이다. 가령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 신씨, 김만중의 어머니 윤씨, 이준경의 어머니 신씨, 한석봉의 어머니 등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우리는 다음에 이준경(1499 ~ 1572)의 어머니 신씨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신씨는 제11대 중종 때의 사람으로 부수찬(副修撰) 이수정(李守貞)의 부인이었다. 신씨는 그 아들 이준경(李浚慶)의 나이 다섯 살 때에 이미 “소학(小學)”을 가르쳤는데, 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집안이 화(禍)를 입고, 충청도(忠淸道) 괴산(槐山)에서 유배(流配)생활을 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유배생활에서 풀려 서울에 돌아왔으나, 남편은 죽고 집안은 완전히 몰락한 뒤였다. 신씨는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아들의 나이 10살이 되자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때 신씨가 직접교육을 담당했는데 매우 엄격하였다. 신씨는 “효경(孝經)” “대학(大學)“ 등의 유학경전(儒學經典)을 모두 친히 가르쳐 조금이라도 틀린 곳이 있으면 준절히 꾸짖으며, 학문과 인격수양에 게으름이 없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이준경은 뒤에 인신(人臣)으로서는 최고(最高)의 관직(官職)인 영의정(領議政)에 까지 올랐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씨가 아들에게 소학, 대학, 효경 등의 유학경전을 친히 가르치고 그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녀 자신의 학문적인 깊이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여성사)
○ 이준경(李浚慶)의 어머니는 남편(男便)과 지위(地位)와 재물(財物)을 다 뺏기고 귀양살이에서도 오로지 아들들의 교육을 위해서 온갖 서러움과 고난을 극복해 내었다.
(한국사회교육연구원 주부교실)
○ 묘지수호(墓地守護)
수찬부군(修撰府君) 부자(父子)⋅형제(兄弟)⋅숙질(叔侄) 9인이 동시(同時)에 혹화(酷禍)를 당하고 불쌍한 다박머리와 더벅머리의 어리고 약한 사람까지 귀양 가게 되고, 집은 깨지고 사람은 없어져도 감히 돌봐주지 못하는 터에, 신 판관 부군(申判官府君)은 장인과 사위간의 의리(義理)로 밤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사형장(死刑場)에 버려져 있는 시체를 수습(收拾)하였다. 그리고 다시 묘소(墓所) 터를 택해서, 자기 집 세장지(世葬地)인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편안하게 장사지냈다. 이 묘소는 신씨의 묘소와 딴 등성이에 있으나, 청룡백호가 둘러쌓여 혈(穴)자리가 분명하게 맺혀있고, 맞은 바래기에 일자(一字)모양의 안산(案山)이 빗겨있어, 명당(明堂)이 펀펀하고 아름다워서 풍수인(風水人)들이 일컫기를 괘등형(掛燈形)이라고 한다. 또한 숭덕재 형제(崇德齋兄弟)가 귀양 갔다가 돌아와서는 오갈 데가 없었는데, 외조부(外祖父)께서 데리고 사시면서 머리를 어루만져 사랑하고 귀여워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때 형제(兄弟)는 외조부(外祖父)의 가르침을 받아 학업(學業)과 사업(事業)이 성공할 것을 기필하겠다는 맹세로, 복소(復巢)의 나머지를 거두어, 극히 애써서 근로(勤勞)하고 어린사람을 사랑하여 길러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 국가의 주석(柱石)이 되고, 자손(子孫)이 번창하여 과거(科擧)에 계속 급제하므로 양서면 목왕리의 구역(區域)이 드디어 이가(李家)의 세장지(世葬地)가 되었다. 외조부 판관 휘(諱) 승연(承演)께서는 두 외손(外孫)에 대한 재능(才能)과 도량(度量)을 기이하게 여기시어 따님에게 부탁하기를 ⌜이 아이들은 현명(賢明)하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아이여서, 종당(從當)에는 일세(一世)에 저명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될 터이니, 네가 조심하여 잘 보호 하여라⌟하셨고, 정경부인 신씨(貞敬夫人 申氏)께서는 효경⋅대학을 가르쳐 말하되 ⌜과부의 자식은 남이 더불어 사귀지 않는다는 옛글이 있으니, 반드시 학문에 열 갑절을 더 부지런히 하여서, 너의 집 명성(名聲)을 떨어뜨리지 말라⌟하셨다. 신판관공(申判官公)께서는 아들 직장공(直長公)이 무후(無后)되어 代를 잇지 못하여 양대(兩代 신판관 부자분) 묘소가 실전(失傳)되었다. 이를 애석하게 여기신 숭덕재⋅동고 양 문중(兩門中)의 후손들이 외선조(外先祖 申判官公) 묘소를 찾으려고 백방(百方)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신사(辛巳 2001)년 정월에 양문중[兩門中 평산 신씨와 광이(廣李)]의 꾸준한 탐사 끝에 묘소를 찾아, 양서면 목왕리 산 78-2번지, 우리 세장산 경내 수찬공(修撰公 諱 守貞)묘소 右別岡에 萬年幽宅으로 천묘(遷墓)하여, 매년 수찬공 시제일에 참가한 제관이 성묘(省墓)함으로써, 판관공(判官公)의 의리(義理)에 보답하고 수호(守護)하고 있다.
○ 구정골의 유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는 두메산골이 되어 나무가 많으므로 무왕굴 또는 목왕동이라 하였는데, 이곳은 용문산맥 청계산 목왕리 계곡으로, 조선조 때 정승(政丞) 아홉 명(九人)의 묘(墓)가 있다 하여 구정골이라 부르며, 이곳에 유택(幽宅)을 두신 분은 영의정 증직 수찬공 이수정(李守貞), 영의정 증직 지사공 이민성(李敏聖), 영의정 충정공 이준경(李浚慶), 영의정 문익공 이덕형(李德馨), 좌의정 익원공 김사형(金士衡), 좌의정 증직 제청공 신효창(申孝昌), 영의정 충정공 정창손(鄭昌孫), 좌의정 문충공 민희(閔熙), 우의정 민암(閔睦)이다. (양평군지)
우리 광주 이문(廣州李門)에서는 이 구정골에 영의정 증직 휘 수정(忠正公의 父), 영의정 충정공 휘 준경, 영의정 증직 지사공 휘 민성(문익공의 부), 영의정 문익공 휘 덕형 등 네 분의 유택이 있으며, 병조판서 숭덕재 윤경(潤慶 충정공 동고상공의 형님)의 유택도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