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무예를 재현한 모습
출처 :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1202760
한교(韓嶠, 1556년 ~ 1627년)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사앙, 호는 동담, 본관은 청주이다.
직장 한수운의 아들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사재감 참봉, 예빈시 주부, 군자감 판관, 죽산 현감과 의흥 현감을 역임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낭청이 되어 중국의 전략서 《기효신서》를 주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공헌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서원군에 봉해졌다. 첨절제사와 고성 군수를 지내고 참판에 이르렀다.
문집에 《동담집》, 편서에 《소학속편》 《가례보주》 《사칠도설》 《홍범연의》 《군인요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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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 유독 인구에 회자되는 이들이 있다. 내 몸에 기록된 한교(韓嶠)*란 인물 또한 그렇다. 유학자로서는 드물게 병학에 밝았던 그는 죽기 얼마 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후금의 공격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충언을 자신이 직접 그린 상세한 진법과 함께 올린 상소였으나 고희를 훌쩍 넘긴 그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관료는 없었다. 노학자의 경고를 어긴 대가는 끔찍했다. 그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후금은 국경을 넘었다. 적의 파죽지세에 당황한 인조는 앞뒤 잴 것 없이 서둘러 강화도로 피신하면서 세자 또한 전주로 보냄으로써 목숨 구걸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발 빠름을 만방에 알렸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후금이 조선을 집어삼킬 의도 따위는 손톱만큼도 갖고 있지 않아서 그저 형제처럼 지내겠다는 형식적인 화약을 맺는데 만족했다는 사실이다. 결과야 어찌되었건 훗날 정묘호란이라 불리는 사태가 일견 진정된 것처럼 보이자 사람들은 그제야 너나할 것 없이 한교의 상소를 떠올리게 되었다. 덕분에 그의 장례는 제법 볼만한 것이 되었다. 인조는 호란으로 미뤄졌던 그의 장례에 관리까지 파견함으로써 그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유난히 부침이 심한 생을 살았던 그로서는 무덤 속에서나마 웃음을 지었을 터.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전쟁을 예언한 그의 신통방통함만 주목했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제시했던 전쟁 방비책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또 한 차례의 호란으로 나라 전체가 비틀거리게 된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의 죽음을 전후해 대책 없는 희비극 한판이 벌어진 셈이었으나 기실 이런 종류의 희비극은 그의 생애 내내 벌어졌던 것이기도 했다. 그 최초의 판은 물론 그의 탄생과 함께 벌려졌다. 한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한명회의 5대손으로 세상에 태어났던 그의 탐스런 엉덩이에는 서얼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사족처럼 붙어 있었던 것. 제 손으로는 결코 뗄 수 없는 꼬리표라는 사실을 재빠르게 알아차린 그는 하늘을 보며 웃음 한 번을 터뜨리고는 이내 어미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육신의 허기를 채웠다. 후대에 비하면 서얼에 대한 차별이 그나마 덜했던 시절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의지의 인간
영민했던 그는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고 이내 동학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임으로써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이의 수제자라 할 김장생과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학문이 예사롭지 않았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꼬리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의 꼬리표를 들추어냈고 그때마다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바지춤을 단속함으로써 그리 자랑스러울 것 없는 꼬리표를 가려야만 했다. 그러나 남아로 태어나 평생 바지춤만 잡고 살 수는 없는 일. 영민한 그는 의지의 인간이기도 했다. 남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함으로써 오점을 극복하겠다는 그의 가상한 노력은 그를 천문, 지리, 복서, 병학의 대가로 만들어 놓기에 이른다. 대가 운운하니 그럴듯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를 대가로 인정하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머리에 갓 쓴 이들에게 잡학이란 없어도 그만인, 혹은 심심파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대개는 그의 예외적인 성취를 듣고도 흥, 하고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사태가 바뀐 것은 왜란이 발발하면서부터였다. 평생을 유유자적하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아갈 것 같던 사대부들은 난데없는 오랑캐의 침입에 어찌할 바를 몰라 정신 나간 수탉처럼 발만 동동 구르다가 급기야는 하늘처럼 떠받들던 명나라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하러 온 대국 명나라는 과연 달랐다. 패배라고는 몰랐던 일본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에 대패하는 것을 본 조선은 감탄에 놀란 입을 간신히 닫고는 명나라의 병법을 배워야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다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결론을 내린다. 신기에 가깝게 보였던 이여송의 병법이 실은 『기효신서(紀效新書)』라는 병법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조선은 재빨리 손을 써 『기효신서』 입수에 성공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기효신서』는 분량만도 18권에 이르는 거질이어서 도통 무엇부터 손을 대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문장 또한 절강 사투리로 되어 있어 정확히 무얼 말하고 있는지 감 잡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무예를 설명하면서 정지 동작 그림 하나만 그려놓아 실제 연속 동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예 파악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위기에 봉착한 눈먼 장님들이 떠올린 이가 바로 그, 한교였다.
그를 책임자로 뽑은 것은 전쟁 통에 도통 찾기 어려웠던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이후 그의 행보로 증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잡학에 능한 줄만 알았지 보기 드문 끈기 또한 소유하고 있음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간 갈고 닦았던 병법 지식을 바탕으로 대략의 번역을 마친 그는 명나라 유격장군 허국위를 물고 늘어졌다. 자신과는 하등 관계없는 전쟁에 지쳐 하루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허국위였으니 그를 반겼을 리가 없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수차례의 헛걸음 끝에 마침내 허국위를 초빙하는데 성공했다. 내키지 않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형식적으로 병법 시범을 보인 허국위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완전한 오판이었다. 그는 간청, 혹은 읍소로 허국위를 물고 늘어졌고 마침내 허국위는 그 집요함 앞에 다음과 같은 탄식을 내뱉으며 자신의 지식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조선의 안위가 어떠할지 알지 못하고 우리의 군사들은 언제 돌아갈지 알지 못하니 먹는 것이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으며 오직 목침을 어루만지며 긴 탄식을 할 뿐이다. 그런데 병기에 대하여 거듭 물어오니 할 수 없이 대답하게 된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조선은 마침내 조총병인 포수와 근접전 전문 병사인 살수를 갖춘 정예군대를 갖추게 되었고, 그 또한 군자감 판관으로 승진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러나 그의 탄생부터 함께 했던 희비극이 이러한 결정적인 시기에 그를 외면할 수는 없을 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어렵사리 맡은 관직을 내놓아야만 했다. 자칫 싱거울 수도 있었을 희비극에 극적 효과를 더한 것은 바로 선조였다.
"『기효신서』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익혔다는 말을 듣고 저번에 그로 하여금 번역해 내는 일을 전담시켰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가 병환으로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그가 맡았던 병서를 번역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만큼 모두 알아서 잘 편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기복(起復)시키고 급료(給料)를 주어서 그 일을 마치게 하소서."
희극과 비극을 오가다
부모상을 치르는 대신 관직에 나가게 하라는 요청을 받은 선조는 지체 없이 수용함으로써 그러서는 무척이나 예외였을 실용적인 모습을 보인다. 임금의 명령까지 내렸으니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후 몇 년 간 그가 보인 성취는 자못 놀라웠다. 집요한 그는 단순히 『기효신서』를 번역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기효신서』의 원론적인 내용을 보기 좋게 요약해 『기효신서절요』를 만들었고, 군사 조련과 진법에 대한 내용만을 추려 『조련도식』을 만들었으며, 곤, 등패, 낭선, 장창, 당파, 검 등 여섯 가지의 무기를 이용한 무예를 담은 『무예제보』를 만들었다. 세 종류의 병서를 완성한 뒤에야 그는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국가를 위해 부모상까지 미루었으니 실로 백번을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터.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의 인생은 희비극의 반복이었다. 귀향하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입을 삐죽거리는 이들이 적잖았다는 사실은 그의 희비극이 여간해서는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나 다름없었다. 사관은 그 삐죽거림을 냉정한 문투로 정리해낸다.
"자식이 부모의 상중에 있을 때 임금의 명령이 3년 동안 그 집에 이르지 않는 것은 천하 사람들에게 효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자신이 안위(安危)의 기관을 맡고 있어 국가의 경중(輕重)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본디 예법을 멸절하고 윤기(倫紀)를 무너뜨려 천하 만세에 죄를 얻게 해서는 안 되는데, 기타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자신에 대한 수군거림이 있다는 것은 눈치 챘겠으나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는 그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상을 마치고 관직에 복귀한 그는 훗날 후금으로 결집할 여진에 대한 공격을 제안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자 한다. 그나 내세운 전법은 뜻밖에도 전차를 중심에 내세운 것이었다. 『연병지남』이라는 새로운 병서까지 들고 와 목소리를 높였으나 이미 왜란은 끝이 난 뒤였다. 잠재적인 적에 대한 방어책이라는 것은 일상으로 돌아온 갓 쓴 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산악 지형이 대부분인 조선에는 맞지 않는다는 반론으로 지나치게 열정적인 그를 무마하려 들었으나 실상 그 뒤에 숨은 진짜 목소리는 ‘미천한 서얼의 주장을 무엇 하러 받아들이겠느냐’하는 것이었다. 한 꺼풀 더 벗겨보면 ‘부모상도 제때 치루지 못한 불효막심한 서얼의 말을’ 하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을 테고.
비극은 결코 홀로 오지 않는 법이다. 대북파가 서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계축옥사가 한창이던 때 갑작스럽게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전 현감 한교는 서얼의 아들로서 마음 씀씀이가 형편없고 행동이 괴상망측하기만 한데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급하게 여긴 나머지 자기 아비의 이름까지 멋대로 바꿨으므로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는 자가 없으니 나국을 명하소서."
광해군의 동생인 영창대군, 영창대군의 장인인 김제남, 박순의 서자 박응서 같은 거물급 사이에 한교의 이름이 끼어든 것이다. 누가 봐도 관련 없는 그를 끼워놓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상황 속에서 병법을 잘 아는 그와 같은 인물은 자칫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별다른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유배 길에 오른다. 그 뒤로도 그의 인생은 희극과 비극을 오가지만 전체적으로는 내리막길이었다. 인조반정에 참여해 공신이 되었다가 이괄의 난을 막지 못한 까닭에 백의종군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반란군이 국왕으로 옹립했던 흥안군을 잡는데 기여해 복직이 되었다가 아비 이름을 멋대로 바꾸었다는 옛 논란이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되살아나는 바람에 다시 파직되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그러니 죽음을 앞둔 상소와 호란의 발발로 인한 극적인 반전은 그의 인생행로를 돌이켜볼 때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해외에 치우쳐 있는 곳이라 예부터 전하는 것은 다만 궁시(弓矢) 한 가지 기예만 있고 칼과 창은 헛되이 기기만 있지 익히고 쓰는 법은 없다...... 이 때문에 왜적과 대진할 때 왜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해 오면 우리 군사들은 비록 창을 차고 칼을 차고 있어도 칼은 칼집에서 뽑을 시간이 없고, 창은 서로 겨루어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인 채 흉악한 왜적의 칼날에 꺾인다."
이 치열한 문장들이 실은 그의 인생에 대한 참담한 회고문처럼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병법 연구에 몰두했던 그의 삶이 내게는 병법희비극이라는 괴이한 연희(演戱)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어인 까닭일까? 아무렴 어떠랴. 결국 그가 있었기에 내가 태어났으니 칼을 높이 들어 감사하면 그것으로 족할 뿐. 그것이 병법서로 살아갈 내가 취할 자세가 아니겠는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해설
1790년(정조 14) 4월 29일자 실록에는 무예도보통지의 완성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다.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무예에 관한 여러 가지 책에 실린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등 여섯 가지 기예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나왔는데, 선조 때 훈련도감 낭청 한교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에 출정한 중국 장수들에게 두루 물어 찬보를 만들어 출간하였고......"
『무예도보통지』가 한교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천명한 장면이다. 『무예도보통지』 범례는 한교와의 연관성을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한교의 무예제보는 6기(技)를 한 권으로 엮었는데 이것에다 앞뒤에 증보하여 총24기로 늘이고 책 이름을 『무예도보통지』라 하였다."
무예도보통지의 출간에 관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덕무, 박제가, 그리고 백동수를 들 수 있다. 검서관이었던 이덕무와 박제가는 책의 편집을 맡았고 장용영 초관 백동수는 기예를 직접 시험해보는 역할을 맡았다.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모두 서얼이라는 사실이 세삼 눈길을 끈다. 한교의 후예라 불러 마땅할 그들의 소회는 어떠했을까? 이덕무의 글을 통해 그들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책이 거의 완성되자 상께서 칭찬하기를 ‘근래 편서(編書)가 많으나 그 범례와 체제 및 조각의 자획이 이 책만 한 것이 없다.’ 하고 그 판(版)에 기름을 먹여 오래 전해지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실록에 실려 있는 마지막 문장이다.
"장용영에서 인쇄하여 올리고 각 군영에 반포한 다음 또 1건은 서원군(西原君) 한교의 봉사손(奉祀孫)에게 보냈다."
희비극을 넘나들었던 한교의 인생은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 한교에 대한 지식은 이민희가 지은『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글항아리)을 통해 얻었다.
- 설흔(『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공저)』,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 저자)
- 출처 : 기획회의 296호(2011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