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보조추천 0조회 99321.03.19 09:59
[2021 cpbc 사순특강] 4회 - 성경이 말하는 회개의 파스카 |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53:30)
+ 찬미예수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라고 합니다.
이번 pbc 강의에 네 번째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강의의 시작 기도를 사순 제 4주일 복음에서
발췌하는 것으로 기도를 하고자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세상 해 보내시어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사순시기는 모두 여섯 개의 주일을
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사순 제 4주일을 일반적으로 '기쁨의 주일이다.' 라고
이야기 하기도 하는데요,
사순시기의 절정에 이르렀다 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사순시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 우리가 구원을 준비하고
구원을 맞이하는 그런 기쁨의 시간이라는 그런 아주 본질적인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신 이 요한복음에서도 그 기쁨의 이유를
아주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미 16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다는 거.
그래서 인간의 힘만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또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외아들을 보내주셨다라는 거.
그리고 그분이 구세주로 오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살게 되었다라는 거.
예, 이런 기쁨을 전달하고 있구요.
이 기쁨은 이미 입당송에서부터도 잘 제시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는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라고 이미 전례가 시작되면서부터도 기쁨의 환호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제 1독서는요, 이 기쁨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 시작이 사실은 조금 주목해 볼만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이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였다.
주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서 성별하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다."(2역대 36,14)
이런 고발로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배신하였다고 하는데
모든 지도사제와 또 백성들이 하느님을 배신하였고
또 하느님께서 특별히 축성하신 당신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이런 어떤 고발 다음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그 유배에서 유배의 땅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그 칙령을 페르시아의 왕 키로스가 이제 내게 되죠.
그래서 이제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 된다라는 건데 이런 배신과,
이런 뭐라고 할까요?
불충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약속에 성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 계약을 인간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성실함을 꾸준히 유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해방하셨다 라는 내용을 제 1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거 또한 우리가 어떻게 왜, 그리고 기뻐할 수밖에 없는지
이런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있는 본문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2독서도 우리의 기쁨을 잘 얘기해 주고 있죠.
"형제 여러분,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에페 2,4-5)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때문에 구원 받을 수 있다 라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사순 4주일의 어떤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 저는요, 제 강의를 이렇게 진행하려고 합니다.
사순시기 때 이렇게 많이 언급되어지고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들이 있습니다.
이 주제들을 성경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다시 한번 좀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사순시기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러므로 사순시기에 자주 언급된다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관통하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준비한 주제는 '회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앎', '광야',
'파스카', 그리고 '거룩함', 뭐 이 정도의 어떤 내용이 되겠습니다.
예, 그래서 이제부터 하나하나 그 주제들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회개'에 대한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제 사실 사순시기 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이 회개의 시기라는 거죠.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제 그런 생각을 하시죠.
'회개' 이러면 뭔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뭔가 나의 행위가
변화되는 거, 이런 것을 '회개' 라고 생각하시면서 이제
"다시는 거짓말 안 할 거야. 다시는 싸우지 않을 거야. 다시는 죄짓지 않을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시게 되는데 다시는 뭐 뭐 하지 않겠다 라는 말을
늘 다시 하고 계시죠.
예, 다시는 뭐 뭐 하지 않겠다 라는 것의 그 다짐의 공허함과 무력감을
잘 알고 계실겁니다. 회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어떤 것을 하지
않겠다 라는 다짐이 아니라 인식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될 개념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것은 한국말로 '회개' 라고 번역한 그리스 말을 살펴보실 때
좀 더 분명하게 아실 수 있는데요.
'회개'를 그리스 말로 '메타노이아'(Metanoia) 라고 이야기 합니다.
'메타(meta)'라는 그리스말 전치사와 '노이아(noia)'라는 명사가 합성된 단어인데요.
노이아라는 이 명사는 '노에오(voew)'라는 동사에서 파생됩니다.
이 '노이아'라는 동사는 '알다, 인식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영어에 '노우(know)'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뭐 뭐를 '알다' 이럴 때 '노우'라는 단어를 쓰잖아요, 영어에서요.
그래서 이 '노에오'라는 희랍어에서 영어의 '노우'라는 동사가 파생이 됐는데요.
이제 무엇을 알고 인식하는 겁니다.
예, 이전까지 잘 몰랐었던 것을 이제 알게 됨으로써 이제 나의 인식이
굉장히 달라지는 거, 이것을 '회개'라고 이야기 하기 때문에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칼 라너(1904-1984) 같은 분은 회개를
"인식 지평의 확대"라고 정의한 바가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내용이 굉장히 넓어지는 것, 그게 이제
그 '회개'라고 볼 수 있다는 건데요,
여러분들 이런 경우가 있으실 것 같아요.
잘 모르기 때문에 늘 의심하고 불안해 하고 그래서 뭔가 다른 왜곡으로
점차 더 깊어지고 그래서 점차적으로 사실과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매여 있는 이런 것들이 우리 주변에서 굉장히 잘 일어나는
종종 일어나는 그런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았을 때 '아,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나에 대해서 뭔가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분이었구나.'
이런 것들을 알았을 때 이제 우리가 그 매임에서 풀려나고
구원되고 해방되는 그런 체험들을 하신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죄를 뭐라고 이렇게 규정하냐면
하느님에 대한 앎의 부족, 쉽게 말해서 하느님을 왜곡하고 의심한 것이
죄의 시작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창조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그 다음에 이제 우리가 다뤄야 할
굉장히 많은 주제들이 있거든요.
사랑도 있고 정의도 있고 평화eh 있고 여러가지가 있는데
성서는 바로 '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부터 최초의 인간들이 저질렀던 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의 아들들, 카인과 아벨의 죄 이야기, 노아의 홍수도 사실은
죄 때문에 이루어진 사건이었고 나중에 바벨탑의 이야기까지,
즉 아브라함이, 성조라고 이야기 하는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창조 다음에 꾸준히 다루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근데 그 죄 이야기에서 그 이제 원조들의 죄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데
그 때 죄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에 대한 왜곡으로 시작이 되는데
하느님께서는 에덴 동산의 모든 먹을 것들을 다 먹으라고 하셨어요.
다만 그 동산의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만은 먹지 말라.
이렇게 얘기를 하셨는데 뱀이 뭐라고 왜곡을 하냐면 여기 있는 거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하셨다며? 이렇게 왜곡을 하죠.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롭고 사랑이 풍부하신 그분을
아무것도 못 먹게 하는 굉장히 편협하고 인색한 그런 분으로 왜곡하면서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 왜곡에 휘말렸다고 할까요?
예, 그러면서 이제 인류의 첫 조상들이 죄를 짓게 되죠.
예, '앎'이 부족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죄에 빠지게 되는지,
죄의 상황에 매이게 되는지, 예, 그런 것들을 아시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엇인가를 새롭게 '안다' 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면 뭘 아는 것일까요?
예,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 라는 거,
그리고 '우리 옆에서 함께 동반하신다.'라는 거,
그리고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셨다라는 거,
그래서 그런 목숨을 내어 주시는 그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영원히 살게 되었다 라는 거,
이런 것들을 알게 되는 것, 이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뭔가 이렇게 무엇을 알아야지만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좀 더 엄밀히 말한다면
이제 알게 됨으로써 '저절로 동반되는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되어지는 것,
이것이 '회개'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그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 '고백록'에서 하셨던
그 내용을 좀 가져와 봤습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이죠.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임께서는 제 안에 계셨거늘 저는 밖에 있었고
밖에서 임을 찾으며 임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피조물 속에
일그러진 저를 내던졌습니다.
임께서는 저와 함께 계셨지만 저는 임과 함께 있지 아니 하였습니다."
예,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주변에 계신 그분을
찾기 위해서 이제 얼마나 그 바깥에서 그런 노력을 했는지를 고백하고 계시고
하지만 이제 그 분께서 늘 저와 그 분과 함께 계셨다라는 그런 것을
이제 알겠다 라고 고백하는 그런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회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시면서
우리와 동반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회개'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히 이제
'앎'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회개'는 "인식 지평의 확대다."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이렇게 새롭게 알게 된다 라는 건데요.
이제 우리의 '앎'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이제 하느님에 대한 '앎'이
넓어진다라는 이제 그런 것이 되겠죠.
하느님에 대한 '앎'이라는 것이 곧 '신론'이고,
신학의 모든 활동의 내용이다 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 왜곡이 얼마나 우리를 이렇게 메이지 하는지
그런 부분들 말씀을 드렸고요.
그래서 하느님을, 하느님의 선의를 의심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것,
이것이 죄의 본질이고요, 그래서 마태오 복음 12장 31절,
또 마르코 복음 3장 29절, 이런데 보면요,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하느님을 왜곡하는 것, 그분을 믿지 못해서
이런 것은 곧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서 용서 받을 수 없다.
이런 얘기까지 나와 있는데요.
사실 성경 전체는 하느님에 대한 앎을 전해주고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창세기에서부터도 창세기 1장 1절이 이렇게 시작이 되거든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이제 한국말 번역에서는 맨 처음에 하느님께서 뭐와 뭐와 뭐를
이렇게 해서 창조하셨다 이렇게 되어 있지만
히브리 말 문장은 워낙 그 동사가 먼저 등장하기 때문에 '한 처음에'라는
부사를 뺀다면 '창조하셨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책이 성경입니다.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되어 있는 거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라는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한 그런 내용이 될 수 있는데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어떤 조건들, 환경들, 또 모든 사건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느님과 반대되어서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조건이라는 거죠.
창세기 1장은 사실은 이스라엘에 유배를 갔을 때, 그 뭐라고 할까요?
남의 나라 땅에서 유배를 거치면서 매우 고통스럽고 그 고난의 역경의 삶을
살면서 나오게 된 신학적 작품입니다.
즉, 그들이 그런 고난과 고통이 시간을 겪고 있지만 그것도, 그 시간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라고 고백함으로써 여기에서 분명히 새로운 생명,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다라는 것을 믿고 고백했던 그런 신학적인 작품이다
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도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창조하신 조건이며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살아왔던 그리고 인간의 품위를 지키지 못했던,
또 그래서 우리의 우리가 해야 될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했던
이런 모든 것들을 깨우치면서 이제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그런 창조의 시간이다 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이 저희의 일이 되겠죠.
이렇게 창세기 1장부터 이미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고
있는 내용으로 시작이 되고 있고요.
아까 제가 죄에 대한 이야기에도 하느님의 선의를 우리가 어떻게 믿고
보전해야 되는 지에 또 말씀을 드렸고 또 이 성조들의 이야기 이런 것들도요,
계속해서 하느님, 어떤 하느님임을 알려주느냐 하면 하느님께서
굉장히 많은 후손과 그 다음에 당신께서 주시겠다라는 땅을 약속하셨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약속을 꼭 지켜주시는 꼭 준수해 주시는 그래서 이루어 가시는,
결국에는 모든 것을 말씀 하신 대로 다 이루셨다 라고 이야기 하시는
그럴 수 있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탈출기', 이 책도 사실은 사순 시기 때
저희가 가장 많이 읽게 되는 그런 책이죠.
구약성경에서도 가장 중요한 책이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책인데요.
이 중요한 책에서 가장 중요한 그 주제가 뭘까.
'탈출기'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아, 이스라엘이 탈출한 거
하느님께서 그들을 해방 시키신 거, 뭐 여러가지 그 뭐 내용들을
이야기 하실 수 있는데 사실 탈출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는 주제는
그분에 대한 '앎'입니다.
"'앎'이 곧 해방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책이 '탈출기'인데요,
아무리 물리적으로 노예 상태에 있었던 이집트를 탈출했다 하더라도
'앎'이 부족하면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채 매어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반역의 죄들이죠.
그래서 진정한 탈출과 해방은 물리적인 조건의 이동, 아니면
그 어떤 장소의 이동, 공간의 이동 이런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뭘 원하시는 지를 알았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앎'이라는 것을
아주 주구장창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탈출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탈출기'에서 매우 이렇게 반복되어진 '후렴구'처럼 나오는
그런 문장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이거를 저희가 인지 공식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주님'이라는 말은 '주인님'이시라는 뜻이잖아요?
주인님이시라는 말을 저희가 줄여서 주님이 이렇게 부르고 있는데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알게 하는 이 인지 공식이라는 이 문장이 아주
그 후렴구처럼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출 뒤에 어떤 그 아주 중요한 핵심은
이제 이런 '앎'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이 광야를 건너면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용은
이제 하느님에 대한 '앎'이 깊어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렇게 누구 누구의
제 3자의 하느님이었던 그분을 이제 그들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그래서 3인칭적인 시점에서의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제 1인칭과 2인칭적인
그런 아주 긴밀한 관계에 관점으로 옮아가게 되는 '앎'의 심화가
이루어지는 곳이 광야라고 할 수 있고요.
이 '앎'이 충만했을 때 그들이 하게 되는 것이 '계약'을 맺는 일이죠.
계약을 맺을 때 상대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 계약을 맺지 않으시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 신앙을 위해서 계약을 맺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는 사건들을 보여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이런 부분을 이제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고 그 분은 우리의 왕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믿고 사는 것, 이것이 '계약'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이 유다인들은요, 이 '앎'이 충만해지는 거, 아주 깊어지는
그 '앎'에 대해서 히브리 말로 동사 '야다' 라는 동사를 씁니다.
이 '야다'라는 동사는 지금 제가 '회개'에 대한 주제부터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이 '앎' 어떤 것인지를 좀 잘 알려 주는데요.
이 '야다'라는 히브리 말은 무엇인가를 이제 어떤 정보를 습득해서
알게 되는 거, 좀 어떤 외적인 정보에 대한 것도 물론 포함하지만
사실은 그것에 대한 아주 내적인 정보까지도 파악하는 거,
그분의 어떤 마음, 그 사람의 마음, 또 그 사람의 어떤 특성,
그 사람이 어떤 본질, 이런 모든 것까지도 알았을 때를
이제 내가 완전히 그를 알았다, 그때 '야다'라는 동사를 쓰게 되는 거죠.
유다인들이 굉장히 그 머리가 좋은 민족이다 이런 얘기 많이
들으셨을 것 같은데요, 머리가 좋은 백성이다라는 것은
그만큼 이제 아주 깊은 인식 체계를 가지고 있다 라는 거고
그들의, 유다인들의 그 인식 체계에는 '알다'라는 개념이 굉장히 다릅니다.
단순히 외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안다' 라고 하지 않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 사건이든,
아주 내부적인 정보까지도 함께 알았을 때, 내외적으로 온전히 알았을 때,
'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런 인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인 거죠.
그래서 그들을 이제 매우 지혜로운 민족이다 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그를 외부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까지 아는 것,
예, 이것이 '야다'이고 그래서 이 '알다'라는 개념은요,
'관계를 맺다'라는 개념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의 내부적인 상황까지 '알았다'라는 것은 이제 그와 아주
긴밀한 관계에 들어간다는 거죠.
하느님을 제대로 안다라는 것은
그 분과 아주 아주 깊고 구체적이며 인격적이고 개별적인,
그런 관계에 들어섬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제 성서에서
계속 다루어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앎'이구요.
이번에 제가 그 '성경 본문 증언'이라는 책을 쓰게 됐는데요,
이제 여기에서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이 지금 말씀드리는 이 '앎'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세사적인 관점'에서 본문들을 선정해서 좀 깊이 들여다 봤는데
'구세사적인 관점'이라는 건 뭐냐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계시고
당신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하느님의 관점에서 봤다'라는 거거든요.
한 번 참조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탈출기'에서 등장하는 그 부문을 몇 개 가지고 와 봤는데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를 알려주시는 그런 본문들입니다.
탈출기 2장 24절부터 25절,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탈출 2,24-25)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냐면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거고요, 그리고 계약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는 거고,
그리고 당신의 자손들을 살펴 보시는 분,
아주 꼼꼼하게 우리의 모든 사정들을 살펴보시는 분이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처지를 알고 계시는 분이다 라고 선언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신음과 아 또 우리의 처지와 이런 모든 것들을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살피시고, 그 다음에 알고 계신 그런 분이라는 거죠.
탈출기 3장 7절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예, 똑똑히 보시는 분이시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정말로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 분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시편 139편 1절부터 4절인데요.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1-4)
예, 시편 150편 중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이제 정말 위로가 되는
그런 시편인데요, 정말 '살펴보시어 다 아신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멀리서도 다 아시고 앉거나 서거나 다 아시고,
그래서 제가 이런 게 필요하고, 저는 이런 게 고통스럽고,
저는 이런 것이 당신께 요청하는 바이고, 이런 것들을 채 혀에 올리기도 전에
주님, 당신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 우리가 '주님 저는 이게 필요한데요. 저는 이게 괴로운 데요.'
이렇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미 너무나 정확하게,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6장 3절 6절인데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중략)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3-6)
예, 이 호세아서 6장은 앞에서 읽었던 탈출기나 시편과는 조금 다르죠.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라는 건데
이제 그런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드리자는 겁니다.
즉, 그래서 주님을 알고 힘을 알도록 힘쓰고
이제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이 표현도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이건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거든요.
'너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너 어떻게 하면 좋겠니.
내가 어떻게 해야 돼?' 이런 표현들.
그걸 얘기 하고 계시는 거죠.
에프라임은 북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고
유다는 남 유다를 대표하는 얘기죠.
즉 이스라엘 전체를 이야기 하시면서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건데,
그런 하느님이신 것을 우리가 알아드리는 것,
이제 이게 신앙의, 저는 핵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앙은 뭐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렇게 모든 걸 알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 또한 알아드리는 거,
이것을 저는 '신앙이다' 라고 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내가 알아드리고
그래서 그분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것,
이게 '신앙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 이런 '회개'에서 시작된 '앎'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곳이 이제 '광야'입니다.
광야는 그래서 뭔가 이렇게 '앎'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앎'이 부족했을 때 나오는 현상들이 뭐냐면
의심, 의혹, 불평, 불만입니다.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불안해 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모세와 사실 모세에게 불평했다라는 것은 하느님께 불평했다라는 거죠.
불안해 하고 자기네들 안에서의 어떤 두려움, 공포, 이런 것들이 있으니까
끊임없이 이제 하느님을 배신하려고 하고 이제 불만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앎'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오게 되는 현상이죠.
그래서 심지어는 모세를 죽이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노예 상태였던 곳으로 다시 노예가 되는 것도 문제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시는 당신의 구세사의 계획을
인간이 방해하고 그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 좌절 시키려고 했던 거,
이런 것이 이스라엘 불평과 불만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앎'이 이제 완성이 됐을 때, 충만해졌을 때
그들은 이제 계약을 맺게 되죠.
저는 이 광야에서의 여정이, 우리가 사순시기 때 많이 다루는
세 가지 단어들이 있습니다.
기도, 단식, 자선, 이런 건데요.
이런 일들이 사실 광야에서 이루어졌다고 저는 보여져요.
광야는 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의 인생 전체를 의미한다라고도 할 수 있고
거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그리고 그 기도는
왜 단식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이 단식은 이제 어떻게 뭔가 외적으로 구현되어야 되는지,
자선이라는 것으로 구현 되잖아요.
이런 것들을 좀 함께 볼 수 있다고 전 생각이 듭니다.
우선 기도에 대해서 한 번 보겠는데요.
많은 분들이 이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이제 얘기들 하고 계시죠.
맞는 얘기인데 아까 시편 139편에서 보셨듯이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실 기도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라고 하는 것이
조금 더 맞을 것 같아요.
제가 '이러이러한 것들이 저한테 필요합니다.' 라고
말씀 드리기 이전에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알고 계시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이게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광야'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미드바르'라고 하는데요.
이 '미드바르'라는 말은 '민'이라는 전치사, 히브리 말 전치사와
'다바르'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말씀'입니다.
예, 이 '말씀'에 해당하는 '다바르'가 합성된 말이에요.
그러니까 '광야'라는 그 단어지만 이 '광야'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어원을 따라가 보면 뭔가 말씀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거죠.
즉, '광야'는 뭐냐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장소라고 할 수 있고,
그러므로 '광야'는 기도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거죠.
기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거라면 '광야'는 '미드바르',
즉, '다바르'라는 말씀이 뭔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기도가 가능한 건데요.
그러면 왜 광야에서 이런 기도가 가능하냐?
사실은 '광야'야말로 뭔가 결핍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희가 사순시기를 시작할 때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이 되는데요,
재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흙에서 나오잖아요.
그래서 이제 아담이 아다마, 흙이라고 하죠.
흙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본질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재',
즉 흙의 먼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이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라고
보여집니다.
이 뭔가 결핍 되어야지만 그 안에서 뭔가 본질이 보여진다라는 거죠.
너무나 많은 장식과 화려함과 풍요로움이 있을 때 본질이 왜곡되는
그런 일들이, 본질이 이렇게 생략 되거나 누락되는 이런 문제들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쿰란'이라는 공동체가 있었거든요.
쿰란 공동체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본질을 살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한 곳이 광야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정착할 수 없어서 그 정도의 수준이
안 되서어서 이렇게 변두리로 나간 사람들이 아니라 굉장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거든요.
그러나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 왜 광야를
선택했냐 하면 본질이 보이는 곳이어서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세례자 요한도 그의 활동을 예루살렘에서 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하게 되죠.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들은 광야까지 와야지만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고,
광야가 주는 그런 물리적인 조건들이 그 분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됐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이제 광야에서 기도하시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광야는 결핍의 장소라고 말씀드렸는데
제가 그 상실의 미학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상실에 대한 걸 거 같아요.
내가 무엇인가를 잃어 버릴까봐, 혹은 내가 버림 받을까봐,
쓸모 없이 될까봐 이런 것들이죠.
근데 사실 성서는 매우 다른 관점에서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사실은 버림 받음의 극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거든요.
모두로부터 버림 받았고, 심지어는 그 수석 제자였었던
베드로에게조차도 배신 당하게 되죠.
그래서 심지어는 십자가 상에서 "하느님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런 말까지 등장합니다.
물론 시편 22편을 인용하신 것이지만.
그런데 이 버림받음을 우리는 가장 두려워 하는데
사실은 버림받아야지만 이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좀 쓸모없는 존재처럼 되었을 때 이제 나는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죠.
루카복음 17장 10절에 보면요,
그 '쓸모없는 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이제 아주 그 성실하게 주인의 일을 해왔던 그에게
그가 이렇게 얘길 하죠.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제가 해야 될 것을 했을 뿐입니다."
근데 결국 쓸모 없어지는 것이 구원을 맞는
바로 그 직전의 어떤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광야는요, 지푸라기도 없는 곳이죠.
인간은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하느님을 잡지 않고 그 지푸라기를 잡는 거예요.
그래서 '지푸라기 같은 희망',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우리 사회에서 많이
하고 있는데 사실은 지푸라기도 없어야지만 하느님을 만나고
그 결핍 안에서 이제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온전히 내가, 뭐라고 할까요?
이제 그 누구의 의지도 없이 온전히 혼자였을 때
그 때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이런 것을 굉장히 잘 보여주는
요즘 용어가 있던데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라는 말입니다.
저희 한국말로 '공동합의성',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이 '시노달리타스'의 특징이 뭐냐면 '각자 그러나 함께'에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렇게 얘기하실 때 어떻게 하면
교회 공동체가 함께 갈 수 있을까.
이런 부분에만 많이 집중을 하시는데 사실은 조금 다릅니다.
함께 하기 위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부분은 뭐냐면
반드시 각자여야 한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시노달리타스'에서 중요한 부분은
공동 합의가 이루어지는 그런 민주적인 어떤 체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온전히 각자인 그들이 하느님과 연합해서,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각자가 이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 이것이 '시노달리타스'죠.
그래서 우리가 공동으로 잘 합의해서 걸어가는 것이 시노드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 이것이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 온전히 단독적으로, 그렇지만 단독적인 그들이
이제 함께 하느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
이게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합의만 잘하는 거, 민주적인 어떤 내용처럼 보여지는데
민주주의, 민주화에서 화두가 되는 것이 뭐 기득권, 권력, 정권, 힘,
뭐 이런 거라면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이 중심이죠.
그래서 이렇게 '결핍'이라는 것은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 하게 하는 그런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실이 주는 미학, 버려짐의 미학,
예, 이것을 우리가 구원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저희가 체험해야 되는
그런 부분이라고 보실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자선'이죠.
예, 자선은 이제 우리의, 뭐라고 할까요?
기도와 또 이 결핍 속에서의 어떤 기도 이런 것들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게 하는 잣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들은 함께 나눌 수 밖에 없는
이제 그런 사회가 되죠. 그래서 광야에서 그들이 체험했던 이 모든
것들은 사순시기에 강조되는 개념들인 거고, 사실 이것은
우리 신앙 생활 안에서 정말 광야에서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를 통해서 이제 우리는 모두와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앎'으로써 이제 그분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을 '파스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제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파스카'인데,
파스카라는 말은 히브리 말 '페사흐'라는 말에서 음역이 됐어요.
라틴어로 음역이 될 때 '페사흐'가 '파스크~'로 음역이 되고 한국 말에는
크~ 발음이 없기 때문에 그냥 '파스카' 이제 이렇게 음역이 되어 있죠.
뭔가 암튼 '건너 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과 '소리'를 구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세례자 요한을
얘기하면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라고 이야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은 말씀이셨고, 말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소리와 말씀을 구별하는데 '말씀'이 가지는 특성은 창조성에 있습니다.
'소리'는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지 못해요. 뭔가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거죠.
근데 정말 진심으로 '말씀'을 만났다면
그건 반드시 뭔가를 창조해 내고마는 거죠.
말씀으로 창조를 하시잖아요.
그러므로 노예 상태였었던 그들은 이제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거는 말씀을 통한,
'광야'에서 말씀을 통한 변화라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갔다.'라는 것은요,
다시는 매이지 않겠다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한 우리 중에 누구도 노예처럼 사용할 수 없다 라는 거를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이 변화는 진
정한 자유를 위한 여정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갈라디아서 5장 1절부터 1절과 13절을 제가 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생활은 자유를 위한 생활인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라 5,1.13)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그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거고요,
그래서 신앙생활 안에서 여러 어떤, 그 뭐라고 할까요? 내용들
이런 것들은 우리를 억압하거나 우리를 주지하고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으로 해방시켜 주는 그런 자유의 내용들이다 라고
보실 수 있다는 거구요.
여러분들 그 요한복음 8장 32절, 유명한 구절이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런 말이 있는데요,
결국 자유롭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근데 곧 예수그리스도가 진리이시잖아요.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어떤
자유를 누리게 된다 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중심 생활, 우리 구약 성경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너희들은 너희들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을,
나를 거부하였다, 배척하였다."
히브리 말 '마하스'라는 히브리 말인데요.
이게 '거부하다, 배척하다, 폐기물로 여기다.'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때만
진리이신 그분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냐면 하느님을 믿지 못해서
사실 그분은 우리랑 계약을 맺은 분이거든요,
계약을 맺었다라는 것은 아군이란 뜻이에요.
동맹을 같이 맺었다는 거죠.
그런데 마치 우리들은 하느님이 우리를 방해하는 것처럼
배척하고 거부하고 심지어는 폐기물로 여기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그 '무시'라는 말 아시죠?
예, '안 본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라는 거,
여러분들 기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여러분 이제 저희가 성 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거룩한 주간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거룩함이 뭘까?
많이들 생각하실 것 같고 저도 정말 많이 생각했던 주제인데요.
사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내용들을, 혹은 그런 장소, 그런 사물,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때 거룩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죠.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아주 많이 거론되는 것은 '사랑이신 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곧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라면
구약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거룩함'으로 이야기 하고,
신약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그 '사랑'으로 이야기 했다면
그러면 '거룩함은 곧 사랑이다.' 라고 이야기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주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한 행위를 하는 것,
이것만이 거룩함이라고 보지 않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음식을 먹을 때도 그 다음에 자기네들이 무엇인가를 할 때도 늘
그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쓰는 어떤 그 관습들이 있는 거죠.
자기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 이건 뭐냐면,
거룩함이 사실은 굉장히 일상 안에서, 우리 평범한 삶 안에서
구현된다라는 거예요.
거룩함은 하느님께만 속해서 따로 별제된다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일상에서
하느님이 드러나고 하느님과 관련된 일이 이어지고
또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이 된다면 일상이 곧 거룩함을 드러낸다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이 일상과 연결 되어지는 그런 내용인 거죠.
그러면 이 사랑도 정말 그 성경이 이야기 하는 사랑이 무엇일지,
저희들 많이 이야기들 하시는데 사실 그리스 생활 권에서
사랑이라고 얘기할 때 주로 언급되는 것들이 그 '에로스'에 대한 거였습니다.
우리 지금 우리 사회하고도 굉장히 비슷하죠.
그런데 그 성경은요, 이 '에로스'와는 구별되는 사랑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아가페'라는 말을 아주 집중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럼 이 '아가페'가 뭐냐?
좀 더 쉽게 설명을 해 주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 주신 거.
그 '에로스'의 특징이 약간 나 중심적인,
그러니까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 내가 인정받고 있는 지,
나를 사람들이 찬양하고 있는지, 이렇게 보는 것이 '에로스'라면
'아가페'는 네가 괜찮은지, 너를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되는지,
이렇게 너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아가페'라고 얘기하죠.
그리고 이 '아가페'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얘길 하시죠.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그렇게 사랑하라."
즉, 성경이 이야기 하는 사랑의 모델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라고 이야기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인 거고
그 사랑을 우리들 안에서 구현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은 사랑'이
곧 '거룩함'이 된다. 라고도 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에 그 우리 수녀님들 하고 이렇게 이야기할 때 좀
많이 도입하는 그런 이제 언급하는 내용이 있어요,
이 사랑을 얘기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께도 한번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그 정말 좋아하지만 사랑이 아닌 것도 있을까요?
혹은 좋아하지 않지만 사랑할 수 있는 걸까요?
예, 있습니다.
예, 좋아하지 않지만 너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잘 되기를 바라고
너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이게 아가페이기 때문에
성경이 이야기 하는 거룩함으로써의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려고 하는 거,
그리고 하지만 또 너무 좋아하지만 그 좋아함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냥 내 감정일 수 있는 거죠. 예, 그래서 우리들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사랑이 어떠해야 되는지 여러분들 좀 이해를 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 이러한 거룩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구현하는 것,
이게 신앙생활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에 대한 내용들을 이렇게
설명 드리면서 좀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을 '향주 삼덕'이라고 이야기 하는데요.
하느님께 드리는 덕이라는 거죠.
근데 사실은 인간들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인간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드린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단순히 하느님께 향하는 덕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기보다는 우리들 안에서도 함께 통용돼야 되는
그런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거, 예, '그가 변화할 거다' 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변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는 그의 마음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는 변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 안에서는 변하려고 하는 노력이 분명히 있다 라는
그의 선의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희망, 예, 정말 희망할 수 있는, 바오로의 말씀대로 희망할 수
있는 것을 희망하는 게 무슨 그런 의미가 있겠습니까?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구원으로
이끄신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희망하는 것,
그래서 희망은 사람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희망하기 때문에 희망이 가능한 겁니다.
사랑, 아까 말씀드렸죠.
좋아하지 않지만 그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예의와
또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노력과 나의 진심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 이런 믿음, 희망, 사랑이 거룩함으로 구현되는
그런 성주간이 되시기를 저도 기원하겠습니다.
네,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