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별과 어린이는 등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별'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는 별을 대부분 어린이와 같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여기고 전개하고 있다. 동시 작가들은 활유법, 의인법을 이용해 어린이가 지니고 있는 동심의 눈을 통해 밤하늘의 별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별에 대한 상식은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별이나 우주의 존재는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구명된 사실의 세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별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크게 과학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의 세계는 과학의 진리나 상식을 초월한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상상력은 과학의 진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를 음미하면서 그 내용이 과학적으로 맞는가 틀리는가를 따지지 않는다. 동시의 재미는 동심의 모습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감상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별들은 왜/깜빡/깜빡/깜빡거리기만 하나//빛 아끼려고!//그래야 오래/빛나는 별로 떠 있지.
―朴斗淳, [별빛] 전문({아동문학평론} 2003년 여름호)
박두순의 [별빛]은 영롱히 반짝이는 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별은 영원불변의 존재라는 일반적 관념을 깔고 전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핵심은 2연 '빛을 아끼려고!'에 있다. 별이 깜빡인다는 것은 빛을 아끼고 싶어서 그런다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는 두 가지 과학적 사실이 숨어 있다. 하나는 별이 반짝이는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전기의 방전 현상이다. 前者는 지구의 대기권에 존재하는 공기의 흐름에 의해 별빛이 산란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을 말하며, 後者는 일정한 전기의 양이 빛의 에너지로 변환되면 그 전기의 양은 점차 감소한다는 현상을 말하고 있다. 별의 반짝임과 전기의 감소 현상은 별개의 과학 현상이다. 이런데도 前者의 현상을,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後者로 설명(비유)하고 있으니 문학의 재미는 과학의 사실을 초월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문학의 재미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별들은/숨바꼭질할 줄/모른대.//구름이/살짝 다가와/몸을 가려 주어도//참지 못하고/그만 반짝반짝.//별들은/눈 싸움할 줄도/모른대.//'시-작!'/하자마자/그만/깜빡깜빡//별들의 놀이는/이게 좋겠어.//'쉬지 않고 반짝이기!'
-박소명, [별들의 놀이] 전문({한국동시문학} 2003년 여름호)
박소명의 [별들의 놀이]도 앞의 작품처럼 영롱한 별의 아름다움 표현한 작품이다. 하지만 '별의 반짝임'이라는 동일한 현상을 바라보는 동시작가 두 사람의 눈은 사뭇 다르다. 박두순의 동심의 눈은 개별적인 별의 움직임에 머물러 있음에 비하여 박소명의 동심의 눈은 다수의 별의 움직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출발점의 차이로 인해 앞의 작품은 별은 빛을 아끼기 때문에 깜빡인다는 것에 귀결된 것이고, 뒤의 작품은 별들이 서로 모여 눈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깜박인다는 것에 귀착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의 재미는 3연 '눈 싸움'에 있다. 공기의 흐름에 의한 빛의 산란이라는 과학 현상을 '눈 싸움'으로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선하고 재미있는가. 마지막 6연 '쉬지 않고 반짝이기!'는 알맞은 별들의 시합으로 이름 붙여 일반화함으로써 오늘도 계속 밤하늘에서 별들이 깜빡이며 시합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