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2월이 가까워져 날씨도 추워지고, 새해를 앞두고 여러가지 이룬 일, 못 이룬 일, 새해에 기대되는 일...여러 가지로 싱숭생숭하리라 봅니다. 우리 카페의 회원수도 드디어 100명이 되었군요. 축하 할 일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데이터인 초재님의 성씨 관련 하플로 데이터는 주요한 성씨의 경우, 하플로가 편중되지 않고 두루두루 비율로서 나타나, 여러 계통의 사람들이 뒤늦게 성씨를 얻어서 그렇다 혹은 족보 위조의 가능성 등이 제기되었고, 상당히 희귀한 성씨도 여러 갈래이거나 외래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던 성씨들도 토착민의 성씨로 드러나는 등... 족보의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했었죠.. 어쨋든, 성씨 관련 데이터는 아직 조사된 개체수도 모자라고 한국 특유의 집안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에 대한 거부감 등.. 한계점이 많고 아직까지 믿을 수가 없다..라는 것이 정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박씨의 경우는 O2b+O2b1의 비율이 상당히 높고, 최씨도 O2b가 많으며, 김씨와 정씨의 경우 C3가 많고, 이씨의 경우 O3하위하플로가 높은 비율로 나타나, 비율이 높은 하플로를 이들 각 성씨의 주류 하플로로 판단할 경우, 성씨별 뿐만 아니라 그 성씨로 대표되는 한 집단 나아가서 한 나라의 분포나 이동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따라서, 이들 신라를 개창한 것으로 여겨지는 박혁거세의 박씨성의 주류 하플로가 정말 O2b가 맞을지.. 김수로왕의 김해김씨가 C3인지 O2b1인지.. 김알지의 경주김씨가 O2b인지 C3인지 JST002611인지... 중요하겠죠. 또한, 신라의 6대성으로 알려진 이(李;경주 이씨), 최(崔,경주 최씨), 정(鄭; 경주 정씨), 손(孫; 경주 손씨), 배(裵; 경주 배씨), 설(薛;경주 설씨)씨의 하플로 조사로 고조선 유민들이 맞는지... 백제나 고구려의 경우는 나라가 망하면서 성씨를 가졌던 귀족 대다수가 성씨를 잃거나 바꾸면서 이들의 유래를 알 수 없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덕수 이씨의 경우 백제의 귀족이었다고 추정되는 등, 몇몇 예외가 있지만 말이죠..
따라서, 이런 주류 성씨들의 하플로를 면밀히 조사하여 이들의 주류 하플로가 무엇인지 알고 이에 따른 이들의 분포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들 못지 않게 아주 주류의 성씨는 아니겠지만,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성씨들이 있을 것이며, 이들의 하플로를 조사해 봄으로써 우리나라의 역사의 흐름을 아주 바꿀 수 있는 즉, 역사의 turning point (전환점)를 제공할 수 있는 몇 몇 성씨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겠습니다. 이번엔 이들 역사적 터닝포인트를 제공할 몇 몇 성씨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월성 석씨(月城 昔氏): 시조 재흥(載興)의 선 세계는 신라 4대 임금 석탈해이사금의 23세손이다. 석씨는 신라 56왕 중, 8왕(탈해, 벌휴, 나해, 조분, 첨해, 유례, 기임, 흘해)이 즉위했으며, 삼국사기에 석탈해의 탄생 및 망명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왕은 왜국(倭國)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다파나국의 왕이 여국(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왕비는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이를 상서롭지 않은 일로 여겨 버리게 하였으나,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비단에 보물과 함께 알을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궤는 파도를 타고 가다 먼저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으렀으나 그곳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혁거세 재위 39년에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 어귀에 닿았다.해변에서 한 노파가 궤를 건져 열어 보니 아이가 들어 있었고, 노파가 기른 아이는 장성하여 키가 9척에 풍모와 지식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은 궤가 바다에 떠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며 따라왔다고 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변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담긴 궤를 풀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이름은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탈해는 노파를 어머니로 삼아 고기잡이로 봉양하다가 노모의 말을 좇아 학문에 정진하고 지리를 익혔으며, 나중에 양산의 호공(瓠公) 집을 길지(吉地)로 여겨 계책을 써서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이 훗날의 월성(月城)이다. 남해왕이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은 뒤 대보(大輔)로 등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이 임종할 때 나이 많고 어진 사람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선왕의 뜻에 따라 자신이 왕이 되었다며, 자신도 왕위를 탈해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재흥은 고려조에 시랑을 지냈으며, 후손들은 그를 시조(1세)로 하고 본관을 월성(경주의 고호)으로 하였다.
-> 만일 월성 석씨가 정말 석탈해의 후손이 맞다면, 정말 이것은 역사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신라는 박혁거세가 세우고 석씨가 정권을 잡았다가 훗날 김알지의 후손들이 왕위를 독식하였고 특히 내물왕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국가적 뼈대를 갖춘 국가로 자리잡고 결국 훗날 삼한일통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신라 초반의 역사와 이들이 과연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것이 사실인데, 월성 석씨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이들이 정말 외부 (다파나국의 위치에 대해서도 여러 설들이 많죠. 캄차카 반도이다.. 일본 안에 있다.. 등등. 삼국유사에서는 용성국 출신으로 나오는데, 용성국은 한반도 서북부로 보는 경향이 많은 것 같네요) 출신일 가능성이 있는지, 어느 지역에서 건너 왔는지도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제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이들을 한반도 서북부의 제철집단으로 생각합니다. 선진기술을 가지고 가락국에 왔다가 이미 세력을 굳힌 수로왕 주축세력에 밀려서 (가락국기에 수로왕과의 싸움에서 밀려 신라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죠) 현재 포항 방면에 상륙하여 세력을 키운 뒤 신라를 접수했다... 배를 잘 다루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는 C3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JST002611도 시기적으로 다소 맞지 않는 듯 하고...역시 O2b1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재님 말씀대로 수로왕을 비롯한 김해 김씨 중심 왕족계열은 C3일수도 있겠지만, 다른 가야 백성들의 주력은 O2b1으로 보인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들 탈해왕 세력과 수로왕 세력은 출신 지역적으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전후해 경남 남부 해안에 도착하여 서로 겨루었다고 생각하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하지만, 한계점은 2007년 12월 31일 현재 월성 석씨의 인구는 불과 7,996명에 불과합니다. 아마 이들이 김씨들이 정권을 잡은 뒤 이들에게 몰살을 당하는 바람에 급격히 세가 위축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그만큼 이들을 찾아내고 조사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사료됩니다. 또한, 현재의 시조는 탈해왕이 아닌 재흥입니다. 알려진 선대가 그때부터다는 것인데, 물론 재흥이 탈해왕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고는 보지만, 재흥이 과거 석탈해의 명성(?)으로 치장하기 위해 신라의 위세가 없어진 고려조에 석씨성을 차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2) 김해 허씨 (金海許氏): 허씨는 서기 48년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황태후 허씨가 아유타국(현 인도지방 추정?) 군주의 공주로서 16세때 대선에다 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수로왕이 의장을 갖추어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수로왕이 10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하루는 비가 수로왕에게 말하기를 첩은 동토의 객이니 첨이 사후에 모성을 전하지 못함을 슬퍼하나이다 하니 왕이 감동하여 둘째 아들을 모성에 따르게 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하여 황태후의 35세손 허염의 후손이 김해 허씨가 되었으며, 그는 고려 문종때 출생하여 고려 중엽에 벼슬하면서 공을 세우고 삼중대광으로 가락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유재지인 김해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번영으로 여러 파로 크게 분파되었다.
-> 김해 허씨가 알려진 대로 수로왕의 둘째 아들이 맞다면, 김해 김씨의 주력 하플로와 같은 하플로를 가질 것입니다. 따라서, C3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니면 O2b1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일각에서 제시된 L1등의 인도 하플로일 가능성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허황옥 등이 인도에서 나왔다는 것도 의문시될뿐더러 설사 나왔다 하더라도 이들 남성들의 자손이 김해 허씨가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 인구수는 2007년 12월 31일 현재 김해 허씨의 인구는 12만명으로 월성 석씨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인구가 많은 성씨가 대부분 그렇듯 heterogenous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김해 허씨 1성에 묶여있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주류 그룹에서 뽑히지 않는다면, 이들의 하플로가 김해 허씨를 대표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또 하나의 한계점은 아까 월성 석씨 때와 비슷한데, 결국 훨씬 후대의 사람(허염)을 시조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씨 차용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3) 제주도 성씨들:
3-1) 제주 고씨(濟州高氏): 탐라의 지배 씨족으로서 이들 삼성의 시조 탄생에 대해서는 삼성혈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전에는 사람과 만물이 없었는데, 삼신인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홍혈에서 솟아나왔다고 한다. 이들 삼신은 수렵하며 살았는데 하루는 동쪽으로부터 상자 하나가 바다로부터 떠 내려와서 건져 열어보니 그 속에는 세 미녀와 오곡종자와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삼신은 세 미녀를 배필로 삼아 목축과 농사를 짓고 살았으니 이것이 바로 탐라 개국설화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 중 고을라가 고씨의 연원을 이루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고씨의 발상지 제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그 후 후손들의 번창으로 세거지 또는 조상의 작호에 따라 15개본으로 분적되었는데 시조 을라의 45세손 자견왕의 태자 말로 (제주 고씨), 말로의 증손자 공익 (청주 고씨)...각각 분관되었으나 다 같은 혈손이라는 신념으로 대동 단합, 고을라를 도시조로 하고 제주 고씨로 환적하였다.
3-2) 제주/남원 양씨 (濟州/南原 梁氏): 양을라로부터 비롯되며 양을라의 먼 후손이자 탐라의 귀족인 양탕이 광순사의 직함으로 신라에 입조하니 국왕이 예절을 갖추어 국빈대우를 하고 성주왕자의 작호를 내리고 의관을 주어 신라의 조복을 갖추게 했다. 그 때 '良'을 '梁'으로 기록한 것이 양씨로 고쳐진 연유가 되었고 탕의 후손 순과 우경이 신라 말기에 제주와 남원으로 각각 득관하여 분적하였다.
3-3) 제주 부씨(濟州夫氏): 부을라에서 비롯되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먼 후손 득시를1세조로 하고 본관을 제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 이들이 위의 성씨들과 다른 점은 현재에도 제주도에 많이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찌했든 제주도의 주류 하플로를 이룰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O2b, P201, N 중에서 나올 가능성이 많겠죠. 그러나 인구별로 보면 차이가 많이 나서 2007년 12월 31일 현재 제주 고씨의 경우는 32만여명, 남원 양씨 21만여명, 제주 양씨 13만여명, 제주 부씨 9천여명입니다. 성씨에 따라 번식력(?)에 차이가 있어 이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으나 고씨나 양씨의 경우는 아마 집안이 번성해지다 보니 타 지역에도 양씨나 고씨 출신들이 많아져서 원래 이 성이 아니던 사람들이 많이 끼어들어왔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플로 분석에 애로가 많아지겠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주 부씨입니다. 아무래도 집안이 9천여명으로 소수의 인구로 보존이 잘 되어 있고 거의 집안 사람 대부분이 제주도를 근거로 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시대에는 타 지역으로도 많이 갔겠죠). 따라서 이들을 상대로 검사를 한다면, 뭔가 획기적인 탐라의 역사 뿐 아니라 하플로 분포 양상에 대해서도 감이 좀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그러나, 위의 다른 성에서도 언급했듯이, 세계가 실전되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무래도 성씨 차용의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의 흐름을 아주 바꿀 수 있는 즉, 역사의 turning point (전환점)를 제공할 수 있는 몇 몇 성씨를 알아보았습니다. 제대로 밝힐 수만 있다면, 굉장히 역사를 진일보 시킬 수 있는 기회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족보를 갖춘, 즉, 그 집안의 후손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설득시켜 이런 검사를 받는다는 자체가 도전이지 싶습니다. 뭔가 검사 대상이 된다는 불편함, 검사 결과의 의외성을 의식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해석함에 따른 여러 작위적인 결론들... 이런 장애물들을 뛰어 넘어야 가능할 일이기도 합니다.
* 우리 카페 회원님들 중, 제가 위에 열거한 본관/성씨를 가지신 분들의 경우, 본인의 성씨에 대한 언급으로 인한 언짢음이 있을 줄 압니다. 그래도 분자인류학적 지식을 족보에 끌어 붙임으로써 해가 되기 보다는 여러 가지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너그럽게 이런 글을 올린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카페 회원이 아닌 분들 중에서도 위에 언급한 본관/성씨를 가지신 분들도 너그러이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항상 이런 성씨 관련된 이야기를 풀려면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거든요.
첫댓글 열거한 본관/성씨를 가지신 분들의 경우, 본인의 성씨에 대한 언급으로 인한 언짢음이 있을 줄 압니다 ///
개명한 21세기를 살면서 과학적인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어선 안된다고 봅니다
예전에 제가 이야기 꺼낸적이 있지만, 1천년전 고려굴지의 명문가문이었던 강감찬장군의 후손들은 2천명 남짓밖에 안됩니다
특별히 학살을 당한것도 아니고, 당시최고의 명문가문이었는데도 그정도 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위인들의 후손 역시 2천명 남짓 많아야 1만명을 안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진실은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성숙하고 이성적인 회원분이라면 언짢아 하지않을거라고 봅니다
그것가지고 꽁하다면, 본인의 수준부터...
왕가의 후손이 아닌 이상 수십만 단위의 후손을 남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불편한 진실이지만 언제건 밝혀야할 일이기에 냉정한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지요
두분 댓글 감사합니다~ 전주이씨의 경우를 보더라도 씨(?)를 잘 퍼뜨리는 상황이 전개될 경우 인구가 비교적 짧은 시기에도 늘어나긴 하죠~ 그러나 대부분의 성씨는 그리 인구가 늘진 않더군요. 저희 집안도 13000명 정도 밖엔 안되니까요,, 어쨋든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냉정한 열정이 필요하겠지요^^
제 생각엔 하렘을 차리기 전에는
왕가의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10만명도 불가능 하다고 봅니다
하렘ㅋㅋ 전주이씨가 물개도 아닌데 그죠?^^ 그래도 이들 대성들이 조선말까지 그래도 번성했기에 수많은 성없는 백성들이 대성으로 무임승차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번성의 이유로 실제 번식력에 있기도 하겠고 워낙 유명한 성이라 쭈욱 지속되오는 시대 속에 이들이 꾸준히 무임승차해왔던건지,,, 후자의 가능성도 높겠네요
전주 이씨는 특수한 사례라고 학자들도 이야기 하더군요
단순히 전주 이씨 후광을 입으려고 족보를 갈아탄 경우의 수보다
물개 뺨치는 번식력으로 후손을 퍼트려 대한민국 3대 성씨를 만든 그 위대함(?)이 경탄스럽습니다
번식력이라 함은 물개같은 섹스의 정력을 말하는게 아니라, 경제력을 의미하는거죠
옛부터 관상가들이 처첩복과 재물복을 같이 보는 이유는
결국 섹스의 기회를 늘리는 것은 결정적으로 경제력으로 좌우되기 때문이지요
이걸가지고 여성들을 돈 밝힌다고 비난할 일도 아니죠, 인류란 종이 원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각설하고, 전주 이씨라고 별 수 있나요? 북방민족들처럼 강제적으로 씨를 뿌린것도 아닌데...
다른 왕족가문과 마찬가지로 전주 이씨 역시 실제 이성계와 같은 혈통의 후손은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겁니다
나머지는 이성계를 도왔던 휘하의 후손이거나
족보세탁한 사람들일겁니다
제주도 토박이 대표 성씨의 유전자를 밝히는 일이 홍산문명의 비밀을 풀수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동북아에서 최초로 옥가공품을 다뤘던 제주도와 옥 생산지인 한반도의 연결고리가 이들의 선조가
홍산문명을 일군 세력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조사해보는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봅니다
짚어주신 점이 바로 이번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아무래도 제주 부씨의 경우는 그 순수성(?)이 보장이 될것 같아서 이들이 어떤 열쇠를 쥐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요즘 제주도 옥 가공품과 그것을 만든 사람들과 홍산문명의 관계 이것에 꽃혀 있습니다 연구가 진척되다 보면 고대 동북아시아의 비밀이 풀릴것이라 기대합니다
드디어 회원 100명이 되었군요.
성씨의 하플로에서 우리가 시원적으로 주의해야 할 점은 일단 두 가지가 있을 거 같아요.
1. 과거에는 성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출신 지역이나 부족이 중요했었을 가능성. → 따라서 하나의 성씨에 여러 하플로가 처음부터 있었을 수 있음.
2. 혈통 자체의 계승보다 정신적인 계승을 중시하여, 사위나 다른 혈통의 양자를 통해 그 대를 잇는 경우가, 일본은 지금도 많고, 우리도 아마 고려시대 정도까지는 있었을 것.
그리고 한때 삼국시대나 그 이전 시대의 집안으로서 신라계가 아닌 집안이 있을까 하여 열심히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결국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정사(正史)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세계(世系)의 주장, 중간에 세계가 실전되었다느니 하면서 아무튼 그 혈통이라는 주장...
자신의 실제 출신이 알려질 경우의 불이익이 예상하기 어려웠고, 적당한 거짓말로 자신의 혈통을 우세한 쪽에 붙여 말하는 풍조가 상당히 강했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제주도의 3성은 실제로는 고구려 계통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오는 거겠지요. 어렵게 탐라까지 와서 죽음이나 노예 신세를 면하고 나름 잘 살아간 것일는지도.
제 생각도 고려시대 이후 발생한 수많은 성씨들로는 위의 역사적 접근은 어렵다는 판단입니다. 또한 대성들의 경우도 N수는 많지만 계통이 너무 많은것이 확실하므로 헷갈리기만 하고,, 따라서 위의 비교적 많지 않고 역사적 시원이 독특한 성씨들의 경우엔 무언가 단초를 제공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도 언급했고 서하님도 언급해주신대로 제한점이 너무 많죠, 그래도 이런 분야에서의 진전이 있어 역사의 실마리가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합니다.
한반도에 있는 대표 성씨가 아닌 제주도에서 볼수있는 휘귀성씨가 고대 동북아 역사의 실마리를 풀수있는 단초가 될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정리하면 신라어는 斯盧지역의 말보다 오히려 辰倭어가 공통어로 기능했기에 수사의 차용이나 어휘의 차용이 있었으나 두신라 시대에는 辰倭어보다 신라말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신라말은 辰倭어의 영향을 심대하게 받았기에 그 어음체계 역시 저층어 辰倭어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에 들어 이런 혼효는 모두 사라지기에 이른다. 묘청의 난 이후 국가적 통합을 위해서 박씨 집단은 선주집단으로 신라왕가에 편입되고 사로 6부는 고조선유민으로 설정되기에 이른다. 이로 보면 조상들이 왜 사국사라 하지 않고 삼국사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부식이 왜 삼국사기를 새로 써서 많은 기록을 삭제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렇지 않고서야 해제를 써야지 굳이 국사를 새로 쓸 이유가 무엇인가? 다 국가적 통합을 위해 과거는 묻어두려고 한 당대인들의 고충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본인 역시 들춰봐야 아픈 기록들 뼈아픈 史실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뼈아픈 진실 앞에 마로는 서 있는 것이다. 역사는 누구말대로 핏냄새가 진동하는 것이다. 이런 핏냄새가 진동하는 전장에서 살아 남아 오늘의 우리가 있고 둘레놈들이 이웃하게 되는 것이니 논리와 증좌로 무장하고 자료 발굴과 이론 개발에....
baaclia님의 의견은 참으로 색다르면서 신선합니다. 그럴수도 있겠군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자신하던 삼국시대 이야기가 다 후대에서 소급해서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신라6부성도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란건 대부분 인정된 것입니다마는,,,다른것도 그러하다면... 충격이겠네요~~
고려시대에 박씨 형;아우가 있었는데 형묘지명에는 박혁거세애 대한 언급이 없는데 뒤 늦게 죽은 동생묘지명에는 박혁.. 가 차이가 나기에... 이 사이에 삼국사기가 편찬되고 ... 논문을 참조한 것 뿐.. 인터넷에 뒤져 보면 그닥 새로운 내용은 아니랍니다. 이런 이바구를 숙네(ㅅ군>꾼)가 풀어 고라!!!
과연 안동권씨와 경주이씨의 주요하플로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꼬꼬닥님 친구분이 O1a1으로 나왔지요. 안동 권씨분입니다. 경주 이씨의 경우는 워낙 대성이라 역시 다양한 하플로가 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아마 O2b가 아닐까 합니다. 그간 많이 논의된 사항입니다만, 자세한 것은 역시 실증이죠^^ 직접 재봐야 될듯,,,
안동권씨가 현재 62만여명인데, 근 1,000년간 수많은 하플로가 뭉친 성씨가 아닐까요, 메이저하플로가 뭘지 궁금합니다(안동김씨 또한). 경북북부나 강원도를 기반으로 둔 성씨는 대체로 o2b가 많을꺼같습니다.
저도 대체로 Legende님 의견에 동의하지만, 대부분의 성씨가 고려 중엽에 급조(?)된 것들이 많아서 다른 성씨를 모방하여 본관도 원거주지와는 동떨어진 엉뚱한 곳을 삼았을 가능성도 많다고 봅니다. 그래서, 본관 대비 하플로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자료 감사합니다.
baaclia님 언급처럼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 승자에 의해 왜곡 되기 쉬운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분자인류학이라는 학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세한 역사의 흔적이라도 찾아내고 싶은데 거기에 도움을 주는 유용한 도구라고 봅니다.
이규태 칼럼에서 본 것입니다. 1904년인가 조사에서 조선팔도 에서 성이 없는 사람이 70% 성있는 사람이 30%였던것으로 본기억이 있습니다. 이규태자신이 역사전공이고 그부인이 서지학자인 점을 든다면 아주 엉터리는 아닌것 같구요. 일본과 비교한다면 일본명치유신 10년 1878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5%만 성이 있고 나머지 95%는 성이 없었던 것으로 알구 있구요. 이제와서 보면 셰계에서 제일 성씨가 많은 나라로 나오고 그다음이 일본이 다음으로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와서 현재를 기준으로만 보아서는 않될것 같습니다.
가장 성씨의 종류가 많은 나라로 미국이다 빠진것을 수정합니다.